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장애

아픈 손가락 2020. 1. 6. 16:46

양극성장애( bipolar disease)는 조울증의 다른 이름이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으로 바꿔부르면서 조현병과 조울증이 너무 비슷해보였나? 아니면 기분이 심하게 오르락거리는 사람에게 조증이냐고 놀려대는 질병 혐오발언 탓에 공식 병명을 달리 부르기로 학계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걸까? 암튼 그 이유는 몰라도 새로 나온 몇몇 정신건강 관련 책을 보니 조울증을 죄다 '양극성장애'로 표현하고 있었다. 비전문가로서 그냥 단어만 봤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를 짚어본다면, 조울증은 '증상'의 느낌이어서 필요 이상으로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 같은 반면에, 양극성장애는 '장애'를 붙여놓으니 지적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같은 항구적인 질병과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 같다. 뭔가 치료는 불가능하고 장애 상태에 그냥 적응해서 살아야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공황장애(panic disorder), 분리불안장애(separation anxiety disorder)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름을 붙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disorder와 disease는 똑같이 '장애'로 옮기기엔 뉘앙스가 사뭇 다른 듯하다. disorder(dis-order, 질서가 무너짐, 엉망진창)는 신체적인 이상, 약간의 기능 장애 같은 느낌인 반면에 disease는 비록 그 어원이 편하지 않음/불편함(dis-ease)에서 왔다고는 하나 엄연히 '질병'이란 말이지. ㅠ.ㅠ

 

하여간 점점 분리불안 상태의 어린애처럼 구는 시간이 많아진 엄마를 혼자 감당하는 게 힘들어서 작년에 보험공단에다 요양보호 등급신청을 해보려고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에게 진단서를 부탁했더니만, '경도인지장애'와 함께 '양극성장애'라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물론 보험공단에선 울 엄마 정도의 인지능력과 조울증으로는 심사도 불가능하다고 전화로 통보해왔다. 아주 치매환자로 인정을 받아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그것도 심한 인지장애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있어야 한다고. 젠장.

 

조울증이나 우울증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 잘 아는 사람들(심지어 아들들도!)이라도 짧은 시간 우리 엄마를 지켜보면 대체로 엄마 멀쩡한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나에게 핀잔을 준다. 나도 미칠 노릇이다. 일년내내 약을 드시고는 있지만 어떤 빌미로 증상이 심해져 겉잡을 수 없게 되면, 엄마는 하루종일 중얼중얼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입밖에 내거나 온 집안을 서성서성 돌아다니거나, 집안 구석구석에서 오래된 서류나 우편물을 끄집어내 새삼 읽어보며 의심을 하거나, 딸이 눈에 안 보이는 게 불안해서 졸졸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댄다. 

 

홀로 중얼거리는 내용은 대체로 자책과 후회, 어후, 미쳤어, 미쳤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살면 뭐하나...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작년부터는 양상이 좀 달라졌다. 전에는 동네 사람들이나 밖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당신을 이상하게 감시하고 뭔가를 훔쳐가려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젠 심한 의심의 대상에 내가 포함되었다. ㅠ.ㅠ 치매 환자들이 흔히 주변 사람들을 의심해서 도둑으로 몬다는데, 울 엄만 치매도 아닌데 왜 나를 도둑년으로 모는 건지 원!

 

습관처럼 말로는 "XXX(내 이름) 없으면 엄마는 시체야. 너 없으면 엄만 못 살아..."라고 하루에 열두번도 더 되풀이하면서(까칠한 요즘 나의 상태로는 이 말도 딸에 대한 엄마의 가스라이팅 같아서 짜증스럽기만 하다. 도둑년 취급이나 하지 말든지! 나더러 뭘 더 어쩌라고!), 12월 들어서는 실질적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의심하기에 이른 것! 학교에 수업 간다고 외출해도 거짓말 하는 거라고, 자꾸 거짓말 하고 대체 어딜 나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고, 친척 결혼식 축의금을 내가 송금받아서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돈을 내가 다 떼어먹었다고 의심하시고! KTX 티켓을 모바일로 구매했다는 말조차 믿지를 못해서 사흘 내내 고모들을 동원해 설명을 해드려야 할 지경이었다. 부산 숙소와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두고 여행겸 떠나려던 부산 결혼식을 결국 이런 상황에서 다녀왔다는 게 정말 기적이다. 

 

기막히는 건 내 앞에선 눈을 흘기거나 부라리며 험악한 얼굴로 거짓말쟁이라고 나를 의심하거나 발을 구르며 펄펄 날뛰다가도, 아들 전화를 받을 땐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으로 돌변해서 '아들? 엄마 괜찮으니까 걱정마...'라고 한다는 거다. 물론 친척분들이랑 통화를 할 때도 말투와 태도가 달라진다. 누구보다도 남들의 시선과 평판을 의식하는 분이라 그런걸까? 요번엔 나도 정말 지치고 지긋지긋하고, 열이 뻗쳐서 엄마의 본모습을 증거로 남겨두겠다며 동영상 촬영을 해두었다. (한두달 뒤에 엄마가 심신의 안정을 되찾으면, 병증이 심했을 때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신다.) 엄만 당신의 '미친 모습'을 찍어두었다며 당연히 길길이 화를 내시고 딸을 더욱 미워하고 있지만, 내가 오죽하면!  고모들 두분과 같이 떠난 부산에서 1박2일간 엄마는 집에서 보이던 모습과 달리 대체로 놀랍도록 안정적이었는데, 엄마의 고질병을 잘 아는 고모들도 드디어 밤사이 드러난 불안증과 의심병의 진실을 확인하고는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며 나를 불쌍히 여겼다. 나의 인내심이 놀라운 수준이라고. ㅠ.ㅠ 

 

양극성장애 환자의 사연들을 들어보면 정말 기막힌 경우가 많다. 조증인 상태에선 환자가 자신만만하고 거침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데, 주변에서 자칫 잘 알아차리지 못하면 집을 확 팔아버리거나 고가의 물건을 막 사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20년 전쯤엔가 울 엄마도 집에서 입던 옷에 슬리퍼 바람으로 지갑 하나만 들고 뛰쳐나가선 막내동생 예식장을 계약하겠다며 동네에서 멀지 않은 특급호텔에 찾아간 적이 있는가 하면, 며칠 뒤엔 백화점에 가서 투피스를 서너벌이나 사서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들어온 적도 있다. 그때 너무 속이 상해서 주치의에게 털어놓았더니, 집을 팔아버리거나 비싼 보석을 사들이거나 남에게 주어버리는 사람도 있는데요 뭐... 하더라.

 

조증 상태의 장점을 굳이 찾는다면 신체기능이 평소보다 좋아진다는 점이다. 시력도 청력도 더 예민해지는지, 보청기가 없어도 소리를 잘 듣고 안경을 쓰지 않아도 TV 자막이 다 보인단다. 다리가 아파 집안에서도 느릿느릿 걸어다니던 엄마는 종종 내가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의심스러워서 와다다다 쿵쿵 소리를 내며 나에게 달려오신다. 물론 저러다가 심신이 안정되면 드디어 통증을 느낄 수 있게 되어 며칠 끙끙 앓아누울 게 뻔하고 하루종일 지껄여댄 혀도 다 갈라지고 입안이 헐어 한참 고생을 해야 할 거다.

 

다른 때 같으면 어서 약을 바꾸러 병원에 무작정 가보자는 나의 부탁을 들어줄만도 한데, 요번엔 극심한 딸 의심증상 때문에 (정신병원에 자기를 처넣으려고 하는 술수란다) 원래 예약날자까지 꼬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이 한달여일만에 잡힌 정기 예약일이다. 정신과 약은 한꺼번에 투약량을 확 늘일 수도 없고 약을 바꾼다고 해서 효과가 즉각 나타나는 것도 아니므로, 사실 크게 기대되지도 않는다. 다만 나보다 신뢰하는 의사의 위로와 이야기를 엄마가 잘 듣고 플라시보효과도 좀 생기길 바랄뿐.  연초부터 참으로 지치는 나날인데, 이러다 내가 병나겠다 싶어서 자꾸 밖으로 도망칠 일을 꾸미고 있다. 나도 숨은 쉬어야지. 휴.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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