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말자'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1.05.17 아는 게 병 11
  2. 2010.12.21 감기약 테라플루 10
  3. 2010.09.01 허리와 커피 5
  4. 2010.05.28 먹어서 낫기 4
  5. 2010.05.07 집에 왔다 8
  6. 2010.04.03 병원 공포 11
  7. 2009.09.18 애자 10
  8. 2009.09.01 도피 16
  9. 2009.07.03 귀가 14
  10. 2009.06.23 가방싸기 14

아는 게 병

투덜일기 2011. 5. 17. 17:41

이 세상에 감기를 치료하는 약은 없으며, 모든 감기약은 증상완화제일 뿐이다.
어차피 감기는 약 먹으면 2주, 안 먹으면 보름만에 낫는다.
물 많이 마시고 밥이랑 과일 잘 챙겨먹고 잠 잘자서 몸의 면역력을 높이면 감기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감기약 먹으면 졸리고 멍해서 정신집중이 안된다.
감기약 먹고 운전하면 사고날 확률이 늘어난다. (무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본 것 같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지어주는 감기약의 알약 갯수를 보면 딴나라 의사들은 기함을 한다. 약 흡수 잘 되라고 소화제까지 처방하는 의사들 여기밖에 없다더라.

이상은 감기에 대한 평소 나의 지식이랄까 믿음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근거로 거의 3주간 계속 버텼다. 이번 감기는 다른 증상 없이 그냥 기침만 나왔던 터라 더욱 소신껏 밀고 나갔던 것 같다. 사실 무작정 버틴 건 아니고 지난번 먹고난 테라플루도 몇번 먹어주었다. 크게 효험은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기침도 낮엔 얼추 괜찮다가 밤에만 좀 많이 나왔다. 원래 기압이 낮아져 기침은 밤에 더 심하진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지난주초엔 기침을 하느라 뱃가죽이 당기는 수준까지 이르긴 했으나 나로선 별로 불편할 게 없었다. 나을듯 나을듯, 떨어질 듯 떨어질듯 하다가 밤만 되면 다시 도지는 기침이 그저 얄미울 정도였다. 그런데 왕비마마는 나의 기침을 못견뎌했다. 기침 소리 들을 때마다 병원으로 끌고 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기침보다도 그놈의 잔소리가 지겨워 결국 어제 동네 내과를 찾았다. 목안을 들여다본 의사는 내 짐작과 별 다를 것 없는 말을 했다. 염증이 좀 있기는 하지만 심하지 않다. 낮에 물 많이 마시고 체온관리 잘 하고 푹 쉬는 정도로 나을 수 있겠지만 약을 먹으면 좀 더 빨리 나을 테니 이틀치 처방을 내려주겠다. +_+

주사는 맞고 싶으면 맞으라고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당연히 안 맞기로 했다. 약만 타가지고 돌아와 어제오후부터 시간 맞춰 열심히 먹고 있는데.... 

젠장,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밭은 기침은 콜록콜록 똑같고 괜히 정신만 멍하다. 알러지 약까지 들어 종류도 6가지나 되는데 왜 효과가 없는 거냐!(콧물에다 몸살까지 겹쳤으면 약을 열개는 처방했으려나? -_-;) 엄마는 주사를 안 맞아서 그런다며 약 다먹고 내일은 주사까지 맞으라고 또 성화다. 나는 애당초 병원에 갔던 걸 후회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 것 같다. 의사와 약의 권위를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가짜 약을 먹고도 30%쯤의 환자들은 증상이 완화된단다. 그래서 그런 착한(?) 환자들과 의심 많고 부정적인 태도의 환자들은 치료효과가 두배나 차이를 보인다. 플라시보 효과 대신 역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걸 노시보 효과라고 한다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딱 그짝이다. 이 세상 감기약을 죄다 불신하는 나에게 감기약이 효력을 제대로 나타낼 리 없잖은가. ㅋㅋㅋ 병도 병이지만  나는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인 셈. 어쩌면 아는 게 병이 아니라, 불신과 회의가 병일지도...  역시나 믿을 건 내 몸과 오기밖에 없다 싶다.

이놈의 기침 감기 바이러스, 내 오늘부터 너를 물에 빠뜨려 죽여주마!
기를 쓰고 물을 마시고는 있는데...
계속 화장실 다니느라 귀찮아 죽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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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약 테라플루

투덜일기 2010. 12. 21. 01:44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병원도 안 가고 약도 안먹고 버티며 '잘 먹어서 낫는' 식탐 요법을 주로 찾는 나지만 '레몬차처럼'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감기약이 있다니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제부터 콧물이 심해 줄줄 흘러내리지 않으면 코가 꽉 막혀 제대로 호흡이 곤란한 지경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먹어보겠단 생각도 안했겠지만 말이다.

요즘 그 감기약이 유행(?)이라지만 과연 우리 동네 약국에서도 팔려나 약간 의아했는데, 확실히 인기품목인지 "테라플루라는 감기약 혹시 있나요?"라고 예상 질문까지 연습하고 간 것이 무색하게도 약사 바로 앞 카운터에 가격표까지 붙은 채 따로 진열되어 있어 말 한 마디 없이 살 수 있었다. 밤과 낮 용으로 나뉘어 한 상자에 각각 6천원.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종합감기약 종류는 10알 한 상자에 2-3천원쯤이면 살 수 있는 데 반해 차 형태라서 아무래도 좀 비싸군 싶었다. 

어쨌거나 얼른 물을 끓여 찻잔에 담아 한 봉지 타 마셔본 첫 소감은 '맛없다!'였다. 레몬차 맛이 나기는 하는데 뒷맛이 몹시 쓰고 떫은 느낌. 인공적인 단맛에 뒤이어 섬뜩한 쓴맛이 파고드는 애들 감기약 시럽과 비슷한 맛이랄까. 으윽. 큼지막한 알약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도 못할 노릇이지만, 나로선 그 달달씁쓸텁텁한 감기약을 차로 한 잔 다 마시는 것도 꽤나 고역이었다. (차라리 한번에 꿀꺽 삼키는 알약이 낫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음) 하지만 벨로도 처음엔 맛 없어서 외면했다가 두번째 다시 시음한 뒤 맛있다고 여겼다니 나도 첫인상에 너무 얽매이진 않기로 마음 먹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내가 걸린 감기의 주요 증상은 어제부터 두통과 콧물, 코막힘이었는데 약을 먹고 나선 일단 코막힘 때문에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했던 상황은 좀 나아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콧물은 금세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4-6시간 간격으로 먹으라는 복용 설명에 맞춰 인상을 팍팍 써가며 두잔째 마시고난 지 세 시간쯤 지난 지금, 한 시간 전부터 주체할 수 없는 콧물의 공격으로 계속 팽팽 코를 풀어대고 있다. 나에겐 별로 맞지 않는 감기약인가? -_-;; 실은 제약회사를 탐탁지 않아 하는 나의 심리가 약효를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약을 타서 마시기 전에 복용 안내를 확인하다 보니 제약회사가 하필 '노바티스'였다. 일찌기 장 지글러 선생께서 탐욕스러운 다국적 제약회사의 선봉으로 고발한 바로 그 회사란 걸 알고 나니 어찌나 기분이 찝찝하던지. 하기야 유명 제약회사 치고 탐욕스럽지 않은 데가 없지만, 노바티스는 특히 백혈병 치료약 글리벡으로 전세계적으로 치사한 짓을 벌이고 있는 곳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백혈병 환자들이 청원한 가격 인하 청구 때문에 소송중일 거다.) 약에 대한 믿음이 발휘하는 플라시보 효과가 최소한 30퍼센트나 된다는 걸 감안하면, 노바티스에 대한 불신과 마뜩찮음이 약효에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ㅋ (언제부터 그렇게 정치적인 걸 그리 꼼꼼히 따졌다고!)

하긴 아래 포스팅한 네스프레소 기계도 말 나온김에 정말 확 질러? 싶은 충동에 좀 더 알아보니 네슬레에서 만든 거라고 했다. 네슬레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분유로 장난 치고 노동자 핍박하는 악덕 다국적 기업이라는데, 정치적으로 상당히 진보 성향을 띠고 있는 클루니가 그런 회사 광고를 찍었다니 급 실망스럽기도 하고, 과연 모르고 찍었을까 알고도 그냥 찍은 걸까 마구 궁금해졌다. (하기야 나도 <탐욕의 시대>를 읽기 전엔 인스턴트 커피 땡길 때 맥심 커피 대신 꼭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를 샀었으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하다.) 어쨌거나 나는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으니 훗날 캡슐형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게 되더라도 네스프레소는 사지 못할 거다. 조지 클루니와 광고만 소비해 주는 수밖에. -_-; 

트랙백할 욕심에 감기약 얘기 쓰다가 갑자기 장 지글러 선생 타령하고 있는 걸 보면 코를 하도 풀어대 정신이 없는 건 분명하다. ㅎ 암튼 겨우 두 봉다리 마셔본 결과로는 별로 쓸만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며, 특히 가격 대비 효용을 따진다면 괘씸할 정도다. (병원 거부증을 참아내고 차라리 동네 의원엘 갔더라면 진료비와 약값을 다 포함해도 4-5천원 안쪽이었을 텐데! 아깝다, 만이천원 -_-;; 그리고 더더욱 아깝다, 매달 내는 나의 건강보험료 십몇만원 ㅠ.ㅠ)  그래도 이왕 산 거, 끝까지 마셔볼 작정이긴 하다. 밤 약은 잠 올까봐 아직 못 마시고 있는데 그건 좀 약효가 다르려나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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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와 커피

투덜일기 2010. 9. 1. 18:13

이틀 전 아무 이유 없이 허리를 비끗했다. 무거운 걸 든 것도 아니고 갑자기 몸을 깊이 수그린 것도 아니다. 그냥 외출하려고 손을 뻗어 소파에 있던 가방을 집어들려던 것 뿐인데, 순간적으로 몸이 좀 이상했다. 과거에 허리를 삐끗하거나 어깨 같은데 담이 들릴 때는 외부로 들릴 만큼은 아니라도 몸 어딘가에 무리가 갔음을 직감할 수 있는 '우드득' 또는 '휘청' 하는 소리가 나에게만은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느낌도 없이 손을 뻗었을 때와 손을 거두었을 때의 몸 느낌이 달랐을 뿐이다. 심한 이상은 아니라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할 땐 거의 멀쩡하지만 자세를 바꿀 때가 문제다. 특히 엉거주춤 구부리는 동작은 코미디가 따로 없다. 가장 괴로운 건 볼일 볼 때. -_-'' 주변에선 빨리 병원엘 가든지 한의원엘 가라고, 하다못해 파스라도 붙이라고 성화지만 내가 어디 그런 사람인가. 며칠 지나면 나아질 거라면서 그냥 버티는 중이다. 확실히 상태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달라서 화장실 다닐 때와 잠자리에 누울 때 많이 수월해졌음을 느낀다. 앉아서 일할 때는 거의 불편함을 모르겠고... 어쨌거나 또 요가수업 빼먹을 핑계가 생겨서 기뻤다. 이젠 요가를 빼먹어도 돈도 아깝지 않은 단계에 접어들었다. 조카한테 민망할 뿐.

원두커피가 떨어져서 이번에도 같은 원두를 살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공정무역 커피를 주문했다. 그간 양심에 찔리면서도 가격이 두배가 넘는 데다 입맛에 맞는 걸 찾으려면 또 몇번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기 때문에 망설였다. 원두는 금방 볶은 걸 조금씩 사다가 일주일 내로 먹어야 제격이지만, 방구석 붙박이로 사는 나로서는 그냥 대용량을 사서 며칠 간 신선한 원두커피를 즐기다 남은 원두는 얼른 냉동보관했다가 조금씩 꺼내 갈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간 주문해 먹던 원두는 1kg에 3만6천원. 이것저것 사먹어 보니 내 입맛엔 풀시티로스트로 좀 진하게 로스팅한 남미산 커피가 맞는다는 걸 깨달았고, 가격대비 만족도도 몹시 높았다. 주문한 뒤에 로스팅해 보내주는 원두를 이틀 쯤 뒤에 받아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면 정말로 향기가 온 집안 가득 그윽하게 퍼진다.

어쨌든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곳도 주문 하면 그제야 볶아서 배송해준다니 원두만 잘 고르면 될 듯했는데, 똑같이 콜럼비아산 아라비카 커피를 두 종류로 시켰는데도 오늘 도착한 원두를 설레는 맘으로 갈아서 커피를 만들어 보니 맛이 없다. -_-;; 개인적으로 나는 신맛이 강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향도 그윽함이 덜하고 맛은 전체적으로 시큼털털하다.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곳도 여러군데이니 계속 양심적인 커피를 마시려면 로스팅을 좀 더 잘하는 곳을 찾아봐야한다는 뜻이다. 구매자 후기 읽어보니 다들 '맛'보다 '공정무역'에 방점을 두고 산 듯했는데 그걸 간과한 내 잘못이다. 227g에 만오천원씩, 두 봉지 다 맛이 없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하나는 성공할 줄 알았건만... 솔직한 마음으론 공정무역이고 양심이고 다 관두고 그냥 예전에 주문하던 데다 다시 원두를 주문하고 싶다. -_-; 변변한 낙도 없는 삶에서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데... 결국엔 커피 업체를 잘못 고른 나의 잘못인데도, 공정무역 커피는 별로 맛이 없다는 쪽으로 자꾸 편견이 자리를 잡으려 하기에 이렇게 또 끼적이고 있다. 자꾸 마셔보면 신맛에도 길들여지려나...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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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서 낫기

삶꾸러미 2010. 5. 28. 15:31

그리스, 로마 시대는 물론이고 19세기까지도 내과의사들은 대부분 식물학자였단다. 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과학자와 식물학자들은 병을 고칠 해답을 식물에서 찾아왔고, 신약개발 얘기를 들어봐도 과학자들이 아직도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는 게 맞다. 한방에서 아직도 요긴하게 참조하는 동의보감도 거의 다 식물 약재 비법 아닌가 말이다. 밥이 보약이고 밥상으로 병을 고친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거다. 독초도 조금만 먹으면 약으로 쓸 수도 있다잖은가. 어차피 인체는 스스로 치유하고 나으려는 에너지와 비밀스런 방편을 갖고 있는 유기체이므로, 치명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면 병은 낫게 되어 있다.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 몸을 잘 못 돌봐서 그렇지.

보호자로서 평균 일주일에 한번은 대학병원을 들락거리고는 있지만 의학과 약효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점점 회의가 들어 웬만해선 병원을 찾지 않는 나의 성향이 더욱 고착되는 중이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라는 사람들이 환자를 두고 하는 말은 거의 다 가정이고 가능성이지 않으면 협박이다. 이런저런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으면 나을 거라고 환자에게 확신을 주는 게 아니라, 일단 한번 복용해보고 주사도 맞아보자는 식이다. 의료과실을 입증하는 게 쉽지도 않은 나라지만, 어쨌거나 그런 의료사고의 가능성을 최대한 피해가려는 수법이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나 모든 부작용과 문제점에 대한 책임은 환자가 지라는 거다.

의료진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하도 오묘해서 같은 약도 사람에 따라서는 효과가 달리 나타나며 웬만한 위약의 플라시보 효과는 무려 30%에 달한다니 가끔 불치병이 기적처럼 나았다는 사례들은 엄밀히 말해 인간과 인체의 정신력과 체력의 승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임상효과가 입증된 약일지라도, 대조실험을 해보면 약에 대한 신뢰성을 지닌 집단은 탁월한 효과를 보는 반면에 약효에 대한 회의를 품은 집단은 약이 잘 듣질 않는단다. 딱 울 왕비마마 같은 분 얘기다. 멀쩡한 음식도 '혹시나 상했나' 의심하는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왕비마마는 주치의에 대한 신뢰도에 따라 드시는 약의 효과가 죄다 다르다. 특히나 진통효과를 내는 약이나 주사나 패치 따위에 대한 불신은 놀라울 정도라 남들보다 30%(플라시보 효과 만큼이다)는 약효가 떨어질 게 틀림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나로선 통 믿음이 가지 않는 민간요법이나 '카더라 통신'에 대한 신뢰와 효과는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대단하게 나타난다. '친구분의 권유 대로 매일 사과발효 식초를 먹었더니 머리와 다리가 확실히 거뜬해졌다'고 믿는 식이다. 결론은 하나다. 모든 것은 왕비마마의 마음과 생각에 달렸다는 것.

모전녀전이라고 나 역시 회의와 불신이 많은 인간이지만 식탐녀 답게 먹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몸을 다스릴 수 있다는 부분엔 믿음이 간다. 특정음식에 심한 알레르기를 보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모든 인체는 해로운 음식에 어떤 형태로든 거부반응을 보이며 이로운 음식엔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난다. 고혈압 당뇨 환자에게 육류를 줄이고 열심히 유기농 채소를 먹게 하면 반드시 혈압과 혈당 수치가 좋아진다. 왕비마마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하고 끼니마다 나물반찬과 샐러드 따위를 떨어뜨리지 않은 결과 1년 반만에 약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기에 자신있게 하는 말이다. 운동량을 늘여서 체중만 줄이면 당뇨 약을 끊어도 될 터인데 그것까지는 이룰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중년에 접어든 내 몸도 마찬가지다. 평생 변비 같은 건 모르고 살지만 외식을 했다든지 불균형하게 끼니를 떼워 푸성귀를 좀 덜 먹은 다음날은 확실히 화장실 가기가 어렵다. 이젠 몸도 적응했는지 채소와 과일을 좀 덜먹었다 싶은 날은 오밤중에라도 나도 모르게 우적우적 오이와 양배추 과일 따위를 씹어먹고 앉았다. 이 또한 심리적인 작용임을 잘 안다. 음, 나 오늘 채소를 좀 덜 먹었네. 내일 배변이 어려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몸을 지배해 현실로 벌어진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이런 미묘한 심리와 몸의 경향을 나는 다 '먹는 것'으로 해결하려 들고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닭고기가 먹고 싶으면 몸에 동물성 단백질이 부족하다는 의미고, 새콤달콤한 과일이 땡기면 몸이 비타민을 원한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한다.
 
몇달째 감기기운으로만 들락거리던 바이러스의 힘이 드디어 창궐하여 목이 붓고 콧물이 줄줄 나는 상황에 놓이면 즉각 나는 보신용 음식으로 대처한다. 예로부터 몸이 아파 입맛이 떨어지면 죽을 먹는 게 전통이지만 나는 '죽쑤는' 것도 싫고 별 씹을 것 없이 우물거리다 삼켜야 하는 죽도 싫다. 말이 보신용 음식이지, 맥 떨어지고 입맛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냥 머리에 '퍽' 하고 떠오르는 음식이 곧 내 몸이 원하는 보신용 음식이다. 이번에 그렇게 '퍽'하고 떠오른 음식은 난데없이 '치킨수프와 미나리'였다. 오래 전 <**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시리즈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지만 원래도 치킨수프의 뉘앙스는 서양인들이 몸 아플 때 먹는 심신의 보양식이다. '국물' 음식이 드문 서양식 가운데 그나마도 따끈하게 몸을 덥혀주는 음식이기 때문일 거다. 뜬금없이 미나리 생각은 왜 났는지 모르겠는데 미나리 특유의 상큼한 향이 그리워진 걸 보면 코감기로 둔해진 후각이 콕 찝어서 미나리 열망을 뇌에 전달한 모양이었다. ^^

아직은 사흘째 밤마다 열이 올라 후끈후끈 덥고 팽팽 코를 풀어대느라 코밑이 빨갛지만 온갖 채소를 듬뿍 넣은 치킨 수프와 미나리숙주 무침을 이틀 내리 먹어주었더니 얼추 감기가 나아가고 있는 기분이다(순전히 기분일지도).  열이 나는 건 내 몸의 백혈구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의미라 기특해서 얼음물을 마셔가며 열심히 지원을 해주고 있다. 어차피 감기 바이러스는 2주면 물러간다는데 꾸역꾸역 먹어서 나으려는 식탐녀의 노력으로 며칠 안에 똑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오늘은 비타민B군 섭취를 위해 돼지고기를 삶아서 쌈밥을 해먹을 것이기 때문. 거슬러 올라가면 음식과 약은 기원이 같다는 진리를 신봉하게 된 자의 몸부림은 곧 식탐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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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왔다

투덜일기 2010. 5. 7. 20:33

거의 1년만인 지난 일요일에 또 병원 들어갔다가 오늘 나왔다. 나 말고 왕비마마 때문에. ^^;
이번 입원은 여러모로 놀라웠다.
수술공포에 사로잡힌 왕비마마의 변덕에다 병원과 의사의 삽질까지 더해져 수술일정이 연기되질 않나, 입원예정일엔 아예 수술을 취소했다가 또 다시 날짜가 당겨 잡히질 않나... 지난 일요일에 병원들어가기 직전까지도 통 앞일을 알 수가 없더니만, 바로 다음날 수술, 그리고 5일만에 전격 퇴원, 역사상 최단기간에 간병무수리 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다.

기간이 짧으니 그간 쌓인 피로도 덜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간밤에 특히 잠을 설치는 바람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대충 짐정리 해놓고는 단잠에 빠졌다. 원래도 잠자기를 즐기지만 내방에 편히 누워 따뜻하게 자는 잠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깨어나고 싶지가 않을 정도였다. 집 나가면 고생이고 역시나 집이 최고다 싶긴 해도, 집에 돌아온다고 무수리가 해야할 일이야 사라지는 건 아니어서 묵지근한 몸을 일으켜 왕비마마의 저녁 진지를 챙기며 맥이 또 빠졌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그질을 시작하니 비로소 정말 집에 왔다는 푸근한 느낌이 든다. 꼼꼼히는 못읽었지만 대강 이웃 블로그도 한바퀴 돌아보니 나머지공부라도 해서 따라잡아야 할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나의 부재가 짧았다는 의미다. 

암튼 무사히 집에 왔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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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얘기긴 하지만 요번에 번역한 책에 이런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 미국 의학협회가 2000년에 발표한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고속도로 교통사고, 유방암, 에이즈를 포함한 여러가지 주요 사망원인보다 병원에서 의료 과실로 죽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 그 수가 연간 9만 8천명이 이르렀다고. *_* 우리나라랑 미국이랑 인구 비율이 워낙 다르긴 하지만,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닌가!

사실 우리 아버지도 119를 불러 타고 가기는 했지만 두발로 멀쩡히 응급실에 걸어들어가셨는데, 쓸데없이 말라리아니 뭐니 엉뚱한 추측으로 밤새도록 온갖 검사 다 받고도 발열과 오한의 원인을 못찾다가 아침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위중한 순간이 된 다음에야 의사들은 심증이 가는 병명을 <짐작>해냈었다. 물론 그땐 이미 늦은 뒤였다. 의료 과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두뇌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심증뿐 의구심을 밝혀낼 도리도 없었고 워낙 황망해 아무런 경황이 없어, 우리로선 그래도 그 못미더운 의사들에게 매달리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닥터 하우스 팀도 병명을 알아내기까지 며칠씩 걸리기도 하지 않더냐고 속으로 애써 위로를 하면서.

책의 저자는 그런 의료 과실의 가장 큰 원인이 의료진의 무능이 아니라 안일하고 무심한 태도 때문이라며, 흔히 건강에 관한 한 주도권을 의료진에게 모두 맡기는 게 보통이지만 환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의료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게 귀찮을 만큼 묻고 의견을 제시하고 대안을 촉구하라고 권한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실수를 범하는 인간인데, 또 바로 그 전문가라는 위치 때문에 실수가 있어도 제도적으로 다들 쉬쉬하며 덮기에 급급해 수많은 과거 실수에서도 통 배우는 게 없단다. 게다가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수의 통계 자료를 지식으로 갖고 있는 의료진이 아니라 바로 본인므로, 최대한 치료 효과를 높이려면 환자 본인이 주도권을 갖는 수밖에 없단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건강을 극단적으로 위협받는 순간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겠지만, 그 전엔 최대한 대체의학이나 믿음직한 민간전승요법에 더 기대어 건강을 챙기겠다는 사람이다.

온갖 지병을 다 갖고 계신 왕비마마 덕분에 한달에 평균 두세 번은 종합병원엘 가야하는 형편인데, 이 나라에선 의료 과실을 입증하는 게 미국보다 훨씬 더 어려운 탓에 돈 많은 사람들 아니고선 감히 거대권력인 의료계와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걸 감안할 때 정말이지 환자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약 처방의 날짜계산이 잘못되었다거나, 약을 하나 빠뜨렸다거나, 다음 진료예약이 상담시 정한 날짜와 달라진다거나 하는 행정적인 착오는 실수 축에도 들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걸핏하면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미국에서야 연간 의료 과실로 판명된 사망자 통계가 9만 8천명이라지만, 우리나라는 아마 의료 과실로 환자가 사망했음을 인정한 건수가 역사상 통틀어도 98건도 되지 않을 것 같다. CT 조영제 주사 하나를 맞아도 온갖 부작용으로 인한 결과는 본인 책임이라는 사유서에 서명을 받는 형편이니 뭐. -_-;;

월말에 또 왕비마마의 병원 거사가 잡혀 있어 어제는 그 건과 관련하여 무려 여섯 개 과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협진 상담을 하고 수술동의를 받아야했는데, 마지막 코스였던 심장전문의와 마취전문의는 수십 가지가 넘는 약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조차 난감해 했다. 외부 병원 약도 아니고 다 지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이라 컴퓨터 모니터에 진료과목 별로 종류 별로 다 뜨는 게 내 눈에도 확인되던데도! 미리 수술관련 안내문을 숙지하고 있던 내가, 그리고 작년 수술에서 이미 어떤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익히 겪어본 내가 이런이런 약은 지혈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미리 끊어야하는 게 아니냐고 넌지시 알려줘야 했다. +_+ 

아침부터 다저녁때까지 온종일 층층마다 병원을 뺑뺑 돌며 여러 과에서 의사들이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이유는 울 엄니가 워낙 고위험군 환자이기 때문일 텐데, 의례적인 절차라고는 해도 어쩜 다들 그렇게 건성건성인지 원 도무지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왕비마마가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는 대여섯개 진료과에서 그나마 정성스럽게 오랜 시간 문진으로 시작해 이런저런 점검을 하고 검사 결과를 알려주고 다정히 환자를 안심시키는 주치의는 딱 두명 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잘 지내셨어요? 별다른 일은 없으셨죠? 그럼 드시던 약 또 처방해드릴게요."라며 1분만에 진료를 끝내는 식이다. 환자인 울 엄마도 보호자인 나도 특별히 물어볼 게 없으면 더 시간을 빼앗는 게 민망할 지경.

간병 무수리 생활을 하도 오래한 전적 덕분에 이젠 병원 돌아가는 판세가 빤히 눈에 보이는 것 같고, 그놈의 행정절차와 의료계의 자존심 때문에 환자 측에서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소용없는 일이 무언지 대강은 파악이 된다. 요번에 번역한 책 때문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나는 의료진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고 수긍하는 <착한> 보호자였지만, 허망하게 아버지를 잃고 나선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게 커져 사사건건 의구심이 생겨 자꾸 꼬치꼬치 묻고 따지게 된다. 그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쓸데없이 키우지 않는 건 물론이다. 게다가 어리바리하게 주치의 지시를 잘못 알아듣는 인턴이나 간호사들의 실수를 미연에 막으려면 정말로 환자와 보호자가 똘똘하고 영악해질 수밖에 없다. (몇년 전엔 퇴원을 위해 항생제를 이틀전부터 끊기로 했는데, 멍청한 초짜 간호사 하나가 항생제를 새로 매다는 바람에 퇴원이 지연될 뻔하기도 했었다. 엉뚱한 약을 잘못 놓지나 않은 걸 고마워야 하는 건지도...)

병명도 다양하게 골고루 끼고 계신 왕비마마를 보필하려면 병원과 의사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매번 다니면서도 참 멀리하고픈 곳이 또 병원이다. 박수근 그림이 걸려있고 한켠에 갤러리와 카페가 생겨난 대학병원 로비는 마치 백화점에 쇼핑 다니듯 병원도 소일거리 삼아 다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애쓰는 듯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구태의연하게도 의술이 인술이라는 사실이다. 병을 다루는 게 곧 사람을 다루는 일임을 젊고 늙은 의사들이 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면 좋겠건만, 단지 하나의 그럴싸한 직업으로 선택되어 가는 양상이 짙은 의사라는 직업이 점점 안타깝고 염려스럽다. 눈에 불을 켜고 왕비마마를 지켜야하는 병원생활이 또 3주 뒤로 다가왔다. 왕비마마는 수술이 무서워서 심장이 벌렁거릴 뿐, 온통 관심이 집중되는 입원생활 자체는 막상 퍽 즐기는 양상을 보이시는데 간병무수리는 숨막히는 병원공기와 차고 좁은 보호자 침대에서 버티는 쪽잠 생활이 싫고 겁나서 역시나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나저나 참, 저 책은 과연 잘 팔릴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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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

놀잇감 2009. 9. 18. 23:49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최단기간 100만부를 돌파해 기념파티를 했다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싶지가 않다. 내심 궁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나에겐 초대형 베스트셀러 기피증 말고도 엄마를 소재로한 소설이라는 점이 더 큰 요인이다. 거의 매일 24시간 이렇게 붙어지내는 모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울 엄마를 생각하면서 나는 괜스레 저 책을 안 읽기로 마음 먹었다.
영화 <애자>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철부지 딸과 병들어 죽어가는 엄마의 눈물겨운 신파극. 최강희는 세상의 딸들이 엄마랑 손잡고 가서 보기를 권했다지만, 나는 엄마와 둘인 절대로 싫었고 따로도 보기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질질 울기 싫어서 보기 좀 그렇다는 나의 말에, 그렇게 신파조로 슬프지 않고 밝게 그려졌다니 볼만할 거라고 지인이 설득을 했다. 그분에게도 병들어 누워계신 엄마가 없었다면 아마 난 끝까지 안보겠다고 우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만나면 서로의 어머니 건강을 염려하는 사이인지라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따라나섰다. 

애자도 예쁘고 작가지망생의 저 방도 마음에 든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애자>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원래부터 최강희는 내가 퍽 선호하는 배우이고 김영애 아줌마의 연기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나머지 조연들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다. 이름도 하필 <동팔>이어서 돌팔이 의사라고 놀림받는 최일화도, <찬란한 유산>에선 별로 매력을 못살렸지만 <바람의 화원> 정조 역할로 나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배수빈도, 낭랑한 목소리 때문에 좋은 장영남 편집장도,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김C도!
요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유독 많은 것 같은데, 외지인인 내가 보기엔 어색한지 안한지 잘은 몰라도 가끔 <몬 알아듣는> 대사가 있어서 좀 답답하긴 했다. 해운대 볼 때는 최소한 열마디에 하나쯤 못알아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도 강하고 세고 독하기까지 한 두 모녀의 캐릭터엔 아마도 경상도 사투리가 필수적이었을 것 같다. 
우려했던 대로 꽤 따라울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 지끈거릴 만큼 피곤하게 울리는 영화가 아니어서 좋았고 툭툭 던지는 퉁명스러운 모녀의 대사하며, 구석구석 세심한 부분까지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이 좋았고, 특히 죽음과 병을 다루는 방식이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신파 극심한 영화처럼 병든 엄마가 끔찍하게 아파하며 관객을 고문하는 장면이나 뒤늦게 철든 딸의 한스러운 통곡 장면이 너무 길면 어쩌나 몹시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다.
만에 하나 죽기 전에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아마도 그건 울 엄마 얘기 일 거라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어쩌면 세상의 모든 딸 마음 속엔 애자가 하나씩 들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간만에 유리알 가득 미세한 눈물방울이 흩뿌려져 있어서 하...하... 뜨거운 입김을 불어 안경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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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투덜일기 2009. 9. 1. 18:03

지금도 그다지 철이 든 건 아니지만 암튼 철모르던 시절 삶이 고달퍼지면 막연한 환상을 품듯 은근히 바라던 게 있었다. 아주 가벼운 교통사고 정도로 입원해서 한 보름쯤 푹 쉬면 좋겠다는 바람. 그러면 학교도, 회사도 안 가도 되는 온갖 면책권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하면서. 물론 진짜 병원의 삶이 얼마나 참담한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몇해 전 응급실을 거쳐 난데없이 긴급 수술을 하고 누워있던 며칠 간의 실제 병원 생활은 아프고 막막하고 괴롭기만 했다. 진통제를 맞아 아픔이 잠시 잊혀지면 병상에 누워서도 개강 전에 넘겨야 할 원고 걱정을 했었다. 생각해보니 몇년 전 그때도 8월이었다.

그 이후로는 철없는 망상을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긋지긋한 원고를 껴안고 씨름하던 지난 8월 나는 별안간 다 버리고 어디로 도망을 가거나 차라리 신종플루에 걸려서 격리병동에 한 보름 들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퍼뜩 했다가 얼른 꼬리를 내렸다. 바랄 게 따로 있지... 웬만한 사람들은 일주일이면 다 나아서 퇴원한다고도 하지만, 겨우 보름 도피한다고 그 사이 어깨를 짓누르는 짐들이 사라질 리도 없으니 말이다. 다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게으름 때문인데도 스스로 쌓아올린 감당하기 어려운 벽이 나타나면 늘 비겁하게 도피할 궁리부터 하고 앉았다.

어쨌거나 지지부진했던 8월이 가버려서 속이 다 시원하다. 9월엔 좀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아니 다르게 살아야할 의무가 깃발을 펄럭이는 기분이다. 결국 방법은 딱 하나, 정면돌파뿐인데 왜 노상 그걸 잊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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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투덜일기 2009. 7. 3. 15:34
열흘만인 어제 집으로 돌아왔다.
왕비마마 간병 역사상 최단기간에 귀가할 수 있었음을 기쁘게 여기고는 있지만, 수술 이후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에 올라 앉은 듯 조마조마했던 터라 아직은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래도...
집에 와서 자는 잠과 집밥은 달디달다.
환자 본인도 나도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라 여겼지만, 역시나 모든 수술은 똑같이 버겁고 겁나더라. 
병원행 가방싸기는 요번이 마지막이기를 성심껏 빌었더니, 바람이 엉뚱하게 작용했는지 트렁크가 망가져버렸다. 혹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징조?

텅 비었던 냉장고를 다시 온갖 식재료로 가득 채워놓고 사골부터 푹푹 고는 냄새가 온통 진동하는 집안에서 이제는 느슨해졌던 번역 노동의 나사도 슬슬 조여봐야 하는데, 여전히 심신이 노곤하고 멍하다. 혈압기로 혈압 재고 혈당계로 혈당수치 재고 왕비마마한테 보조기 채웠다 풀고 수술부위 소독하는 병원놀이가 아직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 두들기는 것보다 익숙한 느낌인 걸 보면, 바짝 긴장한 간병모드가 쉽사리 해제되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 안되는 이 글줄도 몇번이나 지웠다 썼다 망설이며 끝을 맺질 못하겠다. 
어쨌거나 집에 와서 좋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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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싸기

투덜일기 2009. 6. 23. 11:47
그릇이나 문구용품 따위에 붙어 있는 스티커는 그냥 두고보질 못해 처음부터 떼어내고 써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에 비행기를 탈 때 항공사 직원이 여행가방 손잡이와 몸통에 덕지덕지 붙여준 스티커는 왠지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다음번에 가방을 써야할 일이 있을 때나 떼내는 버릇이 있다. 마지막 여행이 언제였든 그 흔적의 끄트머리라도 오래오래 부여잡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 
일년 가까이 여행가방 손잡이에 붙어 있느라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한 제주발 한성항공 짐표와 스티커를 어젯밤 다 떼내고 다시 짐을 꾸렸다. 세면도구와 양말, 수건, 편한 옷과 다량의 왕비마마 속옷, 휴대폰 충전기, 커피믹스, 종이컵, 책 두 권...을 넣을 때까지는 짐짓 유쾌한 여행을 준비하는 체할 수 있었지만, 곧이어 담요, 작은 쟁반, 과도, 티스푼, 곽티슈, 그리고 약 한 보따리를 챙겨 넣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모녀의 동반가출을 준비하듯 메모지에 적어놓은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손길이 너무도 익숙해 오히려 서글펐나 보다.
아침 일찌감치 화분에 빠짐없이 물을 주고, 될 수 있는대로 냉장고를 비우고... 떠날 준비는 모두 끝냈는데, 허무하게도 기다림은 다시 오후까지 이어져야 한단다. 여행 가방을 싸는 일은 늘 설렘을 동반했건만, 이젠 그 비율이 절반으로 떨어져버렸다. 옛날부터 따지면 8할대라 우길 수 있겠지만(처음엔 8할대라고 썼다가 고쳤다), 2, 3년전부터 따진다면 가방 싸기 두번에 한번은 여행 목적이 아니었다. 장농 옆에 세워두었던 여행가방을 꺼내 짐을 싸는 이유가 어느덧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동반할 때가 많아졌단 뜻이다. 다음 여행을 꿈꾸며 가방에 매달 예쁜 이름표를 사들여 이미 이름까지 적어둔지 어언 2년이건만, 이번에도 그 이름표는 매달 수가 없다. 집 떠나는 건 똑같아도 팔다리와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는 이런 가방싸기, 다시는 없으면 참 좋겠다. 부디 다음번 이 가방을 꺼낼 땐 정말로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을 위한 것이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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