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옥 예찬

추억주머니 2007. 10. 16. 21:05

홍옥에 관해 비슷한 글을 이미 쓴 것 같아 찾아보니 벌써 2년 전이었다.
다시 봐도 감흥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아
퍼다가 조금 다듬어본다.

내가 어렸을 땐 사과 종류가 홍옥과 국광(어린 친구들 이런 사과가 있었다는 거나 알려나?)만 있는 줄 알았다.
제사나 차례상에 오르는 사과는 그냥 내게 "맛없는 사과"일 뿐이었고 그 이름이 '부사'라는 건 아마 나중에 알았던 듯하다.

홍옥은 새빨갛고 윤기 나는 얇은 껍질이 특색이고 새콤달콤한 맛이었던 반면
국광은 알도 작고 볼품이 없을 뿐더러 육질이 좀 단단하고 단맛이 많았는데
둘 다 가격은 저렴해서 우리는 가을 무렵 얼기설기 나무로 엮어놓은 상자에 담겨, 쌀겨에 파묻힌 홍옥이나 국광 사과를 한 '궤짝'씩 집에 들여놓고 오래도록 먹곤 했다.
홍옥은 금세 시장에서 사라지는 데 반해, 국광은 좌판에서 한겨울에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후지, 또는 부사로 불리던 사과도 지천으로 깔려 있었지만 달기만 하고 푸석푸석한 사과의 맛을
나는 좀체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암튼 내가 그리도 좋아했던 홍옥이 단맛 위주의 사과 종류에 밀려 사라진 것이 10년도 더 넘은 듯했다.
더불어 저렴하지만 때깔도 떨어지고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국광' 사과도 찾아볼 길 없었다.
해서 그나마 초가을에 나오는 초록색 풋사과로 새콤달콤한 홍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는데...
몇년 전부터 드디어 홍옥이 과일가게에 다시 출현한 것이다!

모름지기 홍옥은 빤질빤질 매끄러운 빨간 껍질을 눈으로 음미하다
통째로 한손에 쥐고 와삭... 깨물어 먹는 것이 제맛이다.
그러면 새콤달콤 싱그러운 과즙이 입 한 가득 돌면서 행복함이 밀려든다.

고등학교 때였나...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도시락을 두개씩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
가을부터 겨울까지
울 엄마는 도시락 두개와 함께 꼭 홍옥 사과 두 개를 함께 싸주셨더랬다. 디저트로 먹으라고..
그러면 손 힘 좋은 단짝 친구한테 반으로 쪼개달라고 부탁해서
반쪽씩 손에 들고 서로 바라보며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 먹던 재미와 맛도 일품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홍옥을 통 만나볼 수가 없었기에 안타까워하고만 있었는데
이태 전 과일가게에서.. 수많은 종류의 사과 이름 속에서 '홍옥'이란 글씨를 보고 긴가민가.. 의심 많은 인간 답게 설마... 했었다. '홍옥'의 짝퉁임이 분명한 '홍로'를 좀 더 익혀놓고 사기 치는 게 아닌가 했던 것.
그러나 "속는 셈 치고" 한번 사와 먹어보니
역시나 새콤달콤 감동의 맛이었다.
나처럼 그간 홍옥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들이 꽤 많았던지
행복하게도 해마다 요맘때면 반짝 과일가게에서 홍옥을 만날 수가 있다.

감기 기운을 이겨보겠다고 며칠 신경써서 과일을 먹으며 계속 홍옥 타령을 해댔더니
엄마가 드디어 새빨간 홍옥을 사다주셨다.
겉에 입혀 놓은 왁스 때문이라지만, 예전엔 홍옥을 먹기 전에 꼭 옷자락에(지금 생각하면 더럽기도 하다만;;)
쓱쓱 닦아 빤질빤질 더욱 윤이 나게 문지르곤 했다.
그러면 제일 처음 한입 크게 깨물었을 때 생겨나는 동그란 이빨 자국과 연노랑색 과육이 참으로 예쁘게 느껴졌다.
*_*

좀 전에도 엄마가 굳이 과도와 포크까지 쟁반에 받쳐다 주신 걸 마다하고 덥썩 집어
무식하게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껍질에 농약성분이 남아 있거나 말거나, 홍옥은 무조건 껍질째 먹어줘야 제맛이란 말이지.
쨍쨍 얼음이 어는 겨울은 커녕 11월만 되도 홍옥은 자취를 감춘다.
과육이 연한 탓에 오래 보관하거나 유통시킬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있을 때 많이많이 먹어두는 수밖에 없다.

으으...
글을 쓰면서도 다시 입안에 침이 돌아 얼른 또 새빨간 홍옥 사과 하나 꺼내
깨물어 먹어줘야겠다.

사고가 단순한 식탐가인 나에게 홍옥은, 이 가을 몇 안되는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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