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

투덜일기 2015. 6. 15. 22:09

주말에 수락산에 갔었는데 중간에 낙오가 됐다. 하산 길 시작하자마자 일부러 느림보들을 모아 앞세워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후미에 있다가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중간에 꼬리를 놓치면서 갈래길에서 엉뚱한 길로 내려간 거였다. 근데 낙오자 6명 중 맨 끄트머리에 있었던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단 걸 맨 처음 알았다. 내가 앞사람을 따라 무작정 내려가고 있으려니 뒤에서 우리 단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OO! OO! 어쩌구저쩌구... (나중에 알고 보니 혹시 일행중 무작정 직선 코스로 내려간 사람 있을까봐 갈래길에서 OO 우측으로!라고 외친 거였단다)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다시 길을 올라가며 외쳤다. OO 여기도 있어요!!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듯 등산로는 다시 조용해졌다. 하산길도 아니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서 내가 앞선 멤버들을 따라잡을 리는 만무했다. 일단 나는 다시 소수가 내려간 길로 내려가 상황을 알렸다. 우리 잘못 내려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오른쪽 길로 갔어요! 


그랬더니 산악마라톤도 하시는 선배님과 등산 고수 후배가 수락산은 등산로가 많아서 어차피 가다가 다 만나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내가 가리킨 방향은 뒤풀이 장소인 '수락골' 방향(서쪽)이 아니라 북쪽이라나... 고수들이 그렇다면야 그런 거지. 일단 우리 6명은 더 이상 헤어지면 안된다고 꼭 붙어 움직여야 한다고 다짐하며 하산을 계속했다. 마침 올라오는 등반객 두 사람을 만난 우리는 수락골 방향을 물었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수락골 가는 길 나오나요? 그랬더니 그 젊은이 자신감 넘치게도 '아니'라고, 길도 안보이는 왼편 숲쪽을 가리키며 저리로 내려가야 수락골이 나온다고 말했다. 나름 방향감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보기엔, 그리고 좀 전에 헤어진 일행들이 간 방향과는 완전 반대방향을 가리키는 조언에 나는 의심을 품었지만, 가다 말고 다시 돌아서서까지 방향과 갈 길을 일러주는 그 청년의 호기에 우리는 길도 안 보이는 숲으로, 말하자면 비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내눈엔 길도 아닌데! 등산 고수들은 이 정도면 길이 있는 거라고... 쌓인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지고 아슬아슬 한뼘 밖에 흙이 안보이는 이상한 숲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어차피 산 내려가면 좀 벗어났더라도 택시 타고 집결지로 가면 된다고... 하지만 길은 점점 더 험해지고, 설상가상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비까지 흩뿌렸다. 좀 전까지 햇빛 쨍쨍 눈부셔서 선글라스 끼고 있었는데! 나뭇가지를 헤치고 지나느라 긁히고 찔리고... 인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등산로와 달리 암벽에 묶여 있는 건 알량한 빨랫줄 아니면 줄줄이 엮어 놓은 운동화끈! ㅠ.ㅠ 그걸 붙들고 유격훈련 하듯이 한 길 넘는 암벽을 내려갔다. 하지만 제법 내려가도 주등산로와 만나지지가 않았고, 나는 다시 일행들이 간 방향과 너무 달라 불안하다고 꿍얼거렸다. 


그제야 네이버 지도로 현위치를 확인. 수락산이 요상하게도 전화가 안터지는 곳이 많았고 종종 인터넷도 먹통이었다. 드디어 휴대폰에 지도가 뜬 순간 우리는 완전 엉뚱한 곳으로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남양주군 별내가 나온단다. ㅋㅋㅋㅋ 결국 다시 우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미친 놈 뭐야! 길을 모르면 모른다고 가르쳐주질 말든지 왜 잘난 척 틀린 길을 가르쳐줘가지고!!! 하산길에 만난 남자가 가르쳐준 방향은 정 반대인 동쪽 방향이었다. 나 원 참. 그리고 등산하다 길을 잃으면 괜히 모르는 길 질러갈 게 아니라 다시 올라가 원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


우린 다시 가느다란  빨랫줄이나 운동화끈 같은 줄에 목숨을 걸고(!) 익스트림 스포츠 즐기는 인간이거나 약초꾼들이나 다닐 법한 이상한 숲길과 암벽을 타고 다시 정상을 향했다. 4, 50분 헤맨 끝에 드디어 밥먹고 하산하던 주등산로와 만난 순간, 희한하게도 하늘은 다시 밝아져 햇빛이 쨍쨍했다. 좀 전에 다니던 길과는 전혀 다른 세상. 음침한 회색 세계에서 벗어난 느낌은 순전히 심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 혼자였으면 다 뻥이려니 하겠지만 비 등산로에서 헤매며 비 계속 내리면 몇몇은 방수 옷 없는데 어쩌나 단체로 걱정했다규! 


지나고 보니 다 웃을 일이고 인상 깊은 추억이지만 생각할수록 길 잘못 알려준 그 남자가 생각난다. 원래도 소심해서 타인에게 잘 묻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어쩌면 나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데, 이번에 애써 주변에 묻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며 오히려 더 꼬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르면 사실대로 모른다고 할 일이지, 그 남자는 왜 아는 척을 했을까? 진짜로 안다고 생각했을까? 비슷한 방향도 아니고 정 반대 방향을 가르쳐주면서?


본인이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사회에 병적인 존재가 아닐까 심히 비약하는 결론까지 내리게 된다. 무작정 어디론가 사람들을 막 끌고 가다가 '이길이 아닌개벼...' '아님 말고..' 하는 식의 리더나 조언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과적으로 무사히 낙오자들을 다독여가며 이끌고 하산에 성공한 등산 고수 두 사람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하산길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해 남은 얼음물 홀라당 거의 다 마셔버린 하수들과 달리, 고수들은 보온병에 든 오미자차, 보냉팩으로 감싼 얼음물이 끝까지 남아 있어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ㅠ.ㅠ 염분과 당 떨어지는 경우를 대비한 각종 간식까지도...) 선뜻 "아무 길로나 질러가면 돼!"라고 함부로 생각한 건 잘못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50명도 넘는 인원을 리드하면서 평소처럼 갈래길에서 방향을 지시해주는 사람을 세워두지 않은 주최측도 잘못했다! (산행 책임자는 그래서 모두에게 긴 반성의 글을 올렸다 ㅋㅋ) 하지만 이번엔 워낙 인원도 많고, 뒤풀이 장소 확보를 위해서 무거운 짐과 함께 선발대(주로 빌빌대는 멤버들 뒤치다꺼리 해주는 고수들)를 여럿 파견하는 바람에 미처 못 챙긴 걸 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것. ㅋㅋ


그간 거의 매일 휴대폰 앱으로 근력운동을 좀 했고 앞산도 가끔 올랐지만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몰랐는데, 긴장한 탓인지 낙오하기 이전에 정상 오를 때도 이상한 암벽에서 밧줄이나 쇠줄 타고 오르기를 거듭 시도했고 (부들부들 떨면서... ㅠㅠ) 나중에 낙오한 뒤 되돌아가는 길에도 유격훈련이 아니고 뭐냐 싶게 엄청 생고생을 했는데도 밧줄 잡았던 어깨만 약간 뻐근할 뿐 비교적 몸이 멀쩡한 것이 놀랍다! 비록 입안은 너덜너덜 다 헐었지만서도... ㅎㅎㅎ 혹시나 산에서 낙오되면 나 혼자서도 집에 잘 찾아가야한다며 산행 루트 설명할때 귀 쫑긋 열심히 듣는 편이고, 휴대폰 안 터질 것에 대비해 배낭에 나침반도 매달고 다니지만 실제로 낙오를 하다니... ㅋㅋ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물론 그날따라 산행 지도도 안보고 딴짓했고 휴대폰 안터져도 나침반 보잔 말은 못 꺼내겠더라... 고수들이 있는데 하수가 무슨...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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