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참 먹고 난 식곤증에 시달리다 졸음 쫒기의 일환으로 적어본다. -_-;; (다 쓰고 나면 부디 잠이 깨길..) 이제는 끝나버린 제9회 여성 영화제에서 본 마지막 영화 두 편. <스파이더 릴리>와 <스무살이 되기까지>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남은 표와 시간 분배와 보고 싶은 영화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영화를 고르다 보니 두 영화를 고르게 되었는데 영화의 느낌은 전혀 달랐지만 내눈엔 비슷한 코드가 감지되었다. 제목에도 적었듯이 나를 둘러싼 가족과 성장, 그리고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것.
이번엔 놓쳤더라도 나중에 개봉할 때 찾아보거나 (<스파이더 릴리>는 5월쯤 개봉한다는 후문^^) 어둠의 경로로 찾아볼 분들을 위해 이제부턴 more 기능으로 해야할 듯.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해보겠지만, 모든 영화 리뷰는 스포일러 요인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므로 알아서들 보시라. ㅋㅋ
<스파이더 릴리>의 두 주인공 샤오뤼(발음이 맞는지 벌써 가물가물... 영어 이름은 Jade였는데;;)와 다케코는 둘 다 이른바 '결손가정'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샤오뤼가 9살 어린 나이에 대뜸 다케코와 사랑에 빠진 건, 본능적인 둘 사이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까. 상처받은 사람들끼리는 묘하게 통하고 알아보는 그 놀라운 교감. 세월은 두 사람을 단절시키지만,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찌릿찌릿 전기파장 같은 교감이 오간다.
개인적으로 연애의 핵심은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이 더 잘산다더라.. 하는 말은 위로를 위해 구성된 거짓말이란 얘기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아, 이 한글 제목 정말 싫다. "Kissing Jessica Stein"으로 그냥 두거나 좀 멋지게 바꿔볼 것이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몸의 상태가 어떠하든 정신적인 면에서 유사한 성별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끼리는 소통이 훨씬 쉽고 공감도 빠르다. 여자들끼리, 남자들끼리 각각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유대와 공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사랑과 연애에 있어서도 나와 비슷하여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쉽지 않겠나.
그런데 둘의 사랑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케코의 가족. 가족의 굴레를 언제나 상기시키듯 다케코의 팔에 새겨진 '스파이더 릴리' 문신은 새길 때의 통증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실에 가깝겠지만 나는 문신처럼 다케코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언뜻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에 내포된 고통 또한 만만치 않은 가족의 멍에 때문에 다케코의 인생이 휘둘려지는 것이 너무도 슬프고 화나고 속상했다. 샤오뤼는 사랑의 기억과 표시로 문신을 새기길 원하지만, 다케코의 문신은 질기디 질긴 멍에 같은 가족에 대한 의무감과 죄책감의 상징이기 때문. 과연 다케코가 그 멍에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는 직접 영화를 보고 판단하시기 바람 ㅎㅎ
독립적인 어른인 듯하지만 아직은 진짜 어른이 아닌 다케코와 철부지 같지만 사랑에 관해선 누구보다 성숙한 마음을 지닌 소녀 샤오뤼의 동반 성장을 담은 듯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서 혼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서늘한 눈매와 시원시원 길쭉한 이목구비의 다케코와 인형처럼 올망졸망 귀엽고 깜찍한 샤오뤼의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 샤오뤼가 계송 흥얼거리는 Jasmine이라는 주제가도 구슬프면서 아름다워 좋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샤오뤼가 다케코에게 외쳤던 말 가운데 "사람을 잊는 건 어른이지, 아이는 사람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던 "나를 기억해줘"라는 말.
드라마든 영화든, 너도 나도 첫사랑에 목매서 발전이 없는 건 참 별로인데... ^^;; 그래도 첫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애틋한 거니까 뭐 특히 이 영화에선 감미롭게 아름다웠음.
배경은 과연 몇년도쯤일까.. 영화보는 내내 궁금했는데 세계사에 약한 내가 그걸 짐작해낼 수야 없는 것이고 암튼 프랑스에서 유태인이 차별을 받고 있고, 고등학교 내 재즈밴드가 줄곧 남자들로만 구성되다 처음으로 여학생 부원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학교에 회의가 소집될 정도이니 어지간히 옛날이긴 하다.
영화를 보며 처음 느낀 생각은, '여성 최초'라는 것의 무게였다. 지금은 그나마 자주 들리지 않는 말이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수없이 들었던 "최초 여성 합격자",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기업 이사 승진", "최초 여성 수석"....따위의 말들. 그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차별과 억압과 편견이 존재했는지, 우리의 수많은 "언니들"이 당당히 실력으로 지혜롭게 그 경계를 넘어서기까지 어떤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이 영화는 그 "여성 최초"의 순간을 단편적이지만 아기자기하고 흥미롭게 담고 있다.
이제 더는 "여자라서" 무조건 차별받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가족의 지나친 간섭과 무관심, 외모와 성별로 사람을 판단하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가뜩이나 괴로운 질풍노도의 시기 열여섯 살을 어렵사리 보내는 한나(프랑스어 발음은 안나인데!)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기랑 비교되는 예쁘고 날씬한 언니들, 말끝마다 살빼라고 구박하는 엄마, 도무지 도움이 안되는 무관심한 아버지까지, 한나에게도 가족은 "수시로" 짜증스러운 멍에지만 결국 푸근하게 기댈 수 있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 (가족에 대한 요즘 내 논리와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원!)
게다가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 쯤, 지나친 가족의 관심과 애정어린 호들갑이 남들앞에선 창피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지 않았나? 재즈밴드 오디션 결과가 나오는 날, 초조하게 기다리던 한나를 응원하겠다며 모조리 학교에 나타난 가족들을 수치스러워하며 결과도 보지 않고 집으로 끌고가는 한나를 보며 나 또한 초등학교 졸업식이 생각나 더욱 깔깔 웃어댔다.
8남매 장남의 첫딸의 초등학교 졸업식. "나름" 우등상을 받는다는 광경을 보기 위해 그날 학교를 찾은 우리 가족은 어마어마했다. 부모님과 두 동생을 비롯해,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아버지 두 분, 큰고모, 막내고모, 외갓집 대표로 막내이모, 사촌동생들까지... @.@ 눈이 녹아 질척대는 운동장 대신 각반에서 졸업식이 거행되는 바람에 교실 뒤까지 주르륵 늘어선 학부모들. 그 가운데 울 아부지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내가 우등상, 개근상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교실 앞까지 들어와 사진을 찍어대고, 식구들은 마구 박수를 쳐대고... 그때의 난 창피하고 민망해서 마룻바닥 아래로 꺼져버리고 싶었고 떼거지로 몰려온 친척들을 어지간히도 미워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때 상장 받고 돌아서다 찍힌 뾰루퉁한 표정의 사진도 소중하기만 하고 바쁜 일 다 팽개치고 첫 손녀, 조카의 하찮은 초등학교 졸업식엘 와주신 그분들의 애정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말이다. ㅎㅎㅎ
암튼 내가 이런 생각을 리뷰랍시고 영화 감상에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이 영화도 가족에 대해선 온정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않는데, 그것이 구태의연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상투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거대 유대자본의 횡포는 싫지만 이방인으로서 차별받는 유대인이란 정체성에 여성이라는 부분까지 가세되어 더욱 힘겨운 한나의 싸움에서 가족은 그야말로 든든한 "빽"이니까.
이 영화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한나의 "재즈 연주"!!! 원래 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에 대해선 무조건적인 동경과 애정을 쏟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나가 별로 뚱뚱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웠는데 콘트라베이스를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땐 완전 반할 정도! 한나에게도 본격적인 첫사랑이 예고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나의 첫사랑은 콘트라베이스인 것 같다. 집안 그 누구도 이해 못하는 아픔과 소외를 치유해주는 아름다운 첫사랑이라니.. 어찌나 부럽던지. 무작정 나도 콘트라베이스를 품에 안고 사랑하고 싶더라! *_*
그리고 "재즈에 대해선 무식한" 가족을 위해 한나가 나에겐 "비야 비야 비야 오지 말아라 장마 비야 오지 말아라 비야 비야 오자 말아라 우리 언니 시집 간단다...." 는 가사로 익숙한 이스라엘 민요(나는 어제까지 이 음악이 우리나라 민요인 줄 알았었다!)를 연주하고 아버지의 눈물 글썽이는 표정이 클로즈업 됐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흘렀다. 옆에 홀로 앉아 있던 젊은 엉아가 울다 웃다 정신 못차리는 나 때문에 좀 난감해 하는 듯 했음. ㅋㅋ
암튼 좌충우돌 한나의 성장기를 깔깔 웃음나게, 또한 눈물 핑 돌게 그린 이 영화를 보니 나도 열여섯 살 때가, 스무살 때가 마구 그리웠다.
참참참... <스파이더 릴리>를 볼 때도 거의 빈좌석이 없었는데 <스무살이 되기까지>는 완전 매진이었다면서 주최측에서 깜짝 이벤트로 선물을 나눠주었다. 물론 재수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대여섯 명 뽑아 주는 이벤트에 당첨될 리 없었지만 9회째인 여성영화제가 그토록 성황리에 매진을 기록하는 걸 보니 주최측이 아님에도 몹시 뿌듯했다. 내년엔 바야흐로 10주년째. 올해는 겨우 3편으로 마감했지만 내년엔 좀 더 미리미리 계획적으로 영화를 골라 좀 더 많은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