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저녁에 떠나서 순천에서 1박하고 9일 새벽에 순천만을 돌아본 뒤, 곧장 조계산을 오르는 빡빡한 일정에 따라 나섰다. 경기 강원 근교 산이야 뭐 마음 먹고 친구들과 스케줄 짜면 갈 수는 있겠지만, 남도 쪽에 있는 산들은 이렇게 단체로 버스 타고 가는 기회가 아니면 가보기가 쉽지 않다.
서울 모처에서 7시30분에 출발. 밤길이고 거의 다 가서도 길이 꽤 막혀서 밤 12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버스에서 나눠준 김밥을 헐레벌떡 먹었지만 그래도 출출한 건 사실이고 결국 새벽 1시반에 라면에 계란 넣어 끓여먹고서야 뿌듯한 배로 몸을 뉘였다.
당연히 잠은 설쳤고, 계획대로 6시에 펜션을 출발해 순천만 돌아보기 시작. 으아.. 이 얼마만에 보는 여명과 일출인가.
벌써부터 오리들이 꾸륵꾸륵 울어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높고 멀어서 사진엔 잘 안보이지만 맨 오른쪽 사진엔 활강하는 새 한마리가 찍혔다!
7시 5분이 일출시간이라며 다들 헐레벌떡 용산전망대라는 곳을 오르는데... 에고에고... 날도 추웠고 길은 멀고.. 결국 맨앞 일행은 몰라도 다들 일출을 보는 건 실패했다. 그래도 올라간 보람이 있을 만큼 숲길도 풍광도 아름다웠음.
순천만 갯벌에서 자라는 갈대도 멋졌지만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동글동글한 섬과 구불구불한 물길, 멀리 보이는 섬들이 어쩜 그렇게 정겹고 에쁜지! 오른쪽 사진에서 붉게 보이는 건 '함초'라고 한다. 함초소금이 분홍색인 이유가 있었어!
전날 밤에 미리 라면을 안 먹었으면 어쩔뻔했냐고 계속 투덜댈 정도로 이미 뱃속은 허기져서 꼬르륵꼬르륵 울어대고, 방한에 신경을 덜 쓴 관계로 내려올 땐 손시리고 춥고... 아침 식당에 가자마자 꾸역꾸역 밥으로 속을 채웠다.
다행히 조계산 정상 장군봉을 향해 가는 대신 이왕이면 여유롭게 가을산을 만끽하는 쪽으로 방향이 수정되어 선암사에서 송광사 넘어가는 길로 모두 향했다. 얼마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대 사찰 중 하나인 선암사엘 드디어 가보는군 싶어 신이 났다. 까마득한 옛날 고딩 시절에 '여름수련회'로 갔던 통도사와 대흥사, 마곡사를 가본 걸로 친다면, 비교적 최근 답사로 다녀온 법주사, 부석사를 포함하고 이번 등산을 계기로 6개 클리어. 안동 봉정사만 가보면 되겠다. (그러나 통도사, 대흥사, 마곡사도 30여년전이 아닌 요즘 모습을 좀 보고싶다. ㅠ.ㅠ)
선암사에서 꼭 눈여겨보아야할 것들이 여럿이라고 현직 역사선생님이신 선배가 미리 준비한 동영상도 보여주고 설명도 해주는 걸 비몽사몽 대충 넘겼으나 그럼에도 선암사의 백미라는 승선교는 그 이유를 알겠더라.
승선교의 무지개 아치 안으로 쏙 들어오는 저 전각을 보려면 개울 아래로 내려가야하는데 ^^; 귀찮아서 난 내려가지 않았고 선배님들이 찍은 사진을 이렇게 퍼왔다. ㅎㅎ 내가 찍는다고 더 잘 찍을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 사진은 내가 직접 찍었음. 파란 하늘과 앞서 걸어가는 일행들의 뒷모습과 노란 단풍이 정말 예뻤다.
올 가을은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잎들이 물들기 전에 말라버리거나 타버리거나 오그라들어서 단풍이 별로 안 예쁘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아직 단풍이 절정이 아닌 순천엔 예쁜 나무색이 정말 많았다.
빨갛고 노란색, 그 중간색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자아냄. 그러나 역시 휴대폰으로 담아온 사진들은 그 느낌을 제대로 살려내주지 못하고... 에효.
이번에 처음 안 건 선암사가 조계종 사찰이 아니고 태고종 사찰이라는 것. 그래서 스님들이 입은 가사 색깔이 갈색이 아니고 새빨간 색이다. 태고종은 승려도 결혼을 할 수 있으니 각자 스님들별로 살림집이라고 할 수 있는 요사채가 곳곳에 나뉘어 있고 크고 작은 암자도 자잘하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런 구조의 절집은 정말 처음 보는 느낌.
어딜 찍어도 옆 건물 기와가 서로 겹쳐져 걸리는데 그게 또 매력이다. 한옥집 짓고 살며 처마에 나도 풍경 매달고 싶으다.. ㅠ.ㅠ
어딜 봐도 고풍스러운 사찰의 매력이 느껴졌는데... 꼭 보아야할 것 중 하나가 원통전 모란무늬 문살이라고 해서 홀로 앞장서 다니며 마구 찾아다녔으나 실패. ㅋㅋ 결국 선배님이 가르쳐주셨다. 내가 보러 다녔을 땐 문을 열어 젖혀놓고 예불 중이어서 보였을 리가 없다. 아래 맨 오른쪽 사진이 바로 그 선암사 원통전의 모란문살이다. 진짜 정교하고 아름답고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고색창연하고...
선암사의 '뒷깐'까지 서둘러 구경을 마친뒤 송광사로 출발했다. 스님들이 노상 다니는 길이라 수월하다매! 기막혀서... 돌계단이 끝이 없고 구간구간 경사는 또 왜 그리 가파른지. 잘난 척 스틱 없이 오르다가 결국엔 헉헉대며 스틱을 펼쳐들고 몸을 실었다. 다행인 것은 조계산엔 중턱에 보리밥집이 있어서 굳이 도시락을 싸들고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바라보이는 산자락에도 동글동글 단풍색이 예뻤는데...
부침개와 도토리묵을 추가한 4인 상의 위용.
몇번의 헉헉대는 고비를 넘긴 끝에 깔딱고개를 넘고 넘어 '원조 보리밥집'에 도착했다. 산속에 보리밥집도 심지어 여러개! ㅋㅋ 비닐하우스를 곳곳에 짓고 그 안에 평상을 깔아놓은 식이었는데, 배도 고팠지만 우와 쌈채소도 싱싱하고 반찬이 다 맛있었다. 한잔 곁들인 동동주인지 막걸리도 환상의 맛!
아침을 배불리 먹은 뒤 1시도 안 되어 맞은 점심시간인데도 밥한 공기 다 비벼서 이 한 그릇을 싹싹 다 먹어치웠었더니만 진짜 잘먹는다고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아 예, 제가 간식은 안먹어도 밥은 엄청 잘 먹습니다요. 밥심으로 살지요..
이 원조집은 무려 1980년(!)부터 영업을 했대고 월요일엔 휴무란다. 도시락 없이 월요일에 조계산 등산하다 찾아가면 큰 낭패일듯. 혹시 모를 훗날을 위해 나도 기록해놓는다. (근데 과연 또 가게 될까? ㅠ.ㅠ)
흡족하게 부른 두들기며 출발해보니 송광사까지 아직도 남은 거리가 3.5km쯤. 다시 수많은 돌계단과 비탈을 오르고 내려 드디어 송광사를 만났다. 정상만 안 갔지 거리로나 경사로 보나 힘든 등산은 똑같이 다 한 셈이었다. 다들 지치고 시간도 많이 지체되어 송광사 경내는 최대한 후다닥 돌아보기로.
초록색부터 연두색, 노란색, 선홍색까지 모두 매달고 있는 환상적인 단풍나무들이 곳곳에 있었으나... 사진으로 찍으면 이 정도가 최선이다. ㅠ.ㅠ
선암사의 고색창연함에 너무 감탄했던 모양인지, 다분히 새것으로 갈아엎어 현대식 느낌이 풀풀나는 송광사는 상대적으로 별로 감흥이 없었다. 나름 멋진 건축이다 싶었던 회랑과 누각의 위용은 이 정도...
내가 귀찮아서 휙휙 찍은 사진들이 위와 같다면 다른 분들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모습은 또 좀 다르다. ^^;
왼쪽은 내가 찍은 선암사의 해우소. 신발 벗고 들어가야 함! 그래서 난 안들어갔고.. 가보면 엄청 높아서 고소공포증이 느껴진다고 한다. 안 들어가길 잘했지. ㅋ
아이폰으로 대충 난사
누군가 신형폰으로 찍어 공유해준 사진
이날은 아침 6시부터 펜션을 뛰쳐나가 집에 11시반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3만7천여보를 걸었더라. 하산 길에 무릎보호대를 했음에도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른쪽 무릎이 아파 낑낑거렸고, 다음날 당연히 근육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1박 2일간 이렇게 알차게 돌아보는 일정이 또 어딨겠나 싶어서 뿌듯했던 가을나들이. 단풍든 나무는 정말 실컷 다 보아서 여한이 없다.
뜻밖의 누수공사로.. 아니 정확히는 사람들에 치여 마음 고생이 너무너무 심한 나날을 보내며 당연히 불면에 시달렸다. 수시로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열이 막 오르고 (어쩌면 이건 폭염 탓으로 생겨난 온열 질환의 징후일 수도 있겠으나;;) 거의 24시간 에어컨을 틀어도 심신이 계속 고달펐다.
스트레스로 바짝 긴장한 머리가 때로는 활자로 달래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번엔 도무지 책을 들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깊은 숲속에 들어가서 소리라도 고래고래 지르고 싶은 심정?
그래서 정말 미친 척 무박2일로 지리산 천왕봉을 가자는 이야기에 홀라당 넘어가 금요일밤 10시에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 결정엔 점점 몸쓰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드는 상황도 한몫을 했다. 내년엔 무릎이나 발목이 더 아파서 등산과 영영 이별을 할 수도 있는데! 하루라도 더 젊을(?)때 로망인 지리산에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하필 최고기온이 36, 7도를 육박하는 한여름에 간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설마 지리산은 시원하겠지 막연히 상상했다.
생판 모르는 일반 산악회 주최 지리산 등산에 나포함 지인 4명이 끼어서 가는 형식이었는데, 놀랍게도 무박2일로 새벽 3시부터 지리산 종주 33km를 13시간만해 해치우는 A팀이 16명이나 됐다. 혹시 버스 출발 시간을 넘겨 낙오되면 서울로 돌아오는 건 각자 알아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단다. 우어... 우리는 거의 최단코스로 10시간만에 천왕봉을 찍고 내려오는 B팀. 13.5km를 10시간에 완주하면 된다고 했다.
밤새 버스에서 자야 수월하게 등산을 할 수 있을 테니 안대와 목베개까지 준비했지만 ㅠ,ㅠ 그럼 그렇지... 당연히 숙면을 취할 순 없었고, 어느 틈에 3시가 다 되어 A팀이 성삼재에서 우르르 버스를 내렸다. 곧이어 3시 30분쯤. 우리도 백무동 계곡 주차장에 당도했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을 켜고 등산 준비를 했다.
새벽 지리산은 역시나 시원해서 23도를 가리켜 다행이었지만, 도시락과 얼음물, 커피와 간식까지 사상 최고의 무게로 꾸린 배낭이 어깨와 허리를 짓눌렀다. 물론 가장 무거운 건 비몽사몽 피로감과 불안감이 더해진 나의 육신이었다. 등산 고수이신 선배님의 안내로 빠르지도 않게 차근차근 경사를 오르는데 음...이상하다. 왜 숨이 잘 안 쉬어지지? 자꾸만 다리가 처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해도 폣속에 공기가 잘 가 닿지 않는 느낌이랄까.
동행들이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리더이신 선배님은 속으로 나 때문에 천왕봉은 글렀고 장터목 대피소까지만 갔다가 하산해야겠다고 계산을 하셨다고 한다. ㅠ.ㅠ 말도 안되는 추측일 수도 있겠는데, 내 짐작으로는 폐소 공포증 같았다. 어둠 속에서 각자 헤드랜턴에 의지해 자기 발밑만 보고 가는 야간 산행이 상상속에선 되게 멋질 것 같았는데 현실의 나에겐 그냥 공포였던 모양이다. 조금 오르다 쉬기를 반복하며 내가 변명을 했다. 해만 뜨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실제로 사방이 서서히 밝아지자 숨이 잘 안쉬어지는 것 같은 짓눌린 느낌이 사라졌다. 미안한 마음에 그다음부턴 내가 맨앞장을 섰는데 초반에 많이 까먹은 시간을 벌충하겠다는 의욕이 간간히 과다해져 오버페이스! ㅋㅋ 이내 선두를 선배님께 양보했다.
여기가 바로 장터목 대피소
새벽 4시부터 오르기 시작해 장터목대피소에 당도한 것이 8시 30분쯤. 6시반쯤 간식으로 빵을 좀 먹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싸온 도시락을 먹을 순서였다. 선배님이 돼지고기와 라면사리까지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끓였고, 나는 산에서도 굳이 잘 먹겠다는 일념으로 얼린 냉면 육수와 도토리묵, 양념한 김치, 채썬 오이로 묵사발을 만들었다. 장터목 휴게소에선 바람이 꽤 불어 그늘에 있으면 바람막이를 입고도 덜덜 떨렸던 참이라, 뜨끈한 찌개도 먹고 곧이어 시원한 묵사발도 먹으며 꾸역꾸역 엄청난 양의 밥을 삼켰다. 점심은 하산 후에 느즈막히 식당에서 사먹을 작정이라 최대한 많이 먹어두라는 선배님의 당부 말씀. ㅋㅋ
해발 1750미터라는 장터목 대피소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그야말로 장엄했다. 와.. 지리산이 정말 큰산이로구나. 사방으로 겹겹이 펼쳐진 능선이 끝이 없었다.
부른 배를 두들기며 다시 천왕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 시간이 9시 30분.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1.7km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상까지 목표시간은 대략 11시. 정상에서 좀 노닥거리다가 3시간 동안 하산해 점심 먹으면 딱이겠군, 했다.
보통 산에서는 1km 걷는데 30분을 예상한다. 헌데 지리산 표지판은 거리표시가 너무 박한 느낌! 서울 근교 산에서 느끼는 거리감보다 너무 멀었다. 500미터 거리 줄이기가 어찌나 어렵고 오래 걸리던지. ㅠ.ㅠ 틀림없이 표지판 잘못됐다고 투덜투덜 나중엔 욕이 막 나왔다. 아니 이게 무슨 1.5km냐고! 3km도 넘는 것 같은데!
길이 멀어서 욕이 나오는 것과는 별개로 운무와 구름에 휩싸였다 벗어졌다를 반복하는 풍경은 기가 막혔다. 우와...
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계속 이렇게 운무가 몰려오면 천왕봉에서 시계가 별로 안 좋을텐데.. ㅠ.ㅠ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이왕이면 하늘이 맑게 개기를 빌며 바위 비탈을 오르고 또 올랐다.
드문드문 고사목을 만나 높은 산임을 실감하며 드디어 1915미터 천왕봉 정상!
걱정했던 대로 정상 부근은 구름에 휩싸여 시계가 좋지 못했고... 좁아터진 정상석 부근엔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고 무셔라.
째뜬 내가 드디어 지리산 꼭대기를 올랐다는 뿌듯함과 행복함에 휩싸였다. 한라산 꼭대기는 어렸을 때 멋모르고 올라가긴 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남한 최고봉을 올랐고, 두번째로 높은 지리산 천왕봉도 드디어 구경했으니 이제 남은 건 설악산 대청봉 뿐이로다! ㅎㅎㅎ 장하다.
하산길은 중산리 계곡으로 3시간만 내려가면 된다고 했으니 최대한 정상 등반의 기쁨을 만끽하며 아이스커피도 한 모금 마신 뒤 11시반쯤 슬슬 하산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복병은 역시나 한낮의 더위였다. 천왕봉 정상 코스는 능선길이 많지 않아 그리 더운 줄 모르고 올랐는데, 내려갈 때는 숲을 벗어나 뙤약볕으로 걷는 길이 꽤 됐고, 28,9도 정도라고는 해도 습기와 열기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물은 총 2리터 정도면 넉넉하다고 했었는데;;; 1.5km쯤 남았다고 했을 무렵 결국 내 물은 동이 나버렸고 후배와 동기에게 물과 음료를 얻어마시며 민폐를 끼쳐야 했다.
산에서는 절대 주변 사람들 물 뺏어먹으면 안된다고 배웠는데 어흑. 게다가 총 6.5km였던가... 3시간이면 된다고 하던 하산길이 얼마나 길고 지루한지. 가도 가도 끝이 없어! 하도 지리지리해서 지리산이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체력은 점점 고갈되고 다리는 무겁고, 땀은 쏟이지는데 계속 덥고... 어휴. 경사가 가파르지 않는 한 숨가쁠 이유도 없는 하산길은 속도만 잘 유지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체력이 떨어져 산을 내려가는 게 고역일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산길에 비하면 오히려 천왕봉 올라가기 직전엔 쌩쌩한 편이었네 그려.
폭염에 무박2일로 지리산에 간다고 했을때 주변에서 혹시 탈진할까 우려된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이해가 갔다. 숨도 안찬데 너무 힘들고 진빠지고 금방이라도 눕고 싶고. 마지막 삼거리대피소였던가... 거기서 쉴 땐 나도 모르게 배낭을 맨 채 의자에 드러누워버렸다.
하여간 10시간을 예상했다가 11시간 반만에 무사히 내려와 중산리 계곡 앞 식당에서 대충 씻고 옷도 갈아입은 뒤 감자전과 비빔밥으로 맛나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서울로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은 5시. 종주팀 중에는 무려 9시간만에 33km를 달려 내려와 벌써부터 쉬며 기다린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인간이 아닌게야. ㅠ.ㅠ
무사히 서울로 돌아와 24시간 만에 신사역 앞에서 버스를 내리고 보니, 정말 지난 시간이 꿈결 같았다. 우와 내가 지리산 천왕봉엘 올라갔다니! 당연히 그날은 지리산 숲의 정기를 받으며 체력을 탈탈 소진한 뒤끝이라 집에 돌아와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그러나 지리산 효과는 며칠 가지 못했다. 매일같이 부딪쳐야 하는 아래층 아저씨 아줌마와 말을 섞기만 해도 엄마도 나도 혈압이 올라갔다. 우엑!
번역은 과거 수도자들의 수행 도구였다는 말도 있듯이, 드물게 잠깐씩 짧은 작업을 할 땐 그래도 마음의 평화가 온 것 같았지만, 불면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면 잠 안오는 밤에 뽀시락뽀시락 또 생산적인 취미생활을 하는 수밖엔 없었다. ^^
마침 출판사 다니는 후배가 서울도서전 홍보물로 만들었다는 에코백을 준 게 있었는데, 보라색과 민트색 중에 내 취향대로 민트색 프린트를 고르긴 했어도 딱히 내가 좋아하는 '푸른 색'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반대편을 푸른색 자수로 장식하리라!
자수책을 뒤적여 여름에 맞게 시원해보이는 도안을 골라 가방에 밑그림을 그렸다.
요즘엔 알록달록한 자수보다 이렇게 단색 자수 도안이 더 마음에 든다. 나중에 자수액자를 만들어도 예쁠 것 같다.
왼쪽이 선물받은 에코백의 원래 정면이고, 가운데는 내가 자수를 놓아 새로이 탄생한 정면이고... 에코백의 단점인 수납 문제를 해결하고 지저분한 자수 실매듭도 가리고자 한쪽에만 천을 대고 주머니도 달아 오른쪽 사진처럼 안감이 탄생했다.
생각보다 꽤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자수실도 많이 들어, 처음 2개나 사놓았던 DMC 791번실이 모자라 중도에 멈췄다가 동대문시장에 다녀와야했다. 벌써 두어번 들고 나가보았는데, 이젠 정말 가벼운 천가방이 아니고선 어깨가 아파서 뭘 매고 다닐 수가 없다. 이것저것 많이도 넣고 다니는 내 취향엔 크기가 좀 작다 싶지만 그래도 캔버스 천이 두툼한 편이라 꽤 오래 애용할 것 같다.
가방의 완성과 더불어 더 이상 맘고생 할 일이 없으면 했으나.. 지난주에도 또 접촉사고로 전전긍긍할 일이 생겨 밤에 또 자수함을 꺼냈다. ㅠ.ㅠ 이번엔 간단하게 선인장 도안을 이리저리 참고해 냉장고 마그넷을 만들었다.
마침 친구 생일도 돌아오겠다;; 지난번에 받은 기프티콘에 답례겸... 자수 브로치따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친구의 취향을 감안한 선택이다.
친구의 이니셜까지 새겨넣고도 막상 냉장고에 붙여보니 넘나 예뻐서 선물하지 말고 그냥 내가 가질까 한참 고민했다. ㅋㅋ (그러나 아직 전달하지 않았으므로 계속 유혹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또 만들긴 마그넷 재료가 부족해서리...
요 전 포스팅을 올린 뒤 비로소 나름 마음의 정리도 많이 된 느낌이고, 불면도 어느정도는 해소된 듯하다. 어차피 창피한 김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나의 노력과 그 결과물 또한 자랑하고 싶었다. 남아도는 잉여력과 생산성의 결과물이 예쁘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은가. ㅠ.ㅠ
처음 아팠던 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설날이었던가 어느해 명절에 힘든 노동을 다 견디고 난 다음날, 스트레스 풀러 약속을 잡았는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일이 갑자기 고통스러웠다. 발을 디딜 때 아픈 게 아니고, 다리를 접을 때 무릎 부분에 통증이 느껴졌던 거다. 그날 하루 종일 절뚝이며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명절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그랬나보다 막연히 생각했었다. 푹 자면 낫겠지.
당시에도 아프다가 안 아프다가 통증이 반복되기를 여러 달. 문득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겁을 내다 결국 정형외과에 가 엑스레이를 찍었다. 관절도 연골도 이상은 없다면서, 의사는 다리 근육강화 운동을 좀 열심히 하라고 했다. 소염진통제를 한 이틀 받아왔던가. 언제 그랬었나 싶게 무릎은 곧 멀쩡해졌다. 스트레스성 상상통이었나 싶을 정도로. ㅎㅎ
그러고는 또 몇년. 그 사이 나는 놀랍게도 '등산인'이 되었다. ^^; 2016, 17년엔 하루 20km가까이 걷는 것도 예사인 서울 둘레길도 걸어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등산만 했을 때는 무릎 통증이 재발되지 않았었는데, 아스팔트 걷는 길도 많은 둘레길이 문제였던가? ㅠ.ㅠ 암튼 작년부턴 등산을 3시간 이상 하면 꼭 내려올 때 무릎이 아팠다. 왼쪽 다리가 아플 때도 있고 오른쪽 무릎이 아플 때도 있어 통증이 왔다리갔다리 했었는데, 12월부턴 계속 오른쪽 무릎만 아팠다. 그리 많이 걷지도 않는 날이었는데, 산에 올랐다가 간식 먹으며 좀 쉬다보면 일어날 때부터 다리가 뻣뻣하고 무릎을 접을 때마다 아팠다. 젠장..
1월 첫 등산인 북한산 백운대를 갔던 날도 내려오면서 퍽 고생을 했다. 많이 아파서 오른쪽 무릎을 세게 짚을 수가 없으니 왼쪽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갔고, 결국 다음날엔 양쪽 다리가 모두 아팠다. 왼쪽은 근육통, 오른쪽은 원인 모를 통증. 하루 푹 자고 나면 증상이 사라지곤 했는데, 이젠 며칠 지나야 멀쩡해졌다.
올해 결심 중 하나는 등산을 다시 열심히 다니는 거여서, 엊그제 다시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사실은 오른쪽 손목도 아픈지 꽤 된 상황이었다. 영화 번역 작업을 하면 장면 시간 맞춰 일일이 자막을 넣어 자막 파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우스를 엄청 많이 써야 하고 그런 날은 당연히 손목에 무리가 갔었다. 멀쩡한 것 같다가도 병뚜껑을 열어야 할 때 손에 힘이 안 들어간다든지, 손목을 아래로 꺾으면 아픈 정도. 직업병이려니 하면서도 째뜬 이참에 다 물어보았고, 다시 엑스레이를 찍은 뒤 건초염 진단을 받았다.
관절과 연골엔 여전히 이상이 없고 힘줄에 염증이 생긴 거란다. 무릎과 손목이 아파서 왔다는 내 말에, 의사는 통증 부위에 무리가 가는 일을 했느냐는 질문보다도 먼저 평소 몇시에 자느냐고 물었다. ㅠ.ㅠ 어... 좀 늦게 자는데요. 주로 밤에 일을 해야 해서... 불면증도 좀 있고... 대번에 그게 원인이란다. ㅎㅎㅎ 잠을 제때 안 자면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고 그래서 염증이 쉬 발생한다고. 에고.
바닥에 양반다리하고 앉지 말것, 관절을 심하게 꺽는 자세는 피할 것, 가능하면 일찍 잘 것, 내리막길은 피할 것.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잘 낫지 않는 병이라며 소염진통제 처방과 물리치료를 병행하자는데, 내가 다시 물었다. 실은 내일 등산을 가거든요. 가면 안되나요. ㅠ.ㅠ 의사는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등산은 관절을 희생해서 심장과 폐를 튼튼하게 하는 운동입니다. 어느 기관을 튼튼하게 할지는 본인이 선택해야겠죠. 건초염에 안 좋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셨네요. 잠도 제때 안자고, 등산 다니고... 헐.
나는 숲에 가야 불면증이 낫는다고 변명했고, 의사는 정 좋으면 어쩔 수 없다면서 등산을 가야겠거든 스틱을 꼭 쓰라고 조언했다. 고주파 치료, 자기장 치료, 찜질 등등의 물리치료를 받고 났더니 신기하게도 다리가 말짱해졌다. 아싸... 좀 불안했지만 소염진통제도 먹었겠다 다음날인 어제 아침 압박밴드로 오른 무릎을 단단히 감싼 채 괜찮겠거니 싶어 꾸역꾸역 등산을 따라갔다.
올라갈 때는 정말로 아픈 줄도 모르겠고 멀쩡했는데 2시간이 넘어가고 하산길이 이어지자 점점 무릎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절룩거리는 나를 보며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어우 씨 짜증나고 창피해서 원. 신년산행이고 이후 행사가 있어서 7km정도로 산행이 짧아 다행이지 더 높고 긴 산행이었으면 큰고생했을 것 같다. 통증은 내 문제이지만, 단체 산행에서 홀로 행동이 느려지는 건 남들에게도 민폐가 되는 짓이라 앞으로도 걱정이다. 과연 완전히 다 나아서 산에 계속 열심히 다닐 수 있을까?
어제 송송송 휘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산에 오르는 기분 정말 좋았는데 ㅠ.ㅠ 벌써 포기하고 싶진 않다. 이런 내 마음이 무식한 고집일까 아닐까, 그것이 문제로다.
미국 여행기를 연말안에 끝내겠다는 목표를 겨우겨우 달성한 뒤엔 곧이어 2017 베스트 포스팅을 하고 싶었지만 감기몸살로 계속 빌빌댔다. 그나마 다행히 A형 독감은 아니어서 열은 오르지 않았고, 그냥 팔다리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쑤시고 아프고 눈과 코에서 뜨거운 바람이 슝슝 나오더니 콧물이 쏟아졌다. 사나흘 앓고 일어나 이제 좀 살만 한데, 아직은 머리가 멍해서 책도 안 읽히고 그래서 일도 못하겠고 꼼지락 꼼지락 쓸데없는 바느질을 좀 하다가 블로그 정리나 하자 싶어졌다.
일단 2017년 정리 포스팅을 다 해야, 나의 모든 유희와 여행 기록을 메모해 놓은 탁상 달력을 내다버릴 수 있다규~ ㅋㅋ
2017년에 읽은 책
1. 캐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김미정 옮김/그책(2016)
2.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억관 옮김/민음사(2016 리미티드에디션)
3. 5분 카페 스케치 --- 김충원 지음/진선아트북(2016)
4. 이것 좋아 저것 싫어 --- 사노 요코 지음/이지수 옮김/마음 산책(2017)
5. 죽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지음/이지수 옮김/마음산책(2015)
6. 아니라고 말하는 게 뭐가 어때서 --- 사노 요코 지음/전경아 옮김/을유문화사(2017)
7.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이상원 옮김/현대문학(2013)
8. 책이 입은 옷 --- 줌파 라히리 지음/이승수 옮김/마음산책(2017)
9. 처음 만나는 프랑스 자수 --- 박성희 지음/티나(2016)
동화로 만나는 프랑스 자수 -- - 박성희 지음/티나(2017)
히구치 유미코의 자수 12개월 --- 히구치 유미코 지음/황선영 옮김/이아소(2016)
10. 시녀 이야기 ---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김선형 옮김/황금가지(2017 특별판)
<캐롤>은 16년에 본 영화와 원작이 어떻게 다른가 궁금해서 올해의 첫 책으로 읽었다.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좋았고, 책속에선 테레즈가 사진작가가 아니라 무대 디자이너라는 점도 신선했다. 루니 마라의 테레즈도 좋았지만, 책에선 주인공이 겨우 풋풋한 스무살, 스물한살이었다는 게 인상 깊었다. 난생 처음 만난 사랑이 캐롤이었다니 축복이다. 인상 깊은 구절을 적어놓은 독서 노트에서 "두려워 하면서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테레즈는 생각했다. 두려움과 사랑,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p331)는 글귀가 새삼 가슴에 박힌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몇번 시도하다가 뭔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의 글이었던 막연한 인상과 최근 들어 어마어마하게 높아진 선인세에 괜히 배알이 틀렸던 것 같다. 근데 어느날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듣는데, 문득 이 음악에 영감을 받아 썼다는 하루키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예전엔 <상실의 시대>로 출간되었다던가. 마침 아삼삼한 느낌의 트레이싱페이퍼 커버를 씌운 리미티드 에디션이 나왔다고 알라딘에서 홍보 메일도 날아왔겠다... 그래 한번 읽어주지 하며 구입했던 거다. 내가 왜 하루키를 불편해했는지 그 남성중심적 글쓰기의 실체를 파악할 수도 있었고, 좀 더 어려서 읽었더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암튼 뭐 나랑은 별로 안 맞는 작가라고 결론 내림.
사노 요코의 책을 세권이나 읽은 건... ㅠ.ㅠ 내가 이 '일본 할매'랑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며 읽어보라고 권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에게 비친 내 인상과 생각이 어떤지 궁금했다. 평소 내가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워! 근데 죽도록 아픈 건 무서워..."라고 했던 말과 일맥 상통하는 말들이 확실히 책에 담겨 있었고, 그 밖에도 이거 내가 한 말 아냐? 싶은 구절들을 발견했다. "나는 인사치레를 못한다. 인사치레를 하려들면 입이 썪는 것 같다. 그러니 내가 하는 칭찬은 진심이다."(<죽는 게 뭐라고> p62) "나는 돈이 없을 때에도 돈을 잘 쓰는 게 자랑이다."(<죽는 게 뭐라고> p135) ^^; 당연히 이 작가와 나는 다른 점도 많았지만... 그 사람이 대체로 나를 제대로 파악한 게 맞다고 생각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책을 작업하면서 작품에 홀딱 반해가지고,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리즈의 책 중 <레베카>를 틈틈이 읽었다. ㄹㅇㅊ 이 더 매력적인 주인공이었고 작품도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무레도 <레베카>는 어린 시절 흑백영화로 보았던 히치콕 감독의 영화 장면들이 뇌리에 깊이 박혀 편견으로 작용했다. 길쭉하고 비스듬한 대문자 R만 보아도 섬뜩했던 느낌이 아직도 남은 걸 보면 영화를 꽤 여러번 보았나? ㅎㅎ
9번 자수책은 '읽었다'라고 하기엔 민망한 책이라 세권을 하나로 쳤다. 후배가 편집 작업에 참여한 자수책 증정본을 줬는데, 작은 브로치 같은 소품 자수들이 너무도 예뻐서 스케치 취미생활은 완전 내팽개치고 자수 욕심에 불탔다. 결국 또 다른 자수책까지 사들이고는 천과 수틀까지 마련... 원하는 색깔의 실만 사들이면 또 맨날 바느질이나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 아직 실과 바늘은 구입 안하고 있음 ;-p
<시녀 이야기>는 2017년에 읽은 마지막 책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게 되면서 그럴 만 하다 느끼는 한편 나 홀로 애트우드에 대한 존경심을 독서로 표할 작정(?뭐래.. ㅋ)이었다. 작금의 현실을 파헤친 것 같은 섬뜩하고 예리한 작품을 이미 20년 전에 썼다니(원작은 98년 출간인듯;) 참 대단하다.
부끄러울 만큼 ㅠ.ㅠ 워낙 독서량이 적어서 올해의 책 베스트 3권은 어렵지 않게 골랐다. 죄다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이란 공통점을 지금 발견했다. ㅎㅎ
2017년에 본 영화
1. 너의 이름은
2. 언어의 정원
3. 초속 5센티미터
4. 시간을 달리는 소녀
5. 라라랜드
6. 가장 따뜻한 색, 블루
7.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8. 무현, 두 도시 이야기
9. 모아나
10. 라이언
11. 덕혜
12.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
13. 히든 피겨스
14. 공조
15.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16. 죽여주는 여자
17. 공모자들
18. 지니어스
19. 파리로 가는 길
20. 라푼젤
21. 신데렐라
22. 커피 한 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
23. 아가씨
24. 썸머타임: 아름다운 두 계절
25. 은밀한 가족
26. 여교사
27. 더 셰프
28. 호프 스프링즈
29. 페어웰, 마이 퀸
30. 아담
31. 미쓰 와이프
32. 옥자
33.아이 캔 스피크
34. 맨체스터 바이더씨
35. 메리와 마녀의 꽃
36. 꾼
진하게 표시한 영화만 영화관에 가서 봤고, 나머지는 비행기에서 봤거나 죄다 휴대폰으로, 아니면 컴퓨터로 다운 받아 본 영화다.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봐서 그런가...어떤 영화는 제목을 봐도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다. ㅠ.ㅠ 달력엔 분명 그 옆에 별점 표시도 해놨던데 ㅎㅎㅎ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요즘 너무도 활발하다.
2017년엔 퀴어 영화를 꽤 본 것 같다. 퀴어 인물도 남녀 감독이 참 얼마나 다르게 그려내는지... 상업성을 추구하기 때문이겠지만, 불편한 시선과 묘사가 좀 거슬린다 싶으면 역시나 남자 감독이었다.
암튼 심히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꼽은 올해의 베스트 영화 3는...
개봉일과 상관없이 내가 본 순서대로 뽑고보니 또 다 소수자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특히 <죽여주는 여자>엔 소외된 약자들만 등장한다. 성매매 여성, 장애인, 트랜스젠더, 그리고 병든 노인. 쉬쉬하는 노년의 성과 빈곤 문제, 어떻게 늙을 것인가, 늙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현실감 있게 다뤘고, 그래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히든 피겨스>는 유쾌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였지만, 그들이 미국 NASA에 들어갈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결국 지적으로 뛰어난 인재이고 최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실화인데도 판타지처럼 느껴진 이유는 우리나라만해도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으니까? <아이 캔 스피크>의 나문희 할머니만 해도, 자기가 운영하는 수선가게를 지닌 소상공인이고, 영어회화 학원에 다닐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여성들이 그나마 좀 힘을 쓰려면 배움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당연한 일인데 현실과 겹쳐서 왜 슬픈지...
덧붙이자면 <재키> 비행기 안에서 보다 넘 지루해서 초반에 포기하고, 나탈리 포트만에 대한 애정으로 나중에 다시 시도했지만 역시나 끝내지 못했다. ㅎㅎ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재미 없으면 이젠 끝까지 참아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ㅎ
[#M_옛날 영화 다시 보기|닫기 |
2016년엔 세계의명화, 일요시네마 2 프로그램을 작업하며 모두 12편의 EBS 영화를 번역했었는데, 2017년엔 EBS에서 재방송하는 영화들도 워낙 많았고, 세계의명화만 일이 들어온 데다 나와 작업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아서 9월 2일 방영분까지 달랑 7편을 작업했다. 사진 편집 앱에서 포스터 안짤리는 8개짜리 프레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12개짜리에 넣어 더 휑하다.
1/28 우주전쟁 2/9 로빈후드 2/26 터미널
6/17 제로법칙의 비밀 7/22 파앤드어웨이 8/12 굿윌헌팅 9/2 디파티드
맷 데이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로빈 윌리엄스, 키아라 나이틀리...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일단 나를 먼저 떠올려주는 프로덕션 PD님이 있어 기쁘다.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영화인 <굿 윌 헌팅>을 번역하게 되서 어찌나 기뻤는지!(하지만 이 영화에 그토록 여혐 발언이 많은 줄은 정녕 미처 몰랐었다. ㅎㅎㅎ 할리우드가 어떤 곳인지 드러난 작금의 상황을 보아도 어휴...) <디파티드>는 홍콩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영화라 개봉 때 보고싶었으나 놓쳤던 터라 쾌재를 부르며 작업했었다. 2018년에도 두달에 한편 정도는 작업하고 싶은데 과연 사정이 허락될지 모르겠음. (아직 의뢰가 없다 ㅠ.ㅠ)
2017년에 본 공연
1. 콜드플레이 내한공연(4/16)
2. 뮤지컬 나폴레옹(9/20) - 임태경, 정선아, 김수용, 박송권
콜드플레이 공연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ㅠ.ㅠ <나폴레옹>은 왕비마마 모시고 가려고 여름부터 예약했다가 위약금까지 물고 취소하기를 2번이나 반복한 뒤에 겨우 관람성공해 감개무량했다. 아직은 와병중이라 위태위태했고, 아니나 다를까 공연에 집중 못하고 자꾸 나에게 말을 걸거나 몸을 움찔거려 옆자리 관객이 중간 쉬는 기간에 언짢은 불평을 했다. 에효... 보는 내내 엄마 때문에 긴장해서 뮤지컬에 대한 인상이나 감상보다 그날 조마조마했던 마음과 안도감이 더 떠오른다.
2017에 본 드라마 & 예능
1. 셜록 시즌4
2. (여전히) 도깨비
3. 비밀의 숲
4. 이번 생은 처음이라
5. 윤식당
6.효리네 민박
<셜록>은 그토록 고대했던 것에 비하면 좀 실망스러웠고... 꼬박 1년 전이라 정말로 아스라하다. 그치만 또 언제 나올지 모를 시즌5를 기다리겠지. <도깨비> 역시 1월에 끝이 난 드라마라 2016년 베스트에 넣었던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없던 건 아니지만, 영상미며 스토리며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에 반해 <비밀의 숲>은 그야말로 최고의 드라마! 한참 바쁠 때 본방중이라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며 아껴뒀다가 한편씩 두편씩 어쩔 땐 세편 내리 꼬박 밤새며 봤다. 으아.. 정말 대단한 흡입력과 완성도!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중간에 몇편 보다가 결혼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대사들이 맘에 들어서 나중에 다시 몰아봤다. 중성적인 여자 이름을 좋아하는데 이 드라마엔 여주인공 이름이 지호, 남주인공 이름이 세희다. ^^; 뭔가 이런 미묘한 설정부터 좋아! 세희 역할의 이민기 배우를 새삼 다시 보게 됐고, 여주인공의 친구들 이야기도 각각 소홀하지 않게 잘 다루어져 좋았다.
<윤식당>은 오래오래 집을 떠나 여행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로망을 잠재우느라 헬렐레 즐거이 보았고(난 식당 종업원들 아니고 거기 나오는 외국인들에 감정이입해서 보는 재미가 좋았다), 이효리와 아이유를 다시 보게 되었던 <효리네 민박>도 제주도 로망과 함께 보고보고 또 보고 재방도 보고 그랬다. 제주도에서 살기 위해서라면 게스트하우스에 취직할까, 감귤농장에 취직을 할까, 뭐 그런 꿈을 아직도 못 버렸다. ^^;
2017년에 떠난 여행&답사
1. 미서부와 캐나다 빅토리아섬 (4월) --- 8개월만에 여행기를 마쳤으니 더 설명 않겠다. ^^
2. 서울 북촌 (6월) --- 관광객의 눈으로 서울 살기 프로젝트 1
북촌 한옥마을 여러번 가 봐서 다 안다고 생각했다가 오잉~ 하며 놀랐다. 종로구와 서울시에서 꽤나 많은 곳들을 새로 가꿔놓았더라. 엄청 예뻤다.
3. 양주 회암사지 & 장욱진 미술관 & 권율장군 묘 (6월 & 9월)
양주에서 문화해설사 하시는 지인분 덕분에 속속들이 구경하며 신이 났었다. 폐사지(유구만 남은 절터) 구경을 별로 많이 안해본 터라, 회암사지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랐고, 박물관에도 볼거리가 많아 신기했다. +_+
거의 왕궁터 같았던 회암사지...
건축상도 받았다는 장욱진 미술관 구석구석 예쁘다
장욱진 미술관 옆 권율장군 묘에서 내려다보며이는 예쁜 한옥
4. 안면도(6월)
5. 곤지암 화담숲(7월)
6. 속초 동명항(8월)
6. 강화도(9월)
7. 외산 무량사 & 보령 성주사지 & 오천항 수영성(11월)
흐렸어도 무량사의 가을은 눈부셨다
나폴리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오천항
같은 날 오전과 오후 날씨가 이토록 다르다 ^^;
8. 수원 화성 행궁(12월)
행궁과 화성 성곽을 1바퀴 다 돌았는데.. 우와.. 너무 좋아서 봄날에 날씨 좋으면 한번 더 가고싶다는 얘기를 했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그림과 설명이 너무도 정확해서 그대로 복원해 놓은 화성은 조선시대 건축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터키에서 못 타본 열기구 선망 때문인지 제자리에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전부인 저 열기구(18,000원)라도 좀 타보고 싶었다. ㅋㅋ
9. 서울 둘레길 - 관광객의 눈으로 서울 살기 프로젝트 2
빠진 날이 많아서 함께했던 팀들의 공식 둘레길 순례는 끝났는데 난 미처 못 끝냈다. ㅠ.ㅠ 총 28개 스탬프 중 아직 7개를 더 찍어야함. 옛날 우체통을 재활용해 만들었다는 스탬프 보관소에서 각기 다른 모양의 스탬프를 찍는 재미가 ㅎㅎㅎ 은근 쏠쏠하다. 스탬프 상관없이 서울 둘레길을 이미 몇바퀴나 돌았다고 큰소리치시던 선배님들도 막상 스탬프북 없으면 말짱 꽝이라고 하자, 별것 아닌데 욕심난다며 결국 157km를 완주하고 완주증서를 받아내시던데... 난 뭐냐. 뭐든 시작은 잘해도 금방 싫증내고, 그렇다고 또 완전 포기도, 깔끔한 마무리도 잘 못하는 나의 미련떠는 성격이 여기도 반영된 것 같다. 남은 스탬프를 2018년 상반기에 다 찍고 완주기념 배지를 꼭 받으리! (새해 결심 중 하나다 ^^;)
하반기엔 거의 등산을 못다녀서 다시 등산 초보자의 폐활량과 몸이 되었음을 12월 북한산에서 실감했다. 몸이 어찌나 무겁던지! 2018년부터는 매달 두번씩 안빠지고 좀 다시 산에 다녀볼 작정이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면 자꾸 무릎이 아파서 등산도 앞으로 몇년이나 하겠나 싶은 심정. ㅠ.ㅠ
2017년 전시
1. 훈데르트 바서 - 세종문화회관 (포스팅도 했으니 생략)
2. 르누아르의 여인 - 덕수궁 미술관 (그저 그랬음)
3.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상설 전시 & 마티스와 디벤콘 특별전
4. 장욱진 미술관 탄생 100주년 특별전 (6월과 9월에 각기 다른 특별전을 두번이나 봤다)
5. 고궁박물관 창덕궁 희정당 벽화 - 지금도 전시중이고, 희정당에서 떼어 복원한 금강산 그림이 진짜로 볼만하다. 금강산 관광을 대체 왜 가나 싶었는데, 남북관계 복원돼 관광루트가 다시 뚫린다면 가보고싶어졌을 정도다.
2017년 기억될 사건
1. 중학교 자유학기제 수업
아무래도 출판과 번역은 사양길이고... 뭔가 더 재미난 일 없을까, 새로운 길을 모색해볼까 하는 심정으로 중학교 1학년들 자유학기제 수업을 한 학기 맡았다. 밤 새가며 수업자료 PPT 만들 때마다, ^^; 형편없이 적은 강사료를 받으며 다들 이짓을 왜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생기발랄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한편 기대되고 즐거웠다. 중2병이 중1로 내려왔다고 해서 엄청 떨었는데, 그냥 귀여운 애들이었어! 물론 말 안듣고 떠들고 쿨쿨 자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애들의 그 팔딱팔딱한 기운을 전달받는 느낌이 짜릿했다. 다만.. 연기된 수능 일정에 밀려 방학날 오전까지 마지막 수업을 하고선 콜록거리는 애들한테 옮아온 감기로 연말연초를 빌빌대며 보내야했지만 말이다. 처음 한두 주 수업때만 해도, 내 다시는 이 짓 안한다! (물론 번역일의 소중함과 귀함을 새삼 깨달았다 ㅎㅎ) 라고 별렀지만, 한 학기를 다 지내고 난 뒤의 마음은 또 잘 모르겠다. ^__^
2. 후배 인터뷰 & 취업 특강 ㅠ.ㅠ
동아리 후배의 부탁에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해줬는데 그게 일파만파 일이 커져서 결국엔 번역에 관심있는 후배들을 위해 취업특강도 하게 됐다. 어우... 번역 하고 싶은 애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7년도 남지 않은 2024년에 AI가 번역가를 대체할 거라는 옥스포드 대학교 보고서도 알려주고, 암울한 출판 전망도 들려주고... 번역은 영어 실력이 주가 아니란 얘기를 해주고 돌아왔다. 근데 뭐;; 어차피 힘든 대학생들의 취업... 번역가로 진입하는 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
3. 이별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고 이게 뭔가, 사귀는 건가, 썸인가, 아닌가 지지부진 고민하고, 아니 고민 자체를 거부하고 괜한 두려움에 대화와 감정을 회피하고.. 그러면서 어느 결엔가 뽀르르 달려가 만나고 그러면서 1년 넘게 이어져왔던 관계가 크리스마스에 끝났다. 서로 지향하는 미래가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고 나름 배려했으나 결국 상처 없는 이별은 없다. 따져보니 무려 20년 만이라서 내가 서툰 탓도 있었겠고, 뭔가 되게 두렵고 어려웠다. 사랑과 두려움은 양립할 수 없다는데, 호감이 결국 사랑으로 이어질까봐, 혹은 사랑이 아닐까봐 겁이 났었다. 째뜬 끝까지 차마 묻지 못한 질문과 미련을 덮어 놓자니, 내상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굳이 2017년을 정리하는 공간에 이 이야기를 적어두는 것은 혹시나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나의 우유부단함을 정리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난 왜 지나고 나서야 감정의 실체를 깨닫는 건지 모르겠다. 혹은 추억의 미화를 위해 과장하는 걸 수도 있겠지. 한숨. 몇번의 고비 이후,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 없게 엄청 잘해주겠노라고 말해놓고, 결국엔 그러지 못했다. 그치만 아무리 잘해주었더라도, 끝이 난 마당에 후회 없는 관계는 없겠지. 행복하라고 그에게 말했지만 행복하면 괜히 억울할 것 같다. 일단 나는 좀 불행하다.
------------------------------------------
돌아보니 2017년은 참 많이 놀러다녔고, 출간이 미뤄져서 그렇지 번역 일도 꾸준히 꽤 많이 했다. 블로그질 할 시간과 정신 여유가 없었을 만도 하다. 나와는 상관 없는데도 충격으로 다가온 사람들의 죽음과 친구의 난치병 같은 것들 때문에 괜히 조바심이 나서 더 행복해지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소소한 낙과 순간의 기쁨보다는 자꾸 더 '쎄고 확실한' 행복을 바랄수록 불행해진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되었다.
올 7월은 이상스레 엄청 길게 느껴졌다. 탄신파티 몇번 하고 나면 후딱 가버렸던 예년의 7월과 달리, 옥수수 농장에 주문해놓고서도 익기를 기다리기까지 며칠간이 한참 걸린 것 같고, 월초에 두번이나 갔던 등산은 아주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진다.
탱자탱자 거의 먹고 놀려니 오히려 블로그질엔 소홀했다. 게다가 몇달에 한번씩 마감이 있다가 2주마다 마감에 쫓기려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느긋하게 글을 끼적일 여유 또한 사라졌다. 또한 그간 책도 멀리하고 문화생활도 잘 안하고 탱탱 빈 머리를 통 채우질 않았더니만, 말이든 글이든 문장 하나 만드는데 이렇게 힘들어 어디 해먹겠나 싶을 때가 많다. 글줄로 밥벌이 계속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작년 쯤부터 어느덧 또래 친구들이 대화 중 <그거 뭐야>, <그게 뭐지>를 거의10초마다 추임새로 넣는 걸 내가 막 놀려먹으면, 너도 좀 있어봐라, 머지 않았다는 협박성 예언을 들었는데, 정말로 나 역시 파닥파닥 낱말이 떠오르질 않는 증상이 나타났다. 가뜩이나 뭔가를 설명할 때 서론도 길고 말이 긴 인간인데 이젠 거두절미하고 요점만 잘 추려서 말하는 법을 새로 익히기라도 해야할 것 같다.
어휘를 더 잃어버리기 전에 우선 책, 책, 책을 읽어야해! 라고 생각을 하지만 더운 날씨 핑계로 몇달째 책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도 이러면서 무슨 책 안읽는 국민들 탓을 하고 난리냐, 급반성.
탁상 달력을 오늘에야 8월로 넘기려니 7월엔 칸칸이 뭐가 이리도 적힌 게 많은지... 웃겨서라도 기록을 해놔야지 싶었다.
1. 등산: 북한산(정릉코스), 양평 소리산
북한산이 명산인 건 갈 때마다 느끼지만, 정릉 계곡이 그렇게 깊고 청량한 줄은 정말 몰랐었다. 까마득한 옛날에 소풍도 가고 그랬는데 완전 새로운 느낌. 언제고 북한산을 능선따라 한번 종주해보고 싶다. 어렸을 때 멋 모르고 부모님 따라갔던 것처럼... 송추에서 우이동까지? ㅋㅋ
양평 소리산 역시 계곡이 일품. 비 많이 내린 며칠 뒤에 가서 계곡물 구경 제대로 했지만, 곳곳에 바위가 미끄러워서 애도 많이 먹었다. 낑낑대고 올라갔다 내려와서 시린 계곡 물에 발 담그고 노는 게 좋아지면서 점점 아저씨가 되어가는 건가 민망하다. 예전 같으면 등산화 벗는 거 귀찮아서 절대 싫다고 했었는데 ㅠ.ㅠ
<굿바이 싱글>은 내가 고른 게 아니라 아무 기대없이 보러 들어갔다가 의외로 재미나게 눈물도 흘리며 봤다. 김혜수, 마동석 연기야 뭐 믿고 보는 거라 치고, 서현진이 마동석 부인으로 나왔다는 거! ㅋ 요샌 영화든 드라마든 아역배우가 연기를 잘해야 완성도가 높아지는 듯. 십대 미혼모로 나온 김현수 연기가 대단하다 싶었다. 김혜수한테 안 밀려! ㅎㅎ
<제이슨 본> 돌아온 맷 데이먼! 말이 필요없다. 기억도 다 돌아온 마당에 더 무슨 할 이야기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ㅎㅎ 기대를 했는데도 그럭저럭 좋았다. 주말에 빈 자리 하나도 없는 극장에서 몸을 움찔움찔 하며 봤음. 폭력은 너무 과하지 않을 정도이고 늘 그렇듯 액션과 추격 신은 풍부하다.
뒷북으로 본 <귀향>, <내부자들>은 볼까말까... 벼르다가 본 거라서... 그냥.. 의외로 좋았다, 고만 쓰련다. <의궤, 8일간의 축제>는 KBS다큐멘터리 3부작인가로 다 본 건데도 영화판으로 한번 더 보며 눈요기했다. 리움 미술관에서 봤던 화성능행도 그림들을 떠올리면서..
3. 공연: <ONE LOVE> 콘서트 @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친구따라 묘한 팬질을 하고 있다. ㅋㅋ 토요일 낮공연엔 유열, 이사벨, 임태경이 차례로 나와 노래를 서너곡 씩 불렀다. 판매수익이 재난구호단체에 기부된다고 해서 사실 대단히 부실한 공연을 고가에 보고도 그리 분노하지 않았다. 백주년 기념관의 지나치게 빵빵한 에어컨에 놀란 몸이 심한 냉방병에 걸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라 공연 중간에 밖으로 뛰쳐나가기까지.. ㅠ.ㅠ 했던 것과 상전벽해가 따로 없구나 싶었던 놀라운 백양로 풍경이 더 기억에 남았다.
4. 드라마: <굿 와이프>, <닥터스>
박신혜의 은근 팬이라 <닥터스>를 열심히 챙겨보고 있다. 오글오글 병원에서 의사들이 연애하는 얘기 뻔하다며 많이 접어줬는데도 느글느글 김래원표 홍지홍 쌤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워졌다.특별출연하는 배우들도 대단. 어제 오늘은 남궁민이랑 애들 때문에 눈물 찔끔.
<굿 와이프>는 케이블 TV 챙겨보기 어려워서 안 보고 있다가 주변의 추천으로 뒷북 탑승했다. 와... 다들 왜 보라 그랬는지 알겠다. 전도연은 비뚤어진 입 때문에 한쪽만 더 깊어진 주름까지 아름다운 자태로 김혜경 변호사를 멋지게 그려내고 있고, 유지태의 폭발할 듯한 존재감이 대단하다. 유지태한테 좀 밀리긴 하지만 윤계상도 그만하면 잘하고 있고 , 무엇보다도 법조계와 정재계 비리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 죽겠다. 누가 정말 나쁜 놈인지도 아리송... 그게 매력이다.
5. 먹는 게 남는 것이 아니고, 사진으로 남은 먹거리 ^^;
이젠 식상해져서 예전처럼 음식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있진 않지만, 여전히 푸드포르노 트렌드에서 벗어나진 못한 것 같다. 민망하면서도 얼른 사진으로 남겨둔 음식의 자태를 가끔 휴대폰으로 넘겨보며 뿌듯하다. 그래, 이날 이건 이런 맛이었지... ㅠ.ㅠ
하지만 음식과 함께 그날 같이 있었던 사람들, 주고받은 이야기도 함께 떠오르기 때문에 내겐 그 또한 소중한 기록이다. 나 이렇게 잘 먹고 잘산다는 과시형 목적보다는 정보공유 차원이라는 핑계도 있다. 나중에 찾아보긴 나도 여기가 젤 편하다니깐요...
라뮤즈 드 연희의 음식들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비프스테이크, 라구 파스타, 리코타 치즈 샐러드, 라뮤즈 버거다. 룸이 여럿 있는 모양이어서 가족모임하기 딱이었는데 가격대비 만족도를 따진다면 흠... 글쎄 ^^; 괜찮은 것도 같고. 브런치나 런치 세트 메뉴는 가격도 괜찮아 보였지만, 우린 샐러드 제외 1인 1메뉴가 필요한 대식가 부대이고 저녁 시간이라, 200g짜리 고깃덩어리도 좀 작아보였다. 300g짜리를 시킬 걸 그랬나 했었음. 10명이서 스테이크 다섯 접시, 버거 2개, 파스타3개, 샐러드 4개 완전 클리어! 그나마 파스타 1개는 나중에 추가주문했는데 실수로 주문이 안들어가서 안 먹고 나왔음. ㅋㅋ 밖에서 스테이크를 잘 안 사먹어봐서 가격대를 모르겠다.... ㅎㅎ 대체로 맛있게 먹었고 친절해서 음식과 서비스 면에선 좋았다. 많이 먹었다면서 나중에 아이스커피 서비스로 줬음. 일방통행 골목에 있고 주차장도 없는 2층 주택 개조 레스토랑이지만, 골목 입구에서 발레파킹 가능! 담엔 맥주랑 안주를 먹으러도 한번 가보고싶다.
주말에 수락산에 갔었는데 중간에 낙오가 됐다. 하산 길 시작하자마자 일부러 느림보들을 모아 앞세워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후미에 있다가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중간에 꼬리를 놓치면서 갈래길에서 엉뚱한 길로 내려간 거였다. 근데 낙오자 6명 중 맨 끄트머리에 있었던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단 걸 맨 처음 알았다. 내가 앞사람을 따라 무작정 내려가고 있으려니 뒤에서 우리 단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OO! OO! 어쩌구저쩌구... (나중에 알고 보니 혹시 일행중 무작정 직선 코스로 내려간 사람 있을까봐 갈래길에서 OO 우측으로!라고 외친 거였단다)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다시 길을 올라가며 외쳤다. OO 여기도 있어요!!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듯 등산로는 다시 조용해졌다. 하산길도 아니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서 내가 앞선 멤버들을 따라잡을 리는 만무했다. 일단 나는 다시 소수가 내려간 길로 내려가 상황을 알렸다. 우리 잘못 내려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오른쪽 길로 갔어요!
그랬더니 산악마라톤도 하시는 선배님과 등산 고수 후배가 수락산은 등산로가 많아서 어차피 가다가 다 만나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내가 가리킨 방향은 뒤풀이 장소인 '수락골' 방향(서쪽)이 아니라 북쪽이라나... 고수들이 그렇다면야 그런 거지. 일단 우리 6명은 더 이상 헤어지면 안된다고 꼭 붙어 움직여야 한다고 다짐하며 하산을 계속했다. 마침 올라오는 등반객 두 사람을 만난 우리는 수락골 방향을 물었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수락골 가는 길 나오나요? 그랬더니 그 젊은이 자신감 넘치게도 '아니'라고, 길도 안보이는 왼편 숲쪽을 가리키며 저리로 내려가야 수락골이 나온다고 말했다. 나름 방향감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보기엔, 그리고 좀 전에 헤어진 일행들이 간 방향과는 완전 반대방향을 가리키는 조언에 나는 의심을 품었지만, 가다 말고 다시 돌아서서까지 방향과 갈 길을 일러주는 그 청년의 호기에 우리는 길도 안 보이는 숲으로, 말하자면 비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내눈엔 길도 아닌데! 등산 고수들은 이 정도면 길이 있는 거라고... 쌓인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지고 아슬아슬 한뼘 밖에 흙이 안보이는 이상한 숲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어차피 산 내려가면 좀 벗어났더라도 택시 타고 집결지로 가면 된다고... 하지만 길은 점점 더 험해지고, 설상가상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비까지 흩뿌렸다. 좀 전까지 햇빛 쨍쨍 눈부셔서 선글라스 끼고 있었는데! 나뭇가지를 헤치고 지나느라 긁히고 찔리고... 인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등산로와 달리 암벽에 묶여 있는 건 알량한 빨랫줄 아니면 줄줄이 엮어 놓은 운동화끈! ㅠ.ㅠ 그걸 붙들고 유격훈련 하듯이 한 길 넘는 암벽을 내려갔다. 하지만 제법 내려가도 주등산로와 만나지지가 않았고, 나는 다시 일행들이 간 방향과 너무 달라 불안하다고 꿍얼거렸다.
그제야 네이버 지도로 현위치를 확인. 수락산이 요상하게도 전화가 안터지는 곳이 많았고 종종 인터넷도 먹통이었다. 드디어 휴대폰에 지도가 뜬 순간 우리는 완전 엉뚱한 곳으로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남양주군 별내가 나온단다. ㅋㅋㅋㅋ 결국 다시 우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미친 놈 뭐야! 길을 모르면 모른다고 가르쳐주질 말든지 왜 잘난 척 틀린 길을 가르쳐줘가지고!!! 하산길에 만난 남자가 가르쳐준 방향은 정 반대인 동쪽 방향이었다. 나 원 참. 그리고 등산하다 길을 잃으면 괜히 모르는 길 질러갈 게 아니라 다시 올라가 원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
우린 다시 가느다란 빨랫줄이나 운동화끈 같은 줄에 목숨을 걸고(!) 익스트림 스포츠 즐기는 인간이거나 약초꾼들이나 다닐 법한 이상한 숲길과 암벽을 타고 다시 정상을 향했다. 4, 50분 헤맨 끝에 드디어 밥먹고 하산하던 주등산로와 만난 순간, 희한하게도 하늘은 다시 밝아져 햇빛이 쨍쨍했다. 좀 전에 다니던 길과는 전혀 다른 세상. 음침한 회색 세계에서 벗어난 느낌은 순전히 심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 혼자였으면 다 뻥이려니 하겠지만 비 등산로에서 헤매며 비 계속 내리면 몇몇은 방수 옷 없는데 어쩌나 단체로 걱정했다규!
지나고 보니 다 웃을 일이고 인상 깊은 추억이지만 생각할수록 길 잘못 알려준 그 남자가 생각난다. 원래도 소심해서 타인에게 잘 묻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어쩌면 나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데, 이번에 애써 주변에 묻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며 오히려 더 꼬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르면 사실대로 모른다고 할 일이지, 그 남자는 왜 아는 척을 했을까? 진짜로 안다고 생각했을까? 비슷한 방향도 아니고 정 반대 방향을 가르쳐주면서?
본인이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사회에 병적인 존재가 아닐까 심히 비약하는 결론까지 내리게 된다. 무작정 어디론가 사람들을 막 끌고 가다가 '이길이 아닌개벼...' '아님 말고..' 하는 식의 리더나 조언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과적으로 무사히 낙오자들을 다독여가며 이끌고 하산에 성공한 등산 고수 두 사람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하산길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해 남은 얼음물 홀라당 거의 다 마셔버린 하수들과 달리, 고수들은 보온병에 든 오미자차, 보냉팩으로 감싼 얼음물이 끝까지 남아 있어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ㅠ.ㅠ 염분과 당 떨어지는 경우를 대비한 각종 간식까지도...) 선뜻 "아무 길로나 질러가면 돼!"라고 함부로 생각한 건 잘못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50명도 넘는 인원을 리드하면서 평소처럼 갈래길에서 방향을 지시해주는 사람을 세워두지 않은 주최측도 잘못했다! (산행 책임자는 그래서 모두에게 긴 반성의 글을 올렸다 ㅋㅋ) 하지만 이번엔 워낙 인원도 많고, 뒤풀이 장소 확보를 위해서 무거운 짐과 함께 선발대(주로 빌빌대는 멤버들 뒤치다꺼리 해주는 고수들)를 여럿 파견하는 바람에 미처 못 챙긴 걸 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것. ㅋㅋ
그간 거의 매일 휴대폰 앱으로 근력운동을 좀 했고 앞산도 가끔 올랐지만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몰랐는데, 긴장한 탓인지 낙오하기 이전에 정상 오를 때도 이상한 암벽에서 밧줄이나 쇠줄 타고 오르기를 거듭 시도했고 (부들부들 떨면서... ㅠㅠ) 나중에 낙오한 뒤 되돌아가는 길에도 유격훈련이 아니고 뭐냐 싶게 엄청 생고생을 했는데도 밧줄 잡았던 어깨만 약간 뻐근할 뿐 비교적 몸이 멀쩡한 것이 놀랍다! 비록 입안은 너덜너덜 다 헐었지만서도... ㅎㅎㅎ 혹시나 산에서 낙오되면 나 혼자서도 집에 잘 찾아가야한다며 산행 루트 설명할때 귀 쫑긋 열심히 듣는 편이고, 휴대폰 안 터질 것에 대비해 배낭에 나침반도 매달고 다니지만 실제로 낙오를 하다니... ㅋㅋ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물론 그날따라 산행 지도도 안보고 딴짓했고 휴대폰 안터져도 나침반 보잔 말은 못 꺼내겠더라... 고수들이 있는데 하수가 무슨... ^^;
4월 못지 않게 5월도 이 나라엔 잔인한 달, 가슴아픈 달이지만... 그래도 이 무렵 연두색 나무들은 참 예쁘다. 어떻게 저렇게 예쁜 색깔이 다 있나 싶어지는 잎사귀들. 머리도 팔다리도 무거운 날이었지만 그래서 더 일부러 산엘 따라갔었고, 가길 잘했다. 여전히 빌빌댔으나 그래도 체력이 꽤 쓸만해졌음을 실감했다. 올라갈 땐 꼬래비에서 둘째로(총 35명중;) 간신히 정상을 올라, 남들 다 도시락 펴고 절반쯤 먹고 있을 때 합류했는데 내려올 땐 중간 정도의 성적. 다들 놀라워했다. 일단 A팀이었다는 거! B급인생도 좋지만... 예쁜 능선을 더 많이 보고 싶어서 욕심부렸다가 후회없이 뿌듯했다.
대구 비슬산. 1083m. 휴식 포함 총 산행시간 5시간 30분. 헥헥거리느라 사진들은 죄다 남들이 찍은 것들;; 산중턱에 펼쳐진 진달래밭이 장관이라는데, 꽃이 다 졌어도 오즈의 마법사 노란 벽돌길이 떠오르는 저 나무길은 진짜 예뻤다.
설날 이전 주말에 정선 함백산으로 눈길 등산을 갔었다. 아이젠과 스패츠까지 구비해야하는 본격 눈길 산행은 하도 간만인데다가, 남한에서 6번째로 높은 산이라고 해서 겁을 집어먹었는데 다행히 새벽에 출발해 당일로 다녀오려니 꽤나 높은 지점(해발 800미터쯤인 만항재??라던가;;)에서 산행을 시작해 그리 오래 걸리는 코스는 아니었다. 서울 기온은 영상이어도, 함백산은 쾌적한 날씨에 영하3,4도 정도 될거라는 예상. 헌데 하루종일 어찌나 날씨가 변화무쌍한지... 눈보라가 휘날리다가 쨍쨍 햇빛이 비치다가 다시 컴컴하게 흐렸다가... 워낙 가물어 눈이 별로 없는 거라는데도 중간중간 엄청난 눈길이 나왔다가 질질 누런 물이 흐르는 진창길이 이어지다가... 귀시렵고 코시려운 칼바람이 휘몰아치다가... 아주 정신이 쏙 빠졌다.
그래도 다행인 건 2월에 눈길 산행할 수 있는 곳이 몇 안되다 보니 등산객들이 워낙 많아서 곳곳에 병목 정체현상(!)이 벌어져 빨랑 올라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구간이 많았다는 점. ㅎㅎ 원래는 3,40분씩 내달리듯 강행군 하다가 모여서 단체로 간식 먹으며 잠시 쉬곤 하는데 하도 중간중간 막히다보니 산 정상을 넘어서기까지 제대로 간식 먹을 시간도 없었다. 점심시간에야 비로소 죄다 모여 눈밭에 옹기종기 앉아 보온도시락을 까먹었다.
왼쪽이 내 스틱과 장갑. 저 장갑은 아빠가 쓰시던 거다. 유품정리하면서 차마 아까워서 남겨두긴 했지만... 저 등산 장갑을 내가 끼고 겨울산행을 하게될 줄은 아빠도 몰랐겠고 나도 몰랐다.
위의 사진 두 장은 그나마 바람 덜한 비탈사면 옆에서 점심 먹느라 멈췄을 때 찍은 것. 하도 가물어서 산불을 염려해 폐쇄된 등산로도 많다는데 초보자인 내 눈엔 저만큼 쌓인 눈도 신기할 따름이고...
수증기가 나뭇가지에 겹겹이 얼어붙어 바람결따라 희한한 눈꽃을 피운 걸 '상고대'라고 한다는데, 강원도도 계속 워낙 기온이 높아 눈꽃을 볼 순 없어 다들 아쉬워했지만, 난 원없이 눈을 밟은 것 같아 그저 좋았다. 이번 겨울에 가장 장대한 눈구경은 의외로 터키 갔을 때였으니 뭐;;;
하산 길엔 스틱을 매만진다거나 모자를 고쳐쓴다거나 해서 조금만 머뭇거리다간 종종 저런 인적 드문 눈길에 홀로 남게 됐다. 서둘러 따라갈 걱정 속에서도 기뻐하며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고 후딱 눌렀더니 흔들렸다. ㅋㅋ 잘 따라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진 찍는다고 더 꾸물거리면 혼날까봐(?) 감히 등산 중엔 폰카질을 할 엄두도 못내겠고, 사실 헥헥거릴 때는 힘들어서 사진찍을 생각도 잘 나질 않는다. ㅎㅎ
등산가서 꼭 정상 표지석 옆에서 독사진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은 '늙은이'라는 증거란다. 이 집단도 반드시 정상 표지석 옆에 사람들 죄다 모아놓고 단체사진을 찍는데, 웃기고 어색하지만 이젠 나도 그러려니 하며 한쪽 귀퉁이에서 얼굴이 특히 넙대대하게 나오든 말든 참아낸다. 궁궐에서 어쩔 수 없이 찍히는 사진에 무감각해졌듯이 어떻게 나오든 말든 내가 열심히 들여다볼 게 아니니 상관없다는 생각. ㅋㅋ 점점 대인배가 되어가고 있는 건가?
암튼 아이젠을 등산화에 끼고 걸으면 체력소모가 더하다는데, 딱히 더 힘든 느낌이 없었던 건 오르막길마다 거의 계속 막혀서 크게 힘들일 일이 없었기때문일까, 아니면 연초부터 휴대폰에 앱까지 깔아놓고 근력+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일까 통 알수가 없다. 등산 고수들은 눈도 많지 않고 정체 현상 때문에 제대로 등산다운 등산을 못했다고 투덜댔으니 아무래도 전자가 원인인 것 같지만... 2월 들어선 통 앞산에도 한번 안 올라간 터라 근력이 과연 늘었는지 모르겠다. 점점 늘어나는 몸무게의 대부분은 과연 지방일까 근육일까 ㅠ.ㅠ
대충 찍어온 사진이 아쉬워서...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중이신 선배님의 함백산 일출 사진을 업어왔다. 어느 산이든 '운해'는 새벽녘에만 볼 수 있나보다. 내 평생 저런 산꼭대기 일출 광경을 볼 기회는 영영 없겠지만 한번 보고 싶긴 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멋지다.
둘째주 토요일마다 등산고수들을 따라가는 산행의 올해 첫 행선지는 북한산. 독바위역에서 올라가 족두리봉, 향로봉, 탕춘대능선, 불광역으로 내려오는 3시간짜리 '가벼운' 산행이 될거라고 했다. 하지만 작년 경험상 이들 기준의 '가벼운' 산행도 내게는 늘 고강도 등산이었고, 등반 배정 시간이 짧을수록 쉬는 시간이 얼마 없어 더 고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덜덜 멀미나는 암능 구간을 얼마나 다녔는지 머리가 지릿지릿. 고소공포증 환자에겐 그저 북한산 둘레길이 딱인데 ㅠㅠ 내눈엔 벼랑처럼 보이는 봉우리로 무작정 올라가라 그럴때마다 아주 오금이 저렸다. 곳곳에 얼어붙은 길이 있어 벌벌 떨며 지나긴 했지만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암튼 쾌청한 날씨에 거의 봄볕 같은 햇살과 파란하늘, 툭 트인 시계가 멋졌던 날.
저 능선 중 맨 왼쪽 봉우리가 족두리봉이다. 향로봉은 그 옆 두번째였던가. 막판엔 정신 혼미해서 기억도 잘 안남. 대체 능선을 얼마나 뺑뺑돌아 온건지... 어린시절 부모님따라 북한산 가서 송추로 올라가 구기동으로 내려오거나, 평창동으로 올라가 우이동으로 내려오며 길고 험한 등산에 징징 울던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북한산... 진짜 만만하지가 않다.
잘 못찍어서 길이 선명하지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능선 중간에 '북한산 차마고도'라고 불린다는 바윗길이 있다. 무시무시할거라 예상했으나 폭이 제법 넓어 안쪽으로 바짝 붙어 걸었더니 참을만 했다. 이른 시간이라 마주치는 사람들이 없어 다행.
멋진 기암괴석 나타나면 휴대폰 꺼내들 여유도 생겼다는게 스스로 대견해서 또 한장...
고수들의 등산을 한 1년 열심히 따라다니면 폐활량도 늘고 근력이 붙어 좀 수월해진다더니만, 오는 3월이면 만1년 되는데 아직도 허덕허덕 힘겹기만 하다. 한달에 한번으로는 단련이 안된다는 얘기. 앞산을 가도 심장이 터져라 빠르게 올라야 연습이 되나보다. 쉬엄쉬엄 아름다운 경치 보며 슬슬 다니면 될 걸, 왜 그렇게 죽자살자 산을 타야하는지 좀처럼 모르겠으나 일단은 따라다녀보는 수밖에.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