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9.01.30 이름 21
  2. 2009.01.24 사진 7
  3. 2008.12.01 제사 다음날 18
  4. 2008.11.20 연필이 좋다 19
  5. 2008.02.04 헤이리와 공동묘지 8
  6. 2007.11.16 신문 스크랩 6
  7. 2007.10.02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8
  8. 2007.04.04 문상 3
  9. 2007.02.01 내력 2

이름

삶꾸러미 2009. 1. 30. 16:20

어려선 내 이름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도보도 못한 희성은 아니어도 김, 이, 박, 최 같은 흔한 성씨가 아닌데다 놀림감이 되기 십상인 발음이고,
성에도 이름에도 죄다 받침이 있어서 부르기에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리 예쁜 이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성도 <평범>하고 유리, 혜선, 정주, 자영, 영선, 지영 따위의 예쁜 이름을 지닌 친구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씨 때문에 아마도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일가는 모두 학창시절 놀림을 받거나 똑같은 별명으로 불릴 운명일 것도 같다. 아무려나 성이야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름만은 좀 더 평범하고 예쁘게 지어주시지 그랬느냐고 어려선 할아버지를 꽤나 원망했었다.

8남매의 장남이신 울 아버지의 첫 아이다 보니 그 옛날에야 당연히 이왕이면 아들을 기대했을 것이고
임신한 엄마의 배 모양으로 보나 수월한 입덧으로 보나 아들이 틀림없다고 여러 사람들이 입을 모았기 때문에
덜컥 딸인 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를 비롯해 집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옛날 분이니 당연히 그러셨겠지만 할아버지는 첫 친손주가 계집아이라며 몹시 못마땅해하셨고 울 엄마가 몸조리 후 시댁에 돌아왔을 때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고 들었다.
계집아이라고 미워하신다니 당연히 손녀의 이름 따위는 지어주실 생각도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던 나의 부모님은 작명소에서 이름을 두어 개 지어받았고 <현경>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릴 작정으로 두분이서만 며칠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는데, 막상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가보니 할아버지가 벌써 손수 내 이름을 지어 신고를 마친 뒤였다.
부모님이 훗날 그 얘기를 내게 들려주신 걸 보면, 당시 부모님도 <현경>보다 현재의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인데 어쨌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 집에서 부르는 아명이 따로 있던 아이들도 더러 있던 시대였지만(예를 들어, 울 올케들은 신기하게도 둘 다 본명과 그냥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대로 정해졌다.
내가 태어난 다음해, 연년생으로 남동생이 태어났고 3년뒤에 또 생겨난 동생도 사내아이였는데, 할아버지는 그게 다 당신이 첫 손녀딸 이름을 잘 지은 덕분이라고 하셨다. ^^
본래 난초에는 대에 꽃이 하나밖에 안핀다면서 그 뜻을 담아, 딸은 하나만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내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연이어 남동생을 볼 수 있었다는 말씀이셨다.

할아버지의 작명이 실제로 염력을 발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동생이 하나쯤 있어도 좋았겠다 싶긴 해도 내 이름 덕분에 든든한 남동생들이 생겼다는 데야 나도 불만을 품을 순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흔하지 않은 내 이름이 뿌듯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작명소에서 받은 이름이라는 <현경>이 내 이름이었다면 지금보다 발음이 더 어려웠음은 물론이고, 내 주변 지인들 가운데 세 명이나 되는 현경들과 더불어 스스로 몰개성한 이름이라 여겼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어디 가서 처음으로 이름을 밝혀야 할 때나, 내 이름으로 음식점 예약 같은 것을 해야 할 때 어려운 발음 때문에 상대방과 혼선을 빚으면 마구 민망해져 순간적으로 나도 흔한 성씨에 쉽고 발음하기 편한 이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솟구치는 것은 사실이다. 왜 전화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성씨부터 십중팔구 <전>으로 잘못 알아듣는지 원!

아무튼 이제껏 살면서 나는 실제로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성까지 같은 사람은 단 한명도 발견한 적조차 없다)을 만난 적이 딱 한번밖에 없다. 학교 선배였던 그 사람 역시 독특하게도 성이 <계>씨여서 서로 이름표를 보며 쿡쿡 웃어댔는데, 내 이름과 유사한 발음의 이름은 내 주변에만 해도 수없이 많아 더러 내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독특한 내 이름은 정말이지 그리 흔하지 않다.
다만 놀라운 것은 박경리 선생의 작품에 내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지만 ^^ 내 성이 워낙 유별나서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하다.

내 이름에 각별한 애착이 들었던 건 아무래도 번역을 시작하고 난 다음이었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옮긴이로 책표지에 인쇄하게 되었을 때, 혹시 필명을 쓸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 본명을 쓰겠다고 대답했다. 어려선 혹시 이름을 바꾼다면 어떤 이름이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만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거나 세월과 유행에 따라 수시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 바뀌었던 반면, 번역을 시작하면서 필명을 따로 갖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멋진 필명을 지닌 분들을 내심 부러워하긴 하지만, 현재 내 이름만큼 나를 잘 드러내고 표현할 필명을 생각해낼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름이 너무 흔해서 번역가로 활동하며 하는 수 없이 필명을 만들어 써야 하는 지인들에 비하면, 성도 이름도 흔하지 않아 인상적인 느낌이라 번역가의 이름으론 딱이라는 칭찬을 더러 듣기도 하는 내 이름과 할아버지의 작명솜씨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본명에 비하면 블로그에 사용하는 닉네임 <라니>는 꽤나 흔하고 낯간지러운 느낌이라 뭔가 다른 이름을 생각해내고 싶었지만, 학창시절 친구들과 쪽지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부터 쓰던 애칭이라 그 역사가 20년도 넘다보니 더 친근하고 편한 다른 닉네임은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문득 어린시절에 들었던 수수께끼가 생각난다.
"분명 자기 것인데 자기보다 남들이 더 많이 쓰는 것은?"
물론 답은 <이름>.
나보다 남들이 더 많이 써주는 이름이니 처음부터 뜻도 좋고 부르기 쉽도록 공들여 지어야겠지만,
결국엔 이름의 가치를 만드는 건 본인일 수밖에 없다.
지금껏 쌓아온 이름값에 먹칠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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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삶꾸러미 2009. 1. 24. 22:52

나이든 어르신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나이들어 죽음을 반기는 사람이야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환자 이외는 아무도 없으리라 믿지만)
적극적으로 죽음을 대비하고 언급하며 자연스러운 수긍의 태도를 보이는 분들과
철저한 금기사항이나 불경스러운 일처럼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는 분들.
"오래살면 뭐하누. 내가 빨리 죽어야지 니들이 편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몸소 늙고 병들어 경험해보지 않고는 말이다.

절에서 흔히 여신도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여든여섯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는 부처에 대한 믿음이 삶의 중심이었고 실제 삶에서도 보살처럼 자식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베푸는 분이셨다. 불교든 기독교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극락과 천국엘 간다고 믿으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데는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암튼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우리 외할머니만큼 죽음을 자연스레 대한 분도 없었던 느낌이다.
"나 죽으면 꼭 화장해서 산에다 휘휘 뿌려라."는 외할머니의 말씀은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고
환갑 즈음에는 손수 수의를 장만해두었다가 볕좋은 가을날엔 가끔 샛노란 삼베 수의를 툇마루에 내놓고 거풍과 일광욕을 시키셨다.
처음엔 그게 수의인 줄도 눈치채지 못했다가 하필 내가 놀러간 날 툇마루에 놓여 있는 삼베옷을 만나게 되면 공연히 화가 났다. 인간이 나이들면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자손들 코앞에 죽음을 들이밀어 환기시키는 할머니의 태도가 야속했던 것 같다. 묘자리와 수의를 미리 장만해 놓으면 오히려 노인들이 더 장수한다는 속설도 있으나, 우리 외할머니는 장수를 바라며 수의를 장만해놓으신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냥 그 날을 당신이 손수 준비해두고 싶으신 듯했다.
중한 병환 때문에 이십여년이나 간수해온 수의를 정말로 입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또 자진해서 영정사진을 찍으라 하셨다.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색 철쭉을 배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 나의 사촌동생에게 찍으라고 하셨다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액자에 담겨 1년 넘게 대형TV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입퇴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를 뵈러 집에 갈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며 꽃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정겨움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날의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차마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손수 죽음을 꼼꼼히 준비하셨던 외할머니와 달리, 그보다 10년이나 먼저 돌아가신 우리 친할아버지의 경우엔 남은 가족들이 참 많이 허둥댔던 것 같다. 워낙 정정하셨다가 갑자기 쓰러지시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는 말 따위를 입에 올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여든 중반에 접어드셔선 예전보다 기력이 떨어지시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식사량이나 거동의 정도로 볼 때 우리 할아버지가 백살까지 거뜬히 사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무작정했다.
이북5도청에서 실향민들을 위한 묘지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들과 논의해 조부모님의 묘자리를 장만했지만 할아버지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신 노인들의 수의나 묘자리를 미리 장만하는 건 곧이곧대로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불효가 담긴 행동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우리는 여든을 넘기고 장수하시는 두분의 존재에 그저 감사할 뿐 머지않은 사별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일부러 생각을 거부했던 듯하다. 그저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며...
그러다 황망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린 당장 할아버지의 영정사진부터 고민을 해야 했다.
동네 사진관에서 찍으신 듯한 주민증 사진은 너무 마음에 안들고, 가족사진을 오릴 순 없는 상황이라 결국엔 칠순때 찍으신 기념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들어야 했다. 앓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루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초상을 치르는 일은 온 가족에게 충격이었고 기막힌 슬픔도 슬픔이지만 장례절차도 낯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친할머니때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할머니와 수십년 만에 다시 동침 파트너가 된 나는 할머니의 매끈매끈한 살결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행복을 최소한 몇년은 더 누릴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겨우 여섯달 만에 또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으신 할머니는 야속하게도 끝내 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우린 그때도 영정사진을 마련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고, 우린 또 15년도 넘은 너무 젊은 할머니의 낯선 사진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속앓이를 했다. 왜 예쁜 할머니의 모습을 미리 담아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

죽음을 대비하지 않는 성품도 유전인지 우리 아버지 역시 우리 앞에선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는 일이 거의 드물었고, 우리들 또한 아직 젊고 건강하시다고 굳건히 믿은 터라 언젠가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만 늘 병치레를 하는 우리 엄마보다 하루만 더 살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다. 그래야 자식들한테 부담을 덜 주면서 병든아내를 보필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어쨌든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가 대단히 위중한 상태임에도 우린 도저히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가 한달 가까이 이어지며 의사들이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자 집안 어르신들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 삼남매에게 넌지시 이르셨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기보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와 오래도록 병원생활을 하는 경우를 상상하며 고집스레 그에 대한 대비를 의논했다.
결국 아버지의 임종 후 우리는 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식구마다 디지털카메라를 사들여 그렇게도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데, 막상 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담은 독사진은  드물었다. 간혹 퍽 멋진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영정사진으론 사용하기 곤란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양복을 입은 모습의 여권사진을 쓰라고 조언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등산 나들이 차림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숱적은 머리는 반드시 등산모자로 가린 채로.

장례식장에서 다급히 집에 돌아와 내가 골라간 등산복 차림의 사진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인화지만 있었던 사진이라 확대하는 과정에서 많이 흐려졌고, 아주 최근의 모습은 아니라 나는 또한번 속앓이를 했다. 조카들 사진은 그렇게도 많이 찍었으면서 왜 아버지 사진은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물론 가장 멋진 모습의 아버지는 우리들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고인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 아버지, 그렇게 네번째 장례를 치르며 비로소 깨달은 듯하다.
이번에 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에 세라믹으로 사진을 붙여달게 되면서 또 다시 사진고민에 빠졌던 우리는(그나마도 영정사진으로 썼던 인화지 사진은 돌려받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옛날 디카파일부터 모든 사진파일들과 앨범을 다시 뒤져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드물었던, 산에서 찍은 아버지의 독사진을 이번에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새로 저장해둔 폴더의 날짜를 보면 2007년 7월 1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그건 분명 내가 컴퓨터 파일들을 뒤져 노트북으로 옮겨 장례식장으로 들고갔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 땐 그 사진을 고르지 않았을까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당시 그 사진을 본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슬퍼하느라 다들 경황이 없기는 했지만 노트북에 든 사진들을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같이 뒤졌던 것도 같은데;;;

암튼 화질이 그리 좋지도 않고 크기도 작아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살아생전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잘 담긴 도봉산 오봉 사진을 새삼 발견한 날 나는 슬피 울어야 했지만 그래도 많이 기뻤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제부턴 엄마 사진도 내 사진도 많이많이 찍어야겠다고.
독사진은 영판 쑥스러워 거부하던 것도 이젠 좀 덜해야겠다고.
아직 죽음을 대비하기에 이르다면 이른 나이지만 이왕이면 나는 준비된 상태로  언제일지 모를 내 마지막을 맞고 싶다.
남은 이들이 최대한 덜 허둥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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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다음날

삶꾸러미 2008. 12. 1. 15:58
그날은 몹시 추웠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친구들과 설악산 콘도에 놀러갔다 밤늦게 돌아온 크리스마스 이브,
이상스레 음산하고 어두운 집을 엄마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낮에 할아버지가 길에서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옮겼지만 위중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전하며 엄마는 병원에 가보겠다는 나에게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다. 
안절부절 다가온 크리스마스 새벽에 결국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열명도 넘는 가족들이 응급실 밖을 지켰지만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임종을 지켜본 건 장손인 큰동생과 막내동생 뿐이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 더욱 허망하고 슬펐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참 혹독하게도 추웠는데
13년이 흐른 뒤, 빨라진 음력 탓에 어젠 날씨가 너무 온화해 같은 날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온종일 기름내를 피우며 준비한 부침개와 전, 나물과 고기를 차려놓고 버글버글 모여든 가족들과 절을 올리며 이제 확실히 할아버지 기일은 슬퍼하는 날이 아니라 가족들의 즐거운 회합일임을 깨달았다.
이북식으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돼지고기 편육을 자르던 나도 다른 때보다 비계가 많아 부담스러워 보이는 부위가 딱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모양이라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제사 다음날이 피곤하고 뒷다리가 땡기는 후유증을 남기는 건 똑같지만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노동은 확실히 여유롭다.
어른들 얘기로는 3년은 지나야 제삿날이 돌아와도 서러운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3년만에 슬픔을 이기는 건 너무 매몰찬 것 같다.
언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당신들을 추억하면서도 눈물을 비치지 않게 되었는지 그것도 벌써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데 앞으로 몇년 더 지나면 아버지의 추억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또 미리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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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이 좋다

놀잇감 2008. 11. 20. 18:08

문방구를 사모으는 것은 꽤 오래된 나의 취미다.
오래 전엔 눈가가 달착지근 아련해지는 파스텔 톤의 편지지를 모으던 때도 있었고,
수첩류와 무지공책, 예쁜 볼펜, 스티커, 메모지 따위를 주섬주섬 사모으던 시기를 거쳐
요샌 뭐든 주제를 정해 온갖 문방구류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주제를 자전거로 정하긴 했지만 아직 '모았다'고 할 만큼의 아이템을 마련하진 못한 상태.
자전거를 장만해놓고도 게으름 탓에 제대로 타지 못하는 죄책감을 은근히 다른 소비 욕망으로 떠넘기려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자전거 그림이 들어간 문방구를 유심히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눈에 띈 물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출처: 텐바이텐 all rights reserved by gongjang

자전거 그림이 들어갔대서 무조건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자전거의 환경 지향적인 메시지를 담아 재생신문지로 흑연을 말아 연필을 만들었대고, 연필이 담긴 종이 케이스도 접착제 대신 실로 박았다는데 그 만듦새가 퍽이나 정성스러웠다.
사실 자전거 그림은 약간 성의가 없게 느껴져 내 취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풍은 아니지만 슬슬 휘갈겨도 잘 써지는 연필심의 부드러움과 연필깎이로 깎아놓은 돌돌말린 연필밥이 내 마음에 꼭 들어서 요샌 뭐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연필을 사용한다.

모름지기 연필은 연필깎이로 둘둘 돌려 갈아놓는 것보다는 일일이 칼로 약간 기름하게 깎아 세로 결을 살려놓아야 내 마음에 꼭 드는데, 이 연필은 나무가 아니라 칼날이 잘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앙증맞은 연필깎이도 하나 장만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연필깎이는 어디까지나 이 연필 전용이고, 나머지 연필들은 죄다 칼로 깎아쓰고 있는데 전동이든 수동이든 연필깎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내가 처음으로 손수 연필을 칼로 깎아 쓴 게 언제인지는 돌이켜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는 미제인지 독일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주물(혹은 무쇠?)로 된 투박한 수동연필깎이가 있었다. 원래 책상에 못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여서 아빠는 둥근 쇳덩어리 같이 생긴 그 연필깎이를 두툼한 나무토막에 못으로 고정시켜주셨는데, 우리 삼남매는 연필을 깎을 때면 양발로 그 나무토막의 양 귀퉁이를 누른 뒤 구멍에 연필을 꽂고 한손으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 다음엔 플라스틱으로 된 집 모양의 연필깎이도 생겨났던 것 같다. 연필을 꽂는 구멍에 집게 같은 것이 달려 그걸 젖히고 연필을 꽂으면 고정이 되기 때문에 이제 양발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졌고 한손으로 연필깎이 꼭대기를 지그시 누르며 손잡이를 돌리면 됐다.
물론 몇십원짜리 휴대용 연필깎이를 늘 필통에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요즘도 아이라이너 전용으로 사용되는 손가락마디 만한 소형 연필깎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소형이든 대형이든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적당히 연필이 깎였을 때 빼지 않으면 연필 한 자루를 금방 몽당연필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기계식 칼날이 싫기도 했지만, 나는 잘 드는 칼로 사각사각 연필을 돌려가며 나무를 벗겨내고 마지막에 심을 너무 가늘지 않게, 적당한 길이와 두께로 깎아놓아야 성에 찼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은 연필 다섯자루를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키 순서대로 넣어놓으며 몹시 뿌듯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연필의 질이 형편없었다. 심이 골아서(자꾸 떨어뜨린 탓이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도 툭툭 부러져 나가는 연필이 흔했고, 재질과 색깔이 다른 나무를 붙여놓은 연필을 깎다보면 결이 이상해 깎이는 게 아니라 나뭇결을 따라 쪼개져 흑연심이 뭉텅 드러나는 연필도 있었다. 겉으로는 HB라고 적혀 있어도 심이 너무 단단해 색도 흐리고 걸핏하면 공책을 찢어먹는 연필도 종종 만났다. 그러다 겉모습도 매끈한 독일제나 잠자리가 그려진 일제, 하얀 지우개가 끝에 달린 노란 미제 연필이라도 손에 넣게 되면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도 좋았지만 칼날 끝에서 부드럽게 밀려나가듯 깎이는 삼나무 재질(국산연필보다 심히 부드러운 나뭇결이 신기해 나중에 알아보니 삼나무라고 했던 듯)의 연필밥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었는지 모른다.
신문지를 떡하니 펼쳐놓고 바닥에 앉아 칼로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묘미는 나만이 즐겼던 것일까?
고모부가 출장에서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 세트엔 작은 연필깎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는 예쁜 색심까지 날카롭게 깎이는 게 아깝고 싫어서 언제나 칼로 색연필을 깎았는데, 특히 색연필을 깎고 나서 모인 연필밥은 너무 예뻐서 단숨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통에 모아두기도 했었다. +_+

하지만 연필 깎는 칼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게 된 건 분명 국민학교 고학년 때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전엔 연필깎이나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연필깎는 칼의 형태가 대단히 위험한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이었기 때문이다. 휘청휘청 얇고 너무도 예리해서 나에겐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으로 잘라(쓰다가 반쪽으로 잘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연필을 솜씨 좋게 깎아주던 최초의 손은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모든 재주에 능하셨던 한량 출신의 할아버지는 서예도 일품이고 한시도 읊으시고 심심풀이로 조각도 하셨으니, 그까짓 연필 정도 깎는 것이야 우스우셨을 게다. 그리고 짐작컨대 연필깎이에서 나오는 방정맞고 짤뚱한 연필 모양에 비해 약간 길쭉하고 늘씬한 느낌의 연필을 깎아내는 나의 취향은 할아버지한테서 비롯된 듯하다. 나와는 겨우 아홉살 차이가 나고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우리 막내고모가 깎아놓은 연필 모양도 내 솜씨와 비슷한 걸 어른이 된 후에 깨달었는데, 그땐 그게 고모를 우러러보던 어린 조카의 무의식적인 모방이라 여겼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 막내고모와 내가 둘 다 연필깎기를 제대로 배운 인물이 할아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너무 작아서 할아버지가 놓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은 언제나 요술을 부리듯 일정한 길이로 깎인 늘씬한 연필을 탄생시켰다. 도루코 면도날 다음으로 쓰인 칼은 역시 도루코에서 나온 문방구용 칼이었는데 칼날이 좀 더 단단하고 윗부분엔 알루미늄으로 덧씌워 손으로 잡고 쓰기에 편하게 생겨먹은 그 칼도 역시나 작아서,  할아버지댁에서 분가해 나온 부모님과 살던 저학년 때엔 엄마나 아빠가 내 대신 연필을 깎아주었던 것 같다. 삼남매의 연필을 깎아주기가 번거로워져서 부모님이 연필깎이를 장만했을 수도 있겠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일본에서 대거 수입된 앙증맞고 예쁜 샤프펜슬에 혹해 연필을 멀리했고 수학이 아닌 한 공책에 쓰는 필기도구도 볼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연필에 대한 추억이 덜하긴 하지만, 특활로 미술반 활동을 했으므로 누가 뭐래도 데생 연필은 질 좋은 나무와 흑연이 들어있는 걸 골라 정성스레 칼로 깎아 갖고 다녔고 심이 물러 잘 부러지는 4B, 2B 연필 하나를 제대로 사겠다고 큰 문방구를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때는 연필과의 완전 절교 시기였고, 나의 연필 사랑이 다시 불붙은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미국 의류회사의 서울 구매사무소라는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처음 사무실은 대단히 허름했는데
놀랍게도 메모지와 연필, 볼펜, 노트패드 같은 사무용품은 뉴욕 본사에서 보내준 것을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허영심이라 실소가 나오지만, 어쨌든 일년에 두세 번 한국에 들르는 사장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사무용품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까다로운 인간이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특히 사장이 하얀 지우개가 달린 노란 미제 연필로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품함엔 절대로 연필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인간이 일년에 쓰게 될 연필이 한자루나 될까말까 한데, 본사에선 분기별로 연필을 비롯한 사무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으니 참 웃기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사무용품 사물함에 들어 있는 갖가지 문방구류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회사 로고까지 인쇄해 넣은 전화 메모용 포스트잇도 좋았고, 대학때 즐겨쓰던 빅볼펜과 노란연필을 마음껏 쓰는 것도 좋았다. 
특히 팩스 비용 최소화를 위해 발신 팩스는 한꺼번에 타이피스트에게 타이핑을 시켰는데
그 전에 이면지에 초고를 쓸 땐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듯 다들 연필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짧은 영어로 통신문을 작성하려니 모두들 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답안을 작성하듯 정성을 들였던 게 아닐까. ^^
암튼 볼펜과 연필, 갖가지 크기의 노란색 메모패드, 각종 포스트잇은 집에도 가져다놓고 썼는데
그 회사를 관두고도 몇년동안은 그때 집어온 메모패드와 노란 연필을 아주 요긴하게 집에서 써먹었던 기억이 있다. ^^;

직장생활을 관두고 나서 만날 컴퓨터와 씨름을 하던 내가 다시 연필깎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역시 조카들이 생기고부터다. 우리 조카들은 넷 가운데 돌잡이에서 세 녀석이나 연필을 잡았을 정도로 아기때부터 연필을 좋아했고 나는 조카들이 해놓은 의미없는 낙서라도 그저 대가의 작품인 양 호들갑을 떨며 열심히 연필을 깎아 그들에게 바쳤다.

마분지에 연필. 정민공주 5세때 작품


그런 정성을 들이면 이런 그림도 간간이 하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언젠가 내가 기분전환 삼아 파마를 한 다음에 그려달라고 졸라서 얻은 건데, 나중에 정민공주가 유명한 화가가 되면 전시하려고 고이 간직해두고 있다. ㅋㅋ

암튼 나는 요즘 마냥 연필이 좋다.
조카들이 쓰다가 두고 간 동아니, 모나미니 하는 알록달록한 연필들이 벌써 죄다 몽당연필로 변해버렸지만 좀체 버릴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세살 된 조카의 손엔 몽당연필이 또 제격이기도 하고, 모나미 볼펜 몸통을 끼워 하나쯤은 꼭 들고 다니던 몽당연필의 추억 때문에라도 최대한 끝까지 써볼 작정이다.
물론 자전거 그림 뿐만 아니라 돌고래 무늬와 아무 무늬없는 나무색 연필, 단순한 느낌의 검정 연필도 기어이 사들였다.
검정 나무로 된 연필은 아마 또 칼로 연필을 깎아놓은 연필밥을 버리기 아까워할 것 같아 아직 구경만 하고 있다.

글씨체가 부끄러워 요샌 뭐든 손으로 쓰는 걸 두려워하게 되는데 사각사각 소리도 경쾌한 연필로는 연애편지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편지 보낼 연인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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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를 따라 문산쪽으로 얼마간 달리다 보면 통일전망대가 나타나는데, 그 근방은 언제부턴가
'통일동산'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은 헤이리 예술마을이니, 영어마을 파주캠프니 해서
꽤나 복잡한 곳이 되고 말았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고 볼 거리가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는 열성을 보이는 사람들은
예쁜 카페와 갤러리가 있고 책 전시장이며 멋진 건축물이 있다는 헤이리에 꾸역꾸역 참 많이도 찾아가는 듯하다.
나 역시 일년에 서너 번 이상 그들과 같은 길을 따라 달려가긴 하지만
언제나 내 목적지는 헤이리가 아니라 그 번듯한 '예술마을'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펼쳐져 있는
동화경모공원, 쉽게 말해 '공동묘지'다.
어찌된 경유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동화경모공원은 이북5도 출신의 실향민을 위해
그나마 고향인 이북땅을 바라보는 듯한 자리의 강가 언덕배기에 조성된 공원묘지였고
평안북도가 고향이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나란히 그곳에 누워계신지 13년째다.
그러니까 헤이리니 영어마을이니 해서 그 동네가 북적이기 이전부터 우리 가족은 간단한 먹을거리와
술을 싸들고 소풍삼아 공원묘지를 찾았다는 뜻이다.

어린시절엔 '공동묘지'라는 말이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다.
TV에서 <전설의 고향>을 할 시간이 되면 겁이 나서 채널도 잘 못 돌리는 겁쟁이였던 나는
무서운 이야기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동묘지'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하얀 유골이 굴러다니고 파란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며 어디선가 불쑥 머리를 길게 풀어헤진 소복입은
여자가 입가에 피를 흘린 채 나타나는 공포의 장소로만 인식했다.
그래서 가끔 '망우리 공동묘지' 앞을 지나가는 차라도 타고 있으려면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고
전국 어느 곳을 가나 만날 수 있는, 야트막한 산이나 언덕배기에 동그랗게 봉분을 올린 가족묘를 보고서도
무서움에 떨었던 것 같다.

이북 출신이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셨기 때문에 서른이 다 되도록 제대로 성묘란 걸 하러
공원묘지를 찾은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더욱 그런 편견이 자라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도 한식때, 추석때, 설날에 찾아갈 묘소가 생긴 뒤로는
죽음이 삶의 연장이듯 공동묘지도 그저 삶의 한 공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동그란 봉분이 모여있는 것만 보고도 무서움에 떨던 어린시절의 나와 달리
어린 조카들은 공원묘지에 줄지어 있는 봉분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고 메뚜기를 잡고
고모에게 술래잡기를 하자고 청한다.
처음 몇년은 성묘하러 갈 때마다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느라 다들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이제는 어른들도 소풍나온 사람들처럼 두 분 묘소 앞에 깔아놓은 자리에 앉아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 아버지,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 몇달 있다 또 올게요!"라고 큰소리로 인사하고는 돌아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우리 식구들에게 헤이리 예술마을은 난데없이 공원묘지 앞에 생겨난 '이상한 동네'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국이 묘지화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돈많은 예술인들이 돈자랑을 하듯 세운 공동체 마을이
드넓은 공원묘지 코앞이라는 사실에 아무렇지도 않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리고 최근엔 아버지를 그곳 납골당에 모셨으니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이야 '묘지'보다 '공원' 느낌으로 친근해졌음에도
헤이리에 놀러간다는 건 어쩐지 배신 같기도 하고
어차피 돈이 많아 끼리끼리 모여든 그곳 예술인들에게 비싼 입장료까지 내며 그들을 배불려주고 싶은
생각 또한 없기에 지금껏 나는 한번도 헤이리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

물론 헤이리를 마뜩찮게 여기는 건 나 뿐인듯
어제도 설날 성묘를 미리 당겨 공원묘지를 찾았더니, 헤이리 마당엔 사방에서 몰려든 차들이 빼곡했고
주변에 마련된 식당 마을에도 사람들로 버글거렸다.
그들은 모두 일찍이 삶과 죽음이 바로 이어지는 연장선 위에 있음을,
그래서 공원묘지 바로 옆의 아트갤러리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멋진 사진을 찍는 것은
마치 시신을 떠내려보내는 갠지스강에서 바로 그 물로 태어난 아기의 몸을 닦으며 신의 축복을 비는 것과
같은 행위임을 깨닫고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아니면 예술인 마을 바로 옆에 거대한 공원묘지가 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고 신경쓸 겨를도 없었기에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인지 문득 몹시 궁금했다.
어쩌면 공원묘지에 큰 의미를 두는 건 <전설의 고향> 세대인 나 같은 노땅에게나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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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스크랩

추억주머니 2007. 11. 16. 18:10
오래 전, 할아버지댁엘 가면 안방 아랫목의 할아버지 자리 옆에 늘 신문더미가 쌓여 있었다.
폐품  수집하는 날 학교에 내기 좋게 접어놓은 것도 아니고 신문 크기 그대로 몇달씩 쌓여있기 일쑤인
신문더미를 식구들이 돌아가며 타박을 해도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내 기억으론 신문을 두 종류나 보셨는데 (물론 둘 다 보수적인 논조의 일간지였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쓰시고도 큼지막한 둥근 돋보기를 손에 들고 앞장부터 맨끝까지 광고 포함 모든 기사를
훑으셨다.
문제는 그렇게 신문을 "방안에" 몇달씩 쌓아두었다가, 너무 많아지면 다락으로 옮겨 놓았다가
1년쯤은 지나야 폐지로 팔거나 폐품으로 내도록 허락을 해주셨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건 바로 할아버지의 열성적인 신문 스크랩.

할아버지는 신문에 실린 '유용한' 정보를 대단히 신뢰하셨고
삶의 지혜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쓸만하겠다 싶은 기사는 반드시 오려두었다가
'해당 인물'에게 건네며 당장 당신 눈앞에서 읽게 시킨 뒤 실천을 강요하셨다.

예를 들어 환절기에 "감기 예방법"이라는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나와 막내 고모를 불러다 앉혀놓고 그대로 하라고 명하시거나,
"학계에까지 침투된 고정간첩 비상" 따위의 기사는 학교에 계시던 우리 아버지에게 건네며 주의를 주시는 것이었다.
처음 우리는 시큰둥하게 오린 기사를 받아들고 읽은 뒤 건성으로 "네" 대답하고는 오린 신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나중에 그 기사를 내놓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므로 언제부턴가 나는 아예 할아버지가 오려주신 신문기사를 따로 공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가끔은 오래 된 그 신문 스크랩을 학교 숙제에 유용하게 써먹은 적도 있었다)

일요일마다 온 식구가 할아버지 댁에 가서 놀다가 점심,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건 참 좋았지만
내심 이번엔 할아버지가 누구를 불러다 신문스크랩을 내밀며 "잔소리"를 하실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애정과 신뢰를 가장 많이 받았던 막내고모는 할아버지가 신문 스크랩을 내밀면
꽥 소리를 지르며 그만 좀 하시라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나나 동생들, 우리 엄마, 작은엄마, 그리고 우리 아버지까지도 호랑이 할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워
"신문 스크랩 전달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냥 묵묵히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기사를 읽고나서
"소중히" 간직하는 체 접어 넣곤 했다.

그땐 신문의 논조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강박적인 신문 스크랩과 실천 강요가 참 짜증스럽기만
했고, 나머지 식구들 모두 워낙 그 순간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켜본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 전달"은 내가 서른살이 될 때까지도 그저 참고 견뎌야할
절차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툴툴거렸던
할아버지의 자식들 8남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똑같이 신문을 오려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읽어보라고 건네는
것을 "생활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셋째 고모는 신문을 3개나 구독하며 주식, 직장생활, 건강, 재테크, 웰빙... 수없이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사촌동생들과 그 배우자에게 나눠주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라고
강권하기에 이르렀다. 가끔은 그 정성이 우리집에까지 뻗쳐 "당뇨병 관련 특집 기사" 같은 것이 실리면
가족모임에 가지고 나와 우리 엄마한테 전달하기도 하신다. ^^

그뿐인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 사이의 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 역시
신문을 보다 가끔은 스리슬쩍 기사를 찢어 보관한다. ㅋㅋ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좌르륵 관련 기사와 정보가 수도없이 뜨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해두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로 내게 남을 것만 같다.
나는 아직 오려낸 신문기사를 누구에겐가 전달하는 정성까지 보이진 않고 있지만
내가 우리 고모들 나이가 되면 어쩌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커피 관련 특집 기사가 생각나
내다 놓으려고 꿍쳐 두었던 신문더미에서 좀 전에 후다닥 그 페이지를 찢어 책꽂이에 올려두며
내 모습이 우스워서 혼자 킥킥 웃었다. (아 참... 우유부단한 모녀는 아직도 신문구독 중단에 대한 결정을 못 내렸다 -_-;)

정리는커녕 그간 오리거나 찢어두기만 한 신문기사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지만
막상 버릴까말까 다시 읽어보면 슬쩍 있던 자리에 꽂아두게 된다.
역시 핏줄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못 속이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떠오르는데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익숙한 습관의 반복인지, 정말로 유전인자의 강력한 작용 때문인지
무지한 머리로 헤아릴 길은 없지만 아무튼 이런 것도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다.

예전엔 그리도 싫고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내 안에 아직 살아계신 할아버지의 숨결로 느껴지다니, 조금씩 철이 들고 있긴 한가 보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그저 "늙어감"의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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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적을 떼면 나오는 이른바 '원적'엔 저런 주소가 적혀 있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동 ***번지.
저기가 어딘고 하면 김소월의 고향인 영변(이제는 김소월보다 핵시설로 더 유명한 듯한!)에서 멀지 않다는데, 물론 나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고, 심지어 우리 아버지도 말로만 들었지 가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식솔들 데리고 만주땅으로 올라가 사업(?)을 벌이던 사이 태어나셨다가 난리통에 월남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북 출신이시고, 살아생전엔 절대 고향 땅을 밟지 못하리란 걸
한으로 여기셨던 두분 때문에 나는 정말로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은 꿈에도 통일"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정민공주보다 어렸을 땐 해마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할아버지가 나와 큰동생을 데리고 주섬주섬 음식을 싸가지고 문산행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좌석이 있는 객차엔 앉을 자리도 없어 마룻바닥 같은 것이 길게 깔린 짐칸에 탈 때도 많았던 완행열차의 종착역에서 내리면(지금은 경의선의 종착역이 문산이 아니라 도라산 역이라더라) 다시 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야했고, 임진각에서도 군인들이 보초를 선 철조망 앞까지 간 우리들은 작은 돗자리를 펴고 또 다시 북녘을 향해 술을 따르고 절을 했더랬다.
할아버지는 간단히 음복을 한 후 남은 음식을 보초 서는 군인들에게 나눠준 뒤
또 다시 손주들을 데리고 허름한 시외버스와 복작거리는 완행열차를 갈아타고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셨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거의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할아버지의 채근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고단한 행차를 나와 큰동생은 꽤 오래 별 투정 없이 따라다녔는데, 다녀와선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투덜거려도 결국 추석날이 돌아오면 기차 타러 가자는 할아버지의 꼬드김에 또 다시 선뜻 넘어가곤 했다.
기차를 타는 것도 매력적이었겠지만, 철조망 너머로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거나 때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시는 할아버지를 어린 마음에도 차마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은 아침에 차례를 지냈는데 굳이 임진각 철조망 앞에까지 가서 또 다시 성묘 대신 절을 하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못말리는 대신, 같이 따라나서진 않는 것으로 나름대로 반항을 했기 때문이다. ^^

나와 동생들이 머리가 굵어져 추석마다 고생스럽게 경의선 열차를 타고 임진각으로 떠나던 할아버지의 성묘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한 뒤엔 다시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그 임무가 넘겨졌고, 차츰 기차 대신 자동차로, 임진각 대신 행주산성으로, 교통수단과 행선지가 바뀐 우리 할아버지의 간이 성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었다.

몇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이 온종일 생방송으로 이어지던 날 나는 당연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대중까지도 빨갱이라며 치를 떨게 싫어하시던 할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셨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몹시 궁금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를 둔 아들인 우리 아버지는 그날, 북한에 얼마나 돈을 많이 퍼다주고 저렇게 요란한 쇼를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퍽이나 못마땅해 하셨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햇볕정책과 북한에 '퍼다주기'를 비판하지만
나는 현재 북한 청년들의 평균신장이 165센티미터를 겨우 넘을까말까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듯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의 식량현황이 그저 안타깝기에 어떻게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생색내기든 아니든 북한주민들에게 쌀 한 톨이라도 더 배급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그렇게 지원한 자원과 식량은 절대 북한 주민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 권력층의 배를 더욱 불리고 군비확장과 핵시설에 투자될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렇게 빼돌려지고도 남은 식량은 결국 죽어가는 '인민'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겠나? -_-''
감상적인 온정주의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제3세계의 가난한 난민과 굶주린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선교단을 보내고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정작 휴전선 너머에서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나 탈북자들을 나몰라라 하는 인간들은 위선자나 다름 없다고 본다.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체제가 다르고 테러를 지원하는 군사독재국이고 핵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핵으로 가장 크게 전세계를 위협하는 나라는 사실 사방에 핵잠수함을 띄워놓고 있는 미국이 아니던가?

오늘 또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걸어 넘어 북한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떠올렸고, 과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원은 통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국적을 가졌고 한국말은 몇마디 하지도 못하는 하인스 워드 같은 사람까지도 한 핏줄이고 '동포'라고 아우르는 마당에, 같은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같으며 커다란 스포츠 행사 때마다 한반도 기를 달고 함께 출전하면서 남북을 서로 잃어버린 자기네 땅이라고(한국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잠시 휴전 중이라잖아!) 우기는 두 나라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왕래하고 쌀과 돈을 최대한 공유하며 살면 왜 안되는데?
 
물론 남이든 북이든 탐욕스러운 놈들은 더욱 많이 가질 테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테지만(지금은 안 그런가 뭐?) 최소한 남북 청소년들의 평균신장 차이라도 덜 벌어지지 않겠나 말이다.
먹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고 굶으면 벌컥 화가 나는 나로서는 전체적으로 못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남한 또래 아이들보다 한뼘 이상 키가 작은 북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의미에서 또 오늘 뽈록한 김정일의 배를 보니 버럭 화가 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짐작하듯 아직도 통일은 요원한 일일 테고
더 많은 이들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 만남으로 진정 '인민'과 '국민'을 위해 뭔가 소중한 결실이 하나라도 더 맺어지길 빌 뿐이다.
그러다 보면 금강산과 개성공단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대신 내 살아 생전에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땅을 한 번 밟아볼 수도 있지 않겠나.

횡설수설... (쓸데 없이 글이 길긴 또 왜 이렇게 기냐..헐)
두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본 나의 어지러운 생각이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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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

삶꾸러미 2007. 4. 4. 03:14

아닌 척 잊고 살지만, 죽음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매번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배고파 죽겠네, 신경질 나 죽겠네, 짜증 나 죽겠네,
심지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따위의 엄살스러운 죽음과 다른 진짜 죽음.
말로는 오늘 내일 당장 사고로 죽을 지 모르는 게 현대인의 삶이라고 늘 떠들어대지만
내심으론 당분간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떠밀어내며 살다가
덜컥 부음을 듣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면서 아득한 느낌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익숙해진다는 것의 동의어이기도 한 것 같다.
어려선 장의차만 보아도,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만 보아도 섬뜩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고
'월하의 공동묘지',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괴담 시리즈가 연상되었다.

제법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문상을 갈 일이 생기면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는 건 도저히 못할 일이었던 것 같다.
간신히 음료수 정도나 마시거나 그것도 그냥 들고 있다가 가방에 넣어오거나
그냥 살며시 테이블 아래 놓고 나올 정도로, 나는 죽음과 관련된 그 어떤 것과도
단절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때 본격적으로 초상이라는 것을 치르면서
비로소 죽음도, 죽음의 의식도 그저 삶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다.
온종일 꺼이꺼이 목놓아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 떠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도 어느 순간이 되면 허기가 느껴져 육개장에 밥을 말아 입에 퍼넣다 그런 내가 또 혐오스러워져서 또 눈물이 나고, 넋나간 듯 주저 앉아 있다가도 또 아는 얼굴이 눈에 비치면 가서 인사도 하고
상복 옷고름에 김치국물 묻혀 가며 음식과 술도 나르고,
문상객들 뜸해진 새벽이면 고인의 영정 앞에서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하고...
그런 일들을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어려선 공동묘지는 무조건 으스스한 곳이라 여기고, 혹시나 국도변을 지나다 봉분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을 보면 언짢은 듯 시선을 피했건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합장해 모시고 10여년 째 성묘 다니는 공원묘지는 이제 우리 가족에게
단체로 찾아가는 나들이 장소처럼 친근하기만 하다.
두분이 생전에 다시는 못 가보신 이북 땅 대신에,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돗자리를 넓게 펴고 절부터 올린 뒤, 소풍객들처럼 우르르 둘러 앉아 음복하고 가져간 과일과 음식 나눠 먹고 담소를 나누면, 조카들은 신나게 봉분 사이를 뛰어다닌다. 

이처럼 개인적인 경험으로 죽음과 친근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현재에 맞이하는 죽음은 단번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차츰 문상 갈 일이 많아지는 걸 보면, 내 나이가 실감되기도 하는데
이번엔 친구 동생의 부음이라 더욱 허망했다.
장례식장엘 다녀오고 나면 며칠은 신변 정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의 습관이고 보니
요 며칠은 또 유언장 쓰듯 내 삶을 정리하느라 청승을 떨게다.
그 호들갑이 다만 며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여튼 그 며칠이 지나고 나면 슬며시 다시 죽음을 떠밀어 내고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겠거니 하련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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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력

추억주머니 2007. 2. 1. 23:36
찍어놓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닮은 모녀나 모자, 부녀, 부자를 보면
유전자의 힘은 참 무섭고도 놀라운 것이로구나 느끼게 되는데
단순히 생김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가족간에 하는 행동까지 똑같다는 걸 깨닫게 될 때는,
시대와 삶의 질이 달라진 듯해도 결국 인생은 핏줄을 매개로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른 집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은 그렇다는 얘기다.
생김새는 별로 집안 내력 따질 만큼 닮은꼴이 아닌데(내가 키 작은 거랑 눈 나쁜 거 말고 다른 생김새도 아부질 닮았다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습관이나 행동은 어느 순간 놀랍도록 세대간의 동일함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사례 1)
우리 친할머니는 나른한 오후쯤 가만히 앉아서 꾸벅꾸벅 조시는 일이 많았는데
베개 꺼내드리고 좀 누워 주무시라고 하면 한사코
"나 안 졸리다"고 손사래를 치셨고, 억지로 이불이라도 덮어드리면 곧장 박차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셨다.

나이 드니 정말로 잠이 준다고 투덜대시는 울 아부지,
나른한 오후가 되면 꼭 TV 앞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조시는데
요즘처럼 추운 날엔 감기 걸리니 잠깐이라도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내가 잔소리를 하면
이상하게도 방에 들어가면 잠이 달아난단다.
꾸벅꾸벅 졸다가 정작 누우면 잠이 달아나는 것이 노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여길 수도 없는 것이, 울 엄마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하면 아예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낮잠을 주무시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만의 모전자전이란 말인가?

사례 2)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한량의 삶'을 사신 분이라 할머니가 고생을 무던히도 하셨고, 장남인 울 아부지는 대단한 효자였음에도 당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할아버지는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재주가 참 많으신 분이어서
서예, 그림, 한시(쓰기 뿐만 아니라 "처엉~~~~~산~~~~~~~~~~~~~~~~~~~이 어쩌고.."하는 한시 읊는 솜씨도 참 구성지셨다), 애완 조류 키우기, 화분 가꾸기 같은 일에 탁월하셨다.
특히 이웃에서 죽어가는 화분을 버리려고 내놓거나 할아버지께 맡기면 기필코 살려내는 '신의 손'에 가까웠다. *.* (그 재능이 나에겐 이어지지 않음이 안타깝다 ㅠ.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작은 화분에 키우는 무화과 나무에서 해마다 토실토실한 무화과를 '수확'해 우리도 맛을 볼 수 있게 하실 정도였으니까..

반면에 우리집은 늘 화분이 죽어나가는 집이었다.
아부지가 직장생활 하시는 동안에 받아온 값비싼 난 화분이나 분재는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빈 화분만 남겨지기 일쑤였고, 정년퇴직 직후 선물받은 각종 화분도 다 죽였을 거다.
그래서 역시 울 아부지는 오종종한 생김새부터 할아버지(옛날 분치고는 키도 크고 멋지게 생기셨다!)랑 닮은 부분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아부지가 본격적으로 화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 둘 씩 집에 초록 식물을 늘려가더니, 해마다 한식 때 성묘 다녀오는 길에 사온 화분들이 나날이 번창해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죽어나간 화분은 전적으로 엄마와 내 "악의 포스" 때문이었음 증명하듯,
아부지는 내 작업실에서 죽어가던 산세베리아도 살려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고는 거실 한 귀퉁이에 화분들을 "모셔놓고" 손주들이 뛰어다니다 잎이라도 다칠라치면 버럭~ 화를 내셨던 울 할아버지처럼, 아부지도 거실 한 귀퉁이에 줄지어 세워놓고 달력에 날짜 표시해가며 물주고 키우는 화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카들이 놀러오면 녀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혹시 애지중지하던 화분이라도 쓰러뜨릴까봐 전전긍긍하신다. -_-;;
올 한식엔 또 새 화분을 몇개나 사자고 하실까...

사례 3)
홍시 얘기를 할 때도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유사함을 적은 적이 있는데,
참외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는 참외를 참으로 좋아하셨고, 외출했다 돌아오셨거나 야외로 소풍 같은 걸 갔을 때 참외를 드시고 싶은데 과도가 빨리 준비되지 않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손으로 참외를 퍽~ 쳐서 깨뜨려 껍질째 드시기도 했더랬다.
일제 강점기에 쬐끄만 일본 순사들이 '6척 장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우리 외할머니가 그렇게 크고 긴 손으로 참외를 쩍 잘라 나에게도 한 쪽 주시면, 난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

과일을 깎아 대령하는 걸 차마 못 기다릴 만큼 참외에 대한 탐닉이 강한 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
참외는 내가 별로 좋아하는 과일도 아니지만 (먹게 되면 속 다 파내고 먹는데, 울 엄만 그럼 무슨 맛이냐!고 막 퉁박이다), 내가 껍질 벗긴 참외를 작게 자르느라 뜸을 들이면, 대뜸 "난 자르지 말고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셨더랬다. ㅋㅋ
그나마 당뇨 발병 후엔 하나를 다 통째로 내놓으란 소린 못하고, 절반만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시며 "역시 참외는 손으로 먹어야 제맛"이라고 중얼거린다.

참외 탐닉의 내력은 이상하게도 딸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큰 동생에게 흘러갔고, 그 녀석도 외할머니, 엄마 닮아서 참외를 몹시 좋아하는데
내가 예쁘게 과일 깍는답시고 참외를 조각조각 반달썰기하면 막 화를 낸다.
먹을 게 없다나 뭐라나... -_-;;
그러면서 자기도 통째로 반쪽 내놓으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여름 참외철이 되서 큰동생네가 놀러오면 장유유서고 뭐고 없다.
얼른 참외를 깎아 울 엄마 반쪽, 큰 동생놈 반쪽 먼저 손에 쥐어주고
그 다음에 먹기 좋게 한 접시 잘라 아부지께 드리는 순이다. ㅋㅋ
 
사례 4)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야 하는 버릇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들 방학숙제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암튼 우리 집 삼남매는 어린 시절 방학숙제마저도 개학이 코앞으로 다가와야만,
그것도 급기야 부모님께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고 혼이 난 다음에야 전전긍긍 밤샘작업으로 개학 전날까지 가까스로 마치는 부류였다. ㅜ.ㅡ;;
그런데 문제는 방학 내내 배짱좋게 놀다가 해가는 숙제이니 '대충대충' 시늉만 하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소심함과 완벽주의 탓인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다.
한달이나 두달치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주제에, 날씨 좀 틀리면 어떻다고 지난 신문을 죄다 뒤져 일일이 확인하는 식이니 시간이 오죽 더 많이 걸릴까.
내 경우는 그림이나 글짓기, 만들기 숙제도 심혈을 기울여야 직성이 풀렸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숙제를 다 해갔던 것 같다. ㅎㅎㅎ

2월 1일 개학을 하루 앞둔 어젯밤, 조카 정민공주네가 집으로 쳐들어(!) 왔다는 전화가 왔다.
ㅋㅋㅋ 역시나 방학숙제 때문이었다.
방패연과 꼬리연을 만들어 가야하는데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고,
동시를 지어 꾸미는 숙제엔 컬러 프린터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일기는 그나마 미리미리 다 써두었으니, 어쩌면 제 아빠나 삼촌, 고모보다 훨씬 훌륭한 조카였지만, 동시 꾸미기 숙제를 하면서 드러난 성격은 놀랍게도 판에 박은듯이 고모와 똑같았다.
이미 다 지어온 동시를 세 편이나 한글 프로그램에 앉히고
각종 그림으로 시화를 꾸미는 것이 숙제인 모양인데, 정민공주는 한글97 그리기 마당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으면 절대로 대충 아무거나 선택하지 않았고....
인터넷 이미지를 다 뒤져서라도 결국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냈다.
울 올케의 짐작으론 '타이핑만 하면' 되니 금세 끝날 숙제였지만, 실제론 동시 한 편에 시간이 30분도 더 걸렸고, 결국 조카는 시간도 없는데 꾸물거린다는 제 엄마의 꾸지람과 호통에 결국 눈물을 보였으며, 공주의 방학숙제는 밤 11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

오밤중에 숙제를 끝내놓고도 고모랑 더 놀다 가지 못해 안달하는 조카들을 내쫓다시피
집으로 보낸 뒤, 엄마가 한 말씀 하셨다.
"쯧쯧쯧.. 어떻게 방학숙제를 개학 전날까지 밤새다시피 해가는 것까지 집안 내력이라니..."

내가 <내력>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였다. ㅎㅎ
(사례 하나 추가했다. 이것들 말고도 더 많지만.. 너무 길어지면 지루할 테니까..^_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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