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도 2장밖에 안 남았고, 날씨가 하루하루 추워지는 걸 보니... 올해도 후딱 흘러갈 것 같다. 연말이 되면 괜한 조바심에 뭔가 기록을 남겨야할 것 같지만 또 워낙 게을러서 올해는 뭘 하고 뭘 보고 어딜 다녔는지 죄다 아득하다. 

그래도 기억에 또렷이 남은 공연이 있으니, 적어두자.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19. 7월이었던가 8월이었던가 아무 정보도 모르고 있다가 벨로가 스팅 내한 예정되었다고 해서 후다닥 예매 오픈일에 무작정 당일권 예매를 했다. 과거 스팅공연을 함께 다녔던 일행을 떠올리면 석장을 사야겠으나, 요샌 관계가 좀 서먹해진 고로 2장만.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흘러 드디어 10월 5일. 하필이면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정치적 세싸움을 벌이는 중이었고 설상가상 올림픽공원 주변 여러 경기장에선 전국체전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려했으나 담요에다 돗자리에다 소소한 먹거리에다 따뜻한 차와 물이 든 보온병에다가 짐도 많았고, 공연 끝나고 난 시각에 일행이 파주까지 가는 일이 요원하여 차로 움직이기로 했다.

다행히 꽉찬 공원 주차장을 한바퀴 돌고 났을 무렵 한 대가 빠져나가는 바람에 신나게 주차완료. 오후 4시쯤 올림픽공원 잔디마당 도착했다. 둥두르둥둥 울리는 음악 소리에 벌써부터 심장이 벌렁벌렁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록페스티벌 분위기 이 얼마만이냐!

​잔디마당을 한바퀴 두른 담벼락에서 공연포스터 발견! ㅎㅎㅎㅎ 신난다.

입장권을 손목에 차는 팔찌와 바꾼 뒤 입장하니 루카스 그레이엄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한가롭게 공연보는 분위기... 좋다좋다. 신난다. 어깨춤이 괜히 들썩들썩 났다.

5일 출연진을 대충 살피고 유튜브에서 한두곡 골라듣기도 했지만 그저 심드렁했었는데 현장에서 들으니 역시 오.. 노래 좋다. 생김새도 귀엽잖아! 갑자기 확 옷을 벗어 드러낸 상반신은 귀욤귀욤 근육질. ^____^​

​체력딸려서 록페스티벌이든 스탠딩공연은 못다닌다고 선언했지만, 또 막상 이런 현장에 나가보면 없던 체력과 에너지가 막 샘솟는 것 같다. 우리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한두 자리 건너편 깔개에선 반백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중년남녀 관객들이 보였다. 뭔가 덩달아 안심되는 분위기? 젊음의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이놈의 연령주의에 함몰되어 괜히 위축되는 비굴한 태도 좀 버려야할 텐데, 그게 잘 안된다. 남들도 우리 보며 멋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쳇...

이런데 왔으면 치맥은 필수지... 손목에 찬 성인인증 팔찌와 출입증 인증샷도 찍어주고.. ㅋㅋ

루카스 그레이엄에 이어진 무대는 아일랜드 밴드 코다라인. 나로선 듣보잡이었지만 작년엔가 내한공연도 했대고, 드디어 돗자리를 벗어나 스탠딩 구역으로 들어가보니 사운드도 좋고 음성도 좋고 팬들도 어마어마했다. 다들 노래 따라부르는데 우린 다 처음 들어보는 곡이고. ㅠ.ㅠ 에고 미안해라. 째뜬 공연음향이 돗자리에서 듣는 거랑은 천지차이라서 이전 공연도 들어와서 들어볼 걸 후회가 됐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스팅...

스팅 내한공연을 간다고 하면 비아냥거리는 누군가는 맨날 옛날 노래만 재탕할 뿐 최근 노래는 넘 후져서 들어줄 수가 없다는 말도 하지만 흥! My Songs로 세계 투어중인 연주는 아는 노래라도 느낌이 또 달랐다. 나 역시 또 앨범을 살까말까 망설였었는데 공연 들어보고 CD 사기로! 밴드 공연에 어울리게 편곡한 노래들이 새삼 정겹고 좋더라는.​

2년만인가 3년만인가... 다시 본 스팅은 여전히 변함없이 날렵하고 우아하고 멋졌다. 이 아저씨는 대체 목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걸까. 함께 공연온 기타리스트 도미닉 밀러는 확 늙어버린 느낌이던데.. 그래서 요번 공연에서도 도미닉 밀러의 아들이 더 멋진 활약을 보이는 것 같던데 참 나... 랩을 곁들인 편곡도 신나는 코러스도 다 좋았다. 에효... 행복한 한숨. 또 언제 스팅을 보게 될까? 야멸차게 앵콜 없이 90분 공연이 끝나고 쌩 돌아선 스팅을 아쉬워서 몇번 더 불러보다 우리도 공연장을 나왔다. 자정을 향해 달려가며 차에서도 계속 스팅 노래들을 들으며 행복한 마무리. 


Posted by 입때
,

꼭 보고 싶어 탐내던 전시였는데 9월을 허송세월한 관계로 놓치는 줄 알았다가, 중앙박물관에서 10월 20일까지 연장전시를 해준 덕분에 간신히 보고 왔다. 진경산수화도 좋고 실경산수화도 좋고... 색채 화려한 인상파 그림이나 샤갈, 마티스 등등도 다 좋지만 우리 옛그림도 진짜 볼수록 아름다워 빠져든다. 어떻게 화선지나 비단에 붓으로 그렇게 섬세한 묘사가 가능한지 원!

문제는 이 전시 보기로 하고 전날밤에 하필 무지막지한 과음을 새벽까지 했던 관계로... 술이 덜 깨고 속이 메슥거려서 ㅠ.ㅠ 속속들이 찬찬히 다 보지 못하고 중간중간 탈진해 의자에서 쉬어야 했다는 점. 

최악의 컨디션이었음에도 눈을 뗄 수 없는 그림들이 너무 많았다. 

금강산과 총석정을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에고 빨랑 금강산관광 재개되어서 나도 좀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에 남북교류 한참 가능할 때는 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들었을까. 금강산관광은 그냥 울 아버지 같은 노친네들이나 안보관광으로 가는 건줄 알았다는;; 

암튼... 그 옛날에도 새하얀 도포자락 휘날리며 풍경 좋은 산에 꾸역꾸역 힘들게 올라가 경치 보고 좋아라하고 그림으로 남기고 그러던 풍습은 요즘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싶다.큼지막한 풍경화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사람들 찾기 놀이도 매번 즐겁다. 

양반네들의 평생 소원인 금강산 안내를 도맡느라 수시로 동원되었다는 주변 사찰 스님/중들은 뒷모습에서도 귀찮음과 피곤함이 느껴졌던 건 순전히 내 감정이입 때문이었겠지. 

하여간... 핸드폰을 꺼내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휘청휘청 보고 다녀서 그림 사진은 하나도 안찍고 돌아 나오다가 포스터만 달랑 찍어왔다. 순전히 기록용...

 

Posted by 입때
,

조선, 병풍의 나라

놀잇감 2018. 12. 26. 19:47

전시는 12월 23일까지여서 10월부터 중앙박물관 지도 전시회랑 같이 보러가려고 별렀으나 결국 지도 전시는 놓치고 이것도 끝나기 나흘 전에 겨우겨우 보러 갔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처음 가본 건데... 대기업에서 홍보용이든 탈세용이든 아니든 작품 소장하고 미술관 운영하는 거 난 찬성일세. ^^;

전시는 생각보다 넘 좋아서 여러번 감탄했다. 서양 문화에선 그림을 일단 벽에 턱 걸어놓고 상시 감상을 하는 편이라면 겸손을 군자의 미덕으로 여기는 동양에선 병풍이나 족자로 그림을 갖고 있다가 가끔씩만 꺼내서 감탄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혼자 보기도 아까워서 좋은 그림을 감상할 양이면 친구들 지인들 불러다가 핑계김에 술도 마시고 시도 막 읊고.. 그림 감상이 풍류의 일환인 거지. 그렇다면 내가 허세 떨듯 미술관 구경다니는 것도 내 나름의 풍류 취미라고 우겨야겠다.  ​



설명도 없이 사진만 무진장 찍어와서 더 뭐라 적을 이야기도 없다.

그냥.. 전시는 좋았고, 병풍의 종류가 어마어마했고, 그림속에 모두 각각의 이야기가 담겨있었고, 구석에 작게 보이는 게 한 마리, 꽃 한 송이, 벌레 한 마리도 그냥 괜히 그려 넣은 건 없었다. 그리고 기록화 느낌의 병풍은 사진기 없던 시절 옛날 사람들이 '참석 인증샷' 정도로 나눠갖던 기념품 역할도 많이 했던 모양이다.  ​

이토록 화려한 병풍을 실컷 보고 집에 오니, 차례와 제사 때 세워두는 우리집 병풍이 어찌나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ㅎㅎㅎ 

좌: 해치. 기린, 백탁, 천록... 뿔달리고 몸뚱이에 털이 얼룩덜룩한 상상의 동물을 도무지 분간 못하겠다. 이건 뭐라고 적혀 있었더라. +_+

중: 살아있는 오징어가 헤엄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게 틀림없다! 

우: 조개와 해당화도 각각 무슨 의미가 있었는데 ㅠ.ㅠ ​

세계지도를 그린 병풍도 있고..

평안 관찰사가 부임하는 모습을 그린 거라던가.. 암튼 평양 시내를 그린 병풍도 있고!

​청설모가 토종 다람쥐를 몰아낸 외래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어디서 잘못 들었나? 암튼 옛날 병풍 속에도 청설모가 있더라!

설치류 싫어하는 내 눈에도 좀 귀여워보여서 얘만 클로즈업해 찍어보았다. 








놀라운 자수 병풍도 있었고...


궁궐에서 열린 연회 장면을 그린 병풍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궁중 화원들이 행사를 지켜본 뒤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조감도처럼 실제보다 더 장엄하게 그려 넣었겠지. 

사람들 한사람 한 사람 표정이 다를 때도 있고 재인들의 춤사위가 살짝 다른 것도 찾아보는 묘미가 있다. 물론 그렇게 자세히 보려면 멀미가 필수.. ㅋㅋ

오디오 가이드 대신에 박물관 앱을 깔고 이어폰으로 설명을 들었는데 버그가 있는지 자꾸만 튕기고 에러나고... 자수 병풍 몇개는 송혜교 목소리로 작품 설명이 나왔고, 아모레퍼시픽 회장님이 직접 설명 녹음도 했던데 그건 쫌;;; +_+ 굳이 왜 그렇게까지! 

하여간에 뿌듯한 관람이었다. 기념품가게에 들러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전통문양이 들어간 마스킹 테이프 하나만 사왔음. 

어디 가든 기념품을 사들이는게 수렵채집인으로서의 DNA 때문이라는 어느 인류학자의 말을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 







Posted by 입때
,

원주 나들이

놀잇감 2018. 11. 21. 16:59

​올해는 정말 원없이도 놀러다닌다. 

인생의 전환기를 맞아 주변에서 누구는 심히 아프고, 누구는 갑자기 떠나버리고, 나 역시도 건강을 자신하지 못하게 되면서 모두 조바심을 냈다. 보고 싶을 때 망설이지 말고 만나기, 하고 싶은 일은 주저하지 말고 저지르기, 싫은 일은 싫다고 티내고 동조하지 말기, 행복한 일 기쁜 일만 하고 살기... 따위의 결심을 하자고 단합? 같은 걸 하게 된 거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누가 어디 갈까? 그러면 무조건 오케이! 하며 따라다녔다. ^^ 물론 그래서 행복했고, 힘들 때 그날의 사진들을 꺼내보며 조금 위로가 되었다. 이런 날들이라도 무기력하게 늘어져 낙담하고 나쁜 생각만 하면서 허투로 보내진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원주에 있는 박경리 문화공원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노란 공작단풍잎과 빨간 단풍잎이 정말 카페트처럼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우와... 찬란한 저 색깔좀 보소.. 비가 내려 색이 더 진해 보인다.

박경리 선생이 글을 쓰시던 방에 쌓인 책더미를 보는데 얼마전 책장 정리하기 전까지 내 방 꼬라지랑 똑같아서 슬몃 웃음나고 정겨웠다. 가운데는 반려묘상... 오른쪽 큰 책상엔 원래 재떨이가 놓여 있어야하는데 ^^; 유치원생들부터 체험학습 몰려오는 학생들 교육상 나빠서 치웠다는 후문. 남성 작가나 화가였여도 재떨이를 굳이 치웠을까 궁금타. 



​친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는데... 혼불문학관이며 윤동주 문학관엘 가봐도.. 작가는 역시 필체가 예술가답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도 내 편견인가?

암튼 '원고지에 쓴 육필원고'라는 말을 요즘 아이들도 그렇고 후대 아이들도 박물관에서다 보는 유물로 알겠지. 

난 학교 다닐 때 원고지에 독후감 써서 상받고 그랬는데. ㅠ.ㅠ 

우리집엔 문방구에서 파는 빨간 선 원고지 말고 검정색이나 초록색으로 선이 그려진 '출판사용 원고지'가 굴러다녔다. 아마도 아버지가 대학출판부에서 쌓아 놓고 쓰는 비품 원고지를 집에다 가져다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난하고 알뜰한 부모님이 출판사에 다니던 지인에게 얻어다 둔 것일 수도 있겠고.. 암튼 대학 이름이나 출판사 이름이 인쇄된 그 원고지에 글을 써서 내는 걸 창피해하던 유년의 내가 기억난다. 


​이날 답사의 하일라이트는 그간 여러번 별렀으되 입장료가 하도 비싸고 멀어서 가지 못했던 '뮤지엄 산'. 제임스 터렐관이던가 깜깜한 통로로 들어가 빛의 예술을 보는 별관 관람까지 무려 2만5천원이던가 암튼 거금을 들였으나 한번쯤은 아깝지 않다 싶었다. 

안도 타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질감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여긴 확실히 물과 빛을 잘 이용했다는 느낌이 들어 아름다웠다.

누가 일부러 가져다 놓기라도 한듯 조르륵 물살에 밀려 흔들리던 단풍잎도 예쁘고...​

색깔을 주제로 열린 특별전이었던가... 대작들이 많았는데 현대미술은 보는 눈도 없고 추상화엔 좀처럼 감흥을 잘 못느끼는 내눈엔 그저 그랬다.

로비에 있던 백남준의 작품(왼쪽) 마네킹 때문에 좀 무서웠지만 오래된 자동차는 맘에 들어서 굳이 찍어옴.


뒷마당의 둥근 돌무덤들은 경주에 있는 고분군을 형상화했다는 ​것 같다. ​

미술관 로비엔 엄청 비싼 자코메티의 조각품도 자리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서 재미났다. 그치만 난 예전 자코메티 전시도 본 사람이라 뭐 그 정도 소품은 쿨하게 패스~. 사진도 안 찍었다.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잘 찍어올 재주도 없었고...


Posted by 입때
,

남편따라 베트남에서 지내다 잠시 귀국한 친구와 쌓은 5월의 추억 기록이다. 아이클라우드 용량 절약을 위해 사진 지우기 전에 후다닥 아까운 사진만 여기다 퍼놓았었는데 뒤늦게 정리한다. ㅠ.ㅠ 


​여긴 북촌의 무슨 공방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주방인듯한 문짝에 조르륵 올려둔 고양이 인형이 예쁘다.

​이 얼마만에 보는 펌프인가! 옛날 친가, 외가 마당에 모두 이런 펌프가 있었다. 빨갛게 녹이 슬었는데도 맑은 물이 올라와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몇년전에 월요일마다 엄마가 애청하시는 <우리말겨루기>에 '마중물'이 문제로 나왔는데, 엄마랑 나랑 동시에 답을 외쳐 서로 쳐다보며 웃었더랬지.

익선동의 어느 카페 마당이었던듯. 이때 가보고 오래된 좁은 골목과 학옥집들이 맘에 들어서 누굴 시내에서 만날 때마다 일부러 약속장소를 종로쪽으로 정해 거의 반년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갔더랬는데 벌써 이미 많은 곳이 변해버렸다. 아직 골목 곳곳에서 살림집으로 살고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얼마나 시끄러울까 걱정되 되고;;

 

 

​같은 날 세운상가엘 왜 갔더라? 뭔가 행사가 있다는 안내문을 받았던 것 같다. 옥상에서 작은 공방 좌판이 열려 있었던 건 별 흥미가 없었는데, 그 옆 전시실에서 빈티지 그릇 벼룩시장이 열려 반색하며 구경했다. 


언제부턴가 종로구에선 한옥집들을 사들이고 개조해서 한옥문화원이라든가 한옥 체험관이라든가 한옥도서관으로 일반에 공개를 하고 있다. 궁궐 쌤들 따라서 북촌 답사 따라갔다 발견한 보물 같은 한옥집들을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워서 친구들도 데려갔다. 당연히 다들 어찌나 좋아하던지. 한 여름에도 누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정말 시원하다. 이날은 비가 와서 나름대로 또 운치가 있었던 기억...​



Posted by 입때
,

또 자수

놀잇감 2018. 2. 21. 22:37

새해 들어 또 다시 번역일은 개점휴업 상태다. ^^;

불안감 탓인지 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멍하니 놀기만 하기엔 식충이스럽고... 손목은 아파도 뭔가 생산적인 노닥거림을 하는게 확실히 시끄러운 정신 가다듬기에 도움이 된다. 한땀한땀 수를 세며 샘플 사진이나 도안과 자수를 비교하고 있으면 정말로 잡생각이 들 수가 없다. 혹시라도 잡생각이 삐지고 들어온 순간 바로 틀려 풀어야하는 사태 발생! 귀찮아서 풀지 않고 개성이라 우기겠다 맘먹은 부분도 많지만, 책에 있는 도안이 아니고 인터넷을 뒤져 시도해 본 '작품'들도 이 정도면 됐지 싶어 대체로 흡족하다. 









Posted by 입때
,

눈이 왔는데;;

투덜일기 2018. 1. 31. 22:26


어제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처음엔 정말로 재가 날리나 싶었던 가는 눈발은 어느틈에 함박눈으로 변했고 두어시간 사이 수북하게 싸였다. 해저문 저녁 왕비마마 등쌀에 또 내려가 아픈 손목으로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었다. 이젠 정말 이 건물에 눈 쓰는 사람이 나 아니면 울엄마뿐이다. 아래층 101호 아저씨는 늘 한밤중에 귀가해 오전내내 자는 것 같고 (그래서 종종 밥때를 놓쳐 마당에 묶인 개가 한밤중에 쇠사슬을 쩔그럭거리며 빈 밥그릇을 발로 차는 게 아닐까) 새로 102호 이사온 사람은 얼굴도 본 적 없고 가끔 밤에 불이 켜진 것만 보았는데... 어제 보니 마당 눈을 밟고 망설임없이 집으로 들어갔더라. 하긴 나라도 이런 집에 세들어 살면서 마당 쓸기 의무를 느꼈을 거 같진 않다. ㅋㅋ 그러나 또 착한 나와 엄마는 맨날 아래 두 집 현관 앞과 계단까지 눈을 쓸어준다. 야박하게 계단에서 우리집 현관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만 내는 건 또 좀 아니다 싶어서... 다행히 어제 눈은 별로 수분이 없어 무겁지 않았고 금방 쓸렸다. 다행히도.

째뜬 아마 무릎이 아프지 않았으면 오늘 신이 나서 눈 밟으러 동네 앞산에 올라갔을 텐데 ㅠ.ㅠ 나중을 기약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참았다. 미끄러운 눈길에 발목과 무릎에 힘주어 걷다보면 멀쩡한 다리도 퍽퍽한데, 괜히 넘어지기나 하면 큰 낭패. 못 간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바닥 울퉁불퉁 안 미끄러운 패딩 부츠 신고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 나무에 쌓인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투덜투덜 커피나 마시자 생각하며 휴대폰에 든 설경 사진을 되돌아보는데, 어랏 맞다, 적년 겨울엔 앞산에 눈 구경 가서 동영상도 찍었었지! 하는 깨달음. 그리고 마침 어제 여기 동영상을 직접 올리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겠다, 곧바로 활용해야지.

휴대폰 스피커로 듣는 바람 소리랑 컴퓨터 스피커 바람소리는 확실히 다르다. 그간 계속 욕만 했는데 ㅋㅋ 새삼 쓸만한 티스토리.

그치만 동영상 초보라 가만히 못 들고 있고 이리저리 휘둘러대서 좀 어지럽다고 미리 고백함. ^^;; 





Posted by 입때
,


2018년에 본 첫 그림전시는 뜻밖에도 신윤복과 정선 그림이었다. 2017년 마지막 본 전시가 고궁박물관 희정당 벽화 총석정 그림이더라니.. ㅎㅎ 뭔가 절묘한 인연의 연장선? 

동대문 DDP에서 몇년전부터 계속 간송미술관의 수장고에 첩첩이 쌓여있던 미술품들을 교체전시하고 있는데, 혜원의 전신첩과 정선 그림을 야금야금 나눠 보여주는 바람에 꽤 여러번 갔었지만, 요번처럼 혜원 전신첩을 대거 한꺼번에 구경한 건 처음인 것 같다. 영하 18도 예보가 있던 날 하필 이 전시를 보러 가자고 그랬을 때는 에이... 이왕 혹한을 떨치고 나간 거, 바로 직전 포스팅에 적어두었던 기대전시 중 하나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막상 가서 보니 그저 좋았다. 

혜원과 겸재의 그림만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옛 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디지털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나 나의 편견으로 괜히 꽁해가지고는 나는 원본이 좋더라, 특히나 디지털로 되살린 현대 미술품 나는 원래 안 좋아해! 라며 궁시렁거렸었는데 ㅋㅋ 그 또한 막상 보니 좋았고 으아~ 감탄한 작품도 있었다. 아이고 민망하여라. 앞으로는 '나는 원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말 함부로 안하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했다. 절대고, 원래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좀 변하기도 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말이야...  간송도 요즘 트렌드에 어쩔 수 없이 기개를 꺾었는지, 휴대폰으로 플래시 안 터뜨리면 원본 사진도 찍게 해주더라. 물론 작품 보호를 위해 조명을 하도 컴컴하게 해놔서 잘 나오지는 않지만서도..

해서.. 원본 대신 입구에 진열된 혜원 전신첩 설명을 찍어왔다. 어차피 그림 제목도 혜원이 정한 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편의상 붙인 것인데, 그 아래 요즘 유행하는 언어로 붙여놓은 태그 글귀들도 기발하고 재미났다. #BGM빵빵 #알콜뽀샵 #사대부스웩.. 막 이래! ㅋ

2018년 5월까지 넉넉하게 계속 전시한대고, 입장료는 입장료는 10,000원이다. 


혜원전신첩이 총 30점인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ㅎㅎ


혜원 전신첩에서 특히 유명한 <단오풍정> <쌍검대무> 같은 그림 속 의상을 고급지게 만들어 마네킹에 입혀 전시해놓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좀 섬뜩하지만 ㅋㅋ 실제로 볼 땐 캬... 한복이며 옷감 예쁘다고 그 앞에서 침을 흘렸다. 

신윤복의 그림 속 주인공들을 모두 모아 한편의 애니메이션처럼(고흐의 작품들로 만든 <러빙 벤센트>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야기를 꾸몄고, 쌍검대무의 무희들은 특별히 따로 춤추는 장면이 나타났다. 혜원 전신첩 중에서 <쌍검대무>를 특히 좋아하는 편이고 그림에서 바람이 슝슝 나오는 것 같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그 느낌을 동영상으로 보니 또 나름 좋더라. 

단점이라면... 영상 화면이 나오는 벽이 너무 길어서 한눈에 볼 수가 없다는 아쉬움이;; ㅠ.ㅠ 당연히 내 실력 탓이지만 동영상도 잘 담아내지 못했다. (그나저나 나 여기 동영상 직접 올리는 건 처음인가 보다! 이런 기능 있는줄 왜 몰랐지? ㅋ)


겸재 정선은 서른여섯 살엔가 처음 근처 현감으로 부임한 친구 이병연의 초청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고는 그때부터 70대가 될 때까지 여러번 금강산 그림을 그렸는데, 연도별로 점점 더 호방하고 세련되게 숙련된 필치로 발전해나가는 그림체의 느낌이 확연히 보인다. 초심자땐 누구나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만, 원본에 집착하게 되는데 나중에 노련해지면 최선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느라 생략의 묘미도 막 부리고 그런 거지...

암튼 금강산 그림들이 담긴 겸재의 전신첩도 멋드러졌으나 사진엔 그 맛이 하나도 담기지 않아 죄다 삭제해버렸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한 점 선보이자면...

<해악전신첩>에 든 '내금강산도'일 거다


이 금강산 봉우리 사이사이에 현대적인 도시를 접목시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디지털 작품은 이런 느낌이다.

위 그림에선 케이블카가 지나가고, 아래 그림에선 잘 찾아보면 남산타워, 에펠타워도 있으며 9분인가 7분인가 작품이 상영되는 동안 불꽃놀이도 벌어지고 그런다. 

금강산의 4계절의 변화 모습도 있던데 그건 좀 너무 속도가 드려서 답답한 느낌이라 빨리감기 버튼이 어디 있으면 막 누르고 싶었었다. ㅎㅎ

금강산 <총석정>은 금강산 앞바다에 있는 주상절리 '총석' 꼭대기에 세워진 정자 이름이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너무도 궁금한 총석정 그림을 희정당 벽화로도 보고 겸재 그림으로도 보고... 평창 올림픽엔 북한 선수들이 오고... 언젠가는 정말 금강산 총석정 구경을 나도 할 수 있을까? ㅎ 

둘의 느낌이 비슷한가? ^^;; 


아래는 맨 마지막 전시실 디지털 작품인데... 기다란 벽 화면에 화려한 꽃들과 풍경이 눈부시게 연이어 펼쳐진다. 한참을 구경하며 핸드폰으로 찍으려고 이리저리 애를 써도 색감이 죄다 날아가버려 포기하고 아쉬워하며 뒤를 돌았더니 뒤쪽 거울에 비친 화면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옳타구나 찍어오긴 했는데 이제보니 내 실루엣을 확 오려버리고 싶다. +_+


말도 안되는 혹한에 며칠째 두문불출하다 게으름 떨치고 나간 외출이라 특히 보람있고 좋았다. 이날 동대문에 간 바람에 드디어 자수실과 브로치 재료도 사왔다. (곧 자수 포스팅이 이어진다는 예고다. ㅋ)





Posted by 입때
,

드디어 여행기의 끝이다.

봄에 다녀온 여행 후기를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고 겨울에.. 그것도 올해의 마지막날 마무리하고 있는 나는 뭐냐. 언제나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앗뜨거라 일을 마무리하는 성격을 끝내 못버리고 살다 죽겠지. ㅎㅎ

한국에선 계속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자다말고 자꾸 깨어나는 바람에 자도자도 피곤한 날이 이어졌는데 여행하는 동안에는 친구랑 한 침대에서 자는 날이 많았는데도 막판엔 거의 눈감았다 뜨면 아침일 정도로 숙면을 취했다. 그만큼 차 타고 돌아다니는 일이 노곤한 때문이기도 하겠고, 내가 여행하며 놀러다니는 걸 즐기는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암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쥐죽은 듯 소리없이 자던 친구도 나도 어느덧 나이가 들어 골골 코를 고는 중년 아줌마가 되고 말았지만 서로의 소음이 별로 잠에 크게 방해가 되진 않았다. 살짝 시끄러워서 이리저리 돌아누우면 옆에서 알아차리고 서로 잠든 자세를 바꿔주었다. 그럼 또 언제 그랬나 싶게 쿨쿨쿨..

미국이 테러위협 때문에 출입국 심사를 강화해서 공항에 4시간 전에 나가야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출국날 기상시간은 무려 6시 15분이었다. 12시 40분 출발 비행기인데 도대체 왜?! 에효..

하여간 7시에 후다닥 집을 나서 LA E언니네 집에서 다시 차를 바꿔타고 넷이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LAX 공항 에서 짐을 부치고 로비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보름간의 여행을 죽 돌아보니 참 많은 것들을 보고 먹고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계획과 예약, 결산뿐만 아니라 운전도 거의 도맡았던 E언니에겐 정말 뭐라 감사를 해야할지... 그치만 E언니는 또 2015년에 세자매+1 멤버가 한국 다녀갔을 때 제주도와 일본 여행을 계획했던 나의 수고에 대한 빚을 갚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땐 까탈스러운 둘째 I언니와 천진난만하기만 한 어린 올케 때문에 살짝 조마조마한 순간들도 많았는데 ^__^ 요번엔 넷이 다니며 의견이 심하게 안맞는다거나 기분 상하는 순간이 정말로 단 한번도 없었다! 다들 무던한 성격이기도 하려니와 E언니가 워낙 철저하게 준비하고 넉넉하게 베풀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첫날 걷은 회비는 터무니없이 적었던 것 같다. 나중에 샴푸며, 치즈, 비누, 헤어롤 빗까지 E언니는 바리바리 선물을 안겼다. 나중엔 또 와서 동부 한바퀴 같이 돌자! 아니면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만나든지! 그러면서... ㅎㅎㅎㅎㅎ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물론 나의 친구 S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여행보다 한국에 나오는 걸 더 좋아해서 문제지만 ㅋ 

친구 S는 1년 안에 어쩌면 올해 안에도 직장을 때려치우고 한국행 비행기를 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서(아시아나 마일리지가 쌓이는 신용카드를 쓰고 있어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늘 마일리지로 장만하기 때문) 나로선 이별이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K언니는 E언니와 헤어져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인천공항과 달리 LA공항은 에스컬레이터 입구부터 비행기 티켓 소지자만 올라갈 수 있더라) 살짝 눈물을 훔쳤다. 그 마음 저도 알지요...

면세점에서 왕비마마께 드릴 뇌물로 립스틱을 하나 골라 사고는 라운지를 좀 돌아다니다 별로 살것도 없다며 소파에 앉아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조명이 마음에 들어서 찍은 딱 1장의 LA 공항 사진이다. 바깥날씨는 여전히 미세먼지 1도 없어 보이는 청명함 그 자체. 

공항 에너컨이 너무 빵빵해서 춥다며 셔츠를 꾸역꾸역 입고 있었는데, 비행기에 오르고 나니 이상하게도 비행내내 너무너무 더웠다.

비행기는 대체로 추워서 담요를 막 2개씩 꽁꽁 두르고 있어야하는 곳 아니었던가?

내 체온이 높아져서 그런 게 아니고, 후드티 입고 탔던 대학생 남자애들은 너무 덥다며 몇번이나 승무원들에게 불평을 할 정도로 정말 비행기 안이 덥고 답답했다. 참 이상한 경험...

그리고 한국에서 출발했을 때는 영화 딱 3편 보니깐 LA 도착해있었는데.. (11시간 걸린다)

돌아올 때는 ㅠ.ㅠ (13시간으로 늘어남!)

비행기 타자마자 1시간쯤 있다 비빔밥으로 점심먹고 나서 내리 영화를 3편이나 봤는데 시간이 딱 절반 지나 있었다. 으어어....

<히든 피겨스>, <재키>, <공조> 3편을 내리본 뒤엔 멀미가 나서 더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콜드플레이의 GHOST STORIES 공연실황을 보며 여행 떠나기 전날 보았던 잠실 주경기장 공연의 감흥을 되살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를 보고도 비행시간이 한참 더 남아 있어 너무도 괴로워하며 비행기 뒤쪽 공간에서 서성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 팍팍한 현실로 돌아가기도 왜 이렇게 힘이 든 것인지.

장거리 비행기를 탄 여행이 워낙 간만이어선지 좁은 비행기좌석에서 열시간 이상을 버티는 게 정말 너무너무 고역이었다. 동유럽과 스페인, 그리스, 남미 같은데로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막상 계획을 세울 때는 그 막막하고 오랜 비행시간 때문에 겁부터 좀 날 것 같다. 조금만 더 오래 있었다간 폐소공포증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착륙때 창밖만 내다보지 않으면 비행기에서도 고소공포증을 느끼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LA에선 분명 4월 30일 일요일 대낮에 출발했는데, 한국에 도착한 건 꼬박 하루도 더 지난 5월 1일 오후 6시였고,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답답한 공기만큼 탁하고 뿌연 인천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Posted by 입때
,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인 토요일. 매일같이 호텔 조식을 챙겨먹던 습관을 깨면 안된다면서 ^^; 친구는 전날 마켓에서 사온 버터식빵을 굽고 달걀 프라이 한개를 곁들여 커피와 함께 아침상을 차려주었다. 

원래는 친구 부모님 댁에 들러서 인사도 드리고 가져간 홍삼 선물도 전달할 계획이었지만, 쿨한 어머니께서 오지 말라고 전화를 하셨다. 몸이 좋지 않아 손님 맞을 형편과 기분이 아니라고... 친정 엄마랑 만나면 괜한 잔소리 듣는 게 일이라면서 친구 S도 차라리 잘됐다고 했다. 물론 사실 나도 어르신들께 인사드리는 거 부담스럽고 싫었다! 만세이~ ㅎㅎ

더욱 여유로운 아침 시간... 전날 돌려두고 잔 빨래를 건조기로 옮겨 말린 뒤 차곡차곡 개며 벌써부터 슬슬 돌아갈 짐가방을 쌌다. 외출해서 종일 돌아다니고 밤중에 들어오면 짐 챙길 시간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

이날의 일정은 일단 S의 LA 친구들이자 나와도 안면이 있는 J님의 집들이에 가는 것이었다. 각자 먹을 것을 한두 가지 담당해 싸가지고 가는 식이었는데, 친구S는 워낙 요리와도 담쌓은 데다 전날까지 빡세게 서부일주 로드트립을 하고 온 걸 감안하여 디저트와 과일을 '사가기로' 담당했었다.

행선지는 그라나다힐스애서 LA를 거쳐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야하는 피코 리베라. 주말이라 차가 안막히면 4,50분쯤 걸리는 곳이란다. 

화창하고 구름 한점 없는 날씨! 드디어 하늘색 미니의 뚜껑을 열고 좀 달려보기로 했다. 미친년 꽃다발처럼 너풀거리는 머리칼과 볼살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일종의 실험? ㅋㅋ

이날 찍은 미니 시승 사진을 여행기 첫편에도 올렸었지만 ^^; 암튼 속도계에 보이듯이 시속 2,30킬로미터까지만 뚜껑 열고 달리기에 적당한 느낌이었다. 시속 40킬로미터를 넘어서면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근데 또 너무 차가 빨리 달릴 땐 바람의 저항 때문인지 뚜껑을 덮는 게 불가능하단다. 로컬(지방도로의 의미?)에서 기분 낸다고 뚜껑 열고 달리다 어리바리 닫을 때를 때를 놓쳐 그대로 고속도로를 타게 되면 꼼짝없이 목적지까지 미친바람을 맞으며 가는 수밖에 없다고... ㅎㅎ

친구가 이미 겪어본 일이라나. 해서 우린 고속도로 진입 전에 얼른 뚜껑을 닫고 음악을 틀었다. 으음.. 미니를 장만한다고 해도 난 원래 컨버터블을 살 마음이 없었지만, 컨버터블이 아니어도 장거리 고속도로를 달리는 용으로 만들어진 차는 아니란 걸 완전 실감했다. 승차감이 어찌나 나쁜지! 게다가 뒷좌석은 또 얼마나 좁은지! ㅋㅋㅋ 예쁘니깐 다 용서가 되는 차이긴 하지만, 클래식하고 귀여운 외관과 달리 운전하는 느낌도 꽤나 육중하고, 일단 내 형편으론 한국 가격이 너무 비싸!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미니쿠페는 나의 (현실을 감안한) 드림카 목록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ㅠ.ㅠ

LA를 지났을 때쯤이던가... 고속도로에서 배트맨이 탔을 성 싶은 길쭉하고 희한한 차 발견! 그러나 워낙 빨리 슝~ 지나가버려 제대로 못찍었다. 미국 고속도로에선 생김새도 색깔도 워낙 다양한 자동차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맥퀸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카> 주인공들이 막 도로에서 돌아다녀! ㅎㅎ

J님의 타운하우스엔 우리가 1착으로 도착. 한국에서 공수한 조각보와 커튼으로 정갈하게 꾸며진 집구경에 나섰다. 한국도 타운하우스가 유행이지만... 나도 능력이 된다면 아파트의 편리함과 단독주택의 독립성이 혼합된 타운하우스에 살고싶다. ㅠ.ㅠ 

곧이어 도착하신 분들이 한아름씩 안고 온 음식 덕분에 화려하고 어마어마해진 잔칫상을 보라! +_+ 이 중 떡볶이와 김밥만 '사'가지고 온 것이고 나머지는 다 손수 놀라운 솜씨로 만들어 온 음식들이다. 정말.. 배가 찢어지도록 과식을 했다. 친구 S는 넘 느끼하다고 괴로워했지만 내 입엔 해산물 크림 파스타가 단연 최고! 느무느무 진하고 맛있고 푸짐했다. ㅎㅎ

맛있는 두 종류 김치부터 시계방향으로... 해산물 크림 파스타, 떡볶이, 도토리묵 무침, 잡채, 김밥, 오징어 및 야채 튀김의 순이다. 내가 찍은 사진 아님 ^^;;

우리가 사간 케이크는 결국 꺼내지도 못했던 디저트 테이블...

예쁜 약식 또한 C님이 손수 만들어오신 것인데... 한국서 날아온 나 때문에 죄다 특별히 좀 더 신경을 쓰셨다고 해서 감동을 받았다. 내가 뭐라고;; ㅎㅎ 

배가 너무 불러서 거의 각자 여기저기 소파와 식탁 의자에 널브러져 괴로워하던 차.. 우리는 언니들의 호출을 받았다. 두 언니는 <라라랜드>에 나온 명소인 해변과 시장(?)을 돌아보고 쇼핑도 하며 하루를 보냈으니, 출국 전날 저녁은 다시 또 다 함께 만찬을 즐겨야하지 않겠냐는 것. 암요, 그래야죠. 

LA 시내 E언니 집에 친구의 차를 세워놓고 다시 넷이 한 차로 옮겨타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은 LA 바로 옆에 있는 올드 패서디나. 쇼핑가와 음식점들이 많이 모여있는 나름 관광지? 고급 부티크도 있고, 일반 쇼핑몰도 많은 거리엔 여행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시아인들이 특히 바글바글거렸다. 

큰 길에서 발레파킹을 부탁한 뒤 안쪽 골목으로 들어서자 곳곳에 예쁜 카페와 음식점들이 이어졌다. 아직 해지려면 먼 캘리포니아 봄의 오후 햇살은 6시가 다 되어도 뜨겁고 강렬했다. 

우리의 마지막 만찬은 또 다시 이탈리아 음식 사촌인 그리스 음식. ㅋㅋ 미국식 대형 스테이크를 부담스러워하니깐 젤 만만한 게 파스타 종류일수밖에. E언니가 예약해둔 '산토리니'는 K언니도, 친구 S도 예전에 가본 곳이라고 했다. 나만 처음이야! S는 배가 너무 불러서 늘 시키던 그릴드 깔라마리 (구운 새끼 오징어? ㅋㅋ) 한두 마리만 먹고 말 거라며.. 2주 가까이 이어지는 먹부림 고문에 괴로워했다.   

식당에 올라갈 때만 해도 내려와선 야심차게 디저트로 젤라토를 먹어야지 했으나 나중엔 생각도 나지 않았다 ㅎㅎ



그치만 마지막 만찬인데 그냥 맨숭맨숭 깨작거릴 순 없지... 저는 상그리아도 마실래요! 

이 사진의 햇살과 분위기를 보고 누군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갔다 왔느냐고 물었었다. 으음... 이왕이면 그리스라고 해주지..

째뜬 이 식당의 이름은 '산토리니'였다니까!

술이 약한 S는 곧 운전을 해야하고, 계속 감기로 고생한 K언니도 알코올은 조심해야 하므로 상그리아는 2잔만 시켰는데, 하필 안에 든 과일 중에 망고가 보여서... 망고 알레르기가 있는 E언니는 맛만 살짝 보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 

내 입엔 완전 맛있었는데... 친구 S는 한 모금 마셔보더니 독해서 싫으시다고...

연일 밤마다 술을 마셔댄 덕분에 여행기간 동안엔 나의 간이 튼튼해졌거나 혹은 알코올에 대한 면역이 생겼거나(둘 다 근거 없는 억측임을 잘 안다) 중독이 된 건지 정말로 저녁만 되면 술이 땡겼었고, 과음한 적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늘 거뜬했다. 요샌 밤에 맥주 한 캔 마시고도 다음날 힘들 때가 많은데.. 쩝.. ㅠ.ㅠ 



K언니가 이날 먹은 메뉴를 나중에 깔끔하게 정리해 보내준 사진이다. 

이제 보니 배부르다면서 많이도 시켰군.. ㅎㅎ 지중해식이라서 건강에 좋다고, 다 살 안찌는 음식이라면서 E언니가 또 이것저것 시켰던 것 같다. 주말에 예약씩이나 하고 와서 네 사람이 음식을 너무 적게 시키는 건 예의가 아니라면서.. ㅎㅎ 하긴, 총 음식값의 20-25%를 팁으로 주어야하니 음식을 적게 시킬수록 팁도 적어질테니 그말도 맞다. 암튼 이번 여행에선 매번 밥먹고 내가 팁을 계산해야하는 스트레스가 없어서 느무도 행복했다! 모든 귀찮은 일을 도맡아준 E언니한테 축복을!


오른쪽은 에피타이저 중에서 일행들이 가장 좋아라 먹곤 한다는 구운오징어. 그릴드 깔라마리 클로즈업한 거다.

개인접시에 덜어서 K언니가 따로 찍어 공유해준 사진. 이게 오징어라고? 꼴뚜기 아닌가? 내가 괜히 따지고 들며 궁금해하자 친구가 그냥 좀 먹으라고... 너 또 집에 가서 이거 해먹을라 그러지! 놀려댔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좀 볶다가 레몬갈릭 소스 뿌리고 시금치 넣으면 완성될 것 같긴 하다 ^___^




마지막날 기념으로  친구와 나의 사진을 찍어 주겠노라고 휴대폰을 들이대는 K언니에게 거의 보름간 얼굴이 이따만한 보름달이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순간이 찍혔다. 너무 웃기기도 하고,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그리워서 스티커를 활용한답시고 마구 공개한다. 

한국에서 간 나는 덥다고 반팔차림으로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데, LA주민인 친구는 춥다고 외투를 걸쳤다. 하긴 전날까지도 아침저녁으론 오리털패딩을 입고 다녔던 친구다. 

6시부터 이른 저녁을 먹고 우리가 나올 때쯤엔 바글바글 음식점 테라스 자리가 한군데도 빈 테이블 없이 꽉 들어찼는데, 음식을 나눠먹는 사람들은 정말 우리밖에 없더라. 서로 '비쥬'를 하며 쪽쪽 친한 척 한 사이도 자리잡고 앉으면, 각자 시킨 음식만 죽어라 먹을 뿐, 절대 한 입 먹어볼래 권하는 법도 없다. ^^;; 우린 또 그게 신기해서 주변 테이블 사람들이 '각자' 매몰차게 밥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와.. 어떻게 피자도 한 조각 안 나눠주고 혼자 다 먹냐며... ㅎㅎ

식당에서 나와선 부른 배를 꺼뜨리느라 잠시 쇼핑을 하기로 했다. 처음엔 눈요기만 할 작정이었는데;; K언니가 남편 선물이며 딸 선물을 마구 고르기 시작하면서, 나도 괜히 갭에 들어가 할인하는 품목 중에 긴 랩스커트와 스트라이프 티셔츠, 모자까지 충동구매를 했다. 그러고 보니 요번 여행에서 치즈와 트러플 오일 말고는 나를 위해  처음 한 쇼핑이었다! 노느라고 쇼핑할 시간도 없는 여행이었구나야...

눈요기하다가 나중엔 언니들과 헤어져 전화통화를 하고서야 겨우 다시 만나, 발레 파킹 부탁했던 자리로 돌아왔는데 와... 우리 앞에서 차를 기다리던 두 아시아인(중국어를 썼다) 아가씨들은 옷부터 핸드백, 신발까지 샤넬로 도배를 했더군. 그러고도 명품 브랜드 쇼핑백을 바리바리 손에 들고 있었다. 어머나 관광객 아닌가봐, 무슨 차 타고 왔나 보자.. 그러면서 지켜보았는데 역시나 주차요원이 가져다준 차도 벤츠였다. 미국에선 벤츠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싸다지만 흠... 

중국 갑부들이 워낙 많아져서 유학보낸 자식들 중엔 그렇게 고급 차와 명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다니는 애들이 많다고 했다. 차이나 머니의 힘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도 구경하다니 오 놀라워라.

E언니의 차에 올라 다시 LA 시내로 들어갔다가, 헤어져 친구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암튼 뭐 그렇게 뿌듯하고 배부르고 꽉찬 여행의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집에 와서 마저 짐을 정리하며 냉장고에 남겨두었던 캔맥주를 또 마셨던가 말았던가... 그 기억은 가물가물.

친구가 팬클럽 활동(?) ^^ 때문에 휴가때마다 거의 1년에 한번은 한국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헤어짐의 아쉬움이 덜했던 것 같다. 예전엔 내가 미국엘 가든 친구가 한국엘 나오든 최소 3, 4년은 있어야 얼굴본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쏟아지며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국내 있는 친구들보다 카톡도 더 자주하지, 1년에 한번 한국에 오면 우리집에서 아예 숙식하며 지내지... 그러다 보니 곧 또 볼텐데 뭐! 그런 마음?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