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10.08.26 바라보긴 뭘 8
  2. 2010.01.26 친절도 좋지만 23
  3. 2010.01.13 외래어 발음 24
  4. 2010.01.08 조심히 22
  5. 2010.01.03 눈의 종류 8
  6. 2009.12.03 혓바늘 11
  7. 2009.11.09 어루만짐 15
  8. 2009.11.05 지인과 지기 사이 13
  9. 2008.11.05 사소한 실망 14
  10. 2008.03.26 나더러 좋은 하루가 되라고? 17

바라보긴 뭘

투덜일기 2010. 8. 26. 15:43

중고등학교 시절 사범대 부속학교였던 우리 학교엔 당시로선 꽤 드물게(이후 많은 학교에서 따라했다고 들었다) 아침마다 명상의 시간이 있었다. 이른바 '마인드 콘트롤'이라고 해서 MC라고 시간표에도 떡하니 적혀 있었을 거다.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에,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유치하고 얼굴 간지러운 명상음악과 새소리 물소리 따위를 배경으로 느릿느릿 명상을 유도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편안히 눈을 감고  마음의 여행을 떠납니다.
나는 지금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리는 숲 속을 거닐고 있습니다.
산들바람이 붑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쩌구 저쩌구...

뭐든 새로운 걸 도입하기 좋아했던 그때 선생들은 우리학교가 '마인드 콘트롤' 시간을 도입해서 학생들 성적도 오르고 성정이 반듯해졌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렇게 강제로 단체로 눈을 감게 하고 억지 명상을 시키는 상황도 우습고, 흘러나오는 명상음악과 내레이션도 웃겨서 처음엔 피식피식 웃다가 그냥 잠깐 눈붙이고 자는 짬으로 활용하고 말았다. 특히나 명상의 시간이 끝날무렵, 당연하다는 듯 "이제 마음의 무거운 짐은 모두 사라져 평화가 찾아왔습니다."라며 얼토당토 않게 단정하는 말에는 버럭 화도 났던 것 같다.

꽤 오래 요가를 다니면서 이젠 좀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나는 학창시절 명상시간에 느꼈던 삐딱한 불평 때문인지 여전히 명상을 유도하는 강사들의 간질간질한 말들이 귀에 거슬리고 우습다. -_-;; 특히나 조용조용 가만가만 우아떨며 나긋나긋 읊조리는 말투도 우스꽝스럽고! 같은 말투라도 동작 설명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참아주겠는데 처음에 반가부좌 하고 앉아서 눈감고 수업 시작할 때 하는 말들은 어쩜 그리도 그 옛날 명상의 시간 코멘트와 비슷한가 말이다! (하기야.. 명상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억지로 생각을 물리치려고도 떠올리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들고 나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합니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호흡을 바라봅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깊은 숨에 척추 마디마다 전해지는 호흡을 바라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얘긴 줄은 알지만, 만날 뭘 어떻게 바라보라는 건지!
아무리 마음의 눈이라지만 볼 게 있고 못 볼 게 있지 않은가 말이다. 몇달 전에 강사가 바뀌어 수강생들이 우르르 다른 시간대로 빠져나갔을 만큼, 새로 온 강사가 좀 여러가지로 서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전 강사들의 언사가 더러더러 귀에 거슬리는 정도였다면 지금 강사는 수업 중 쓰는 말의 절반 이상이 비문이다. 특히  동작 설명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바라보라'고 한다. "다리 뒤쪽에서 느껴지는 자극을 바라봅니다", "고개를 숙이고 온몸의 자극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봅니다"하는 식이다. 명상과 요가 동작을 동시에 유도하는 말들이 어렵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래도 말과 글로 밥벌이를 하는 직업병까지 있는 인간이다 보니 문장 전후관계가 틀리는 경우가 더 많은 강사의 지시를 거듭 들으면 몸이 유연하게 풀리는 게 아니라 팔다리 근육이 자꾸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조카가 요가 가자고 하지 않으면 신나서 수업을 빼먹는 형편이긴 해도 무려 핫요가 9개월째인 지금도 내 몸이 여전히 최강뻣뻣인 건 어디까지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명상언어 때문이라고 변명하면 누가 믿어주려나. -_-;;

째뜬 이런저런 핑계로 열흘쯤을 내리 빠지다가 어제 그제 연이틀 요가 수업 후 삭신이 심히 쑤셔서 오늘은 막무가내로 버텨 요가수업을 빼먹었다. 요가 열공중인 조카는 혼자라도 가겠다며 나섰으니 시방 열심히 요상한 비문 명상언어에 맞춰 호흡과 여러 자극을 '바라보며' 팔다리를 늘이고 있을 게다. 이러다 조만간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도 '바라보다'에 대한 새로운 뜻이 실리는 건 아닐까.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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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비스업계 종사자의 우리말 파괴 실력이야 익히 알고는 있어 이젠 그러려니 하지만, 막상 겪으면 매번 어처구니가 없다. 좀 전에 정수기 때문에 AS 기사가 다녀갔는데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실소가 나올 만큼 극강의 높임말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었다. 

"냉수 조절 센서가 고장나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센서이데요, 부품이 없으서 오전에 못왔습니다."
"지금은 얼음이 다 녹으네요."
"다 되습니다."
그러더니 다 고치고 나서 집을 나서며 우리 모녀에게 한 마디 했다. "수고 많이 하십시오." -_-;

백화점 점원의 "15만원이십니다", "사이즈가 없으십니다" 정도는 한방에 날려버리듯, 정수기 부품과 센서와 얼음까지 한껏 높여주더니만 우리더러 수고를 많이 하라니 뭐냐. 우습게도 AS 평가서를 바로 자기 눈앞에서 작성해달라고 내미는데, 천편일률적인 항목만 체크하도록 주르륵 적혀있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따로 쓰는 고객의 의견란이 있었더라면 우리말 존칭 교육부터 다시 시키라고 적고 싶었다. 멀끔히 생긴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아무데나 '시'자를 붙여대는지, 그게 친절이고 고객을 높이는 행동이라고 착각하는 이유가 뭔지 정말 궁금하고 짜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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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외래어 발음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 아니지,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어로 붙인 우리나라 브랜드 발음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로 EVERLAND라고 적어놓고 한글은 <에버랜드>라고 쓴다. 피터팬에 나오는 NEVER LAND의 짝퉁이 분명하다. 나에게 번역을 하라도 해도 피터팬의 NEVER LAND는 <네버 랜드>라고 하겠지 만 EVERLAND를 외래어 표기법대로 쓰면<에벌랜드>가 맞지 않나? <에버랜드>로 읽히고 싶으면 EVER LAND로 쓰든지! 아무튼 나는 무의식중에 <에벌랜드>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주변에서 핀잔을 준다. 에벌레들이 노는 동네냐고.

Tous Les Jours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에 무지하지만 특히 연음이 중요한 프랑스어 발음이라면 <뚤레주르>로 읽어야 옳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글 브랜드명은 <뚜레쥬르>다. 이곳 역시 나는 내 맘대로 <뚤레주르>라고 읽는 게 보통인데, 그때도 눈총을 받는다. 잘난 척 한다고. 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상 특정 외국어(태국어, 베트남어?)를 제외하고는 경음 ㄲ, ㄸ, ㅃ 대신에 ㅋ, ㅌ, ㅍ를 써야한다. 아직은 프랑스어 발음이 아무리 <뚤레주르>에 가깝더라도 <툴레주르>로 표기해야 옳다는 뜻이다. 하지만 광고 카피에서 흔히 맞춤법을 무시하듯, 브랜드명에 있어서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표기법은 코웃음의 대상인 모양이다. <뚤레주르> 보다는 <뚜레쥬르>가 부드러운 느낌이라 브랜드명으로 당첨되긴 했겠지만, 어땠든 나는 못마땅하다. 어쩐지 발음이 다양하지 않은 일본어식 표기법 때문에 과거 많은 외래어들이 요상한 형태로 자리잡았던 관습의 연장선 같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제일 마음에 안드는 건 너도나도 영어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써대는 언어습관이지만...
얼마전 TV에서 나오는 금연 공익광고를 보고는 기가 막혔다. <SELF 하지 말고 HELP 하세요>라더라. 누군가는 그 표어 지어놓고 무릎을 치며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으니 광고 카피로까지 쓰였겠지만, 내 반응은 "미친 것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용인 자연농원>보다 <에버랜드>가 더 멋지고 세련됐다고 여기는 한, 저런 미친 짓거리들은 더욱 많이 생겨날 거다.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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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놀잇감 2010. 1. 8. 20:54

번역을 잘 하려면 영어실력도 중요하지만 우리말과 글솜씨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번역관인지라, 탁월한 건망증으로 깜박깜박 생각 안나는 단어 때문에 영어사전을 뒤지는 빈도수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자주 국어사전도 열심히 찾아보는 편이다. 헌데 국어사전을 찾다보면 가끔 내가 잘못 알고 있던 말들을 만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작은 충격에 사로잡힌다.

언제부턴가 자주 들려오던 <조심히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나는 <조심히>가 틀림없이 <조심해서>의 잘못된 표현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조심>이라는 명사와 <조심하다>라는 동사가 기본형이므로 <조심히>라는 부사형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확고한 믿음은 무슨 근거였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난 사전을 찾아볼 필요조차 느끼지 않은 채 그렇게 믿었고 <조심히>라는 형태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내심 못마땅했다.

헌데, 내가 틀렸더라. +_+ <조심히>는 엄연히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말이다. 최소한 내 주변과 가족들 사이에선 수십년 간 들어본 적 없어 몹시 낯설고 이상하게 들리는 <조심히>라는 말이 표준말이었다니. 나와 가족들은 늘 <조심해서>라는 형태로만 사용했지, <조심히 잘 찾아봐> 따위의 표현은 써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히>가 표준말임을 알게 됐다고 해도 내가 앞으로 이 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며, 다른 이들이 사용하는 <조심히>라는 말이 유독 거슬려 귀가 쫑긋 서는 버릇도 쉬이 없어지지 않을 듯하다.

짐작컨대 내가 표준말로 알고 있던 단어나 표현이 틀렸음을 깨달을 때마다 공연히 자존심이 상하는 이유는 스스로 내가 쓰는 말이 거의 표준말이라는 맹목적인 고정관념 때문인 것 같다. 조부모님이 평안도 출신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오래 사셨고 외가쪽은 계속 서울 토박이인 덕분에 살아오면서 내가 쓰는 낱말이나 억양을 은근히 올바름의 척도로 삼아왔다는 뜻이다. 아등바등, 어리바리, 복불복, 해쓱하다, 핼쑥하다, 설렘, 쩨쩨하다, 후텁지근하다 등등 그간 틀리게 알았다가 뜨끔했던 말이 꽤나 많은데도 아직 내가 틀렸음을 깨달으면 허걱 놀라우니 인간의 허영심이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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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종류

놀잇감 2010. 1. 3. 02:33

이번 겨울 전체 예보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했던가? 절대 기억할 수 없어 민망하지만 어쨌든 새해들어 또 눈이 내렸다. 이번엔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파르르 부서지는 눈은 아니다. 에스키모들에겐 눈의 이름이 수십 가지라던가 수백 가지(설마 수백 가지는 아니겠지? +_+) 나 된다고 들었는데 우리말엔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세 종류 뿐인가 싶어 찾아보니 아니란다.
<눈의 종류>로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많은 표현이 있었다.

가랑눈 · 가루눈 · 길눈 · 도둑눈 · 마른눈 · 만년눈 · 밤눈 · 복눈 · 봄눈 · 소나기눈 ·
솜눈 · 숫눈 · 싸라기눈 · 자국눈 · 진눈 · 진눈깨비 · 찬눈 · 첫눈 · 함박눈


사실 내가 흔히 썼던 <싸락눈>이 표준말인지도 그간 자신이 없었다. 며칠 전, 얼마 안 쌓인 눈길을 달려 밥먹으러 가면서 마침 다들 출판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이라 싸락눈의 맞춤법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다들 갸우뚱했다. 함박눈은 확실히 알겠는데, 알알이 부서지는 그 가느다란 눈에 대한 이름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싸락눈? 싸라기눈?  싸래기눈? 싸리눈?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표준어는 싸라기눈이고, 싸락눈도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니 역시 표준말인 셈이다.
싸라기눈: 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
싸락눈: 싸라기눈의 준말.                                     [출처: 국립국어원]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은 건지 원. 싸락눈. 싸라기눈. 둘 다 사투리같다. 크크.

게다가 내가 싸락눈이라고 우겼던 지난주초 폭설 때 눈은 쌀알처럼 뭉쳐지지도 않고 아예 파르르 부서지는 눈이었으니 <가루눈>이라고 했어야 옳다. 가랑비가 있듯이 가랑눈도 있고, 마른눈이 있으면 진눈도 있다는 게 재밌다. 눈만 오면 눈사람을 만들러 뛰쳐나갔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니 확실히 함박눈이라고 다 진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솜덩이 찢어 던지듯 펑펑 내렸어도 잘 뭉쳐지는 습기 많은 눈이 있었는가 하면, 싸락눈 못지않게 잘 안뭉쳐지던 마른 함박눈도 분명 있었던 게 기억난다.

올 겨울에 얼마나 더 눈이 내릴지는 모르겠는데, 새삼 눈의 종류를 찾아보았으니 이젠 눈 내릴때마다 어떤 눈인지 굳이 밖에 나가 확인하는 거나 아닌지. 마침 조카들이 놀러오는 날 또 함박눈이 온다면 나도 눈사람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이웃들은 매일 동숲에서 눈사람 마에스트로가 되기 위해 눈덩이를 굴린다는데, 나는 현실에서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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혓바늘

투덜일기 2009. 12. 3. 02:20

혓바늘: 혓바닥에 좁쌀알 같이 돋아오르는 붉은 살. 주로 열이 심할 때에 생긴다. (출처: 국립국어연구원)

이틀 내리 잠을 좀 못잤더니 혓바늘이 돋았다. 혀를 놀릴 때마다 찌릿하게 아프고 묘하게 걸리적거리는 것이 옛사람들이 참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싶다. 딱 바늘 끝으로 아주 살짝 찌르는 것 같은 통증. 심하면 말도 어눌해지지만 지금은 그 상태는 아니라 은근히 혓바늘을 괴롭히며 놀고 앉았다. 괜스레 입술 안쪽에 혀끝을 비벼 부러 통증을 유발하고 있자니 이것 역시 미약하나마 가학성향이 아닌가 뜨끔하다. 헌데 이건 어려서부터 나의 버릇이다. 혓바늘이 돋으면 이로 마구 짓눌러 평평하게 만들어 없애려는 유아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사전 뜻엔 열을 동반한다고 적혀 있지만, 열감기 따위를 앓는 게 아닌데도 가끔씩 돋아나 몸의 피로 정도를 알려주는 혓바늘처럼 내 삶에도 쉼표를 찍어줄 지표가 있으면 좋겠다. 혓바늘은 푹 자고 과일 많이 먹으면 사라진다는 평범하지만 확실한 비법을 알고 있듯이, 더불어 좀 쉬었다가 건강한 삶으로 되돌아갈 지혜도 세트로 장만해 둔다면 좋을 텐데. 건강한 삶의 비법이야 알 리 없으니 오늘밤에도 우적우적 귤만 까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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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짐

투덜일기 2009. 11. 9. 15:23

"나이 들수록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되는 법이다. 늙음은 심신의 쇠약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내나 남편, 정인이 살아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들은 대개 섹스를 포기함과 동시에 어루만짐까지 포기하고 만다. 어루만짐이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어루만짐은 더 나아가, 때로는 죽음으로 이르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몸이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몸이 어떤 접촉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이 탓이든 다른 이유로든 외로움을 타는 사람에게 어루만짐은 최고의 약손이다." (235쪽)
                                                        -- 고종석, <어루만지다>, 마음산책, 2009

 
책을 읽을 때도 확실히 당시의 관심사나 고민거리에 따라 눈을 파고드는 구절이 다르다. 여름부터 읽다 던져두기를 반복한 책을 어제 드디어 끝냈는데, 대체로 맛깔스럽게 풀어낸 사랑의 언어와 단상들 가운데 저 부분이 유독 가슴을 울렸다.
나무토막처럼 무뚝뚝한 나의 기질에 굳이 유전인자를 따져본다면 분명 엄마한테 물려받은 것이다. 눈 나쁘고, 키작고, 팔다리 짧고, 머리숱 없는 것까지 죄다 아버지를 닮았으면서 다정다감하고 잘 <어루만지는> 성품은 왜 안 닮았나 알다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소심하고 무뚝뚝한 성격을 물려받으려거든 덩달아 눈 좋고 키 크고 롱다리에다 머리숱도 많은 유전인자를 같이 타고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무뚝뚝 모녀는 결코 먼저 손을 내밀어 부비적거리는 성품은 아니되 다정한 가장 덕분에 평생 넉넉한 어루만짐 속에 살아왔는데, 이젠 그 뚜렷한 부재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딸이지 남편이 아니야!>라고 왕비마마에게 소리쳐보지만, 그래도 엄마가 내게 원하는 건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도 조물락조물락 손을 어루만져주고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프다고 하면 안쓰러워서 꼭 안아주던 남편처럼 다정히 굴진 못하더라도 가끔 외로움을 어루만져줄 따뜻한 <약손>이 틀림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 덩치 큰 아기가 되어가는 듯한 엄마와 어떻게든 악착같이 철부지 딸노릇을 하고 싶은 나의 갈등은 결국 내가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제대로 어루만지는 역할을 수행할 때 풀릴 것이다. 하지만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도 왜 자꾸 억울함이 고개를 드는지(가령,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팔순 가까운 노모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고 집안일은 한톨도 안하며 사는 진정 캥거루족 지인을 부러워하며 -_-;), 내 마음속의 철부지를 자꾸 달래보아도 잘 모르겠다. 자식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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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아는 사람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벗: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동무: 1.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2.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
지기: <지기기우>의 준말. 자기를 잘 알아주는 친구. 자기를 잘 이해해 주는 참다운 친구.

쓸데없이 개인사를 많이 털어놓는 블로그라 부지불식간에 글에 등장하는 <지인>들이 꽤 되었는데, 결국엔 나에게 그만큼 쓸데없이 <지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되는 듯하다. 물론 나의 블로그에 자신이 등장했음을 아는 <지인> 정도라면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이거나 <지기>인 경우가 많아, 뭉뚱그린 <지인>의 호칭에 슬며시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라고 하면 어쩐지 <벗>과 비슷하게 비슷한 또래여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들어 나이가 밑이거나 위인 친구에게는 막연하게 거리를 두는 <지인>이라는 표현을 들먹이고 말았던 것 같다.
이번에 새삼 <지인>부터 친구를 뜻하는 여러 낱말을 찾아보고 나니 반성이 필요하긴 하다. 영화 <아는 여자>에서 <그냥 아는 여자>라는 정재영의 소갯말에 이나영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남녀관계를 떠나서 얼마나 공감했던가. 이쪽에선 뭔가 특별한 관계라고 여겼는데 저쪽에선 <그냥 아는> 사이로만 규정하고 있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해악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위해인물임음을 깨달았을 땐 마음의 상처를 피할 수가 없다. 얼른 관계 재수정에 돌입해 처리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기대에 대한 배신감이랄까, 인간 자체에 대한 실망까지 겹쳐 그간의 모든 다른 관계까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쪽에선 정말로 <그냥 아는> 사이로 남았을 뿐인 관계인데도 상대쪽에서 뭔가 특별한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낌새를 보이면 차마 냉정하게 쳐내지 못하고 뒷구멍에서나 구시렁거리게 된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어떻게든 정리가 되겠지, 그런 한심한 바람이나 품으면서.

작년에 휴대폰을 바꾸면서 전에 있던 휴대폰에 저장됐던 번호를 모조리 옮기긴 했지만 상당수의 번호를 과감히 지우고 정리한 뒤엔 <가족> 외에 딱히 유용하게 정리해두진 못했던 그룹별 번호 정리에 돌입했었다. 휴대폰을 을 잃어버려 나쁜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경우를 대비하여 <가족> <친구> 따위의 솔직한 그룹명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겠어 싶은 생각에 난 고집스레 가족/친구/동창/후배/선배/er/비즈니스/기타/받지마 9개의 분류를 정했다. 물론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첫 그룹인 <미지정>에 남겨둔 채로. (예를 들어 ㅌㄹ 주민들은 아직 미지정 그룹에 속한다 ^^; 블로그이웃이라는 그룹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세월을 견디다 고민 없이 친구 그룹에 넣을 수 있는 사이가 될 날을 꿈꾸는 중이다;;)

처음 그룹을 일일이 나눌 땐 벨소리도 다르게 해서, 전화오는 소리만 듣고도 척,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 알아보겠다는 심사였으나 당연히 뻘짓이었다. 내가 9종류나 되는 벨소리를 기억할 리가 없지 않은가.
우선은 가장 많이 울려대는 <가족>의 전화를 차별화하고, 자다가도 안잔 척 목소리를 맑고 씩씩하게 내야 하는 <비즈니스> 전화의 벨소리만 식별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친구>와 <동창>을 굳이 나눈 이유야 뻔한 것일 텐데, 내 경우는 <후배>와 <친구>의 분류에서 이리저리 고민을 좀 해야했다. 나이로는 밑이지만 이래저래 연이 닿은 지인들과 차츰 동등한 우정을 쌓아가다 보면 그냥 <후배>라고 칭하기 미안한 느낌이라 <친구>라고 불러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이로는 선배뻘이지만 당연히 친구 폴더에 정리된 사람들도 물론 존재한다. 하기야 싸이월드 시절 일촌에도 급수를 나눠야한다고 여겼던 것처럼, <친구>도 사람마다 심리적 거리감이 퍽 다르다. 사전상의 뜻처럼 가깝게 오래 사귀었어도 새삼 멀어지는 과정에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누구보다 가까움을 느끼는 친구도 있으며, 멀찌감치 오래 사귀어 친구로 여겨지는 이들도 있다. 유독 <지기>라고 마음속에 꼽아두게 되는 이도 있음은 물론이다.

쓸데없이 넓고 얄팍한 인간관계는 과감히 청산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는 생각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해왔지만 게을러서, 매몰차지 못해서, 맺고 끊음이 불명확해서 질질 이끌려온 관계로 엮인 <지인>들이 아직도 꽤나 많은 것 같다. 가끔 나를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맥확장을 위한 디딤돌이나 그밖의 쓸모로 <이용>하려는 지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도 몇번이나 되면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이제부턴 정말로 서로 마음 다치지 않을 사람들로만 벗과 동무를 삼아 <지기>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일 테다.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 허투루 쏟아부을 에너지와 감정이 이젠 몹시 아까워졌다. 드디어 내게도 방만한 인간망 정리의 시기가 왔나보다(사실 이 말도 10년전부터 되뇌긴 했다. ㅠ.ㅠ). 늦었더라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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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실망

투덜일기 2008. 11. 5. 16:25
좋게 말하면 세심하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나는 상대의 아주 사소한 것 하나로 신뢰와 정이 뚝 떨어짐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상대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령 어떤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받았는데 도저히 틀릴 수 없는 기초적인 맞춤법을 연이어 틀린다든지("축하들입니다"는 실수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도 이어 "축하들여요"라고 쓰더라)
욕설을 평소 지인들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하는 사람(지인들 사이에서도 가끔 장난삼아 한마디쯤 욕을 할 순 있겠고, 운전할 때와 화날 때는 나도 엄청난 욕쟁이지만서도;;; 친구한테 수시로 이새끼저새끼, 이년저년 하거나 대화중에 'C팔'을 추임새로 쓰는 따위는 못견디겠다.),
내 기준에서 틀리면 안될 것 같은 말을 실수하는 사람('버락 오바마를 '오바마 버락'이라고 했다. 그냥 오바마라고 했으면 될텐데;;).

책도 그렇다. 나로선 관심목록에 넣어두었다가 몇번의 망설임 끝에 사들였는데 책에 오탈자 투성이라면 당연히 오만정이 떨어진다. 하기야 책의 오탈자는 내가 보기에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 편집자와 출판사의 무성의와 급조의 혐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 3쇄를 찍은 책인데도 오탈자가 거슬린다면 출판사에 대한 신뢰마저 크게 무너진다. 그것은 물론 저자의 잘못이라곤 할 수 없다. 맞춤법을 확인하고 문장을 다듬는 교정교열은 어디까지나 편집자의 몫이니까.
하지만 저자의 선택임이 분명한 낱말 사용의 거슬림 또한 나에겐 정떨어짐의 원인이 되고, 저자에 대한 신뢰도 슬쩍 무너지는데 책이 마음에 드는 경우엔 안타까움이 더해져 괜히 나혼자 생병을 앓는다.
예를 들어, 요 며칠 불어터진 입술 핑계로 쉬면서 읽은 책들 중에 <소박한 정원>이 참 좋았는데,
방송작가 출신으로 정원 디자인 공부를 하는 저자가 참 맛깔스럽게도 글을 쓰더니만 찰스 <황태자>, 다아애나 <황태자비>라고 적어놓은 걸 본 순간, 마당과 정원에 대한 나의 열망을 담아 120%로 치달았던 책과 저자에 대한 애정이 별안간 7, 8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황태자, 황태자비라니.
설마 저자가 대영제국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제국주의자일 리도 없는데 왜 왕세자, 왕세자비로 바꿔쓴지 오래 된 그 말을 그렇게 썼을까, 괜히 혼자 추측과 억측을 거듭하며 별일 아닌 걸로 괴로워하던 나는 급기야 지은이가 영국까지 정원공부를 하러 간 사실까지도 부유함의 상징이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스스로 참 못났다 여기며 얼른 책을 덮었다.

그러고 보면 요샌 뭘 하든 뭘 보든 좋은 면보다 실망스러운 면을 더 열심히 찾고 있는 나를 느낀다.
번역서을 읽으면 유려한 문장보다 어색한 문장과 비문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고
영화를 봐도 꼬투리 잡을 부분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기며
사람이든 사물이든 예전엔 쉽게 보아 넘길 수 있었던 작은 실수가 큰 실망으로 자리잡는다.
남들이 보기에 나 또한 그렇게 실수 많고 허점 많은 인간일 텐데 왜 이렇게 자꾸 비호감형으로 변해가는지 원.
사소한 실망을 점점 심대한 실망감으로 마음에 새기는 요즘 나의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마음에 안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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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방송은 물론이고 공공기관이며 은행, 음식점 따위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하도 많이 들어 귀와 입에 익다보니 들을 때마다 늘 마뜩찮아 하던 나도 혹시 어디선가
덩달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우려될 정도다.
아니, 나 역시 아무 생각 없던 시절엔 당연한 듯 따라 썼음을 고백하자. 
특히 메신저나 이메일의 경우엔 더더욱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많이들 주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좋은 하루 되세요>나 <즐거운 시간 되세요>는
참 말도 안되는 말이다.
인간에게 좋은 하루가 되고, 즐거운 시간이 되라니!

분명 영어의 Have a nice day, Have a great time 따위를 대책없이 빌어다 쓰고 있는 말일 터인데
아침 인사로 뜬금없이 "좋은 아침!"이라는 말을 들을 때처럼 나는 혼자 속이 쓰리다.
엄밀하게 따져서,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행복한 여행 되세요>라는 말은 비문이다.
게다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형이므로 높임말과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구조다.
올바르게 쓰려면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빌어요>, <여행 잘 다녀오시길 빕니다> 쯤으로 바꿔야 한다. (사실, "좋은 하루, 즐거운 시간"의 관형어구도 트집 잡으려면 이야기가 또 길어진다)
같은 명령형이라도 오래전부터 써내려온 <안녕히 가세요> <살펴 가십시오>와는 또 다르다.

그런데도 영어병에 찌들은 대다수의 이 나라 사람들은 비문이든 아니든 그저 좋은 말인 줄로만 알고
아무 생각 없이 영어식 문장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네 아침 인사라는 것이 하도 못먹고, 난리를 겪으며 살던 백성들의 삶을 반영한
"식사 하셨어요?"나 밤새 "안녕하세요?"라는 것이 못마땅해 다른 인삿말을 찾으려는 심리도 깔려 있으리라고
짐작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아침인사로 동료들끼리 "좋은 아침!"이라고 외치거나
상사에게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문제는 그렇게 내눈에 말도 안되고 우스꽝스러운 인사법이 너무도 당연하게 방송이나 인쇄물을 통해
재생산되고 강화되어 '옳은 말'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문득 은행 ATM에서 거래를 하고 명세표를 받으니 맨 아래
<좋은 하루 되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인간이 어떻게 좋든 나쁘든 <하루>가 되느냐 말이다!

얼마 전 뉴욕필의 평양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미국인 지휘자는 애써 우리말을 외운 듯, 연주 시작전 인사말의 끝을 이렇게 맺었다.
"좋. 은. 시. 간. 되. 세. 요."
(혹, '즐거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_-;;)
어눌하게라도 한국어로 북한 관객에게 마음을 전하려 한 그의 의도는 감동적이었지만
나는 Have a great time 쯤 되는 영어를 누군가 번역하여 한국어라고 가르쳐주었을 그 말이 못마땅했고
과연 북한 관객들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의아했다.
지휘자의 한국어 맺음말 뒤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으니, 다들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이왕이면 누가 좀 제대로 가르쳐주지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내 불만은 이미 대세로 기울어 버린 우리말의 변화를 못 받아들이고
혼자만 고집을 부리는 쓸데없는 투정인지도 모른다.
언어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끊임없이 성장, 변화하므로
수많은 외래어와 외국어식 표현으로 <감염>된 한글의 영역이 오히려 넓어지고 어휘가 풍부해졌기에
무작정 일본식, 영어식 어휘를 배척하기만 해서도 안됨을 안다.
하지만 어휘가 풍부해지는 것과, 비문이 올바른 문장인 양 막강하게 터를 잡고 앉는 것은 다르다.

아, 물론
나 역시 매일 번역하는 문장에서 주술 관계가 맞지 않은 비문을 양산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누군가 내 블로그의 글을 죄다 분석해 빨간 펜으로 비문을 찾아낸다면 시뻘겋게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제대로 된 문장을 짓고 맞춤법도 틀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으므로 약간의 면책 가능성은 있을 것이라고 혼자 자위하고 있다.


얼마전엔 나 역시 맞는 말이라 여기고 있던 <감사드린다>는 말도 잘못된 말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감사>는 남에게 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고맙게 느끼는 마음이므로 <드리면> 안되고,  그냥 <감사해야> 한단다.
정 <드리고> 싶으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로 쓰는 게 옳다고.
그런데 우리는 <축하드린다>와 헷갈려 <감사>마저도 드리는 게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쓰고 사는 우리말이지만 알면 알수록 더 어려운 게 한글이고 조심스럽다.
그래도 명색이 우리말과 글로(물론 영어와 더불어) 먹고 산다는 사람이 제대로 된 우리말을 써야한다는
생각에 어깨는 자꾸 무거워지는데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내게 그리 협조적이지 않은 듯하다.

내가 이리도 마뜩찮게 여기는 <좋은 하루 되세요>가 10년쯤엔, 아니 불과 2, 3년 뒤엔
당연히 옳은 말로 여겨지면 어쩌나 마음이 찜찜하다.
하물며 관공서에 나붙은 플래카드에도 <즐거운 명절 되세요>라고 적혀 있는 마당 아닌가!

영어,영어 하지 말고 다들 우리말이나 제대로 하면 참 좋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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