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21.12.25 엄마들은 왜 그럴까 4 6
  2. 2020.10.02 시든 꽃 1
  3. 2020.02.19 다시 훈련 4
  4. 2020.02.06 아는 병 3
  5. 2020.01.16 닷새만에
  6. 2020.01.14 죽을까봐 불안해 2
  7. 2020.01.14 서러움 일지 1월 14일
  8. 2020.01.13 새로운 증상
  9. 2020.01.07 눈을 감으면 글씨가...
  10. 2020.01.06 양극성장애 2

엄마들은 왜 속마음을 선뜻 털어놓지 않으실까. 표본의 수가 엄청 적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노모 얘기를 하다보면 역시나 공통되는 푸념 하나가 엄마의 말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최소한 세번은 권해야한다는 쓸데없는 '국룰' 때문일까? 바쁘게 돌아가는 21세기에, 모녀지간에 아직도 그러는 건 시간낭비 감정낭비 아닌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요번 엄마 생일에 맛있는거 외식할까요? 아니 됐다. 귀찮게 뭘 나가 먹니. 간단히 집에서 먹자.... 근데 또 열심히 설득에 나서면, 영 싫은 눈치도 아니다. 물론 까칠한 딸의 설득이라는 것이 조근조근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서, 아 몰라! 집에서 밥 차리기 내가 힘들다고요! 뭐든 나가서 먹을 거야! 한중일양식 중에 고르세요. 안 고르면 내 맘대로 정할거야!... 이런 식으로 반협박을 하면 엄만 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솔직히는 원래도 그럴싸한 데 가서 외식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사실 울 엄만 본인의 욕망을 늘 감추고 살며 인고의 삶을 표방하는 어머니상은 아니다. 오래 우울증, 조울증을 겪으시면서 자기방어기제가 생겼는지, 아니면 늘 엄마를 중심으로 (이건 작고하신 아버지의 아내 사랑 영향이 크지만) 위해바치는 태도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종종 내가 "울 엄만 모성애가 부족해!"라고 투덜거릴 만큼 본인 중심의 사고방식을 시전하실 때가 많다. 나의 두 할머니들이 극진한 손주사랑으로 뭐든 손주 먼저 챙겼던 태도와 너무도 달라서 나로선 신기할 정도다. 또 예를 들자면, 울 할머니들은 과일이든 간식이든 웃 어른으로서 제일 먼저 챙겨드리면, 그걸 대체로 나나 어린 손주들에게 양보하셨다. 아니면 아껴두었다가 우리더러 더 먹어으라고 주신다든지. 근데 울 엄만 혹시라도 옆에서 빨랑 먹고 싶어 징징 우는 조카들에게 먼저 간식이나 과일을 챙겨주었다가는 엄청 뭐라고 하셨더랬다. 어른(당신)이 먼저지! 애들이 어디 버릇 없이!!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고는 실제로도 엄마 입으로 가장 먼저 들어감. ㅠ.ㅠ 딸기공주였던 큰 조카와 왕비마마 울 엄마의 은근한 알력 다툼 때문에 ㅋㅋ 옛날엔 따로따로 담은 딸기와 케이크를 동시에 딱 가져다 드리거나, 큰 접시에 공유용으로 내갔을 땐 양손으로 동시에 포크로 찍어 나눠드렸을 정도다.

모든 엄마들이 자식을 위해 언제나 희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성애도 결국 사회를 위한 세뇌이자 이데올로기라는 데 동조함. 그렇기에 울 엄마의 당당한 가모장 태도를 응원하긴 하는데, 먹거리 장유유서와 관련된 원칙은 중시하면서 그 외 사안엔 왜 본인의 속마음을 단번에 내보이는 건 어려워하시는지 모르겠다. 모녀 여행이라도 떠났다가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반응 때문에 얼마나 속이 터졌던가.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여기 더 들렀다 갈까, 말까, 뭘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 앞에서 엄마의 첫 대답은 늘 "됐어." "괜찮아." 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짜증나서 쌩 돌아서기라도 해보면 섭섭한 눈치시고! 어휴.  

엄마도 이젠 내 더러운 성질머리 아실 때도 됐는데, 아직도 습관처럼 "엄만, 됐다. 니 마음대로 해."라고 하는 반응 때문에 속이 문드러진다. 그래서 요새 내가 도입한 방법은 질문하기 전에 먼저 협박(?)을 한다는 거다. 엄마, 딱 한번만 물을 거예요.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ㅎㅎ (물론 이 방법도 잘 안 통할 때가 많다. +_+) 내가 너무 못됐나? 엄마들도 제발 이제 좀 자기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 좋고 싫은 것을 단숨에 입밖으로 내뱉으셨음 좋겠다. 여든살에도 맘대로 못하고 살면 넘 억울하지 않으시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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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

아픈 손가락 2020. 10. 2. 18:58

간만에 리시안서스 한다발을 사다가 꽂아두고 하도 예뻐서 연일 감탄하고 있다. 주로 식탁에 놓아두고 밥 한숟갈 먹고 씹으며 쳐다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데, 희한하게도 엄만 나와 계속 시각이 다르다.

원래도 엄만 꽃을 좋아하면서도 '절화'를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으신다. 생명을 똑 잘라 죽여서 꽃아놓기 때문이란다. 불자의 마음이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예쁜 꽃 좀 곁에 두고 보려고 사온 나로선 좀 심술이 난다.

이번에도 신이 나서 꽃다발을 꽂아두고 이쁘지, 이쁘지? 묻는 내게 엄만 대뜸 "꽃이 꼭 조화같다"고 대꾸했다. +_+ 꽃도 잎도 모두 조화처럼 생겨서 신기하다고. 시니컬하시기는...

리시안서스가 좀 하늘하늘한 꽃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리어카 좌판에서 산 거라 덜 싱싱했는지 사온지 사흘째부터 한두 송이씩 좀 말라가며 시들기 시작했다. 난 가끔 시든 꽃도 거꾸로 말려 오래 두고보는 인간인지라 별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엄만 연일 가위를 들고 시든 꽃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내 눈엔 아직 멀쩡해보이는 꽃도 꽃잎 가장자리가 말랐다며 어서 잘라버려야겠다고. 아니 왜?!

오늘로 닷새째. 아침 저녁으로 두번씩이나 시든꽃을 솎아낸 꽃은 처음 저날보다 거의 3분의 1은 줄어들었는데;; 오늘 저녁 식탁에서도 엄만 밥을 먹는 내내 매의 눈으로 또 잘라버릴 꽃을 찾는 눈치였다. 아 놔 진짜! 아직 다 멀쩡하구만. 엄마, 그냥 제일 싱싱하고 예쁜 꽃만 보면 안돼? 왜 예쁜 꽃 놔두고 계속 시든 꽃만 쳐다봐요? 내가 따지듯이 물었다. 누가 우울증환자 아니랄까봐! 설마 완벽주의 성향 때문인 거야? 

사과를 한 상자 두고 먹을 때 썪은 사과부터 먹는 사람과 제일 잘 익고 맛있는 사과부터 먹는 사람이 있다나 뭐라나, 그게 삶의 태도일 수도 있다는 우화를 읽은 기억이 난다. 썪은 사과는 물론 미리 다 골라내 멀쩡한 사과를 보호해야겠지만... 좋은 거, 맛있는 걸 늘 제일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끼는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다. 그러다가 다 썪히기 십상이고.

디저트로 과일을 먹을 때도 엄만 젤 덜 단 과일부터 먹는다. 예를 들면 방울토마토, 사과, 참외 등의 순서. 먼저 단 과일을 먹으면 다음 과일은 맛이 없어진다나. 의도적으로 노력을 했던건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나는 제일 먼저 좋아하는 과일을 먹는다. 새콤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므로 사과, 참외, 토마토의 순이기 쉽다. 달지 않은 토마토를 맨 마지막에 먹어야 입가심도 될 것 같고. 

우울증 환자의 특징인지, 아니면 없이 산 기억이 있고 아끼는 것이 생활화된 구세대 여성의 특징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반찬을 앞두고도 엄마의 태도는 짜증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기껏 솜씨를 부려 새로 만든 메인 요리를 앞에 두고도 엄마의 첫번째 젓가락질은 '없애버려야 할' 오래된 반찬을 향하기 일쑤다. "저거부터 다 먹어치우자"라는 논리인데, 어차피 그게 마지막이 아닌 경우도 많다. 그냥 새 반찬은 좀 아껴야겠다는 심리일까? 인지능력이 약간 떨어지면서, 시야가 좁아지는지 반찬도 눈앞에 있는 것만 공략하는 느낌이라 요샌 아예 식판처럼 큰 접시에 반찬 할당량을 정해 밥과 함께 담아드린다. 그러면 또 군말없이 새 반찬부터 드시는 걸 볼 수 있다. 

울 엄만 정말 연구대상이다. 나로선 아무리 탐구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명절을 앞두고 엄마 친구들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엄마의 대꾸방식도 참 여전하다. 엄마 친구분들은 병든 엄마를 오래전부터 챙기는 나를 대견해하고 칭찬하시는데, 엄만 맞장구를 치다가도 곧바로 딸 흉을 본다. 소곤소곤 뒷담화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니 듣건말건 상관없다는 태도다.  "맞아, 내가 딸 때문에 사는 거지. 쟤 없었음 벌써 죽었겠지. 근데 쟤가 성질이 드러워서 나랑 맨날 싸워. 잔소리가 말도 못해..."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매번 대꾸가 똑같다. 저렇게 자기 의견에 솔직한데 왜 우울증이지 싶을 때도 있다. 저것도 방어기제인가?

암튼 난 하필 시든 꽃만 유심히 바라보고 매번 썩은 과일부터 골라 먹는 그 비관적 태도에 물들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중이다. 내 눈에 꽃은 대체로 시들어도 예쁜데.  드라이플라워도 있구만요. 남은 것중에 제일 맛있는 사과를 골라 먹으면 매번 끝까지 제일 맛있는 것만 먹을 수 있다는 낙관론, 눈 가리기 아웅이라도 좀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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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훈련

아픈 손가락 2020. 2. 19. 16:46

수년전 금강경 사경을 시작으로, 작년 상반기까지 엄마는 꾸준히 거의 매일 불경이나 불교서적을 노트에 필사 하셨다. 처음엔 그냥 종교적인 신심에서 비롯된 자발적 시도였지만, 독서보다도 훨씬 더 두뇌활동에 자극이 되는 게 바로 책을 읽고 중얼거리면서 손을 움직여 쓰고 다시 확인하는 복합과정이기 때문에 내가 강권하다시피 했고 엄마도 곧잘 협조해주셨다. 하지만 5월 22일을 끝으로 방치했던 노트는 나의 닥달로 9월1일에 딱 한번 다시 한 페이지 필사한 뒤 줄곧 외면당하고 있었다.

작년연말부터 병세가 나빠졌을 땐 온전하게 대화만 가능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으니, 필사는 개뿔. 바랄 수도 없었는데 2월 중순 접어들면서 엄마는 거의 안정적인 상태로 회복되었고, 머잖아 다시 약을 줄여야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번주에 걱정스러운 두번의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일요일인 2월 16일.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는 대뜸 내일 큰아들 생일이지? 라고 물었다. 네? 뭐라굽쇼? 내일이 며칠인데 큰아들 생일? 엄마의 대답은, 11월 17일이잖아....  (큰아들 생일이 11월 17일인 것은 맞다. 건강한 상태였던 몇달 전 그날을 기념해서 엄마가 아들 가족에게 밥도 사주셨더랬다)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냉장고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시라고, 정신 차리라고, 지금이 11월이 맞냐고 물었다.  

잠시 후 11월 아니야? 2월이야? 왜 헷갈렸지? 본인도 의아해하고, 나도 어리둥절함과 속상함 속에서 그냥 넘어가는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어제. 셋째주 화요일. 매달 엄마가 고교동창 친구들과 오찬을 하는 날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전날 저녁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올해는 엄마도 엄마 친구들도 대부분 팔순이 되는 해여서, 1월부터 생일자들이 돌아가서 밥을 사기로 했다는데 1월엔 당연히 엄마 상태가 안좋으시니 불참했다.  2월 오찬은 곧 생일을 맞이하는 울 엄마가 밥값을 내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엄마 본인도 요번엔 꼭 참석하리라 단단히 벼르고 계셨고, 나도 부실한 울 엄마를 종종 보살펴주시는 친구분들(길 잃고 헤매거나 약속장소 헷갈리는 울 엄마 찾으러 출동하기도 하고, 택시 태워 보낸 뒤 나한테 전화도 넣어주시고.. ㅠ.ㅠ)께 뭔가 약소하나마 선물을 하고 싶어서 핸드크림을 사다가 포장을 해두었었다.  엄마 친구분들은 성남시장까지 가서 참기름, 들기름도 짜다가 나눠주시고 막 그러는데 자긴 맨날 받기만 한다고 울 엄마가 징징거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격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전화통화 후, 미리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크림은 다음달을 기약하며 옷방 책상에 올려두었는데...  어제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보니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어랏? 설마... 절에 가는 날도 아니고, 에이, 모임에 가신 건 아니겠지... 생각했으나 핸드크림도 자취를 감춘걸 보며 문득, 취소되었던 모임 상황이 바뀌었나? 생각했으나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집이든 핸드폰으로든 전화가 걸려왔으면 내가 잠결에도 못 들을 리가 없다. 엄마가 우편물 확인하러 내려가셨나보다 했던 현관문 소리가 엄마의 외출소리였던 것이다!

득달같이 카톡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통 답이 없더니 6번째 전화만에 엄마가 휴대폰을 받았다. 예상대로 약속장소인 사당역까지 갔다가 아무도 없어서 친구들한테 전화로 확인을 한 뒤 집에 돌아오시는 중이라고. ㅠ.ㅠ 어제 취소 전화 받은 건 전혀 기억에 없단다. 거의 두달만에 엄마 혼자 감행한 외출이다보니 그간 몇번 억지산책에 끌고 나가긴 했어도 불안했다. 혼자서 집에 잘 찾아올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엄만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다. (현관 비밀번호를 엉뚱하게 눌러서 내가 소리쳐 알려드려야 했으나 뭐 그건 전에도 있는 일...) 따로 쇼핑백에 들고간 핸드크림도 손에 꼭 쥐고서. ㅠ.ㅠ (한번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근데 모임이 왜 취소되었는지, 전날 모임 취소 관련 통화를 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다. 모임 장소에서 홀로 기다리다가 친구들과도 한분한분 다 통화를 한 모양인데, 집에 와서도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왜 안 만나기로 했는지 물으셨다. 

매달 셋째주 화요일 모임은 당연히 각인되어 있는 정보이니 잊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것도 일시적인 정보이고, 내가 친구분들에게 드릴 핸드크림을 사놓았다는 것도 일회성 정보인데 왜 둘 중에 하나만 기억에 남았을까? 인간은 누구나 기억이 선택적이고 중요한 정보만 두뇌에 남는다. 근데 친구들 나눠줄 선물은 중요하고, 모임 취소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으휴.

2주전 진료때 주치의에게 정밀 뇌진단을 받아보았으면 한다고 의논했을 때, 의사는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말했다. 인지기능개선제인 아리셉트를 드시고 계시지만, 지금 복용 용량으로도 알츠하이머 예방은 충분한 건가 불안한 엄마와 내 마음을 의사는 잘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에피소드도 그냥 일시적인 걸로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암튼 몹시 불안해진 나는 다시 그 옛날 필사 노트를 꺼내왔다. 재미없는 불경과 책 내용 필사는 별로 흥미가 없을 것 같고 두뇌자극에 제일 좋은 건 외국어 배우기라는 말을 본 적이 있어서 이번엔 영어 문장을 베껴적고 단어를 외우시게 할 작정을 한 거다. 

내 이름은 OOO이고 80살이고, 어쩌고 저쩌고... 10문장쯤 되는 말을 만들어서 반복 읽기를 시킨 뒤 단어를 10번씩 쓰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1시간쯤 뒤에 가보니, 3단어만 되풀이해서 쓰고 7개 단어는 깡그리 패스, 나머지는 마지막 네 문장을 베껴적어놓으셨다. 내가 나중에 외우기 시험볼 거라고 했더니 열심히 읽고 외우느라 바쁘셨나보다. 그게 아니면 정보 전달이 일부만 머리에 남거나. 흑흑.

암튼 근 6개월간 엄마가 글씨 쓸 일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영어단어 적어놓은 글씨를 보니 손가락 힘이며 인지기능 상태는 많이 나빠지지 않은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알츠하이머 노인들은 힘있게 획을 긋지 못한다고 들어서... 하여간에 너무 한번에 스트레스 주면 안되니깐 나머지 단어들은 오늘 다 10번씩 쓰시라고 숙제를 내주었는데... 어제 간만에 홀로 대중교통수단 외출로 무리를 한 탓인지 온종일 주무신다. 컨디션이 좋아지면서 약도 과도해진듯.  그치만 난 또 못된 사감선생처럼 가서 노친네를 깨워가지고 다시 두뇌훈련을 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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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당신 영어 글씨 흡족해하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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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병

아픈 손가락 2020. 2. 6. 16:31

 

다행히 설날을 기점으로 엄마의 병세는 고비를 넘긴 듯하다. 불안증과 의심증도 차츰 줄어들더니 드디어 오늘은 내가 언제 그랬냐 싶게 간간이 기분이 좋으시다. 1년 전에도 12월에 심하게 발병했다가 설날 지나고 2월 들어 진정세에 접어들었었다. 그래도 작년엔 2월 말이었던 79세 생일 모임을 건너뛰었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었다는 의미다. 당시 핑계는 내년이 팔순이니 2020년에 거하게 밥을 먹자고, 그리고 곧이어 잡혀 있던 고손녀의 돌잔치 때 얼굴 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동생들을 설득했다. 

 

2019년 3월9일이었던 돌잔치날 엄마는 도무지 환자로 보이지 않는 건강한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하셨다. 심지어 미용실에 가서 머리 드라이도 하고 오셨던 터라 기쁨에 겨워 기념 사진도 남겼었다. 미소가 온화하고 우아하기 이를데가 없다. 평소 내가 왕비마마라고 떠받들어드리는 울 엄마의 모습이다. 남들도 다들 인상 좋으시다고, 엄청 고우시다고 (경복궁 선생님들의 칭찬이다 ㅋ) 하는 얼굴.  

오랜 세월 함께 엄마의 병증을 겪어온 가족들은 엄마 표정만 보아도 안다. 증세가 나쁠 때는 얼굴의 일부 근육과 신경도 이상해지기 때문에 사나운 표정과 눈빛으로 돌변한다. '호랑이 눈썹'이 되었다고 내가 표현하기도 하는데 눈 주변의 주름이 바깥쪽을 대각선으로 경직되면서 무서운 느낌으로 바뀌는 거다.  뇌의 일부 전달물질이 불균형을 이르면서 신경이 곤두서면 근육도 그에 따라 지배되는 것 같다. 암튼 오늘 엄마의 표정은 완전히 이 모습까지 이완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표독스러워져서 무서울 정도의 느낌에선 확실히 벗어나셨다. 이제 나도 겨우 숨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엊그제 2주만에 다시 진료를 받으면서, 잠자는 게 여전히 불편하다는 엄마의 말에 의사는 세로켈 용량을 200mg으로 더 늘렸다. 연세가 많으셔서 복용량 변화를 심하게 할 수가 없다보니 늘 이런식이다. 입원을 시켜 곁에서 면밀히 지켜보지 않는 한 1, 2주 만에 한번씩 상담후 조금씩 약을 바꾸다 보면 한두달이 훌쩍 지나간다. 요번엔 엄마가 비협조적이어서 중간에 더 먼저 찾아가 약을 바꿀 기회를 놓쳐서 더 기간이 오래 걸렸다. 젠장.

하여간 그래도 역시나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이건 '아는 병'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면서 참으면 결국 좋아지는 때가 온다. 다시 병세가 나빠지는 주기가 너무 빨라져 그것이 절망스럽긴 하지만, 악화일로에 놓이는 알츠하이머와는 또 다르니까.

연세 때문인지 점점 더 증세가 심해지고 기간도 길어지면서 요번에 특히 역대로 힘들고 괴롭던 차에 신기하게도 인간의 심리 원리를 다룬 책 증정본을 하나 받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어쨌든 겪어 나가는 당사자로서 삶은 참 공교로울 때가 있다. 엄마한테 난데없는 의심과 비난을 받으며 내가 징징 울며 괴로워할 때 도착한 이 책을 받자마자 양극성 장애 부분을 펼쳐보았다. 그림과 도표로 간단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임에도, 그 간단한 정보가 엄청 위로를 주었다. 어차피 치료약이 있으니 전문가들은 다 아는 병이겠지만, 계속 재발하는 것이 너무 속상하긴 하지만 엄마가 보이는 성격 변화와 온갖 증상들도 결국엔 다 예측범위 안에 들어 있었다.

"기분이 급변할 때는 극단적인 성격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적, 개인적 인간 관계에 심한 긴장을 유발한다" (<심리 원리> p40)

"일반적으로 양극성 장애의 주요 원인은 뇌 기능에 관여하는 화학물질들의 불균형으로 알려져 있다. 신경 전달 물질이라고 불리는 이 화학 물질에는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도파민이 포함되며 신경 세포 간에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유전도 원인의 하나로, 양극성 장애는 가족 내에서 유전되고 어느 나이에서나 발병할 수 있다. 100명 중 2명은 살면서 한번 이상의 양극성 장애의 삽화(episode, 우울증이나 조증 같은 특정 증상이 지속되는 기간-옮긴이)를 경험한다고 하는데 그 중 일부는 평생 두어번의 삽화만 겪지만 어떤 이들은 여러 번 겪는다. 삽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는 스트레스, 질병,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이나 돈 또는 직장과 관련된 문제 같은 일상 생활 속의 괴로움 등이 있다." (p40-41)

우울증과 조증의 패턴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아도, 아 그렇구나 싶다.   

안정기 → 경조증 →우울증(이 시기에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수면장애와 식욕저하를 겪고 망상 환각 불안정한 사고를 경험)  → 약한 우울증 → 조증 → 혼재성 상태  ㅠ.ㅠ

영원한 레아 공주, 캐리 피셔가 남겼다는 말도 위로가 됨. "양극성 장애는 도전이지만,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줄 수도 있다." 

석달째 엄마를 돌보면서 나도 우울증 환자가 되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이 꽤 많았다. 뭔가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느낌? 아는 게 병이기도 하지만 또 아는 게 힘이기도 해서, 기분이 바닥을 칠 때면 위험신호라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홀로 뛰쳐나가거나 약속을 만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위기를 나름 잘 극복한 것 같다. 스스로 장하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땐 엄마의 '삽화'가 매년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또 지나갈 것으로 믿어야지 별 수 있겠나.

엄마의 성격변화와 몇몇 이상 증세가 유독 심해서 혹시 조울증 때문이 아니라 알츠하이머의 전조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 치매 환자를 겪어본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알츠하이머의 가능성에 손을 들었다 - 주치의에게 두뇌 정밀검사를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증세가 완전히 회복된 이후에도 그러는지 두고 보자고. 엄마도 나도 가장 두려워하는 그 병만은 진짜로 아니면 좋겠다. 째뜬 보름 뒤로 다가온 조촐한 팔순 가족모임은 별 문제 없이 강행해도 좋을 듯하니 다행이다. 다들 웃는 얼굴로 맛있는 밥 먹고 힘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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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만에

아픈 손가락 2020. 1. 16. 21:32

일이 바빠 두문불출하고 집에 처박혀 일만 하던 날이 오늘로 꼬박 닷새. 결국 초저녁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다가 돌아왔다. 온종일 수시로 등뒤로 다가와 핸드폰이 어디가 이상하고, 딸년이 이상하고, 통장이, 자동이체가 이상하다고 자꾸 말을 거는 통에 원고에 집중도 안 되고, 말대꾸와 설명을 해주는 것도 한계에 도달해 폭발한 거다.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예전엔 내가 너무 속상해서 엉엉 울고 눈물로 호소하면 엄마는 정신줄을 놓은 와중에도 날 안쓰러워하면서 따라 울다가 조금 안정을 되찾고는 했었는데, 이젠 엉엉 따라 울긴 하지만 딸년인 내가 이상해졌다고, 착한 딸은 어디 가고 저렇게 악독한 애가 됐는지 모르겠다면서, 내가 무섭다고 그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서로 한계가 온걸까.

배설이 필요하지만 결국 내 얼굴에 침뱉기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주절주절 적어놓는다는 게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노트북과 책을 들고 뛰쳐나가 일부러 몸에 나쁜 정크푸드를 꾸역꾸역 먹은 뒤 스타벅스에 들어가 일감을 펼쳤지만, 결국 몇시간 못하고 들어왔다. 처음에 나갈 땐 엄마가 밥을 먹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밥도 약도 먹게 해야겠기에 꾸역꾸역 들어와 식탁을 차리고 있는 내가 너무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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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큰아들 전화를 받은 엄마. 십여분 전까지 작업실에 쫓아와 등 뒤에서 "어헝헝헝, 어떡해, 엄마 때문에 OOO(성까지 붙인 내이름)이 이상해졌어...엄마가 미쳐가지고 딸까지 미치게 만들었어.."라고 징징댄 게 무색하게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응, 엄마는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 별 일 없어. 애들은 잘 있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 엄마 잘못이야, 니네는 잘못 없어...

 

우와, 저러니 얼핏 듣고 멀쩡하다고 할밖에. 나한텐 별별 헛소리 다 하시고 속을 뒤집으면서 왜 아들들한테는 멀쩡한 척 하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웃으며 대꾸했다. 걔네들은 엄마의 본 모습을 모르니깐 괜찮다고 그래야지 그럼 어떡해? 걱정하잖아. 근데 넌 바로 옆에서 엄마 볼꼴 못볼꼴 다 봤잖아. 속일 수가 없지. 하하하.

기가 막혀서 나도 따라 웃었다.

 

잠자는 약 드시기 직전.

불안해, 불안해, 노래를 하는 엄마에게 대체 왜 그렇게 불안하냐고 물었더니 또 단박에 대답이 나왔다.

죽을까봐 불안해. 맨날 죽고 싶다고 말은 하면서 다 그짓말이야. 죽을까봐 불안해서 미치겠어. 그러니까 엄마 좀 감옥에 갖다 넣어. 경찰서에 연락해서 잡아가라고 그래.

 

대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다만 팔순에도 죽음이 두렵다는 게 솔직한 엄마의 마음이란 건 알겠다. 노상 살만큼 살았다고 중얼거리던 건 다 뻥이었단 말이지. 이상하다. 오십대인 난 지금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당장 삶이 끝난다고 해도 크게 아쉬울 건 없다. 난 나름 줄곧 아주 열심히 주어진 여건 안에서 퍽 즐겁게 살았고, 남은 중노년의 인생이 그닥 기대되지 않는다. 무슨 영화를 더 보겠다고...

 

하여간, 한해에도 여러번 발병해 롤러코스터를 타는 울 엄마의 증상을 수십년간 기록해 면밀히 연구했더라면 뭔가 근사한 업적을 이뤘을 것도 같다. 아닌가? 발표할 논문엔 환자의 표본 수가 더 많아야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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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음 상하는 일의 연속. 엄마이자 환자의 프라이버시 따위 개나 줘버려, 하는 심정이 자꾸 올라온다. 나이들면서 나도 점점 옹졸해는 거겠지. 그러든가 말든가. 차곡차곡 적어놨다가 엄마가 멀쩡해지면 그동안 나한테 이렇게 심하게 굴었다고 다 일러바칠테다. 물론 그러면 엄만 또 민망하고 창피해서 다시 병이 도지려나? 암튼...

 

열 뻗치게 만들었던 오늘자 엄마의 발언들

- 추워 죽겠다.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리다. 니가 전기장판 다 갖다 치워서 그렇다. 엄마 얼어죽으라고? (초겨울에 치운 건 여름과 가을 내내 침대에 두고 쓰시던 찜질팩이고, 그거 대신 시트 아래 아예 전기요를 깔아드렸었다. 그렇다고 설명하고 방금 켜드리고 나옴.)

- 너 옷이 그게 뭐니? 꼴 보기 싫다. 그런 옷을 맨날 왜 입고 있느냐. (재작년 아울렛에서 만원짜리 회색 플리스 티셔츠를 팔길래 덜컥 사왔으나 XL 사이즈라 집에 와서 혹시 엄마 입으실랴우? 물었더니 싫다고 질색팔색을 하시길래, 너무 긴 소매를 자르고 끝에다 스누피와 우드스탁을 수놓은 옷이다. 당연히 나는 너무 마음에들고 따뜻한데, 엄만 원래도 내가 큰 옷 입는 걸 싫어한다. 결국 딴 옷으로 갈아입었다.)

- 머리도 꼴보기 싫다. 저번에 분명 미용실 간다고 그러더니만 계속 저러고 다닌다. 머리 안 자르고 어디 딴델 갔겠지. (하도 머리 길다고 타박이라 스프링끈으로 질끈 묶었더니) 저것 봐라, 또 이상한 걸로 머리를 묶었네. +_+

- 엉엉엉. 엄마... 엄마... OOO이 점점 이상해져, 나 어떡해 엄마...  (외할머니는 여든셋에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오이소박이를 담가 자식들에게 돌리셨다. 울 엄만 아프단 핑계로 살림 손에서 놓은지 15년도 넘었고, 딸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으면서!)

- (점심 먹으면서 하도 당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 자책하시길래 그럼 잘 됐네, 나 엄청 바쁜데 엄마가 점심 설거지 좀 해주세요, 그랬더니만 단박에) 싫어! 못해! 손시려워서 못해...

 

그래도 유일하게 희망적이었던 순간은...

오후에 커피 마시면서 엄마도 차 한잔 타다 드렸더니 "땡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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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증상

아픈 손가락 2020. 1. 13. 20:18

조울증이 심해지면 엄마는 매번 반복되는 말과 행동이 따로 있다.

일단 자책이 심해진다. 자격지심의 끝판왕이 되어 끝없이 자신을 책망하고 타박한다. 경조증과 우울증이 겹쳐져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도저히 못참겠다고 내가 소리를 지를 때까지 계속한다. 그러다 더 심해지면 거의 24시간 내내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입으로 중얼거린다. 주로 자책을 하지만 주변 사물과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여기며 괴로워한다. TV도 이상하고, 방바닥에 먼지도 이상하고, 화분도 꼴보기 싫고, 벽에 걸린 가족사진도 이상하고... 식사 때마다  밥먹을 자격이 없으니 밥도 먹으면 안된다고 드러눕거나, 이웃사람들이 자기를 감시하기 때문에 절대로 밖에 나갈 수 없다는 둥, (이유가 뭐든) 창피해서 이젠 절대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2017년과 18도엔 말끝마다 '난 사실대로 얘기하는 거다'라고 우겨댔었다. 뜬금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 액자를 가리키며 저렇게 오래된 사진을 뭐가 자랑이라고 떡하니 집에 두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책장에 든 조카들 아기때 사진을 보면서도 다 큰 애들 사진을 저기 왜 두는 거냐고, 애들이 와서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대학병원에서 당뇨약과 혈압약을 6개월치씩 타다 두고 먹는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난 사실대로 말하는 거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결국 장식장에 든 모든 사진 액자는 몇달간 엎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거'라면서 나는 물론이고 아들들, 며느리들에게까지 거침없이 생각나는대로 내뱉은 덕분에 (니가 사업으로 돈을 얼마나 버는지는 모른다만, 맨날 그렇게 사치하다 거덜난다. 남편이 힘들게 벌어다 준돈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쓰면 안된다, 안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환자가 '심신미약' 상태에서 한 말이든 아니든,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너무 솔직한 지적이었기에 ㅠ.ㅠ 엄마는 엄청난 인심을 잃었고 미운 털이 많이 박혔다. 나 또한 상처 받은 적이 수없이 많았었고.

 

그런데 2019년 12월부터 시작된 엄마의 증세는 좀 다르다. 물론 당신 본인에 대한 자책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긴 하지만, 의심증이 추가되었는데 그 의심의 주요 대상이 바로 나다. 어휴. 부산행 KTX와 숙소 예약을 인터넷으로 마쳤다는데도 도무지 그걸 못믿질 않나, 서울역에 가서도 고모들을 못 만날 거라고, 혹은 길을 잃고 기차를 놓칠 거라고 하질 않나, 친척분들이 내게 송금한 축의금을 내가 다 떼어먹을 거라고 하질 않나 (엄마 보는 앞에서 고모들을 증인으로 두고 축의금 봉투에 일일이 현금을 넣는 걸 보여주었음에도!), 부산에 자기를 버리고 올 거 같아서 계속 날 놓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고 하질 않나... ㅠ.ㅠ

 

부쩍 날 도둑년 취급을 해서 마음을 상하게 하더니만 급기야 엄마는 며칠 전 외출했다 돌아온 내 가방을 뒤졌다. 자꾸 거짓말을 하고 어딜 나다니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확인을 해야겠다나. 어휴. 기가 막혀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딸에게 의존적이기만 하던 엄마는 어쩌다가 나에 대한 신뢰를 그토록 잃게 되었을까. 그간 엄마의 조울증이 심해질 때마다 짜증도 나지만 근본적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커서 달래드리려는 태도였다면, 요번엔 너무 낯설고 무섭게 구는 엄마의 모습이 겁도 나고, 무진장 억울하고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난다. 입바른 소리는 잘하지만 근본적으로 너그럽고 좋은 사람이었던 우리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정말 이상하고 괴팍하고 인색한 할머니만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고, 그래서 너무 슬프다. 

 

나 역시 일종의 가면우울증이랄까, 밖에 나가선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즐겁게 지내려 노력하면서도 내 속은 점점 문드러지고 있는 것 같다. 울 엄마의 정신건강이 그리 좋지 못하단 건 지인들도 대강 알지만 그 내막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나 말고 울 아버지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아들도 결혼전엔 아픈 엄마를 목격했지만 20년쯤 나가 살았으니 그간 바로 곁에서 지켜본 것도 아니고 24시간 실체를 겪어본 것도 아니니까. 놀랍게도 엄마는 내 앞에서 길길이 날뛰다가도 아들이 다니러 온다거나 전화가 걸려오면 금세 다른 표정이 된다. '응, 아들? 엄마 괜찮아. 걱정하지 마...' 물론 의사 앞에서도, 남들이나 친척들 앞에서도 비교적 얌전해진다. 편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선 멀쩡해 보이려는 환자의 의지가 발현되는 건지, 놀라운 연기력인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로선 순식간에 달라지는 엄마의 태도에 그저 배신감을 느낄 뿐이다. 아마도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을 다룬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나오는 건 그들도 이런 인간의 이면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 대한 심한 의심 이외에도, 엄마는 이제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하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과거엔 주로 '내가 미친년이라 큰 일이다, 미친 엄마 때문에 우리 딸이 힘들어서 어쩌나' 이런 푸념을 하셨는데 올 들어서는 계속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OOO(내 이름)이 이상하다, 쟤가 미쳤다'고 말하며 심지어는 내 눈이 이상하다고까지 하신다. 내 눈이 어떻게 이상하냐고 물으면, 달라졌다고, 그냥 이상해졌다고...  과연 새로운 이런 증상들의 의미는 뭘까. 일주일 전에 바꿔온 약(세로켈이 25mg에서 100mg으로 늘어남)으로 밤엔 전보다 약간 더 잠을 주무시고 있고, 눈감으면 나타난다는 글씨는 사라졌다고 하며 온종일 계속되던 중얼거림도 줄어들긴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 엄청난 차도가 있는 것 같진 않다. 

 

마지막으로 요번들어 엄마는 이상하게 옷타령, 신발타령을 하신다. 입을 옷이 하나도 없다고. 신발도 신고 나갈 게 하나도 없단다. 옷장에 있는 옷들을 죄다 꺼내 보여드리기도 하고, 결혼식 갈 때 걸칠 조끼도 새로 사드렸는데도 여전히 오늘도 엄만 입을 옷이 없어서 못나간다고 푸념이다. 그나마 신발타령이 멎은 건, 1월 들어 내가 겨울 신발을 두 켤레나 사놓았기 때문이다. 대체 한겨울에 추운데 어딜 나갈 데가 있다고 (매달 셋째주 화요일에 동창모임이 있긴 하지만, 해마다 이맘때는 조울증이 도져서 못나간 적이 많다) 매일같이 옷타령 신발타령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럼 같이 쇼핑하러 나가자고 하면 또 싫다고 하니, 나더러 대체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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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기 전에 먹어야하는 약을 드시게 하느라 엄마와 한참이나 씨름을 하고 돌아왔다. 컨디션이 좋을 땐 매일 정해진 시간인 밤 10시에 '자기전'이라고 약봉지에 쓰인 약을 스스로 먹고 침대에 눕는 것이 엄마의 일과다. 하지만 요즘처럼 상태가 나쁠 땐 뭐든 일단 '싫다'고 거부하고 본다.

엄마, 저녁 드세요. - 싫어, 안 먹어. 먹을 자격 없어. 

엄마, 늦었어요, 약 드세요. - 싫어, 안 먹어. 먹어도 소용없는 약을 왜 맨날 먹으래. 이거 먹으면 내일 나 못일어나.

이젠 조근조근 달래는 것도 지쳐서 버럭 소리부터 지른다. 아 왜 또! 드시라고 하면 좀 순순히 드시라고요!

 

오늘 의사와 상담 때 엄마는 사뭇 우아하고 차분하게 그간 잘 못지냈고, 마음이 불안하고, 밤에도 잠을 못자는데 그 이유가 눈만 감으면 눈앞에 글씨들이 마구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내용의 글씨들이 총천연색으로 자꾸 보인다고. 거의 작년 이맘때도 엄마가 했던 말이다. 돌이켜보면 딱히 스트레스나 '이슈'가 없을 때 엄마 병이 심해지는 건 일년 중 늘 비슷한 시기였다. 과거엔 봄과 가을, 환절기를 잘 못넘기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한겨울에 증상이 가장 심한 것 같다. 일단 2017년과 2018년은 동일하게 11월부터 나빠져서 다음해 설날 즈음까지 계속 힘들었다. 2019년은 11월을 잘 넘기나 싶었는데 12월에 그놈의 부산 결혼식 때문에 그만...  하긴 결혼식이 아니었더라도 11월 중순에 엄마와 내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나도 그 때문에 사흘간 잠도 못자고 괴로워했었는데, 엄마는 깜빡깜빡 건망증 때문에 그 사건을 잊었던 듯 1, 2주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람에 대한 질문을 했었다. 이 이야기는 으음... 그 사람에 대한 일방적인 인신공격이 될 수도 있으므로 좀 더 생각해보고 나중에 포스팅을 하든지 말든지 결정해야지.

 

암튼 올해로 팔순을 맞은 엄마의 상태가 점점 나빠질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고, 핸드폰 메모장이나 탁상달력에 메모를 해두기는 하지만 반복적인 증상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나도 이제부터 좀 더 체계적으로 고민하려면 단편적인 메모가 아니라 좀 더 자세한 기록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부산에 갔을 때 밤새 잠 못자고 괴롭힘을 당하는 날 지켜본 고모들도 진지하게 엄마와 나를 위해서 뭔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봐야한다고 조언했었다. 일단은 최대한 객관적인 상황파악이 먼저라고 생각된다.

 

원래도 노인들은 어떤 상황을 접했을 때 두뇌의 필터링이 떨어지고 걱정이 많다. 그래서 '노파심'이란 말도 나왔을 테고. 늙을수록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없이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내놓게 마련이다. 그게 옳든 그르든 판단은 나중이고, 일단 말을 해놓고 보는 거다. 울 엄만 대단히 타인지향적인 성향이라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한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입바른 소리를 크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동네에서 못마땅한 이웃의 행동을 보면 간혹 지적은 하지만, 그러는 빈도수가 높진 않다. 그런데 가족들에겐 좀 다르고, 우울증에 대한 나름의 방어기제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으나 평소엔 듣는 사람 생각 않고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신다. 예를 들면...

 

내가 뭔가 요란뻑쩍지근한 요리를 해바쳤을 때: 냄새는 엄청 요란하더니 맛은 그저그렇구나. (난 당연히 버럭.. ㅠ.ㅠ)

그런 효녀 세상에 없다고 내 칭찬을 하는 당신 친구들에게: 효녀 맞아, 근데 성격이 까칠해서 나랑 맨날 싸워.

번역이 얼마나 힘들고 위대한 일인 줄 아느냐고 내 칭찬을 하는 친척들에게: 그렇죠, 맨날 밤새고 일하는 거 보기 안타까워요. 근데 벌이가 시원치않아서 혼자 먹고살기도 힘드나봐요, 그러니까 좋은 사람 있을 때 시집이나 가서 편히 살지 원 참... 

 

그밖에 아들들에게도, 며느리들에게도, 손녀딸에게도 엄마는 그간 말실수를 참 많이도 했었다. 엄마의 정신건강이 안좋을 때라서 좀 양해를 해달라고 하기엔 평소에도 입바른 소리를 너무 많이 쏟아내시기 때문에 말로 인심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엄마 입장에선 저런 이야기들이 다 '사실'일 거다.


주변에서 내가 엄마를 '잘못 키워서' 혹은 '너무 오냐오냐 해드려서' 저렇게 의존적이고 의지박약한 노인이 되었다는 말을 왕왕 들을만큼 엄마는 그간 우울과 불안이 심해질 때마다 내게 크게 의지하고 눈에 안보이면 괴로워하는 편이었다면, 작년말부터 시작된 엄마의 불안증과 의심증은 조금 또 방향이 달라졌고 말로는 여전히 "딸 없으면 못산다, 난 딸 없으면 시체다"라고 주절거리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특히 금전적인 부분으로.

 

일견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은행계좌 관리나 세금 납부를 내가 인터넷뱅킹으로 해드리는데 그게 영 불안한 거다. 내가 엄마의 연금통장 비밀번호와 계좌를 다 알고 있으니 홀라당 훔쳐가버릴까봐서. ㅠ.ㅠ 슬픈 건 엄마가 컨디션이 좋으실 땐 태도와 말씀이 정 반대라는 거다. 엄마 돈이 다 니돈이야, 엄마 죽으면 다 너 주고 갈 거야. 엄마 죽기 전에 너 잘 살게 만들어놓고 가야할텐데... 뭐 이런 눈물겨운 딸걱정을 하실 땐 언제고 지금은 내게 눈을 흘기며 못 보던 신발이 있느니, 못 보던 옷이 생겼느니, 통장에 찍힌 자동이체 금액이 어떻느니, 당신 카드값이 이상하느니... 매일같이 괴롭히는 중이다. 

 

아무튼 요즘 기시감이 들어 나도 불안하다. 18년 연말과 19년 초에 갑자기 생겨난 다리 통증으로 응급실을 거쳐 입원하기 직전에도, 엄마는 심히 정신이 병들어서 이렇게 나를 들들 볶았고, 게다가 나는 원고마감 중이었기에 스트레스가 극심했었다. ㅠ.ㅠ 19년 연말과 20년 연초에도 여전히 엄마는 많이 아프고, 난 일로 심히 바쁘다. 다행인 건 지난 번의 경험으로 스트레스가 최고 수치에 달하면 두말없이 냉정하게 병든 엄마를 버려두고 밖에 나가 압력 추를 꺽어 폭발을 미연에 막는다는 점이다. 엄마가 더 징징대거나 말거나, 나부터 살고봐야지, 요샌 그런 생각을 1번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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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성장애

아픈 손가락 2020. 1. 6. 16:46

양극성장애( bipolar disease)는 조울증의 다른 이름이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으로 바꿔부르면서 조현병과 조울증이 너무 비슷해보였나? 아니면 기분이 심하게 오르락거리는 사람에게 조증이냐고 놀려대는 질병 혐오발언 탓에 공식 병명을 달리 부르기로 학계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걸까? 암튼 그 이유는 몰라도 새로 나온 몇몇 정신건강 관련 책을 보니 조울증을 죄다 '양극성장애'로 표현하고 있었다. 비전문가로서 그냥 단어만 봤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를 짚어본다면, 조울증은 '증상'의 느낌이어서 필요 이상으로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 같은 반면에, 양극성장애는 '장애'를 붙여놓으니 지적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같은 항구적인 질병과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 같다. 뭔가 치료는 불가능하고 장애 상태에 그냥 적응해서 살아야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공황장애(panic disorder), 분리불안장애(separation anxiety disorder)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름을 붙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disorder와 disease는 똑같이 '장애'로 옮기기엔 뉘앙스가 사뭇 다른 듯하다. disorder(dis-order, 질서가 무너짐, 엉망진창)는 신체적인 이상, 약간의 기능 장애 같은 느낌인 반면에 disease는 비록 그 어원이 편하지 않음/불편함(dis-ease)에서 왔다고는 하나 엄연히 '질병'이란 말이지. ㅠ.ㅠ

 

하여간 점점 분리불안 상태의 어린애처럼 구는 시간이 많아진 엄마를 혼자 감당하는 게 힘들어서 작년에 보험공단에다 요양보호 등급신청을 해보려고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에게 진단서를 부탁했더니만, '경도인지장애'와 함께 '양극성장애'라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물론 보험공단에선 울 엄마 정도의 인지능력과 조울증으로는 심사도 불가능하다고 전화로 통보해왔다. 아주 치매환자로 인정을 받아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그것도 심한 인지장애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있어야 한다고. 젠장.

 

조울증이나 우울증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 잘 아는 사람들(심지어 아들들도!)이라도 짧은 시간 우리 엄마를 지켜보면 대체로 엄마 멀쩡한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나에게 핀잔을 준다. 나도 미칠 노릇이다. 일년내내 약을 드시고는 있지만 어떤 빌미로 증상이 심해져 겉잡을 수 없게 되면, 엄마는 하루종일 중얼중얼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입밖에 내거나 온 집안을 서성서성 돌아다니거나, 집안 구석구석에서 오래된 서류나 우편물을 끄집어내 새삼 읽어보며 의심을 하거나, 딸이 눈에 안 보이는 게 불안해서 졸졸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댄다. 

 

홀로 중얼거리는 내용은 대체로 자책과 후회, 어후, 미쳤어, 미쳤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살면 뭐하나...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작년부터는 양상이 좀 달라졌다. 전에는 동네 사람들이나 밖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당신을 이상하게 감시하고 뭔가를 훔쳐가려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젠 심한 의심의 대상에 내가 포함되었다. ㅠ.ㅠ 치매 환자들이 흔히 주변 사람들을 의심해서 도둑으로 몬다는데, 울 엄만 치매도 아닌데 왜 나를 도둑년으로 모는 건지 원!

 

습관처럼 말로는 "XXX(내 이름) 없으면 엄마는 시체야. 너 없으면 엄만 못 살아..."라고 하루에 열두번도 더 되풀이하면서(까칠한 요즘 나의 상태로는 이 말도 딸에 대한 엄마의 가스라이팅 같아서 짜증스럽기만 하다. 도둑년 취급이나 하지 말든지! 나더러 뭘 더 어쩌라고!), 12월 들어서는 실질적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의심하기에 이른 것! 학교에 수업 간다고 외출해도 거짓말 하는 거라고, 자꾸 거짓말 하고 대체 어딜 나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고, 친척 결혼식 축의금을 내가 송금받아서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돈을 내가 다 떼어먹었다고 의심하시고! KTX 티켓을 모바일로 구매했다는 말조차 믿지를 못해서 사흘 내내 고모들을 동원해 설명을 해드려야 할 지경이었다. 부산 숙소와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두고 여행겸 떠나려던 부산 결혼식을 결국 이런 상황에서 다녀왔다는 게 정말 기적이다. 

 

기막히는 건 내 앞에선 눈을 흘기거나 부라리며 험악한 얼굴로 거짓말쟁이라고 나를 의심하거나 발을 구르며 펄펄 날뛰다가도, 아들 전화를 받을 땐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으로 돌변해서 '아들? 엄마 괜찮으니까 걱정마...'라고 한다는 거다. 물론 친척분들이랑 통화를 할 때도 말투와 태도가 달라진다. 누구보다도 남들의 시선과 평판을 의식하는 분이라 그런걸까? 요번엔 나도 정말 지치고 지긋지긋하고, 열이 뻗쳐서 엄마의 본모습을 증거로 남겨두겠다며 동영상 촬영을 해두었다. (한두달 뒤에 엄마가 심신의 안정을 되찾으면, 병증이 심했을 때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신다.) 엄만 당신의 '미친 모습'을 찍어두었다며 당연히 길길이 화를 내시고 딸을 더욱 미워하고 있지만, 내가 오죽하면!  고모들 두분과 같이 떠난 부산에서 1박2일간 엄마는 집에서 보이던 모습과 달리 대체로 놀랍도록 안정적이었는데, 엄마의 고질병을 잘 아는 고모들도 드디어 밤사이 드러난 불안증과 의심병의 진실을 확인하고는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며 나를 불쌍히 여겼다. 나의 인내심이 놀라운 수준이라고. ㅠ.ㅠ 

 

양극성장애 환자의 사연들을 들어보면 정말 기막힌 경우가 많다. 조증인 상태에선 환자가 자신만만하고 거침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데, 주변에서 자칫 잘 알아차리지 못하면 집을 확 팔아버리거나 고가의 물건을 막 사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20년 전쯤엔가 울 엄마도 집에서 입던 옷에 슬리퍼 바람으로 지갑 하나만 들고 뛰쳐나가선 막내동생 예식장을 계약하겠다며 동네에서 멀지 않은 특급호텔에 찾아간 적이 있는가 하면, 며칠 뒤엔 백화점에 가서 투피스를 서너벌이나 사서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들어온 적도 있다. 그때 너무 속이 상해서 주치의에게 털어놓았더니, 집을 팔아버리거나 비싼 보석을 사들이거나 남에게 주어버리는 사람도 있는데요 뭐... 하더라.

 

조증 상태의 장점을 굳이 찾는다면 신체기능이 평소보다 좋아진다는 점이다. 시력도 청력도 더 예민해지는지, 보청기가 없어도 소리를 잘 듣고 안경을 쓰지 않아도 TV 자막이 다 보인단다. 다리가 아파 집안에서도 느릿느릿 걸어다니던 엄마는 종종 내가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의심스러워서 와다다다 쿵쿵 소리를 내며 나에게 달려오신다. 물론 저러다가 심신이 안정되면 드디어 통증을 느낄 수 있게 되어 며칠 끙끙 앓아누울 게 뻔하고 하루종일 지껄여댄 혀도 다 갈라지고 입안이 헐어 한참 고생을 해야 할 거다.

 

다른 때 같으면 어서 약을 바꾸러 병원에 무작정 가보자는 나의 부탁을 들어줄만도 한데, 요번엔 극심한 딸 의심증상 때문에 (정신병원에 자기를 처넣으려고 하는 술수란다) 원래 예약날자까지 꼬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이 한달여일만에 잡힌 정기 예약일이다. 정신과 약은 한꺼번에 투약량을 확 늘일 수도 없고 약을 바꾼다고 해서 효과가 즉각 나타나는 것도 아니므로, 사실 크게 기대되지도 않는다. 다만 나보다 신뢰하는 의사의 위로와 이야기를 엄마가 잘 듣고 플라시보효과도 좀 생기길 바랄뿐.  연초부터 참으로 지치는 나날인데, 이러다 내가 병나겠다 싶어서 자꾸 밖으로 도망칠 일을 꾸미고 있다. 나도 숨은 쉬어야지. 휴.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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