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

하나마나 푸념 2010. 7. 6. 02:22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비겁함이랬는데, 내 꼴이 딱 그짝이다.
이 동네 재건축 문제는 어떻게든 진행이 되고 있는 모양인지, 얼마 전 구청에서 재건축 정비계획 안내문이 등기로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재건축 찬성파와 반대파의 우편물도 빗발쳤다. 찬성파는 이 동네 재건축 사업이 엄청 축소되기는 했지만 30년씩 노후한 주택을 새로 지어 재산의 가치를 높일 절호의 기회이므로, 일부 '이기적인' 반대파의 논리에 휩쓸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반대파는 '재건축은 곧 자살행위'이며 멀쩡히 살고 있던 집을 빼앗기고 길바닥으로 쫓겨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촉구했다.

양쪽 다 너무도 거부감이 드는 어투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태도를 보니, 왕비마마와 나의 입장은 더욱 모호해졌다. 전국 방방곡곡이 똑같이 흉물스러운 아파트촌으로 변해가는 것은 분명 싫은 일이고,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할 부동산이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행위가 싫기 때문에 나도 무분별한 재개발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은 지 30년도 넘은 우리 집을 비롯해 주변 여러 집들이 조만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할 만큼 노후한 건 사실이고, 갈수록 거동이 어려워진 병든 왕비마마를 위해선 싫지만 계단 많은 이 집을 떠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도 실행에 옮기는 게 두려워 미적거리고 있는 나로서는 마냥 재건축을 반대하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다. 해서 또 다시 우리 모녀의 생각은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것이었다. 재건축 반대파가 득세해서 재개발이 물건너 가면 그냥 좀 조용해 진 다음에 다른 데로 이사를 가든지 하고, 찬성파가 득세해서 정말로 재건축이 이루어진다면 또 그 상황에 맞춰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부담금은 얼마인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결정하면 되겠다고 간단히 생각한 것이다.

헌데 현실은 우리를 그런 회색분자로 내버려두질 않았다. 결사항쟁을 촉구하던 반대파 주민들이 반대의견서를 받으러 우리집에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요번 재건축 지역에 해당되는 세대가 350여 가구 정도이며, 그 가운데 반대 의견서를 150장만 채우면 재건축 계획이 무산될 수 있다고 했다. (왜 과반수가 아닌지? 그건 모르겠다 -_-;;) 현재 반대파가 130여 세대이므로 20장만 의견서를 더 채워 제출하면 되니 우리도 동참하라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는데, 그들의 얘기를 듣다가 나는 그만 빈정이 상해버렸다.

나는 이 동네 재건축을 반대하는 이들이 세입자를 중심으로 분담금 부담이 당연히 어려운 서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그저 비교적 최근에 지은 빌라나 아파트에서 4, 50평씩 공간을 누리며 넓고 편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내민 반대 의견서에는 그런 정서가 담겨 있었다. '현재 주거지에서 생활하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재건축을 할 이유가 없어서 결사 반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서명하라고 내민 구청 제출 의견서의 맺음말이었다. 물론 나라도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재건축을 반대했을 것이다. 지은 지 얼마 안되는 새집을 대체 왜 허물고 다시 짓는단 말인가. 하지만 오르 내리기 힘든 계단과 겨울엔 추워서 달달 떨어야 하는 낡은 목욕탕, 원래가 좁아서 이층 두 집을 터서 살고 있는 등 분명히 '살기 불편한' 주거 문제를 알고 있는 나에게 무조건 그들과 똑같은 의견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며 핏대를 높이는 태도는 나의 삐딱성을 일깨우고 말았다. 아, 우리는 불편하다니까!

결국엔 재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찬성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이기심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고, 나 역시 좀 더 편히 살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옳은 명분을 위해 희생하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던 거다. 비겁한 나의 결론은 역시나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겠다는 데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다. 이 동네 재건축에 관한 한은 어느쪽이 옳은지도 이젠 잘 모르겠다. 재건축 재개발 지역에선 원주민의 비율이 늘 30%밖에 안된다는데, 정말로 여기서도 그렇게 될지, 아니면 정말로 낡은 집을 새집으로 바꿔 가질 기회를 반기는 원주민들이 많은지... 확실한 건 이미 이웃들이 니편 내편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것뿐이고, 그래서 주변에 도둑 한번 든 적 없었고 새벽이면 온갖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는 이 동네에 새삼 정이 뚝 떨어졌다. 과연... 이 동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어느 쪽이든 걱정스러워서 미리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나는 진정 비겁자다. 하루 생각해볼 시간을 주겠다며, 도장 찍은 반대 의견서 받으러 내일 또 온다고 했는데 아 어쩌나. 현재의 미봉책은 왕비마마와 나 중에 한 사람만 반대의견서를 써주는 것인데 (찬성도 일리 있고 반대도 일리 있으니까) 실로 회색분자 다운 꼼수가 아닌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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