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선 내 이름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도보도 못한 희성은 아니어도 김, 이, 박, 최 같은 흔한 성씨가 아닌데다 놀림감이 되기 십상인 발음이고,
성에도 이름에도 죄다 받침이 있어서 부르기에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리 예쁜 이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성도 <평범>하고 유리, 혜선, 정주, 자영, 영선, 지영 따위의 예쁜 이름을 지닌 친구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씨 때문에 아마도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일가는 모두 학창시절 놀림을 받거나 똑같은 별명으로 불릴 운명일 것도 같다. 아무려나 성이야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름만은 좀 더 평범하고 예쁘게 지어주시지 그랬느냐고 어려선 할아버지를 꽤나 원망했었다.
8남매의 장남이신 울 아버지의 첫 아이다 보니 그 옛날에야 당연히 이왕이면 아들을 기대했을 것이고
임신한 엄마의 배 모양으로 보나 수월한 입덧으로 보나 아들이 틀림없다고 여러 사람들이 입을 모았기 때문에
덜컥 딸인 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를 비롯해 집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옛날 분이니 당연히 그러셨겠지만 할아버지는 첫 친손주가 계집아이라며 몹시 못마땅해하셨고 울 엄마가 몸조리 후 시댁에 돌아왔을 때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고 들었다.
계집아이라고 미워하신다니 당연히 손녀의 이름 따위는 지어주실 생각도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던 나의 부모님은 작명소에서 이름을 두어 개 지어받았고 <현경>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릴 작정으로 두분이서만 며칠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는데, 막상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가보니 할아버지가 벌써 손수 내 이름을 지어 신고를 마친 뒤였다.
부모님이 훗날 그 얘기를 내게 들려주신 걸 보면, 당시 부모님도 <현경>보다 현재의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인데 어쨌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 집에서 부르는 아명이 따로 있던 아이들도 더러 있던 시대였지만(예를 들어, 울 올케들은 신기하게도 둘 다 본명과 그냥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대로 정해졌다.
내가 태어난 다음해, 연년생으로 남동생이 태어났고 3년뒤에 또 생겨난 동생도 사내아이였는데, 할아버지는 그게 다 당신이 첫 손녀딸 이름을 잘 지은 덕분이라고 하셨다. ^^
본래 난초에는 대에 꽃이 하나밖에 안핀다면서 그 뜻을 담아, 딸은 하나만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내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연이어 남동생을 볼 수 있었다는 말씀이셨다.
할아버지의 작명이 실제로 염력을 발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동생이 하나쯤 있어도 좋았겠다 싶긴 해도 내 이름 덕분에 든든한 남동생들이 생겼다는 데야 나도 불만을 품을 순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흔하지 않은 내 이름이 뿌듯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작명소에서 받은 이름이라는 <현경>이 내 이름이었다면 지금보다 발음이 더 어려웠음은 물론이고, 내 주변 지인들 가운데 세 명이나 되는 현경들과 더불어 스스로 몰개성한 이름이라 여겼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어디 가서 처음으로 이름을 밝혀야 할 때나, 내 이름으로 음식점 예약 같은 것을 해야 할 때 어려운 발음 때문에 상대방과 혼선을 빚으면 마구 민망해져 순간적으로 나도 흔한 성씨에 쉽고 발음하기 편한 이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솟구치는 것은 사실이다. 왜 전화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성씨부터 십중팔구 <전>으로 잘못 알아듣는지 원!
아무튼 이제껏 살면서 나는 실제로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성까지 같은 사람은 단 한명도 발견한 적조차 없다)을 만난 적이 딱 한번밖에 없다. 학교 선배였던 그 사람 역시 독특하게도 성이 <계>씨여서 서로 이름표를 보며 쿡쿡 웃어댔는데, 내 이름과 유사한 발음의 이름은 내 주변에만 해도 수없이 많아 더러 내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독특한 내 이름은 정말이지 그리 흔하지 않다.
다만 놀라운 것은 박경리 선생의 작품에 내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지만 ^^ 내 성이 워낙 유별나서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하다.
내 이름에 각별한 애착이 들었던 건 아무래도 번역을 시작하고 난 다음이었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옮긴이로 책표지에 인쇄하게 되었을 때, 혹시 필명을 쓸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 본명을 쓰겠다고 대답했다. 어려선 혹시 이름을 바꾼다면 어떤 이름이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만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거나 세월과 유행에 따라 수시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 바뀌었던 반면, 번역을 시작하면서 필명을 따로 갖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멋진 필명을 지닌 분들을 내심 부러워하긴 하지만, 현재 내 이름만큼 나를 잘 드러내고 표현할 필명을 생각해낼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름이 너무 흔해서 번역가로 활동하며 하는 수 없이 필명을 만들어 써야 하는 지인들에 비하면, 성도 이름도 흔하지 않아 인상적인 느낌이라 번역가의 이름으론 딱이라는 칭찬을 더러 듣기도 하는 내 이름과 할아버지의 작명솜씨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본명에 비하면 블로그에 사용하는 닉네임 <라니>는 꽤나 흔하고 낯간지러운 느낌이라 뭔가 다른 이름을 생각해내고 싶었지만, 학창시절 친구들과 쪽지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부터 쓰던 애칭이라 그 역사가 20년도 넘다보니 더 친근하고 편한 다른 닉네임은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문득 어린시절에 들었던 수수께끼가 생각난다.
"분명 자기 것인데 자기보다 남들이 더 많이 쓰는 것은?"
물론 답은 <이름>.
나보다 남들이 더 많이 써주는 이름이니 처음부터 뜻도 좋고 부르기 쉽도록 공들여 지어야겠지만,
결국엔 이름의 가치를 만드는 건 본인일 수밖에 없다.
지금껏 쌓아온 이름값에 먹칠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