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에 여행을 간다면 당연히 눈 엄청 쌓인 겨울에 가게 되리라, 눈밭에서 킬킬대며 오겡끼데스까.. 한판 외쳐주리라 상상했지만.. 인생은 역시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11월로 친구의 휴가가 잡히고선 제일 먼저 제주 여행을 계획했고, 그 다음은 북해도 3박4일 패키지를 눈빠지게 뒤졌다. 친구 일행의 국내일주 패키지 여행이 월요일에 부산에서 끝나는 일정이라 무조건 부산 출발 상품을 찾아야했는데... 당연히 인천이나 김포 출발 상품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째뜬 모객 안돼서 취소될까봐 조마조마 애태우다 결국 부산에서 삿포로로 출발!
2시간쯤 날아가 내린 삿포로 공항에서 처음 마주한 유리창 밖 북해도 풍경
2시 비행기로 부산을 떠났는데 2시간 만에 삿포로 치토세 공항에 도착해보니 벌써 어둑어둑... 아 놔;; 11월의 북해도는 5시면 해가 진단다. 게다가 날씨도 꾸물꾸물...
몇미터나 쌓인 눈구경은커녕, 처음 이틀은 우산 펼쳐들고 차가운 빗속을 쏘다녀야했다. 뿌연 구름과 빗속에 내려다본 삿포로시내 전경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고, 곧장 오타루로 이동.
놀이공원처럼 꾸며놓은 무슨 과자공장이다. 우린 대체로 시큰둥 본체만체했으나.. 중국관광객들은 열광하며 쇼핑열을 올렸다
오타루 운하 주변에 시멘트벽돌로 지은 이런 건물들이 다 공방이고 기념품 가게다. 100년 넘은 건물이라 나름 문화재라는듯.. 유리공예가 유명하다는데 수제품이다보니 가격이 당연히 사악하고 ^^; 내눈엔 별로 이쁜 줄도 모르겠더라.차라리 건물 뒤쪽의 좁은 골목이 더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너무 일러서.. 문연데가 별로 없었다. 오전이라 이제 겨우 점심장사 준비중... 운하를 따라서 바다까지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후쿠오카 갔을 때도 그랬지만 '운하'에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안된다. 옛날 배가 워낙 작았으려니... ㅋㅋ
그러고는 오타루 오르골 박물관 차례.
오른쪽 사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드넓은 실내가 나온다. 건물 앞에 있는 시계는 매시간마다(매 30분마다던가) 뿌뿌 수증기를 뿜으며 울어댄다. 이 주변 골목이 죄다 기념품가게 거리. 쇼핑하라고 자유시간을 꽤 많이 줬는데(1시간 반이었던가), 우린 얼른 오르골 한개씩 고르고는 커피숍에 들어가서 죽때리다 ^^; 시간 맞춰 나왔다.
비가 와서 더더욱 해가 일찍 지기도 했지만, 가이드는 지가 빨랑 쉬고 싶은 건지 빡시게 일정을 소화하곤 매일같이 4시쯤이면 얼른얼른 온천호텔에 들여보냈다. 식사하기 전에 온천 한판 하라나... 어딜 가나 설명은 제대로 안하고 (차라리 가만히 입이나 다물고 계시든지!) 계속 본인 개인사만 주절저줄 풀어놓는 가이드가 엄청 미워서, 돌아오면 여행사 홈페이지에 바가지로 욕을 써주마 하며 휴대폰 메모장에 빼곡하게 적어왔었는데... 다 부질없다 싶어서 관뒀다. ^^;
밤새 내린 비는 다행히 사흘째아침부터 쨍하니 갰고, 도야호수를 보러 산을 넘어가다 드디어 설경을 만났다. 멀리 만년설 쌓인 산구경만 해도 좋겠다 생각했다가 눈구경을 하다니, 그나마 운이 좋았다.
도야호수에서 탄 '성 모양'의 유람선은.. 으음.. 안습이라고할 밖에...
다만 풍경사진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와 찍힌 갈매기 모습이 좀 신기했다. 물론.. 언니들이 일본 새우깡으로 한참 배를 불린 다음이긴 하지만..
이날의 마지막 일정은 시라오이에 있는 아이누족 민속촌과 유황냄새 풀풀나는 화산 아래 조잔케이 지옥(?)계곡. 후대에 만들어놓은 민속촌은 세계 어딜 가나 그 박제된 느낌이 좀 유치하고 서글프고 짠한 구석이 있다. 그나마 요즘 용인 민속촌은 기발한 알바생 연기자들 때문에 인기가 높아졌다는데... 전통복장으로 옛모습 재현하며 돈벌이를 한다는 건 유의미한 일이라도 좀 처연하다(고 나는 생각).
곰을 신으로 숭상한다는데 마을 입구에 곰을 가둬놓은 우리가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든 걸지도...
마지막날 다시 삿포로 시내구경.
옛날 도청건물이라나 뭐라나... 빨간 벽돌건물 주변 공원에서 다시 가을을 만끽했다.
마침.. 무슨 일인지 기모노 입고 단체로 촬영나오신 아주머니(?)들을 몰래몰래 구경하다 도촬에 성공.. (죄송합니다;;) 여기가 일본이구나 하는 걸 가장 실감했던 순간이랄까.. ㅋㅋ
아마도 오오도리 공원이라고 했던가.. 은행나무가 참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북해도엘 간건지.. 그냥 일본의 어느 온천 유람을 다닌건지 별로 다른 느낌이 없었다. ㅠ.ㅠ 그나마 눈구경을 한 걸로 위안을 삼으려해도... 속상한 건 마찬가지. 째뜬 원래 LA에서도 사우나와 찜질방을 즐긴다는 친구는 지난번에 이어 요번 일본여행에서 날마다 즐긴 온천이 제일 좋았다는 것 같고... 사우나도 싫고 온천은 난생처음 경험한다는 세 언니들도 온천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했다. 첫날 빼고 두밤은 계속 호텔도 다다미방으로 배정받아서 저녁먹으러 다녀온 사이 이불 깔아주는 우렁각시 서비스도 좋아들 했다.
마지막으로 재미난 이야기 하나. ^^; 북해도 여행일행은 6명이었는데, 친구네 세자매와 나, 그리고 큰언니의 친구가 딸을 동반했다(올케가 빠진 대신에;;). 부산 출발이다보니 대부분 그 지역주민일 수밖에 없고 다들 구수한 사투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인원수로 보나 구성원으로 보나 우리만 좀 튀는 듯했다. 버스 1대 일행이 모두 25명이었는데 (혼자 온 젊은 청년도 있었음), 다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엄청 궁금해하셨던 모양이다.
이전에도 몇몇분이 슬쩍 물어서 대충 이야기를 했다는데... (3자매는 미국 LA에서 왔구요, 첫째랑 셋째가 친구들 한명씩 데려온 거예요. 어린 아가씨는 친구 딸이구요...)
문제는 과잉친절인지 쓸데없는 오지랖인지 가이드가 매일밤마다 호텔 방배정표를 복사해서 열쇠와 함께 나눠줬다는 것! 거기엔 여행자들의 이름이 죄다 적혀 있었다!(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는 가이드의 그 행위도 진짜 마음에 안들었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건 도대체 누구누구가 자매인가 하는 것 때문이이었다. 나의 친구와 둘째언니는 종종 쌍둥이로 오인될 정도로 닮았으니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문제는 '성' 때문이었다.
6명 여자들이 성이 다 다른 것! ^^ 아니 자매라면서 왜?? 이OO, 권OO, 정OO, 박OOO, 조OO, ㅂOO. 성이 같은 여자들이 아무도 없어! 아니 그렇다면 죄다 아버지가 다른 동복자매??? ㅋㅋㅋ 다들 그런 생각들을 했는지...
드디어 마지막날 비행기를 타기 직전 들른 면세점 쇼핑 때, 살 것 없어 빈둥거리는 나의 친구에게 일행중 가장 연장자이신 70대 할아버지가 물어봤단다. 자매라면서... 대체 누가 언니동생인가? 노상 혼자 다니는 사람(모험심파 작은 언니!)은 왜? 친구는 열심히 설명을 했드렸다는데,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듣던 할아버지가 한 마디... 아 근데 왜 성이 다 다른가...
크하하하... 사람들이 물어볼 때마다 세자매가 누군지 나름 설명을 했다는데 (아 진짜 우리나라 사람들 어디서든 신상 파악하는 병좀 고쳤으면..) 도무지 입력이 안됐던 이유가 각기 다른 '성' 때문이었다. 미국 아줌마들은 결혼하면 다 남편 성으로 바꾼다고.. 결혼하기 전 성은 '조'씨라고 (큰언니만 유지하고 있음 ㅋㅋ) 설명함으로써 미스터리를 풀어드렸으나, 할아버지는 딱히 납득한 표정이 아니더란다.
아마 다른 일행들은 끝까지 어머니가 3혼을 해서 각기 성 다른 딸을 셋 낳아 기른 집에서 친구들 데리고 여행온 줄 알았을 듯. ^___^
경복궁 옆 고궁박물관에서 2월 8일까지 <류큐 왕국의 보물> 특별전을 하고 있는데 관련 공연이며 교육이 꽤 알차다. 류큐 왕국이란 ^^; 옛날에 '유구국'이라고 해서 조선, 중국과 교류한 역사도 꽤 길고 일본과는 별개의 나라였던, 현재 오키나와 섬에 존재했던 왕국을 말한다. 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 역사박물관, 고궁박물관 중에서 안내책자와 전시 도록, 팸플릿의 질도 항상 고궁박물관이 최고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는데, 가만 보면 기획 전시내용도 거의 늘 알차고 훌륭하다. 안내책자나 브로셔의 글귀나 오타만 봐도 보유인력의 자질을 알수있는 법이 아닌가! 게다가 매번 공짜! (프란치스코 교황 내한 기념으로 했던 <천국의 문> 전시는 예외로 유료였다. 수녀님들을 비롯해 천주교신자들이 엄청 구경오던데 워낙 비싸기도 했지만 나는 계속 오가면서도 안봤다. 혹시 기회되면 나중에 이탈리아에 가서 직접 보고 싶다규~ -_-;) 고궁박물관 조직 자체가 탄탄한 건지, 뛰어난 학예사와 직원들을 잘 뽑은건지 갈 때마다 감탄하는 경우가 많다.
암튼 요번에 본 공연은 오키나와 문화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류큐 왕국의 보물> 전시와 연계해 류큐 왕국의 고전무용과 노래를 소개하는 자리. 이름하여 <류큐의 바람>이다. 고궁박물관 별관에서 17일과 18일 양일간 3회 공연을 하던데(부산에서도 공연 1번 하더라마는;;), 마침 주말에 경복궁에 갈 일이 있어서 맘먹고 구경했다. 오키나와는 내가 몇년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여행지다. 갇혀있는 물고기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세계 최고라는 추라우미 수족관을 꼭 보고 싶어서리... (그렇게 들먹들먹하고 있는데 작년에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사랑이네가 구경가질 않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이랑 공효진이 코끼리 바위엘 막 찾아가질 않나;; TV에서 펌프질을 막 하더군)
이렇게 선망을 갖고 있으면 결국에는 조만간 저지르지 싶어서, 미리 공부(?)도 할 겸 연말에 경복궁 봉사 나간 날 짬내서 류큐 왕국 전시회를 둘러보았고 공연이며 특별교육 프로그램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ㅎㅎ <류큐의 바람: 오키나와의 춤과 노래>이라는 제목으로 여러가지 고전무용과 창작무용, 노래까지 보여준 공연은 생각보다 좋았다. 무료인 대신 선착순 입장이라고 해서 30분이나 일찍 갔는데도 앞자리는 죄다 관계자석이란 종이 붙여놓은 게 불만이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직원들이 어린 아이들부터 챙겨서 차곡차곡 앞쪽 내빈석 빈자리로 옮겨주고 일일이 동선을 안내해주고 그랬다. 대체로 공무원들은 좀 싸가지가 없고 고자세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편인데, (계약직인지 아닌지 몰라도 다른 국립 및 시립 박물관 가봐도 직원들이 야박하게 구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 선입견이 가끔 고궁박물관에 가서 깨진다. 아주 좋은 예. ㅎㅎ
1시간 반에 달하는 공연은 앞부분의 궁중무용 순서때 하도 정적이고 조용해서 좀 졸리려고 했으나(한국이나 일본이나 궁중무용과 음악은 느릿느릿 움직임도 정적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좋게 말하면 우아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맥빠진다. ㅎㅎ 왕앞에서는 암살 위험 때문에 함부로 역동적인 동작이 담긴 춤을 출 수 없다는 듯;;) 후반부에선 활기찬 창작무용과 노동요 등이 있어 확실히 시끌시끌 신명나고 유머가 넘쳤다. 아싸~ 아싸~ 하는 추임새가 일본에서 온 것임을 새삼 확인. ㅋㅋ
아래 사진은 내가 찍은 건 아니고 일행 중 한분이 일찌감치 박물관 화장실 갔다가 마침 출연진을 만났다기에 전달받았다. 색감 화려한 의상이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예쁜 옷도 많고... 전통무용을 어느 가문에서 3대째 전수받아 널리 알리고 있다는 모양이다.
일본에 많이 가본 건 아니지만, 료칸엘 가봐도 기념품 쇼핑센터에를 가봐도 쇼핑백이나 세탁물용 비닐팩 하나를 만들어도 그냥 허투루 하지 않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는다. 요번에도 오키나와 관광 지원을 위함인지 오키나와 안내책자랑 공연 브로셔를 예쁜 비닐봉투에 담아 주었는데, 안에 든 설문지를 작성하면 비닐파일도 나눠준다고 했다. 아쒸, 볼펜 없는데 생각한 순간 설문지에 저 앙증맞은 필기구가 클립처럼 꽂혀 있었다. (비닐종이 위에 놓인 검정색 물체;;)
공연 브로셔는 꼼꼼히 읽어보고 재활용 폐지로 내놓았지만, 오키나와 안내책자는 (관광지 안내며 섬 전체 지도까지 들었다!) 비닐파일에 넣어 잘 보관해 두었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오키나와 갈 때 가져가야쥐! 문득 우리나라 관광홍보도 과연 이렇게 꼼꼼하고 아기자기하게, 사람들 마음을 확 끌게 잘 하고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행여나...
셋쨋날은 호텔서 아침먹고 나서 오후까지 그야말로 자유로이 돌아다니다 공항가기 전에 일행과 만나면 끝. 일본 호텔의 뷔페식 아침밥은 맛이 없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나는 열심히 미니 오븐에 빵을 데워 테이블로 갔더니 친구는 미소시루에 밥, 시사모 구이와 명란젓을 듬뿍 담아와 희색이 만면했다. LA에서 명란젓 얼마나 비싼 줄 아냐고, 시뻘겋고 짜디짠 것도 비싸서 못 사먹는다고, 이렇게 말갛게 신선한 명란젓 처음 본다고, 넘 맛있다고 흥분일색이었다. 나도 먹어보라고 권했으나 다시 일어나 밥푸고 자시고 하기 귀찮아.... 그러고 보니 이날 아침밥은 사진도 안남겼다. 원래도 먹거리 보면 숟가락질부터 하지, 사진부터 찍는 인간이 아니라 셋쨋날 쯤 되니 원래 하던대로 돌아간 듯.
전날밤부터 이날 하루 뭘하고 놀 것인가 지도와 안내책자를 보며 아침까지도 고민이 끝나지 않았던 이유는 베르메르 때문
이었다. ㅜ,.ㅠ
첫날 다자이후시에 갔을 때 이미 포스터를 발견하고 희희낙락 자유일정 때 보러가야겠노라고 결심했으나 가이드에게 물으니 후쿠오카에서 다시 가려면 거리가 만만치 않다고 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찾아가도 뭣하고 택시로 가면 2, 3만엔은 나올 거라고...(택시비가 3,40만원이란 말이냐!)
왔다갔다 왕복시간도 정확히 알수 없는데다 기껏 박물관에 찾아갔다 해도 허겁지겁 그림을 보고 나오려면 내내 불안에 떨어야할 것 같았다. 나 혼자였다면 몰라도 그림에 별 관심없는 친구를 이끌고 모험을 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해서 결국 포기.
그런 나를 놀리듯 시내 곳곳엔 베르메르 그림 포스터가 저렇게 떡하니 붙어있었다. 흥! 나중에 네덜란드로 보러가면 되지 생각했는데, 포스터 영문사이트 주소를 보니 베를린 어쩌고 되어 있다. 저 그림은 베를린 박물관에 있나? +_+ 암튼... 아쉬운 베르메르와의 인연.
자유일정에서 여행사가 추천하는 장소는 대부분 캐널시티 쇼핑몰과 도심 백화점 주변, 하카타 역 쇼핑몰 따위였으나 나와 친구는 둘 다 쇼핑을 별로 안좋아하는 인종. 쇼핑이라면 이미 전날 밤 드넓은 무지 매장을 실컷 구경한 걸로 족했다. (아직도 무지 매장에서 본 검정색 통짜 원피스가 눈에 아른아른.. 그러나 칠부소매의 겨울 원피스를 내가 언제 어디에서 입으리! 안 사길 잘했지) 게다가 이미 마냥 걸어다니는 데는 질력이 나기도 한 상태.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유람선이나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휘휘 구경을 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이었다. 허나 유람선은 야경 위주라 낮엔 탈 수도 없었는데다 시간도 몇번 되지 않았고 (어쩐지 전날 강에 배가 하나도 안 돌아다니더라;;) 시티투어도 하루에 딱 네번. 지정 정류장 아무데서나 타고 내릴 수는 있지만 표를 사려면 시청 로비까지 가야했다.
지도를 보니 하핫, 우리가 전날 벤치에 앉아있던 공원이 바로 시청 뒤에 있는 텐진 중앙공원이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게야...
(이러면서 전날 사진 재활용. 공원 잔디에서 놀이기구 같은 걸로 연습하던 남녀 학생이 인상적이었다)
목표는 11시에 출발하여 항구와 해변, 도시 외곽을 도는 파란색 노선의 시티투어 버스를 타는 것이었는데 아뿔싸, 내 앞에서 머뭇거리며 이것저것 묻던 일본 아주머니가 단체 가이드였던 듯, 남은 표를 몽땅 사가버렸다. 로비에 먼저 도착한 건 우리였는데! 잠깐 안내판 보며 남은 표 열두장이라고 희희낙락 확인하는 사이에 흑... ㅠ.ㅠ 매표원이 안내판 11시 시간표에 매진 팻말을 붙여놓았다. 결국 우린 12시에 출발하는 빨간색 도심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또 다시 두 시간이나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의미. 에효. 여러 설문과 인증 끝에 한번에 15분간만(!)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시청 건물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다 너무도 날씨 화창한 밖으로 나섰다.
요즘 한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박스 모양이 대세인 일반 자동차들과 대단히 클래식한 느낌의 택시도 한 장 찍고...
(정말로 운전수가 차문 자동으로 열고 닫아주는지, 일본 택시 한번 타보고 싶어서 별로 멀지 않은 나중 집결지까지 타고 가자고 했더니 친구가 결사반대했다. 왜 쓸데없는 데 돈을 쓰냐고, 멀지도 않은데... 그치만 얼마나 비싼가 한번 타보고 싶긴 하던데;; ㅋ)
도심이라 주변에 백화점들이 대거 몰려있다는 건 알지만 굳이 들어가보고 싶진 않았으나 걷다보니 다이마루 백화점 앞이었다.
역시나 깔끔한 건물 앞에서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만든 의미 모를 곰돌이도 구경하고, 귀여운 하마 모자(혹은 부녀?)상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큐슈 날씨는 제주도와 비슷하려니 생각했었는데 확실히 어찌나 덥고 햇살이 뜨거운지 외투는 계속 벗어서 들고다녀야 했다.
이날 돌아다니며 제일 예뻤던 꽃집 앞 화분들.
공연히 억울하게 시간을 허비하다 드디어 시티투어 버스에 오를 시간. 지정석인데 그나마 일찍 표를 끊은 터라 앞에서 둘쨋줄, 자리는 좋았다. 햇살이 뜨거워 그렇지 ^^;
그래도 관광용이니 가끔씩 영어 안내라도 해줄 줄 알았으나 그건 헛된 기대였다. 계속 일본말로만 뭐라뭐라 방송이 나왔으니, 우린 그저 지도를 보며 위치를 짐작하는 수밖에. 처음에 항구쪽 고가도로를 잠깐 달려 바다를 뵈준 다음엔 그나마 대부분 도심을 도는 거라 돌아다녀 본 곳이 많았다. ㅋ
겨우 50분 보는데 2천엔이나 하고, 배차간격이 너무 멀어 다시 탈 수도 없으니(그날 하루는 비슷한 노선의 다른 버스도 계속 이용할 수 있다는듯;;) 그다지 추천할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항구와 해변쪽을 도는 노선을 탔더라면 볼 게 더 많았을까? 그야 모를 일.
어쨌거나 우리와는 달리 좌측통행을 하는 일본에서 길쭉한 버스가 좌회전을 할 때마다 왼쪽 끝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야트막한 가로수에 부딪칠 것 같다고 기겁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음.
2층 버스에 앉아 선글라스와 외투로 햇빛을 가리다가 가끔씩 사진기를 들어올리고 난사한 사진 중에 그나마 두 장. ^^;
저것은 분명 야자수렸다? 제주와 비슷한 위도임이 분명하다고 나 혼자 우겼음. 그리고 가끔씩 도로 모퉁이에 서 있는 저 동그란 시계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는 시계탑에도 이제 다 디지털 시계로 숫자만 나오지 않던가?
암튼 후쿠오카 도심에서 내게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물은 바로 이것.
용적률을 엄청 포기하고 옥상을 계단식으로 한 뒤 나무와 화초를 심었다. 나는 그냥 휴식공간이려니 했는데 버스 타고 돌다보니 저 옥상 중앙쯤에 난 계단으로 걸어내려오는 사람 발견!
경사면 쪽에서 보면 이렇게 생긴 건물이다. 버스투어 하며 지나다 찍은 사진이라 좀 멀다...
무슨 건물인지 나중에 지도 찾아봐야지 작정했었는데;; 아 글쎄 챙겨왔던 지도를 벌써 내다버렸지 뭔가.
사무실 건물이라면 공간을 거의 절반이나 포기하고 저렇게 꾸몄다는 건데,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첨부: 저 건물 이름은 아크로스 후쿠오카. 후쿠오카현 국제회관이 자리잡은 13층 건물이란다. 저 경사면은 텐진 중앙공원과 마주하고 있으며, 항시 개방되어 있는 계단 산책로와 에코 빌딩으로 유명하다고...)
다시 시청앞으로 돌아가 빨간 2층버스에서 내려 해야할 일은 점심을 챙겨먹는 것. 일본에 왔으니 초밥을 먹을 것인가, 일본 카레를 먹을 것인가... 눈에 띄는 음식점마다 기웃거리다, 사람 많은 곳엘 가야 맛있다는 지론을 철썩같이 믿고 찾아다녀보았으나 도심에서 직장인들이 1시 넘어서까지 우글우글 밥을 먹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ㅋㅋㅋ
그러다 발견한 곳이 이 작은 우동집. 허름하고 작은데 뭔가 포스가 느껴진다고 자위하며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영어메뉴도 있음! 메뉴판과 그릇에서 '원조' 글씨를 발견하고 몹시 뿌듯해하며 메뉴 맨 위에 있는 우동을 시켰다. 좀 짜긴 했어도 퍽 맛있었음. 그러나 다시한번 말하지만 왜 이리도 양이 적은 것이냐! 눈치를 보니 다른 남자들은 거의 다 사리를 덤으로 시켜먹더군. 그럼 그렇지. 이것만 먹고 어찌 한 끼라고 할 수 있으리.
(물병만 크게 나왔다고 친구한테 잔소리 들은 카운터 정면 사진. 우동은 아직 한 젓가락도 안 먹은 상태. 입 큰 사람은 두 젓가락으로 끝낼 수도 있겠다. ㅋ)
이왕이면 다른 다리로 강을 건너겠다며 좀 멀리 돌아 다시 캐널시티 쪽으로 돌아오다 다리 위에서 찍은 강의 합류지점. 별로 안 넓은데 사진엔 퍽이나 넓게 나왔다. 이러니 한강은 찍어놓으면 바다처럼 보일지도;; 그러고 보니 가운데가 뻥 뚤린 캐널시티 쇼핑몰 건물은 한장도 안 찍어왔군.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각 시간대별로 있다는 음악분수도 꽤나 기대했다가 어찌나 미미하여 놀랐던지. ㅋㅋㅋ 그에 비하면 우리 동네 개천변에 있는 분수쇼가 더 장관이더라.
아래는 항구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인데, 처음 여행 계획할 때 염두에 두었던 카멜리아호가 부두에 정박해 있어서 괜히 반가웠다. 부산에서 그 배타고 타고 9시간이나 와야했더라면 배안에서 아마 몸서리를 쳤을 듯. 전망대 올라가는 거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유리창 격자무늬가 선명하게 나온 이 사진 괜스레 마음에 든다.
이후 시간 때우기는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지친 다리를 쉬러 카페에 들어가서 계속 개겼던가... 일본 슈크림은 달지 않다며 그래도 한번 먹어보자고 해서 슈크림 빵도 같이 사먹었던 건 기억 나고, 사흘만에 부쩍 늘어난 뱃살에 한숨 지었던 것도 생각난다. 많이 걸어다니면 뭐하나, 고열량 간식을 좀 많이 먹었어야지.. 밤마다 맥주에... ㅎㅎㅎ
애당초 2박3일은 너무 짧지 않겠느냐고 나흘짜리 여행상품을 알아보라던 친구에게 아쉬우냐고 물었더니 이미 일주일 이상 놀러다닌 느낌이라 흡족하다고 했으나,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나는 마냥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3박4일짜리 홋카이도 여행을 갈 걸 그랬나... -_-;
암튼 티웨이 항공은 처음 타보는 경험이었는데 퍽 흡족했다. 그래서 다들 저가항공사를 이용하는 것이겠지. 갈 때는 오렌지주스에 크라상 빵 하나 달랑 주기에 쳇, 외면하다 주스만 마셨는데 돌아올 때는 참치주먹밥이 나왔다. 배 안 고파서 먹을까 말까 망설이는 내게 친구가 외쳤다. 맛있어! 까불지 말고 먹어둬. (집에 와서 신라면 끓여먹을 생각에 좀 버텨보다 결국 나도
다 먹었는데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는지... 공항버스를 간발의 차로 놓치는 바람에 집에 9시도 훨씬 넘어 도착했다. ㅠ.ㅠ 물론 그 밤중에도 라면 두개 끓여 김치 한 포기와 함께 폭풍흡입을 안 한 건 아니지만서도).
여행 다녀오면 그 어느 때보다 튼실해진다는 진리는 이번에도 입증되었다. 세끼 다 찾아먹고 사이사이 간식까지 챙겨먹는 습관에 길들여진 위는 거의 한달이 다 된 요즘에야 원래로 돌아왔다. 여행자로 산다는 건 참... 심신이 즐거운 일이다.
새벽에 한번 더 온천욕을 즐길 사람을 위해 6시반부터 울린 모닝콜을 무시하고 우린 8시까지 내쳐 잤던 것 같다. 8시반에 아침 먹고 10시까지 모이라고 했던가... 암튼 아침형 인간인 친구 덕분에 상당히 여유롭게 아침 먹기 전 주변을 돌아볼 시간도 있었다.
이곳이 우리가 묵은 하나미즈키 료칸. 방 열쇠 나눠줄 때 보니깐 3층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앞에서 보니 2층이다. 뒤와 옆쪽으로 애매하게 건물이 더 연장되어 있는 듯.
일행 중에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온 모녀커플이 있었는데,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어르신에겐 좀 고역이었겠으나 젊은 사람들은 이 정도 규모의 저렴한 료칸에 묵어도 정말 아무 문제 없겠다. 늙은이처럼 난 왜 점점 온천 료칸이 좋아지는 걸까나 ㅠ.ㅠ
이른 아침이라 한산한 골목엔 이따금씩 옛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지나다녔다. 남학생들은 진짜로 7, 80년대 우리가 입었던 깜장교복이고 여학생들은 세일러복.
대체 왜 죄다 '지옥'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한 온천 사진을 찍고 다니다 여학생과 마주쳤는데, 내가 자기들 사진을 찍는 줄 알았는지(사진기 방향으로 볼 때 절대로 카메라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비켜있는 게 아니었음;;) 그 자리에서 배시시 웃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뒤늦게라도 내가 사진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본 뒤 담아왔다. 나 같으면 얼른 도망가고 말았을 텐데, 착하기도 하여라.
한국인 관광객이 엄청 오는 곳인 듯.. 글씨체는 좀 이상할망정 표지판마다 한글이 있다. 이런 거 찍어오는 거 웃기다면서도 결국 찍어오고야 말았다는;;; 일본은 어디나 기복신앙의 공간이 정말 많은 듯. 온천 골목에도 떡하니 이런 집이 있었다. 절 같지도 않고 규모도 엄청 작던데;;; <연애성취> 글자만은 대번에 알아본 나는 이웃주민 지다니를 떠올렸다. 종이 하나 매다는 데 100엔(대략 천오백원)이라는데 저걸 매달아 걸면 정말 연애가 성취될까? ^^;;
료칸에서 먹은 이날의 아침식사. 먹을 거 별로 없는 호텔식 뷔페가 아니라서 좋았다. 저 뚜껑을 열면 달걀 프라이와 베이컨 한 조각이 지글지글 익고 있고, 하얀 스티로폼 통엔 낫또가 들었다. 청국장은 좋아하여도 내 낫또는 못 먹는 사람이건만, 친구가 화장실 성공을 기원하며 먹어야한다고 해서 꾸역꾸역 삼켰다. 김이 딱딱하고 창호지 같긴 했지만 그럭저럭 가벼운 조찬으로 딱이었다. 이래야 부담없이 간식을 사먹을 수 있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아침을 먹고 나서 가방을 싸가지고 내려온 우리는 근처 가마토 지옥을 둘러봤다. 분출되는 성분에 따라서 같은 집인데도 군데군데 온천 색깔이 막 다르고 온도가 800도라나 어쩧다나... 정말 지옥이 그렇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부글부글 끓는 온천수 나오는 샘을 한바퀴 돌아 구경한 뒤 온천 수증기로 찐 달걀 사먹고 족욕 한판하고 나왔다. 그런 온천 지옥 자산 가치가 엄청나다는데(몇백억이라고;;), 귀엽게 생긴 사장 아들이 담뱃불 붙여서 재 떨어뜨려가며 수증기 많이 나오는 모습 시연하고 있는 걸 보며, 우리가 중얼거렸다. 한국 같았으면 부자 사장 아들이 저런 시답잖은 안내 하고 있겠냐. 일본이니까 가능한 거지....
두 사진이 같은 집이라는 것이 신기...
다음은 벳부의 마지막 코스 유노하나. 유황재배지라는데 아마 한 10분쯤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 ㅋㅋㅋ
움집 같은데서 수분과 햇빛을 막아 유황결정을 오래오래 키우는 걸 '재배'라고 표현한 듯. 움막이 선사시대 움집같이 생긴 건 약간 관심을 끌었으나 꼬리꼬리한 유황냄새는 좀체 좋아할 수가 없다.
흐리고 침침했던 전날 날씨와 달리 화창하고 푸르른 하늘과 눈부신 햇빛. 이런 가을날에야 어디를 데려가서 풀어놓아도 좋아라 했을 듯. ㅋ
이어지는 행선지는 유후인. 아기자기한 기념품점과 민예품 상점 늘어서 있는 거리라며 익히 들어본 적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뭐 내 생각엔 인사동과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싶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민예품은 너무 비싸서 살 엄두도 낼 수 없고 싸구려 기념품은 조잡해! ㅋㅋㅋ
차라리 유후인 공부를 미리 했더라면 호숫가에 있다는 샤갈 박물관엘 가볼 것을.. 사진 찍으며 샤갈이라고 적힌 건물이 보이길래 카페인가보다 했더니만,나중에 여행책자를 보니 샤갈 작품이 전시되어 있단다. 물이 엄청 맑아서 뛰노는 물고기 비늘이 보인다는 호수는 전날 내린 비로 혼탁... 전날 비와서 혼탁하다는데 물은 또 왜 저리 적어보이는가?
그래도 단풍 들었으면 호들갑 떨며 예뻐라 했겠다 중얼거리며 뒤돌아섰다. 호수로 이어지는 개울은 문득 선운사 올라가는 길을 연상시켰음. 여기도 단풍 들었으면 더 아름다웠겠지...
유후인의 특산 먹거리는 일본 전지역 출품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했다는 코로케. 역시나 가이드는 '너무' 맛있을 것을 기
대하지 말라고 귀띔했고,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하였으나.... ㅋㅋㅋ 역시나 튀긴음식을 안좋아하는 우리에겐 심히 느끼했다. 고로케가 당연히 그렇지 뭘! 생선을 넣은 듯한 금상 고로케보다는 차라리 감자고로케가 난 더 나았던 듯.
사진은 금상 고로케였는지 감자 고로케였는지 모르겠다. 금방 튀겨내어 바삭바삭 따끈하긴 했는데;; 우린 이후 상점들은 보는둥 마는둥 '진한' 커피 찾아 삼만리에 나섰다. ^^;
유후인에서 내가 제일 신기하게 느꼈던 건 어느 집 담장에 철사로 만들어 세워놓은 자그마한 조형물들이었다. 아무렇게나 철사를 구부려놓은 것 같지만 죄다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는 새의 형상은 분명 예술가의 솜씨!
어렵사리 찾아낸 커피집에서 산 쓴 커피로 느글느글한 목구멍을 씻어내리며 버스에 오르고 보니 또 점심시간.
휴게소 같은 데 있는 대형 음식점에 주르륵 준비되어 있던 솥밥 우동정식을 먹었다.
튀김과 연어구이가 차갑기는 했으나 맛은 대체로 훌륭. 고로께는 언제 먹었냐 싶게 밥과 우동을 흡입했다. 앙증맞게 나온 사과랑 귤도 맛있었음.
이후 스케줄은 내가 전체 일정 중에서 가장 관심이 없었던 아소산, 활화산 분화구 구경이었다. 그런데 아싸~! 날씨는 쾌청해도 바람이 거세 '로프웨이'(케이블카를 이렇게 부르는 듯;) 운행이 중단되었단다. 처음 나눠준 일정 안내에도 날씨에 따라 분화구를 못 보게 되면 화산 박물관으로 대체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가이드 말이 말이 화산박물관이지 사진 몇장 보고 오래 된 영상물 보는 게 전부이니 굳이 입장료 내고 들어가서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내 말이! 해서 화산 사진은 로프웨이 승강장 건물에서 대강 보고, 그곳 특산물이라는 요구르트 한 병씩 마신 뒤 후쿠오카로 향했다. 심지어 점심 때 먹은 것 같은 저녁을 또 단체로 먹느니 박물관 입장료랑 저녁값이랑 챙겨서 각자 돌려줄 터이니 자유로이 사먹으라는 가이드의 제안. 우리야 당연히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별 불만이 없었던 이유는 가이드가 융통성을 많이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버스 타고 이동거리를 최소로 하려고 일정 순서도 좀 바꾸고 보나마나 한 전망대 관람 같은 건 하나 쯤 슬쩍 빼먹고... 워낙에도 마지막날은 자유여행이었지만 사흘 간 절반쯤이 자유롭고 보니 우리에겐 더욱 금상첨화였다.
결국 우리는 늦은 오후에 후쿠오카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나서부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애당초 셋이 가려던 여행이라 숙소 때문에 여행사 직원과 여러번 통화를 해야했는데, 우린 방이 좁아도 당연히 셋이 묵겠다고 우겼으나 매번 불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었다. 트윈이 아니라 세미더블이 어떻고 저떻고....
암튼 결국 둘이 갔으니 문제는 해결됐지만, 호텔방에 올라가 본 우리는 여행사 직원의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비즈니스호텔이라 방이 정말 비좁아서 트윈 침대를 들여놓을 데가 아예 없어! ㅋㅋㅋ
치산호텔 방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다. 우리 등뒤에 출입문이 있고 침대 발치에 벽처럼 있는 곳이 화장실. 욕조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야할 정도로 귀여운 크기에 변기에 앉으면 거의 문에 무릎이 닿으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엄청 깨끗해서 하룻밤 자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음. 싼 게 비지떡이 아니라고 우리는 또 한 번 중얼거렸다. 다만... 와이파이가 안 잡히는 호텔임이 좀;; ㅋ
그러고 보니 일본은 대체로 와이파이에 인색했다. 로밍은 해갔어도 데이터는 차단해뒀던 터라 와이파이 되는 데서만 신문물 검색이 가능했는데 도심 호텔에서도 와이파이가 안될 줄이야! 벳부 료칸에서도 와이파이 패스워드 알려주던데 쳇!
그래도 나에겐 제법 실한 눈썰미와 방향감각이 있겠다. 두려움에 떠는 친구를 호기롭게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포장마차촌에서 본토 오뎅도 먹게해주마.
강을 따라 저녁때만 나타난다는 포장마차촌을 향해 곧장 강을 건너니 벌써 어스름.
서서히 장사를 시작하려는 포장마차가 보이긴 했으나 본격 영업은 해가 져야 할 모양이라 우린 계속 강을 따라 걷다가 월요일이라 문을 닫은 뭔가 문화재스러운 건물도 만나기도 하고, 다리를 두어번 건너 공원 벤치에 한참 앉았다가 돌아섰다.
호텔 바로 옆부터 '캐널시티'라고 어마어마한 쇼핑몰이 있던데 후쿠오카는 운하의 도시인 듯했다. 넓지 않은 강이 두 갈래로 갈라져 (세 갈래였던가?) 도심에서 다리를 건너 조금 가면 또 다시 강줄기가 나왔다. 차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사람들만 건너다니는 다리가 있고... 다음날까지 다리를 몇개나 건너다녔는지 셀 수도 없다.
엄청 큰 물고기가 가끔 펄쩍펄쩍 뛰어오르기도 하는 후쿠오카의 강에선 그런데 한강처럼 낚시질 하는 사람을 찾아보지 못했다. 낚시는 금지인가? 하기야 한강에서도 낚시는 원래 금지됐는데 사람들이 몰래몰래 하는 거라고 들은 것도 같다. ^^;
강변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오다 드디어 일본에선 드물다는 포장마차 촌에서 오뎅을 사먹기는 했는데, 맛은 뭐 그저 그랬다. 내 입맛이 워낙 서민적이다보니 오뎅도 좀 구수하고 팅팅 불은 걸 선호하는데 (반면에 친구는 쫄깃한 걸 선호;;) 국물이 너무 짜고 달아서 새삼 일본이구나 싶었음.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포장마차 안주는 비싸니까 조심하라는 가이드 말은 이번에도 틀렸어! 고기 꼬치 파는 집은 비싼 집도 있었지만 우리가 먹은 오뎅집은 둘이 먹고 450엔. 한국 떡볶이 포장마차랑 비슷하구만 뭘;; 겁을 주고 그러시는지.
암튼 요기를 하긴 했어도 저녁식사로는 제대로 된 일본 라멘을 먹기로 결심했던 터라 캐널 시티에 모여 있다는 유명한 라면집을 찾아 올라갔다. 입구에서 자동 주문기로 먼저 돈을 내고 주문서를 뽑아야하는 데 그걸 몰라 어리바리 테이블에 앉았다가 다시 나와 시킨 라면은 그나마 제일 맵다는 것이었으나... ㅋㅋ 친구는 라면 면발이 아무리 생면이라도 꼬불거리지 않는 건 반칙이라며 느끼함에 괴로워했다. 돼지뼈 국물 라멘에 뭘 기대하셨나요 ㅎㅎㅎ
교자랑 세트로 나오는 걸 시켰으니 망정이지 양이 하도 적어 미리 오뎅 안 먹었으면 배고파서 화났을지도...
암튼 시내 거리를 쏘다니다 엄청 비싼 과일집에서 발견한 네모난 수박 구경과 편의점에서 일본맥주 쇼핑을 끝으로 둘쨋날도 끝이 났다.
나야 가끔씩 버스타고 나다니기나 하지, 새벽부터 종일 12시간(동부와의 시차 때문에 6시에 출근한단다 헐;;;) 근무에 시달리는 은행 간부인 친구는 여행 이틀만에 고백했다. 석달치 걸을 거 여기 와서 다 걸은 것 같다고. 12센티미터나 되는 통굽 슬리퍼를 용감하게 신고 일본 여행 오겠다는 걸(인천공항엔 맨발에 그걸 신고 내렸었다) 내가 극구 말려 운동화를 신게 했었는데 운동화 안 신었음 어쩔 뻔 했누 ㅎㅎㅎ
한두달전에 시작만 해두고 버려둔, 밀린 포스팅 마무리를 먼저 해야하나 생각하니, 10월 여행기는 그럼 내년에나 쓰게 되거나 아예 집어치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시작한다. 이번 가을의 우울함은 사진이나 들여다보며 넘겨볼 요량으로.
친구와 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이번에도 은근히 제주도 카드를 내보았지만, 오래 전 '고국방문단 제주관광 패키지'에 크게 덴 친구는 차라리 일본엘 가자고 했다. 배 타고 일본에 가는 거 있다며? 기차도 타고, 배도 타고, 비행기도 타고, 일본라멘이랑 우동도 먹고... 다 하자! 그래 까짓것, 우리도 라멘과 우동 먹으러 일본 가는 사치 좀 떨어보지 뭐, 그랬다.
우여곡절 끝에 셋이 가기로 했던 여행은 둘로, 배 타고 가는 여행은 시간 아까워서 포기, 여행지는 큐슈로 정해졌다. 마지막날 자유일정이 포함된 패키지 여행의 가격은 지난번 엄마랑 갔을 때의 딱 절반. +_+ 저가항공사로 가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잠자리와 먹는 게 심히 부실하면 어쩌나 슬며시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대체로 만족! 융통성 있고 기동력 있는 여행이라 패키지의 폐해는 크지 않았다. 싼 게 비지떡이 아닐 수도 있다는 좋은 예.
김포공항에서도 일본 가는 패키지 많던데 우린 이번에도 인천공항 출발. 저가항공사 터미널이 따로 멀리 있는지 난생처음 공항에서 셔틀 트레인도 타보았다. 딱 지하철 같은 느낌인데, 객차 수가 당연히 훨씬 적다. 셔틀 트레인 이용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아 5분마다 하나씩 다닌다는데 매번 꽉꽉 차서 다니더군. 러시아워 때 지하철 타본 게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줄서서 우르르 몰려 타고 또 우르르 내려 우르르 느릿느릿 줄지어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광경이 딱 그 느낌이었다. 촌스럽게도 신기해하며 사진도 찍었으나 제대로 나온 건 없음.
10시 좀 넘어 날아올라 1시간 20분 만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도 일사천리. 전용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곧장 그리 멀지 않은 다자이후 시로 향했다. 학문의 신을 모셨다는 텐만궁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입시철을 앞두고 관광객보다 일본 현지인들이 엄청 더 많은 듯했다. 마침 일요일이기도 해서 아이들 데리고 가족 나들이 온 일본인들이 드글드글...
입구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가다 보니 일본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한 탁발승이 눈에 띄었다. 내가 일본어를 모르는 탓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스님들은 염불하는 목소리도 톤이 각기 다르고 좀 개성이 있는 반면, 일본 스님들은 하나같이 염불소리가 똑같은 것 같다. 암튼.. 발가락 갈라진 버선과 납작한 신발까지 완비한 차림이었는데 민망해서 좀 더 가까이 가서 찍진 못하겠더라. 여기가 일본이구나 느꼈던 첫 광경.
한옥도 집 크기에 비해 지붕과 기와 무게가 엄청나다고 하는데, 일본 전통 건축물은 그 느낌이 더 한 것 같다. 지붕이 건물의 절반을 훨씬 넘어! 큐슈 지방의 특징인지 기와가 아니라 나무를 잘게 쪼개 뭉쳐놓은 것 같은 지붕 재질도 신기했다. 건물 정면엔 마당 너머까지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건물 뒤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뭘 그렇게 빌 게 많은지 주렁주렁 달려있는 나뭇조각들. 저런 나무떼기 말고도 신사마다 흔히 묶어놓는 종이 부적도 많았다.
이 관광지에 딸린 식당에서 우동정식으로 조촐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나선 널널하게 오후에 관광지 하나 더 보고 벳부 온천 료칸에 투숙하는 것이 첫날 일정. 시간도 많겠다 구석구석
산책하듯 돌아보다 전통 옷을 입은 귀여운 아이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재수굿 하듯이 일본 사람들은 나이대 별로 여기 와서 무슨 의식을 치른다는 것 같다. 가이드 설명도 맨 뒤에서 귓등으로 듣는둥 마는둥 해서... 자세히는 모르는데, 암튼 부모들도 아이들도 곱게 전통의상으로 차려입고 제법 거창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공간도 있었다. 민망해서 좀 더 가까이 찍지 못해 상당히 어정쩡해 보이는 사진이지만, 암튼 아이 본인과 부모에게 사진 찍어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받았다. ㅋ
애들은 뭘 입혀놔도 귀엽지만, 무채색으로 된 전통의상을 입혀놓으니 뭔가 더 엄숙하게 느껴지면서 사랑스럽다. 한복으로 치면 양반네 도령복장 쯤 되려나?
암튼, 이곳의 특산물은 따뜻한 찹살떡이라는데 점심먹은 집에서 하나씩 나눠주어 맛이나 보겠다고 한 입 깨물고는 슬며시 가방에 넣었다가 나중에 버렸다. 팥소가 든 찹쌀떡을 기름에 드글드글 굴려놓았다고나 할까...
게다가 친구는 일본식 오뎅을 꼭 먹어야겠다고 해서 문어맛으로 하나 샀는데 식감이 한국 오뎅에 비해서 엄청 쫄깃했으나 역시나 튀긴 음식이다보니 느끼했다.
둘이 동시에 커피가 필요하다고 외쳐댔다.
그러고는 이미 올라가면서 봐둔 스타벅스로 달려갔다. 의미가 있을 법한 인테리어가 독특했던 텐만궁 앞 별다방과 그 몇 집 건너에 있던 기념품점.
커피값은 환율 따져보면 거기나 여기나 비슷했던 것 같은데 유독 컵이 작았다. 커피 인심 후한 미쿡에서 온 친구는 종이컵 만한 커피가 신기하다며 깔깔깔. 사진도 찍어 남겼으나 괜히 자기 얼굴만 커보이는 것 같다고 삭제를 요구했다. ㅎㅎ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다음으로 향한 장소는 <키츠키 성하마을>. 큐슈의 '작은 교토'라던데 교토엘 안가봤으니 알 턱이 있나. 내 느낌으론 황토를 바른 담장이며 잘 생긴 전통가옥들이 모여 있는 모양새가 안동 하회마을과 비슷한 것 같았다.(다행히 이 다음주에 안동엘 다녀와 비교 가능 ^^;)
지금 생각해보니 꽤나 한적한 마을 풍경도, 공개해둔 공간이 있고 못 들어가게 해둔 공간이 있는 것도 하회마을이랑 비슷했군.
난 저 언덕을 내려가 마을 반대편 집들도 구경하고싶었으나 친구가 말렸다. 너무 가팔라! 시간 안에 못 돌아오면 어쩌려구! +_+
패키지 여행의 폐해는 뭐니뭐니해도 가이드 마음대로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 거기 가서 봐도 다 똑같아요... 라고 가이드도 말했지만 장담컨대 가이드는 저 반대쪽까지 한번도 안 가봤을 것이다.
얼핏 들은 바로는 에도시대 무사들의 저택이 모여 있던 곳이라는 듯하다. 주택의 구조도 재작년에 본 무사의 집과 똑같은 느낌. 공개된 저택의 경우에도 절대 마루나 실내엔 올라가지 말라고 가이드는 신신당부했지만, 막상 집안엔 친절하게 한글로 '신을 벗고 올라오세요'라고 적혀 있었다규~!
여유만 있다면 무사의 저택에서 차도 한 잔 시켜 마실 수 있게 해놨던데, 친구와 내가 녹차를 별로 안좋아해서 그냥 나왔다. ㅋ
늘 약속시간보다 집결지에 한참이나 일찍가야 마음을 놓는 친구 덕분에 나는 주차장 주변 꽃이나 찍으러 돌아다녔다... 코스모스와 금잔화는 알겠는데 마지막 꽃은 난생 처음 보는 듯;; 전투적인 새나 곤충처럼 생겼다. ^^
버스타고 좀 가다가 "저기 보이는 게 벳부만입니다!"라는 소리에 여러 장 난사하였으나 결과는 신통찮다.
그래도... 군데군데 하얗게 솟아오르고 있는 온천의 수증기가 보이는 것으로 만족. 날이 흐려서라나 뭐라나 온천에서 뽐어나오는 수증기가 이날따라 좀 덜하다고 했다. 심할때는 시가지 전체가 자욱하다고.
벳부에서도 물이 제일 좋은 골목이라고 가이드가 극구 자랑하던(그 말이 맞는 것 같긴했다. 유명한 'OO지옥'이라 이름붙은 온천이 주변에 죄다 몰려있었음) 숙소는 생각보다 정말 작았다. 복층 건물이긴 했지만 진짜 전통료칸을 리노베이션한 느낌? 방이며 계단, 온천탕까지 얼마나 작고 앙증맞은지 귀여울 정도였다.
금방 물청소를 했는지 맨발 벗고 다녀도 되겠다고 친구가 감탄을 금치 못했던 골목도 그렇고 료칸자체도 그렇고 정말 깨끗 깨끗. 게다가 료칸 주인은 한국인 아주머니였고, 친구는 김치 인심 후하겠다고 아주 좋아라했다.
유타카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저녁은 두유 샤브샤브. 콩국물을 끓이면서 고기와 야채를 먹다보면 순두부가 만들어지는 원리란다. 뷔페식으로 마련된 샐러드와 밑반찬, 그리고 푸짐한 김치(!) 때문에 일행들 모두 행복하게 밥을 먹었다.
나 역시 지난번 엄마랑 여행했을 때 저녁마다 먹은 가이세키 정식보다 훨씬 좋았다.
점심 먹을 때만해도 일본 아줌마들이 이래서 날씬하구나 깨달았다던 사람들은 또 다시 한국식으로 배터지게 저녁을 먹고나서 각자 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온천을 즐길 시간...
방에 올라오니 어김없이 다녀간 우렁각시가 테이블을 치우고 깔아놓은 이부자리. 이불을 저렇게 말아놓아 섬뜩한 느낌이라고 해서 내가 얼른 펴놓았다. ^^; 완전 폭신폭신 아늑하여라~
그러나 온천욕을 하기 전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료칸 냉장고엔 물 한 병 들어있지 않았으므로, 우린 가이드가 알려준 대로 마트를 찾아 나섰다. 물도 사고 일본 맥주를 마셔줘야햇!
약간 언덕길이라 올라올 때 힘들 거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린 방에 올라가 양말 가져오는 게 귀찮아서 운동화를 포기하고 '게다'를 신고 따각따각 골목길을 나섰다.
ㅠ.ㅠ 현지인이 말리면 역시나 그 말을 들어야 한다니까...
마트까진 한 20분 걸어야하는 거리. 나야 워낙 여름마다'쪼리'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친구는 아니나 다를까 발가락 사이가 아프다며 퍽이나 괴로워했다. 나 역시 굽이 높아도 푹신한 생고무 쪼리는 신어봤어도 쿠션이 전혀 없는 나무바닥 쪼리는 처음인지라 언덕 막바지엔 좀 힘이 들었다. 다행히도 중간에 족욕장이 있어서 쉬어가기로 한 건 좋았는데 물이 어찌나 뜨거운지! ㅠ.ㅠ 수증기 나오는 나무통에 다리를 넣고에 족욕하는 곳도 따뜻한 돌에 발을 올려두는 신기한 족욕체험도 있었으나... 혹시나 서툴게 작동하다 델까봐 뜨거운 온천물에만 발을 담갔다가 돌아왔다. 우리는 너무 뜨거워서 30초를 다 못 담그고 있는데 반해 일본인 관광객들은 막 젊은 부모가 어린 아기 발도 같이 담그고 있는데도 아기가 전혀 울지 않았다. +_+ 체질이 달랐던 걸까... ㅎㅎㅎ 하여간 신기한 경험.
규모가 큰 료칸엔 온천탕이 있어도 방마다 욕조와 샤워시설이 있던데 여긴 세면대 뿐, 씻는 건 무조건 온천탕으로 내려가야 했다. 수도꼭지가 다 해야 열개도 안 되는 정말 앙증맞은 목욕탕엔 그래도 노천탕도 있었음. 후딱 온천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와선 피부가 매끈하네 마네 온천물 타령을 하며 맥주를 마셨다. 일본 말 몰라서 새우깡 오리지널 맛인줄 알고 사왔던 밍밍하고 비린 과자 안주가 에러이긴 했지만, 온천 뒤끝엔 맥주 한 캔으로도 금세 취기가.... ㅋㅋ
별 얘기 없으니 여행기를 한번에 다 쓰려고 했는데 역시 안되겠다. 그리하여 첫날 일정 여기서 끝.
친구가 5월에 어울릴 것 같다며 이 영화 보고싶다고 해서 개봉일을 기다려 약속을 잡았다. 헌데 가까운 데는 개봉관이 없다! 대한극장, 서울극장 이런데는 하루 중 이상한 시간에 한번쯤 교차상영을 하고, 전국적으로도 상영관이 열개 안팎일 정도 ㅠ.ㅠ
암튼 그래서 일산 화정까지 가서 어렵사리 보고왔다. 그렇게 벼르고 볼 만큼 주변에 강력추천할 영화는 아니지만, 촉촉히 봄비 내리는 날 우산쓰고 돌아다니다 관람객이 전부 네명 밖에 안되는 초소형 영화관에서 각자 막 수다떨며 보기엔 딱이었다(우리 석줄 앞쪽에 앉은 커플 중 남자는 일본 영화인줄도 모르고 들어왔두만 ㅋㅋ). 조숙한 어린아이와 철부지 어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전형적인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그야 뭐 나도 알고 간 거니 상관없다. 아이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내겐 항상 그것이 관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 문상을 내려간 다이키치. 친척들은 외할아버지와 꼭 닮은 다이키치의 외모에 '히엑~!!'하면서 놀라고, 동시에 할아버지의 숨겨진 딸 6살짜리 린의 존재 때문에 수군거린다.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는 골칫덩어리 꼬마는 입양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친척 어른들의 냉담한 반응에 다이키치는 충동적으로 자기가 맡겠다고 선언한다. 첫눈에도 슬프고 외로워 보이는 린에 대한 연민 때문. 린 또한 다이키치의 제안에 옷자락을 덥썩 잡는다. 어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다정하게 바라보기도 했고, 일단은 다이키치의 외모가 아빠(할아버지)랑 닮은 설정이니 뭐.
아우, 진짜 쪼끄만 애가 표정이 어찌나 처연하고 슬픈지, 나중에 조잘조잘 웃으며 떠드는 모습이랑 같은 애가 아닌 것만 같다. 린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비하면, 다이키치의 만화같은 과장 연기는 막 유치해! (원래 만화가 원작이라고;;) 다이키치 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 연기도 지나치게 과장되고 희화된 느낌인데(특히 물류센터 같은데서 일하는 직장 동료들!), 이런 영화는 또 아역배우 하나만 건질 수 있으면 다 용서가 된다. 린이 넘 귀엽고 깜찍하니깐!
그나저나 포스터 보니 다이키치가 겨우 27살이었군. 회사에서 워낙 일 잘하는 관리직 상사인 듯 나와서 30대인줄 알았다. ㅋ 일본에서도 쉽지 않은 육아문제, 부모의 역할, 가족애를 한 축으로 하고, 아이와 어른의 동반성장을 아기자기하게 그린 영화다. 다이키치가 린을 데려와 사는 단독주택도 예쁘고, 처음 나온 할아버지네 집, 나중에 잠깐 나온 부모님네 집, 다이키치가 출근시간에 늦어 노상 린을 안고 뛰어다니는 골목길도 다 예쁘고 정겹다. 일본영화 보고 나면 나는 영화속의 예쁜 골목길이랑 주택가만 기억에 남기도 하는데, 촬영지가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불쑥 가보고 싶다고 느꼈다. 한류 드라마 촬영지에 외국 관광객 바글거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아무튼, 포스터에도 보듯, 저렇게 애랑 땡땡이무늬 커플 잠옷 입은 것도 귀여워 귀여워! 작아도 아이들 머릿속엔 별별 복잡한 생각이 다 들어있고, 마음씀씀이가 어른들 뺨친다는 걸 아는 어른들이 만든 이야기구나 싶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어린 조카 앞에서 나도 멍해진 적 있었다.
아 맞다, 나에겐 영원히 '조제'로만 기억된 (워낙 일본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보지 않는다;;) 이케와키 치즈루가 단역으로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것도 두살 아들을 키우며 다이키치에게 조언을 해주는 회사 선배로.. +_+ 뭐 여전히 젊지만, 풋풋한 조제 때랑 비교하면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이라 내가 괜히 뜨악했다.
딸바보들의 세상을 칭송하고 가족권장 드라마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라고 결론내렸다. 부모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만, 부모노릇을 비스름하게만 해봐도 확실히 인간적인 성숙은 필수다. ㅋ
맨처음 린이 까만 원피스 입고 마당에 서 있을 때 나도 한 눈에 반하겠던데, 그 장면 사진이 없어서 아쉽;;
역시나 6시 모닝콜로 눈을 뜬 아침. 평소엔 늘 새벽 6시쯤 잠드는 올빼미가 6시 모닝콜에 잠을 깨는 생활은 아무리 여행지라도 적응하기 참 어렵더라. 그래도 다른 날보나 창밖이 훤한 듯하여 몸을 일으켜보려 했더니 말을 듣질 않았다. 까마득히 오래 전 부실한 몸으로 체력장을 치른 다음날처럼, 허벅지와 장단지, 무릎과 허리가 죄다 쑤셨다. 왕비마마가 이렇게 아파서 걸음을 제대로 못걸으시는 건가 어렴풋이 실감될 만큼 심각한 근육통. 혹시나 해서 새벽 온천 한번 더 하시겠느냐고 엄니에게 물으니 니 맘대로 하란다. 나야 물으나마나, 온천물이 아무리 좋아도 잠보다 좋을소냐 당연히 잠을 택했다.
그래도 출국날이라 훨씬 더 서둘러야 하기에 조금 더 미적거리다 억지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한발 한발 뗄 때마다 앞다리 뒷다리가 다 땡겼다. 사다리 같은 계단으로 30미터 높이 천수각에 뛰어 올라갔다 내려온 15분도 안되는 사이에 중년의 몸은 그렇게 망가지고 말더라. ㅎㅎ
료칸 건물은 전날 묵은 데보다 더 현대적인데 실내장식은 이쪽이 더 고풍스러웠다. (전날 묵은 료칸 창엔 두툼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음) 우리나라 한옥의 아기자기 예쁜 창살과는 느낌이 다르지만, 창호지 바른 저 창문 무늬도 깔끔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ㅋㅋ 설정사진 티나게 맨 왼쪽 문이 덜 닫혔다.
생각해보니 일본료칸온천 체험 못지 않게 한옥고택체험도 열망하며 살았는데 일본엘 먼저 가 본 셈이다. 언제고 꼭 행랑아범 냄새 안나는 깨끗한 고택을 골라 한옥체험도 해보고 말리라!
창문을 여니, 짠하고 사흘만에 햇살이 보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일본을 떠나는 날 반나절이라도 비와 우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왕비마마의 불편한 다리를 감안해 방배정을 1층으로 받는 바람에 전망이 나빠진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나무 사이로 조만큼이라도 바다가 보이는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저게 바로 동해바다 아닌가. 료칸에선 <대정원>이라고 이름붙여 자랑하는 안뜰과 바닷가 산책로를 권했었는데, 우린 이렇게 창밖으로 내다보는 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아침식사도 부페식이 아니라 저녁 먹은 그 자리에 정갈하게 개인별로 마련된 간소한 정식이었으나, 카메라질에 익숙하질 않아 몸만 덜렁 내려간 탓에 증거사진이 없다. 미소된장을 각자 풀어서 즉석 국을 끓여 밥과 함께 먹는 식이었다. 달걀찜과 샐러드도 있었고, 알록달록하게 튀긴 감자 고로께 같은 반찬도 있어서 난 전날 카이세키
코스요리보다 아침 정식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서둘러 아침을 먹자마자 곧장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해야했으므로, 전날 아침 방에 준비된 다기로 차를 끓여서 잠시 음미하며 부렸던 여유도 생략했다. 그 대신 료칸 방과 아쉬운 작별의 의미로 사진 몇 장.
우리가 묵은 128호 방 한가운데 벽엔 저렇게 약간은 조악한 정물화가 매달려 있고 그 아래 수수한 꽃꽂이 수반이 자리잡고 있었다. 호텔 로비는 물론이고 복도 곳곳에 작고 앙증맞은 수반과 꽃꽂이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별 거 아니라도 이런 세부적인 데 신경쓰는 마음씀씀이가 나는 참 좋다. 며칠 전 잡지 기사를 보니, 교토 쪽엔 호시노야 리조트 계열 료칸 가운데 정말 역사가 오래된, 각각 별채로만 이루어진 전통료칸도 있다더라. 혹시라도 또 한번 온천료칸 여행을 꿈꾼다면 참고해야겠다.
아 맞다, 로비 커피하우스에서 무료로 커피도 마실 수 있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포기해야했다. 아까비...
방열쇠에 저렇게 꽤 큼지막한 나뭇조각이 달려있었다.
열쇠가 두개인 이유는 하나가 금고열쇠이기 때문인데, 옷장 아래쪽에 작은 철제 금고가 자리잡고 있더라. 나는 열어볼 생각도 안했다.
어쨌든 저 열쇠 덕분에 료칸이름 토코엔을 한자로 東光園(동광원)이라고 표기한다는 걸 알게됐음.
아침햇살에 빛나는 대정원은 그야말로 3초쯤 얼굴만 내밀어 보고 돌아섰다. 박석 같은 저 돌 위로 걷는 기분도 꽤나 괜찮았겠다...고 짐작.
마지막 날 첫 행선지는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유형의 관광지인 배 박물관이었다. 내가 일본 배 박물관엘 뭣하러 가서 홍보영상물까지 봐야한담... 여러 종류의 배를 실컷 시식하게 해준다고 해서 그나마 좀 참았다. ㅋㅋ
20세기 배라나 뭐라나가 돗토리현 특산품이라는데 색깔이 우리나라 배처럼 노란 갈색이 아니라 연두색인 게 특징이래고, 좀 아삭한 품종은 시큼하고 그나마 좀 단 놈은 푸석거렸다. 시식이 끝난 후엔 왕비와 곧장 로비 의자에 앉아 빈둥거리며 박
물관에 대한 무관심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시간을 죽였다.
그나마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배 박물관 건물의 뼈대... 얼핏 봤을 땐 대나무이거나 최소한 나무 소재인 줄 알고 허걱 놀라 한참 올려다봤다. 다니는 곳마다 산에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대나무 쪼개서 만든 부채살처럼 곡선으로 배 형상을 본떠 만든 건물이 밖에서 볼 땐 좀 우스꽝스러운데 안에서 볼 땐 꽤 근사했다.
건물 골조가 뼈처럼 드러나는 저런 구조를 내가 선호하는 건가?
어슬렁 거리며 건물을 나와 주차장에서 맞닥뜨린 건 어딜 가나 보이는 일본의 경차들.
경차는 노란 번호판을 단다는데 브랜드도 모양도 정말 다양하게 많더라. 일본 자동차는 각진 게 유행인지 경차든 아니든 각진 모양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저런 차 한번 운전해보고 싶었다. +_+ 그치만 차선이 반대라 사고내기 딱 좋겠지...
마지막 행선지는 쿠라요시? 에도시대 옛거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였다. 이른바 아카가와라(적와, 빨간 기와라는 뜻이랜다) 시카라베 토장군 거리. 맷돌로 커피 갈아주는 데가 있다고 그래서 지도 들고 찾아가보려고 했으나(규모가 인사동 만큼도 안 되는 듯;;) ㅠㅠ 날씨도 다시 껌껌해지고 빗방울도 뿌리기 시작하는데다 왕비마마의 다리가 비협조적이어서 그냥 눈에 띄는 데만 돌아다녔다.
늘 복작거리는 인사동과 달리 완전히 한산했다
아주 어린 시절 나도 개울을 낀 이런 집에서 산 적 있다!
이런 창고를 개조해서 공방과 기념품점으로 만들었다지
가게주인들은 물건 팔 생각이 없어보인다 -_-;
작은 시가지 중심에 실개천 같은 저런 개울이 흐르고 골목골목 더 좁은 수로가 이어지는 곳도 있는데 야트막한 물속에 팔뚝보다 더 굵은 색색깔의 잉어가 돌아다닌다. 나는 인공색소로 물들인 것 같은 잉어를 좀 징그러워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신기해서 사진 찍으려다가 매번 놓쳤는데, 이 사진엔 운 좋게 난간 사이로 한 마리 보인다. ㅋㅋㅋ
무슨 환경 다큐멘터리에서 보니 징그러워 보여도 저 잉어들이 생활오수에 포함되어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먹어치워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던데, 여기도 그러는 걸까 궁금해도 어디 물어볼 데가 없어 답답했다.
맷돌로 갈아주는 커피집은 포기했어도 지도를 보니 일본 절이 눈에 띄어 얼른 왕비마마 모시고 찾아갔다. 대
대련사였을 거다;;
대로 세습되는 직업이라는 일본 승려와 절은 낯설기도 하고 솔직히 좀 비호감으로 느껴진다. 일본 스님들의 염불소리도 심히 꾸미는 것 같고 말이지.... ;-p
그러거나 말거나 왕비마마는 일본 절 부처님 앞에 백엔짜리 몇개 보시하고 싶어하셨는데, 드디어 원풀이했다. 온 동네가 그렇듯 여기도 꽤 오래된 느낌이던데 유독 절마당 한구석에 마련된 납골묘만 화려번쩍 으리으리했다.
지도에 표시된 걸 보니 절 앞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에 <대련사 대로>(절 이름 맞다고 치고) 적혀 있었다. 일본 사람도 뻥이 참 심하다는 걸 느껴야 했으니...
[#M_더보기|접기|
ㅋㅋㅋㅋ 이런 골목에다 <대로>를 붙이다니...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딱 편할 정도의 폭이다.
수공예품을 전시도 하고 팔고 있는 가게 몇군데를 들어가보기도 했지만, 엄청난 가격대에 비해 물건은 어찌나 조악한 느낌인지... 사고싶은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러더라. 이런 데 비하면 우리나라 인사동이나 삼청동은 정말 세련되고 멋진 곳이라고. ㅋㅋ
모든 일정의 마지막은 이 거리 한 구석에 있는 떡 샤브샤브집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사흘간 하도 음식에 실망을 했던 터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맛있어서 감탄하며 먹었다. 열심히 외웠던 <오이시이데스네>를 쓸 수 있었던 유일한 음식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쓸 기회가 없었다. ㅋㅋ
랩이나 좀 벗겨내고 찍을 것을... 본디 음식 앞에두고 유별나게 사진찍어대는 인간들을 혐오해왔던 터라 민망하여 얼른 슬쩍 한장 찍고는 먹기에 바빴는데, 거의 다 먹고 나니 샤브샤브에 찹쌀떡을 넣어 끓여먹는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기록해둘만한 가치가 있을만큼 맛있어서 딱 하나 남았던 떡을 찍었다. 끓는 육수에 10초 정도만 넣으면 말랑말랑해지는데, 너무 오래 두면 흐물흐물 집을 수도 없게 녹아버린다.
우린 공항가느라 영업시작하자마자인 듯 미리 세팅된 자리에서 11시반부터 먹어댔는데, 꽤 유명한 집인 모양으로 12시가 넘자 일본인들이 바글바글 모여들더니 급기야 문밖까지 줄을 서서 기다렸다. 식당 이름이나 알아올 것을... 잠든 도시인 것처럼 우리 일행 말고는 거의 사람도 보이지 않던 거리에서 유독 그 음식점만 사람들로 들끓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오찬이 흡족해서 그랬는지 검게 변한 하늘에선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떠나는 발걸음이 여유로워졌다. 이미 우산은 짐가방에 넣고 싸버려서 다시 꺼낼 수도 없는 일이고...
빗길을 달려 요나고 공항까지 한시간 반쯤 걸렸던가 모녀는 처음에만 아쉬운 마음에 창밖 풍경에 시선을 돌렸을 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공항 규모가 하도 작아서 수속하는 승객들도 딱 우리가 탈 비행기 인원밖에 없었는데도 줄은 참 엄청 오래 섰던 것 같다. 그 시간에 비하면 돌아오는 비행시간 1시간 20분은 어찌나 짧게 느껴지던지. 올 때와 똑같이 성의 없는 기내식을 물리치고 간만에 종이 신문 하나를 다 훑었더니 벌써 착륙준비를 하겠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던 파아란 한국 하늘. ^^*
그러나 저 구름을 뚫고 내려오니 이 땅도 잔뜩 흐렸었다.
그러고 보니 2주 전 일인데 두어달은 된 일처럼 아득하다. 그래도 전혀 짧지 않은 사흘이었다. 요번 여행에서 깨달은 것 두 가지.
1. 앞으로 또 모녀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냥 국내 여행지만 실실 다니는 게 낫겠다. 물론 그마저도 섣불리 떠날 마음은 먹기 어려울 것 같다. ㅠㅠ
2. 내 일본어 발음이 꽤 괜찮은가보다! 다음 일본여행을 위해 (행여나?!) 일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볼까나? ㅋㅋ 답례 인사 따위로 내가 쓴 말은 딱 두 가지,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랑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였는데 내가 저 말을 하면 일본인인줄 착각하거나 일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지 다들 막 말을 더 붙였다. 예를 들어, 토장군 거리에서 앙증맞은 검정콩 붕어빵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우리 일행을 보자 우리말로 "검정콩 드세요. 맛있어요!"라고 하면서 시식용 빵을 내밀었다. 계속 "검정콩!"을 외치는 아저씨에게 나는 예의상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하면서 하나 집었는데 그 아저씨가 막 당황하면서 "아하, 스미마생... 어쩌고 저쩌고... " 그러면서 빠르게 다시 일어로 지껄이는 거다. 놀라고 당황한 나는 고개만 꾸벅하고 얼른 도망쳤다. +_+
외국인이 우리말로 하는 "감사합니다"는 어쩐지 어색해서 금방 알지 않나? 흠...
아시아나 승무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뜸 내게 일어로 말을 걸지 않나... 하여간 이상하다!
다시 유럽에 갈 날을 꿈꾸며 사두고 구경만 하다가 요번에 짐가방에 매달고 간 이름표를 잃어버렸다. 흑...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둘쨋날 버스에서 기사 아저씨가 내려준 짐을 보니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딱 한번쓰고 이별이라니... 마구 던지고 험하게 굴리는 짐가방에 매다는 항공용 이름표 고리를 그따위로 약하게 디자인한 인간이 나쁘다! 그나마 사자마자 자랑용으로 찍어둔 이 사진이라도 있어서 다행인건가.. ㅠ.ㅠ
비바람 속에 첫날을 보내느라 제풀에 지친 모녀는 전날 밤 일본 말도 모르면서 TV를 틀어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 일기예보를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일본열도 아래쪽은 죄다 우산 그림이었다. 6시부터 울린 모닝콜에 눈을 떠 커튼을 젖혀보니 당연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 아침 먹기 전 온천욕 한판의 욕심은 내리는 비와 함께 꼬리를 감추었다. 비오는 날 뽀송뽀송하고 푹신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마저 풍겨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4월 12일. 또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은 9시였으므로 우리는 최대한 뭉기적거리며 아침시간을 잠으로 축내다 드디어 아침을 먹으러 로비 식당으로 향했다. 둘쨋날의 첫번째 식사는 부페식. 전날 가이드가 나누어준 식권을 내자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 종업원이 빈 접시와 나무 젓가락이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놓고 한바퀴 휘 둘러보니, 대부분은 일본식 밑반찬과 각종 생선구이류가 대다수였고 식당에 드글드글한 료칸 숙박객도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내가 먹을 수 있겠구나 싶은 건 약간의 샐러드와 토마토, 빵, 오렌지 주스, 우유 정도. 원래 아침을 안 먹는 인간이지만 강행군 여행을 떠났을 땐 반드시 잘 챙겨먹는 것이 원칙인데, 아침부터 맥이 빠졌다. 그나마 왕비마마는 먹을만 하다며 하얀 밥 한공기에, 샐러드, 생선구이, 미소시루 한 그릇으로 요기를 했다. 쓴 커피까지 대충 먹고난 나는 방에 올라가서 슈크림이 든 빵으로 배를 채웠고...
숙소를 한군데 정해두고 돌아다니는 여행이 더 좋지만 아쉽게도 이번은 명탕 <순례>라 료칸을 하루씩만 묵어야 했으므로 얼른 짐을 꾸려 내려간 나는 왕비마마를 로비에 앉혀놓고 재빨리 료칸 주변을 살폈다. 대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온천 마을에서 그냥 목욕 한 번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ㅠ.ㅠ 역시 패키지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다.
료칸 앞은 바로 개울이었고 개울을 따라 나무판자가 깔린 산책로 같은 게 조성되어 있었다. 종일 비가 내려 물이 많아진 것인지 찰랑찰랑 흘러가는 개울이 위험해 보이는 듯도 했는데, 못내려가게 하는 표지판도 없는 걸 보면 수심이 깊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나 군데군데 피어있는 벚꽃은 죄다 떨어져 아쉬움을 더했다. 휘날리는 벚꽃 비 대신에 진짜 비를 맞아야 하는 여행이라니 우쒸!
기모노에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료칸 앞 다리까지 나와 양쪽에 줄지어 서서 떠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찾아간 우리의 첫 행선지는 시마네현 마쓰에 시에 있는 마쓰에 성. 우리나라로 치면 행주산성쯤 되려나? 벚나무가 8천그루나 있어서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 드는 곳이라던데 뭥미 싶을 정도로 벚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이런 엄청난 장수목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일본말을 모르니 무슨 나무인줄은 모르겠고 수령이 350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쩐지 뿌리 드러난 모습이랑 생김새가 토토로 같은 데서 많이 봤음직하지 않은가?
이런 나무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 꽤 많이 내리는데도 공원 곳곳에서 위아래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쉼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환경미화원들은 비가 와도 서울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공원이나 고궁에선 비오면 아무도 일 안하던데... 주로 갈쿠리 같은 걸로 자잘한 돌이 깔린 성 마당을 고르게 다듬는 사람들이었는데, 계속해서 관람객이 드나들어 발자국이 찍히는 걸 어쩔 수가 없을 텐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갈쿠리질을 해댔다. 우리가 지나가서 또 발자국을 만드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비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원수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대부분 할머니이거나 할아버지였다. 다들 날씬하고 자세가 꼿꼿해서 언뜻 보아서는 노인임을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로 일본에서 지내는 사흘동안 울 엄마처럼 뚱뚱한 할머니는 단 한명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비마마는 더욱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그들과 비교되어 걸음도 잘 못걷는 뚱뚱한 노인이 무슨 관광이랍시고 일본을 휘젓고 다니느냐고... 휠체어를 타고서도 구경 다니는 일본 노인들과 맞닥뜨린 적도 있으므로 그들을 가리키며 용기를 북돋아드리려 해보았지만, 그들은 일본 사람이니까 괜찮단다. ㅜㅜ
왕비마마 특별출연 ^
암튼 마쓰에성 천수각은 이렇게 생겼고 5, 6층 높이인 제일 꼭대기까지 가려면 저 가운데 검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어두고, 맨발로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왕비마마는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라는 경고에, 입구 들어가자 마자 놓여 있는 관리인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한국 같았으면 절대 안올라가봤을지 모를 성 꼭대기에 엄마를 대신해 오르기 시작했다.
왕비마마의 눈빛은 당신도 올라가보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과장 안하고 경사가 6, 70도쯤 되는 나무 계단들은 확실히 노인들에게 무리였고, 층마다 무사들의 갑옷이며 투구, 옛날 지도, 무기류, 우물이 전시되어 있는 걸 보는둥마는둥 뛰다시피 가파른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층층이 올라가 증명용 사진을 찍었다.
왕비마마에게 사진으로라도 보여드려야하니까... 멀리 보이는 건 신지코 호수라는 것도 같고.. 어쨌든 마쓰에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기는 하더라. 사진에 보이는 저 분홍자줏빛 나무들이 벚나무라는 얘긴데, 8천그루는 다들 어디에 숨은 건지 사방팔방 둘러봐도 잘 안보이기에 내심 벚꽃이 만개했을 때도 별볼일 없었겠구라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ㅋ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마쓰에성 바로 옆에 자리잡은 사무라이들의 고택. 해자로 둘러싸인 성안에는 오로지 성주와 식솔들만 살고, 무사들은 성밖에 따로 집을 마련해 살았단다. 암살당할까봐 그랬겠지 뭐. 사무라이들의 집을 복원한 건지 보존해 놓은 집들은 딱 남산 한옥마을이 떠올랐다. 소박하게 기와를 얹고 나무로 지은 집들이며 우물, 부엌에 놓인 그릇, 대청마루 다다미방 한 가운데 앉혀놓은 사무라이 마네킹까지! ㅎㅎ
수수한 집들은 뭐 그리 예쁘다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굵은 모래인지 자잘한 자갈인지 암튼 신발에 닿는 감촉이 좋은 정갈한 마당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구석구석 쏘다니는 대신 툇마루 비슷한 데 앉아 쉬고 있다가 문득 발견한 것은 나무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마리! 크기가 엄청 컸다. 집에서 쌈채소 씻다가 작은 민달팽이를 더러 발견한 적은 있어도 실제 집 매달고 기어가는 달팽이를 목격한 건 최소한 20년은 넘은 것 같아 더 반가웠다.
일본 달팽이!
무사의 집에서 나오면 길 건너편에 바로 강물 같은 해자가 흐르는데, 우리도 저 배를 타고 해자를 한바퀴 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총 몇개라던가, 그런 설명은 당연히 까먹었는데 암튼 저 배(저래 뵈도 이름은 호리카와 유람선!)를 타고 나즈막한 나무다리를 지나려면 위에 씌운 지붕이 내려와 더욱 납작해지고 안에 탄 승객들은 잔뜩 고개와 상체를 수그려야 한다. 추울 땐 코다츠도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드디어 코다츠를 경험해보는가 기뻐했더니만, 그래도 봄이랍시고 코다츠는 없고 이불만 놓여있었다.
사실 이날은 전날만큼 비바람도 심하지 않고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서 나는 크게 추운 걸 몰랐지만, 왕비마마는 50분간 배를 타는 사이 춥다고 덜덜 떨으셨다. 이불이라도 있으니 어찌나 다행인지!
뱃사공 할머니, 허락받고 사진찍었다. 막판엔 노래도 불러주심^^
이불 뒤집어쓴 왕비마마 또 출현
한국 관광객이 꽤 많이 오는지, 뱃사공 할머니는 지붕이 내려오면 숙이는 연습을 처음에 한두번 시키더니 이내 한국말 안내방송을 틀어주었다. 물가에 서 있는 집들을 보노라니 가보지도 않은 베네치아가 잠깐 떠올라 이 무슨 엉뚱한 비약인가 싶기도 했는데, 아주 낮은 다리를 지나는 동안 네다섯 번 정도 지붕이 내려와 다 함께 찌그러져야 하는 경험이 예상외로 꽤나 재미있었다.
배타고 지나다 보니 좀 전에 가본 사무라이 저택 앞으로 빨간 버스도 지나가고...
저 멀리 천수각도 올려다보이고....
다리마다 난간 조각도 달라서 아주 짧은 다리도 있고 아래쪽은 콘크리트로 된 다리도 있는데, 주로 사람들만 건너다닐 수 있는 좁은 다리들이 훨씬 예쁘더라.
유람선을 끝으로 오전일정은 끝이 났으니 기다리던 점심시간. 시마네현 특선음식인 이즈모 소바정식에다 신지코 호수에서 잡힌 빙어 튀김도 나온다고 해서 살짝 기대를 했는데... 했는데...
메밀 소바는 한 젓가락씩 작은 찬합에 세 단이나 들어 있으되 한국에서 먹는 메밀국수처럼 갈은 무와 파를 듬뿍 넣은 국물에 푹 담가 먹는 게 아니고 그냥 작은 주전자에 든 국물을 살짝 부어 <비벼> 먹어야 하는 수준이다. 국물이 워낙 짜서... 거기다 밥 한그릇이 나왔는데 그냥 쌀밥이면 좋겠구만 버섯과 재첩(역시나 신지코 호수 특산물이란다)을 넣어 간장으로 간을 해 지은 거무스름한 밥이었다. 근데 왜 밥맛이 비리냐고!? 빙어튀김은 새끼손가락 만한 거 딱 두 조각. 그나마도 차갑고...
해서 우리 일행은 다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얼른 아래로 내려가 핫바 같은 걸로 빈 속을 채웠다. 핫바 값은 한국이랑 비슷하게 200엔. 대신 크기는 훨씬 작더라. ㅠ.ㅠ
다음 행선지는 아다치 미술관. 미술작품보다는 정원으로 더 유명한 곳이란다. 일본식 정원의 최고봉이라나 뭐라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었고.. ㅋㅋ 그래도 정원이며 마당 예쁜 건 좋아라 하니 기대했는데, 나가볼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아래 사진은 다 거대한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찍은 거다. 미술관의 자랑인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미술관 1, 2층을 돌아다니며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저런 정원 사진을 매번 찍고보니, 죄다 비슷해보였다. 정원마다 이름도 다 다르더구만...
경치 좋은 산자락 아래 같은 데를 일부러 배경으로 골라서 이렇게 인공미 넘치는 정원수로 꾸미는 게 일본식 정원 가운데서도 무슨 형식이라고 하던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글동글 깎아놓은 정원수를 보노라니 나는 어디선가 텔레토비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슬몃 웃음도 났고, 공원묘지에 가면 수없이 볼 수 있는 봉분 생각도 떠올라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렇게 숨막히는 정교함으로 꾸며놓고 사람 발길 못닿게 한 채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조금 흐트러졌더라도 들어가서 거닐고 숨쉬고 어루만지는 쪽이 나는 더 좋단 말이지...
주로 일본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는 미술관은 그야말로 <왜색> 짙은 그림과 글씨 투성이라 건성으로 지나다녔다. 얼마 전 동화 원화 전시회에서 본 제비랑 아기
그림이 눈에 띄여서 반갑긴 했어도, 마음에 든 작품은 딱 이거 하나였음. 아저씨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 나도 듣고 싶다고 불현듯 생각...
둘쨋날 여정의 마지막은 역시나 인공미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하나카이로 정원. 나는 식물원 같은데 별로 안 좋아하지만, 흐드러진 꽃구경은 왕비마마가 특히 좋아하시는 거라 상품 검색하면서 은근 기대했고, 역시나 전 일정 가운데 왕비마마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며 흡족해했던 듯하다. 워낙 넓은 곳이고 시간도 촉박해 산책 대신 코끼리열차 비슷하게 생긴 빨간 기차를 타고 한바퀴 휘휘 돌아본 것도 다리를 쉬기에 좋았고.
계절마다 다양한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는데, 봄이라 주로 보이는 건 튜울립과 히야신스였고, 동산 가득 양귀비가 피어나는 중이기도 했다. 입구부터 꽃향기가 진동하여 눈과 코가 잠시 즐거웠음.
이 정도 튤립이야 에버랜드에도 있지 않나..
돔안으로 들어가면 어지러울 정도의 양란 천국
돔에서 사방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난 꽃보다 이런 조형물이 더 좋다
관광을 모두 마치고 료칸으로 가기 전에 일본의 이마트라는 자스코에 잠시 들르기는 했다. 혹시나 예쁜 장화가 있으면 사오려는 욕심을 품고 갔으므로 확인해보았지만, 지방 소도시 마트에 예쁜 장화가 있을리 없잖아! 해서 슈퍼에 들러 그날 저녁 목을 축일 캔맥주 세 개랑 찝찔한 과자부스러기만 사가지고 나와 버스에서 마냥 일행을 기다렸다.
둘쨋날 간 온천 이름은 카이케 온천이고 일왕이 묵었다고 해서 유명하다는 료칸은 토고엔이었다. 일본 전역에 체인망을 갖고 있는 호시노야 리조트 계열의 료칸이라더라. 전날 묵은 료칸처럼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안내하는 곳이 아니라 현대식 호텔처럼 검정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여전한 친절함으로 우릴 맞이했다. 여행 일정을 계속 바꾸고 조정하느라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합류한 탓인지,전날 방배정에서 하필 제일 먼 끝방에 묵느라 왕비마마가 고생하셨기 때문에 미리 가이드에게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방을 부탁하였더니, 료칸에선 다른 일행과 달리 우리만 1층에 방을 내주었다. 그것도 지하에 있는 온천과 2층 식당으로 갈 수 있는 별관 엘리베이터 바로 옆방으로. 그 정도 배려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는데, 짐을 풀자마자 다시 저녁을 먹으러 올라간 식당에서 우린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가이드는 다리가 불편한 분이 있다는 말로 방 배정에 편의를 부탁한 것뿐인데, 식당에 가보니 울 엄마 자리에만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음식을 차려놓은 것이 아닌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 게 불편하긴 해도 남들이 다 올려다보는 높은 자리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에 왕비마마는 난색을 표하며 민망함에 밥도 제대로 못드셨지만 (그래서 고맙지만 담날 아침 식사는 그냥 남들과 똑같이 밥상에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로선 료칸 측의 배려가 정말 인상 깊었다.
오른쪽에 살짝 비치는 테이블 다리가 왕비마마의 개인 식탁이다
료칸의 규모도 훨씬 크고 웅장한 데다 울 엄마에 대한 배려로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인지 카이세키 요리도 전날보다는 입에 맞는 편이었다. 전날엔 식당에 내려가니 이미 티라이트에 불을 붙여놓아 스키야키와 스테이크가 제멋대로 익어가고 있었지만, 여기선 일일이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에야 불을 붙여주었고, 찹쌀떡이 이상한 국물에 담겨있는 걸 비롯해 밥과 미소시루 이외에도 여기 보이지 않는 코스가 서너 가지 더 나왔다. 물론 오른쪽 위에 있는 소바는 점심에 먹은 소바를 떠올리게 했고, 회접시에 있는 가운데 생선은 방어로 짐작되는데 역시나 비렸다. 그나마 오징어(한치일수도..) 회와 나머지 회는 악착같이 다 먹어주었다. 저기 맨위 왼쪽 뚜껑 덮여 있는
이름하여, 딸기 치즈 무스
스끼야끼 국물이 맛있어서 밥 한공기를 다 먹을 수 있었음. 게다가 마지막에 나온 디저트가 흡족하다보니 전체적으로 꽤 괜찮은 식사를 한 느낌이 들더군. ^^
다시 방에 올라가 배가 좀 꺼지기를 기다리던 모녀는 아마도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거의 6층이나 되던 마쓰에성 천수각 사다리를 무슨 경주하는 사람처럼 뛰어오르고 내려온 탓에 나도 다리가 욱신거렸고, 여행오기 사나흘 전부터 홍제천변 산책길에서 사전준비를 하긴 했지만 역시나 운동 총량으로 볼 때 무리를 한 셈인 왕비마마도 녹초가 된 터였다.
하지만 뜨거운 몸을 담가 피로를 풀 수 있을 거라며 모녀는 묵직한 몸을 이끌고 다시 온천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온천 료칸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유카타 기념촬영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얼른 왕비마마를 앉혀놓고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피로에 지쳤는지 이미 엄니 표정은 별로 좋지않다.
처음 방으로 안내 받을 때 방에 준비되어 있는 유카타는 두벌 다 s 사이즈라면서, m사이즈를 친히 가져다준 직원의 친절도 왕비마마에겐 민망함이었다. 아 왜 일본 사람들은 그리도 날씬한 거냐고! 쳇...
전날 묵은 마츠노유 료칸 온천은 딱 우리나라 목욕탕 분위기가 강했는데, 그 이유는 대중탕에서 흔히 보는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와 플라스틱 대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토고엔 료칸 온천에는 옻칠한 나무 의자와 나무로된 대야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ㅎㅎㅎ
온천탕엔 당연히 디카를 가져가지 않았으므로 그 생김새를 보여줄 순 없지만, 우리방 욕실에 놓여있던 나무 의자와 대야로 느낌이나마 전하려고 찍어왔다. 둘다 진한 옻칠을 해서 빤질빤질한 느낌을 살리고, 의자 높이를 두배로 높이면 딱 온천탕에 놓여 있던 의자와 대야다. 한국 일식집에 가보니 저런 나무통에다 밥을 섞어서 요리를 만들어주던데.... 설마... 그들이 용도를 헷갈린 게 아니라 저런 나무 용기가 일본에서도 다방면으로 쓰이는 것이겠지?
온천탕엔 8시반쯤 내려갔는데 우리 일행들은 벌써 다 온천욕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고 월요일 밤이라 그런지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어서, 온천은 그야말로 왕비마마와 나의 독탕이었다. 2천엔 쯤 내면 별도로 가족탕을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2천엔 번 셈이다. 온천 료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벌써?) 또 언제 와보겠나 싶은 나는 왕비마마를 살살 꼬드겨 노천탕에도 나가보자고 설득했다. 전날밤보다는 확실히 덜 춥기도 하고, 낯선 데 홀로 있는 걸 겁내는 왕비마마를 두고 혼자 나갈 수도 없으니 어쩌겠나. 다행히도 왕비마마는 엉거주춤 나를 따라 노천탕으로 나가주셨고, 일부는 빨간색 뾰족 지붕을 덮어 물이 식는 것을 막았지만 가장자리에선 소나무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진기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별빛이라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새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선 소나무 아래로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로 땀을 식히며 즐기는 노천탕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전날 료칸은 온천 운영시간이 자정이면 끝났지만, 이곳은 24시간 운영이라고 했다. 1시반 부터 2시반 사이에청소를 하고, 새벽 청소가 끝나면 남탕과 여탕이 서로 바뀐단다. 양기와 음기를 섞기 위함이라는 얘기를 진즉에 들었는데 진짜로 그런 료칸 온천엘 왔구나 싶었다. 모녀는 또 다시 새벽에 탕이 바뀐 뒤 한번 더 온천을 하고 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염원을 다지며 방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방에 돌아온 우릴 반겨준 건 푹신한 이부자리. 심지어 들어가기 쉽게 이불도 저렇게 젖혀놨더라. ㅎㅎㅎ
몸은 젖은 솜 같았지만 마지막 밤을 좀 더 불태워(?)야 한다는 생각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캔맥주(산토리, 기린, 예츠비)를 꺼내 왕비마마는 한모금만 따라드리고 혼자서 기분을 냈다. 온천 내려갈 때 싸가지고 가서 노천탕에서 마실 걸, 하는 뒤늦은 회한이 들었지만 다 쓸모없는 짓... '다음번(과연?)엔 기필코!' 라고 생각하며 겨우 캔 하나에 얼굴이 벌게져가지고 잠을 청했다.
여행후기를 더 미루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거라는 조바심에 틈틈이 적어놓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러다 또 발동 걸리면 일 미뤄두고 포스팅에 열을 올리겠지만서도, 사진 크기 일일이 줄이고 올리는 게 번거로워서라도 하루씩 정리하는 게 좋겠다. 겨우 사흘간의 여행이 심리적으로는 일주일 이상 길게 느껴졌으니, 아마 후기도 쓸데없이 투덜투덜 주절주절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간만의 여행이었기도 하니까.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마감중에 여행이라니!) 예상했던 대로 한시간이나 눈을 붙였을까 서둘러 일어나 세면도구를 마저 챙기고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12시반 출발인데 공항 집결 시간은 10시까지. 집에서 공항까지 리무진 버스로 한시간이면 충분하지만, 30분에 가까운 배차시간을 감안하면 아침 일찍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인천공항 고속도로 이용료 7500원이 아까워서 늘 당연히 집앞 정류장에 서는 리무진버스를 이용하는데, 두 사람의 왕복 버스비 3만 6천원을 감안하면 동생 말마따나 차라리 차를 가져가서 주차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이 왕비마마의 편의를 위해서도 낫겠다는 걸 요번에 처음 깨달았다. 과연 앞으로 또 두 모녀가 해외여행을 할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_-;;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던 지인에게 일본 노선이 제일 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시간 남짓한 비행 시간동안 음료수도 나눠주고 식사도 나눠주고 기내 면세품까지 팔아야해서 번개불에 콩 볶듯 쉴틈없이 서둘러부쳐야 하기 때문이란다. 우리의 목적지인 돗토리현 요나고까지 예상시간은 겨우 1시간 10분. 당연히 기내식도 간단하고 부실한 도시락이었다. 기내식이 부실하니 미리 공항에서 요기를 해두라는 가이드의 조언을 들었던 터라, 나는 기내식을 먹는둥 마는둥 짧은 시간에 몇 개 안되는 일본말 외우기에 돌입했다. 아는 일본말이라곤 <스미마생>,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밖에 없는데, 왕비마마 간식이라도 사드리려면 <이꾸라데스까-얼마입니까> 같은 정도는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몇 마디 수첩에 적어간 터였다.
나쁜 머리로 내가 열심히 외운 일본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꾸라데스까? (얼마입니까)
고레오 구다사이 (이것 주세요)
오미즈/오차 구다사이 (찬물/녹차 주세요)
오이시이데스네 (맛있네요)
와까리마시다 (알겠습니다)
~와 도꼬데스까? (~는 어디입니까?)
그밖에도 몇 개 더 적어갔지만 짧은 비행시간 동안 외우는 건 무리였는데, 다 외웠더라면 억울할 뻔했다. 결과적으로 사흘간 저말은 한번도 쓰지 못했으니까. 얼마라고 물어서 대답해 주면 알아는 먹을 거냐고! 게다가 맛있다고 감탄할 만한 음식은 사흘간 6끼니 동안 딱 한번뿐이었으니... ㅠ.ㅠ
여행상품 검색하면서 난생 처음 들어본 요나고는 정말 작은 도시인듯 공항 규모가 정말 작았다. 오래 전에 가본 속초 공항에 비할까. 타고간 비행기도 작은 편이었는데, 외국인은 인솔 가이드 포함하여 우리 일행 14명이 유일했다. ㅋㅋ 덕분에 지문과 사진을 찍어 입력해야 하는 입국수속은 금세 끝났고, 옛날에 주민등록증 만들 때처럼 양손가락에 시커먼 롤러로 잉크를 발라 지문날인을 해야하는 것으로 상상하며 막연히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던 외국인 지문입력은 그냥 손가락 스캐너에 양손 검지를 대는 것으로 끝이라 오히려 좀 의아했다.
예상은 했지만 일본 기상청도 구라청이기를 바랐던 마음도 무상하게 요나고 공항 밖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국이랑 기온 비슷하다더니만 엄청 더 춥고! .ㅠ.ㅠ 비교적 따뜻하게 처덕처덕 입은 터라 인천공항과 기내에선 겉옷을 벗어 들고다녀야했는데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하늘이 하는 일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위로를 들으며 버스에 올라탄 뒤 드디어 조촐한 관광이 시작되었다.
첫 행선지는 사카이미나토. 사카이미나토에 조성되어 있다는 미즈키(엥? 미즈키 님?) 시게루의 요괴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서 미니버스에서 내려 기차를 타야했다. 만화 주인공들로 꾸며진 요괴기차를 타고 사카이미나토에서 내려 요괴 거리 곳곳에 서 있는 청동상이며 캐릭터를 살려 꾸민 가게를 구경하는 게 관광의 목적이었으니, 비까지 내리는 와중에 울 엄니가 그런 구경을 반길 리 없었고 일행 중 결혼 21주년을 맞아 여행왔다던 중년 부부도 울 왕비마마와 함께 버스를 지켰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만 후다다닥 수박 겉핥기 식으로 구경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나야 미즈키 시게루도 모르고 주인공 기타로도 모르지만 시간 들여 꼼꼼이 구경하고 싶은 거리여서 좀 안타까웠다.
이름 모를 역의 풍경, 나무가 신기하게 생겼다
마침 기타로 열차가 지나갔다
우리가 탄 열차? 전철?
천장에도 온통 요괴 캐릭터 그림
역 광장 초입에 있는 청동상 - 가운데 할아버지가 미즈키 상일까?
공원 가로등은 물론이고 택시에도 눈알요괴가 달려있더라 ㅋ
미즈키 로드 인증샷 - 미즈키 니의 거리가 있다니!
우산은 포기하고 후드 티 뒤집어 쓰고 돌아본 거리에서 발견한 벛꽃은 죄다 이런 수준이었다. 일주일만 더 일찍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ㅠ.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겠나.
어쨌거나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상점과 요괴상을 찾아보는 재미가 뭐 그리 쏠쏠할까 싶었던 처음 생각과 달리, 요괴 캐릭터 모양으로 빵을 구워 파는 빵집이 없나 (3종류 사먹었는데 맛도 좋았다!) 정원 예쁜 찻집이 없나, 캐릭터 상품점이야 별로라고 쳐도 반나절쯤 돌아다녀도 좋겠다 싶은 곳이었다. 만화내용을 알고 왔더라면 더욱 금상첨화였겠지만...
주인공을 안찍을 수야 없지. 얘가 기타로다
젤 귀엽던데 얘 이름은 까먹었다 ㅠ.ㅠ
[#M_요괴 빵?|접기|
우리가 타고갔던 기차 캐릭터 모양의 빵 - 좀 뭉개졌는데..담날 아침에 먹었다 ^^
뭐니뭐니해도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따라가서 제일 싫은 건, 내 마음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가이드가 정해준 시간에 맞춰 헐떡거리며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도 일부러 꾸며놓은 거리 안쪽으로 그냥 동네 구멍가게 같은 잡화 식료품점에서 나 어릴 때 '미깡'이라며 사먹던 옛날식 밀감도 발견했고, 시골스러운 쌀집도 구경하며 신기했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 다음 코스를 위해 억지로 버스에 올라야 했다. 으휴.
동해에 인접해 일몰이 절경이라는 신지코 호수가 다음 행선지였으나, 비바람치는 오후에 일몰은 무슨 일몰. 가운데 소나무섬을 만들어놓았으니 그거라도 구경하라는 말에 버스에서 내려 한 다섯발자국 가다가 사진 한방 찍고는 그냥 돌아섰다. 그래도 이 사진속의 두 연인은 젊어서 비바람 무릅쓰고 한참이나 다녀오더라마는...
동해바다 내려다보러 올라간 그 다음 전망대도 당연히 나는 시큰둥했고, 어서 온천료칸에 가서 푹 쉬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코스정식 카이세키 요리에 대한 기대도 허기와 함께 부풀어올랐고... 대체로 요번 일행들의 목적은 온천료칸 체험인듯 했으므로, 시답잖은 관광 코스는 한둘 정도 빼고 푹 쉬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혹시라도 불만을 품은 사람이 나중에 여행사에 항의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그 바람을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다. 괜찮은 온천 료칸 골라서 푹 쉬는 여행을 계획하려면 그저 호텔팩이나 자유여행밖에는 방법이 없는듯.
<명탕순례>랍시고 우리가 첫날 간 곳은 타마즈쿠리 온천. 돗토리현 공항에 내리긴 했어도 이미 어느 시점엔가 시마네현으로 넘어가 그곳 주소는 시마네현이라고 했다. 온천 역사가 1300년이나 된다고 해서 저녁이나 아침에 짬 내서 온천마을 산책도 할 작정을 품고 떠났으나, 여행 가서 내가 그런 부지런을 떨어본 역사가 없으니 당연히 패스~. 게다가 반나절 만에 이미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듯한 왕비마마를 모시고선 그저 온천욕이나 할밖에 아무것도 계획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숙소인 마츠노유 료칸
료칸 안뜰 -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온천욕탕이다
원래 내가 꿈꾸었던 온천료칸 체험은 역사가 몇백년씩 되는 소규모 전통 료칸에서 기모노를 차려입은 오카미상의 깍듯한 시중을 받아보는 것이었으나 ㅠ.ㅠ 그런 곳은 단체손님을 받지 않는 듯, 패키지 상품으론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항공권과 숙박 예약만 대행해주는 자유여행 상품은 더러 있었으나, 일본말도 못하면서 왕비마마를 모시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진즉에 포기한 뒤, 그나마 좀 괜찮은 온천료칸 상품을 검색해본 터였다. 숙소 건물에 들어가자 마자 풀냄새 같은 다다미 냄새가 느껴지더니 방에 들어가자 확실히 다다미방의 향취가 느껴졌다. 바로 이거야, 싶은. 온천료칸에 가면 저녁 먹기 전에 먼저 온천욕부터 하는 거라는데, 우리는 체크인 시간이 늦어 곧장 저녁을 먹어야 했다. 내가 꿈꾸었던 카이세키 요리 또한 다다미방으로 가져와서 차려주는 것이었으나, 식당으로 내려가야 했으니 또 한번 실망...
이것이 카이세키 요리
그렇다고 대규모 식당에서 객실손님 전체가 와글와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행을 위해 따로 마련된 소규모 연회실 같은 곳에서 각자 한 상씩 차려진 저녁밥을 먹는 식이었고,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종업원들이 깍듯하게 시중을 들기는 했다. 열심히 외운 오미즈(찬물)이며 오차(녹차)를 달라고 입도 떼기 전에 눈치 빠르게 따라주시고... 일본인들의 친절함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매번 납작 엎드리듯 무릎 꿇고 시중드는 건 어째 영 불편하더라.
암튼 지역특산물인 게요리, 쇠고기 스테이크, 스키야키, 사시미, 소바... 온갖 진미가 나오는 것으로 기대했던 코스정식의 겉모습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맛이!!
우리나라 활어회와 달리 일본 사시미는 약간 숙성한 맛을 최고로 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바닷가에 가까워서 특선요리가 생선이란 것쯤은 짐작했음에도, 첫날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나는 허기를 빵과 과일로 달래야했다.
나말고도 열심히 큼지막한 카메라를 가는 데마다 들이대는 여학생이 있기는 했지만, 괜스레 자꾸 사진찍는 게 민망해서 얼른 한장 누르고 마느라 저 사시미 위에 덮인 종이도 걷지 않아 좀 민망하다. 아무려나 네다섯 점 올려 있던 생선회는 비려서 먹다 남겼고, 게다리는 차가웠으며 특히 제일 위 가운데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요리는 생선과 가지, 두부를 연잎 같은 데 싸서 찐 거였는데 어찌나 비린지 단박에 비위가 상할 정도였다. ㅠ.ㅠ 왼쪽 위 뚜껑 덮여 있는 스키야키는 어찌나 짠지 아래 있던 날 달걀을 풀어 넣어도 간이 맞질 않고 나머지 밑반찬은 차거나 비리거나 밍밍해서, 첫날 저녁 제대로 먹은 건 하얀밥과 미소시루와 쇠고기 몇점이 다였다. 카이세키 요리 엄청 맛있다고 들었는데 이곳만 실망스러운 걸까? 우쒸...
식탐녀의 상한 마음을 그나마 달래준 건 방으로 돌아와 발견한 푹신한 이불 두 채였다. 다녀와서 알아보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규모 료칸도 식당은 별채에 마련해두고, 아침 저녁 밥 먹으러 다녀오는 사이 이불을 개고 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듯하다.
이불을 보니 하루만에 너무 피곤해서 온천이고 뭐고 한숨 먼저 자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애써 몸과 마음을 추스려 유카타로 갈아입은 뒤 온천으로 내려갔다. 굳이 목욕탕에 귀중품을 가져갈 이유가 없겠지만, 어쨌든 일본 온천에는 열쇠로 잠그는 라커 없이 그냥 바구니 아니면 나무로 짜놓은 칸막이에 옷을 벗어놓는다. 들어갈 때 자기 번호만 눈여겨 보면 그만이다.
온천 성분 같은 거 전혀 모르긴 하지만, 완전히 말간 물은 적당히 따뜻했고 대강 씻었는데도 머리칼과 살결이 매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료칸에 딸린 온천탕이므로 규모는 당연히 그리 크지 않고, 탕이 종류별로 마련되어 있는 일반 목욕탕 정도를 상상하면 될듯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온양온천이랑 강화도 해수온천에 가본 적 있는데, 거기나 여기나 느낌은 다 비슷했다. 노천탕도 있었지만, 춥고 피곤해서 우린 나가볼 엄두도 내지 못해 그건 좀 아쉬웠다. 물이 다르다고 칭찬을 거듭하며 모녀는 다음날 새벽에도 한번 더 온천욕을 하자고 작심했지만 ㅋㅋㅋ 막상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당연히 온천욕 대신 잠을 더 욕심냈다. 아무렴, 잠이 더 중요하고 말고.
_M#]
일요일에 떠나 어제 무사히 돌아왔음. 동생들은 사흘이 후딱 갔다면서 벌써 와서 아쉽겠다고 위로했지만, 모녀의 2박3일은 어찌나 길었는지 원래 예정대로 3박4일이었으면 큰일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나의 바람과 달리 도착하는 날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바람에 소망하던 꽃비는커녕 육중한 노친네 부축하고 우산 받쳐들고 다니느라 무수리는 완전 녹초 상태로 몸살 직전까지 빌빌대야 했다. 게다가 어제 인천공항에 내리니 갑자기 겨울 날씨! 삭신이 쑤셔서 어젯밤부터 오늘오전까지 두 모녀는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끙끙 앓았음. ㅠ.ㅠ
동해바다에 면한 곳이라 느낌이 속초나 강릉 즈음으로 여겨지는 톳토리현, 시마네현 일부를 보고 온 주제에 일본이 어쩌니 저쩌니 말하는 건 가당찮은 짓이겠지만 어쨌거나, 처음 가본 일본에 대한 느낌을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 생각보다 벚꽃이 별로 없더라. 끝물이기도 하고 비가 와서 많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아직 벚꽃축제기간이라는데 공원에 서 있는 벚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음. 진해나 여의도처럼 일본에도 일부 대도시에만 대규모로 벚꽃길이 조성되는 건가?
- 화산지역이라 당연하겠지만, 일본 온천물 우리나라 온천물보다 좋더라. 온천욕 별로 안 좋아해서 효능 따위 잘 모르는 편인데, 머리감고 나서 곧장 매끈거리는 머릿결이 느껴졌음. 떠나는 날 아침에 한번 더 담그지 못하고 돌아온 걸 모녀 둘 다 후회스러워했다. ㅋ (나이가 들면서 온천이 좋아지는 걸지도.. -_-;;)
- 다다미방으로 된 온천료칸 체험, 은근 매력있다. 다다미를 해마다 바꾸는지 어쩐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싱그러운 돗자리 냄새 같은 다다미 냄새가 풍겼고, 저녁 먹으러 다녀오는 사이에 다기 놓여있던 테이블 치우고 이불 깔아놓는 서비스 마음에 들었음.
-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음식맛과 염도에 차이가 있으니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어쨌거나 이번 여행의 현지음식은 절반 정도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모험정신 강하고 식탐 많은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겠나. 일행 중엔 컵라면과 과자부스러기로 거의 연명한 이도 있었다. ㅋ
- 귀엽고 아담한 경차가 정말 많더라. 경차 비율이 30퍼센트가 넘는다는 말만 들을 때랑 직접 보는 거랑 역시 느낌이 다르다.
- 전통과 옛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였다. 전국 어딜 가나 도시든 시골이든 볼썽사나운 아파트와 시멘트 양옥집 투성이인 이 나라와 달리, 오래된 일본집스러운 느낌의 나무로 된 집들이 참 많았다.
본격후기는 슬슬 밀린 일 눈치 봐가면서 올리도록 하겠음. 여행은 늘 좋지만, 집에 돌아오는 건 더 좋다. 예전엔 판에 박힌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싫어서 항상 여행 끄트머리에 느끼는 아쉬움이 몹시 컸던 것 같은데, 이번엔 진심으로 귀가를 기다렸다. 오죽하면 제목이 <살아돌아옴>이겠나. 집에 와서 기쁘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