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게 말하면 세심하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나는 상대의 아주 사소한 것 하나로 신뢰와 정이 뚝 떨어짐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상대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령 어떤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받았는데 도저히 틀릴 수 없는 기초적인 맞춤법을 연이어 틀린다든지("축하들입니다"는 실수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도 이어 "축하들여요"라고 쓰더라)
욕설을 평소 지인들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하는 사람(지인들 사이에서도 가끔 장난삼아 한마디쯤 욕을 할 순 있겠고, 운전할 때와 화날 때는 나도 엄청난 욕쟁이지만서도;;; 친구한테 수시로 이새끼저새끼, 이년저년 하거나 대화중에 'C팔'을 추임새로 쓰는 따위는 못견디겠다.),
내 기준에서 틀리면 안될 것 같은 말을 실수하는 사람('버락 오바마를 '오바마 버락'이라고 했다. 그냥 오바마라고 했으면 될텐데;;).
책도 그렇다. 나로선 관심목록에 넣어두었다가 몇번의 망설임 끝에 사들였는데 책에 오탈자 투성이라면 당연히 오만정이 떨어진다. 하기야 책의 오탈자는 내가 보기에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 편집자와 출판사의 무성의와 급조의 혐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 3쇄를 찍은 책인데도 오탈자가 거슬린다면 출판사에 대한 신뢰마저 크게 무너진다. 그것은 물론 저자의 잘못이라곤 할 수 없다. 맞춤법을 확인하고 문장을 다듬는 교정교열은 어디까지나 편집자의 몫이니까.
하지만 저자의 선택임이 분명한 낱말 사용의 거슬림 또한 나에겐 정떨어짐의 원인이 되고, 저자에 대한 신뢰도 슬쩍 무너지는데 책이 마음에 드는 경우엔 안타까움이 더해져 괜히 나혼자 생병을 앓는다.
예를 들어, 요 며칠 불어터진 입술 핑계로 쉬면서 읽은 책들 중에 <소박한 정원>이 참 좋았는데,
방송작가 출신으로 정원 디자인 공부를 하는 저자가 참 맛깔스럽게도 글을 쓰더니만 찰스 <황태자>, 다아애나 <황태자비>라고 적어놓은 걸 본 순간, 마당과 정원에 대한 나의 열망을 담아 120%로 치달았던 책과 저자에 대한 애정이 별안간 7, 8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황태자, 황태자비라니.
설마 저자가 대영제국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제국주의자일 리도 없는데 왜 왕세자, 왕세자비로 바꿔쓴지 오래 된 그 말을 그렇게 썼을까, 괜히 혼자 추측과 억측을 거듭하며 별일 아닌 걸로 괴로워하던 나는 급기야 지은이가 영국까지 정원공부를 하러 간 사실까지도 부유함의 상징이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스스로 참 못났다 여기며 얼른 책을 덮었다.
그러고 보면 요샌 뭘 하든 뭘 보든 좋은 면보다 실망스러운 면을 더 열심히 찾고 있는 나를 느낀다.
번역서을 읽으면 유려한 문장보다 어색한 문장과 비문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고
영화를 봐도 꼬투리 잡을 부분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기며
사람이든 사물이든 예전엔 쉽게 보아 넘길 수 있었던 작은 실수가 큰 실망으로 자리잡는다.
남들이 보기에 나 또한 그렇게 실수 많고 허점 많은 인간일 텐데 왜 이렇게 자꾸 비호감형으로 변해가는지 원.
사소한 실망을 점점 심대한 실망감으로 마음에 새기는 요즘 나의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마음에 안든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받았는데 도저히 틀릴 수 없는 기초적인 맞춤법을 연이어 틀린다든지("축하들입니다"는 실수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도 이어 "축하들여요"라고 쓰더라)
욕설을 평소 지인들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하는 사람(지인들 사이에서도 가끔 장난삼아 한마디쯤 욕을 할 순 있겠고, 운전할 때와 화날 때는 나도 엄청난 욕쟁이지만서도;;; 친구한테 수시로 이새끼저새끼, 이년저년 하거나 대화중에 'C팔'을 추임새로 쓰는 따위는 못견디겠다.),
내 기준에서 틀리면 안될 것 같은 말을 실수하는 사람('버락 오바마를 '오바마 버락'이라고 했다. 그냥 오바마라고 했으면 될텐데;;).
책도 그렇다. 나로선 관심목록에 넣어두었다가 몇번의 망설임 끝에 사들였는데 책에 오탈자 투성이라면 당연히 오만정이 떨어진다. 하기야 책의 오탈자는 내가 보기에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 편집자와 출판사의 무성의와 급조의 혐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 3쇄를 찍은 책인데도 오탈자가 거슬린다면 출판사에 대한 신뢰마저 크게 무너진다. 그것은 물론 저자의 잘못이라곤 할 수 없다. 맞춤법을 확인하고 문장을 다듬는 교정교열은 어디까지나 편집자의 몫이니까.
하지만 저자의 선택임이 분명한 낱말 사용의 거슬림 또한 나에겐 정떨어짐의 원인이 되고, 저자에 대한 신뢰도 슬쩍 무너지는데 책이 마음에 드는 경우엔 안타까움이 더해져 괜히 나혼자 생병을 앓는다.
예를 들어, 요 며칠 불어터진 입술 핑계로 쉬면서 읽은 책들 중에 <소박한 정원>이 참 좋았는데,
방송작가 출신으로 정원 디자인 공부를 하는 저자가 참 맛깔스럽게도 글을 쓰더니만 찰스 <황태자>, 다아애나 <황태자비>라고 적어놓은 걸 본 순간, 마당과 정원에 대한 나의 열망을 담아 120%로 치달았던 책과 저자에 대한 애정이 별안간 7, 8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황태자, 황태자비라니.
설마 저자가 대영제국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제국주의자일 리도 없는데 왜 왕세자, 왕세자비로 바꿔쓴지 오래 된 그 말을 그렇게 썼을까, 괜히 혼자 추측과 억측을 거듭하며 별일 아닌 걸로 괴로워하던 나는 급기야 지은이가 영국까지 정원공부를 하러 간 사실까지도 부유함의 상징이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스스로 참 못났다 여기며 얼른 책을 덮었다.
그러고 보면 요샌 뭘 하든 뭘 보든 좋은 면보다 실망스러운 면을 더 열심히 찾고 있는 나를 느낀다.
번역서을 읽으면 유려한 문장보다 어색한 문장과 비문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고
영화를 봐도 꼬투리 잡을 부분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기며
사람이든 사물이든 예전엔 쉽게 보아 넘길 수 있었던 작은 실수가 큰 실망으로 자리잡는다.
남들이 보기에 나 또한 그렇게 실수 많고 허점 많은 인간일 텐데 왜 이렇게 자꾸 비호감형으로 변해가는지 원.
사소한 실망을 점점 심대한 실망감으로 마음에 새기는 요즘 나의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마음에 안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