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일본어 포스터를 올리는 건 일어에 익숙하신 이웃 블로거에게 진짜 영화 제목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인지 묻기 위해서다. 영어제목은 <Memories of Matsuko>인데 마츠코 앞에 또 다른 한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수식어가 있는 모양이긴 하지만, 그것이 정말 '혐오스런'인지 궁금했다. (헐.... 찾아보니 혐(嫌)자는 맞다. 혹시 한국 배급사에서 관객 끌기용으로 붙인 건 아닐까 분노했는데 원래부터 있던 제목인가 보다. -_-;;)
암튼 영화 속에서 마츠코를 '혐오스럽다'고 평가하는 건 말년의 극히 일부만을 본 극히 일부의 의견일 뿐이기 때문이다. 혐오스럽다기 보다는... 암담하다.
영화는 유치찬란한 색감과 70년대 미국 뮤지컬 영화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노래, 파란만장 신파의 형태를 띄고 있어서 영화보는 내내 저도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유발하는데, 묘하게도 계속 나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어쩜 이 감독은 여자의 일생을 저렇게도 처절하게 망가뜨려놓고도 그걸 가족주의와 사랑로 포장하려든단 말인가!
이제부턴 스포일러 염려가 있으니 영화 볼 사람은 클릭하지 마시길 ^^
마츠코의 인생이 끊임없이 파국으로 치닫도록 휘말리게 된 이유는 언제나 남자다.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기둥서방들... 놈들에게 두들겨 맞아 눈탱이 시커멓게 되어 코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도 언제나 마츠코는 되뇌인다. "그래도 혼자인 것 보다는 나아"라고... 마츠코를 등쳐먹던 수많은 놈팽이들 가운데 그나마 진실한 사랑이랍시고 하나 나오는 놈마저도 이건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를 또 불행하게 만들 것이 두려워서 기껏 선택하는 길이 교도소 앞에서 출소날을 손꼽아 기다리다 장미꽃 받쳐들고 나온 여자에게 주먹질을 하는 거란 말인가?? 아이 참 욕이 나와서 원... 제아무리 감옥에서 참회를 했다고 해도 18년뒤의 참회는 너무 늦다.
물론 어린시절의 애정결핍과 불행이 많은 이들의 이후 인생을 좌우한다지만 그것 때문에 아름답고 총명한 마츠코가, 생의 바닥까지 떨어져 노숙자처럼 혐오스러운 뚱녀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과정의 수많은 선택들은 그녀에게 내리는 감독의 악의적인 처벌 같았다.
마츠코의 억울한 삶을 결국 존재도 몰랐던 가족의 일원인 조카 '쇼'가 이해해주는 방식이지만(그나마 쇼를 맡은 일본 배우가 몹시 귀엽다^^;;) 자기를 완전히 내몰고 버리고 외면하고 거부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고향과 똑 닮은 강가에서 늘 눈물을 흘리며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대신 마츠코는 왜 더 악착같이 살아내지 못했을까.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용기와 가족보다 진한 정을 나누었던 감방동기 친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마지막 환상 속에서라도 가족과 화해를 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기는 하지만 뒤이은 죽음 만큼이나 그 깨달음은 허무하고 너무 뒤늦었다. 그래서 신파의 극치에서 흘린 내 눈물은 슬픔보다 짜증스러움에 더 무게가 실렸고, 리얼리티를 살린 비극적 결말이라기엔 허겁지겁 모든 균열을 가족과 사랑의 이름으로 풀칠해 마감하려는 것 같아서 괘씸했다.
차라리 친구 구미코와 손잡고 놈팽이 같은 기둥서방 족속들에게 멋지게 복수하고 사랑 그 까짓것.. 하면서 코웃음 치다 장렬하게 죽은 거라면 기쁘게 눈물 흘리며 박수 쳐주련만 아쒸... 혹시 오래 된 영화라 시대에 뒤떨어진 스토리가 된 건 아닌가 눈이 빠지도록 맨 마지막 크레딧까지 확인했더니 웬걸.. 2006년 작품이었다. *_*
하여간... 오래도록 혼자인 여자들 넷이 하늘공원에서 팍팍해진 다리를 주무르며 2시간도 넘게(상영시간이 무려 129분!) 영화관에서 대부분 깔깔대다 나온 뒤끝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우린, 놈들의 잘못을 모두 여자한테 뒤집어 씌워 단죄시키는 영화 딱 질색이란 말이지! 뭐 그래도 볼만은 했지만... ㅎㅎㅎ
<여자의 일생>이나 <테스> 같은 작품 보며 불끈불끈 분개하고 화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영화라고 해야할듯.
밤참 먹고 난 식곤증에 시달리다 졸음 쫒기의 일환으로 적어본다. -_-;; (다 쓰고 나면 부디 잠이 깨길..) 이제는 끝나버린 제9회 여성 영화제에서 본 마지막 영화 두 편. <스파이더 릴리>와 <스무살이 되기까지>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남은 표와 시간 분배와 보고 싶은 영화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영화를 고르다 보니 두 영화를 고르게 되었는데 영화의 느낌은 전혀 달랐지만 내눈엔 비슷한 코드가 감지되었다. 제목에도 적었듯이 나를 둘러싼 가족과 성장, 그리고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것.
이번엔 놓쳤더라도 나중에 개봉할 때 찾아보거나 (<스파이더 릴리>는 5월쯤 개봉한다는 후문^^) 어둠의 경로로 찾아볼 분들을 위해 이제부턴 more 기능으로 해야할 듯.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해보겠지만, 모든 영화 리뷰는 스포일러 요인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므로 알아서들 보시라. ㅋㅋ
<스파이더 릴리>의 두 주인공 샤오뤼(발음이 맞는지 벌써 가물가물... 영어 이름은 Jade였는데;;)와 다케코는 둘 다 이른바 '결손가정'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샤오뤼가 9살 어린 나이에 대뜸 다케코와 사랑에 빠진 건, 본능적인 둘 사이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까. 상처받은 사람들끼리는 묘하게 통하고 알아보는 그 놀라운 교감. 세월은 두 사람을 단절시키지만,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찌릿찌릿 전기파장 같은 교감이 오간다.
개인적으로 연애의 핵심은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이 더 잘산다더라.. 하는 말은 위로를 위해 구성된 거짓말이란 얘기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아, 이 한글 제목 정말 싫다. "Kissing Jessica Stein"으로 그냥 두거나 좀 멋지게 바꿔볼 것이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몸의 상태가 어떠하든 정신적인 면에서 유사한 성별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끼리는 소통이 훨씬 쉽고 공감도 빠르다. 여자들끼리, 남자들끼리 각각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유대와 공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사랑과 연애에 있어서도 나와 비슷하여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쉽지 않겠나.
그런데 둘의 사랑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케코의 가족. 가족의 굴레를 언제나 상기시키듯 다케코의 팔에 새겨진 '스파이더 릴리' 문신은 새길 때의 통증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실에 가깝겠지만 나는 문신처럼 다케코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언뜻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에 내포된 고통 또한 만만치 않은 가족의 멍에 때문에 다케코의 인생이 휘둘려지는 것이 너무도 슬프고 화나고 속상했다. 샤오뤼는 사랑의 기억과 표시로 문신을 새기길 원하지만, 다케코의 문신은 질기디 질긴 멍에 같은 가족에 대한 의무감과 죄책감의 상징이기 때문. 과연 다케코가 그 멍에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는 직접 영화를 보고 판단하시기 바람 ㅎㅎ
독립적인 어른인 듯하지만 아직은 진짜 어른이 아닌 다케코와 철부지 같지만 사랑에 관해선 누구보다 성숙한 마음을 지닌 소녀 샤오뤼의 동반 성장을 담은 듯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서 혼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서늘한 눈매와 시원시원 길쭉한 이목구비의 다케코와 인형처럼 올망졸망 귀엽고 깜찍한 샤오뤼의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 샤오뤼가 계송 흥얼거리는 Jasmine이라는 주제가도 구슬프면서 아름다워 좋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샤오뤼가 다케코에게 외쳤던 말 가운데 "사람을 잊는 건 어른이지, 아이는 사람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던 "나를 기억해줘"라는 말.
드라마든 영화든, 너도 나도 첫사랑에 목매서 발전이 없는 건 참 별로인데... ^^;; 그래도 첫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애틋한 거니까 뭐 특히 이 영화에선 감미롭게 아름다웠음.
배경은 과연 몇년도쯤일까.. 영화보는 내내 궁금했는데 세계사에 약한 내가 그걸 짐작해낼 수야 없는 것이고 암튼 프랑스에서 유태인이 차별을 받고 있고, 고등학교 내 재즈밴드가 줄곧 남자들로만 구성되다 처음으로 여학생 부원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학교에 회의가 소집될 정도이니 어지간히 옛날이긴 하다.
영화를 보며 처음 느낀 생각은, '여성 최초'라는 것의 무게였다. 지금은 그나마 자주 들리지 않는 말이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수없이 들었던 "최초 여성 합격자",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기업 이사 승진", "최초 여성 수석"....따위의 말들. 그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차별과 억압과 편견이 존재했는지, 우리의 수많은 "언니들"이 당당히 실력으로 지혜롭게 그 경계를 넘어서기까지 어떤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이 영화는 그 "여성 최초"의 순간을 단편적이지만 아기자기하고 흥미롭게 담고 있다.
이제 더는 "여자라서" 무조건 차별받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가족의 지나친 간섭과 무관심, 외모와 성별로 사람을 판단하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가뜩이나 괴로운 질풍노도의 시기 열여섯 살을 어렵사리 보내는 한나(프랑스어 발음은 안나인데!)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기랑 비교되는 예쁘고 날씬한 언니들, 말끝마다 살빼라고 구박하는 엄마, 도무지 도움이 안되는 무관심한 아버지까지, 한나에게도 가족은 "수시로" 짜증스러운 멍에지만 결국 푸근하게 기댈 수 있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 (가족에 대한 요즘 내 논리와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원!)
게다가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 쯤, 지나친 가족의 관심과 애정어린 호들갑이 남들앞에선 창피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지 않았나? 재즈밴드 오디션 결과가 나오는 날, 초조하게 기다리던 한나를 응원하겠다며 모조리 학교에 나타난 가족들을 수치스러워하며 결과도 보지 않고 집으로 끌고가는 한나를 보며 나 또한 초등학교 졸업식이 생각나 더욱 깔깔 웃어댔다.
8남매 장남의 첫딸의 초등학교 졸업식. "나름" 우등상을 받는다는 광경을 보기 위해 그날 학교를 찾은 우리 가족은 어마어마했다. 부모님과 두 동생을 비롯해,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아버지 두 분, 큰고모, 막내고모, 외갓집 대표로 막내이모, 사촌동생들까지... @.@ 눈이 녹아 질척대는 운동장 대신 각반에서 졸업식이 거행되는 바람에 교실 뒤까지 주르륵 늘어선 학부모들. 그 가운데 울 아부지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내가 우등상, 개근상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교실 앞까지 들어와 사진을 찍어대고, 식구들은 마구 박수를 쳐대고... 그때의 난 창피하고 민망해서 마룻바닥 아래로 꺼져버리고 싶었고 떼거지로 몰려온 친척들을 어지간히도 미워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때 상장 받고 돌아서다 찍힌 뾰루퉁한 표정의 사진도 소중하기만 하고 바쁜 일 다 팽개치고 첫 손녀, 조카의 하찮은 초등학교 졸업식엘 와주신 그분들의 애정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말이다. ㅎㅎㅎ
암튼 내가 이런 생각을 리뷰랍시고 영화 감상에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이 영화도 가족에 대해선 온정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않는데, 그것이 구태의연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상투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거대 유대자본의 횡포는 싫지만 이방인으로서 차별받는 유대인이란 정체성에 여성이라는 부분까지 가세되어 더욱 힘겨운 한나의 싸움에서 가족은 그야말로 든든한 "빽"이니까.
이 영화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한나의 "재즈 연주"!!! 원래 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에 대해선 무조건적인 동경과 애정을 쏟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나가 별로 뚱뚱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웠는데 콘트라베이스를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땐 완전 반할 정도! 한나에게도 본격적인 첫사랑이 예고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나의 첫사랑은 콘트라베이스인 것 같다. 집안 그 누구도 이해 못하는 아픔과 소외를 치유해주는 아름다운 첫사랑이라니.. 어찌나 부럽던지. 무작정 나도 콘트라베이스를 품에 안고 사랑하고 싶더라! *_*
그리고 "재즈에 대해선 무식한" 가족을 위해 한나가 나에겐 "비야 비야 비야 오지 말아라 장마 비야 오지 말아라 비야 비야 오자 말아라 우리 언니 시집 간단다...." 는 가사로 익숙한 이스라엘 민요(나는 어제까지 이 음악이 우리나라 민요인 줄 알았었다!)를 연주하고 아버지의 눈물 글썽이는 표정이 클로즈업 됐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흘렀다. 옆에 홀로 앉아 있던 젊은 엉아가 울다 웃다 정신 못차리는 나 때문에 좀 난감해 하는 듯 했음. ㅋㅋ
암튼 좌충우돌 한나의 성장기를 깔깔 웃음나게, 또한 눈물 핑 돌게 그린 이 영화를 보니 나도 열여섯 살 때가, 스무살 때가 마구 그리웠다.
참참참... <스파이더 릴리>를 볼 때도 거의 빈좌석이 없었는데 <스무살이 되기까지>는 완전 매진이었다면서 주최측에서 깜짝 이벤트로 선물을 나눠주었다. 물론 재수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대여섯 명 뽑아 주는 이벤트에 당첨될 리 없었지만 9회째인 여성영화제가 그토록 성황리에 매진을 기록하는 걸 보니 주최측이 아님에도 몹시 뿌듯했다. 내년엔 바야흐로 10주년째. 올해는 겨우 3편으로 마감했지만 내년엔 좀 더 미리미리 계획적으로 영화를 골라 좀 더 많은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다짐해 본다.
오늘 드디어 공중파에서 해주던 Grey's Anatomy 시즌2가 끝났다. 요새 일요일 밤이면 완전 테순이 모드로 돌아가 TV 앞을 지켰다. <하얀 거탑>을 보고나서 이리저리 채널놀이를 좀 더 하다보면 Grey's anatomy를 2편 내리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시즌3은 언제나 해주려나! ㅠ.ㅠ 게을러서 파일 다운받아 보는 건 또 죽어도 못한다... 흑...) 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가끔 시간이 맞고 마음도 내키면 <외과의사 봉달희>도 봐준다. ^^ 바야흐로 메디컬 드라마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MBC <종합병원>이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건 엄밀히 말해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였지만 그래도 이재룡이 제법 고뇌하는 착한 의사 역할을 보여줬을 땐, 저런 의사가 어디 있나, 뻥이다.. 구시렁거리면서도 이뻐하며 봐줬던 것 같다. 그 뒤론 <의가형제>도 있었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들이 죄다 나와 보다 말았던 <해바라기>도 있었다. 그러다 내가 본격적으로 메디컬드라마 폐인이 된 건 <ER> 때문이었다. 1996년이었던가.. 고맙게 SBS에서 시작은 했어도 박세리 골프를 중계하느라 예정 편성시간을 늘 어기며 오밤중까지 기다리게 했지만, 나는 막내동생과 리모컨을 놓고 싸우며 ER 시청권을 사수했더랬다. 하지만 급기야는 방송국에서 낮은 시청률을 이유로 시즌2에서 전격 종영을 결정했다. 나름대로 ER 마니아였던 이들이 각종 PC 통신 매체에서 SBS 게시판으로 쳐들어가 불만을 토로했고, 천리안에서 활동하던 나는 ER 동호회를 만들자는 아이들의 이메일을 받고 발기인(씩이나!)이 되어 열심히 ER 사랑을 키웠다. 그러다 몇년 뒤 다시 KBS에서 ER 방영을 결정했지만 터무니없게도 시즌4부터 수입을 시작했다. ㅡ.ㅡ;; 아무려나... ER의 시그널 음악이 흐르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설레는 증상이 제법 오래 갔다 ^^;; 결국 KBS 역시 시청률을 탓하며 시즌4로 ER 방영을 그쳤지만, 아쉬운대로 케이블에서 계속 방영을 해주는 바람에, 지금 시즌9까지 진행됐다. 미국선 시즌 13까지 방송했으니 13년이나(!) 줄곧 방송 하고도 올 9월엔 시즌14가 시작될 거다.
메디컬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 미국이든 한국이든 <ER> 이전과 이후를 논할 정도로 ER은 중요한 시금석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ER이 병원 장면의 리얼리티를 살려 다른 드라마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일 거다. 사실 ER의 긴박감 넘치는 장면들을 보다가 우리나라 메디컬 드라마를 보면 응급실이나 수술 장면이 한숨 나올 정도로 엉터리여서, 정말로 병원에서 연애하는 멜로 드라마 수준으로나 애써 봐줬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Grey's anatomy도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의 범주에 속한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없는지... 의사들끼리는 물론이고 의사/간호사, 심지어 의사/환자 간의 로맨스가 주를 이룬다. 드물게도 메러디스가 시즌2 막판에 수의사랑 잠깐 사귀긴 했지만(어차피 수의사도 '의사'네!)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여전히 데릭이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메디컬 드라마에 열광할까? ER에 미쳐날뛸(?) 때부터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내 경우 그건 너무도 다른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였던 것 같다. 물론 미국의 모든 병원 응급실이 ER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적이고 훌륭한 의사, 간호사들로 넘쳐나 의술이 아닌 인술이 펼쳐질 리 만무하다는 것을 잘 안다. 서류상으로만 유학생 비자를 받아 실제로는 가족들 데리고 미국 가서 돈벌이를 하던 친구 하나는 갑자기 아이가 고열에 시달려 헛소리까지 하자 근처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나중에 3천불짜리 청구서를 받았다고 했다. 치료는 식염수로 체온 내리고 해열제 맞은 것 정도였다는데 말이다. 건강보험 없어도 한국 같으면 10만원 미만이었을 텐데, 미국에선 보험이 없이 911 응급차까지 불러 병원가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간 5천불짜리 청구서를 받는 일도 허다하다고 했다. 결국 내가 감동하며 봤던 <ER>의 멋진 응급실의 모습도 있는 자들만의 응급실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응급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응급 상황 정도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응급실 환자도 MRI나 CT 따위의 값비싼 검사를 하려면, 아니 사소한 검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보호자가 '돈부터' 내야 한다. ㅡ.ㅡ;; 그뿐인가, 늘 부족한 병상은 환자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일부 환자들은 순서를 기다리다 속절없이 목숨을 잃는다. 11년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던 우리 친할아버지는 유명한 S 대학병원 응급실 복도 바닥에 침대도 없이 누워 계셨다가 결국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6개월 뒤 역시나 뇌졸중 초기 증상으로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모셨던 우리 친할머니는(우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S 대학병원이 지척인데도 그리로 가기가 싫었다!) 응급실 담당 의사와 간호사들이 피자 시켜먹으며 히히덕거리는 사이 시시각각 의식을 잃고 결국 깨나지 못하셨다. 우리랑 말씀도 주고받던 할머니가, CT 찍어야 하니 돈 내고 오라고 해서 내가 원무과에 다녀오니 의식을 잃으셨는데, 왜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의사가 한다는 말이 그땐 위급 상황이 아니었단다. 그땐.. 조금 전까지 피자를 씹어먹던 의사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래.. 그땐 10년 전이니 그렇다 치다.
하지만 불과 3, 4년전, 내가 같은 응급실로 실려갔을 때도 배가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던 내가 누워 있을 침대는 없었고, 검사 받으러 이리저리 내 휠체어를 밀고 다닌 건 막내동생과 울 엄마였으며, 검사 끝나면 진통제 놔주겠다고 했던 주치의의 약속은 결국 내가 수술실로 들어가 마취제를 맡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사이 나는 계속 아프다고 울부짖어야 했다. 작년에 막내동생 때문에 거창하게 새단장해 개원한 S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을 때도 환자들이 링거 하나씩 꽂고 줄줄이 의자에 앉아 침대가 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마찬가지였고, 몇시간 동안 지켜봐도 가운 자락 휘날리게 바삐 뛰어다니는 의사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 게 현실이다. 그들도 인간이고, 병원에 고용된 월급쟁이고, 조직의 일원이고, 부품처럼 자기 맡은 일만 하는 사람들이니 뭐랄 수도 없다. 그게 현실이라니까!
<ER>이나 <Grey's anatomy>나 <하얀 거탑>이나 <외과의사 봉달희> 속 모습처럼 환자 이동침대를 손수 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술실로 향하는 의사들은 이 나라 현실 속엔 없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는 건 어디까지나 그 일만 따로 하는 병원 직원의 몫이다. 아... 환자가 의사 가족이거나 아부해야 할 인물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메디컬 드라마 속엔 정말로 환자와 생명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 같은" 의사들이 떼거지로 등장하고, 먼저 검사비 내고 오라는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부분' 정말로 살려내기도 하며(아 물론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살려내는 수많은 의사들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응급처치 과정이 최신식 의료기의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아... 부러워라.
물론 다행히 현실에서도 정말 고마운 의사를 만난 적도 있다. 재작년에 엄마가 쓰러졌을 때 처음 엄마를 맡은 신장내과 레지던트는 그야말로 울 엄마를 살려낸 장본인이었고, 병실에서 기다란 쇠꼬챙이로 중심정맥을 뚫는 따위의 무시무시한 응급처치를 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서도 몇시간 동안이나 울 엄마 곁을 지켰더랬다. 그래서.. 메디컬 드라마를 볼 때면 가끔 그 레지던트의 얼굴이 주인공들 얼굴 위로 잠시 스치는 것도 같다.
인생은,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가 많지만 확실히 드라마보다 아름답진 않다. 죽어 나가는 환자 때문에 진심으로 허탈해하는 의사들의 모습은 메디컬 드라마 안에서만 볼 수 있다. 현실 속의 의사들은 어서 다음 환자를 봐야 하기 때문에 사치스러운 감정에 휩쓸릴 여유도 없거나, 집요하게 매달릴지도 모를 환자 가족들과의 거리를 두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를 그렇게 확연히 알면서도 메디컬 드라마에 열광하는, 아니 그렇기 때문에 메디컬 드라마에 감동하는 내가 좀 한심하긴 하지만 앞으로도 난 열심히 메디컬 드라마를 챙겨볼 거다. 불륜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메러디스와 의료사고에 휩쓸리게 된 장준혁과 심장병이 도진 봉달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면서... ^^;
별로 한가할 때도 아니고, 심심할 새도 없으며 블로그질에 매진할 때가 절대로 아님에도
시험공부 할라치면 먼저 책상정리가 하고 싶어 3시간씩 책상서랍과 씨름을 벌이거나
소설책이 죽도록 더 보고싶어지는 심리의 일환인지...
키드님이 퍼다놓으신 문답을 또 냉큼 시행해 볼 참이다. ㅋㅋㅋ ^^;;
스스로도 컴플렉스 덩어리라고 느끼고는 있었는데... 새삼 알지 못했던 것들까지 따져보니
컴플렉스의 총아였음이 밝혀지는 듯...
피터팬 컴플렉스 (O)
:어른이 되는것이 싫고 영원히 아이로 남고싶은 욕심이 있었다.
-> 6학년때부터 난 이미 다 컸다고 생각했던 조숙한 아이였기 때문에, 과연 저런 상태로도 피터팬 컴플렉스에 해당되는 걸까 약간 의문이 없진 않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는 게 정말로 미치도록 싫었고, 계속 '국민학생'으로 남고 싶었던 건 확실하다.
어른이 되어 이른바 '나이값'이라는 걸로 함부로 사람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사회적/보편적 나이 관념도 몹시 싫기 때문에, 주변에서 '철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심혈을 기울여 사들인 스티커나 스탬프, 예쁜 수첩 따위를 조카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걸 보면, 나에게 이 컴플렉스는 '...욕심이 있었다'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같다. ㅎㅎ
카인 컴플렉스(X)
:나의 형제 또는 자매끼리 서로 시기한 적이 있었다.
->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우리 삼남매는 참 사이가 좋았고(어린 시절 내 독사진은 아주 드물다. 늘 두 남동생 손을 꼭 잡고 찍힌 사진이 대부분 *_*), 나이차도 얼마 안나는 동생들이 누나 말을 대단히 잘 들었다. 동생들이 다 커서도 여자친구 생기면 제일 먼저 나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이젠 장가 가서 각자 가정을 꾸린 그들의 마눌까지도 다 착하다!
신데렐라 컴플렉스 (X)
:동화속의 신데렐라처럼 자신이 박해 받는다고 생각한다.
->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난 늘 인정받고 의견도 존중받는 맏딸이었기 때문에 일부 자신감이 지나칠 정도였다.
나르시스 컴플렉스 (O)
:자신을 과대평가한 적이 있다. 혹은 하고 있다.
-> 지금은 자신감의 날개가 많이 꺾였지만 ^^;;
자뻑증상이 대단히 심할 때가 있었다.
운동과 "연애" 말고 대체 내가 못하는 게 뭐가 있나!
인간성 좋아, 의리 있어, 성격 화끈해, 요리 잘해, 뜨게질 따위도 잘해...
거기다 과학과 의술의 힘 전혀 안 빌리고 이 정도면 정말 예쁜 거지!..라는 망언도 가끔은 서슴지 않는다. ㅋㅋㅋ
나폴레옹 컴플렉스 (O)
:자신의 키가 작다고 생각해 그 보상심리로 공격적이거나 과도한 행동을 한다.
-> 바로 윗 항목처럼 마구 잘난 척을 하다가 키 얘기가 나오면 기가 죽는다. ㅠ.ㅠ
국민학교 1학년 입학하곤 전교에서 제일 작았다지만... 중학교땐 당당히 10번대였고, 고등학교때 교실에서 맨 앞자리로 밀려나긴 했지만, 평생 1번은 해본 적도 없는데, 요샌 어딜 가나 내가 제일 작다. 흑...
보상심리로 그러는 건지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원래 가끔씩 과격한 행동을 많이 하며 '여자라서' 또는 '덩치가 작아서' 선심 쓰듯 주는 특권이자 차별(때론 무시이기도..)을 싫어해서, 회사 사무실 이사 같은 거 할 때 걸레질 마다하고 책상이나 파일장 옮기느라 골병들곤 했다. -_-;;
낙랑공주 컴플렉스 (△)
:사랑을 위해서는 가족이나 국가를 배신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애국자는 아니기 때문에 국가는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가족을 배신하진 못할 것 같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가족은 나에게 굴레이자 내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가족 사이에 고민할 일이 생긴다면 충분히 고민한 후 가족을 설득하거나, 가족의 이유가 타당하다면 사랑을 버리거나 둘 중 하나일듯.
(헉.. 내가 이래서 연애를 못하는 건가?)
요나 컴플렉스 (O)
:지금 살고있는 현재의 삶보다 어머니의 뱃속이 더 편하다고 생각한다.
-> 별로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당연히 그럴 것 같다.
모든 것이 해결되는 안온한 환경에서 책임과 의무는 전혀 없는 원초적인 삶을 누리며
가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탯줄을 슬쩍 잡아당겨 엄마의 입덧을 부추기면 되는 게 아닐까?
ㅋㅋㅋ (갑자기 영화 <마이키 이야기>가 떠올랐다)
파에톤 컴플렉스 (X)
:어린 시절 겪은 애정 결핍에 의해 지나치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 내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애정과 사랑이 넘치는 시기였다. 8남매 장남이신 울 아부지와 6남매 장녀이신 울 엄마 사이에 태어난 첫딸이니 오죽했으랴.
고모들의 증언에 의하면, 거의 방바닥에 내려놓는 일이 없이 늘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컸다고 했다. ^^V
프로메테우스 컴플렉스 (X)
:자신이 무지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눠주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 절대 아니다! 뭘 배워도 밑빠진 독처럼 남는 게 없는 느낌이라 어디서든 내 무지함이 만천하에 드러날까봐 벌벌 떠는 쪽이다.
이카로스 컴플렉스 (△)
:무능력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아닌 초인적인 어느 완벽한 존재가 되고싶다.
-> 순전히 '가지않은 길'에 대한 동경 비슷하게, 초인적으로 완벽한 존재로 살아가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가끔 인간적인 무력함 앞에서 절망을 느낄 땐 너무 슬프다.
폴리야나 컴플렉스 (X)
:보다 더 나아질 수는 없을 정도로 현재가 최고이며 모든 일을 다 좋게 생각한다.
-> 나 역시 키드님처럼 낙천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라 웬만하면 좋게 생각하지만, 욕심도 많아서 현재가 최고는 절대로 아니며, 모든 일을 다 좋게 생각하기엔 불평 불만이 몹시 많은 투덜분자다. ^^
보헤미안 컴플렉스 (O)
:다재다능하고 자유로우며 변덕적이며 상황에 따라 최대의 이익을 받도록 행동한다.
-> 나르시스 컴플렉스 환자답게 다재다능하다고 느낄 때도 많으며,
자유로운 걸 추구하고(내가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현재만큼의 자유로움마저도 상당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결혼 후 더 큰 자유의 날개를 단 사람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더라!) 참으로 변덕스럽다. 싫증도 잘 내는 편이므로...
상황에 따라 최대의 이익을 받도록 행동한다는 건, 아무래도 '잔머리 굴리기의 대가'이냐는 질문 같은데 ^^;; 조직생활(?)하던 시절, 잔머리를 굴린 건 아니지만 몸바쳐 충성하는 방식으로 회사에서 늘 인정을 받는 편이긴 했다. 게다가 사회는 '착하면 곧 바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라 착하게 굴지 않으려고, 최소한 내 밥그릇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중이다.
프로그루스테스 컴플렉스 (O)
:현재의 사회에 널리 퍼진 견해나 태도, 집단주의 등을 무시하고 개성있고 싶어한다.
->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온 나라가 시뻘건 물결로 뒤덮였던 2002년 월드컵의 광란에 가까운 집단주의가 무서워 난 거의 TV도 보지 않았다. 유행하는 옷 스타일 따라가는 것도 싫다. 내 옷장에 10년도 더 된 옷들이 버젓이 걸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튀어 시선을 끄는 것도 싫어한다. 게다가 수백년째 계속해서 유행하고 있는 듯한 여자들의 "청초한 긴 생머리" 물결은 정말 싫다!
파랑새 컴플렉스 (X)
:어느 것이 예전과 바뀌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적이 있다. 한결 같은 것을 좋아한다.
-> 고인 물처럼 변화가 오래 사라지면 오히려 견디질 못하는 것 같다. 변화가 주는 약간의 스트레스와 모험 같은 거 은근히 즐긴다. 요즘 일하기 싫어 죽을 병에 걸린 것처럼 헤매는 이유도 너무 똑같은 일상이 지속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프리랜서 주제에 하라는 일을 마다할 수도 없고.. 미치겠다 +_+)
피그말리온 컴플렉스 (O)
:누군가 자신에게 기대를 가지고 관심을 가져주어 그 덕에 자신이 변한적이 있다.
-> 동기부여가 그래서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
늘 온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존재여서(니가 잘해야 동생들은 물론이고 사촌동생들까지 본받는다...는 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ㅋㅋ),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 같다.
첫 회사에서도 "기대가 크다"는 보스 말에 넘어가 정말 미련할 정도로 코피 터지게 일했더랬다.
스톡홀룸 컴플렉스 (O)
:사회나 정의가 아닌 범죄나 범죄자에게 더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 작년엔가 번역한 책에 좌익과격단체에 납치됐다가 오히려 그 일원이 되어 은행강도에 동참했던 미국 언론갑부의 딸 패트리샤 허스트의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는 바람에 스톡홀름 컴플렉스라는 걸 알게 됐는데, 극단적인 상황에서 스트레스와 공포 때문에 범죄자들에게 동화되는 인간 심리를 뜻하는 거라 저 위 설명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어쨌든 사회가 더 이상 개개인을 보호하지 못하고, 이른바 정의라는 것이 가진자들만을 위한 정의라면 나는 당연히 범죄나 범죄자에게 더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것이다.
지난 80년대 사회가 훌륭한 실례가 아닐까.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영화 주인공까지 된 지강헌의 경우, 그가 극악무도한 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옹호할 맘도 없지만, 그런 범죄와 범죄자를 생산하는 건 바로 부패한 이 사회라고 생각하기에, 당시 그 사건을 보며 안타까웠다.
지강헌의 경우가 너무 심하다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어떨까?
제노비스 컴플렉스 (O)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명이 있을 때 더욱 더 책임감이 희박해진 적이 있다.
-> 당연하지! 난 원래 리더보다는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투덜분자라니깐!
샹그릴라 컴플렉스 (O)
:노화는 숙명이 아닌 자기관리에 달렸다고 생각하면서 젊게 늙고 싶다고 생각한다.
-> 옛날부터 동안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 어쩌면 강박관념 같은 게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보톡스 주사로 터질듯 주름을 감추거나 웃음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쳐진 살을 당기는 노력과 발악은 혐오하는 편이지만, 심신을 가꾸는 자기관리를 통한 젊음 지속하기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예 먹는 나이를 거꾸로 되돌릴 순 없을 테고, 겉은 쪼글쪼글 주름져도 속이 탱글탱글 마음을 젊게 가지면 되지 않을까?
난 아마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도 여전히 철딱서니 없이 지금처럼 칠렐레팔렐레 살아갈 테고, 운동화마저도 굽이 높은 걸 신고 다닐 게 분명하며, 누가 나이를 물으면 한참 계산해야 할 것 같다.
번아웃 컴플렉스 (O)
:어떤 한 일에만 집중하다가 갑자기 무기력함을 느낀 적이 있다.
-> 요즘이 딱 그런 시기인듯...
거의 3년간 쉴새 없이 마감일에 쫓겨가며 번역과 가족일에만 몰두해 살아왔고, 많이 무기력함을 느낀다. 뭔가 활력소를 찾아야 할 터인데.. ㅠ.ㅠ
무드셀라 컴플렉스 (O)
:나쁜 기억은 일부러 지우고 좋은 기억만 가지려고 한적이 있다.
-> 좋은 기억만 뇌리에 남겨두려고 하는 건 인간의 본능 아닐까?
안 그러면 미쳐버린다던데... 특히 난 나쁜 일을 겪으면 당시에 많이 괴로워하는 편이라 얼른 지워버리려고 애를 쓴다. ^^
스탕달 컴플렉스 (X)
:어떤 멋진 예술품이나 무언가를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생기는 정신적 이상현상이 있다.
-> 그저 넋놓고 감탄할 뿐, 특별히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 것 같진 않다.
오지상 컴플렉스 (O)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층의 멋진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적이 있다.
-> 20살 전후로는 또래나 두어살 많은 남자들이 죄다 애 같아 보였고
최소한 7살 이상은 차이가 나야 비로소 남자로 보였는데, 20대 후반쯤인가 마지막 회사 다닐 때는 나를 몹시도 밀어주시던 회장님이 정말 샤프하고 멋지셨다 *.*
영화는 완전히 꽝이었지만, <뉴욕의 가을>에 위노나 라이더랑 나온 리처드 기어!
위노나가 했던 새카만 커트머리를 하고 멋진 중년 아저씨랑 사랑에 빠지고 싶었더랬다. ㅋㅋㅋ
근데 지금은... 내가 중년이다, 젠장!
무슨 한풀이를 하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젠 온종일 문화생활에 힘쓰느라, 평소 걷는 양의 10배쯤 되는 걷기를 통한 육체노동(?)과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를 겪고 보니 오늘은 살짝 몸살 기운마저 있다.
그렇지만 흐뭇하기 짝이 없던 하루를 기록해두지 않을 수야 없지.
역시 문화생활이란 내 두뇌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주변에 자랑을 일삼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희열이 궁극의 목적이 아니겠나. (아.. 속물스러워라~~ ^^;)
째뜬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라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르네 마그리트를 보러 갔었는데
우글우글 아이들 포함 100명쯤 몰려다니는 사람들에 뒤섞여
(개학을 얼마 앞둔 평일 낮엔 어린이 단체 관람도 많다는 걸 왜 몰랐을고! ㅠ.ㅠ)
가까스로 작품 설명을 듣는 과정은 좀 피곤하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내게는 너무도 어렵고 무서운' 마그리트 그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드물게 내 마음에도 드는 마그리트 그림을 찾아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그림 ^^;;
심금, 캔버스에 유채
화가의 후기작에 속하는 이 그림엔
내가 무서워하는 새ㅡ.ㅡ;;도 없고 (나뭇잎과 새가 중첩되어 있는 그림들.. 어흑 너무 무서웠다 ㅠ.ㅠ)
하늘색이 내가 딱 좋아라하는 색감. 투명한 와인잔도 예쁘고... 어쩐지 산등성이 모양새도 낯익다. ㅎㅎ
마그리트가 자기 작품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나마 그의 작품을 보는 혜안을 좀처럼 갖출 수 없었던 나의 무지함에 위로가 되었지만
역시나 초현실주의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도 뜻밖의 횡재로 느껴진 또 다른 전시회가 있었으니!!
두둥~~
그것은 바로 시립미술관 1층에서 완전 홀대를 받으며 전시되고 있던
<로베르 콩바스 전>!!!
마그리트 전시회를 보면 그냥 공짜로 들어갈 수 있고
이 전시회만 보려면 달랑 700원의 입장료를 내면 된다는데
겨우 47점에 불과하다니 간단히 돌아봐주마 마음먹고 저녁 약속시간을 겨우 30분 남겨두고 전시장에 들어갔던 나와 일행은 완전 눈이 뒤집힌 듯, 화려한 색채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콩바스의 그림을 후다닥 훑어 보느라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사진 크기도 차이나는 것 좀 보라지..
콩바스는 현재 활동하는 프랑스 화가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인물이라는데
(작품 설명 맨 앞부분만 듣고선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ㅠ.ㅠ)
마그리트 그림을 보고난 뒤의 암울하고 찝찝하고 음산한 느낌(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영화처럼, 그림에 대한 취향도 하늘과 땅차이니깐 뭐... )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유쾌하고 기발한 그림들이 전시장에 넘쳐났다.
특히 화가가 직접 쓴 작품설명들이 어찌나 재미있든지!!
47점에 불과하다는 전시작품의 양을 얕잡아본 걸 몹시 후회했던 J와 나는
약속시간에 쫓겨 전시장을 나서며 다시 보러 오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캔버스 틀을 떼어내, 대형 족자 느낌이 나는 대형 그림들을 주르륵 한꺼번에 붙여놓아
작품 설명과 대조하며 읽기에 너무도 불편하게 해놓은 성의 없는 전시기획에도 불끈 화가 났지만 어쩌랴... 목마른 자가 우물 파야지.
미술관 홈페이지에도 역시나 작품 이미지가 달랑 2장밖에 없어서, 내가 홀딱 반한 작품은 자랑할 수도 없다.
700원 아니라, 7000원을 더 내라도 보러가게 될지는.. ^^;; 잘 모르겠지만
암튼 난 역시 화려한 색감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다시한번 실감했음.
아차차..
아직 르네 마그리트 전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할인카드가 있음을 주지바람 ^^;
신세계 포인트 카드와 함께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할인쿠폰을 가져가면 20% 할인
모든 BC카드는 10% 할인된다. (천원이 어디야!)
마그리트 전은 4월까지 하니깐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콩바스 전은 겨우 2월 11일까지밖에 하질 않아 이 역시 안타깝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번 미술관 순례를 같이한 J와 나는 만원짜리 마그리트 전보다
700원짜리 콩바스 전이 훨씬 좋았다! ^_________^
어제 문화생활의 마지막은 거의 2달 전에 예매해놓고 기다리던
뮤지컬 <하루>.
유니버설 아트센터로 다시 단장한 리틀엔젤스 회관의 화려하고 푹신한 카페트와
2층 중앙 맨앞줄의 우아한 박스석을 경험해볼 수 있었고,
서범석, 엄기준, 오만석 세 사람을 한 무대에서 봤다는 역사적인 의미와 감동만으로도
꺅꺅 거리며 마냥 좋아라하긴 했지만, 이미 들리는 소문으로 염려했던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많이 떨어져 아쉬웠다.
뮤지컬이 끝나 막이 내리고 나서 내 첫 코멘트가 '이게 뭐야.. 마음에 안들어!'였을 정도.
툭탁거리며 싸우던 동거 연인이 교통사고로 죽은 뒤에 하루 전날로 되돌아간 내용이었던... 몇년 전에 본 영화 줄거리와 똑같은 상황 설정 때문에 공연 보는 내내,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일행들과 그 영화 제목을 고심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프 온리>더라. ^^
창작 뮤지컬이라더니, 그 영화 판권을 사서 원작으로 삼은 건가?
암튼... 개인적으로 서범석의 가창력과 연기와 존재감은 몹시 마음에 들었지만 극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는 생뚱맞은 '플루토'라는 캐릭터도 그렇고
'후까시대마왕' 노릇으로 일관하느라 엄기준의 섬세한 연기력이 묻히고 말았던 방송작가 캐릭터도 맘에 안들고,
두 여주인공이자 목소리마저도 예쁜 척하기 대가인 ㅡ.ㅡ; 김소현과 양소민은 둘 다 목소리가 가늘어 차별화되질 못한 데다 인물표현이 어찌나 상투적인지..
그나마 오만석이 맡은 강영원이라는 인물은 그럭저럭 봐줄만 했지만, 매력과 감동을 느낄 순 없었음.
하여간 그래서 우린 '무슨 스토리가 이렇게 산만하고 어수선하냐'고 구시렁댔으며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래가 단 한곡도 없었음에 기막혀 했지만 ^^;;
그래도! 서범석과 엄기준과 오만석이 한 무대에서 삼각구도를 그리며 열창하던 장면들이 몹시 인상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역시 가창력에선 서범석이 짱! <벽뚫남>에선 워낙 레퍼토리가 조용조용해서 가창력을 느낄 수 없었던 엄기준도 수준급, 의외로 오만석이 제일 딸리더군.. 너무 예쁘고 감미롭게 부르려고 해서 그랬을까?)
어차피 2월 초면 끝날 공연이지만, 주변에 널리 홍보하거나 칭찬하고 싶진 않은 작품이고
입소문을 타서 마구 연장공연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다.
아무려나 문화생활 종합세트 같은 '하루'를 가열차게 보낸 다음날은
역시 피곤하군. ^___^
작년 연말에 뜻밖에 전시장을 찾았다가 대박을 만난 느낌이기도 했고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 세계 가운데 천진난만하고 색감이 화려하고 예쁜 그림이 너무도 많아 그림 좋아하는 우리 조카 정민공주도 좋아할 전시라는 생각에 공주를 대동하고 두 번째로 전시장을 찾았다.
나 역시 사람 없이 조용한 미술관 관람을 그 누구보다 즐기기에 지난번 강추위 속에 평일 야간 관람을 할 때가 더 좋긴 했지만 어린이를 위한 그림 설명을 따라가는 재미도 나름 흘륭했고 그나마 방학 초기라 샤갈전 때처럼 와글와글 장터바닥 같진 않아 다행이었다.
마침 덕수궁앞에선 오후 수문장 교대식이 벌어지려는 찰나여서 공주는 몹시도 즐거워하였고...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선 '반드시' 궁궐도 꼼꼼히 돌아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결국 미술관 1, 2층 전체를 2번이나--한번은 우리끼리, 두번째는 어린이 작품설명하는 도슨트와 함께, 그리고 우를루프 전시관은 3, 4번은 봤을 거다--돌고 난 뒤에, 어스름녘 추운 날씨에 궁궐을 돌며 중화전, 함녕전 따위를 다 보고 다니느라 고모 무수리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ㅠ.ㅠ)
이 블로그엔 스킨의 특성상 웬만해선 사진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샤갈전과 더불어 2번이나 전시를 관람한 흔치 않은 경우라 자랑하고파서 무리를 무릅썼다.
자.. 보시라~
17살에 다니던 파리의 미술학원을 6개월만에 때려치우고는 더 배울 게 없다고 했던 장 뒤뷔페는 의외로 가업을 잇느라 마흔 살까지 포도주 상인으로 살았단다. 그 이후 인생의 절반만을 화가로 산 셈인데.. 아.. 역시 천재는 다른 게 확실하다. 지난번에도 내가 좋아라 하는 그림이라고 올린 초창기 그림도 재미있고 아기자기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작품들은, 피카소처럼 예술적 영감이네 어쩌구네 하면서 여자를 수시로 갈아치우지 않고도 예술세계의 깊이와 폭이 몹시 다양하고 중층적이었다.
모자를 써 보는 여인 / 1943년 11월 / 캔버스에 유채 / 60 x 73 cm / 파리 파르티퀼리에르 컬렉션 소장
예술가야 워낙 상상력이 뛰어난 게 당연하겠지만 모자를 써보느라 분주한 손가락의 모양을 달랑 네 개만으로 저렇게 단풍잎처럼 처리한 뒤에 얼굴과 머리모양, 모자에 중점을 둔 뒤, 나머지 몸은 대강 쓱쓱 작게 그렸다. 정말 어린아이 그림 같지 않나?? ^^;;
아래 작품도 내가 좋아라~ 하며 미소를 머금었던 작품이다.
금반지 / 1958년 / 100 x 81cm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뒤뷔페가 흙, 돌, 지표 등의 재질학에 관심을 두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라는데 이 시기엔 예쁘고 화려한 것보다 다 이렇게 질감이 가장 두드러지고 표현이 단순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저 손가락에 낀 금반지가 실제로 보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
정민이는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우를루프' 세계를 제일 좋아했고, 작품을 딱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걸 고르겠냐고 물었더니 이걸 골랐다.
클로슈포슈(?), 밀도가 좀 더 높은 스티로폼을 조각하고 채색한 입체 조형물인데 몹시 귀엽다!
딱히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뒤뷔페만의 신조어라는 '우를루프'의 세계에선 사람도, 물건도, 제각각의 공통적인 색채를 갖고 탄생한다. 우를루프 세계 속에서 물건 이름 맞추기도 그림 감상의 또 다른 재미였는데 멀리서 본 느낌과 실제 작품 제목이 전혀 틀린 것도 많지만, 제대로 짐작했을 때의 기쁨이란! 뉴욕과 파리에 거대한 우를루프의 세계 조형물들이 있다는데 몹시 가보고프다.
내가 이 사람의 그림을 왜 좋아하게 됐는지.. 두 번째로, 각기 다른 도슨트의 작품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니 장 뒤뷔페는 일상의 소박한 것, 초라한 것, 별것 아닌 것, 추할 수도 있는 것들에서 미를 느끼고 그대로, 또는 더 밉고 못생기게 표현하면서 아름다움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거창하고 심각하고 정치적인 색채가 진하거나 암울한 느낌의 그림은 내가 좀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람의 그림은 인간적이면서도 밝고, 가끔 슬프면서도 희망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더 많지만 공식 홈페이지(덕수궁 현대미술관)에 소개된 그림 가운데 퍼오느라 선택의 폭이 좁아졌는데, 예를 들어 아래 그림은 나처럼 건망증 심하고, 특정 분야에 대해선 장단기 기억력 상실증 환자에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꼭 찝어내서 그린 것도 같다. ^^;;
좌표 / 1978년 205 x 291cm / 종이에 아크릴(36개의 구성재료를 붙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기억의 극장' 연작 가운데 하나라는 이 작품에서.. 기억의 조각들 가운덴 그냥 소용돌이처럼 흔적만 남거나, 점점이 사라져가거나.. 또렷이 각인된 사람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툭툭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래도 배열이 참 예쁘기 그지없다!
점점 노쇠해지면서, 그림 뒤에 자석을 붙여 철판에 붙여놓고 이리저리 배열을 한 다음 오려붙였다는군. 실제로 이 그림을 보면서 나는 아련한 색감이 참 몽환적이라 느꼈다.
장 뒤뷔페는 "나의 전체 회화 작품에는 두 개의 바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불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개입 흔적을 극도로 과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존재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여... 부재의 원천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아무래도 나는 전자의 바람이 나부끼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쪽이 더 즐겁고 행복했는데, 인간 존재를 없애 허무감이 느껴지는 작품들도 물론 감탄스러웠다.
앞으로 난 이 화가를 주목해보리라! 1985년에 작고한 이 화가 생김새도 멋지다 ㅎㅎ
공식 홈피에서 퍼온 월페이퍼인데.. 책상 전면에 놓인 그림들이 사랑스러워서..
대개 못마땅한 전시회는 외국의 소규모 미술관 한두 개에서 작품 몇개 덜렁 가져와 놓고선 그럴듯하게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전시는 프랑스의 장 뒤뷔페 재단 창고가 텅텅 빌 정도로 작품을 실어왔고, 다른 미술관 소재의 작품들도 많아서 일단 전시의 질이 알차고 비중 있었다.
게다가 sk가 웬일로 그런 선심을 쓰는지 포인트 삭감 없이 그냥 멤버십 카드만 보여주면 할인을 해주는데, 동반자까지 무조건 할인이라 정민공주는 단돈 3천원에 궁궐까지 다 봤으니 어찌 흐뭇하지 않을쏘냐. 1월 28일일까지밖에 하질 않아서 주변에 더 널리 알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
2006년 마지막 문화생활과 2007년 첫 문화생활이 같은 전시회라니.. 이 또한 뜻 깊지 않은가!
(그런데 사진들이 모두 저작권에 저촉을 받는 것들이라 문제가 생기면 후다닥 삭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ㅡ.ㅡa)
정민공주가 밤중에 헤어지며 "고모, 오늘 정말정말 재미있고 즐거웠어! 다음에 고모 전시회 갈 때 나도 꼭 데려가야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점심때 들른 음식점에 '윌리 호니스전' 팸플릿이 있었는데, 공주 모녀에게도 가보라고 권하다가 그만 촐싹맞게 내가 '벨로 언니랑' 보러 갈 거라고 발설하고 말았던 것... 아... 어찌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충동구매는 좀처럼 하지 않는 내가 가끔은 친구의 부추김에 훌러덩 넘어가 좋아라하며 뭔가를 사들이기도 한다. 물론 가격이 저렴한 경우에 한해서.. ^^;;
잠실 교보문고에서 친구를 만난 김에... 워낙 값싼 제작비로 만들어 서플먼트도 거의 없고, 화질과 음향도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dvd를 몇개 샀다. 화양연화 아비정전 러브레터 흐르는 강물처럼 이상 각 4900원 ㅋㅋ 로마의 휴일 7900원.
저 중엔 중고 비디오 테이프로 갖고 있거나, 만우절날 장국영의 사망소식이 들린 후 망연자실하는 내게 후배가 CD로 구워준 것도 있는데, 그래도 또 사고팠다. @.@
문제는 책과 마찬가지로 dvd를 장만해도 정작 보는 건 지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갖고 있는 dvd 가운데 그나마 2번 이상 본 건, BBC판 <오만과 편견>(아~~ 완전소중 콜린 퍼스!)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뿐이고, 심지어 ER 시리즈 마지막 2세트는 아예 포장도 뜯지 않고 모셔만 두고 있다. 언젠가 많이 한가할 때 몰아서 보리라 마음먹으며 ㅋㅋㅋ
그래도... 좋아하는 영화를 중고 비디오 테이프로 모아둘 때처럼 (비록 이제는 처치곤란으로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긴 하지만) dvd를 나란히 세워놓으며 몹시 뿌듯하다.
아 맞다! 털실이 포근포근하고 품이 넉넉한 회색 터틀넥 스웨터도 샀다. grey heather라고 하는.. 희끗희끗한 회색이 나는 왜 이리도 좋은지.. 혹자들은 내 옷장에 승복 색깔 옷이 너무 많다고 타박이지만 ^^;; 넉넉하고 푹신한 느낌이 좋아서 만지작 거리다, 별 고민 안하고 '이거 주세요!' 했다. 회색 스웨터는 이미 몇 개나 있지만, 또 사고나서도 절대 후회하지 않게되는 아이템. 폭신한 스웨터와 내복이 없다면 아마 난 이 나라의 겨울을 버티지 못할 거다. ^^;;
키드님을 선두로 이웃 블로거들의 재미난 베스트 문답을 보며 참 흥미롭긴 했으되, 나는 기억력도 나쁘고 뭔가를 열심히 정리하는 인간 유형에서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다 보니(다이어리 쓰기를 작파한지 최소 5년은 넘은 것 같다. 이젠 아예 장만하지도 않는다) 난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파피와 쌘이 한 번 더 옆구리를 쿡쿡 찔러주니 또... 정리 못하는 인간이라 더욱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 그냥 수월하게 살면 될 것을 나란 인간은 뭐든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다 판난다.
게다가 또 이렇게 만날 서론이 길다. ㅋㅋ 사진 편집해 올릴 능력도 없으니 단조롭고 별 재미도 없을 것이라고 미리 경고 ^^;;
2006 최고의 책 3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정영목 옮김/청미래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올리버 색스 지음/조석현 옮김/이마고 - 젠틀 매드니스/N.A. 바스베인스 지음/표정훈,김연수,박중서 공역/뜨인돌
민망하게도 꼽아보니 1년동안 사들인 책 대비 읽은 책이 50퍼센트도 되지 못했다. 조지 마이클이 토크쇼에 나와 '책은 훌륭한 가구'라고 한 말에 힘입어, 사람들이 흐뭇하게 장서용 책을 사들인다는 말에 나도 킥킥 웃으며 뿌듯해 했지만... 일 때문에 하는 번역과 검토 이외의 책을 좀 더 많이 읽지 못하는 내 게으름이 참 민망한 수준이다. 겨우 열권 남짓 읽은 책 가운데 어렵사리 골라봤다. ㅡ.ㅡ;;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좋아서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을 또 사보았으나 실망스럽긴 했지만, 이 책은 사랑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터무니 없는 착각이자 자기 최면인가를 냉소적이면서도 유쾌한 사유로 엮은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더랬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다양한 신경증 환자들의 놀라운 임상기록을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한 책이다. 우울증 환자이신 엄마 때문에 신경/정신 장애를 다룬 책들에 아무래도 호기심이 많이 가는데, 황당하고 놀라운 여러 환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질 수 있었던 듯. <젠틀 매드니스>는 가장 우아하고도 품격 있는 광기라고 애서가들이 이름 붙인 '애서광' 증상을 지닌 여러 서양인들의 특이한 삶과 책에 대한 애착에 얽힌 뒷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희귀본을 소장하기 위해 책을 훔치기까지 하며 개인 문고를 가꿔나가는 저들의 문화는 사실 우리에게 많이 낯설다. 1000페이지가 넘는 사전 두께라 사실 다 읽진 못했지만, 내용보다는 순전히 장서용으로 장만해놓고 쓰다듬으며 뿌듯해하는 책이다. ^^;; 게다가 이런 두께의 비대중적인 책을 옮기고 출간하기로 결정한 관계자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기도 하고, 읽지도 않으면서 사들여놓고 그저 좋아라 하는 책 허영심의 발로에서 목록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ㅋㅋ
2006 최고의 영화 3 - 수면의 과학 - Good Night, and Good Luck - 왕의 남자
올해도 영화를 그리 많이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나마 본 영화 가운데 고를 수밖에 없었다. <수면의 과학>은 당당히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었는데, 나머지는 생각 좀 해야 했다. <Good Night, and Good Luck>은 마녀사냥 같은 매카시의 공산주의 색출 열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 미국의 정직한 언론인을 다룬 영화였는데, 내가 한 때 몹시 좋아했던 조지 클루니가 감독과 각본을 맡아 훌륭하게 연출을 해내기도 했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모습도 볼 수 있어 좋았을 뿐더러, 거지발싸개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 언론의 행태와 비교되는 영화속 실존 인물의 모습이 대단히 멋졌다. 당시 TV 방송에선 저널리스트가 담배를 피우며 진행을 하던데, 그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 영화관을 나오며 흡연의 욕구가 마구 용솟음치기도 했던 영화다. ㅋㅋ <왕의 남자>는 동성애 코드와 연산의 인간적인 고뇌, 광대패거리의 슬픔, 한복의 아름다움 따위가 잘 어우러져, 푸짐하게 잘 차린 잔칫상 같은 느낌의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6 최고의 공연 3 - 벽을 뚫는 남자 - 미스터 마우스 - 형제자매들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본 뮤지컬 <벽뚫남>은 2층 S석이라 시야 확보는 좋았으되, 좌석이 좁아 무릎이 앞 벽에 닿아 불편했던 것을 빼면, 엄기준과 해이의 적당한 호연과 조연들의 열정적인 연기가 어우러져 프랑스 코미디의 특유의 익실과 재치의 묘미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 공연이었다. <미스터 마우스>는 소극장에서 처음 본 뮤지컬이었는데,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이나 흡입력 같은 건 없어도 서범석의 담백하고 진솔한 연기와 가슴 아픈 스토리 때문에 심장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공연 후반 내내 엉엉 울었더랬다. 가격 대비 몹시 만족했던 뮤지컬 ^^;; <형제자매들>은 친구따라 무작정 강남가는 격으로 내용도 전혀 모르면서 자그마치 7시간 반이나 하는 러시아 원어 연극이라는 얘기만 듣고 가서 봤는데 오후 2시부터 시작해, 가부키(물론 본 적 없다)처럼 중간에 저녁 먹는 시간도 있고 밤 10시 넘어 끝나는 놀라운 마라톤 공연이었다. 가끔 지루하다 느낀 적도 있었지만, 스탈린 시대 농민들의 애환을 다룬 내용은 다른 언어와 자막의 벽을 넘어 찌릿하게 마음을 울렸고, 막이 내린 후엔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기립박수를 오래오래 보냈다. 뮤지컬은 가끔 봤어도, 진지한 연극을 본 것이 워낙 오랜만이라 각별히 인상적이었던 데다, 20년째 같은 배우들이 같은 연극을 계속 무대에 올리고 있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라마 극장(? 정확하지 않음^^)의 열정적인 팀웍 또한 감동이었다.
2006 최고의 문화생활 3 - 장 뒤뷔페: 우를루프 정원 展 - 이면展
전시회를 그닥 많이 다니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둘 밖에 못 고르겠다. 클레전과 인상파 거장전은 전시장을 나와서 전시의 성의없음에 마구 화가 날 정도였고, 롭스&뭉크 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나쁨과 미진함 때문에 덕수궁을 나오자마자 마구 단 것과 카페인이 땡겼더랬다. ^^;;
12월의 완전 끝자락에 르네 마그리트 展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나는 초현실주의 그림이 별로인데다, 키드 님과 달리 르네 마그리트 그림은 내 취향과 좀 거리감이 있다 ㅎㅎ), 내가 극구 우겨 보러갔던 장 뒤뷔페 전시회는 별 기대 없이 갔다가 대박을 건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프랑스에선 국민화가로 이름이 높다는 장 뒤뷔페의 작품이 대거 전시된 알찬 기획인 것도 훌륭했고, 작품을 설명해주는 큐레이터의 맛깔스러운 소개도 재미 있었을 뿐더러, 가장 중요하게는 한 사람의 작품 세계라 보기엔 몹시 놀라울 정도로 폭이 넓고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며 마구 행복해졌다.
그래서 부러 시키지도 않은 전시 품평서를 써주기도 할 정도였는데 ^^;; 평일 목/금엔 밤 8시반까지 전시를 연장할 뿐만 아니라, sk멤버십 카드가 있으면 평소에도 2천원 할인, 오후 6시 이후엔 50%나 할인해준다. 그래서 일행들 모두 단돈 5천원 내고 들어가 보면서 만오천원짜리 전시로도 손색이 없다고 칭찬했음 ㅋㅋ 전시 감상은 정민공주 데리고 한 번 더 보러 갔다 온 다음에 올릴 계획인데 과연.. 1월 28일까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한다.
이면전.. 은 내가 아는 분이 소속된 그룹 전시회였는데, 순전히 팔이 안으로 굽는 논리로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음 ㅋㅋ... 내가 최초로 전시작품을 돈 주고 산 역사적인 기록도 있고 해서.
2006 최고의 지름 3 - 필리핀 보라카이 여행 - 변수옥 화가의 판화 작품 2점 (사진 가운데 맨 오른쪽 ^^;;) - 롤러 스탬프 세트
ㅋㅋㅋ 마지막 세번째 것 때문에 고민 좀 오래 했는데, 정가 4만8천원이나 하는 책 <젠틀 매드니스>를 넣을까 하다가 가격대비 만족도로 봐선 아무래도 롤러 스탬프를 넣어야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롤러 스탬프란... 말 그대로 예쁜 무늬가 둥근 롤러에 새겨져 있어서 손잡이를 잡고 죽 돌리면 띄 모양의 스탬프가 찍히는 건데, 완전히 재미 붙여서 선물 할 일 있을 때마다 포장지 대신 두툼한 색지나 갱지 사다가 찍어서 포장해 주며 혼자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어제도 조카들이 놀러와서 공연히 이면지에 수십장 찍고 놀다가 갔는데... 스탬프 잉크가 좀 아깝긴 해도 그 마음을 내 익히 이해하기 때문에 그냥 냅뒀다. ^^;;
2006 최고의 드라마 3 - 굿바이 솔로 - 연애시대 - Grey's Anatomy
이건 이웃들과 너무 비슷해서 설명이 필요없을 듯;;; 요새 케이블에서 <꽃보다 아름다워>를 재방해주고 있는데, 또 넋놓고 보면서 노희경의 대사에 감탄하고 있다. *.* 세 드라마의 공통점을 찾아보니, 가슴을 저미듯 대단히 공감 가는 현실적인 대사와 주옥 같은 표현으로 이어지는 잔잔한 내레이션, 분위기에 딱 맞는 배경음악인 듯 싶다.
2006 최고의 삽질 3 - 재작년에 거금 8백만원이나 번역료를 '완전히' 떼먹은 출판사 직원이(원래 좀 아는 사이였고 소개할 당시엔 그 출판사를 퇴사한 상태) '미안해서' 소개한 신생 출판사 일 때문에 다른 일 제쳐두고 연달아 2권이나 번역했는데, 10달 넘도록 번역료도 못받고 공연히 다른 일만 마구 밀렸던 일. 더욱이 돈 받을 욕심에, 얼굴 팔리는 거 몹시 싫은데도 책 소개 나오게 된 DMB 방송에 인터뷰도 해줬는데! 아.. 신경질나. - 웰빙 좀 추구해보겠다고 거금 5만원씩이나 주고 사들인 마리안느와 아마존 화분 죽이기(아직 안죽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ㅜ.ㅡ;;;) - 그밖에 자잘한 삽질들은 많았는데... 딱히 뭘 꼽을지 모르겠다. ^^;; 나중에 생각나면 삽입하든지 하겠음
2006 최고의 음반과 싸가지, 안습 지름엔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다. 음반은 워낙 잘 사지도 않고, 또 잘 듣지도 않는 듯... 몇개 산 게 있긴 한데 까칠해져선 열심히 일할 땐 음악도 귀에 거슬리다보니 잘 찾아듣지도 않고, 찾아 들을 때도 익숙하고 편한 것만 고르게 된다. 사놓고 후회하는 물건도 좀 있지만(가령 백화점 세일에서 산 만원짜리 낙타색 미니스커트라든지, 몇달째 포장조차 풀지 않은 요가매트라든지 ㅋㅋ), 워낙 지르기까지 심사숙고 하는 인간이라 크게 지르고 후회하는 물건은 없어 다행이다.
그야말로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스테판의 고통과 아픔이 슬몃 슬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기자기하고 깜찍한 상상력으로 포장된 이야기가 하도 유쾌하고 즐거워서 혼자서 계속 킥킥킥 깔깔깔 웃어댔다. 그리고 결과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마무리에 난 또 어김없이 해피엔딩을 상상하곤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개봉관이 많지 않고, 다들 찾아와서 보는 관객인 데다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 전엔 관객석 조명을 켜지 않는 씨네큐브 특유의 배려 덕분에 영화가 끝나는 순간 벌떡 일어나 화면을 가리는 성급한 관객이 거의 없어 잘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어 자막과 음악을 끝까지 앉아서 감상하며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어 참 좋더군.
측근 하나는 이 영화를 <싸이보그..>와 비교하며 유쾌하다고 말하여 내가 버럭 화를 낼 정도였는데, 박찬욱의 비틀리고 괴상한 상상력과는 분명히 다르며,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느껴지는 암울함의 분위기나 희망에 대한 소박한 바람의 정도까지도 모두모두 참 다르다!
스테판이 스테파니를 사랑하는 이유는 손으로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는데... 인간이 손으로 꿰매고 붙이고 만들어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조금씩 부족한 헝겊 인형과 공예품들이 정말로 대단히 예쁘고 아름답다.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하고 놀라운 디지털 기술보다는 어딘가 허술하고 정감 가는 아날로그 기법을 동원하여 영화 전반에 예스러운 느낌이 흐르도록 한 것도 내 취향엔 아주 마음에 들었고, 특히 꿈속의 세계를 구성하는 색채와 골판지 공예 작품들은 하나같이 나도 갖고 싶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셀로판지 하나로도 어쩜 그렇게 발칙한 생각을 해낼 수가 있는지 원... 감독의 상상력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못보고 지나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문답인지, 키드님도 제목을 잘 모른다 하셨는데 좋아하는 것이든 취향이든 암튼 이럴 때 드러나는 이웃 블로거들의 성격이나 취향이 나도 참 재미나다 여기므로 성심껏 답해보려 함.
당신이 좋아하는 케이크의 종류는 단연 1번은 티라미수 케이크! 2번은 아마도 초콜릿 무스 케이크일 듯 하고, 달지 않고 맛이 몹시 진한 치즈 케이크도 좋아하지만 측근 가운데 케이크 한 판을 거의 혼자 먹다시피 하는 J양과 달리 나는 한 조각 정도로 만족하는 편. 가끔 케이크나 초콜릿이 죽도록 먹고 싶어 홀로 조각 케이크와 커피를 사먹기도 하지만, 사실 '단 것'을 그리 즐기진 않는다. ^^;;
당신이 좋아하는 음료는 아무래도 커피.. 라고 해야할 듯. 그렇치만 변덕이 심해서 기분에 따라 취향도 달라진다. 집에 있을 땐 달달하게 인스턴트 커피에 설탕과 가루 크림을 모두 넣은 게 맛있고 작업실에서 골똘히 일을 할 때는 약간 흐리게 내린 원두커피를 한두 주전자 거뜬하게 마시며 행복해 하고, 카페나 콩다방 같은 델 가서는 거의 어김없이 카푸치노를 마신다. 물론 설탕은 넣지 않고. 향기로운 커피와 구름처럼 둥둥 뜬 우유거품에 곁들인 계피가루의 조화는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카푸치노를 만들어낸 이탈리아인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할 정도.
카푸치노를 좋아하게 된 건 내가 생전 처음 '카푸치노'란 예쁜 이름의 커피를 맛보게 된 1990년 뉴욕 첫 출장의 기억과도 맞물린다. 양키들 틈바구니에서 버벅대며 2주째 코피 터지도록 일만 하던 어느 날, 쿠바 난민출신의 다정한 동료 디자이너가 퇴근 후 데려가 사주었던 그 향기롭고 부드러운 카푸치노 맛은 평생 잊지 못할듯... *.*
당신이 좋아하는 과일은 새콤달콤한 과일은 다 좋아라 한다. 자두, 복숭아, 귤, 오렌지, 포도, 딸기, 체리, 사과 중에서도 홍옥!, 필리핀에서 처음 먹어본 망고스틴 같은 것들.. (같은 열대 고일이라도 파인애플은 이유 없이 싫더라) 반면에 달기만 한 과일은 싫다. 수박, 참외, 배, 망고.. 따위는 그냥 의무적으로 한 두 조각 먹어주는 정도. 특히 배는 어렸을 때 이른 바 갈비 뜯는 걸 시도한 뒤에 크게 배탈이 나 고생한 적이 있어서 더더욱 즐기지 않는다. 달기만 한 과일 가운데 유독 좋아하는 건 단감과 홍시.(홍시에 얽힌 추억은 할머니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언젠가 밝힌 적이 있음^^)
염색을 한다면 무슨 색으로 한때는 계속 짙은 갈색으로 전체 염색을 하거나 부분 탈색을 해본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답답해 보일 정도로 까만 내 머리칼 색이 그냥 좋아 앞으로도 염색할 생각은 없다. 미용실에서 약품 냄새 맡으며 죽치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무엇보다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스티커 사진이 유행하던 시절 보라색 가발을 쓰고 찍은 사진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적이 있어서 가능하다면 평생 한 번쯤 윤기나는 연보라색으로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탈색을 전제로 한 보라색 염색에 윤기가 날 리 있겠나!) ^^'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음악에 워낙 무지하고 듣는 귀도 발달하지 못하여 장르 구분도 잘 모를 뿐더러, 싫증도 잘 내는 편이라 한 가지만 주야장천 듣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스팅이라면야 언제라도 들어줄 수 있지만...
돈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세계일주! 일단 유럽으로 날아가서, 거기선 그리 비싸지 않은 미니쿠퍼를 산 다음 지도책과 네비게이션을 장만해 유럽 전 지역을 떠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휴양지나 한적한 마을에서 호화롭게 유유자적 탱자탱자 놀련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지중해 연안도 돌아보고, 아프리카로 건너갔다가 남미부터 북미까지 휘휘 돌아다닌 후 일본을 거쳐 반드시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유럽에서 탔던 미니쿠퍼는 배편으로 한국으로 이미 보낸 터. ^_________________^ 지금껏 여행을 그리 많이 다니진 않았지만, 나라가 개판이라며 다들 지지고복고 난리를 쳐도 그래도 살기엔 이 나라만한 데가 없다고 확신한다. 내 소중한 재산인 사람들과 가족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기도 하고.
그런데 돈의 구애를 받지 않더라도, 번역 일은 1년에 한두 권 쯤 계속 하고 싶다. 만날 놀기만 하면 좀이 쑤실 것도 같아서 ㅋㅋ
가장 재미있게 한 게임은 무엇 두뇌가 단순한 탓인지, 복잡한 게임은 고사하고 비교적 단순한 게임도 잘 못하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한때 온 식구들이 테트리스 게임에 심취해 최고 점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때도 있었지만, 그때도 늘 일찍 포기하는 편이었고 기껏해야 윈도우에 기본으로 깔린 지뢰찾기, 프리셀, 스파이더 카드놀이를 하거나, zookeeper를 하는 정도.
당신이 좋아하는 향기는 어린 아기가 풍기는 향긋한 젖내. 갓 갈아 내린 그윽한 커피 향 (개인적으로 별다방보다 콩다방의 부드러운 커피향이 훨씬 좋다!) 어렸을 때 엄마 냄새라고 생각했던, 정의하지 못할 체취와 화장품 냄새가 뒤섞인 아련한 추억의 향기. 샤넬 향수 샹스. 새책을 처음 펼쳤을 때 얼핏 풍기는 종이와 잉크 냄새. 어렸을 때 할머니가 무쇠 솥에서 긁어 나한테만 몰래 주시던 누룽지 냄새.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려고 합니다. 무슨 색을? 20대 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르고 다니기도 했지만 이젠 매니큐어를 칠하면 손톱이 답답해서 호흡마저 가빠지는 느낌이라 여름에 발톱에만 칠하고 있는데.. 굳이 손톱에도 칠해야 한다면 지금도 화장대에 새것인 채로 서 있는 아주 연한 분홍장미색을 바르거나 지금도 울 조카 손톱에 재미삼아 그려주듯 빨간색과 노랑, 초록 따위로 점점이 꽃잎을 찍어 그리고 탑코트를 발라 나만의 네일아트를 시도할지도 모르겠다. ㅋㅋ
아..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주르륵 적어놓고 보니 대책없이 행복해져 절로 미소가 흐른다. 행복이란 이렇게 소박한 것이란 걸 깨닫게 해준 키드님의 옆구리 찌르기에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