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새해 들어 첫 전시관람은 훈데르트바서. 기대한 만큼 좋았다. 동화나라처럼 보이는 건축모형에선 가우디가 떠오르기도 했고 현란한 색감에선 얼핏 클림트 그림도 연상됐던 것 같다. 후기를 쓴다쓴다 미루다가 벌써 보고온지 한달도 훨씬 넘어 감흥이 가물가물 기억도 잘 안나지만 ㅠ.ㅠ 그나마 초기라서 사진 촬영도 허용해주었고(입소문 홍보용인지 요샌 초반에 작품 촬영 허용하다가 나중에 금지하는 전시 많은 것 같다) 마침 도록도 사온 터라 뒤적여가며 밀린 숙제를 해봐야겠다. 그날 만났던 그림들을 떠올리는 순간에는 다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놈의 허영심은 암튼...
상당히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역시나 기억에 많이 남는 건 주최측에서 '밀고 있는' 작품인듯. 사랑하는 여인에게 30일에 걸쳐 매일 fax로 보낸 그림을 이어붙인 작품이 있었다. 이름하여 <30일간의 팩스 페인팅> @.,@ 멀리 외국에 나간 연인이 매일 연서와 함께 이런 그림 보내주면 엄청 감동하지 않을까? ㅎㅎ 근데 나처럼 의심 많은 인간은... 나중에 작품 만들 욕심에 팩스 보낸 거 아니냐고 괜히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다. +_+ 그러거나 말거나 정성은 대단한 것이여..
30일간의 팩스 페인팅
이렇게 천진난만한 느낌의 그림을 내가 좋아하는 것 같다. 색감은 또 얼마나 찬란한지...
전시실마다 벽 색깔을 확확 달리 해놓았던데, 진회색, 진보라색, 주황색 같은 배경과 작품들이 잘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대충 찍어도 막 화보같다고 자화자찬.. ㅋ
정식으로 건축을 공부한 적이 없다는데도 도면을 그리고, 또 그대로 건물이 지어지고 그런 사람에게 각 나라에서 큰 프로젝트를 맡기고... 우리나라에선 불가능한 일이겠지 싶어 더 대단하게 여겨졌음. 예로부터 건축가들은 흔히 반듯하지 못한 것을 잘 못견딘다고 하던데.. ㅋㅋ 가우디도 그렇고 훈데르트바서도 그렇고, 동대문디지털플라자를 설계했던 자하 하디드도 그렇고 이젠 곡선이 대세인 것도 같고... DDP도 우주선 같은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보면 길게 경사진 잔디밭이 나오는데, 지표면과 길게 사선으로 이은 건물 지붕을 풀밭으로 정원으로 꾸민 훈데르트바서 건축물들 실제로 구경해보고 싶다. 창문권리라던가.. 나무 권리라던가.. 암튼 용적률따위 개나 주라는 듯 친환경적인 독특한 건물들을 많이도 지었단다. 실제로 열렬한 환경운동가이기도 했고.
호주에서 폐 유리병으로 집을 지어 환경 친화적인 삶을 이어가기도 하고, 평생 환경운동가로 활약했기 때문에 지구를 지키자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빗물 활용하자고 호소하는 여러가지 포스터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도 <그린 시티>.
화가가 비오는 날씨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에 빗방울 모티프가 그림에 많이 등장했던 것 같다. 나도 비 좋은데! 그러면서 괜히 반색했음..
몇년 전 예술의 전당 전시회 때 가장 인기가 높았다는 <노란 집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어린이 참여 프로그램도 많던데.. 나 역시 언제 한번 스케치로 따라 그려보고 싶은 작품이다. ㅎ
노란 집들 - 함께 하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것은 아픕니다(Yellow Houses: It hurts to wait with love if love is somewhere else)
작품 부제를 읽고 보니... 저게 빗방울이 아니라 죄다 눈물방울이었어.. ㅠ.ㅠ
일본 여자를 애인으로 두었다던가.. 일본 목판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아예 백개의 물(百水)라는 호(?)를 정해 낙관도 찍은 작품이 많다. 백개의 물은 멋있으나 '백수'는 좀 웃김 ^^;
타오르는 물, 1991
브로를 위한 모자, 1994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드글드글한 가운데 색감이 예뻐서 찍어온 그림 두 점.
<타오르는 물>은 방콕 빌딩 꼭대기에서 그렸대고 물과 불을 서로 반대로 표현했단다. 오른쪽 그림의 주인공인 브로는 친구이자 스승인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ㅠ.ㅠ 사진 찍을 땐 그냥 예쁘단 생각 뿐이었는데 도록 읽은 뒤 다시 보니 파란 입술과 표정이 슬프게 느껴진다.
클림트, 에곤 쉴레, 그리고 훈데르트바서의 작품들(특히 건물 ㅠ.ㅠ)을 직접 보러.. 오스트리아게 가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나왔다.
3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관람료는 15000원. 도록은 3만원이다. 공식 포스터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교적 저렴하게 느껴진 도록을 사온 건 좋았지만, 저렴한덴 다 이유가 있는 건지 인쇄 질감과 색감이 대체로 좀 어둡고 푸르딩딩한 기운이 많이 느껴진다. 화려번쩍한 오리지널 엽서는 막 한장에 5천원씩 했던 것 같았는데 우리나라 인쇄술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나? 쳇.. 실망이닷.
대학시절 학교와 가까웠던 성수동은 내게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멀어도 꼭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고집을 부리다 어쩔 수 없이 지각할 것 같은날만 가끔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꼭 내가 뛰어가서 갈아탄 지하철은 순환선인데도 이상하게도 꼭 성수역에서 멈췄다. 지하철 탄 보람도 없이!
그러다 졸업후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말이 미국 의류회사 서울사무소 직원이지, 버젓이 MD 명함을 들고 다녔으되 그냥 본사 디자이너며 검사원들 '따까리'였다. 그래서 샘플 개발이니, 생산 지시니 해서 버젓한 사무실 상담만큼이나 원단공장, 봉제공장, 나염공장을 돌아다녔다. 성수동엔 주요 거래처였던 나염공장이 있어서 한달에도 몇번씩 외근을 나갔던 것 같다.
주로 벽돌을 쌓아올리거나 철제펜스를 치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흉한 모양새에다 겨울엔 무지 춥고 여름엔 한증막이던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즐비한 골목에서 샘플 패턴을 한아름 안고 홀로 택시에서 내리면 공단 특유의 기름 냄새 같은 것에 섞여 가죽 냄새, 찌개 끓이는 냄새 따위가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먹은 나이 만큼이나 오랜 세월이 흘러서.. ㅠ.ㅠ 성수동은 이제 또 다른 문화가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단다. 가죽으로 유명한 거리엔 수제화 골목이 생겨나기도 하고, 텅빈 공장 건물에 젊은 작가들이 공방을 차리기도 하고, 갤러리를 열기도 하고... 커피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인들이 모여드니 당연히 카페와 음식점도 속속 생겨났대고.
해서 친구들과 이름하여 '성수동 프로젝트' 날을 잡았다. 말이 거창해 프로젝트지 그냥 서울 경기 곳곳에 흩어져 사는 대학 친구들이 성수동에 모여 '힙'하다는 밥집, 찻집, 갤러리, 공방 따위를 구경하자는 거였다. 근데 또 하필 그날은 영하 9도였던가... 칼바람에 귓불이 꽁꽁 얼어 동상입기 직전인 날씨였고, 서로 잘 알아보고 왔겠거니 기대하는 바람에 괜히 헤매다가 제대로 공방과 갤러리 순례는 하지 못했다.
그나마 추위 핑계로 오래 머물렀던 대림창고를 다들 인상적으로 여겨주어 다행.
대림창고 외관은 이렇게 생겼다. 벽에 매달려 있던 옛날 간판을 떼지 않고 그대로 둔데다 '컬럼'이라고 적힌 금속제 새 간판은 눈에 잘 안띄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냥 휙 지나치기 쉽다. 친구들도 문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뭐 잘못 알고 온 거 아니냐고 나를 의심했을 정도다. ^^;;
꽤 높은 나무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면 이런 내부가 나오고
넓은 창고형 공간이 툭 트여있는데... 눈앞에 키네틱아트(?) 작품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 뭔가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
넓은 공간은 다시 가운데 벽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 좀 더 어둠컴컴한 카페와 안쪽에 좀 더 환한 느낌의 레스토랑이 있다. 입구 왼쪽 갤러리 위엔 다락방처럼 생긴 2층도 있는 듯.
사진은 비슷하게 나왔는데 오른쪽 카페가 훨씬 어둡다. 카페 오른쪽 카운터에서 모든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은 다음 죄다 셀프로 받아다 먹어야하고 나중에 빈그릇도 각자 반납해야 한다. 가격대도 싸지 않은데 이왕이면 서빙도 좀 해주지... 모델처럼 생신 청년들이 돌아다니며 테이블 정리도 하고 그러던데 좀 더 인건비에 투자를 하시지... 심지어 주말엔 입장료도 만원 받는다고 함!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뜻이려나?
나중에 찾아보니 대림창고 운영자도 조각가였던가... 예술가이고, 곳곳에 예술작품이 소품처럼 전시되어 있다. 주말 입장료도 받는 만큼 정기적으로 작품이 바뀐다는 것 같다. 암튼 추운 겨울에 찾아간 우리는 엄청나게 튼튼해보이고 화력도 좋은 무쇠난로에 홀딱 반해가지고, 저기다 고구마도 구워팔면 좋겠다... 그런 소박한 상상을 했다. ㅋ 여기서 파는 서양 음식들과 안 어울리려나?
아침도 굶었던 터라 배고파배고파 노래를 부르면서 점심 메뉴를 골라 시켰다. 대체로 간도 슴슴하고 원재료에 충실한 싱그러운 맛? 버섯이 잔뜩 올라 있던 피자도 길쭉하게 생겨서 괜히 정겹고 담백한 맛이라 짠 음식 질색하는 친구들 모두 흡족해했다. 파스타도 괜찮다는 평을 받았는데 만오천원 쯤 하는 가격이면 당연히 맛있어야 하지 않나? ;-P 스테이크 종류는 디너 메뉴라며 점심땐 아예 팔지도 않던데 4만원 가까이 했던 듯...
왼쪽은 샐러드까지 4가지를 시켜서 합이 7만 8천원 나왔던 그날의 오찬 사진이다. 4명이 먹기에 적당했는데 그 중 1명은 워낙 소식하는 사람이라 나 같은 대식가만 모이면 모자랄 지도 모르겠다. ^^; 암튼 스테이크 샐러드는 확실히 맛있었음!
오른쪽 사진은 옆 테이블에서 시켜놓고 먹길래 모양도 하도 예쁘고 맛도 궁금하여 한참 수다로 배를 꺼뜨린 뒤에 다시 주문했던 디저트 메뉴 '화가의 낮잠'이다. ㅎㅎㅎ 동그란 그릇엔 초콜릿 무스가 담겨 있고 몽키 바나나를 절반 갈라 구운 듯 그 위에 설탕 시럽을 뿌려 굳혔다. 모종삽에 든 흙처럼 생긴 건 과자와 초콜릿 부스러기.. 구운 마시멜로 두 덩어리도 뒹굴고 있는데, 암튼 맛보다도 유화 캔버스를 활용한 플레이팅이 참신하고 너무 예쁘다며 반색했더니... 언젠가 무슨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써먹었던 콘셉트라는 것 같다. 째뜬 뭐 눈요기로 훌륭하고 행복했으니 되었다. 커피는 맛있었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호나 브룩클린에 온 것 같아!라며 들떠서 꽤나 즐겁게 수다를 이어갔던 것 같다. 나중에 가죽 거리를 헤매고 헤매다 가오픈했다는 작은 소품숍을 만나서 그나마 한 건 했다고 안심하고는 얼른 또 차 마시러 다른 카페로 들어갔었다.
동네 유명해지고 사람들 몰려들면 결국 또 분위기 이상해지면서 거대자본과 대기업이 밀려들어와 제 모습을 잃는 일이 계속 반복되는 걸 본다. 홍대도 그랬고 합정, 상수, 연남동, 가로수길, 북촌, 서촌, 이태원, 망원동까지... 과연 성수동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블로그에 이렇게 자랑과 허세 쩌는 포스팅 하면 나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에 한몫 가담하는 것임을 알면서 째뜬 또 지난 일기랍시고 세태에 편승.
2016년 마지막 전시관람은 혜곡 최순우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전인 <조선공예의 아름다움>이었다. 평창동 가나 아트센터에서 2월 5일까지 전시하고, 입장료는 3천원. 1, 2층 전시관이 꽉 차있고(전시 품목이 총 650점이라고;;), 건너편 구석의 작은 방까지 볼 거리가 많아서 가격대비 거의 횡재한 느낌이었다. 실은... 오후팀이었던 나와 달리 오전에 먼저 보러간 친구 하나는 심지어 주차장 입구로 잘못 들어가서 티켓도 안 사고 그냥 공짜로 구경했다고. +_+
언뜻 생각하기론 최순우 선생이 생전에 수집했던 골동품들인가 했더니만, 그건 아니고 한국적인 조형미가 뛰어난 조선시대 공예품을 모아놓은 것 같다. 일상 생활소품 위주라서 재미난 것들도 많고, 예뻐서 갖고 싶은 것들, 신기한 물건들이 참 많았다. 옛날 사람들의 미감이란 참... 대단하다. 살림살이 넉넉한 양반들이나 아름다운 공예품을 누리고 살수 있었겠거니 싶은 마음에 괜히 심술이 난 순간도 있었는데, 사진엔 없지만 어느 일꾼이 벌통 나무 둥치에도 멋드러진 조각을 해놓은 걸 보곤 하하 웃음이 나왔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예쁘게 꾸미는 걸 좋아하는 본능은 양반이건 평민이건 다를 바 없었겠지.
엄청 추운 날이었고, 전시 보러 들어가기 전에 친구가 휴대폰을 잃어버려 식겁했다가 되찾은 뒤 막 온 세상이 아름답고 살 만한 곳이라는 희망에 찬 심경이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엄청 감동하며 신나게 감상했다. 전시장을 나오기 아쉬울 만큼.
사진 촬영도 제지하지 않아서 아메바 기억력을 한탄할 필요 없이 원없이 마구 찍어왔기에.. 이 포스팅은 사적인 나의 감흥 기록보다는 사진 스크롤의 압박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근데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 또 어쩔 수가 없고.. ㅠ.ㅠ 그저 나의 기억 상기용일뿐.
희한하게도 전시장에서 제일 먼저 본 것이 '요강'이었다. ㅋㅋㅋㅋㅋ 중년의 우리들은 어린 시절 죄다 요강을 사용해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집에서 사용한 요강의 재질이 사기였다는 둥, '스뎅'이었다는 둥 킬킬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전시된 요강은 방짜유기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오른쪽 놋 요강과 함께 소음 방지를 위해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다는 '종이 요강'!
왼쪽 앞부분의 검은색 단지가 바로 종이를 꼬아 만든 '지끈'으로 엮은 종이 요강이다. 지끈으로 방수되는 요강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정말 놀라워라 놀라워... +_+
맨 위쪽 알록달록하고 길쭉한 건 바느질용 '자'이고 그 아래는 바늘통이었던가?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활옷은 꽃무늬가 저게 다 빽빽한 자수다. 한벌 수놓으려면 최소 6개월쯤 걸린다는 것 같다. 그래서 집안 대대로 물려 입거나, 온 고을에서 돌아가며 입었다지 아마. 어휴...
왼쪽 아래 인두도 예쁘고(손잡이 정교한 것좀 보소!), 사각형이든 아니든 실패 하나도 예사롭지가 않다. 옛날 우리 할머니가 쓰시던 실패에도 옷칠을 하고 뭔가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기억이 아련히 나는데... 전쟁통 피란 통에 조선시대 물건이었을 리는 없겠지만 문득 그 실패가 막 아깝고 그리워졌다.
흔한 나무쟁반이려니 휙 지나칠 뻔 했던 이 물건들은 반짇고리란다. 한쪽 구석에 달린 작은 나무함에 바늘을 보관했고, 나머지 골무니, 실이니 하는 바느질 도구와 천을 여기 담아 일을 했겠지. 양갓집 규수나 마님이 자수 틀을 세워놓고 수를 놓는 광경이 막 상상되는 것 같았다. 전생에 침방 나인이 틀림없는지 바느질 도구에 특히 침을 질질 흘렸음. ㅋㅋ
둘이 나란히 있던 물건은 아니지만 가로사진이니 그냥 두개 붙여야겠다.
부채 섹션에서 '옛날 사람'인 우리가 또 반색했던 물건이다. 어린 시절 소풍 가면 꼭 이런 모양의 종이 부채를 하나씩 사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한바퀴 휙 둘러서 펼쳤다가 몇번 부치면 다 찢어지고 말았지만, 소풍 갈 때마다 괜히 사고싶어했으며, 여름이면 종이를 빽빽하게 앞뒤로 접었다가 절반 꺾어 풀로 붙여서 친구들이랑 만들기도 했던 부채가 그 옛날 조선시대부터 사용했던 휴대용 부채였다니 ㅎㅎㅎ
올 여름엔 빳빳한 종이 사다가 한번 다시 만들어봐? 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전시장에서 딱 하나 물건을 가져가라고 하면 나는 이 소반 중에 하나를 골라 갖겠다!고 생각하며 정말 심혈을 기울여 하나를 고르고 또 골랐는데 하나같이 정말 반질반질 탐이 나는 작품이었다. 막연하게 '개다리 소반'이라고만 알고 있던 이 앙증맞은 1인용 밥상, 찻상들은 원래 이름이 '호족반'이란다. 개다리가 아니고 호랑이 다리였어! '개다리 소반'도 없는 건 아니어서, 오른족 사진 중 왼쪽에서 두번째, 한쪽으로만 굽은 모양의 밥상 다리가 바로 주인공이다.
양반집에서도 군자의 미덕을 실천하고자 평소엔 반찬 서너가지에 장, 밥과 국을 올려 먹었기에 요 작아보이는 소반으로도 충분했다는 것 같다. 하긴 궁궐 연회나 잔칫집에서도 1인용 소반으로 각자 대접받았으니 내용물이 달라졌으면 몰라도 왕족이 아니고서야 혼자 커다란 상에 앉아 밥 먹은 사람은 없었겠다.
몇년 전 H백화점에서 밥상, 소반 특별전 할 때 제일 싼 게 4-50만원하는 걸 보고 흐엑~ 놀라 뒤돌아섰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은 더 비싸졌겠구나 싶다. 일단 전통 기법으로 소반 만드는 장인 분들의 맥이나 안끊기면 다행이지 ㅠ.ㅠ
여기다 배추와 무를 다듬어 담았다가 김치를 버무리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그러다가 박박 설거지 하기 참 힘들었겠지, 무거워서 어떻게 다루었을까 온갖 쓸데없는 걱정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루 한 구석에 놓고 겨울에 과일을 담아놓고 집어다 먹으면 좋을 것도 같고.. 에효.
이건 다식판과 떡살.
다식판은 십수년 전 별별 걸 다 집에서 장만하고 싶어했던 왕비마마 덕분에 우리집에도 하나 있기 때문에 그리 신기할 게 없었는데, 저 동그란 떡살은 엄청 탐났다. 스탬프가 따로 없어! 물고기 모양의 떡이라니... 아 먹어보고 싶다. ㅠ.ㅠ
혹시 이게 국화빵, 붕어빵의 원조가 아닐까? ㅎㅎ
등불 가운데 신가했던 건 가운데 놓인 동그란 것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쓰는 등불이여? 궁금했는데 일종의 손전등 역할이라고 보면 되겠다. 들어보면 아랫부분이 뚫려 있는 모양새. 야경꾼 같은 사람들이 손잡이를 잡고 안에 등불을 붙여 옆으로 들어서 비추는 방식이다. 돌이켜보니 사극에서 저런 등불 들고 가는 장면을 본 것도 같다. 촛대도 예쁘고, 등잔 장식도 정교하고... 호롱불도 우아하고..
오른쪽 사진은 대문장식이다. 울 외할머니댁엔 최근까지도 나무대문이 있어서 빗장을 열고 닫는 걸 해봤는데, 물론 저렇게 정교한 물고기 모양 장식은 아니고 그냥 둥글둥글하고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외할머니댁을 차지한 외삼촌이 과연 그 나무대문을 어찌하고 살고 있으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그 동네도 재개발은 물 건너간 거 같던데 흥!
마지막에 하마터면 못보고 나올 뻔하다가 사람들 따라서 골목을 이리저리 건너가 본 작은 전시실엔 도자기류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약간 찌그러진 것도 같은 이 달 항아리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뒤쪽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스며든 오후의 햇살이 푸르스름한 배경을 이루고 그 앞으로 따뜻한 조명을 받고 있는 동그란 항아리를 보면서, 아 이걸 왜 달 항아리라고 불렀는지 새삼 실감이 들었달까.
그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오려고 이런저런 사진앱을 죄다 동원했는데 그나마 이게 가장 비슷한 느낌으로 남은 듯.
일상에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름다운 물건들을 쓰고 살았을 사람들이 마냥 부럽다가, 막상 그들이 이런 사치와 우아함을 누리도록 밑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겠나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것만은 아니지 싶다가, 어차피 문화라는 것이 대체로 가진 자들이 향유하는 것이지만 못 가졌더라도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는 것이야 뭐 다 마찬가지려니 했다. 그래서 나 또한 허세 같아 민망하면서도 이런 거 구경다니는 게 아닐까.
아 부끄럽게도 달랑 10권이다. 그것도 그림책 포함해서... 나부터 이렇게 책을 안 읽는데 출판업계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매년 점점 더 책을 안 읽지? 올해는 사들인 책의 수도 예년에 비해 적었다. 여혐 범죄사건들을 접하면서 뭔가 나도 세상과 계속 싸우려면(?) 이론적인 재무장이 필요한 것 같아서 페미니즘 책을 읽고 정희진 책까지 세 권을 엮어 감상문을 쓰려고 했었는데 ㅠ.ㅠ 결국 안했다. 수다 떨 때도 종종 말문이 막히듯이 블로그 포스팅을 할 때도 버벅버벅 버퍼링이 엄청나다는 걸 느끼며 좌절했다. 그래서 또 글쓰기 관련 책을 읽어야겠다 싶어졌다. 글쓰기에 대한 유명인의 촌철살인 조언과 함께 이런저런 글쓰기 에피소드를 담은 <쓰기의 말들>은 막상 읽을 땐 뭐 이런 걸 책으로 다 만들었나 싶었으나, 다 읽고나선 포스트잇 붙여둔 글귀를 다시 들춰보며 좀 위로를 받기도 했다. 유려한 번역으로 이름 높은 고 장영희 선생의 <슬픈 카페의 노래>도 말맛, 글맛을 따져보느라 원문을 상상하며 다시 읽은 책이다.
옛그림을 보는 법 - 허균 지음/돌베개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스콧 스토셀 지음/홍한별 옮김/반비
나쁜 페미니스트 - 록산 게이 지음/노지양 옮김/사이행성
정희진처럼 읽기 - 정희진 지음/교양인
빨래하는 페미니즘 - 스테퍼니 스탈 지음/고빛샘 옮김/민음사
쓰기의 말들 - 은유 지음/유유출판사
슬픈 카페의 노래 - 카슨 매컬러스 지음/장영희 옮김/열림원
앵무새죽이기 - 하퍼 리 지음/김욱동 옮김/열린책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수 클리볼드 지음/홍한별 옮김/반비
5분 스케치 - 김충원 지음/진선아트북
베스트 3권 뽑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서 1권만 뽑는다면 단연 리뷰도 올린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2. 2016년에 본 영화
셜록: 유령신부
캐롤
바닷마을 다이어리
굿바이 싱글
제이슨 본
국가대표 2
거울나라의 앨리스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잭 리처: 네버 고 백
내부자들
귀향
나의 소녀시대
계춘할망
족구왕
의궤, 8일간의 축제
뷰티 인사이드
베테랑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위쪽 9편. 혼자 보러간 건 내 취향대로 골랐으나, 이제보니 누가 보러 가자고 그래서 얼결에 본 영화도 많다. 암튼 2016년 최고의 영화를 뽑는다면 역시나 영화관에서 2번이나 본 <캐롤> ^^; 근데 베스트 세 편도 어렵지 않게 고를 수 있겠다. 귀여운 자매들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좋았고,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도 흐뭇하게 봤다. '걸크러시'라는 말이 유행하듯 나 역시 '언니들'이 활약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당연한가? ㅎㅎ
2016년엔 하반기부터 밥벌이로 다시 영화 일을 시작해서 옛날 영화들도 많이 볼 기회가 있었다. 담당 PD가 나름 내 취향에 맞게 골라준 덕분인지 (조니 뎁, 키이라 나이틀리, 베네딕트 컴버배치 팬이라고 미리 알렸음) 좋아라 고마워라.. 그러면서 작업했다. 번역가로서는 어쩐지 퇴물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스스로 칭찬용, 펌프질용으로 포스터를 모아 편집했다. 방영일 아니고 작업일 기준으로 2016년엔 12편. 그 중에 무려 베니의 <이미테이션 게임>을 작업했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번역 작업 영화 중 Best 역시 팬심으로 일한 <이미테이션 게임>인데, <칠드런 오브 맨>도 좋았다.
기묘한 건 과거 국내 개봉 않고 dvd로 출시되었다던 <칠드런 오브 맨>이 공중파 방영일 즈음에 국내최초 개봉 소식이 들려왔다는 사실. 이게 뭐람? 영화관과 방송 쪽은 어차피 저작권 관리 및 배급 루트도 다르고 수요자도 다른 듯, 상관없다나. 영화관 재개봉 자막은 누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서라도 보러가고 싶었는데 당연히 게을러서 확인 못했다. 혹시 누가 둘 다 보고 자막 번역 비교한 사람 있나 나름 유심히 살펴봤는데 못 찾음. ㅎㅎ
3. 전시/공연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 국립고궁박물관
창경궁을 보듬다 - 국립고궁박물관
윤동주문학관
Color Your Life - 대림미술관
변월룡 회고전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간송문화전 6부: 풍속인물화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호안 미로 특별전 -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로이터 사진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 혜곡 최순우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전 - 가나아트센터
임태경: 그대의 계절
One Love Concert: 임태경 외 ㅋㅋ
위 두 전시는 포스팅을 했으니, 세번째 베스트로 뽑은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 전시도 포스팅을 할 계획이다. 사진도 엄청 찍어왔으니 자랑 삼아서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입장료 3천원에 완전 눈호강한 느낌이었다.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소소한 일상생활 공예품인데 구석구석 예쁘고 사랑스럽더라.
공연은 임태경 광팬인 미쿡 친구의 소망 대리충족용으로 다닌 것. 체력 딸려서 공연 보러 다니는 것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여름에 공연장의 빵빵한 에어컨 때문에 냉방병으로 거의 기절할 뻔 ㅠ.ㅠ
한달에 2번씩 한번도 안빠지고 개근을 했으니 그만큼 많은 산을 다녔고, 스스로 뿌듯하다. 친구들과는 2월부터 주로 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 서울 근교산을 돌아다녔는데 주변에 갈데가 그토록 많다는 것에 감사하고, 심지어 서울 한복판 남산 둘레길도 고즈넉하고 예뻤다. 조금 멀리 가면야 뭐 말할 필요도 없이 아름다운 산이 도처에... +_+ 내가 이렇게 열심히 등산 다닐 줄 진정 몰랐는데 ㅋㅋ 이 열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그것도 궁금하다. 모녀 가을 여행에서 작년과 확 다르게 좀처럼 운신을 못하시던 왕비마마 왈, 너라도 다리 성하고 건강할 때 많이 다니라고.. ㅠ.ㅠ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베스트 산 셋을 꼽는다면
원없이 상고대와 설경을 본 계방산, 홀릴 듯 철쭉이 아름다웠던 축령산, 울산바위를 뒤쪽에서 볼 기회가 있었던 금강산.
5. 기타
그밖에 올해 사들인 음반은 노장 투혼으로 새 앨범을 낸 스팅의 <57th & 9th>와 미리 김칫국 마시며 떼창 연습하겠다고 산 콜드플레이의 <A Head Full of Dreams> 딱 2장이다. 콜드플레이는 음원으로 몇곡만 사서 듣다가 내한 소식에 팬심 발휘해 CD도 샀는데 첫 공연에 예매 실패하고 완전 광분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추가공연 가게 되서 다시 애정하며 듣는 중. 스팅은 지난 앨범이 완전 뮤지컬 ost 여서 실망하고 옛날 노래만 듣다가 2016년에 그나마 신뢰와 애정을 회복했다. ㅎㅎ
드라마는 방에 있던 배불뚝이 TV가 완전 사망하는 바람에 잘 챙겨보지 못하고 있어서 기억나는 게 치즈인더트랩, 굿 와이프, 또 오해영, 닥터스, W, 역도요정 김복주, 도깨비 정도다. 주로 배우 선호도로 찾아보는 고로 공중파 드라마도 더러 보긴 하지만 손발 오글오글거리거나 전개가 마음에 안들어서 중간에 끊었다 다시 보고 그랬었다. 단막극 <페이지 터너>가 의외로 좋아서 탁상달력에 메모해둔 기억이 있는데, 그래도 대체로 열광하며 신나게 즐겼던 드라마를 한 편 꼽으라면 <또 오해영>!(<굿 와이프>로 했다가 방금 마음 바꿈 ㅋㅋ) <굿 와이프>는 전도연의 약간 비뚤어진 입매와 자연스러운 주름 덕분에 연기가 더 좋게 느껴졌던 것 같고, 나나의 연기도 유지태도 다 괜찮았다. 제발 중년 배우들 얼굴에 티나게 이상한 짓좀 하지 말면 좋겠다. 서현진 연기 좋고 사랑스러운 건 알지만 에릭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또 오해영>은 재방송까지 막 다시 찾아보며 헤벌쭉 했던 기억이 이제야 새록새록 떠오른다. 에릭이 음향 엔지니어로 나오는데 그 직업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제대로 보여주었던 점도 신선했고, 조연으로 나왔던 해영의 부모님이나, 예지원, 김지석 커플의 이야기도, 에릭의 이복동생 커플 이야기도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다루지 않아 좋았다!
그밖에 tv 프로그램에 상을 준다면 단연코 JTBC 손석희의 <뉴스룸>(뉴스룸 맨 마지막 노래 선곡까지 손석희가 직접 한다는 것 같다. 아아 이분은 정말... +_+ 기막힌 뉴스에 광분하고 허탈해 하다 마지막 흘러나오는 노래에 위로받고 그런 순간이 참 많았다), 그리고 에셰프의 활약이 놀라웠던 <삼시세끼 어촌편3>(에릭이 느릿느릿 신중하게 요리 할 거 다하면서 말도 별로 없는 거 진짜 마음에 들었다. 겸손하기까지 한 듯!), 일요일 밤에 생각나면 찾아봤던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방에 TV 없어서 잘 안 봤다더니 테순이같다. ㅠ.ㅠ)
2016년을 되게 빌빌거리며 암울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반백수치고는 잘 먹고 잘 놀러다니며 꽤 잘 살았던 것도 같다. 2017년에도 야금야금 재미난 일 찾아다니며 행복하게 지내봐야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로이터사진전>이 열린다는 소식에 한번 가볼까나 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던 차에 띠리링~ 세계난민기구에서 문자가 왔다. 기부자들 중에서 문자 신청을 받아, 특정한 날에 난민기구가 주최하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과연 될까 의심하면서도 문자 회신을 보냈는데, 우왕~ 초대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해서... 전시 종료를 하루 앞둔 9월 24일. 아침 일찍 예술의전당으로 달려갔다. 소박하게나마 음료도 준비할 터이니 9시반부터 와서 즐기라는 친절한 안내전화도 있었다. 토요일 오전 강남으로 가는 길은 나의 예상보다 더 막혔지만, 그래도 늦지 않게, 커피와 쿠키를 즐길 여유가 있을 만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진 찍기 좋아하시는 왕비마마를 모셔갔는데... 으어.. 모든 사진 설명문구를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인 걸 내가 까먹었던 게 실수였지만, 암튼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좋은 경험이었다.
흑백사진부터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순간을 포착한 장면들과 사람들, 기록 사진의 변천 같은 것도 한눈에 들어왔고, 전시 구성도 재미있었다. 거울의 방으로 꾸며놓은 포토존도 마음에 들어서 얼른 거울에 비친 왕비마마와 내 모습을 담기도 했다. 민망해서 잘 찍진 못했지만... ㅋㅋ
음료와 함께 모든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나눠준 이 종이가방 안에는 쿠키와 난민기구 이름이 새겨진 작은 에코백, 사진 엽서, 팔찌가 들었다. 저 하얀 라벨지를 뒤집으면 황송하게도 내 이름이 적혀 있다. +_+ 소소한 데까지 신경쓴 것에 깜놀. 완전 소액 기부자 주제에 누린 게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찔리기까지 했다. 난민기구 대표도 와서 인삿말에 기념사진 촬영에... 흔히 공공기관의 장들이 늘 그러하듯 딱 거기까지만 하고 가버릴 거라 예상했는데... 1시간 가까이 도슨트 따라다니며 설명을 끝까지 다 듣고 가더라. 그 부분 또한 깜놀.
하여간에 초대받은 사람들끼리 문 닫아놓고 특별관람하는 묘미가 뭔지 드디어 실감하고 뿌듯했다. 11시 개관을 기다려 줄섰다 들어오는 일반 관객들의 바글거림을 피할 수 있었으니! 게다가 혹시나 전시장 나설 무렵에 월기부금을 좀 더 올려 내라는 청약서라도 받으면 어쩌지, 괜히 불안한 의심을 품었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에고 부끄러버라... 선뜻 내가 기부액을 더 올려낼 수 있을만큼 부자가 되면 좋겠다. ㅠ.ㅠ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는 사진들도 많았지만, 직접 보면 확실히 가슴에 와 닿는 충격과 느낌의 크기가 다른 것 같다. 받아온 엽서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왕비마마도 사진 공부를 더 하셔야겠다고 하니... 모녀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었음은 확실.
2016년에 예정된 미술 전시 목록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혔던 호안 미로 특별전. 드디어 보고 왔다. ^___^ 연일 35도를 넘기는 뜨거운 날씨에 집밖으로 한발짝도 나가기 싫었지만, 막상 나가서 시원한 데 들어가면 또 집에 들어오기가 싫어진다. 게다가 호안 미로 전시장은 '추울 정도로' 완전 시원했다. 한 여름 최고의 피서! 방학이라 숙제하러 온 애들 많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비교적 한산해서 더욱 좋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비로소 펼쳐본 브로셔 글귀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 '최대 규모로' 기획된 전시란다. 정말로 작품들이 엄청 많다! 몇년 전 시립미술관에서 봤던, 한쪽 벽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작품은 보이지 않아서 처음엔 살짝 실망스러웠는데, 마지막 창작 시기 위주로 작품 수가 264점이래고, 그림 이외에 조소 작품이며 도자기 그릇, 화가의 작업실도 고스란히 옮겨다 놓았다. 볼거리가 풍부할 밖에!
근래들어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엘 가보면, 다닥다닥 비좁게 그림을 구겨넣은 듯한 전시실 배치도 그렇고, 조명도 그렇고, 심지어 그림 걸린 배경 벽의 질감과 색도 영 마음에 안들어 툴툴거릴 때가 많았는데, 우왕 요번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시장은 내 취향에 딱이었다. 미로 작품들과 딱 맞춤한 듯한 배경과 조명! 거기다 플래시 터뜨리지 않으면 사진 촬영도 맘껏 하게 해준다. 아이고 좋아라...
용량부족으로 머리와 마음에 아무리 담아도 금방 휘발되는 기억을 붙잡을 수 있도록 사진도 많이 찍어왔다. 감동.. ㅠ.ㅠ 같이 간 친구는, 내가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는 그림이라고 미로 작품을 간단히 소개했었는데 의외로 엄청 슬퍼서 울컥울컥 했다는 촌평을 남겼다.
현대미술 무식자인 나는 호안 미로가 프랑스 출신인 줄 알았었다. 퐁피두 전시때는 분명 표기도 '호앙 미로'였었다규... 근데 알고보니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이고 전쟁 통에 프랑스로 망명했었단다. 흐잉... 가우디와도 교류가 있었고 그에게 영향을 받은 시리즈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바르셀로나, 마요르카..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여행가고픈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마요르카 미로 재단 소유의 미술관에 가고시프다.. 흑..
그림감상은 늘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현대미술은 특히나 더 구구절절 해석하고 설명하는 게 더 난감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 호안 미로는 보는 사람 보고 싶은 대로 보라는 의미에서 대다수의 그림에 작품명을 붙이지 않았단다. 웬만한 건 다 '무제'다. 원래 작품명 말고 무제인데도 굳이 이름을 붙인 건 판매상들이 세일즈를 위해 편의상 만들어놓은 것들이라고. 보는 사람 마음대로 봐도 좋다는 화가의 너그러움 또한 엄청 마음에 든다. 그림들이 예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하고.... 암튼 참 아름답다. 눈호강 실컷 했음.
사진도 맘껏 찍을 수 있었겠다... 시시콜콜 잡소리보다는 맛보기로라도 그림을 올리는 것이 이웃들에게 더 도움이 될 듯하야, 이만 총총.. ^^;
[무용수]라는 작품이다. 어렵사리 하나를 골라 갖는다면 난 이걸로 하겠다. ㅋㅋ
마지막에 들른 기념품 샵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2천원씩 하는 큼지막한 엽서는 인쇄의 질과 색감도 좋았는데 어쩐지 한동안 세워놓고 보다 서랍에 쟁여두고 마는 엽서보다는 오래오래 유용한 걸로 사고 싶어서... 핸드폰 케이스(12000원)와 마우스패드(5000원)를 장만했다. 대림미술관 팬톤 전시 때는 기념품 가격이 대체로 너무 사악하다 느꼈는데... ㅎㅎㅎ 미로 전시 기념품들은 가격도 합리적이라 느꼈고 품질도 괜찮은 편이다. 해서... 사고싶은 거 많았는데 참느라 애썼음. ㅎㅎ
포스터는 진열대에 안보이길래 슬며시 다가가서 한 장 주면 안되느냐고 그랬더니 2천원에 판매한다고. 우왓.. 요즘 전시 포스터 거창하게 만들어서 막 만원 넘게 팔던데 웬떡이냐 싶어서 ^^ 얼렁 달라고 했다.
방문에 붙여둔 브레송 전시 포스터 아래쪽에, 김환기 브로셔를 떼어내고 눈누난나 흥얼거리며 붙여두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값비싼 그림을 집에 걸어두고 흐뭇한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 ㅎㅎ 나는야 싸구려 포스터로도 비슷한 만족도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조으다.
호안 미로 특별전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9월 24일까지 휴관일 없이 계속 전시하고.. 입장료는 15,000원이다. 들어갈 땐 좀 비싼 거 아닌가 했었는데 나오면서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
올해 기대되는 전시 중에 특히 전혀 모르면서도 괜히 땡겨서 보러가야지 마음 먹었던 변월룡 회고전. ^^; 성 때문에 굳이 관심이 갔던 건 아니고, 구소련 연해주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서 소련에서 주류 미술가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북한 미술에 큰 기여를 했으나 북한으로 귀화를 거부한 뒤 입국금지 조치를 당했고 소련에서 미대 교수로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는 개인사가 아무래도 흥미로웠던 것 같다.
미술관 홈피에서 미리 몇작품 맛보기로 본 것도 다 마음에 들었다. 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이 틀림없을 텐데도 작품이 다 천편일률적인 느낌이 아니네!
암튼.. 그러나 봄날 내내 벼르다 전시 마지막날 가까스로 달려가 후르륵 스치듯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마지막날은 하필 연휴 마지막인 5월 8일. ㅠ.ㅠ 내수진작인지 뭔지 고궁과 미술관 입장료도 연휴내내 무료여서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원래도 전시회 마지막날 드글드글 사람 많다는 걸 감안했는데도 와.. 너무 혼잡해서 도슨트 그림설명이 다 취소됐을 정도였다.
사람들 바글거리지.... 웬일인지 사진촬영을 금지하지 않아 다들 그림 감상은 뒤로하고 너도나도 휴대폰 카메라 눌러대는 소리가 철커덕 철커덕.. 지겹게도 시끄러웠다. 물론 나도 얼른 몇장 찍어왔지만..;;; ㅎ
소련의 유명 예술가들과 일반인들의 초상화도 엄청 많고, 사회주의 선전화도 보였지만 특히 좋았던 건 세계 곳곳을 그린 풍경화였다. 유화도 있고, 동판화도 있고...
변월룡, [겨울]
아마도 저 나무는 자작나무가 아닐까 상상했던 <겨울>이란 풍경화가 좋아서 한참 들여다보다 사람들 없을 때 얼른 한장 찍어왔다.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작은 뒷모습이 엄청 정겹다.
아래는 같은 구도의 풍경을 동판화와 유화를 나란히 걸어놓아 더욱인상적이었던 <나홋카의 밤> 풍경.
좌: [나홋카의 밤] 에칭, 1962
우: [저녁의 나홋카 만] 캔버스에 유채 1968
나홋카는 연해주의 도시라는 거 같다. 원래 변월룡이 연해주 고려인 유랑촌에 살다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 사이 난데없이 가족이 강제이주를 당했단다. 그나마 고향이면서도 고향이 사라져버린 상황. 그래서 변월룡은 그곳을 그리워하며 1년에 한번씩은 연해주를 찾았다는 듯.
저 멀리 빛나는 항구도시의 불빛과 하늘에 지나간 두 줄기 비행기 자국, 그리고 언덕 앞에 크게 구불구불 자란 소나무가 이국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낯익다. 소나무 탓인가? 금강산 그림도 있고 북한의 소나무 그림도 많은데, 구불구불한 소나무는 화가가 북한을 다녀온 뒤로 많이 그렸다는 모양이다. 소나무에 향수를 담았다나 뭐라나... 하여간에 그 소나무 풍경과 모내기 풍경 중에 "평안북도 정주"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었다. 우와 우리 할아버지 고향인데.. 그러면서.
4개의 전시실 중 마지막 주제가 <디아스포라의 풍경>이었고, 그가 그린 세계 곳곳과 소련의 풍경들이 모여 있었다. <북한 기행> 전시실에 걸려있던 을밀대와 평양 대동문을 그린 그림들도 좋았지만 딱히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고, 그외 내가 재미있어 한 그림은 바로 이것!
변월룡 [블라디보스토크 해변] 에칭, 1972
동판화가를 고모로 둔 나로서는 에칭이 얼마나 더 섬세하게 회화적인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잘 알기에 에칭 작품의 완성도는 아쉬울 수 있지만, 단순한 삽화 느낌으로도 바람 부는 순간을 포착해낸 것이 어찌나 유쾌하던지. 우산 날아가는 장면까지 ㅎㅎㅎㅎ 재미 있어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빗줄기며 휘청이는 나뭇가지며 그림 구석구석에 다 바람이 몰아친다. 거짓말 좀 보태면 바닷바람의 소금기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음. ㅎㅎㅎ
변월룡을 두고, 잃어버린 천재화가라고 하던가. 아무튼...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도 보길 잘했다 싶었다.
미술관 말고도 궁중문화축전 기간+연휴가 겹쳐 덕수궁 곳곳에 다 사람들이 많았는데 바삐 전각들을 지나다보니 안에 설치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보았던 덕수궁 프로젝트만 못한 느낌... ㅠ.ㅠ 내 편견인지 궁궐이랑 하나도 안 어울리는 듯! 현대미술이 워낙 어려워서 내가 무식한 탓이겠으나.... 째뜬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설치미술 구경하는 사람은 하나도 못봤음. ^^;
이런 공이 덩그러니 대청마루에 놓여있는다든지...
하얀 카펫같은 건 축구경기장의 라인으로 쓰이는 하얀 잔디라고. 근데 이게 뭐? 밤에 조명 비추고 보면 더 그럴듯하려나? +_+
함녕전 돌아나오다가 떡 아래 사진 속 문을 봤을땐 우와 진짜 성의 없다, 하얀 커튼 달아놓고 끝이네? 그랬었는데....
그나마 반전이었던 건, 저게 천이 아니고 에폭시. ^^; 고체로 하늘하늘 천 커튼을 형상화해놓은 거였다. 뭐 그래도 궁궐 전각에 병원 칸막이 같은 흰 커튼이 웬말... 이란 생각은 안변했지만.
덕수궁엔 현대미술관 분관이 있고 전시도 늘 근현대미술만 한다는 건 알지만, 내가 늘 들어가보고싶어서 안달을 내는 궁궐 전각 안에다가 설치미술을 전시할 작정이라면 좀 더 작품선정에 신중했으면 좋겠다. 지난번 덕수궁프로젝트 아주 좋았다니깐요! ㅎㅎ
후배가 대림미술관 전시 초대권이 있다고 해서, 아무 정보도 없이 그냥 가자 가자 날을 잡았다. 봄맞이도 할 겸, 전시를 보고나선 서촌을 거닐다 수성동 계곡과 인왕산 둘레길도 걷자고 했다. 문제는 여럿이 시간을 조율한 날짜가 '일요일'이었다는 것.
유명한 대규모 기획전시도 아니고 뭐 어떻겠어 막연히 짐작했으나 그건 우리의 오산. ㅠ.ㅠ 일요일 오후 대림미술관은 초대권교환부터 입장까지 구비구비 줄을 서서 3, 40분 기다렸다 들어가야했다. 전시장 내부도 당연히 사람들로 바글바글... 앞사람과 간격 유지하며 관람해달라고 진행요원들이 간간이 막 채근하는 분위기였다. 아이고...
째뜬 공짜란 말에 무슨 전시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보러간 거 치고는 몹시 뿌듯한 관람이었다. 5천원 내고(회원할인 받으면 3천원) 보라고 해도 아깝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올해의 '컬러'가 '로즈쿼츠'(Rose Quartz)와 '세레니티'(Serenity)라는 요상한 이름의 분홍색과 하늘색이란 걸 혹시들 아시는지? 해마다 패션계와 디자인계에서 유행할(?) 색깔을 미리 지정하는 건지 어쩐지 암튼 매년 연초가 되면 그해의 색깔이 발표되고, 여러 브랜드와 디자인 업체들은 또 색깔로 열심히 상품을 만들어 선을 보인다. 과연 얼마나 팔리는지는 내 알바가 아니고... ^^
위 사진 맨 위에 적힌 '팬톤'이라는 회사가 바로 해마다 색을 정하는 곳인데, 색과 관련된 디자인과 패션계에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색상을 관장(?? 맞는 말인가 모르겠다;;)한다. 미묘한 톤과 채도와 명도가 다른 색깔에 대해서 서로 설명하고 전달할 때 기준이 되는 셈.
소싯적 나의 첫 회사가 미국 의류회사였던 관계로 사무실에 팬톤 컬러북이 있었고, 뉴욕에서도 디자이너가 샘플을 의뢰한다든지 나염, 염색 색깔을 지시할 때 '페덱스 상자'에 고이고이 담아 '오리지널 컬러'라며 보내오던 우표만한 컬러칩이 어찌나 앙증맞고 예쁜지, 또 색깔 이름은 얼마나 영롱하고 기발한지 ㅋㅋ 심심할 땐 컬러북 넘겨보며 괜히 시간을 때우기도 했었다.
암튼... 그 추억의 팬톤 컬러북 선망은 아직도 종종 수십만원, 백수십만원에 이르는 팬톤 컬러북 시리즈를 '쓸데없이'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키는 바.... 가끔 팬톤 코리아 홈페이지에 가서 괜히 이것저것 펼쳐보는 신세다 내가.
아 근데!
대림 미술관에 갔더니만 뙇~~!! 마침 팬톤 컬러와 연계된 색채와 디자인 전시가 아닌가! 하하하하...
팬톤 컬러칩과 어울리는 일상의 물건들 사진과
미묘하게 다른 사람들의 피부색...
알록달록 무지개처럼 물들인 펠트지와 가죽들(캠퍼 제품에 사용되는!)
그리고 그밖에 영롱한 색감을 자랑하는 인테리어 소품, 의자, 장식품들이 주르륵 전시되어 있었다.
대림미술관의 좋은 점은 사진촬영을 막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티켓이나 인증샷이 있으면 전시를 얼마든지 또 보러가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늘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겠지...
파스텔톤으로 물들인 유리 촛대 작품들은 '이딸라'의 공방에서 나온 거란다.
북유럽풍 인테리어와 식기들이 몇년전부터 대유행이고, 나 역시 '이딸라' 접시들을 갖고 싶어서 호시탐탐 노리기만 할 뿐 차마 비싸서 사지 못하고 있었는데 핀란드 이딸라가 처음 시작은 유리공방이었다는 듯. 내가 무셔워하는 새 모양유리공예품들이 많아서 그쪽은 대충 휙 보고 이 영롱한 파스텔톤의 유리 촛대 구경만 실컷 했다. 하나에 45000원이던가.. 아트샵에서 살수도 있음. 근데 예쁜 색은 없었어!(라고 믿음 ㅋ)
의자들을 벽면에 색깔별로 높이놓이 쌓아놓았던 전시실에서... 그 유명한 임스체어부터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여러 브랜드의 의자들을 바라보며 침 깨나 흘리기도 하고...
3, 4층에 마련된 다채로운 인테리어 중에 하나 갖는다면 어떤 걸로 할까 괜한 고민도 하고...
하여간에 알록달록 눈이 즐거운 전시였다.
마지막 사진은 소파도 너무 귀엽지만... 왼쪽 도자기 소품을 눈여겨 봐야한다는 것. 베르메르의 하녀그림과 어울리는 위치에 도자기 주전자를 놓았다. 건물 창문과도 절묘하게 이어놓은 창틀 디자인도 예쁨.
영화 <동주>를 보고나서 윤동주 문학관에 다녀온 이야기를 함께 써야지... 그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영화를 보러가게 될 것 같지 않다. ㅜ.ㅜ 나중에 기회되면 집에서 찾아보든지...
부암동엘 여러번 돌아다녔지만 윤동주 문학관은 매번 못갔었다. 하필 월요일이었다거나, 다른 약속이 있어서 문학관 해설사로 일하시는 '아는' 선생님의 설명을 나만 못듣고 먼저 간 일도 있었다. 듣자하니 문학관은 '코딱지만' 해도 건축과 전시 형태가 인상적이라고들 했다. 선유도처럼 수도 가압장과 물탱크를 그대로 활용했다면서...
해서 아직은 쌀쌀했지만 햇볕 화창했던 3월 15일에 윤동주문학관을 찾았다. 아는 해설사 선생님 근무일이 맞춰서. 자하문 고개, 창의문(자하문이 바로 이 창의문의 별칭이라는 걸 아시는지! ㅋ) 바로 건너편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 주변엔 '시인의 언덕'이라고 해서 윤동주 시비도 세워놓고,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인왕산 그림도 세워놓고, 성곽길 따라서 청운동 공원과 산책로도 제법 쓸만하게 만들어놓았다. 좋은 계절에 한번씩 둘러보기에 좋음.
얼른 문학관 문 열고 들어갔을 땐 보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다 돌아보고 나와서 난간에 매달려 햇볕을 쪼이고 있으려니 그제야 벽면에 뚫린 자잘한 구멍이 그냥 장식이 아니고 윤동주 시인의 사진을 작품으로 만든 것임을 깨달았다. 가까이선 볼 수 없고, 멀리 떨어져야만 보이는 것은 숲만이 아니었군.
문학관 전시실 내부는 워낙 좁기도 하고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이 한장도 없다. 시인의 육필원고와 각종기록사진들이 올망졸망하게 전시되어 있고, 전시장 한 가운데는 시인의 고향인 길림성 명동촌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나무 우물 몸체가 떡하니 놓여있다.
8, 90년대 윤동주의 묘비 찾기작업이 벌어질 무렵에도 명동촌에 옛날 마을 흔적이 하나도 안남았다던데 대체 어디서 가져온 우물일까 수상쩍었지만 ^^; 왜 그 낡은 우물을 거기 전시했는지 의도는 알겠다. <자화상>에도 등장하는 '우물'은 윤동주 문학관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암튼 글씨체마저도 '아티스트'라고 느껴진 원고와 사진에 대한 설명을 차례차례 듣고 나면 제2전시실로 나가게 된다. 이른 바 '열린 우물'
최대한 벽 끝에 붙어서 폰카에 담아본 광경은 이렇다. 윤동주 문학관 건출을 의뢰받은 건축가가 주변을 허물다 바로 옆에 그대로 남아있던 물탱크를 그대로 살리듯 개조해서 위를 뻥 뚫어 '열린 우물' 느낌으로 만들어놓았단다. 누렇게 낀 물때도 그대로 남아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왼쪽편 사다리 출입구 쪽은 또 다른 작은 우물의 입구 같기도 하고...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또 한 편의 작품 같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ㅋㅋ
또 하나의 물탱크는 제3전시실 '닫힌 우물'로 만들어져, 그곳에서 윤동주의 생애에 관한 10여분짜리 동영상을 보여준다. 으스스한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마치 감옥같은 느낌인데, 천장에 작게 뚫린 구멍이 없었더라면 난 아마 폐소공포증에 뛰쳐나가고 싶었을 것도 같다. 예전에는 그 구멍에 자동문을 달아서 동영상을 상영할 때는 완전히 닫기도 했다는데 고장이 났다나 뭐라나... 일부러 열어뒀다나 암튼.... 독방 감옥 맨 꼭대기 벽에 작게 뚫린 창문 같기도 하고, 시인이 수감되었던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는 어땠을까 떠오르기도 하고...
[아래 사진] 캄캄한 공간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런 느낌이다. 점점이 찍힌 건 사다리 자국.
캄캄한 우물에 갇혀 좁은 구멍으로 올려다본 느낌이 위 사진이라면, 다시 열린 우물 공간으로 나와 올려다본 새파란 하늘과 그 옆으로 드리워진 나뭇가지가 참... 아름다웠다.
광복이후 꾸준히 출간되었던 윤동주의 시집 표지들도 한쪽 벽에 매달려 있는데, 재미있었던 건 윤동주의 다양한사인들만 만 따로 오려 앙증맞게 진열해놓은 것이었다. 영화 <동주>의 포스터 제목 글씨도 알고보니 윤동주의 친필체를 그대로 살린 거였다.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윤동주가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때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도 우리말로 시를 썼던 건 사실이더라도 송몽규처럼 '항일애국투사'는 아니지 않나? 학창시절 국어교사들이 죄다 '저항시'로 가르쳐서 그렇게 외우기는 했었지만, 이제 새삼 읽어보면 그저 시대와 현실을 고민한 문학청년의 깊은 고뇌 정도로 읽힌다. 그래서 더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고...
예고편과 몇컷의 스틸사진을 본 게 다이긴 하지만 째뜬 영화에서 강하늘이 윤동주 역할을 한 건 느낌이 참 잘 맞는 것 같다. 유약하면서도 강단있고 고민도 많은 얼굴? <귀향>과 더불어 무조건 봐주어야하는 영화라는 분위기 덕분에 의외의 선전을 했다니 나 한 사람쯤은 안 봐주어도 되지 않을까 핑계를 삼고 있다. 이기적이게도 마음 불편한 영화는 여간해선 보기가 어렵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