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추억주머니 2013. 9. 16. 16:52

포쇄에 이어 포도 포스팅. 좀 웃기다. ^^;

아무튼...

 

 

주택을 개조한 연희동 커피집에 갔다가 담벼락에서 발견한 포도넝쿨. 만지지 말라고 눈으로만 감상하라고 옆에 팻말이 적혀있었다. 사람들이 가짜인줄 알고 자꾸 만지나? 암튼 알알이 익어가는 앙증맞은 포도송이를 보며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마침 그 옛날 마당 넓고 부엌 드나들기 엄청 불편한 한옥집 살던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당신 주장으론 평생 열 가지도 넘는 직업을 가져봤다고 하셨지만 가족들이 평가하는 할아버지는 그냥  경제적으론 무능력한 '한량'이셨다. 만주에서 여각, 부산에서 양계장... 등등의 무용담을 듣다보면 뭘 해도 죄다 끝엔 말아먹은 이야기. ㅋㅋ 하지만 그렇게 전해들은 이야기 말고 어린 내 눈으로 관찰하고 경험해 서른 무렵까지 가까이서 지켜본 할아버지의 인상은 좀 무섭고 완고하고 보수적인 마초이되, 아이들을 예뻐했고 서화에도 능했고 손재주가 좋았으며 특히 원예에 일가견이 있으셨다. 어린시절 할아버지댁 마당엔 사시사철 꽃들이 피어났고 옥수수랑 피마자를 수확한 기억도 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포도나무. 집앞 평상 위로 네모나게 쇠 기둥을 올려 여름내 포도덩굴이 그늘을 드리우다가 어느덧 작은 포도송이들이 매달려 익어가기 시작했는데, 취학전이던 내가 할머니 무릎을 베개 삼아 평상에 누워 올려다보며 포도 익기를 기다린 게 딱 요맘때였나보다. 혹시라도 키가 닿는 곳에 매달린 포도송이는 조바심에 못기다리고 연보라색 정도 되었을 때 따먹어보기도 했는데, 그럼 어찌나 시고 떫던지! 뒤쪽으로 안보이는 데서 딱 한알 따먹어도 할아버지는 대번에 알아차리곤 혼을 내셨다. 포도송이 가지에 상처나면 다른 포도알도 병든다고.  그렇지만 징징 울며 혼이 난 뒤 열흘쯤 지나 완전히 익었다 싶은 포도송이를 할아버지는 쪽가위로 똑 잘라 내게 안겨주었다. 알도 성글고 송이도 작은 포도가 한꺼번에 다 안익고 한송이씩 천천히 익는 게 어린마음에 어찌나 원망스러웠던지...

 

추억은 맛과 냄새로 각인된다더니만, 포도덩굴을 보자마자 어려서 설익은 포도를 몰래 따먹었을 때의 시큼떨떨한 맛부터 잘 익었어도 요즘 포도와 비교하면 당도가 상대도 되지 않는 새콤한 포도의 맛이 입안에 감도는 듯했다. 내가 달기만 한 과일(수박, 참외, 배, 멜론, 망고 따위;)은 별로 안좋아하고 새콤달콤한 과일에 탐닉하는 건(포도, 귤, 자두, 사과 중에서도 홍옥과 아오리;;) 어려서 길들여진 입맛 탓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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