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준비성이 뛰어난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점점 까다롭고 괴팍한 유형으로 변하면서 뭐든 조바심을 품고 진즉에 준비를 해야 마음이 놓인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하긴,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척 마음을 놓고 뿌듯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옛날보다 미리 걱정하는 시기가 빨라진 것뿐이라 괜스레 전전긍긍하는 기간만 길어졌으니 그것도 내심 못마땅하다.
아무려나 어린이날, 어버이날 빼곡히 들어있는 5월이 오려면 아직 꽤 남았는데도 나는 열흘전부터 고민에 돌입했다. 생일 챙기면 됐지,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는 그냥 좀 넘기라고 잔소리하는 올케도 있지만 때맞춰서 조카들 선물 챙기는 것도 고모의 낙인데 어쩌라고! 물론 낙과 더불어 요샌 선택의 고민도 커지긴 했다. 만날 똑같은 걸 사줄 수도 없고...
원래 아이들은 옷선물이랑 책선물을 제일 싫어한단다. 그건 부모가 언제든 사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필수품이지 선물로 기쁘게 받을 품목은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나도 점수를 더 따려면 장난감을 사주어야겠지만 이번엔 녀석들이 못마땅해 하더라도 건설적인 책선물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미 준비를 마쳤다. 슬쩍 어린이날 선물이 뭔지 떠본 공주는 책선물이라고 하자 몹시 실망하여 거세게 항의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선물 주면서 나만 신나면 그만이지 뭐. 요즘 애들 책은 내가 봐도 신기하고 재미나다. *_*
곧이어 어버이날 선물은 또 뭘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왕비마마께서 수월하게 해결해주셨다. 작년에 김영임의 <효> 공연을 보여드렸는데 올해도 또 가고싶으시단다. -_-;; 작년에 공연 볼 때도 마치 중노년계의 이효리라도 되는 듯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김영임 아줌마를 보며 나는 꽤나 의아했는데, 레퍼토리도 비슷할 게 뻔한 그 공연을 울엄마가 또 보고 싶다는 걸 보면, 그리고 벌써 사흘 내내 vip석은 한자리도 남지 않은 걸 보면 내가 몰라서 그렇지 엄청나게 인기 많은 공연인 모양이다. 아니면 효도는 딱 5월 한달동안에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자식들이 선택하기에 적합한 공연이거나(공연 제목부터 <효>라잖아!). 울 엄만 옛날부터 외할머니가 그리 좋아하셨던 <회심곡> 때문에 가고 싶다고 하셨던 건데 올해는 좀 길게라도 불러주면 좋겠다. 작년엔 화려한 무당차림으로 굿하다 중간에 객석에 내려와 돈 걷어간 것밖에 기억에 안남는다. 내가 보기엔 시큰둥해도 어르신들은 예쁜 그 아줌마가 손한번이라도 잡아주며 잘왔다고 하니 만원짜리는 물론이고 수표까지 막 찔러주더군. 나로선 꽤나 놀라운 문화충격이었다. 나이 들어도 좋아하는 가수나 소리꾼한테 열광하는 건 똑같다는 걸 몰랐다는 게 이상한 건가? 그나마 울 엄만 나훈아, 남진 공연 보고 싶단 소리 안하니 천만다행이다. 그 아저씨들도 중노년계의 <비> 수준이라던데. ㅋㅋ
째뜬 5월 준비는 얼추 끝났다. 언제 어디서 무슨 메뉴로 거국적으로 밥을 먹을까, 를 결정하는 문제는 아직 남았지만 그거야 아랫것들이 정하라고 할 작정이다.
이젠 홀가분한 마음으로 5월을 기다려도 되는데, 왜 아직도 마음이 묵직한지 그걸 모르겠다.
토룡마을 주민들이 대거 보이코트할 양상을 보여 2008 베스트 포스팅 릴레이가 존폐위기에 놓였다니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나라도 동참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을 이런 식으로나마 정리해두는 건 나 같은 비기록형 인간에게 퍽 훌륭한 갈무리방법이므로, 옆구리 찔려서라도 적어두면 십년쯤 후에 차곡차곡 돌아볼 때 굉장히 흥미로울 듯하다. ^^;
2008년 최고의 책 3
<디아스포라 기행>과 <서울은 깊다>는 금방 꼽았는데 마지막 책 한권을 선뜻 고르기가 힘들었다.
읽은 책 리스트를 보며 조금 고민하다가, 처음 꼽은 두권보다 덜 진지하지만 행복했던 독서는 무엇이었던가 생각해보니 <소박한 정원>에 눈길이 갔다. 초록 식물은 살리기보다 죽이는 데 더 능하면서 정원사로 사는 삶이 멋지게 느껴지니 어쩌면 좋으냐.
2008년 최고의 영화 3
한국영화는 한편도 안 꼽자니 왠지 좀 찔려서 <다크나이트>를 넣을까 <추격자>를 넣을까 망설였을 만큼 <추격자>도 훌륭한 영화였지만 생각해보니 너무 무섭고 섬뜩해서 히스 레저의 손을 들어주었다.
히스 레저의 유작이기도 하니깐.
2008년 최고의 드라마 3
2008년엔 드라마를 별로 안 챙겨본 듯하다. 볼만한 드라마가 없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 내가 더 게을러졌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세 드라마는 꽤 열심히 챙겨봤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강마에랑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될 만큼 좋았기 때문에, 다른 주요배역들의 짜증스러움 쯤이야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었다.
같은 시간에 방송하는 바람에 늘 재방송으로 보긴 했지만 <바람의 화원>도 뒤늦게 불붙어 감탄하며 찾아보았다. CG로 되살아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문근영양의 재발견이 큰 수확.
<식객>은 나의 식탐 성향 때문에 보기 시작했다가 순전히 김래원 보는 맛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요리 잘하는 남자는 피아노 치는 남자만큼이나 매혹적이다(알렉스 빼고!)
2008 최고의 전시 및 공연 3 작년엔 은근히 전시회도 공연장도 잘 안다녔더라. 전시와 공연을 한꺼번에 꼽을 수밖에 없음이 슬프다.
서울 시립 미술관 고흐 전시회는 사실 2007년에도 보았기 때문에, 2007년 베스트 포스팅을 했더라면 아쉬워하며 다른 걸 손꼽아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돌아보니 2007년엔 한해 갈무리를 안했더라.
하지만 고흐 전시회는 2008년이 밝자마자 또 보러 갔었기 때문에 흐뭇하게 첫번째로 떠올랐다.
전시회는 다녀오면 죄다 자랑스레 후기를 남겼던 것도 같은데 뭔가 빠진 것도 같고 이상하다.
아무튼 작년 기록을 확인할 곳은 블로그밖에 없으니 두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라틴 아메리카 거장전을 골랐다. 공연은 정민공주가 출연한 어린이 뮤지컬 빼곤 12월에 딱 한번 봤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하도 간만에 콘서트장엘 갔더니 유치하게 꾸며놓은 카니발 분위기(서커스 단원 같은 사람들과 웃기는 동물 모양이 공연장을 돌아다녔다)도 신선하고, 수시로 변하는 무대장치며 애니메이션 배경 같은 것도 황홀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라이브의 매력이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올핸 좀 귀찮아도 콘서트장에 가끔 찾아가보고 싶은 바람이 있다. 특히 김동률 단독 콘서트하면 꼭 가리라!
2008 최고의 음반 3
김동률 5집 - Monologue
맘마미아 ost
Oasis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1년 내내 음반이라고 해봤자 총 5장 샀나보다. -_-;;
오아시스 음반은 지다님 따라서 은근슬쩍 사보았는데 듣고 있자면 커피 생각이 마구 간절해진다.
최고의 음반이라고 손꼽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제일 많이 들었고 뿌듯한 걸 세 장 고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홀로 위안 삼기로 했다. ㅋㅋ
2008 최고의 지름 가을 내내 가죽 냄새 타령 하다가 결국 장만한 갈색 가죽재킷
친구들은 유럽여행도 가는데! 그러면서 확 사버린 검정 가죽가방
심적으로 5년간 뿌듯하기는 했으나, 마지막 2년 가까이 방치했던 작업실 정리. 소모적인 짓만 하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생산적인 결단을 내렸다는 데 의의가 있다. ^^
다행스럽게도 2008년엔 최악의 삽질이라고 자책할 만한 우를 범하지 않았거나(자잘한 부끄러운 짓들은 당연히 있지만;;) 벌써 기억에서 지워버렸나보다. 더는 특별히 떠오르는 사건들이 없음을 기뻐하자.
어쨌거나...
2008년 한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더 게으를 순 없다 ㅠ.ㅠ
[#M_그밖에...|접기|최고의 사건이랄 것까진 없으나 개인적으로 기록해두면 나중에 뿌듯할 지도 모를 일들
- 공역 및 재출간 포함하여 총 5권의 번역서가 나왔다. 9권이나 출간됐던 2006년에 비하면 아쉽지만 2007년엔 겨우 2권 출간되었음을 명심하자. 2009년엔 과연 몇권이나? ^^
- 공역한 책 <의학은 나의 아내...>가 2008 문화관광부 지정 우수도서(수백권 중 하나다ㅋㅋ)에 선정됐단다. 겨우 단편 두 꼭지 번역했어도 어쨌거나 기뻐할 일이다. '좋은 책'이라잖아!
- 약간 아픔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작업한 책 가운데 주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 책이 탄생했다. 게다가 10위권 순위 안에 내 번역서가 두 권이나 올라 있어 사방에서 '축하' 인사를 들어야 했다. 2002년 이후 두번째 쾌거(?)인데 그때처럼 부디 비슷한 류의 책만 쇄도하진 않기를 빈다.
편견, 편단(공정하지 못하고 편벽되게 결정함), 편벽(남에게 알랑거리며 그 비위를 잘 맞추는 일, 또는 그런 사람), 편법, 편식, 편심, 편애, 편파, 편취, 편협.
<편>자 들어간 글자 치고 잘한 일은 하나도 없다.
특히 편애는 나쁘다.
원래 공평무사한 인간이 극히 드물다는 점을 구실로 삼더라도 편파적이면서 잘했노라고 말할 순 없는 일이다.
어제 카니발 콘서트에서도 그랬다.
나는 표나게 김동률을 더 좋아했다. 이적 노래는 몇 곡 아는 것도 없었다.
같이 간 지인은 너무 편애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지러지는 비명은 당연히 김동률만을 향한 것이었다.
물론 이적에게도 환호하고 박수도 쳐주었지만 내가 느끼는 감동은 달랐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사람은 이적이 노래를 부를 때 훨씬 더 열광했고 내가 모르는 노래들도 척척 따라불렀다. 반면에 김동률이 노래할 때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정확히 나눌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을 공히 좋아하는 이들과, 따로따로 편애하는 이들이 뒤섞여 있었으니 아무도 마음 다치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다치는 이들이 생겨나는 편애는 정말이지 곤란하다.
오래 전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확실히 나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냥 예쁜 아이들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잘하거나 모범생이어서 예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 눈엔 심하게 잘나고 스스로의 잘남을 깨닫고 있는 우등생이나 상위권 학생들은 주는 것 없이 얄미울 때가 많았다. 성격이나 성적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눈빛과 태도로 전달되는 맑은 심성 때문에 정이 가거나, 어딘가 측은함이 느껴지는 아이에게로 애정이 쏠렸다. 그러나 교사는, 특히 담임은 누구를 편애하는지 드러내서는 안된다. 누구나 고유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가수와 달리, 아이들에겐 담임선생이 단 한명 뿐이니까.
편애를 받는 아이는 친구들에게 왕따가 되기 십상이고, 편애의 좁은 관계망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린 마음을 다칠지도 모른다.
매사에 잘난 척도 더럽게 많이 하면서 제 앞가림을 못하는 건 나의 가장 큰 단점임을 새삼, 그것도 옆구리를 세게 찔리고 나서야 깨닫고 속이 상해 밤새 가슴을 쳤다.
사탕발림처럼 얄팍한 사랑을 덧칠하며 꽂는 비수는 더욱 아픈 법이거늘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게 한 죄는 너무도 크다.
온종일 자학, 반성모드.
무슨 한풀이를 하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젠 온종일 문화생활에 힘쓰느라, 평소 걷는 양의 10배쯤 되는 걷기를 통한 육체노동(?)과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를 겪고 보니 오늘은 살짝 몸살 기운마저 있다.
그렇지만 흐뭇하기 짝이 없던 하루를 기록해두지 않을 수야 없지.
역시 문화생활이란 내 두뇌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주변에 자랑을 일삼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희열이 궁극의 목적이 아니겠나. (아.. 속물스러워라~~ ^^;)
째뜬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라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르네 마그리트를 보러 갔었는데
우글우글 아이들 포함 100명쯤 몰려다니는 사람들에 뒤섞여
(개학을 얼마 앞둔 평일 낮엔 어린이 단체 관람도 많다는 걸 왜 몰랐을고! ㅠ.ㅠ)
가까스로 작품 설명을 듣는 과정은 좀 피곤하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내게는 너무도 어렵고 무서운' 마그리트 그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드물게 내 마음에도 드는 마그리트 그림을 찾아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그림 ^^;;
심금, 캔버스에 유채
화가의 후기작에 속하는 이 그림엔
내가 무서워하는 새ㅡ.ㅡ;;도 없고 (나뭇잎과 새가 중첩되어 있는 그림들.. 어흑 너무 무서웠다 ㅠ.ㅠ)
하늘색이 내가 딱 좋아라하는 색감. 투명한 와인잔도 예쁘고... 어쩐지 산등성이 모양새도 낯익다. ㅎㅎ
마그리트가 자기 작품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나마 그의 작품을 보는 혜안을 좀처럼 갖출 수 없었던 나의 무지함에 위로가 되었지만
역시나 초현실주의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도 뜻밖의 횡재로 느껴진 또 다른 전시회가 있었으니!!
두둥~~
그것은 바로 시립미술관 1층에서 완전 홀대를 받으며 전시되고 있던
<로베르 콩바스 전>!!!
마그리트 전시회를 보면 그냥 공짜로 들어갈 수 있고
이 전시회만 보려면 달랑 700원의 입장료를 내면 된다는데
겨우 47점에 불과하다니 간단히 돌아봐주마 마음먹고 저녁 약속시간을 겨우 30분 남겨두고 전시장에 들어갔던 나와 일행은 완전 눈이 뒤집힌 듯, 화려한 색채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콩바스의 그림을 후다닥 훑어 보느라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사진 크기도 차이나는 것 좀 보라지..
콩바스는 현재 활동하는 프랑스 화가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인물이라는데
(작품 설명 맨 앞부분만 듣고선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ㅠ.ㅠ)
마그리트 그림을 보고난 뒤의 암울하고 찝찝하고 음산한 느낌(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영화처럼, 그림에 대한 취향도 하늘과 땅차이니깐 뭐... )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유쾌하고 기발한 그림들이 전시장에 넘쳐났다.
특히 화가가 직접 쓴 작품설명들이 어찌나 재미있든지!!
47점에 불과하다는 전시작품의 양을 얕잡아본 걸 몹시 후회했던 J와 나는
약속시간에 쫓겨 전시장을 나서며 다시 보러 오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캔버스 틀을 떼어내, 대형 족자 느낌이 나는 대형 그림들을 주르륵 한꺼번에 붙여놓아
작품 설명과 대조하며 읽기에 너무도 불편하게 해놓은 성의 없는 전시기획에도 불끈 화가 났지만 어쩌랴... 목마른 자가 우물 파야지.
미술관 홈페이지에도 역시나 작품 이미지가 달랑 2장밖에 없어서, 내가 홀딱 반한 작품은 자랑할 수도 없다.
700원 아니라, 7000원을 더 내라도 보러가게 될지는.. ^^;; 잘 모르겠지만
암튼 난 역시 화려한 색감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다시한번 실감했음.
아차차..
아직 르네 마그리트 전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할인카드가 있음을 주지바람 ^^;
신세계 포인트 카드와 함께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할인쿠폰을 가져가면 20% 할인
모든 BC카드는 10% 할인된다. (천원이 어디야!)
마그리트 전은 4월까지 하니깐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콩바스 전은 겨우 2월 11일까지밖에 하질 않아 이 역시 안타깝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번 미술관 순례를 같이한 J와 나는 만원짜리 마그리트 전보다
700원짜리 콩바스 전이 훨씬 좋았다! ^_________^
어제 문화생활의 마지막은 거의 2달 전에 예매해놓고 기다리던
뮤지컬 <하루>.
유니버설 아트센터로 다시 단장한 리틀엔젤스 회관의 화려하고 푹신한 카페트와
2층 중앙 맨앞줄의 우아한 박스석을 경험해볼 수 있었고,
서범석, 엄기준, 오만석 세 사람을 한 무대에서 봤다는 역사적인 의미와 감동만으로도
꺅꺅 거리며 마냥 좋아라하긴 했지만, 이미 들리는 소문으로 염려했던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많이 떨어져 아쉬웠다.
뮤지컬이 끝나 막이 내리고 나서 내 첫 코멘트가 '이게 뭐야.. 마음에 안들어!'였을 정도.
툭탁거리며 싸우던 동거 연인이 교통사고로 죽은 뒤에 하루 전날로 되돌아간 내용이었던... 몇년 전에 본 영화 줄거리와 똑같은 상황 설정 때문에 공연 보는 내내,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일행들과 그 영화 제목을 고심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프 온리>더라. ^^
창작 뮤지컬이라더니, 그 영화 판권을 사서 원작으로 삼은 건가?
암튼... 개인적으로 서범석의 가창력과 연기와 존재감은 몹시 마음에 들었지만 극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는 생뚱맞은 '플루토'라는 캐릭터도 그렇고
'후까시대마왕' 노릇으로 일관하느라 엄기준의 섬세한 연기력이 묻히고 말았던 방송작가 캐릭터도 맘에 안들고,
두 여주인공이자 목소리마저도 예쁜 척하기 대가인 ㅡ.ㅡ; 김소현과 양소민은 둘 다 목소리가 가늘어 차별화되질 못한 데다 인물표현이 어찌나 상투적인지..
그나마 오만석이 맡은 강영원이라는 인물은 그럭저럭 봐줄만 했지만, 매력과 감동을 느낄 순 없었음.
하여간 그래서 우린 '무슨 스토리가 이렇게 산만하고 어수선하냐'고 구시렁댔으며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래가 단 한곡도 없었음에 기막혀 했지만 ^^;;
그래도! 서범석과 엄기준과 오만석이 한 무대에서 삼각구도를 그리며 열창하던 장면들이 몹시 인상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역시 가창력에선 서범석이 짱! <벽뚫남>에선 워낙 레퍼토리가 조용조용해서 가창력을 느낄 수 없었던 엄기준도 수준급, 의외로 오만석이 제일 딸리더군.. 너무 예쁘고 감미롭게 부르려고 해서 그랬을까?)
어차피 2월 초면 끝날 공연이지만, 주변에 널리 홍보하거나 칭찬하고 싶진 않은 작품이고
입소문을 타서 마구 연장공연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다.
아무려나 문화생활 종합세트 같은 '하루'를 가열차게 보낸 다음날은
역시 피곤하군. ^___^
키드님을 선두로 이웃 블로거들의 재미난 베스트 문답을 보며 참 흥미롭긴 했으되, 나는 기억력도 나쁘고 뭔가를 열심히 정리하는 인간 유형에서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다 보니(다이어리 쓰기를 작파한지 최소 5년은 넘은 것 같다. 이젠 아예 장만하지도 않는다) 난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파피와 쌘이 한 번 더 옆구리를 쿡쿡 찔러주니 또... 정리 못하는 인간이라 더욱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 그냥 수월하게 살면 될 것을 나란 인간은 뭐든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다 판난다.
게다가 또 이렇게 만날 서론이 길다. ㅋㅋ 사진 편집해 올릴 능력도 없으니 단조롭고 별 재미도 없을 것이라고 미리 경고 ^^;;
2006 최고의 책 3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정영목 옮김/청미래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올리버 색스 지음/조석현 옮김/이마고 - 젠틀 매드니스/N.A. 바스베인스 지음/표정훈,김연수,박중서 공역/뜨인돌
민망하게도 꼽아보니 1년동안 사들인 책 대비 읽은 책이 50퍼센트도 되지 못했다. 조지 마이클이 토크쇼에 나와 '책은 훌륭한 가구'라고 한 말에 힘입어, 사람들이 흐뭇하게 장서용 책을 사들인다는 말에 나도 킥킥 웃으며 뿌듯해 했지만... 일 때문에 하는 번역과 검토 이외의 책을 좀 더 많이 읽지 못하는 내 게으름이 참 민망한 수준이다. 겨우 열권 남짓 읽은 책 가운데 어렵사리 골라봤다. ㅡ.ㅡ;;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좋아서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을 또 사보았으나 실망스럽긴 했지만, 이 책은 사랑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터무니 없는 착각이자 자기 최면인가를 냉소적이면서도 유쾌한 사유로 엮은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더랬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다양한 신경증 환자들의 놀라운 임상기록을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한 책이다. 우울증 환자이신 엄마 때문에 신경/정신 장애를 다룬 책들에 아무래도 호기심이 많이 가는데, 황당하고 놀라운 여러 환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질 수 있었던 듯. <젠틀 매드니스>는 가장 우아하고도 품격 있는 광기라고 애서가들이 이름 붙인 '애서광' 증상을 지닌 여러 서양인들의 특이한 삶과 책에 대한 애착에 얽힌 뒷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희귀본을 소장하기 위해 책을 훔치기까지 하며 개인 문고를 가꿔나가는 저들의 문화는 사실 우리에게 많이 낯설다. 1000페이지가 넘는 사전 두께라 사실 다 읽진 못했지만, 내용보다는 순전히 장서용으로 장만해놓고 쓰다듬으며 뿌듯해하는 책이다. ^^;; 게다가 이런 두께의 비대중적인 책을 옮기고 출간하기로 결정한 관계자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기도 하고, 읽지도 않으면서 사들여놓고 그저 좋아라 하는 책 허영심의 발로에서 목록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ㅋㅋ
2006 최고의 영화 3 - 수면의 과학 - Good Night, and Good Luck - 왕의 남자
올해도 영화를 그리 많이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나마 본 영화 가운데 고를 수밖에 없었다. <수면의 과학>은 당당히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었는데, 나머지는 생각 좀 해야 했다. <Good Night, and Good Luck>은 마녀사냥 같은 매카시의 공산주의 색출 열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 미국의 정직한 언론인을 다룬 영화였는데, 내가 한 때 몹시 좋아했던 조지 클루니가 감독과 각본을 맡아 훌륭하게 연출을 해내기도 했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모습도 볼 수 있어 좋았을 뿐더러, 거지발싸개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 언론의 행태와 비교되는 영화속 실존 인물의 모습이 대단히 멋졌다. 당시 TV 방송에선 저널리스트가 담배를 피우며 진행을 하던데, 그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 영화관을 나오며 흡연의 욕구가 마구 용솟음치기도 했던 영화다. ㅋㅋ <왕의 남자>는 동성애 코드와 연산의 인간적인 고뇌, 광대패거리의 슬픔, 한복의 아름다움 따위가 잘 어우러져, 푸짐하게 잘 차린 잔칫상 같은 느낌의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6 최고의 공연 3 - 벽을 뚫는 남자 - 미스터 마우스 - 형제자매들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본 뮤지컬 <벽뚫남>은 2층 S석이라 시야 확보는 좋았으되, 좌석이 좁아 무릎이 앞 벽에 닿아 불편했던 것을 빼면, 엄기준과 해이의 적당한 호연과 조연들의 열정적인 연기가 어우러져 프랑스 코미디의 특유의 익실과 재치의 묘미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 공연이었다. <미스터 마우스>는 소극장에서 처음 본 뮤지컬이었는데,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이나 흡입력 같은 건 없어도 서범석의 담백하고 진솔한 연기와 가슴 아픈 스토리 때문에 심장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공연 후반 내내 엉엉 울었더랬다. 가격 대비 몹시 만족했던 뮤지컬 ^^;; <형제자매들>은 친구따라 무작정 강남가는 격으로 내용도 전혀 모르면서 자그마치 7시간 반이나 하는 러시아 원어 연극이라는 얘기만 듣고 가서 봤는데 오후 2시부터 시작해, 가부키(물론 본 적 없다)처럼 중간에 저녁 먹는 시간도 있고 밤 10시 넘어 끝나는 놀라운 마라톤 공연이었다. 가끔 지루하다 느낀 적도 있었지만, 스탈린 시대 농민들의 애환을 다룬 내용은 다른 언어와 자막의 벽을 넘어 찌릿하게 마음을 울렸고, 막이 내린 후엔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기립박수를 오래오래 보냈다. 뮤지컬은 가끔 봤어도, 진지한 연극을 본 것이 워낙 오랜만이라 각별히 인상적이었던 데다, 20년째 같은 배우들이 같은 연극을 계속 무대에 올리고 있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라마 극장(? 정확하지 않음^^)의 열정적인 팀웍 또한 감동이었다.
2006 최고의 문화생활 3 - 장 뒤뷔페: 우를루프 정원 展 - 이면展
전시회를 그닥 많이 다니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둘 밖에 못 고르겠다. 클레전과 인상파 거장전은 전시장을 나와서 전시의 성의없음에 마구 화가 날 정도였고, 롭스&뭉크 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나쁨과 미진함 때문에 덕수궁을 나오자마자 마구 단 것과 카페인이 땡겼더랬다. ^^;;
12월의 완전 끝자락에 르네 마그리트 展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나는 초현실주의 그림이 별로인데다, 키드 님과 달리 르네 마그리트 그림은 내 취향과 좀 거리감이 있다 ㅎㅎ), 내가 극구 우겨 보러갔던 장 뒤뷔페 전시회는 별 기대 없이 갔다가 대박을 건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프랑스에선 국민화가로 이름이 높다는 장 뒤뷔페의 작품이 대거 전시된 알찬 기획인 것도 훌륭했고, 작품을 설명해주는 큐레이터의 맛깔스러운 소개도 재미 있었을 뿐더러, 가장 중요하게는 한 사람의 작품 세계라 보기엔 몹시 놀라울 정도로 폭이 넓고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며 마구 행복해졌다.
그래서 부러 시키지도 않은 전시 품평서를 써주기도 할 정도였는데 ^^;; 평일 목/금엔 밤 8시반까지 전시를 연장할 뿐만 아니라, sk멤버십 카드가 있으면 평소에도 2천원 할인, 오후 6시 이후엔 50%나 할인해준다. 그래서 일행들 모두 단돈 5천원 내고 들어가 보면서 만오천원짜리 전시로도 손색이 없다고 칭찬했음 ㅋㅋ 전시 감상은 정민공주 데리고 한 번 더 보러 갔다 온 다음에 올릴 계획인데 과연.. 1월 28일까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한다.
이면전.. 은 내가 아는 분이 소속된 그룹 전시회였는데, 순전히 팔이 안으로 굽는 논리로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음 ㅋㅋ... 내가 최초로 전시작품을 돈 주고 산 역사적인 기록도 있고 해서.
2006 최고의 지름 3 - 필리핀 보라카이 여행 - 변수옥 화가의 판화 작품 2점 (사진 가운데 맨 오른쪽 ^^;;) - 롤러 스탬프 세트
ㅋㅋㅋ 마지막 세번째 것 때문에 고민 좀 오래 했는데, 정가 4만8천원이나 하는 책 <젠틀 매드니스>를 넣을까 하다가 가격대비 만족도로 봐선 아무래도 롤러 스탬프를 넣어야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롤러 스탬프란... 말 그대로 예쁜 무늬가 둥근 롤러에 새겨져 있어서 손잡이를 잡고 죽 돌리면 띄 모양의 스탬프가 찍히는 건데, 완전히 재미 붙여서 선물 할 일 있을 때마다 포장지 대신 두툼한 색지나 갱지 사다가 찍어서 포장해 주며 혼자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어제도 조카들이 놀러와서 공연히 이면지에 수십장 찍고 놀다가 갔는데... 스탬프 잉크가 좀 아깝긴 해도 그 마음을 내 익히 이해하기 때문에 그냥 냅뒀다. ^^;;
2006 최고의 드라마 3 - 굿바이 솔로 - 연애시대 - Grey's Anatomy
이건 이웃들과 너무 비슷해서 설명이 필요없을 듯;;; 요새 케이블에서 <꽃보다 아름다워>를 재방해주고 있는데, 또 넋놓고 보면서 노희경의 대사에 감탄하고 있다. *.* 세 드라마의 공통점을 찾아보니, 가슴을 저미듯 대단히 공감 가는 현실적인 대사와 주옥 같은 표현으로 이어지는 잔잔한 내레이션, 분위기에 딱 맞는 배경음악인 듯 싶다.
2006 최고의 삽질 3 - 재작년에 거금 8백만원이나 번역료를 '완전히' 떼먹은 출판사 직원이(원래 좀 아는 사이였고 소개할 당시엔 그 출판사를 퇴사한 상태) '미안해서' 소개한 신생 출판사 일 때문에 다른 일 제쳐두고 연달아 2권이나 번역했는데, 10달 넘도록 번역료도 못받고 공연히 다른 일만 마구 밀렸던 일. 더욱이 돈 받을 욕심에, 얼굴 팔리는 거 몹시 싫은데도 책 소개 나오게 된 DMB 방송에 인터뷰도 해줬는데! 아.. 신경질나. - 웰빙 좀 추구해보겠다고 거금 5만원씩이나 주고 사들인 마리안느와 아마존 화분 죽이기(아직 안죽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ㅜ.ㅡ;;;) - 그밖에 자잘한 삽질들은 많았는데... 딱히 뭘 꼽을지 모르겠다. ^^;; 나중에 생각나면 삽입하든지 하겠음
2006 최고의 음반과 싸가지, 안습 지름엔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다. 음반은 워낙 잘 사지도 않고, 또 잘 듣지도 않는 듯... 몇개 산 게 있긴 한데 까칠해져선 열심히 일할 땐 음악도 귀에 거슬리다보니 잘 찾아듣지도 않고, 찾아 들을 때도 익숙하고 편한 것만 고르게 된다. 사놓고 후회하는 물건도 좀 있지만(가령 백화점 세일에서 산 만원짜리 낙타색 미니스커트라든지, 몇달째 포장조차 풀지 않은 요가매트라든지 ㅋㅋ), 워낙 지르기까지 심사숙고 하는 인간이라 크게 지르고 후회하는 물건은 없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