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투덜일기 2009. 9. 1. 18:03

지금도 그다지 철이 든 건 아니지만 암튼 철모르던 시절 삶이 고달퍼지면 막연한 환상을 품듯 은근히 바라던 게 있었다. 아주 가벼운 교통사고 정도로 입원해서 한 보름쯤 푹 쉬면 좋겠다는 바람. 그러면 학교도, 회사도 안 가도 되는 온갖 면책권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하면서. 물론 진짜 병원의 삶이 얼마나 참담한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몇해 전 응급실을 거쳐 난데없이 긴급 수술을 하고 누워있던 며칠 간의 실제 병원 생활은 아프고 막막하고 괴롭기만 했다. 진통제를 맞아 아픔이 잠시 잊혀지면 병상에 누워서도 개강 전에 넘겨야 할 원고 걱정을 했었다. 생각해보니 몇년 전 그때도 8월이었다.

그 이후로는 철없는 망상을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긋지긋한 원고를 껴안고 씨름하던 지난 8월 나는 별안간 다 버리고 어디로 도망을 가거나 차라리 신종플루에 걸려서 격리병동에 한 보름 들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퍼뜩 했다가 얼른 꼬리를 내렸다. 바랄 게 따로 있지... 웬만한 사람들은 일주일이면 다 나아서 퇴원한다고도 하지만, 겨우 보름 도피한다고 그 사이 어깨를 짓누르는 짐들이 사라질 리도 없으니 말이다. 다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게으름 때문인데도 스스로 쌓아올린 감당하기 어려운 벽이 나타나면 늘 비겁하게 도피할 궁리부터 하고 앉았다.

어쨌거나 지지부진했던 8월이 가버려서 속이 다 시원하다. 9월엔 좀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아니 다르게 살아야할 의무가 깃발을 펄럭이는 기분이다. 결국 방법은 딱 하나, 정면돌파뿐인데 왜 노상 그걸 잊는지 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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