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훈련

아픈 손가락 2020. 2. 19. 16:46

수년전 금강경 사경을 시작으로, 작년 상반기까지 엄마는 꾸준히 거의 매일 불경이나 불교서적을 노트에 필사 하셨다. 처음엔 그냥 종교적인 신심에서 비롯된 자발적 시도였지만, 독서보다도 훨씬 더 두뇌활동에 자극이 되는 게 바로 책을 읽고 중얼거리면서 손을 움직여 쓰고 다시 확인하는 복합과정이기 때문에 내가 강권하다시피 했고 엄마도 곧잘 협조해주셨다. 하지만 5월 22일을 끝으로 방치했던 노트는 나의 닥달로 9월1일에 딱 한번 다시 한 페이지 필사한 뒤 줄곧 외면당하고 있었다.

작년연말부터 병세가 나빠졌을 땐 온전하게 대화만 가능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으니, 필사는 개뿔. 바랄 수도 없었는데 2월 중순 접어들면서 엄마는 거의 안정적인 상태로 회복되었고, 머잖아 다시 약을 줄여야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번주에 걱정스러운 두번의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일요일인 2월 16일.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는 대뜸 내일 큰아들 생일이지? 라고 물었다. 네? 뭐라굽쇼? 내일이 며칠인데 큰아들 생일? 엄마의 대답은, 11월 17일이잖아....  (큰아들 생일이 11월 17일인 것은 맞다. 건강한 상태였던 몇달 전 그날을 기념해서 엄마가 아들 가족에게 밥도 사주셨더랬다)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냉장고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시라고, 정신 차리라고, 지금이 11월이 맞냐고 물었다.  

잠시 후 11월 아니야? 2월이야? 왜 헷갈렸지? 본인도 의아해하고, 나도 어리둥절함과 속상함 속에서 그냥 넘어가는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어제. 셋째주 화요일. 매달 엄마가 고교동창 친구들과 오찬을 하는 날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전날 저녁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올해는 엄마도 엄마 친구들도 대부분 팔순이 되는 해여서, 1월부터 생일자들이 돌아가서 밥을 사기로 했다는데 1월엔 당연히 엄마 상태가 안좋으시니 불참했다.  2월 오찬은 곧 생일을 맞이하는 울 엄마가 밥값을 내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엄마 본인도 요번엔 꼭 참석하리라 단단히 벼르고 계셨고, 나도 부실한 울 엄마를 종종 보살펴주시는 친구분들(길 잃고 헤매거나 약속장소 헷갈리는 울 엄마 찾으러 출동하기도 하고, 택시 태워 보낸 뒤 나한테 전화도 넣어주시고.. ㅠ.ㅠ)께 뭔가 약소하나마 선물을 하고 싶어서 핸드크림을 사다가 포장을 해두었었다.  엄마 친구분들은 성남시장까지 가서 참기름, 들기름도 짜다가 나눠주시고 막 그러는데 자긴 맨날 받기만 한다고 울 엄마가 징징거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격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전화통화 후, 미리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크림은 다음달을 기약하며 옷방 책상에 올려두었는데...  어제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보니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어랏? 설마... 절에 가는 날도 아니고, 에이, 모임에 가신 건 아니겠지... 생각했으나 핸드크림도 자취를 감춘걸 보며 문득, 취소되었던 모임 상황이 바뀌었나? 생각했으나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집이든 핸드폰으로든 전화가 걸려왔으면 내가 잠결에도 못 들을 리가 없다. 엄마가 우편물 확인하러 내려가셨나보다 했던 현관문 소리가 엄마의 외출소리였던 것이다!

득달같이 카톡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통 답이 없더니 6번째 전화만에 엄마가 휴대폰을 받았다. 예상대로 약속장소인 사당역까지 갔다가 아무도 없어서 친구들한테 전화로 확인을 한 뒤 집에 돌아오시는 중이라고. ㅠ.ㅠ 어제 취소 전화 받은 건 전혀 기억에 없단다. 거의 두달만에 엄마 혼자 감행한 외출이다보니 그간 몇번 억지산책에 끌고 나가긴 했어도 불안했다. 혼자서 집에 잘 찾아올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엄만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다. (현관 비밀번호를 엉뚱하게 눌러서 내가 소리쳐 알려드려야 했으나 뭐 그건 전에도 있는 일...) 따로 쇼핑백에 들고간 핸드크림도 손에 꼭 쥐고서. ㅠ.ㅠ (한번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근데 모임이 왜 취소되었는지, 전날 모임 취소 관련 통화를 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다. 모임 장소에서 홀로 기다리다가 친구들과도 한분한분 다 통화를 한 모양인데, 집에 와서도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왜 안 만나기로 했는지 물으셨다. 

매달 셋째주 화요일 모임은 당연히 각인되어 있는 정보이니 잊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것도 일시적인 정보이고, 내가 친구분들에게 드릴 핸드크림을 사놓았다는 것도 일회성 정보인데 왜 둘 중에 하나만 기억에 남았을까? 인간은 누구나 기억이 선택적이고 중요한 정보만 두뇌에 남는다. 근데 친구들 나눠줄 선물은 중요하고, 모임 취소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으휴.

2주전 진료때 주치의에게 정밀 뇌진단을 받아보았으면 한다고 의논했을 때, 의사는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말했다. 인지기능개선제인 아리셉트를 드시고 계시지만, 지금 복용 용량으로도 알츠하이머 예방은 충분한 건가 불안한 엄마와 내 마음을 의사는 잘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에피소드도 그냥 일시적인 걸로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암튼 몹시 불안해진 나는 다시 그 옛날 필사 노트를 꺼내왔다. 재미없는 불경과 책 내용 필사는 별로 흥미가 없을 것 같고 두뇌자극에 제일 좋은 건 외국어 배우기라는 말을 본 적이 있어서 이번엔 영어 문장을 베껴적고 단어를 외우시게 할 작정을 한 거다. 

내 이름은 OOO이고 80살이고, 어쩌고 저쩌고... 10문장쯤 되는 말을 만들어서 반복 읽기를 시킨 뒤 단어를 10번씩 쓰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1시간쯤 뒤에 가보니, 3단어만 되풀이해서 쓰고 7개 단어는 깡그리 패스, 나머지는 마지막 네 문장을 베껴적어놓으셨다. 내가 나중에 외우기 시험볼 거라고 했더니 열심히 읽고 외우느라 바쁘셨나보다. 그게 아니면 정보 전달이 일부만 머리에 남거나. 흑흑.

암튼 근 6개월간 엄마가 글씨 쓸 일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영어단어 적어놓은 글씨를 보니 손가락 힘이며 인지기능 상태는 많이 나빠지지 않은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알츠하이머 노인들은 힘있게 획을 긋지 못한다고 들어서... 하여간에 너무 한번에 스트레스 주면 안되니깐 나머지 단어들은 오늘 다 10번씩 쓰시라고 숙제를 내주었는데... 어제 간만에 홀로 대중교통수단 외출로 무리를 한 탓인지 온종일 주무신다. 컨디션이 좋아지면서 약도 과도해진듯.  그치만 난 또 못된 사감선생처럼 가서 노친네를 깨워가지고 다시 두뇌훈련을 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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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당신 영어 글씨 흡족해하심.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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