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호적을 떼면 나오는 이른바 '원적'엔 저런 주소가 적혀 있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동 ***번지.
저기가 어딘고 하면 김소월의 고향인 영변(이제는 김소월보다 핵시설로 더 유명한 듯한!)에서 멀지 않다는데, 물론 나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고, 심지어 우리 아버지도 말로만 들었지 가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식솔들 데리고 만주땅으로 올라가 사업(?)을 벌이던 사이 태어나셨다가 난리통에 월남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북 출신이시고, 살아생전엔 절대 고향 땅을 밟지 못하리란 걸
한으로 여기셨던 두분 때문에 나는 정말로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은 꿈에도 통일"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정민공주보다 어렸을 땐 해마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할아버지가 나와 큰동생을 데리고 주섬주섬 음식을 싸가지고 문산행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좌석이 있는 객차엔 앉을 자리도 없어 마룻바닥 같은 것이 길게 깔린 짐칸에 탈 때도 많았던 완행열차의 종착역에서 내리면(지금은 경의선의 종착역이 문산이 아니라 도라산 역이라더라) 다시 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야했고, 임진각에서도 군인들이 보초를 선 철조망 앞까지 간 우리들은 작은 돗자리를 펴고 또 다시 북녘을 향해 술을 따르고 절을 했더랬다.
할아버지는 간단히 음복을 한 후 남은 음식을 보초 서는 군인들에게 나눠준 뒤
또 다시 손주들을 데리고 허름한 시외버스와 복작거리는 완행열차를 갈아타고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셨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거의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할아버지의 채근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고단한 행차를 나와 큰동생은 꽤 오래 별 투정 없이 따라다녔는데, 다녀와선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투덜거려도 결국 추석날이 돌아오면 기차 타러 가자는 할아버지의 꼬드김에 또 다시 선뜻 넘어가곤 했다.
기차를 타는 것도 매력적이었겠지만, 철조망 너머로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거나 때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시는 할아버지를 어린 마음에도 차마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은 아침에 차례를 지냈는데 굳이 임진각 철조망 앞에까지 가서 또 다시 성묘 대신 절을 하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못말리는 대신, 같이 따라나서진 않는 것으로 나름대로 반항을 했기 때문이다. ^^
나와 동생들이 머리가 굵어져 추석마다 고생스럽게 경의선 열차를 타고 임진각으로 떠나던 할아버지의 성묘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한 뒤엔 다시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그 임무가 넘겨졌고, 차츰 기차 대신 자동차로, 임진각 대신 행주산성으로, 교통수단과 행선지가 바뀐 우리 할아버지의 간이 성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었다.
몇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이 온종일 생방송으로 이어지던 날 나는 당연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대중까지도 빨갱이라며 치를 떨게 싫어하시던 할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셨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몹시 궁금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를 둔 아들인 우리 아버지는 그날, 북한에 얼마나 돈을 많이 퍼다주고 저렇게 요란한 쇼를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퍽이나 못마땅해 하셨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햇볕정책과 북한에 '퍼다주기'를 비판하지만
나는 현재 북한 청년들의 평균신장이 165센티미터를 겨우 넘을까말까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듯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의 식량현황이 그저 안타깝기에 어떻게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생색내기든 아니든 북한주민들에게 쌀 한 톨이라도 더 배급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그렇게 지원한 자원과 식량은 절대 북한 주민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 권력층의 배를 더욱 불리고 군비확장과 핵시설에 투자될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렇게 빼돌려지고도 남은 식량은 결국 죽어가는 '인민'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겠나? -_-''
감상적인 온정주의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제3세계의 가난한 난민과 굶주린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선교단을 보내고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정작 휴전선 너머에서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나 탈북자들을 나몰라라 하는 인간들은 위선자나 다름 없다고 본다.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체제가 다르고 테러를 지원하는 군사독재국이고 핵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핵으로 가장 크게 전세계를 위협하는 나라는 사실 사방에 핵잠수함을 띄워놓고 있는 미국이 아니던가?
오늘 또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걸어 넘어 북한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떠올렸고, 과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원은 통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국적을 가졌고 한국말은 몇마디 하지도 못하는 하인스 워드 같은 사람까지도 한 핏줄이고 '동포'라고 아우르는 마당에, 같은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같으며 커다란 스포츠 행사 때마다 한반도 기를 달고 함께 출전하면서 남북을 서로 잃어버린 자기네 땅이라고(한국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잠시 휴전 중이라잖아!) 우기는 두 나라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왕래하고 쌀과 돈을 최대한 공유하며 살면 왜 안되는데?
물론 남이든 북이든 탐욕스러운 놈들은 더욱 많이 가질 테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테지만(지금은 안 그런가 뭐?) 최소한 남북 청소년들의 평균신장 차이라도 덜 벌어지지 않겠나 말이다.
먹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고 굶으면 벌컥 화가 나는 나로서는 전체적으로 못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남한 또래 아이들보다 한뼘 이상 키가 작은 북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의미에서 또 오늘 뽈록한 김정일의 배를 보니 버럭 화가 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짐작하듯 아직도 통일은 요원한 일일 테고
더 많은 이들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 만남으로 진정 '인민'과 '국민'을 위해 뭔가 소중한 결실이 하나라도 더 맺어지길 빌 뿐이다.
그러다 보면 금강산과 개성공단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대신 내 살아 생전에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땅을 한 번 밟아볼 수도 있지 않겠나.
횡설수설... (쓸데 없이 글이 길긴 또 왜 이렇게 기냐..헐)
두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본 나의 어지러운 생각이었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동 ***번지.
저기가 어딘고 하면 김소월의 고향인 영변(이제는 김소월보다 핵시설로 더 유명한 듯한!)에서 멀지 않다는데, 물론 나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고, 심지어 우리 아버지도 말로만 들었지 가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식솔들 데리고 만주땅으로 올라가 사업(?)을 벌이던 사이 태어나셨다가 난리통에 월남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북 출신이시고, 살아생전엔 절대 고향 땅을 밟지 못하리란 걸
한으로 여기셨던 두분 때문에 나는 정말로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은 꿈에도 통일"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정민공주보다 어렸을 땐 해마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할아버지가 나와 큰동생을 데리고 주섬주섬 음식을 싸가지고 문산행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좌석이 있는 객차엔 앉을 자리도 없어 마룻바닥 같은 것이 길게 깔린 짐칸에 탈 때도 많았던 완행열차의 종착역에서 내리면(지금은 경의선의 종착역이 문산이 아니라 도라산 역이라더라) 다시 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야했고, 임진각에서도 군인들이 보초를 선 철조망 앞까지 간 우리들은 작은 돗자리를 펴고 또 다시 북녘을 향해 술을 따르고 절을 했더랬다.
할아버지는 간단히 음복을 한 후 남은 음식을 보초 서는 군인들에게 나눠준 뒤
또 다시 손주들을 데리고 허름한 시외버스와 복작거리는 완행열차를 갈아타고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셨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거의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할아버지의 채근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고단한 행차를 나와 큰동생은 꽤 오래 별 투정 없이 따라다녔는데, 다녀와선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투덜거려도 결국 추석날이 돌아오면 기차 타러 가자는 할아버지의 꼬드김에 또 다시 선뜻 넘어가곤 했다.
기차를 타는 것도 매력적이었겠지만, 철조망 너머로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거나 때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시는 할아버지를 어린 마음에도 차마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은 아침에 차례를 지냈는데 굳이 임진각 철조망 앞에까지 가서 또 다시 성묘 대신 절을 하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못말리는 대신, 같이 따라나서진 않는 것으로 나름대로 반항을 했기 때문이다. ^^
나와 동생들이 머리가 굵어져 추석마다 고생스럽게 경의선 열차를 타고 임진각으로 떠나던 할아버지의 성묘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한 뒤엔 다시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그 임무가 넘겨졌고, 차츰 기차 대신 자동차로, 임진각 대신 행주산성으로, 교통수단과 행선지가 바뀐 우리 할아버지의 간이 성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었다.
몇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이 온종일 생방송으로 이어지던 날 나는 당연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대중까지도 빨갱이라며 치를 떨게 싫어하시던 할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셨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몹시 궁금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를 둔 아들인 우리 아버지는 그날, 북한에 얼마나 돈을 많이 퍼다주고 저렇게 요란한 쇼를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퍽이나 못마땅해 하셨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햇볕정책과 북한에 '퍼다주기'를 비판하지만
나는 현재 북한 청년들의 평균신장이 165센티미터를 겨우 넘을까말까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듯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의 식량현황이 그저 안타깝기에 어떻게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생색내기든 아니든 북한주민들에게 쌀 한 톨이라도 더 배급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그렇게 지원한 자원과 식량은 절대 북한 주민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 권력층의 배를 더욱 불리고 군비확장과 핵시설에 투자될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렇게 빼돌려지고도 남은 식량은 결국 죽어가는 '인민'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겠나? -_-''
감상적인 온정주의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제3세계의 가난한 난민과 굶주린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선교단을 보내고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정작 휴전선 너머에서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나 탈북자들을 나몰라라 하는 인간들은 위선자나 다름 없다고 본다.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체제가 다르고 테러를 지원하는 군사독재국이고 핵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핵으로 가장 크게 전세계를 위협하는 나라는 사실 사방에 핵잠수함을 띄워놓고 있는 미국이 아니던가?
오늘 또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걸어 넘어 북한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떠올렸고, 과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원은 통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국적을 가졌고 한국말은 몇마디 하지도 못하는 하인스 워드 같은 사람까지도 한 핏줄이고 '동포'라고 아우르는 마당에, 같은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같으며 커다란 스포츠 행사 때마다 한반도 기를 달고 함께 출전하면서 남북을 서로 잃어버린 자기네 땅이라고(한국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잠시 휴전 중이라잖아!) 우기는 두 나라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왕래하고 쌀과 돈을 최대한 공유하며 살면 왜 안되는데?
물론 남이든 북이든 탐욕스러운 놈들은 더욱 많이 가질 테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테지만(지금은 안 그런가 뭐?) 최소한 남북 청소년들의 평균신장 차이라도 덜 벌어지지 않겠나 말이다.
먹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고 굶으면 벌컥 화가 나는 나로서는 전체적으로 못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남한 또래 아이들보다 한뼘 이상 키가 작은 북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의미에서 또 오늘 뽈록한 김정일의 배를 보니 버럭 화가 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짐작하듯 아직도 통일은 요원한 일일 테고
더 많은 이들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 만남으로 진정 '인민'과 '국민'을 위해 뭔가 소중한 결실이 하나라도 더 맺어지길 빌 뿐이다.
그러다 보면 금강산과 개성공단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대신 내 살아 생전에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땅을 한 번 밟아볼 수도 있지 않겠나.
횡설수설... (쓸데 없이 글이 길긴 또 왜 이렇게 기냐..헐)
두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본 나의 어지러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