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누수공사로.. 아니 정확히는 사람들에 치여 마음 고생이 너무너무 심한 나날을 보내며 당연히 불면에 시달렸다. 수시로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열이 막 오르고 (어쩌면 이건 폭염 탓으로 생겨난 온열 질환의 징후일 수도 있겠으나;;) 거의 24시간 에어컨을 틀어도 심신이 계속 고달펐다.
스트레스로 바짝 긴장한 머리가 때로는 활자로 달래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번엔 도무지 책을 들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깊은 숲속에 들어가서 소리라도 고래고래 지르고 싶은 심정?
그래서 정말 미친 척 무박2일로 지리산 천왕봉을 가자는 이야기에 홀라당 넘어가 금요일밤 10시에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 결정엔 점점 몸쓰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드는 상황도 한몫을 했다. 내년엔 무릎이나 발목이 더 아파서 등산과 영영 이별을 할 수도 있는데! 하루라도 더 젊을(?)때 로망인 지리산에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하필 최고기온이 36, 7도를 육박하는 한여름에 간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설마 지리산은 시원하겠지 막연히 상상했다.
생판 모르는 일반 산악회 주최 지리산 등산에 나포함 지인 4명이 끼어서 가는 형식이었는데, 놀랍게도 무박2일로 새벽 3시부터 지리산 종주 33km를 13시간만해 해치우는 A팀이 16명이나 됐다. 혹시 버스 출발 시간을 넘겨 낙오되면 서울로 돌아오는 건 각자 알아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단다. 우어... 우리는 거의 최단코스로 10시간만에 천왕봉을 찍고 내려오는 B팀. 13.5km를 10시간에 완주하면 된다고 했다.
밤새 버스에서 자야 수월하게 등산을 할 수 있을 테니 안대와 목베개까지 준비했지만 ㅠ,ㅠ 그럼 그렇지... 당연히 숙면을 취할 순 없었고, 어느 틈에 3시가 다 되어 A팀이 성삼재에서 우르르 버스를 내렸다. 곧이어 3시 30분쯤. 우리도 백무동 계곡 주차장에 당도했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을 켜고 등산 준비를 했다.
새벽 지리산은 역시나 시원해서 23도를 가리켜 다행이었지만, 도시락과 얼음물, 커피와 간식까지 사상 최고의 무게로 꾸린 배낭이 어깨와 허리를 짓눌렀다. 물론 가장 무거운 건 비몽사몽 피로감과 불안감이 더해진 나의 육신이었다. 등산 고수이신 선배님의 안내로 빠르지도 않게 차근차근 경사를 오르는데 음...이상하다. 왜 숨이 잘 안 쉬어지지? 자꾸만 다리가 처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해도 폣속에 공기가 잘 가 닿지 않는 느낌이랄까.
동행들이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리더이신 선배님은 속으로 나 때문에 천왕봉은 글렀고 장터목 대피소까지만 갔다가 하산해야겠다고 계산을 하셨다고 한다. ㅠ.ㅠ 말도 안되는 추측일 수도 있겠는데, 내 짐작으로는 폐소 공포증 같았다. 어둠 속에서 각자 헤드랜턴에 의지해 자기 발밑만 보고 가는 야간 산행이 상상속에선 되게 멋질 것 같았는데 현실의 나에겐 그냥 공포였던 모양이다. 조금 오르다 쉬기를 반복하며 내가 변명을 했다. 해만 뜨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실제로 사방이 서서히 밝아지자 숨이 잘 안쉬어지는 것 같은 짓눌린 느낌이 사라졌다. 미안한 마음에 그다음부턴 내가 맨앞장을 섰는데 초반에 많이 까먹은 시간을 벌충하겠다는 의욕이 간간히 과다해져 오버페이스! ㅋㅋ 이내 선두를 선배님께 양보했다.
여기가 바로 장터목 대피소
새벽 4시부터 오르기 시작해 장터목대피소에 당도한 것이 8시 30분쯤. 6시반쯤 간식으로 빵을 좀 먹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싸온 도시락을 먹을 순서였다. 선배님이 돼지고기와 라면사리까지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끓였고, 나는 산에서도 굳이 잘 먹겠다는 일념으로 얼린 냉면 육수와 도토리묵, 양념한 김치, 채썬 오이로 묵사발을 만들었다. 장터목 휴게소에선 바람이 꽤 불어 그늘에 있으면 바람막이를 입고도 덜덜 떨렸던 참이라, 뜨끈한 찌개도 먹고 곧이어 시원한 묵사발도 먹으며 꾸역꾸역 엄청난 양의 밥을 삼켰다. 점심은 하산 후에 느즈막히 식당에서 사먹을 작정이라 최대한 많이 먹어두라는 선배님의 당부 말씀. ㅋㅋ
해발 1750미터라는 장터목 대피소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그야말로 장엄했다. 와.. 지리산이 정말 큰산이로구나. 사방으로 겹겹이 펼쳐진 능선이 끝이 없었다.
부른 배를 두들기며 다시 천왕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 시간이 9시 30분.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1.7km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상까지 목표시간은 대략 11시. 정상에서 좀 노닥거리다가 3시간 동안 하산해 점심 먹으면 딱이겠군, 했다.
보통 산에서는 1km 걷는데 30분을 예상한다. 헌데 지리산 표지판은 거리표시가 너무 박한 느낌! 서울 근교 산에서 느끼는 거리감보다 너무 멀었다. 500미터 거리 줄이기가 어찌나 어렵고 오래 걸리던지. ㅠ.ㅠ 틀림없이 표지판 잘못됐다고 투덜투덜 나중엔 욕이 막 나왔다. 아니 이게 무슨 1.5km냐고! 3km도 넘는 것 같은데!
길이 멀어서 욕이 나오는 것과는 별개로 운무와 구름에 휩싸였다 벗어졌다를 반복하는 풍경은 기가 막혔다. 우와...
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계속 이렇게 운무가 몰려오면 천왕봉에서 시계가 별로 안 좋을텐데.. ㅠ.ㅠ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이왕이면 하늘이 맑게 개기를 빌며 바위 비탈을 오르고 또 올랐다.
드문드문 고사목을 만나 높은 산임을 실감하며 드디어 1915미터 천왕봉 정상!
걱정했던 대로 정상 부근은 구름에 휩싸여 시계가 좋지 못했고... 좁아터진 정상석 부근엔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고 무셔라.
째뜬 내가 드디어 지리산 꼭대기를 올랐다는 뿌듯함과 행복함에 휩싸였다. 한라산 꼭대기는 어렸을 때 멋모르고 올라가긴 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남한 최고봉을 올랐고, 두번째로 높은 지리산 천왕봉도 드디어 구경했으니 이제 남은 건 설악산 대청봉 뿐이로다! ㅎㅎㅎ 장하다.
하산길은 중산리 계곡으로 3시간만 내려가면 된다고 했으니 최대한 정상 등반의 기쁨을 만끽하며 아이스커피도 한 모금 마신 뒤 11시반쯤 슬슬 하산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복병은 역시나 한낮의 더위였다. 천왕봉 정상 코스는 능선길이 많지 않아 그리 더운 줄 모르고 올랐는데, 내려갈 때는 숲을 벗어나 뙤약볕으로 걷는 길이 꽤 됐고, 28,9도 정도라고는 해도 습기와 열기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물은 총 2리터 정도면 넉넉하다고 했었는데;;; 1.5km쯤 남았다고 했을 무렵 결국 내 물은 동이 나버렸고 후배와 동기에게 물과 음료를 얻어마시며 민폐를 끼쳐야 했다.
산에서는 절대 주변 사람들 물 뺏어먹으면 안된다고 배웠는데 어흑. 게다가 총 6.5km였던가... 3시간이면 된다고 하던 하산길이 얼마나 길고 지루한지. 가도 가도 끝이 없어! 하도 지리지리해서 지리산이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체력은 점점 고갈되고 다리는 무겁고, 땀은 쏟이지는데 계속 덥고... 어휴. 경사가 가파르지 않는 한 숨가쁠 이유도 없는 하산길은 속도만 잘 유지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체력이 떨어져 산을 내려가는 게 고역일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산길에 비하면 오히려 천왕봉 올라가기 직전엔 쌩쌩한 편이었네 그려.
폭염에 무박2일로 지리산에 간다고 했을때 주변에서 혹시 탈진할까 우려된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이해가 갔다. 숨도 안찬데 너무 힘들고 진빠지고 금방이라도 눕고 싶고. 마지막 삼거리대피소였던가... 거기서 쉴 땐 나도 모르게 배낭을 맨 채 의자에 드러누워버렸다.
하여간 10시간을 예상했다가 11시간 반만에 무사히 내려와 중산리 계곡 앞 식당에서 대충 씻고 옷도 갈아입은 뒤 감자전과 비빔밥으로 맛나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서울로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은 5시. 종주팀 중에는 무려 9시간만에 33km를 달려 내려와 벌써부터 쉬며 기다린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인간이 아닌게야. ㅠ.ㅠ
무사히 서울로 돌아와 24시간 만에 신사역 앞에서 버스를 내리고 보니, 정말 지난 시간이 꿈결 같았다. 우와 내가 지리산 천왕봉엘 올라갔다니! 당연히 그날은 지리산 숲의 정기를 받으며 체력을 탈탈 소진한 뒤끝이라 집에 돌아와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그러나 지리산 효과는 며칠 가지 못했다. 매일같이 부딪쳐야 하는 아래층 아저씨 아줌마와 말을 섞기만 해도 엄마도 나도 혈압이 올라갔다. 우엑!
번역은 과거 수도자들의 수행 도구였다는 말도 있듯이, 드물게 잠깐씩 짧은 작업을 할 땐 그래도 마음의 평화가 온 것 같았지만, 불면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면 잠 안오는 밤에 뽀시락뽀시락 또 생산적인 취미생활을 하는 수밖엔 없었다. ^^
마침 출판사 다니는 후배가 서울도서전 홍보물로 만들었다는 에코백을 준 게 있었는데, 보라색과 민트색 중에 내 취향대로 민트색 프린트를 고르긴 했어도 딱히 내가 좋아하는 '푸른 색'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반대편을 푸른색 자수로 장식하리라!
자수책을 뒤적여 여름에 맞게 시원해보이는 도안을 골라 가방에 밑그림을 그렸다.
요즘엔 알록달록한 자수보다 이렇게 단색 자수 도안이 더 마음에 든다. 나중에 자수액자를 만들어도 예쁠 것 같다.
왼쪽이 선물받은 에코백의 원래 정면이고, 가운데는 내가 자수를 놓아 새로이 탄생한 정면이고... 에코백의 단점인 수납 문제를 해결하고 지저분한 자수 실매듭도 가리고자 한쪽에만 천을 대고 주머니도 달아 오른쪽 사진처럼 안감이 탄생했다.
생각보다 꽤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자수실도 많이 들어, 처음 2개나 사놓았던 DMC 791번실이 모자라 중도에 멈췄다가 동대문시장에 다녀와야했다. 벌써 두어번 들고 나가보았는데, 이젠 정말 가벼운 천가방이 아니고선 어깨가 아파서 뭘 매고 다닐 수가 없다. 이것저것 많이도 넣고 다니는 내 취향엔 크기가 좀 작다 싶지만 그래도 캔버스 천이 두툼한 편이라 꽤 오래 애용할 것 같다.
가방의 완성과 더불어 더 이상 맘고생 할 일이 없으면 했으나.. 지난주에도 또 접촉사고로 전전긍긍할 일이 생겨 밤에 또 자수함을 꺼냈다. ㅠ.ㅠ 이번엔 간단하게 선인장 도안을 이리저리 참고해 냉장고 마그넷을 만들었다.
마침 친구 생일도 돌아오겠다;; 지난번에 받은 기프티콘에 답례겸... 자수 브로치따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친구의 취향을 감안한 선택이다.
친구의 이니셜까지 새겨넣고도 막상 냉장고에 붙여보니 넘나 예뻐서 선물하지 말고 그냥 내가 가질까 한참 고민했다. ㅋㅋ (그러나 아직 전달하지 않았으므로 계속 유혹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또 만들긴 마그넷 재료가 부족해서리...
요 전 포스팅을 올린 뒤 비로소 나름 마음의 정리도 많이 된 느낌이고, 불면도 어느정도는 해소된 듯하다. 어차피 창피한 김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나의 노력과 그 결과물 또한 자랑하고 싶었다. 남아도는 잉여력과 생산성의 결과물이 예쁘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은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