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대림창고

놀잇감 2017. 2. 4. 21:49

대학시절 학교와 가까웠던 성수동은 내게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멀어도 꼭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고집을 부리다 어쩔 수 없이 지각할 것 같은날만 가끔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꼭 내가 뛰어가서 갈아탄 지하철은 순환선인데도 이상하게도 꼭 성수역에서 멈췄다. 지하철 탄 보람도 없이!

그러다 졸업후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말이 미국 의류회사 서울사무소 직원이지, 버젓이 MD 명함을 들고 다녔으되 그냥 본사 디자이너며 검사원들 '따까리'였다. 그래서 샘플 개발이니, 생산 지시니 해서 버젓한 사무실 상담만큼이나 원단공장, 봉제공장, 나염공장을 돌아다녔다. 성수동엔 주요 거래처였던 나염공장이 있어서 한달에도 몇번씩 외근을 나갔던 것 같다. 

주로 벽돌을 쌓아올리거나 철제펜스를 치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흉한 모양새에다 겨울엔 무지 춥고 여름엔 한증막이던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즐비한 골목에서 샘플 패턴을 한아름 안고 홀로 택시에서 내리면 공단 특유의 기름 냄새 같은 것에 섞여 가죽 냄새, 찌개 끓이는 냄새 따위가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먹은 나이 만큼이나 오랜 세월이 흘러서.. ㅠ.ㅠ 성수동은 이제 또 다른 문화가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단다. 가죽으로 유명한 거리엔 수제화 골목이 생겨나기도 하고, 텅빈 공장 건물에 젊은 작가들이 공방을 차리기도 하고, 갤러리를 열기도 하고... 커피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인들이 모여드니 당연히 카페와 음식점도 속속 생겨났대고.

해서 친구들과 이름하여 '성수동 프로젝트' 날을 잡았다. 말이 거창해 프로젝트지 그냥 서울 경기 곳곳에 흩어져 사는 대학 친구들이 성수동에 모여 '힙'하다는 밥집, 찻집, 갤러리, 공방 따위를 구경하자는 거였다. 근데 또 하필 그날은 영하 9도였던가... 칼바람에 귓불이 꽁꽁 얼어 동상입기 직전인 날씨였고, 서로 잘 알아보고 왔겠거니 기대하는 바람에 괜히 헤매다가 제대로 공방과 갤러리 순례는 하지 못했다.

그나마 추위 핑계로 오래 머물렀던 대림창고를 다들 인상적으로 여겨주어 다행.​

​대림창고 외관은 이렇게 생겼다. 벽에 매달려 있던 옛날 간판을 떼지 않고 그대로 둔데다 '컬럼'이라고 적힌 금속제 새 간판은 눈에 잘 안띄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냥 휙 지나치기 쉽다. 친구들도 문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뭐 잘못 알고 온 거 아니냐고 나를 의심했을 정도다. ^^;;


​꽤 높은 나무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면 이런 내부가 나오고

넓은 창고형 공간이 툭 트여있는데... 눈앞에 키네틱아트(?) 작품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 뭔가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

 

​넓은 공간은 다시 가운데 벽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 좀 더 어둠컴컴한 카페와 안쪽에 좀 더 환한 느낌의 레스토랑이 있다. 입구 왼쪽 갤러리 위엔 다락방처럼 생긴 2층도 있는 듯.​

사진은 비슷하게 나왔는데 오른쪽 카페가 훨씬 어둡다. 카페 오른쪽 카운터에서 모든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은 다음 죄다 셀프로 받아다 먹어야하고 나중에 빈그릇도 각자 반납해야 한다. 가격대도 싸지 않은데 이왕이면 서빙도 좀 해주지... 모델처럼 생신 청년들이 돌아다니며 테이블 정리도 하고 그러던데 좀 더 인건비에 투자를 하시지... 심지어 주말엔 입장료도 만원 받는다고 함!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뜻이려나?

​나중에 찾아보니 대림창고 운영자도 조각가였던가... 예술가이고, 곳곳에 예술작품이 소품처럼 전시되어 있다. 주말 입장료도 받는 만큼 정기적으로 작품이 바뀐다는 것 같다. 암튼 추운 겨울에 찾아간 우리는 엄청나게 튼튼해보이고 화력도 좋은 무쇠난로에 홀딱 반해가지고, 저기다 고구마도 구워팔면 좋겠다... 그런 소박한 상상을 했다. ㅋ 여기서 파는 서양 음식들과 안 어울리려나?


아침도 굶었던 터라 배고파배고파 노래를 부르면서 점심 메뉴를 골라 시켰다. 대체로 간도 슴슴하고 원재료에 충실한 싱그러운 맛? 버섯이 잔뜩 올라 있던 피자도 길쭉하게 생겨서 괜히 정겹고 담백한 맛이라 짠 음식 질색하는 친구들 모두 흡족해했다. 파스타도 괜찮다는 평을 받았는데 만오천원 쯤 하는 가격이면 당연히 맛있어야 하지 않나? ;-P 스테이크 종류는 디너 메뉴라며 점심땐 아예 팔지도 않던데 4만원 가까이 했던 듯... 

왼쪽은 샐러드까지 4가지를 시켜서 합이 7만 8천원 나왔던 그날의 오찬 사진이다. 4명이 먹기에 적당했는데 그 중 1명은 워낙 소식하는 사람이라 나 같은 대식가만 모이면 모자랄 지도 모르겠다. ^^; 암튼 스테이크 샐러드는 확실히 맛있었음! 

오른쪽 사진은 옆 테이블에서 시켜놓고 먹길래 모양도 하도 예쁘고 맛도 궁금하여 한참 수다로 배를 꺼뜨린 뒤에 다시 주문했던 디저트 메뉴 '화가의 낮잠'이다. ㅎㅎㅎ 동그란 그릇엔 초콜릿 무스가 담겨 있고 몽키 바나나를 절반 갈라 구운 듯 그 위에 설탕 시럽을 뿌려 굳혔다. 모종삽에 든 흙처럼 생긴 건 과자와 초콜릿 부스러기.. 구운 마시멜로 두 덩어리도 뒹굴고 있는데, 암튼 맛보다도 유화 캔버스를 활용한 플레이팅이 참신하고 너무 예쁘다며 반색했더니... 언젠가 무슨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써먹었던 콘셉트라는 것 같다. 째뜬 뭐 눈요기로 훌륭하고 행복했으니 되었다. 커피는 맛있었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호나 브룩클린에 온 것 같아!라며 들떠서 꽤나 즐겁게 수다를 이어갔던 것 같다. 나중에 가죽 거리를 헤매고 헤매다 가오픈했다는 작은 소품숍을 만나서 그나마 한 건 했다고 안심하고는 얼른 또 차 마시러 다른 카페로 들어갔었다.

동네 유명해지고 사람들 몰려들면 결국 또 분위기 이상해지면서 거대자본과 대기업이 밀려들어와 제 모습을 잃는 일이 계속 반복되는 걸 본다. 홍대도 그랬고 합정, 상수, 연남동, 가로수길, 북촌, 서촌, 이태원, 망원동까지... 과연 성수동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블로그에 이렇게 자랑과 허세 쩌는 포스팅 하면 나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에 한몫 가담하는 것임을 알면서 째뜬 또 지난 일기랍시고 세태에 편승.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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