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가 있다>는 말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자주 쓰셨던 표현이다. 살림살이가 비교적 넉넉했던 이북 및 만주생활과 달리 남한에 내려와 정착해 살면서는 무엇 하나 당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삶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특히 정치사회 문제에 의심이 많으셨고, 뉴스나 신문을 보시다간 종종 "이놈의 아새끼들 분명 야로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려서부터 익히 들어온 <야로>라는 말의 어감상 나는 그게 일본말이라고 생각해왔다. 급히 찾으실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입에서 흘러 나오는 아지노모도(조미료), 사리마다(팬티) 따위의 아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야로>는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순우리말이었다. 뜻은 <남에게 드러내지 아니하고 우물쭈물하는 속셈이나 수작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고 <이번 일에는 무슨 야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쓰인다. 못마땅한 정국이나 공무원 비리 뉴스 같은 걸 보면서 "무슨 야로가 있다"고 지적하신 할아버지의 우리말 표현은 그야말로 정확했다는 의미다.

지난 금요일 밤 마치 금세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연이은 속보로 한반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초계함 침몰 사건 보도를 지켜보며 내 입에서도 자꾸 그 말이 흘러나온다. "뭔가 분명 야로가 있다." 군사 정보에 완전 무지하고 해군 함정의 구조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 없지만, 아무리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군의 발표와 뉴스 내용은 의문 투성이다. 빤히 침몰한 배의 선체가 뒤집혀 물 위에 떠있는 걸 뉴스 화면에서 봤는데 어젠 그 반동강 조차 떠밀려가 가라앉은 위치 파악이 안 됐대고, 수많은 장병들이 갇혀 있을 선미는 사흘이 지난 오늘에야 겨우 찾아냈단다. 아무리 시계가 나쁘고 조류가 심한 곳이라지만 수심이 그리 깊지도 않은 연안에서 레이더로는 잔해의 위치 파악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요샌 고기잡이도 바닷속 물고기떼를 레이더로 탐지해서 잡던데? 망망대해에 뜬 조각배 하나도 위성과 레이더의 공조만 있으면 찾아내는 게 아니었나? 세떼는 레이더에 잡혀 무려 76mm 대포를 쏴댔다면서?

부디 배 안에 생존자가 있어 다들 무사히 구조되기를 빌고 또 빌지만, 희생자 가족이 아닌 나도 당국과 군의 뜨뜻미지근하고 수상쩍은 태도에 열통이 터지는 판국이니 당사자들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사고 원인 짐작조차 쉬쉬하는 분위기고, 초계함의 작전상 이동은 당연히 명령을 통한 것일 테니 애당초 왜 그렇게 연안 가까이에 접근했는지 이유가 있을 텐데 군사 기밀이라서 그런지, 명령체계의 오류나 작전실수라서 그런지 시원한 해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여권과 주류언론에선 지방선거 앞두고 이런 비극조차 이용하려고 자꾸 북한 개입설을 들먹여 불안감을 조성할 테지만, 진짜 불안한 건 터무니 없이 무너져버린 해상 방어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도무지 신빙성이 가지 않는 군의 사건 개요 발표와 대처도 그렇고 뭔가 중요한 걸 감추느라 말 짜맞추기를 하는 것 같던 함장의 말을 보아도 확실해 보이는 건 현재 <뭔가 야로가 있다>는 심증뿐이다. 부디 실종자들의 극적인 생존 속보와 함께 차츰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속보 나오자 마자 지하벙커에 숨어 <국가 안보회의>를 소집한 뒤 "한점 의혹 없도록 진실 규명에 힘쓰라"고 지시했다는 '그분'의 말에 오히려 의혹의 무게가 실리는 걸 어쩔 수가 없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