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1.09.22 오래된 물건 12
  2. 2011.04.19 여전히 문방구 11
  3. 2010.10.22 이러고 논다 22
  4. 2008.12.22 망각 11
  5. 2008.11.20 연필이 좋다 19
  6. 2008.10.23 기분전환 17
  7. 2006.10.11 문방구 중독 4

오래된 물건

추억주머니 2011. 9. 22. 17:07

어제 만난 친구에게 이사를 가긴 가야겠는데 집을 팔고 사는 문제도 두렵지만 일단은 30년 가까이 된 두집 살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또 다시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몰래몰래 버리란다. 노친네들이야 워낙 오래된 물건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못버리게 하는 게 당연하므로 엄마 안 계실 적에 스리살짝. 그래야 하는 것이었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신은 없다. 오래된 물건 못버리는 '지병'은 (이웃 주민 '쌘'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좀 심각한 걸 알기 때문이다. 

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산 책 <나의 고릿젓 몽블랑 만년필>은 막상 읽어보니 내가 워낙 클래식 음악에 무지한 탓에 3분의 1 이상은 뭔소린지도 몰라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고,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젠체하는 느낌이 드는 시인의 글이라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럼에도 지은이가 찍은 오래된 독일물건들 사진을 보는 건 참 좋았다. 런던에서 수학선생님을 하고 계시는 런던아줌마님은 물건 함부로 안 버리고 죄다 껴안고 사는 습관을 '영국병'이라고 칭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래된 물건 절대 안버리고 소중히 간직하는 태도는 유럽인들의 공통적인 특색인 듯하다. 그러니까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치르고도 변함없이 간직된 수많은 골동품들이 유통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심지어 몇백년 전의 식료품 거래 영수증이나, 사적인 편지까지도. 유럽치고 벼룩시장 유명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 말이다. 하다못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야드 세일'이나 '거라지 세일'을 하는 판국에...
 
오래된 물건을 못/안버리는 습관은 어쩌면 근대의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새로운 것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 확확 세상이 바뀌던 때라 과거에 대한 향수가 특히나 진했던 게 아닐까. 신문지도 함부로 안버리시던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확실히 맞는 것 같은데, 세대를 거쳐 우리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그런 성향이 이어진 이유는 역시 알쏭달쏭하다. 내 경우는 단지 좀 우유부단하고 청승맞아서 과거에 얽매이는 듯도 하고. 

하여튼 독일 벼룩시장에서 지은이가 득템한 골동품들 사진을 보며 희희낙락하다가 제일 정겨웠던 건 몽당 연필과 색연필이 든 파버카스텔 필
통이었다. 같은 브랜드는 아니지만 나도 최소 30년 된 스테들러 색연필 갖고 있다규!
전에도 어딘가 쓴 것 같은데 중학교 때 고모부가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을 나는 아끼느라 1, 2년간은 계속 구경만 했었고 드디어 사용한 계기는 손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고등학교 올라가선 친구들과 워낙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으므로 색연필로 편지지를 꾸미기도 했고, 예쁜 편지지에 좋은 글귀 적어서 코팅해 선물하는 유행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 색을 달리해 시를 베껴적는 정성을 들인 기억도 있다. 그렇게 드문드문 십수년간 사용했어도 좀체 닳을 일이 없었던 색연필을 본격적으로 소비하게 된 건 역시나 조카의 탄생 이후의 일이었다. 벽지 낙서를 거쳐 드디어 스케치북과 이면지에 작품을 그려주기 시작한 정민공주의 그림활동에 흐뭇해, 색연필이 막 부러져 하루에도 몇번번씩 깎는 일이 생겨나도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그렇게 조카들 넷을 겪고도 아직 꽤 건재(라기엔 좀 민망하지만;;)한 스테들러 색연필의 현재 몰골은 이렇다. ㅋㅋㅋ


녹이 슨 철제 케이스 위엔 정민이가 서너살 때 붙인 방귀대장 뿡뿡이 스티커가 어지럽기 이를데 없고(잘 떼지지 않아 뗄 수도 없다;;), 내용물은 중간에 없어지고 사라져버린 색깔이 많아 다른 색연필로 대체하는 바람에 마구 뒤섞였지만 아직도 그림놀이 할 때는 없어선 안될 소품이다. 문방구 가면 파버카스텔이든 스테들러든 48색, 64색 색연필이 번드르르 종류별로 진열되어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30년 넘은 이 색연필을 못 버리고 갖고 있는 내가 확실히 청승은 청승이라고 인정할밖에. (그나마 핑계는 요즘 같은 브랜드라도 나뭇결이 거칠고 칼을 대면 뚝뚝 쪼개지는 색연필과 달리 연필 나무가 정말 연하고 부드럽다는 것. 똑같이 집어던져도 대체된 잡종 색연필보다 잘 부러지지도 않는다. ㅠ.ㅠ) 애지중지 써온 30년 역사와 색연필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을 생각하면 어떻게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얼마전엔 엄마가 난데없이 장농 서랍 정리를 하며, 시집올 때 함에 들었던 혼서지와 사주단자를 버리겠다고 내놓으셨다. 아예 쓰레기통에 넣어둔 걸 나는 다시 꺼내며 왜 이런 걸 함부로 버리느냐고 막 화를 냈다. 엄마는 우리 할아버지가 손수 쓰신 글씨체도 아니고 당시 혼서지랑 사주단자 써주는 대서소에 가서 써온 거라 별로 보관할 가치가 없는 거라 항변했지만, 왠지 나는 그냥 버릴 수 없는 물건이라고 느꼈다. -_-;

40여년이 지났어도 비단 색실이 하나도 안 바랬다. 벌써 버렸으면 모르겠으나 엄마는 입때 갖고 있다가 왜 이제와서 새삼 버리시겠다고 하는지 원...

물론 나도 좀 지나면 아무 미련없이 버리자는데 동의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마음으론 한참 더 갖고 있어야할 것만 같다. 엄마방 장농 서랍 안쪽에 든 우리 부모님의 연애편지 묶음도 마찬가지고... -_-;

옛날에 대학생 때였나, 할아버지가 다락방 한 가득 갖고 계시던 오래된 물건들을 비웃으며 대체 왜 그렇게 끼고 도시느냐고 투덜거렸는데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으니 어쩌면 좋으냐. 오래된 물건 못 버려 전전긍긍하는 모습 때문에 머지않아 다 큰 조카들에게 고리타분한 노친네 취급받는 모습이 막 눈에 선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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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문방구

놀잇감 2011. 4. 19. 15:40

블로그 이웃 고비가 하일라이터 계의 최강자라며 고체 형광펜의 존재를 신기해 했다. 나도 익히 본 물건이었다. 조카네 가서 책상에 돌아다니는 주황색 형광펜을 직접 써보기도 했다. 고비의 칭찬 그대로 필기감도 좋고 색감도 좋은 편이었다. 지난번에 문방구 매장에 갔을 땐 제품구경도 했지만 선뜻 구입하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인 스테들러 형광펜을 두개나 사두었기 때문이다. 두어달 지나면 홀라당 말라버리는 흔한 형광펜과 달리 스테들러는 형광펜도 훌륭해서 반년쯤은 거뜬하다. (내가 그리 자주 애용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담엔 나도 사서 써봐야지 마음 먹었는데 고비의 포스팅을 본 거다.

마침 어제 조카네 갔다가 늘 보던 주황색 고체 형광펜을 들고 물었다. 너 이거 다른 색도 써봤니? 조카는 책상위 연필꽂이(연필꽂이만 세 개쯤 된다. 아.. 풍요의 세상이여)에서 주섬주섬 다른 색을 죄다 꺼내 보여주었다. 원래 노랑색은 구몬에서 공짜로 준건데, 좋아서 다른 색깔은 내가 샀어. 아...  @_@



얼른 다 써본 나는 퍼뜩 고비에게 정보를 알려야겠다 싶어서 이 사진을 찍어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러고는 열망에 불타올랐다. 사고싶다, 사고싶다. 세트로 다 사고싶다... -_-a

하일라이터로 쓰려면 사실 노란색 말고는 별로 쓸모도 없고 색이 너무 튀어서 사두더라도 펴~~~영생 다 쓸 일이 없을 게 확실하다. 조카들이 놀러와서 그림그리기 놀이에 다 써버리지 않는한은. 그런데 대체 왜 다 사고 싶으냐고!! 그나마 이렇게 저렴한 문방구만 욕심내는 소박한 취미생활이 얼마나 다행이냐 싶긴 하지만, 쓸데없는 물건은 제발 좀 사서 쟁여두지 말자는 단촐한 삶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나는 늘 우유부단하게 고민한다. 물론 까짓것 얼마나 한다고, 하는 소비욕이 승리를 거둘 때가 많지만 말이다.

4월들어 애용하는 온라인 문방구 사이트의 회원등급이 VIP에서 한단계 떨어져 블루회원이 된 걸 보자 나는 또 막 조바심이 생겨(아니 왜??)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았다. 역시나 꼭 필요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필요한 건 작은 공책 한권과 스프링노트였는데, 스프링노트는 겉장이 반투명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으면서 두께와 종이와 디자인이 모두 맘에 드는 걸 찾을 수가 없어 포기하는 대신 슬며시 연필을 고르고 있었다. VIP회원일 때는 100원 이상의 제품을 사면 무조건 무료배송인데, 블루회원이면 만원을 채워야 무료배송이다. 아쒸... 그래서 소박하게 사들여 엊그제 받은 문방구는 이것.


저 공책은 대체 언제 뭣에 쓰게될까.. 연필도 그간 사들인게 쌓여 분명 안쓰고 구경만 할 게 뻔하고... 신문 재생용지로 만든 연필들은 다 고만고만 차이도 없는데 왜 자꾸 사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색색깔 연필은 끝에 달린 새까만 지우개까지 맘에 드니깐 후회는 없다. 이게 바로 나에겐 만원의 행복이로구나. ㅋㅋㅋ (그래도 여기 없는 공책 한권은 이미 사용 중이니 다 헛질은 아니라고 극구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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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논다

놀잇감 2010. 10. 22. 21:02

책 많이 읽는 이웃들이 리브로 세일 때문에 책과 음반 지름신이 동해 다들 들먹거리는데도 나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미 이달의 할당 지름신을 만족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자주 기웃대는 문방구 사이트 9주년 기념 세일을 내가 그냥 넘길 리가 없지 않은가. 해마다 요맘때인 걸 미리 알고 위시리스트 잔뜩 채워놓고 기다렸지만 요번엔 그래도 비교적 실용적인 것들을 끼워 샀으니 크게 민망하진 않다.

문방구 사이트에서 실용성 없는데도 만날 내가 눈독을 들이고 탐하는 것들은 주로 필기도구류와 카드, 메모지 정도인데 특히 포스트잇은 왜 사도사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연필을 사들이는 데 심취하더니 연필 열망은 이제 확실히 잦아들었고, 포스트잇과 수첩, 메모지는 새로운 것들이 나올 때마다 눈을 빛내다가 문방구 모아놓은 상자를 열어본 뒤 애써 마음을 정리해 장바구니를 덜어내는 과정을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종이인형 놀이의 향수를 자극한 포스트잇 시리즈는 지다 니가 오려다주신 걸로 잠깐 놀아보고 나서 오히려 더 사고싶어졌다. 도대체 어디에다 메모를 써서 포스트잇으로 활용하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깨 걸이 없이 그냥 옷입히는 놀이로 장땡이겠다 싶은 종이인형 놀이 포스트잇 너무 귀엽다! 조카들 생일카드로 쓰려고 카드 시리즈도 함께 샀는데, 포스트잇에 비해 인형들이 너무 커서 막상 보니 좀 징그러운 듯도 하지만 나중에 아까워서 못쓰고 혼자 쟁여둘지도 모르겠다. :) 

지난번에 사진 찾느라 파일을 뒤지면서 보니, 문방구 중독치료 백신 차원에서 포스팅하려고 했던 듯 간간이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더라. 이참에 문방구 사진 대방출(까지는 아니고;;). 이러고 논다고 슬며시 자수하고 나면 앞으로 텐바이텐 지름질 좀 덜하려나?

참고로 이 두 사진은 1, 2년 전에 찍은 것들이라 퍽 약소하다. ㄱ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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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투덜일기 2008. 12. 22. 17:30


이메일과 메신저가 사용되면서 손으로 써보내는 카드니 연하장이 대거 사라져버렸고
더욱이 지인들 사이에선 문자메시지 한통으로 새해인사를 하거나 그것도 생략하는 것이 대세지만
그래도 나는 거의 해마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와 연하장을 장만해둔다.
아마도 문방구 쇼핑중독과도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은데, 매년 사들인 카드보다 보내는 카드의 수가 적어져
책상서랍엔 점점 많은 카드들이 쌓이고 있음에도 올해 역시 11월초부터 카드를 주문했다.
최근 애용하는 카드는 꿩먹고 알먹는 기분으로 사는 유니세프 카드.
올해엔 디자인이 더욱 다양하고 예쁘게 나와서 배달온 카드들을 보며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그러고는 12월초가 되면 우선 외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카드를 보내고 나머지는 중순쯤 써서 날려야지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엔?
당연히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ㅠ.ㅠ 
장단기 기억력상실증환자인 내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만 주말에 정민공주의 생일파티에서 조카들에게
크리스마스를 받고나서야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어야 하는 시기가 이미 지나버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엔 굳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필요도 없고 연초까지 연하장을 받아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연하장은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연말까지 받아야 가장 의미가 깊지 않은가!

국내에 있는 지인들에겐 오늘쯤 우체국에 가서 빠른우편으로 보내면 크리스마스 전에 도착시킬 수 있었겠지만 애당초 카드보낼 생각을 했던 멀리 있는 지인들에겐 완전히 기회를 잃고 말았다는 낭패감에다
손글씨로 뭔가를 단체로 끄적여 써보기엔 준비된 게 없어서 그냥 망연히 또 하루를 보냈다.

24장이나 산 데다 예년에 쓰고 남은 카드 십여장까지 합해서... 고스란히 해를 묵힐 확률이 크다.
그러고는 또 내년에 까맣게 잊고 또 새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문하겠지.
나이 든다는 건 점점 망각의 늪으로 빠져든다는 뜻일까.
아니면 유독 나만의 병이 깊은 것인가.
왜 이러고 사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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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이 좋다

놀잇감 2008. 11. 20. 18:08

문방구를 사모으는 것은 꽤 오래된 나의 취미다.
오래 전엔 눈가가 달착지근 아련해지는 파스텔 톤의 편지지를 모으던 때도 있었고,
수첩류와 무지공책, 예쁜 볼펜, 스티커, 메모지 따위를 주섬주섬 사모으던 시기를 거쳐
요샌 뭐든 주제를 정해 온갖 문방구류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주제를 자전거로 정하긴 했지만 아직 '모았다'고 할 만큼의 아이템을 마련하진 못한 상태.
자전거를 장만해놓고도 게으름 탓에 제대로 타지 못하는 죄책감을 은근히 다른 소비 욕망으로 떠넘기려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자전거 그림이 들어간 문방구를 유심히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눈에 띈 물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출처: 텐바이텐 all rights reserved by gongjang

자전거 그림이 들어갔대서 무조건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자전거의 환경 지향적인 메시지를 담아 재생신문지로 흑연을 말아 연필을 만들었대고, 연필이 담긴 종이 케이스도 접착제 대신 실로 박았다는데 그 만듦새가 퍽이나 정성스러웠다.
사실 자전거 그림은 약간 성의가 없게 느껴져 내 취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풍은 아니지만 슬슬 휘갈겨도 잘 써지는 연필심의 부드러움과 연필깎이로 깎아놓은 돌돌말린 연필밥이 내 마음에 꼭 들어서 요샌 뭐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연필을 사용한다.

모름지기 연필은 연필깎이로 둘둘 돌려 갈아놓는 것보다는 일일이 칼로 약간 기름하게 깎아 세로 결을 살려놓아야 내 마음에 꼭 드는데, 이 연필은 나무가 아니라 칼날이 잘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앙증맞은 연필깎이도 하나 장만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연필깎이는 어디까지나 이 연필 전용이고, 나머지 연필들은 죄다 칼로 깎아쓰고 있는데 전동이든 수동이든 연필깎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내가 처음으로 손수 연필을 칼로 깎아 쓴 게 언제인지는 돌이켜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는 미제인지 독일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주물(혹은 무쇠?)로 된 투박한 수동연필깎이가 있었다. 원래 책상에 못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여서 아빠는 둥근 쇳덩어리 같이 생긴 그 연필깎이를 두툼한 나무토막에 못으로 고정시켜주셨는데, 우리 삼남매는 연필을 깎을 때면 양발로 그 나무토막의 양 귀퉁이를 누른 뒤 구멍에 연필을 꽂고 한손으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 다음엔 플라스틱으로 된 집 모양의 연필깎이도 생겨났던 것 같다. 연필을 꽂는 구멍에 집게 같은 것이 달려 그걸 젖히고 연필을 꽂으면 고정이 되기 때문에 이제 양발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졌고 한손으로 연필깎이 꼭대기를 지그시 누르며 손잡이를 돌리면 됐다.
물론 몇십원짜리 휴대용 연필깎이를 늘 필통에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요즘도 아이라이너 전용으로 사용되는 손가락마디 만한 소형 연필깎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소형이든 대형이든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적당히 연필이 깎였을 때 빼지 않으면 연필 한 자루를 금방 몽당연필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기계식 칼날이 싫기도 했지만, 나는 잘 드는 칼로 사각사각 연필을 돌려가며 나무를 벗겨내고 마지막에 심을 너무 가늘지 않게, 적당한 길이와 두께로 깎아놓아야 성에 찼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은 연필 다섯자루를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키 순서대로 넣어놓으며 몹시 뿌듯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연필의 질이 형편없었다. 심이 골아서(자꾸 떨어뜨린 탓이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도 툭툭 부러져 나가는 연필이 흔했고, 재질과 색깔이 다른 나무를 붙여놓은 연필을 깎다보면 결이 이상해 깎이는 게 아니라 나뭇결을 따라 쪼개져 흑연심이 뭉텅 드러나는 연필도 있었다. 겉으로는 HB라고 적혀 있어도 심이 너무 단단해 색도 흐리고 걸핏하면 공책을 찢어먹는 연필도 종종 만났다. 그러다 겉모습도 매끈한 독일제나 잠자리가 그려진 일제, 하얀 지우개가 끝에 달린 노란 미제 연필이라도 손에 넣게 되면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도 좋았지만 칼날 끝에서 부드럽게 밀려나가듯 깎이는 삼나무 재질(국산연필보다 심히 부드러운 나뭇결이 신기해 나중에 알아보니 삼나무라고 했던 듯)의 연필밥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었는지 모른다.
신문지를 떡하니 펼쳐놓고 바닥에 앉아 칼로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묘미는 나만이 즐겼던 것일까?
고모부가 출장에서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 세트엔 작은 연필깎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는 예쁜 색심까지 날카롭게 깎이는 게 아깝고 싫어서 언제나 칼로 색연필을 깎았는데, 특히 색연필을 깎고 나서 모인 연필밥은 너무 예뻐서 단숨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통에 모아두기도 했었다. +_+

하지만 연필 깎는 칼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게 된 건 분명 국민학교 고학년 때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전엔 연필깎이나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연필깎는 칼의 형태가 대단히 위험한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이었기 때문이다. 휘청휘청 얇고 너무도 예리해서 나에겐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으로 잘라(쓰다가 반쪽으로 잘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연필을 솜씨 좋게 깎아주던 최초의 손은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모든 재주에 능하셨던 한량 출신의 할아버지는 서예도 일품이고 한시도 읊으시고 심심풀이로 조각도 하셨으니, 그까짓 연필 정도 깎는 것이야 우스우셨을 게다. 그리고 짐작컨대 연필깎이에서 나오는 방정맞고 짤뚱한 연필 모양에 비해 약간 길쭉하고 늘씬한 느낌의 연필을 깎아내는 나의 취향은 할아버지한테서 비롯된 듯하다. 나와는 겨우 아홉살 차이가 나고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우리 막내고모가 깎아놓은 연필 모양도 내 솜씨와 비슷한 걸 어른이 된 후에 깨달었는데, 그땐 그게 고모를 우러러보던 어린 조카의 무의식적인 모방이라 여겼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 막내고모와 내가 둘 다 연필깎기를 제대로 배운 인물이 할아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너무 작아서 할아버지가 놓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은 언제나 요술을 부리듯 일정한 길이로 깎인 늘씬한 연필을 탄생시켰다. 도루코 면도날 다음으로 쓰인 칼은 역시 도루코에서 나온 문방구용 칼이었는데 칼날이 좀 더 단단하고 윗부분엔 알루미늄으로 덧씌워 손으로 잡고 쓰기에 편하게 생겨먹은 그 칼도 역시나 작아서,  할아버지댁에서 분가해 나온 부모님과 살던 저학년 때엔 엄마나 아빠가 내 대신 연필을 깎아주었던 것 같다. 삼남매의 연필을 깎아주기가 번거로워져서 부모님이 연필깎이를 장만했을 수도 있겠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일본에서 대거 수입된 앙증맞고 예쁜 샤프펜슬에 혹해 연필을 멀리했고 수학이 아닌 한 공책에 쓰는 필기도구도 볼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연필에 대한 추억이 덜하긴 하지만, 특활로 미술반 활동을 했으므로 누가 뭐래도 데생 연필은 질 좋은 나무와 흑연이 들어있는 걸 골라 정성스레 칼로 깎아 갖고 다녔고 심이 물러 잘 부러지는 4B, 2B 연필 하나를 제대로 사겠다고 큰 문방구를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때는 연필과의 완전 절교 시기였고, 나의 연필 사랑이 다시 불붙은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미국 의류회사의 서울 구매사무소라는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처음 사무실은 대단히 허름했는데
놀랍게도 메모지와 연필, 볼펜, 노트패드 같은 사무용품은 뉴욕 본사에서 보내준 것을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허영심이라 실소가 나오지만, 어쨌든 일년에 두세 번 한국에 들르는 사장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사무용품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까다로운 인간이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특히 사장이 하얀 지우개가 달린 노란 미제 연필로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품함엔 절대로 연필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인간이 일년에 쓰게 될 연필이 한자루나 될까말까 한데, 본사에선 분기별로 연필을 비롯한 사무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으니 참 웃기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사무용품 사물함에 들어 있는 갖가지 문방구류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회사 로고까지 인쇄해 넣은 전화 메모용 포스트잇도 좋았고, 대학때 즐겨쓰던 빅볼펜과 노란연필을 마음껏 쓰는 것도 좋았다. 
특히 팩스 비용 최소화를 위해 발신 팩스는 한꺼번에 타이피스트에게 타이핑을 시켰는데
그 전에 이면지에 초고를 쓸 땐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듯 다들 연필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짧은 영어로 통신문을 작성하려니 모두들 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답안을 작성하듯 정성을 들였던 게 아닐까. ^^
암튼 볼펜과 연필, 갖가지 크기의 노란색 메모패드, 각종 포스트잇은 집에도 가져다놓고 썼는데
그 회사를 관두고도 몇년동안은 그때 집어온 메모패드와 노란 연필을 아주 요긴하게 집에서 써먹었던 기억이 있다. ^^;

직장생활을 관두고 나서 만날 컴퓨터와 씨름을 하던 내가 다시 연필깎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역시 조카들이 생기고부터다. 우리 조카들은 넷 가운데 돌잡이에서 세 녀석이나 연필을 잡았을 정도로 아기때부터 연필을 좋아했고 나는 조카들이 해놓은 의미없는 낙서라도 그저 대가의 작품인 양 호들갑을 떨며 열심히 연필을 깎아 그들에게 바쳤다.

마분지에 연필. 정민공주 5세때 작품


그런 정성을 들이면 이런 그림도 간간이 하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언젠가 내가 기분전환 삼아 파마를 한 다음에 그려달라고 졸라서 얻은 건데, 나중에 정민공주가 유명한 화가가 되면 전시하려고 고이 간직해두고 있다. ㅋㅋ

암튼 나는 요즘 마냥 연필이 좋다.
조카들이 쓰다가 두고 간 동아니, 모나미니 하는 알록달록한 연필들이 벌써 죄다 몽당연필로 변해버렸지만 좀체 버릴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세살 된 조카의 손엔 몽당연필이 또 제격이기도 하고, 모나미 볼펜 몸통을 끼워 하나쯤은 꼭 들고 다니던 몽당연필의 추억 때문에라도 최대한 끝까지 써볼 작정이다.
물론 자전거 그림 뿐만 아니라 돌고래 무늬와 아무 무늬없는 나무색 연필, 단순한 느낌의 검정 연필도 기어이 사들였다.
검정 나무로 된 연필은 아마 또 칼로 연필을 깎아놓은 연필밥을 버리기 아까워할 것 같아 아직 구경만 하고 있다.

글씨체가 부끄러워 요샌 뭐든 손으로 쓰는 걸 두려워하게 되는데 사각사각 소리도 경쾌한 연필로는 연애편지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편지 보낼 연인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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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전환

놀잇감 2008. 10. 23. 21:54
효과가 일시적이라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기분전환에 효과적인 나만의 방법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쉬운 건 무작정 외출해서 아무 카페나 들어가 맛있는 커피 마시기.
작업실이 있을 땐 도망치듯 차를 몰고 그곳으로 숨어들어 싸늘하거나 푹푹찌는 매캐하고 낯선 공기와 정적 속에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시간이 참 소중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공간이 없어졌으니 뭐...
제아무리 브리카 모카포트와 내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도, 집에서 마시는 커피가 허락하는 행복과 여유에는 어딘가 한계가 있다. 집이 아니라는 공간의 차이에서 느껴지는 신선함도 있거니와, 더욱이 누군가 나를 위해 정성스레 만들어준 수고가 덧붙여진다고 생각하면 커피가 더욱 그윽할 수밖에.
문제는 작업실로  도망칠 땐 무릎 나온 추리닝에 사흘째 안감은 머리나 눈꼽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자를 푹 눌러쓰거나 스카프로 칭칭 동여매면 그만이지만, 카페를 찾아 나갈 땐 아무래도 씻고 치장(?)하는 번거로움이 필수인데 몹시 귀찮아 자주 할 짓이 못돼서 그렇지 오히려 기분전환의 효과는 더 크다.
책한권 들고 나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리필해달래서 더 마시는 동안 몇 페이지라도 읽고 들어오면 마치 대단한 약속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겉치레 탐서가인 척 하는 것도 큰 묘미.

그런데, 기분전환이 필요한 순간이 하필 충동적인 외출이 여의치 못한 오밤중이라면?
그럴 땐 여지없이 인터넷쇼핑이 묘약. ^^
즐겨찾기에 들어 있는 몇몇 사이트(주로 문방구 사이트)에 들어가서 위시리스트에 물건을 마구 담았다가 장바구니까지 담은 뒤 진지한 고민을 거쳐 조용히 로그아웃 하고 나올 때가 더 많지만 ^^
그렇게 위시리스트에 담아둔 기간이 오래된 <완소> 물품들은 배송비무료 금액에 도달할 때까지 마냥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사들이며 희열을 느낀다.
요번엔, 뼈다귀모양 포스트잇(포스트잇은 종류별로 사들여도 왜 끊임없이 욕심이 나는 걸까 -_-;;), 뼈다귀모양 이어폰줄 정리기(정민공주 주려고), 재생신문지로만든 연필, 연필깎이, 포스트잇처럼 쓸 수 있는 마스킹 테이프, 옷감전용 마커세트(!), 실험용 민무늬티셔츠를 장만했다.
오밤중에 쇼핑하고 나서 잠든지 얼마 안된 아침, 이내 택배배송을 알리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했을 때의 미묘한 쾌감은 아는 사람만 알리라.
웬만해선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다른 물건들(그야말로 '질러댄' 가방이나 옷)은 나중에 괜히 죄책감도 들고 없어도 될 물건이라는 생각에 떳떳하게 자랑하지 못하는 데 반해 문방구류는 상자 가득 쟁여놓고 있어도 죄책감은커녕 더욱 욕심만 늘어가니 참, 나의 문방구류 열망은 고질병이다.  

워낙 게으른데다 어쩐지 큰 낭비 같은 느낌이라, 카페 외출만큼 자주 할 수는 없지만 미용실 외출도 기분전환엔 아주 그만이다. 예전엔 워낙 소심하기도 했고(더러운 머리를 남에게 맡길 순 없다;;고 생각했음) 최대한 스타일리시한 모습으로 미용사를 만나야 나한테 어울리는 머리모양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괜한 노파심이 작용해서 벼르고 별러 머리 손질을 하러 갈 때도 일부러 미리 머리를 감고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요샌 오래 별렀든 충동적으로 결심했든 미용실에 갈 땐 그냥 꾀죄죄한 모습으로 더럽고 엉킨 머리칼이 정 민망하면 모자를 질끈 눌러쓰고 갈 수 있게 됐다.
그러고는 퍼머를 하든 그냥 머리끝만 살짝 다듬든, 샴푸실에서 느긋하게 기대앉아 다른 사람이 감겨주는 손길에 머리칼을 맡기고 있는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거다.
사실 나는 빠져 있는 상태의 머리칼(머리에 붙어 있는 머리칼은 상관없다^^)에 대해 약간 우스운 공포감 같은 게 있어서 봄가을 환절기에 특히 머리를 감을 때 한꺼번에 와장창 빠져나온 본인의 머리칼을 보고도 섬뜩해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난 절대로 온종일 남의 머리를 감겨주며 손가락에 마구 엉겨붙는 머리칼을 견뎌야하는 미용실 보조는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특히 수채구멍에 모여있을 빠진 머리카락들을 생각하면 정말 무섭다 ㅠ.ㅠ) 그들에게 매우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머리 감겨주기>에 대한 나의 아련한 로망은 아마도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프리카 초원 야영지에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고풍스러운 주전자에 물을 담아 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뒤로 젖혀 머리를 감겨주는데 그 장면이 어찌나 로맨틱한지... @.@
(물론 가끔 엄마 머리를 감겨드리면서도 빠진 머리칼 때문에 섬뜩하고 오싹한 느낌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내쪽에서 <로맨틱한 머리 감겨주기>는 불가능하다!ㅋㅋ)
그 영화를 보았을 즈음에만 해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는 게 그리 조심스럽거나 정성스럽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즐긴다기 보다는 그저 송구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고 견뎌내야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미용실의 서비스가 획기적으로 좋아지면서 머리만 감겨주는 게 아니라 나중엔 시원하게 두피마사지도 해주니,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을 때 괜히 머리를 다듬으러 가서 남의 손에 샴푸를 맡기는 게 나로선 가끔 누리는 사치이자 기분전환의 기회가 되었다.
어떤 일본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순전히 기분전환으로 머리만 감으러 미용실에 가는 내용이 있어서 몹시 공감하며 우리나라에도 가벼운 두피마사지랑 머리만 감겨주는 서비스가 도입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_+

마지막 기분전환 비법은 뭔가 꼼지락꼼지락 만들고 리폼하기.
지난번 바느질로 쿠션을 만들어 본 이후로 수건을 썩썩 잘라 숭덩숭덩 꿰매서 솜을 넣고 뭔가를 만드는 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바람에 그간 마우스 손목받침대를 두개나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하나는 반달 모양으로 대충 꿰매 내가 쓰고 있고(책상 사진 어딘가에 선을 보였을 법도 한데;;), 하나는 곰돌이 모양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정민공주에게 주었는데 점점 뭔가 더 복잡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나 고민하고 있다. 대단히 노동집약적인 퀼트 같은 거에 심취하면 번역은 완전 뒷전으로 나몰라라 하고 만날 바느질만 하고 앉아 있을 공산이 크기 때문에 애써 피하는 중이지만, 뭔가를 조물조물 오리고 꿰매 만드는 행위가 퍽 즐거움을 느낀다.
<수면의 과학>을 특히 좋아하며 봤던 이유도 끊임없이 예쁜 소품을 만드는 스테파니와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스테판에게 감정이입이 됐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전체에 나오는 아날로그풍의 기발한 소품들도 당연히 사랑스러웠고. 
역시 지난번에 심심하기도 하고 자전거 티셔츠도 입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손수 시도해보았으나 무식하게 네임펜과 유성매직으로 그리는 바람에 죄다 번지거나 지워지기는 했지만, 티셔츠 낙서질에 맛을 들인 나는 <패브릭전용 마커>를 오래 눈독들여왔고 얼마전 문방구쇼핑 때 전격 장만하여 앞으로 끝없는 티셔츠 낙서질에 탐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미 두번째 장난질은 성공(?)을 거두었고, 아직 빨아보진 않았지만 다림질 후엔 절대 안지워진다는 제품을 믿어보기로 했다. 
원래 티셔츠 한 장은 실험용으로 시도해보고 괜찮으면 한 장 더 그려서 선물하려고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웠으며, 나름대로 도안도 고민하고 실패를 교훈삼아 얇은 티셔츠가 펜과 함께 늘어나지 않도록 천 안쪽에 테이프를 붙여 그리는 묘안도 생각해내는 등 흥미진진한 과정이었으니, 낙서질을 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희희낙락 즐거워했을지는 실토하지 않아도 뻔한 일.
그러나 결과적으로 낙서질 티셔츠는 두장 다 내가 입기로 했다. ^^
두번째로 그린 자전거 티셔츠는 많이 미흡하지만 정말로 선물하려고 했는데 포장하려고 보니, 티셔츠 봉제 자체가 불량이라 소매 연결부위에 구멍이 있는 것이다! 젠장. 그림 그리기 전에 봤어야 교환을 해달라고 하지, 실컷 낙서하고 났으니 교환도 못하고 그냥 내가 꿰매서 입는 수밖에.

흠...
물론 그밖에도 당연히 친구들 만나 수다떨기, 조카들이랑 신나게 놀기, 전시회 가기, 여행, 고궁 거닐기... 등의 기분전환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굳이 위의 방법들을 거론한 건 미리 계획하지 않아도,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인데 이렇게 시시콜콜 적다보니 역시 가장 쉽고 친근한 기분전환은 블로그질임을 깨달았다.
비록 그 효력이 이젠 찰나에 사그라드는 것 같긴 하지만, 찰나가 모여 영겁이 되듯 계속되는 블로그질로 내 기분은 두둥실 떠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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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중독

추억주머니 2006. 10. 11. 02:44
내가 온라인으로도 오프라인으로도 수시 구경을 즐기는
어느 문방구 가게 (디자인 소품 상점이라고 해야 정확하려나?)에서 개점 5주년 행사로
1주일간 20퍼센트나 할인판매를 단행한다는 이메일이 날아왔다.
다른 광고는 읽어보지도 않고 삭제를 하면서
유독 그 사이트에서 날아오는 광고 메일은 어김없이 열어보고선
입을 헤벌리고 한참이나 구경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가끔은 쓸데없이 귀여운 책 스탬프와 잉크패드, 메모지, 스프링 달린 수첩,
스티커, 앙증맞은 공책, 알록달록 모양이 예쁜 박스 포장용 테이프 따위를 사들인다.

그나마 오늘은 그동안 사려고 별러두었던
명함 앨범을 거의 2천원이나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갔던 것인데...
또 한 시간도 넘게 이것저것 문방구를 뒤적이다
잔뜩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놓았다가는 딱히 급히 쓸모 있는 물건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반성하는 의미에서 곧장 구매하지 않고 wish list로 옮겨놓은 뒤 얼른 나왔다.

나말고도 이런저런 문방구를 욕심껏 사들이는 지인들이 꽤 여럿이다.
다 쓰지도 않으면서 색색깔의 펜들을 사들여 필통에 꽂아두고 흐뭇해 하는 이가 없나
역시나 다 쓰지도 못할 아담한 크기의 각종 수첩과 노트를 보는 족족 사들이는 이가 없나
스티커만 보면 눈을 반짝이는 친구가 없나...

대체 "다 큰 우리들"이 이러는 이유는 뭘까?
나 같은 경우 그닥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으므로
문방구에서 늘 사고 싶었던 색연필이나 예쁜 지우개, 손에 잡히는 감촉부터 남달랐던
앙증맞은 일제 샤프펜슬, 수첩, 지갑 따위를 만지작거리며 오래오래 지켜만 보다가
뭔가 특별한 날 아주 큰 마음을 먹고 사들이는 형편이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쳐도,

상당히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터라 출장 다니시는 아버지 편에 수많은 일제 문방구들을
다 섭렵했고, 내가 몹시도 부러워했던 철제 케이스에 든 48색 색연필(아마도 독일제나 스위스제였을 거다)은 물론이고 요새 다시 유행한다는 다이모를 그 옛날에도 들고다니며 제 학용품에 이름표를 죄다 붙이고 뽐을 내, 우리들 기를 죽였던^^ 친구도 여전히 내가 대형 문방구에 들어가보자고 하면 얼굴을 빛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방구 선반을 뒤져대는 걸 보면
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 아예 키덜트 상품이라는 것이 버젓이 개발돼 나오고 있겠지만
나는 이른바 피규어figure를 비롯해 각종 인형이나 테디 베어류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 싫어하는 것 만큼이나 인형도 싫다! 먼지나 풀풀 나고 말이지... )
오로지 문방구, 특히 서지류에만 중독이 심하다. ㅎㅎㅎ

얼마 전 추석 대청소 하느라 책꽂이 맨 아래 놓인 상자를 여니
예전에 사들인 편지지 세트가 잔뜩 들어 있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편지쓰기를 관둔 게 최소한 10년은 넘었으니 그 역시 10년은 넘었을 게다.
철철이 사둔 카드야 아무 때나 쓸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해묵은 편지지는 기껏해야 조카한테나 물려줄 수밖에 없겠지.

또 앞으로 10년쯤 후에 상자에 담아 치워둔 조무라기 수첩과 공책들을 보며 스스로 한심스러워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문방구 사들이는 일을 좀 자제해야 할 터인데
과연 어쩌려나 모르겠다.
참... 앞으로 10년 후면 내 나이가 몇이냐 말이다. ㅠ.ㅠ

반성문이랍시고 이렇게 적어놓고
분명 내일 난 득달같이 그 문방구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못 이기는 척 물건 하나쯤 내려놓은 다음 낼름 계산할 게 뻔하다.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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