장래희망

하나마나 푸념 2010. 7. 27. 22:24

넌 꿈이 뭐니?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른들이 습관적으로, 그리고 요즘은 강박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지는 저 질문은 내가 어린 시절에도 종종 들었던 말이다. 그때마다 나 역시 생각나는 대로, 선생님, 외교관 정도의 '모범적인' 대답을 하긴 했지만 질문을 던지는 어른이나 대답하는 나나 특별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서 나눈 대화는 아니었다. 처음 만난 어른들이 괜히 할 말 없을 때 날씨 얘기, 시사 얘기 꺼내듯이 허투루  꺼내는 화제와 별 다를 게 없었다는 뜻이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직업이 뭔지 찾았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달려오긴 했지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의 꿈은 아마도 내가 남은 평생 선망을 품을 하나의 가능성이 아닌가 싶다.

헌데 가엾게도 요즘 아이들은 상황이 다르다. 자기 꿈이 뭔지, 뭐가 되고 싶은지 빠르게는 초등학생 때, 늦어도 중고등학생 시절엔 이미 목표를 정해 그 준비에 매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떨려난다고 믿는 어른들 때문이다. 뭐가 되고 싶은지 확고한 주장이 없으면 꿈도 야망도 없는 하찮은 아이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대학시절을 돌이켜볼 때 나는 지금도 그 때가 인생 최고의 황금기라고 여기며 4년 내내 거의 줄창 놀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보낸 추억을 곱씹는 반면, 요즘 대학생들은 신입생 때 이미 취업준비에 매달려 학점따기에 여념이 없다. 조교시절 내가 혹시 출석 확인 잘못하는 바람에 성적에 지장 있을까봐(지정좌석제라 2시간 내내 맨 뒷자리에 앉아 학생들 출결을 확인했었다) 수업 때마다 출석표를 일일이 확인하며 따져대던 학부생들한테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로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 꿈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훌륭한가 하면 절대 아니다. 초등학생들부터 중고등학생들까지 우선은 꿈이 죄다 좋은 학교 진학인 모양이다. 국제중학교, 특목고, 명문대 따위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목표의 반복 속에서 부모들은 정말 자식의 꿈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나와 달리 학부모의 고충을 심히 겪고 있는 친구에게 엊그제 들으니 요즘 중산층 부모가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려면 필수조건이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동생의 희생.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기가 막혀 코웃음이 나오면서도 씁쓸했다. 그래서, 자식 하나 명문대 보내서 그 다음엔 어쩔건데???

세상이 하도 거지같다보니, 그저 행복하고 씩씩하게만 자라주었으면 싶은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들도 벌써부터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자기가 뭘 잘하는지 장래희망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왜 아니겠나.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코르동 블루' 같은 유명 요리학교에 진학해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의 채근이 이어지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하찮은 그림 하나 그릴 때마다 창의력을 더 키워야 하네 마네 잔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지금 무슨 꿈을 이야기하더라도, 어른들의 결론은 하나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온 세상의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할 수 있나! 공부 잘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타고난 재능이던데...
 
100점짜리 시험지나 최우수상 상장을 자랑하며 한껏 어깨를 으쓱거리는 조카들을 무한히 칭찬해주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잘난 척 해도 나 역시 성적지상주의에 갈채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초등학생이 시험을 앞두고 2, 3주 전부터 밤늦게까지 시험준비를 해야하는 세상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혹시라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90점, 80점으로 점수가 점점 떨어져 성적표에 '노력요함'이 적힌 과목이 차츰 늘어나면 아이들은 또 어떤 상처를 받게될까.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잇달아 당선되긴 했지만 학력중심의 사회구조와 행복은 반드시 성적순이라 믿는 부모들의 맹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나라 교육에 희망은 없어 보인다. 교육정책을 만들어내는 공무원이나 교육을 책임지는 교사들도 과거 어린 시절 죄다 우등생이었을 텐데, 공부 하기 싫고 잘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까지 과연 헤아릴 수나 있겠나. 공부를 못하면, 고가의 사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면, 웬만한 꿈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 절반 이상의 장래 희망이 하나같이 '연예인'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 꿈은 지긋지긋한 학교공부와는 멀어질 수 있으니까.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재롱만 피우던 조카들의 머리가 굵어지는 걸 바라보며 그 녀석들이 장차 과연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어떤 인생을 선택할지 몹시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녀석들에게 뭐가 되고 싶으냐는 귀찮은 질문을 던져댄다. 부모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고모로선 그저 행복한 사람, 올바른 사람, 된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자꾸 속물근성이 튀어나온다. 스스로 올바른 사람, 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장래희망을 나 역시 행복한 사람, 올바른 사람, 된 사람으로 바꾸어야 할 모양이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지도 모르겠지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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