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꽃

아픈 손가락 2020. 10. 2. 18:58

간만에 리시안서스 한다발을 사다가 꽂아두고 하도 예뻐서 연일 감탄하고 있다. 주로 식탁에 놓아두고 밥 한숟갈 먹고 씹으며 쳐다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데, 희한하게도 엄만 나와 계속 시각이 다르다.

원래도 엄만 꽃을 좋아하면서도 '절화'를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으신다. 생명을 똑 잘라 죽여서 꽃아놓기 때문이란다. 불자의 마음이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예쁜 꽃 좀 곁에 두고 보려고 사온 나로선 좀 심술이 난다.

이번에도 신이 나서 꽃다발을 꽂아두고 이쁘지, 이쁘지? 묻는 내게 엄만 대뜸 "꽃이 꼭 조화같다"고 대꾸했다. +_+ 꽃도 잎도 모두 조화처럼 생겨서 신기하다고. 시니컬하시기는...

리시안서스가 좀 하늘하늘한 꽃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리어카 좌판에서 산 거라 덜 싱싱했는지 사온지 사흘째부터 한두 송이씩 좀 말라가며 시들기 시작했다. 난 가끔 시든 꽃도 거꾸로 말려 오래 두고보는 인간인지라 별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엄만 연일 가위를 들고 시든 꽃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내 눈엔 아직 멀쩡해보이는 꽃도 꽃잎 가장자리가 말랐다며 어서 잘라버려야겠다고. 아니 왜?!

오늘로 닷새째. 아침 저녁으로 두번씩이나 시든꽃을 솎아낸 꽃은 처음 저날보다 거의 3분의 1은 줄어들었는데;; 오늘 저녁 식탁에서도 엄만 밥을 먹는 내내 매의 눈으로 또 잘라버릴 꽃을 찾는 눈치였다. 아 놔 진짜! 아직 다 멀쩡하구만. 엄마, 그냥 제일 싱싱하고 예쁜 꽃만 보면 안돼? 왜 예쁜 꽃 놔두고 계속 시든 꽃만 쳐다봐요? 내가 따지듯이 물었다. 누가 우울증환자 아니랄까봐! 설마 완벽주의 성향 때문인 거야? 

사과를 한 상자 두고 먹을 때 썪은 사과부터 먹는 사람과 제일 잘 익고 맛있는 사과부터 먹는 사람이 있다나 뭐라나, 그게 삶의 태도일 수도 있다는 우화를 읽은 기억이 난다. 썪은 사과는 물론 미리 다 골라내 멀쩡한 사과를 보호해야겠지만... 좋은 거, 맛있는 걸 늘 제일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끼는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다. 그러다가 다 썪히기 십상이고.

디저트로 과일을 먹을 때도 엄만 젤 덜 단 과일부터 먹는다. 예를 들면 방울토마토, 사과, 참외 등의 순서. 먼저 단 과일을 먹으면 다음 과일은 맛이 없어진다나. 의도적으로 노력을 했던건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나는 제일 먼저 좋아하는 과일을 먹는다. 새콤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므로 사과, 참외, 토마토의 순이기 쉽다. 달지 않은 토마토를 맨 마지막에 먹어야 입가심도 될 것 같고. 

우울증 환자의 특징인지, 아니면 없이 산 기억이 있고 아끼는 것이 생활화된 구세대 여성의 특징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반찬을 앞두고도 엄마의 태도는 짜증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기껏 솜씨를 부려 새로 만든 메인 요리를 앞에 두고도 엄마의 첫번째 젓가락질은 '없애버려야 할' 오래된 반찬을 향하기 일쑤다. "저거부터 다 먹어치우자"라는 논리인데, 어차피 그게 마지막이 아닌 경우도 많다. 그냥 새 반찬은 좀 아껴야겠다는 심리일까? 인지능력이 약간 떨어지면서, 시야가 좁아지는지 반찬도 눈앞에 있는 것만 공략하는 느낌이라 요샌 아예 식판처럼 큰 접시에 반찬 할당량을 정해 밥과 함께 담아드린다. 그러면 또 군말없이 새 반찬부터 드시는 걸 볼 수 있다. 

울 엄만 정말 연구대상이다. 나로선 아무리 탐구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명절을 앞두고 엄마 친구들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엄마의 대꾸방식도 참 여전하다. 엄마 친구분들은 병든 엄마를 오래전부터 챙기는 나를 대견해하고 칭찬하시는데, 엄만 맞장구를 치다가도 곧바로 딸 흉을 본다. 소곤소곤 뒷담화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니 듣건말건 상관없다는 태도다.  "맞아, 내가 딸 때문에 사는 거지. 쟤 없었음 벌써 죽었겠지. 근데 쟤가 성질이 드러워서 나랑 맨날 싸워. 잔소리가 말도 못해..."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매번 대꾸가 똑같다. 저렇게 자기 의견에 솔직한데 왜 우울증이지 싶을 때도 있다. 저것도 방어기제인가?

암튼 난 하필 시든 꽃만 유심히 바라보고 매번 썩은 과일부터 골라 먹는 그 비관적 태도에 물들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중이다. 내 눈에 꽃은 대체로 시들어도 예쁜데.  드라이플라워도 있구만요. 남은 것중에 제일 맛있는 사과를 골라 먹으면 매번 끝까지 제일 맛있는 것만 먹을 수 있다는 낙관론, 눈 가리기 아웅이라도 좀 연습이 필요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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