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에 해당되는 글 1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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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1.20 옛날 이야기 6
  3. 2011.09.22 오래된 물건 12
  4. 2010.10.31 이산가족 7
  5. 2010.10.29 생선가시 2
  6. 2010.03.29 야로가 있다 10
  7. 2010.01.21 방학 14
  8. 2009.09.15 늙음에 대하여 4
  9. 2009.08.10 국수 18
  10. 2009.05.10 진지 17

포도

추억주머니 2013. 9. 16. 16:52

포쇄에 이어 포도 포스팅. 좀 웃기다. ^^;

아무튼...

 

 

주택을 개조한 연희동 커피집에 갔다가 담벼락에서 발견한 포도넝쿨. 만지지 말라고 눈으로만 감상하라고 옆에 팻말이 적혀있었다. 사람들이 가짜인줄 알고 자꾸 만지나? 암튼 알알이 익어가는 앙증맞은 포도송이를 보며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마침 그 옛날 마당 넓고 부엌 드나들기 엄청 불편한 한옥집 살던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당신 주장으론 평생 열 가지도 넘는 직업을 가져봤다고 하셨지만 가족들이 평가하는 할아버지는 그냥  경제적으론 무능력한 '한량'이셨다. 만주에서 여각, 부산에서 양계장... 등등의 무용담을 듣다보면 뭘 해도 죄다 끝엔 말아먹은 이야기. ㅋㅋ 하지만 그렇게 전해들은 이야기 말고 어린 내 눈으로 관찰하고 경험해 서른 무렵까지 가까이서 지켜본 할아버지의 인상은 좀 무섭고 완고하고 보수적인 마초이되, 아이들을 예뻐했고 서화에도 능했고 손재주가 좋았으며 특히 원예에 일가견이 있으셨다. 어린시절 할아버지댁 마당엔 사시사철 꽃들이 피어났고 옥수수랑 피마자를 수확한 기억도 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포도나무. 집앞 평상 위로 네모나게 쇠 기둥을 올려 여름내 포도덩굴이 그늘을 드리우다가 어느덧 작은 포도송이들이 매달려 익어가기 시작했는데, 취학전이던 내가 할머니 무릎을 베개 삼아 평상에 누워 올려다보며 포도 익기를 기다린 게 딱 요맘때였나보다. 혹시라도 키가 닿는 곳에 매달린 포도송이는 조바심에 못기다리고 연보라색 정도 되었을 때 따먹어보기도 했는데, 그럼 어찌나 시고 떫던지! 뒤쪽으로 안보이는 데서 딱 한알 따먹어도 할아버지는 대번에 알아차리곤 혼을 내셨다. 포도송이 가지에 상처나면 다른 포도알도 병든다고.  그렇지만 징징 울며 혼이 난 뒤 열흘쯤 지나 완전히 익었다 싶은 포도송이를 할아버지는 쪽가위로 똑 잘라 내게 안겨주었다. 알도 성글고 송이도 작은 포도가 한꺼번에 다 안익고 한송이씩 천천히 익는 게 어린마음에 어찌나 원망스러웠던지...

 

추억은 맛과 냄새로 각인된다더니만, 포도덩굴을 보자마자 어려서 설익은 포도를 몰래 따먹었을 때의 시큼떨떨한 맛부터 잘 익었어도 요즘 포도와 비교하면 당도가 상대도 되지 않는 새콤한 포도의 맛이 입안에 감도는 듯했다. 내가 달기만 한 과일(수박, 참외, 배, 멜론, 망고 따위;)은 별로 안좋아하고 새콤달콤한 과일에 탐닉하는 건(포도, 귤, 자두, 사과 중에서도 홍옥과 아오리;;) 어려서 길들여진 입맛 탓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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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추억주머니 2012. 1. 20. 21:53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전해 해주시던 이야기들이 나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일합방되던 해와 그 이듬해 이북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만주 생활을 거쳐 한국전쟁을 겪고 90년대까지 사신 두분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개인의 역사로 지니고 계셨다. 물론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다 그러했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젊어서 기운이 장사라 단오날 씨름대회에서 이겨 황소를 탔다는 이야기, 할머니가 꽃가마 타고 몸종까지 데리고 시집오던 이야기, 손기정 옹이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뜀박질을 정말 잘해서 노상 심부름을 시켜먹었다는 이야기, 만주에서 여각하며 돈을 막 궤짝으로 벌어들였는데 밤마다 돈 세기가 싫어 큰고모 둘이 서로 미뤘다는 이야기,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다른 사람들처럼 집 살 생각은 안하고 곧 고향 돌아갈 거라 여겨 그 많은 식구가 여관에서 지내며 갖고 온 돈을 다 탕진했다는 이야기, 결국 평생 한량으로 사신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광주리 이고 나가 생선장수를 하며 생계를 꾸렸던 고생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신 덕분에 서른살 무렵까지 두분의 옛날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으며 나는 우리 조부님 세대가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드라마틱하기는 마찬가지다. 두분 역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열살 무렵 전쟁통에 피난살이 했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라디오와 전축에 이어 흑백TV와 컬러TV, 자동차, 컴퓨터 따위의 등장을 지켜보셨다. 젊어선 지금은 사라진 전차를 타고 다니며 통학 및 데이트를 했다고 하고, 서울이라도 동네가 높아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부모님은 결혼 이후에도 한참 물을 지게로 길어다 먹고 살았다고 전한다. 또 울 엄만 공병호 타자기라나 뭐라나 해서, 국내에서 최초의 국가공인 타이피스트 자격증을 딴 몇 명에 속한 덕분에 일터에서 콧대높은 '미쓰 리'로 불리며 그 옛날 출산휴가와 복직을 거듭하며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10년도 넘게 검찰청엘 근무했다고 들었다. 타이피스트들이 서류를 타이핑해주지 않으면 사건을 못넘긴다나 뭐라나. 그때 엄마의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위쪽에 '후까시'를 잔뜩 넣어 부풀리고 아랫머리를 밖이나 안으로 살짝 꼬부려 '고데'(일명 '소도마끼'라고 하던가?-_-;)를 한 모습이다. 그땐 일주일에 한번 머리를 감고 월요일 아침 일찍 미장원엘 가서 그 머리를 하고는 얌전히 자면서 일주일을 버텼다나! 

엄마는 옛날부터 TV를 보다가는 뉴스에 얼굴을 비치는 유명 정치인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그때는 '새파란 검사보'였다는 둥, '부장검사'였다는 둥 알은체를 했다. 막내 낳고 퇴직을 했으니 일을 관둔지가 4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그때 검찰청 동료 아줌마들과 아직도 연락하고 만난다.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국가정책을 무시하고 셋이나 애를 낳았다며 주변의 눈치를 꽤나 받았다는데, 엄마는 막내를 낳아 아들이 둘 되니까 그제야 마음이 턱 놓이더라고 했다. 이왕 산아제한 정책 무시한 거 딸 하나 더 낳지 그랬느냐고,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는 계속 툴툴댔다. 아들들은 다 소용없고(!) 딸 하나는 너무 불리해!

실제로 어린 시절 내 친구들은 형제들이 대부분 많아서 보통 네다섯은 되었다. 제 밥 그릇은 지가 알아서 쥐고 태어난다면서. 그런 친구들 집에 가보면 우리 할머니가 내 이름 부를 때 고모들 이름을 먼저 두어번 부르고 나서야 성공하듯, 친구네 엄마도 자식들 이름을 부를 때 몇번씩 헷갈려했다. 울 엄만 그러는 일 없던데. 어쨌든 얼마전 <무한도전>에서 추억의 골목놀이가 종류별로 나오며, 맨 마지막에 엄마들이 저녁밥 먹으라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들여가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짠했다. 요즘엔 그렇게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없고, 엄마들이 골목어귀에서 "OO야 밥먹어라!"고 소리치며 아이를 찾는 일도 더는 없으니 말이다. 대신에 학원 간 아이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낼 뿐...

더불어 내 나이와 역사도 만만칠 않음을 느낀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은 거의 흑백사진이다가 열살 무렵에야 겨우 컬러사진이 등장할 정도니 말해 무엇하리. 그뿐인가, 나도 동네를 돌아다니던 물지게, 똥지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고 ㅠ.ㅠ 나무로 짜인 장식장에 들어 양쪽으로 문을 드르륵 열게 되어 있던 흑백TV가 집에 생겨나, 학기초 <가정생활환경 조사서>에 드디어 '텔레비죤' 항목에 표시할 수 있게 됐음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누런 육성회비 봉투의 추억이 없나, 교복자율화 세대라서 사복입고 고등학교엘 다닌 경험이 없나, 7,80년대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 ㅠ.ㅠ 대학시절 좀 깨어 있는 친구들은 교양과목으로 컴퓨터 기초를 수강했지만, 나는 거금주고 산 <클로버> 타자기만 믿고 신기술을 외면했다. 먹끈이 돌아가고 자판을 아주 세게 쳐야 글씨가 새겨지는 수동 타자기만 사용해보다가, 회사에 취직해 처음 전동타자기를 접하고는 너무 힘주어 치는 바람에 한번에 알파벳이 세개씩 다다다 쳐져서 당황했던 건 또 어떻고! 사무실에 컴퓨터가 등장한 건 두번째 회사로 옮긴 이후였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나는 주로 수십 종류의 서류양식 인쇄물에 기안서, 보고서, 영업계획서 따위를 손글씨로 쓰느라 끙끙대야 했다.
 
컴퓨터에 그나마 좀 익숙해진 건 90년대 중반이었던 직장생활 막바지. 개통하는데만 당시 돈 150만원쯤 들었던 무전기 만한 모터로라 휴대폰과 '임원진' 자동차에만 부착되어 있던 카폰을 신기해하던 나도 그 무렵 공중전화 옆에서만 통화가 되는 <시티폰>을 거쳐 PCS폰을 개통했다. 그때부터 썼던 번호를 3년전까지도 고수했으니 참 놀랍다. 그간 바꾼 핸드폰은 또 몇개나 될까. +_+ 아주 어릴 땐 집에 전화도 없어서 10원짜리 챙겨들고 공중전화 걸러 나가 까치발을 들고 다이얼을 돌렸는데, 이젠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다. 아버지 학교로 전화를 걸면 친절한 교환수 언니들이 자리 비운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어떻게든 연결해주었고, 교복 입고 놀러가면 아버지가 교환실에 넣어놓고 퇴근시간까지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면 교환수 언니들은 간식으로 중국집에서 군만두랑 잡채밥을 시켜주었는데, 그 때 먹은 잡채밥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아직도 잡채밥은 중국집 음식에 대한 나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 극장 간판화가, 버스 차장과 더불어 교환수도 이젠 오래전에 사라진 직업이다.

이웃 블로그에서 공포 영화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릴 땐 골목 담벼락에 주르륵 영화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포영화는 예고편도 못보는 겁쟁이라,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은 글씨체로 쓰인 <캐리>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는 골목은 잘 지나지도 못했다. 방학이면 꼭 종로에 데려가 <로보트 태권브이> <똘이장군> <칠칠단의 비밀>따위의 만화영화를 보여주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시던 삼촌 덕분에 나의 형제들은 꽤 어려서부터 단성사, 피카디리, 명보, 스카라, 국도, 대한 극장 같은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외화의 등장인물까지도 거의 실물과 똑같이 그린 극장 간판이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시내 개봉관 극장간판은 참으로 사실적인데, 동네 3류극장 쯤 되면 배우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장간판 그림의 질이 달랐던 것도 기억난다. 오랜 독재 끝에 총맞아 죽은 대통령과 계엄령을 겪은 것이 중학생 때이니 참 나도 오래 살았구나 싶어 입만 열면 자꾸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 꼰대스럽게도 아, 옛날엔 말이지... 그러면서. @.,@

굳이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민담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원래 그냥 지난 이야기 회상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아직 어린 조카들도 자신의 '옛날'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 너 어릴 때 이러저러했노라고 걔들은 기억도 못하는 아기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또, 또, 또... 그러면서 자꾸 옛날 이야기를 들춘다. 생각해보니, 어떤 시대를 살든 어느 세대에 속하든 인간의 수명이 워낙 길어 평생 따져보면 누구나 드라마틱한 삶과 역사를 겪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내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월간지를 보던 시절 21세기엔 쉽사리 우주여행을 다니고 다른 행성의 우주인과 교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 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조카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그만큼 변해 나중엔 오늘의 현실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회상하게 될 것이다. 나의 남은 생엔 또 어떤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남은 날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팔팔한 순간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중년은 중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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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

추억주머니 2011. 9. 22. 17:07

어제 만난 친구에게 이사를 가긴 가야겠는데 집을 팔고 사는 문제도 두렵지만 일단은 30년 가까이 된 두집 살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또 다시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몰래몰래 버리란다. 노친네들이야 워낙 오래된 물건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못버리게 하는 게 당연하므로 엄마 안 계실 적에 스리살짝. 그래야 하는 것이었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신은 없다. 오래된 물건 못버리는 '지병'은 (이웃 주민 '쌘'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좀 심각한 걸 알기 때문이다. 

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산 책 <나의 고릿젓 몽블랑 만년필>은 막상 읽어보니 내가 워낙 클래식 음악에 무지한 탓에 3분의 1 이상은 뭔소린지도 몰라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고,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젠체하는 느낌이 드는 시인의 글이라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럼에도 지은이가 찍은 오래된 독일물건들 사진을 보는 건 참 좋았다. 런던에서 수학선생님을 하고 계시는 런던아줌마님은 물건 함부로 안 버리고 죄다 껴안고 사는 습관을 '영국병'이라고 칭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래된 물건 절대 안버리고 소중히 간직하는 태도는 유럽인들의 공통적인 특색인 듯하다. 그러니까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치르고도 변함없이 간직된 수많은 골동품들이 유통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심지어 몇백년 전의 식료품 거래 영수증이나, 사적인 편지까지도. 유럽치고 벼룩시장 유명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 말이다. 하다못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야드 세일'이나 '거라지 세일'을 하는 판국에...
 
오래된 물건을 못/안버리는 습관은 어쩌면 근대의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새로운 것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 확확 세상이 바뀌던 때라 과거에 대한 향수가 특히나 진했던 게 아닐까. 신문지도 함부로 안버리시던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확실히 맞는 것 같은데, 세대를 거쳐 우리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그런 성향이 이어진 이유는 역시 알쏭달쏭하다. 내 경우는 단지 좀 우유부단하고 청승맞아서 과거에 얽매이는 듯도 하고. 

하여튼 독일 벼룩시장에서 지은이가 득템한 골동품들 사진을 보며 희희낙락하다가 제일 정겨웠던 건 몽당 연필과 색연필이 든 파버카스텔 필
통이었다. 같은 브랜드는 아니지만 나도 최소 30년 된 스테들러 색연필 갖고 있다규!
전에도 어딘가 쓴 것 같은데 중학교 때 고모부가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을 나는 아끼느라 1, 2년간은 계속 구경만 했었고 드디어 사용한 계기는 손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고등학교 올라가선 친구들과 워낙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으므로 색연필로 편지지를 꾸미기도 했고, 예쁜 편지지에 좋은 글귀 적어서 코팅해 선물하는 유행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 색을 달리해 시를 베껴적는 정성을 들인 기억도 있다. 그렇게 드문드문 십수년간 사용했어도 좀체 닳을 일이 없었던 색연필을 본격적으로 소비하게 된 건 역시나 조카의 탄생 이후의 일이었다. 벽지 낙서를 거쳐 드디어 스케치북과 이면지에 작품을 그려주기 시작한 정민공주의 그림활동에 흐뭇해, 색연필이 막 부러져 하루에도 몇번번씩 깎는 일이 생겨나도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그렇게 조카들 넷을 겪고도 아직 꽤 건재(라기엔 좀 민망하지만;;)한 스테들러 색연필의 현재 몰골은 이렇다. ㅋㅋㅋ


녹이 슨 철제 케이스 위엔 정민이가 서너살 때 붙인 방귀대장 뿡뿡이 스티커가 어지럽기 이를데 없고(잘 떼지지 않아 뗄 수도 없다;;), 내용물은 중간에 없어지고 사라져버린 색깔이 많아 다른 색연필로 대체하는 바람에 마구 뒤섞였지만 아직도 그림놀이 할 때는 없어선 안될 소품이다. 문방구 가면 파버카스텔이든 스테들러든 48색, 64색 색연필이 번드르르 종류별로 진열되어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30년 넘은 이 색연필을 못 버리고 갖고 있는 내가 확실히 청승은 청승이라고 인정할밖에. (그나마 핑계는 요즘 같은 브랜드라도 나뭇결이 거칠고 칼을 대면 뚝뚝 쪼개지는 색연필과 달리 연필 나무가 정말 연하고 부드럽다는 것. 똑같이 집어던져도 대체된 잡종 색연필보다 잘 부러지지도 않는다. ㅠ.ㅠ) 애지중지 써온 30년 역사와 색연필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을 생각하면 어떻게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얼마전엔 엄마가 난데없이 장농 서랍 정리를 하며, 시집올 때 함에 들었던 혼서지와 사주단자를 버리겠다고 내놓으셨다. 아예 쓰레기통에 넣어둔 걸 나는 다시 꺼내며 왜 이런 걸 함부로 버리느냐고 막 화를 냈다. 엄마는 우리 할아버지가 손수 쓰신 글씨체도 아니고 당시 혼서지랑 사주단자 써주는 대서소에 가서 써온 거라 별로 보관할 가치가 없는 거라 항변했지만, 왠지 나는 그냥 버릴 수 없는 물건이라고 느꼈다. -_-;

40여년이 지났어도 비단 색실이 하나도 안 바랬다. 벌써 버렸으면 모르겠으나 엄마는 입때 갖고 있다가 왜 이제와서 새삼 버리시겠다고 하는지 원...

물론 나도 좀 지나면 아무 미련없이 버리자는데 동의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마음으론 한참 더 갖고 있어야할 것만 같다. 엄마방 장농 서랍 안쪽에 든 우리 부모님의 연애편지 묶음도 마찬가지고... -_-;

옛날에 대학생 때였나, 할아버지가 다락방 한 가득 갖고 계시던 오래된 물건들을 비웃으며 대체 왜 그렇게 끼고 도시느냐고 투덜거렸는데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으니 어쩌면 좋으냐. 오래된 물건 못 버려 전전긍긍하는 모습 때문에 머지않아 다 큰 조카들에게 고리타분한 노친네 취급받는 모습이 막 눈에 선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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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하나마나 푸념 2010. 10. 31. 09:45

냉랭한 남북기조 때문에 명맥이 끊겼던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이루어져 뉴스에 연일 등장하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리게 된다. 수십년씩 헤어져 살아야 했던 혈육을 만나는 기쁨과 그간의 한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당장 나라도 졸지에 형제부모와 헤어졌다가 수십년 만에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 '안' 찾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억압 때문에 가족을 '못' 찾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리움이 짙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이라는 너무도 다른 환경이 아니더라도, 오래 헤어져 산 가족의 재상봉은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헤어지게 되었는지 한 많은 사연을 주고받으며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나 싶게 각자 살던 대로 예전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다. 혹독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그냥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포장한 채 살아갈 수 있었던 때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심하게 연로해지셔서 상봉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슬픈 일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실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을 모르거나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곁에서 내가 직접 지켜보니 그럴 것 같다는 짐작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우리 할아버지는 지난 80년대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 덕에 여동생을 찾은 적이 있다. 그분은 부산에 살고계셨기 때문에 역시나 부산에 살고 있던 큰고모와 먼저 상봉을 한 후, 할아버지께 연락이 왔고 고모할머님과 할아버지의 감격적인 통화가 이루어진 뒤, 고모할머님 내외가 오빠(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셨다. 가뜩이나 북적대는 우리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잊고 살던 고모할머님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다들 마음이 짠했다. 헌데 똘똘하고 애교가 많은 막내동생이라 퍽 예뻐하셨다는 할아버지의 추억담 속에 존재했던 고모할머니는 세월에 찌들은 검은 얼굴과 시장통에서 국밥장사를 하며 거칠어졌을 입담과 엄청난 주량, 난감한 주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날의 추억은 마구 찍어댄 사진으로 남아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불콰한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맞댄 채 웃고 계시거나 음식이 차려진 상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할아버지 앨범에 들어 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그날 저녁의 분위기는 참으로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의 연속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하룻밤인가 이틀 할아버지댁에서 주무시고 서울 구경도 함께 다닌 뒤 부산으로 내려가셨던 여동생 때문에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속이 상해 홀로 약주를 많이 드셨다. 알고보니 그분은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는 남자(고모할머니의 남편인 줄 알았던 분은 그러니까 따로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그저 '동거인'으로 데리고 살고 있었고, 조강지처한테 버림받은 병든 그 동거남을 어려운 형편으로 수발중이었다. '아들' 이 아니라 '동거인'의 지위로 살아야 했던, 나에겐 '고종당숙'이 되는 그분도 삶이 엉망인듯 했고.

당시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어른들은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국 그렇게 눈물의 상봉을 한 오누이는 살가운 만남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남과 북이 아니라 겨우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그간 살아온 환경이 서로 너무 달랐고 할아버지가 보기엔 '망가진' 삶을 살아온 여동생이 못마땅했으며, 비빌 언덕이 생겼다고 여긴 가난한 누이는 오라비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바랐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그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역정을 내셨기 때문에, 나로선 제대로 묻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부산에 사시는 큰고모가 대표로 간간이 소식을 전하는 눈치였다. 굳이 탓을 한다면 힘겨운 세월과 가난 때문이라고 여겨야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어쩌다가 '그 따위'로 아무렇게나 살게 되었는지 할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셨다.

이산가족 상봉의 뒤끝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누구보다 곁에서 느끼셨을 것 같은데도, 큰고모 역시 남북이산가족 찾기로 가족을 만나러 금강산에 다녀오셨다. 이북에 두고온 형제들을 만나러 갔다는 연로하신 큰고모의 모습은 2003년 당시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우리 할머니와 재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소생이 큰고모 한분 뿐인 줄 알았던 나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금강산 상봉장에 다녀오신 큰고모의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니, 동생과 사촌이라면서 상봉장에 나온 북한의 가족들을 큰고모는 하나도 몰라보겠더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공유한 추억이 없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더라고. 당연히 감격적인 눈물의 상봉은 없었고,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보아 '꽤 사는 것 같더라'는 북한의 가족들은 고모가 가져간 선물에도 그리 반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뭐 그야 상봉인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교육탓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긴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석했던 큰고모는 고대하던 어머니 소식(큰고모가 당시 75세이셨으니 그분은 90세도 넘어 당연히 돌아가셨겠지만)도 거의 듣지 못해 괜히 갔나 싶어 후회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 사흘간이었다던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 전화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 가족들은 중국을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거나 돈까지도 보내는 방법이 있다고는 한다) 애틋한 형제의 정을 느낀 것도 아니니 뭘 더 어쩐단 말인가.

상황은 다르지만 70년대에 미국으로 입양됐던 친구 하나도 몇년 전 30년 만에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왔었고, 홀트아동복지회와 지방경찰청의 도움으로 친부모를 찾았다. 아이를 버린 부모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듯했고, 친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했다. 한국 땅에서 고아원에 버려져 살았을 삶보다 미국에 입양되어 살았던 인생이 훨씬 더 나음을 알기 때문이라면서. 2년뒤 친구 부부는 그간 낳은 갓난쟁이 딸을 데리고 한번 더 한국을 찾아와 생모를 만났지만, 친구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남편이 못마땅하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린 생모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다. 홀로 남매를 키우기 어려워 해외입양을 선택한 생부가 오히려 이해될 것 같다나. 생모 쪽에서도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친구에게 그저 죄책감을 갖고 있을 뿐 별 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는 생모가 아기 입히라며 사들고 온 옷가지와 색동저고리에 감사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돌아서서 내겐 "촌스러워서 집에 돌아가자 마자 다 버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헤어지던 날, 자긴 두번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 때문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친부모를 만나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정타는 생모의 입에서 나왔다. 말이 안통하는 양쪽을 위해 계속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나에게 생모가 넌지시 물었었다. 미국서 쟤네들이 좀 사는 것 같으냐고. 사진작가와 기자면 먹고 살만 하지 않겠느냐고. -.-; 내 친구가 어떻게 나오나 한번 실험해봐야겠다면서, 생모는 대구 산다는 자신의 손녀딸(그 아주머니는 재혼해서 새로이 딸아들 낳아 잘 살고 있었다)이 쓸만한 '유아용 카시트'를 미국에 돌아가면 사보낼 수 있겠는지 내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난감해진 내가 부피가 커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거라고 만류해 보았지만, 일단 물어는 보라나.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 카시트를 사서 대구로 보내주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질문을 받은 내 친구는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다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그날의 만남을 정리해 생모 가족과 헤어지고 나서 나와 친구, 친구의 남편은 허탈한 마음에 술을 마셨었다. 해외입양아가 친부모를 찾고, 서로 말이 안통하면서도 어떻게든 인연의 끈을 이어가려고 애쓰는 건 TV에서나 나오는 일이로구나 싶었다. 친구 부부는 뿌리를 알기 위해서였으니, 친부모를 찾은 게 잘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 과정을 줄곧 지켜본 나로선 과연 그 상봉이 잘한 짓이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가족이었다면 그냥 헤어진 채로 그리움과 의혹, 좋은 상상의 기억만 품고 사는 게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지만, 어린 시절엔 노상 전쟁통에 피난을 가다가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사방에서 폭탄이 터져 홀로 어느 낯선 곳에 숨어 있는 악몽을 꾸다 울며 깨어나곤 했다. 꿈이라 다행이라며 어린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만약에 현실에서도 내가 그렇게 이산의 아픔을 지니고 살았다면, 나 역시 현실의 괴리가 어떻든 일단은 가족을 찾으려들 것이 확실하다. 나중에야 차라리 찾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든지 말든지. 그렇기 때문에 남은 생이 얼마 안되는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하루빨리 더 많은 상봉기회를 누리기를 빌고 있기는 한데, 그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할아버지도, 고모할머님도 이제는 다 돌아가신 분들이라, 마음에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때 만나기를 잘하셨다고 생각하는지 여쭤볼 도리도 없다. "꿈에 그리던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흔한 말이 그분들에게나, 지금 이산가족을 상봉하고 있는 실향민들에게나 서글픈 진실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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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투덜일기 2010. 10. 29. 20:23

밥먹을 때 혼자 생선가시를 발라 먹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는 당연히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충 짐작컨대 열살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호통 교육으로 젓가락질은 국민학교 이전에 이미 통달한데다, 밥상머리에서 오래도록 엄마의 시중을 받기엔 두 동생이 있어 어려웠을 테고, 그때도 이미 잘난척 했던 나의 성격이 그런 걸 허락치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살쪽을 우리에게 나눠준 뒤 당신은 남은 살에서 생선가시를 대충 발라서 입안에 넣고 마구 씹다가 남은 가시를 뱉어내는 방식을 어려서도 몹시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동생들은 머리가 굵어진 뒤에도 생선을 먹을 땐 꼭 엄마가 거들어줘야 했다. 막내는 아예 비린것을 싫어해서 웬만해선 젓가락도 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억지로 먹이려고 자꾸 밥그릇에 생선살을 올려주는 편이었고, 큰동생은 생선가시를 바르는 게 아니라 생선 몸통을 헤쳐놓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영악한 나는 생선 종류가 달라지더라도 중간 뼈대와 등, 배에 난 가시의 구조를 알면 완벽하게 생선살만 발라먹는 게 어렵지도 않은데 다들 왜 헤매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행히도 착한 올케들은 생선반찬을 식탁에 올릴 때마다 어린 조카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일일이 가시를 발라 살만 먹기 좋게 마련해주는 성품이다. 그게 습관이 된 덕분에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땐 우리 모녀를 위해서도 가시를 발라주는 지경. 애들과 남편을 위해 돌아가며 생선 가시를 발라주느라 생선을 굽거나 조리는 날엔 정작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한다고 푸념하면서도, 지켜보면 노상 그러고 있다. 엄마도 위대하지만 아내도 위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끔 나도 밥상머리에서 일손을 돕느라 조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다 보면, 녀석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정말로 젓가락을 쉴 수가 없고, 내 입으론 생선살 한톨 못들어간다.

물론 이젠 나에게도 밥상머리에서 늘 생선가시 바르는 시중을 들어들어야 하는 왕비마마가 계신다. 과거에도 그랬듯 왕비마마는 대충 큰 가시만 발라낸 생선 살을 마구 씹다가(잔 가시는 칼슘 섭취를 위해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신다) 걸리는 가시가 있으면 뱉어내는 분인데, 그러다 꼭 가시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 못하게 말린다. 일주일 단위로 병원에 다닐망정 생선가시 빼러 응급실 가는 일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식단을 구체적으로 짜서 해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생선을 굽거나 조려 상에 올리는 편이라 어느새 생선가시 바르는 일도 나름 주간행사다. 

돌아보면 굴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위해 말년에 생선가시를 바르는 일도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땐 당연히 할머니가 생선 살을 발라 내 밥숟갈에 얹어주셨겠지만, 눈이 어두워지신 할머니를 위해선 나나 엄마가 할머니 밥숟갈에 굴비 살을 올려드려야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은 됐으니 너나 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잔 가시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살코기만 할머니 숟가락에 얹어 드리며 나는 몹시 뿌듯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엄마를 위해 생선살을 바르는 요즘은 뿌듯함보다 서글픔이 앞서고 그래서 자꾸만 심술이 난다. 할머니를 위해선 꼭 숟가락에 생선살을 얹어드렸으면서, 엄마를 위해선 가시만 따로 발라 치워놓고 직접 집어 드시라고 하는 것만 봐도 태도가 다르다. 벌써부터 매사에 너무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엔 엄마가 완전히 힘없는 '할머니'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보가 녹아 있다. 

오늘 저녁에도 가시가 젤 없는 편인 삼치를 구워 먹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열살무렵에 생선가시 분야(?)에서 독립했다고 쳐도 엄마의 시중을 받은 게 10년이니 최소한 나도 10년은 군말없이 봉사해야 맞는 거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봉사의 세월이 이어지면 감사할 일이고... 생선가시 때문에 툴툴대다 갑자기 철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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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가 있다>는 말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자주 쓰셨던 표현이다. 살림살이가 비교적 넉넉했던 이북 및 만주생활과 달리 남한에 내려와 정착해 살면서는 무엇 하나 당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삶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특히 정치사회 문제에 의심이 많으셨고, 뉴스나 신문을 보시다간 종종 "이놈의 아새끼들 분명 야로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려서부터 익히 들어온 <야로>라는 말의 어감상 나는 그게 일본말이라고 생각해왔다. 급히 찾으실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입에서 흘러 나오는 아지노모도(조미료), 사리마다(팬티) 따위의 아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야로>는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순우리말이었다. 뜻은 <남에게 드러내지 아니하고 우물쭈물하는 속셈이나 수작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고 <이번 일에는 무슨 야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쓰인다. 못마땅한 정국이나 공무원 비리 뉴스 같은 걸 보면서 "무슨 야로가 있다"고 지적하신 할아버지의 우리말 표현은 그야말로 정확했다는 의미다.

지난 금요일 밤 마치 금세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연이은 속보로 한반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초계함 침몰 사건 보도를 지켜보며 내 입에서도 자꾸 그 말이 흘러나온다. "뭔가 분명 야로가 있다." 군사 정보에 완전 무지하고 해군 함정의 구조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 없지만, 아무리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군의 발표와 뉴스 내용은 의문 투성이다. 빤히 침몰한 배의 선체가 뒤집혀 물 위에 떠있는 걸 뉴스 화면에서 봤는데 어젠 그 반동강 조차 떠밀려가 가라앉은 위치 파악이 안 됐대고, 수많은 장병들이 갇혀 있을 선미는 사흘이 지난 오늘에야 겨우 찾아냈단다. 아무리 시계가 나쁘고 조류가 심한 곳이라지만 수심이 그리 깊지도 않은 연안에서 레이더로는 잔해의 위치 파악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요샌 고기잡이도 바닷속 물고기떼를 레이더로 탐지해서 잡던데? 망망대해에 뜬 조각배 하나도 위성과 레이더의 공조만 있으면 찾아내는 게 아니었나? 세떼는 레이더에 잡혀 무려 76mm 대포를 쏴댔다면서?

부디 배 안에 생존자가 있어 다들 무사히 구조되기를 빌고 또 빌지만, 희생자 가족이 아닌 나도 당국과 군의 뜨뜻미지근하고 수상쩍은 태도에 열통이 터지는 판국이니 당사자들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사고 원인 짐작조차 쉬쉬하는 분위기고, 초계함의 작전상 이동은 당연히 명령을 통한 것일 테니 애당초 왜 그렇게 연안 가까이에 접근했는지 이유가 있을 텐데 군사 기밀이라서 그런지, 명령체계의 오류나 작전실수라서 그런지 시원한 해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여권과 주류언론에선 지방선거 앞두고 이런 비극조차 이용하려고 자꾸 북한 개입설을 들먹여 불안감을 조성할 테지만, 진짜 불안한 건 터무니 없이 무너져버린 해상 방어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도무지 신빙성이 가지 않는 군의 사건 개요 발표와 대처도 그렇고 뭔가 중요한 걸 감추느라 말 짜맞추기를 하는 것 같던 함장의 말을 보아도 확실해 보이는 건 현재 <뭔가 야로가 있다>는 심증뿐이다. 부디 실종자들의 극적인 생존 속보와 함께 차츰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속보 나오자 마자 지하벙커에 숨어 <국가 안보회의>를 소집한 뒤 "한점 의혹 없도록 진실 규명에 힘쓰라"고 지시했다는 '그분'의 말에 오히려 의혹의 무게가 실리는 걸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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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추억주머니 2010. 1. 21. 22:12

방학(放學):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 추위가 심한 일정 기간 동안 수업을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놓을 방, 배움 학이니, 방학은 배움을 놓고 놀라는 뜻이 틀림없다.

초중고대,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아도 방학땐 거의 놀기만 했던 것 같다. 요샌 방학이 되어도 누구 하나 정신없이 놀기만 하는 학생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마냥 놀아도 되었던 시절을 타고난 복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3을 앞둔 겨울방학엔 자율학습을 하느라 매일 학교에 가야했지만, 등교는 했으되 공부대신 우린 여전히 수다가 본업이었고 고체 연료와 냄비, 양푼 따위를 집에서 날라와 친구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거나 도시락을 모두 모아 비빈 양푼 비빔밥에 달려들어 숟가락 다툼을 하며 히히덕거렸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 달리 괜한 시국 탓하며 학기중에도 학업을 멀리했던 우리가 방학 동안 공부를 했을리 만무했다. 친구들 따라 토익, 토플 특강을 신청하긴 했어도 출석일수가 열흘을 넘긴 적은 없었다. 그나마도 3학년 때부터는 특강 등록증을 검사하는 학생회 친구가 거저 들여보내 줄 터이니, 다들 특강비로 술 사마시자고 꼬드겨 단체로 부모님을 속인 뒤 꽤 오래 술과 밥을 사먹으며 놀았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대학시절 4년이라고 아직도 아련하게 추억하는 이유도, 학기중이든 방학이든 따지지 않고 참 원없이도 놀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미래가 두렵긴 했지만 특별히 인생을 계획하고 앞길을 따져 본 적 없이, 그저 빈둥빈둥 놀았다. 뭐가 그리 재미 있었으냐고 꼬치꼬치 따지면 딱히 손꼽을 것도 없이, 멍하니 무심하게 놀 수 있었던 건 정말 그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아 물론, 노는 게 본업이었던 유년시절은 빼고서 그렇다는 말이다. 학원이나 과외는 생각도 못하고 요즘 학습지에 해당하는 <일일공부>가 유일한 사교육 경험이었던 나는 학기중이든 방학때든 만날 시험지가 밀려도 별 걱정하지 않고 놀았다. 까짓것 일주일치가 밀려도 하룻저녁 끙끙대며 앉아 다 풀면 되는 일이었다. <방학생활>과 일기가 문제이긴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한참 밀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해치우는 버릇은 여전했으므로 개학을 일주일 쯤 앞두고서 숙제검사를 실시한 부모님에게 손바닥을 몇대 맞은 뒤 시작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개학 후 글짓기든 독후감이든, 만들기든 뭔가 하나쯤은 상을 타왔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치밀한 구석이 있어서, 똑같은 굵기와 진하기의 연필로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다 쓰면 티가 날까봐 나는 연필도 굵은 것, 흐린 것, 뾰족한 것, 뭉툭한 것 번갈아서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렇게 강요받은 일기 쓰기가 싫더니, 요샌 누가 쓰라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 블로그질을 하는 걸 보면 우습다. 한두 달치 밀린 일기를 며칠 만에 다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필력>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건가? 흐흐흐.

어쨌든 어린 시절 방학 중 내가 가장 크게 기대했던 이벤트는 친척집 순례였다. 친할머니댁에서 며칠,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고모네집에서 며칠, 원두막이 있는 시골집이 아니라 다들 서울 하늘 아래라 특별한 것도 없건만 나는 방학동안의 홀로 외박을 학수고대했다. 싸가지고 간 방학숙제와 일기는 언제나 손도 대지 않은 채 며칠 뒤 다시 집에 가져갔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부시시 눈을 떠보면, 안방 한가운데 덩그라니 내 이불만 놓여있고 같이 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불은 어느틈에 치워졌을 뿐만 아니라, 방 구석에 상보가 덮인 소반 하나가 놓여있기 일쑤였다. 두분 아침 드시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완고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할아버지가 늦잠 자는 손녀딸을 그냥 내버려두고 그 옆에서 아침상을 받아 진지를 드셨을 걸 생각하면 지금도 놀랍다. 할머니가 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내버려두라고 말리셨을 게 분명하지만, 밥상 예절을 중시하셨던 할아버지 성격상 보아 넘기시기 힘드셨을 텐데. 딱히 할머니댁에서 뭘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고, 갓 성년이 된 고모들 수다 떠는 데 눈을 빛내며 끼어 앉아 있고, 낮잠자고 누룽지나 찐고구마 같은 간식 먹고 TV 드라마 보고... 나중에 작은아버지댁이랑 합치셨을 땐 사촌동생들이랑 놀아주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

방학때 할머니댁에서 며칠 놀다 돌아오면 집에서 한 일주일쯤 보내다가 다시 외할머니댁엘 갔다. 거긴 사촌언니가 있는데다 만화책을 수십권씩 빌려다 쌓아놓고 보는 외삼촌들도 있었으니 더욱 즐거웠다. 물론 할머니댁보다는 늦잠자기가 수월하지 않았지만 새벽같이 안방에서 쫓겨나 잠이 모자라면 건넌방이나 사랑방으로 베개를 들고 옮겨 이어잘 수도 있었다. 온갖 과일과 한과, 견과류가 그득했던 외할머니댁 광이나 다락에서 끊임없이 가져다먹는 간식의 묘미는 또 어떻고!  두 할머니댁 말고도 고모네 집에서도 거의 방학마다 나를 불렀던 건 좀 의아하다. 살림이 여유로웠던 셋째 고모는 딸이 없어 그러려니 한다지만, 꽤나 먼 동네 단칸방에 살았던 넷째 고모네는 딸도 있는데 거길 가서 며칠 씩 지내다 온 건 무슨 이유였을까. 아무리 아이라지만 군 식구 하나 더 챙기는 게 꽤나 귀찮았을 텐데, 고모들이 나를 심히 예뻐했다는 것말고는 딱히 나를 오라고 했던 정황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편하기만 했던 두 할머니댁과는 달리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며칠은 나도 대단히 조심스럽고 어려웠는데도, 다니러 오라는 고모들의 청이 싫지 않았다. 어린마음에도 오히려 내쪽에서 큰 아량을 베푸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끼니 때마다 고모들을 도와 수저를 놓거나 물잔을 옮기며 듣는 칭찬도 퍽이나 뿌듯했고.

물론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과거의 나처럼 마냥 놀지 못한다. 놀기는커녕 다음 학년 수업을 땡겨서 선행학습을 하느라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오래 학원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좀 더 여유가 있는 집안에선 아예 방학 내내 외국으로 연수를 보내거나... 달리 노는 인생을 아예 알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나름 행복과 즐거움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여유롭고 신나야 할 때조차 공부에 치여 보낸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더욱 숨막히는 삶에 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몹시 안타깝다. 유년을 돌아보며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빈둥빈둥 놀기만 했어!"라고 즐거이 고백하는 나와 달리, 그 아이들은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학원을 다섯개나 뺑뺑이하느라 정신없었어!"라고 토로하며 그마저도 행복하다 여기는 건 아닌지.

아무려나 일 하기가 싫으니 만날 꿈꾸는 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년, 방학, 휴가, 이 따위 것들이다. 이 맘때쯤 아직은 밀린 방학숙제와 일기 걱정 없이 태평하게 빈둥빈둥 놀고 있었을 내 유년의 방학이 그리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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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대하여

삶꾸러미 2009. 9. 15. 18:27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주말에 놀러가 함께 저녁을 먹다 보면 늘 되풀이되는 광경이 하나 있었다. 밥상 아래로 자꾸만 밥풀이나 반찬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타박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
양반은 모름지기 매끄러운 놋쇠 젓가락으로 청포묵 하나를 집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까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젓가락질에 능해야한다며 코흘리개 시절부터 우리 손주들에게 엄하게 젓가락질을 가르치셨던 바로 그 할아버지가 진지를 잡수시면서 뭔가를 흘린다는 건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할머니도 가끔 입가에 밥풀 같은 게 묻었는데 느끼지 못하실 때도 있지만,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할머니는 수시로 입가를 닦거나 스스로 밥상 아래를 살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밥상을 치우고 나서도 매번 지저분한 할아버지 자리와 달리 할머니 자리는 늘 깨끗했다.
게다가 골초였던 할아버지한테선 늘 심한 담배냄새와 함께 할아버지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할머니는 그게 늙은이 냄새라면서 질색을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늙은이 냄새 나면 애들이 싫어한다며 언제나 바지런하게 씻고 로션(할머니 용어로는 여전히 '구루무')을 바르셨는데, 정말로 우리 할머니한테선 노인 특유의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6개월쯤 다시 할머니와 한집에서 동침하며 살던 시절, 내가 새벽녘에 컴퓨터를 끄고 옆방으로 들어가 부시시 할머니 옆자리로 파고들면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는데 팔순이 넘어서도 아기피부처럼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할머니의 팔다리를 어루만지면 금세 잠이 들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 할머니한테선 흔한 노인냄새 대신 우리 할머니만의 달콤한 체취가 났던 것 같다. 역시나 팔순 넘어서까지 전국 방방곡곡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만큼 정정했던 우리 외할머니한테서도 노인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친할머니처럼 잘 때 껴안고 자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주 뵙고 팔다리 주물러드리고 했으므로 충분히 체취를 맡을 기회는 있었을 텐데.

내가 늙음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된 건 엄마 때문이다. 올해 나이 예순 아홉. 아직도 나에겐 아줌마 영자씨가 익숙하지만,  어느 누가 봐도 할머니라고 인정할 나이다. 요즘엔 특히 젊게 사는 노인들이 많아 칠순 넘어서도 펄펄 날아다니며 건강을 자랑하는 분들도 많지만, 지병도 많고 마음도 약하고 의존적이기까지 한 울 엄마는 그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냥 할머니로 늙어가고 계신다. 그간의 여러 병력을 따져본다면 이 정도 회복도 고마워 해야 하는 수준이고, 노인으로선 그게 당연한 건데도 내 마음 속 어린아이는 젊은 엄마를 포기할 수가 없는 모양인지 자연스레 노인의 특징을 보이는 엄마가 매번 놀랍고 속상하고 서글프다가 버럭 짜증이 치민다. 
노인들이 밥풀이나 반찬 양념이 입가에 묻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입주변의 근육과 신경이 노화해 정말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입술과 혀의 놀림도 자연히 전보다 날렵하지 못해 음식을 입에 넣거나 씹을 때도 흘릴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울 엄마는 당뇨 합병증으로 말초신경이 상해 손가락 소근육의 움직임이 원할하지 못해 젓가락을 떨어뜨리기 일쑤이니 오죽하랴. 엄마 티셔츠를 보면 하나같이 앞섶에 보일락말락한 얼룩이 묻어 있다. 음식물을 흘린 자국이다. 미리 알아차렸을 때는 얼른 애벌빨레를 하거나 문질러 지우기나 하지, 몰랐다가 그냥 세탁기에 돌리고 나면 나중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식탁 밑 엄마 자리도 흘린 음식물로 매 끼니마다 어지럽다. 어린 조카 밥먹고 난 자리랑 똑같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치우자면 버럭 화가 난다.
진짜 화가 나는 대상은 인간의 노화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인데, 짜증과 분노는 늘 엄마에게 날아가고 만다. 숟가락질에 서툰 아이가 밥을 흘리는 게 당연한데도, 그걸 치우는 게 짜증나서 애한테 화풀이는 하는 몹쓸 엄마처럼.
며칠 전엔 심지어 울 엄마한테서도 드디어 노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사로잡혔다. 노인 특유의 냄새는 피부 노화로 떨어진 죽은 세포와 각질 때문이라 완전히 피할 순 없으니 잘 씻고 향수를 사용하는 수밖엔 없다고 들은 듯하다. 빨간 립스틱 하나 바르는 게 화장의 전부인 울 엄마가 향수를 쓸 리는 없고, 벌써부터 춥다고 매일 샤워는 안할 태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새삼 느껴진 모양이다. 쓸데없이 민감한 나만 가끔 감지할 정도이긴 하지만, 끈적거린다고 바디로션 바르는 것도 싫어하는 왕비마마의 노인 냄새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청력도 나빠져 TV도 거실을 왕왕 울릴만큼 틀어놓아야 하고, 돋보기가 없으면 작은 글씨는 전혀 볼 수가 없으며 기억력도 현저히 나빠져 했던 얘기를 자꾸 되풀이해 당부하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데도 딸로서 선뜻 수긍하게 되질 않는다. 그건 본인도 마찬가지라 나보다 더 속상할 텐데 화를 내는 건 언제나 못된 딸이다.
조금 전에도 늙은 딸 먹으라고 복숭아를 주고 가면서 끈적끈적한 과일물을 사방에 뚝뚝 흘리며 먹고 다니는 엄마에게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식탐에도 여러종류가 있지만 울 엄마의 식탐 특징은 입 한가득 넣고 씹는 쾌감을 유독 즐기신다는 점이다. 예쁘고 정갈하게 자른 과일을 포크로 얌전하게 찍어먹는 건 절대 울 엄마 스타일이 아니다. 무조건 통째로 들고 우적우적 크게 베어먹어야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보다. 아오리나 홍옥사과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 제맛이라고 인정하지만, 단물 뚝뚝 흐르는 복숭아 같은 건 좀!!!
당연히 눈도 어두워졌으니 늙은 엄마가 닦는다고 해봤자 끈적임을 말끔히 닦아낼 리 만무해 두어군데는 빼먹기 일쑤인데 걸레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목. 결국엔 내몸 편하자고 내는 화풀이였던 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셨던 것도 아니고 팔순 넘어 시들어가시는 그분들을 익히 지켜봤으면서도 늙어가는 엄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잘 안되는 걸 보면 나란 인간은 늙음에 대한 지극한 공포를 품고 있나 보다. 늙기 싫어서 발악하는 사람들의 흉한 모습을 손가락질하면서 말로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게 멋진 거라고 주장하지만, 나 또한 다른 방향으로 흉하게 발악하며 억지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확실히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는 지나버렸으니 아쉽고 중년도 노년의 미래도 선뜻 받아들이는 건 싫으니 천상 이게 철 안든 사십대의 청승이 아니고 무언가. 스무살 무렵의 유치한 나는 예순살까지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적이 있다. 아마 그때도 죽음보다 늙음이 더 무서웠던 건 아닐까.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이치라고 고개 끄덕이기엔 늙음이 가져오는 심신의 흐트러짐이 너무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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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삶꾸러미 2009. 8. 10. 16:21

어느 책에선가 국수가 혁명가들의 음식이란 얘기를 봤다. 후루룩 먹고 또 일을 해야하기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 기다란 국수발을 끊지 않고 목으로 넘기며 죽음을 경험하는 거라나 뭐라나.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최소한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일 순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 없어도 면발 몇 줄기 삼키는 건 누구나 가능하고, 노동의 중간에 후다닥 끼니를 해치우기엔 국수만한 것이 없는데다 값도 싼편이니까. 물론 전통의 맛을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는 우래옥이나 을지면옥의 냉면은 사먹으려면 7, 8천원이나 하는 고가(?)의 음식이 되었지만 몇만원짜리 만찬에 비하면야 뭐. 

국수 애호가였던 이북 출신의 조부모님과 오래 살면서 나 역시 국수를 어려서부터 먹고 자랐고 지금도 퍽이나 좋아한다. 내가 파스타류를 특히 좋아하는 것도 국수와 워낙 친근하기 때문이 아닐까. 암튼 할머니댁에서 살 때나 나중에 분가후 주말에 다니러 다닐 때도 그 옛날 여름이면 점심끼니는 으레 국수였다. 평안도 출신 답게 물냉면 아니면 비빔국수. 멸치다시를 내서 뜨거운 육수에 말아먹는 잔치국수는 아무래도 서울이나 남도쪽 음식인듯 집에서 해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저 매일 냉면냉면... 맛있는 동치미 국물을 늘 마련해놓은 것도 아니어서 인스턴트로 파는 마른 냉면을 사다가 삶고 거기 딸려오는 봉지스프로 육수를 대강 만들어 먹는 건데도 삶은 달걀 하나만 얹어 있으면 어찌나 맛있게 여겨졌던지. 할머니가 신김치 송송 썰어 참기름과 설탕을 약간 넣고 맨손으로 고추장과 함께 조물조물 국수에 비벼 주시던 비빔국수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엔 동네마다 국수가게가 있어서 빨래를 널듯 긴 젖은 국수를 기다란 가로대에 걸쳐 높은 건조대에 척척 올려놓았다가 다 마르면 걷어서 잘라 팔았다. 그땐 쌀이 부족할 때라 혼분식을 장려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집마다 국수를 참 많이도 먹고 살았던 모양이다. 국수 심부름을 가는 것도 늘 내 차례였는데, 신문지에 크게 한움큼 싸준 국수를 사들고 오며 나는 한줄기씩 그 밀가루 국수를 뽑아 과자처럼 오독오독 끊어 씹어먹으며 즐거워했다. 엄마는 배탈난다고 질색을 했지만, 국수 삶는 걸 기다리는 동안 동생들과 나는 엄마 몰래 얼른 마른 국수 한두 줄기를 뽑아 씹으며 좋아했었다. 여름이면 우리 식구들은 냉면도 좋아했지만 콩국수를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유난히 콩국수를 더 많이 해먹었던 것 같다. 학교 급식제도가 막 시작되고 있던 시절이라 그 땐 일주일에 한번씩 우유 대신 유리병에 든 두유가 빵과 함께 나오곤 했는데, 나는 지금이나 그 때나 단맛을 가미한 콩국물을 절대로 못먹는 반면(편식은 안된다며 담임선생이 억지로 먹였다가 다 토해버린 기억이 있다) 소금을 쳐 고소한맛이 더욱 강조된 콩국물은 몹시 좋아했다. 콩을 덜 삶으면 콩비린내가 나고 너무 삶으면 메주냄새가 나기 때문에 콩국수를 맛있게 만드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엄마는 늘 푸념을 하면서도 매번 맛있는 콩국수를 만들어주셨던 것 같다. 몇해 전 나도 큰 마음 먹고 흰콩을 사다 삶아 손수 콩국수를 만들어보았지만, 콩이 옛날 콩이 아닌 때문인지 그 옛날처럼 고소하고 뿌듯한 맛은 결코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푹푹찌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도 점심끼니는 거의 언제나 국수다. 더욱이 마트에 나가보면 다양한 국수 종류는 물론이고 평양냉면 육수며 콩국물까지 1인분씩 봉지에 담아 팔고 있으니 금상첨화. 이런저런 브랜드 냉면을 죄다 사먹어 보니 굳이 완제품으로 비싸게 호화포장된 냉면을 세트로 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저렴하게 포장된 생냉면을 사고 제일 싼 봉지육수를 골라도 완성후의 맛은 거의 똑같다. 반면에 콩국물은 브랜드별로 가격과 맛의 차이가 심한 편인데, 딱히 내 입맛에 맛는 정말 고소한 콩국물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무원이가 만든 콩국물이 *정원이네서 만든 것보다 낫더라. ^^

그저께 점심은 물냉면, 어제는 콩국수, 오늘은 크림스파게티. 그끄저께는 열무비빔국수를 해먹었을 텐데, 지난주에 사온 육수와 콩국물을 다 먹었으니 내일은 또 다시 비빔국수 차례. 연일 너무 더워서 입맛이 없으니 자꾸만 차가운 것만 찾아서 그러는지 계속 배탈기가 있어서 오늘은 일부러 스파게티를 해먹었는데도 속이 편하질 않다. 이어지는 밀가루 세례를 감히 내 뱃속이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더위와 스트레스에 심신이 지쳐버린 것일까. 그래도 확실히 국수는 식욕이 없는 와중에도 일단 입안에 넣으면 술술 잘도 넘어가니 신기하다. 말년에 이가 부실해 단단한 음식은 거의 못드셨던 우리 할머니가 유독 소면을 좋아하셨던 눈물겨운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밥먹기 귀찮은 심정으론 저녁끼니도 국수로 대충 때우면 좋겠구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일 점심때 비빔국수는 특히 맵게 비벼먹고 나면 늘어진 정신줄이 좀 팽팽해지려나. 국수 한 그릇 먹자마자 얼른 또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요즘의 나를 보면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인 건 맞는 듯도 한데, 왕비마마는 무슨 죄람. 고종황제도 냉면을 즐겨먹었다는 이야기로 위로를 해드려야 할까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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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삶꾸러미 2009. 5. 10. 16:23

이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제일 먼저 어떤 뜻을 생각할까?
대부분은 <진지하다>의 어간인 진지를 떠올릴 것 같고, 군대와 관련된 직업인이나 갓 제대한 이는 부대에 꾸려놓은 진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밥>의 높임말인 순우리말 <진지>다.
숫기가 없던 나는 어렸을 때 <진지 잡수세요>, <진지 잡수시래요>라는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가 없었다.
끼니 때가 되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나무를 손보시거나 집 한켠에 비닐로 덮어 마련한 새장에서 새들을 거두고 계시면 할머니나 작은엄마, 우리 엄마는 꼭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가서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그러면 당연히 큰딸인 내가 할아버지를 불러와야하는 것처럼 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퍽 자주 있는 일임에도 나는 저 말이 좀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웅얼웅얼 쭈뼛거렸다간 할아버지한테 혼쭐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번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질끈감고 어렵사리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래요."
그러고는 그 어려운 말을 혹시라도 잘못 발음한 건 아닐까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른 후다닥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중에 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진지 드시래요>로 좀 바꾸기도 했다. <진지>도 어렵지만 <잡수시다>라는 존칭어가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다 대학생쯤 되고 나선 더 영악해져 <진지>라는 말을 아예 빼버리고 <할아버지, 점심 드세요> <저녁 드세요> 그렇게 내 마음대로 바꾸어 썼다. 어른 공경에 관해서는 몹시 엄하셨던 터라 어른에겐 뭐든 먹을 것을 권할 때 <잡수세요>라고 해야한다고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박히게 잔소리를 하셨던 할아버지도 그 즈음엔 기력이 쇠하셨던지 별 타박없이 "알았다"고만 대답하셨다.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나조차 쓰기 어렵다고 바꿔쓰고 외면했던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요즘은 더욱 듣기 어렵다는 생각에 자꾸 안타깝다.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유아어인 <아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선 거의 반말을 썼던 내가 아버지 생전에 직접 진지 잡수시라고 제대로 된 높임말을 썼을 리 없다. 그나마 나도 끼니때 조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할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영 자신이 없다. 늘 하던대로 <저녁 드시라고 해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너무 높으니까.
요샌 너도나도 <식사하다>라는 말을 아무때나 쓰고 있긴 한데, 난 또 그 말이 왜 그리 싫은지 모르겠다.
호감이 갔던 사람이라도 그 입에서 "식사했어요?" "식사하셨어요?" "식사하셔야죠?"라는 말이 흘러나오면 난 순간적으로 오만정이 다 떨어짐을 느낀다. 더불어 <식사시간>이란 말도 싫다. 그냥 점심시간, 저녁시간, 이라고 하면 좀 좋은가. 서류로 만든 일정표 따위엔 어쩔 수 없이 <식사시간>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더라도 흔히 쓰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나의 편견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 저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서 나의 언어생활은 여전히 상스럽다. 엄마에게 툭툭 던지는 반말은 친근함의 표현이라 극구 주장하며, 화난 거 티 낼때만 엄마에게 존댓말을 쓴다. 평소엔 아무 생각없이 "엄마 밥 먹어!"와 "엄마 저녁 드셔!"를 거의 반반씩 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럴진대 조카들이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연습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옛날 거의 매일 그 어려운 말을 입에올려야했던 나도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거늘 우리 조카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의도적으로 우리 집에서나마 <진지>와 <잡수시다>라는 말이 사장되지 않도록 써보리라 마음은 먹었는데, 열두살이 된 큰조카는 단 1초도 고민없이 이미 내가 예전에 했던 말바꾸기를 실천한다. 가령 내가 "할머니 과일 잡수시라고 해라"고 하면 공주는 "할머니 과일 먹어!"라고 외친다는 얘기다. -_-;;
나 역시 애써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예전처럼 지금도 그 말들이 좀체 입에서 나오질 않으니, 무작정 조카를 나무랄 수도 잔소리를 할 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먼저 상스러운 반말을 줄여나가는 수밖에. 이따 저녁때는 기필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볼 작정이다. "엄마 저녁 진지 잡수셔." 반말과 높임말의 어중간한 형태라 요상해도 어쩔 수 없다. 갑작스레 극존칭 어미를 쓰면 왕비마마는 늙은 딸이 또 화난 줄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흐흐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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