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언젠가 포스팅에서도 썼듯, 어릴 때 방학마다 삼촌이 종로통으로 불러내 나의 형제들에게 만화영화를 보여줬기 때문에 김청기 감독의 장편애니메이션이 나의 첫 극장영화임엔 틀림이 없다. 그 이전에는 어린이가 영화관에 가서 볼만한 영화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게 <로보트태권V>가 였는지 <마루치아라치>였는지 <똘이장군>이었는지 <칠칠단의 비밀>이었는지 아쉽게도 콕 찝어낼 수가 없어 검색해보니, <로보트태권V>가 1976년에 나왔단다. 그렇다면 내가 열살 때이니 아마 그게 첫 영화일듯. 연년생 큰동생은 방학마다 늘 같이 다닌 게 확실한데, 처음부터 네 살 차인 막내까지 대동하고 갔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느 해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막내동생 손을 잡고 영화관을 향해 종로통 인도를 걷다가 지하철 환풍구에서 나온 바람에 갑자기 주름치마가 확 올라가 당황하여, 애먼 막내동생한테 막 화를 냈던 장면은 기억난다. 아마도 그날, 소심 & 뒤끝 작렬로 영화 보는 내내 집중 못하고 창피한 생각만 하고 있었을 듯. ㅋㅋ
어른 대동 않고 처음 본 영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엄마들이 애들만 영화관에 넣어놓고 나중에 픽업하고 그러는 문화는 없었고, 영화관이란 모름지기 어른과 함께 가야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5학년 때였나, 같은 동네 살 던 큰고모가 사촌동생을 데리고 영화를 보고 오라고 부탁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화관이 하나 있었고, 거기서 <쾌걸 조로>를 상영하는데 사촌동생이 그걸 보겠다고 떼를 쓴 모양이었다. 동생들이 놀러나가고 집에 없었기 때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짠순이'로 유명하신 큰고모가 영화값 아끼려고 나만 가라고 한 것인지 내막은 모르겠으나 암튼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사촌동생을 데리고 동네 영화관(동시상영관은 아니고 나름 3류 개봉관이었다)을 찾았다. 난생처음 내가 영화 표를 사고 거기 적힌 번호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으나, 시내 영화관과 달리 동네 영화관에서 주는 영화표엔 좌석번호도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드문드문 앉아 있는 아저씨들이 괜스레 무서워서 바짝 긴장해 처음엔 영화에 집중도 잘 하지 못했고, 원래도 부산하고 정신 사나운 사촌동생은 음료수 한병을 다 마시더니 영화 보다 말고 화장실엘 간다고 했다. 큰고모가 애지중지하는 외아들한테 또 무슨 일 생기면 안되지 싶어서 화장실 앞까지 쫓아갔다 캄캄한 극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영화는 꽤나 흥미진진했는데 녀석 때문에 줄거리를 놓쳐 짜증도 났고, 나중에 밖에 나오니 생각보다 어두워져 덜컥 겁도 났었다. 아무튼 동생들과 버스 타고 우리끼리만 화전이니 삼송리니 논바닥 스케이트장에 간 것보다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친구들과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
중학교엘 들어가니 한학기에 두번은 단체로 영화관람을 했다. 며칠씩 시험을 보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마지막날 시험이 끝나면 시내 극장에서 출석까지 확인하는 단체 영화관람을 하는 것이 그 학교의 전통(?)이라면 전통인 모양이었다. 그때 처음 본 것이 <사랑의 스잔나> 아니면 <디어 헌터>인 듯한데, 어느게 먼저인지 그걸 모르겠다. <사랑의 스잔나>는 슬펐다는 것말고는 별 기억에 없지만, 베트남전을 다룬 <디어 헌터>는 어찌나 충격적이고 인상 깊었는지, 지금도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최초의 영화로 손꼽는 작품이다. 나중에 비디오로 다시 보니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던데 우린 어떻게 단체관람을 했었는지 그것이 불가사의할 뿐. +_+ 영화음악도 인상적이라 라디오 심야 영화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걸 일일이 녹음해서 반복해 듣곤 했다. 혼자 조숙한 척 하면서;;
단체관람이 아니고 친구와 처음 시내 영화관엘 간 것도 그 즈음이었다. 같은 반이기도 하고 집도 가까운 친구랑 단둘이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다가, 나의 막내동생도 데려갔다. (막내딸인 그 친구가 조잘조잘 수다 많고 말 잘듣는 우리 막내를 귀여워했었다. 자기도 그런 남동생 있으면 좋겠다고까지;;) 굳이 막내가 따라붙은 이유는 아마도 영화구경보다는 기사까지 딸린 친구네 검정색 세단 자가용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날 우리끼리 시내 영화관엘 찾아가는 걸 못미더워한 친구 엄마가 차로 대한극장(혹은 국도극장;;)까지 데려다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암튼 뭔가 대단히 거창하고 역사적인(?) 날이어서 그날의 주변 기억은 또렷한데, 결정적으로 그날 본 영화가 뭐였는지 모르겠다. ㅠ.ㅠ 막내는 기억하려나,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지.
처음 아버지랑 단둘이 본 영화.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 <세계의 명화>를 밤늦게까지 참 열심히도 봤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이고 서부영화까지 이미 본 것일 정도로 젊어서 퍽 영화를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내가 갓난아기 때, 부모님이 연애시절처럼 영화를 보러갔다가 깜깜해지자마자 내가 하도 우는 바람에 둘이 번갈아면서 극장에 들락날락하면서도 끝까지 영화를 보고 나온 적이 있다는 전설을 듣기도 했다. 그 뒤론 아예 포기했다고. 암튼 부부동반 영화관람은 불가능했을지라도 아버지는 가끔씩 TV 영화로 달래지지 않는 영화에 대한 갈증을 극장에서 친구분들과 푸셨던 것 같다. 내가 중고생 때 단체관람을 하고 온 영화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으니까.
그러다 아버지가 보고픈 영화가 있으니 토요일에 단둘이 극장에 가자고 했다. 엄마와 동생들에게는 비밀로 하자면서. ^^; 나는 좋아라 약속을 잡았고, 학교를 파하자 마자 종로로 달려가 단성사 앞 빵집에서 아버지와 만났다. 문제는 영화가 알 파치노 주연의 <스카페이스>였다는 것! 아버지는 <대부> 정도로 생각하신 모양이었는데, 영화는 훨씬 더 잔혹할 뿐만 아니라 부녀가 보기에 좀 민망한 장면도 더러 나왔다. 어쨌거나 숨을 죽인 채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버지는 내게 미안했는지 영화가 너무 자극적이라고 요즘 영화들은 옛날처럼 낭만이 없다고 투덜투덜 하셨던 것 같다. 아무리 아버지와 같이 갔더라도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에 어떻게 교복까지 입은 중학생을 들여보냈는지, 그것도 좀 의아하지만, 이미 <디어 헌터>도 중학생 때 단체로 들어가 본 걸 보면 옛날엔 마구 가위질을 해서 등급을 낮췄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렇듯 아빠와 딸의 이 오붓한 데이트를 나는 최근까지도 분명 중학생 때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빵집서 아빠랑 만난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헌데 저런 내용을 다른 블로그에 댓글로 달고 나서 찾아보니 <스카페이스>는 1983년에 만들어졌대고 우리나라엔 1984년에나 개봉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 뭐냐... 중학생 교복시절이 아니고 고3때란 말인가. -_-; 그러면 또 한 가지는 의문이 풀린다. 교복 자율화 세대라 사복 입고 다녔을 때니까 아무리 애가 좀 작아도 보호자 동반이니 극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간 그날 결국 부녀는 둘만 영화데이트한 게 들통나서 엄마에게 혼이 났다. 미리 얘기 하고 가면 누가 말리나, 왜 그 걸 비밀로 해, 기분나쁘게! 라는 것이 엄마의 요지. 혼이 나면서도 나는 내심 그날의 데이트가 뿌듯했던 것 같다. 이후로도 대학시절까지, 가끔씩 부녀의 영화 데이트는 이어졌지만 이후 같이 본 영화는 뭐였는지도 생각이 안난다.
보다가 뛰쳐나온 영화.
대학에 들어간 뒤로 나의 영화관람 양상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유명 신작 영화를 종로통 개봉관에 가서 보거나, 잘난척 하는 겉멋이 좀 들어 경복궁 옆에 있던 프랑스문화원에 가서 오래된 프랑스 영화를 영어자막으로 보거나(그러니 제까짓게 얼마나 이해를 했겠나!), 학교 근처 동시상영관에 가서 좀 지난 영화를 보거나. 암튼 신입생이라고는 해도 아직 미성년자라 성인영화는 제대로 본 적이 없던 나는 프랑스문화원에서 이런저런 영화를 보며 처음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벌거벗은 남녀의 몸은 물론이고 주요부분이 정면으로 막 나오는 게 아닌가! 나를 그런 문화생활로 이끌었던 동기이자 언니 하나는 나에게 성교육 제대로 시켜준다고 킥킥댔다. 암튼 예술과 문화를 핑계 삼아 프랑스문화원에서는 상당히 수위 높은 성인영화도 꿋꿋이 버텼던 것과 달리, 나는 학교 앞 동시상영관에서 슬그머니 도망쳐나오는 사건을 맞이한다.
당시 동시상영관에서는 괜찮은 외화 한편, 한국 영화 한편을 번갈아 상영했고, 아마도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러 갔던 날인 것 같은데 하필 그때 상영된 한국영화가 애마부인 시리즈였다. -_-; 개봉관과 달리 그냥 영화 중간에도 들어가서 보고 싶은 영화 한 편만 제대로 보고 나오거나, 종일 앉아서 영화 두편을 구색 갖춰 보거나 그건 관객 마음이었다. 이미 수위 높은 프랑스 영화로 단련된 터라, 애마부인 시리즈 정도는 가뿐하게 보아주리라 마음 먹고 들어간 것이었는데, 허걱 뜻밖의 복병이 있었다. 영화 주인공이 내가 아는 사람(말하자면 친척;;)이 아닌가! ㅋㅋㅋ 영화배우인 거야 원래도 알았지만, 막상 스크린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나오는데다 연기는 엄청 어색하고 성우가 더빙한 야릇한 목소리로 얄딱구리한 장면까지 자꾸만 나오는데, 민망해서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ㅋㅋㅋ 결국 나는 속이 좋지 않다면서 도망나와 복도 의자에서 그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음번 친척모임에서 '그분' 얼굴을 어떻게 보나 걱정하면서...
첫 데이트 영화.
아.. 정말 기억해내고 싶은데 이게 통 확실하지가 않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떼로 몰려다니며 영화를 봤고, 그 무리엔 영화감독이 꿈인 친구가 둘이나 있어 종류별로 참 다양한 영화를 보러다녔다. 하지만 사실 떼로 몰려다녔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친구들이 '걔'랑 나랑 엮어주려는 것이어서, 꽤나 시간이 지난 후 그 노력이 은근슬쩍 결실(?)을 맺고 말았기 때문에 어느덧 둘만 영화를 보러 가게 된 시점이 대단히 모호하다.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던 것도 같고 <영웅본색>이었던 것도 같고... ㅋ
암튼 <영웅본색>은 걔가 하도 좋아해서 같이 세번은 본 것 같다. 자기도 그런 진한 우정 영화를 만들고 싶다나 뭐라나. 마지막엔 대부분의 개봉관에서 다 내리고 하는 데가 없어서 시설 엉망이고 퀴퀴한 냄새도 나는 파고다 극장(!)까지 찾아가 봤었다.
더불어 돌이켜보니 마지막 데이트 영화가 무려 <살인의 추억>이다. -_-;; ㅋ
난생 처음 혼자 본 영화.
이웃 주민들은 혼자 영화 본 시기가 꽤나 일러서 20대 초반 아니면 청소년기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 아무래도 세대차의 탓이 좀 있겠지만 (혼자서 영화보는 문화는 역시 90년대에나 생겨났다는 것이 나의 견해;;) 독립심 차이도 있을 것 같다. 암튼 내게 영화란 오래도록, 누구랑 함께 보고 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중요한 소재이자 공통점을 나눌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몇번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보기 싫은 데도 척 노리스 나오는 액션 영화 여러번 끌려가서 봤다 ㅋㅋ) 친구들별로, 또는 사귀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같이 볼 영화를 나누어 분배했던 것 같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이 볼 친구 없으면 동생을 데려가기도 하고.
그러다 서른 즈음에 회사생활을 관두고 번역일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전체적인 홀로서기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밥도 혼자 식당 가서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카페도 혼자 가고, 술도 혼자 마시고, 영화도 혼자 보고. 출장 가서는 이미 다 해본 가닥이지만, 특별상황이 아닌 일상에서는 소심함을 핑계로 아직 시도하지 못할 때였다. 게다가 준백수가 되고보니, 정말 남들 다 일하는 평일 대낮에 홀로 다닐 일이 많았다. 나름 거창하게 <홀로서기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여 하나씩 시도했고 뿌듯해 했던 장면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은 있는데, 아 또 결정적으로 처음 혼자 본 영화가 잘 기억나질 않는다. ㅠ.ㅠ
할리우드 영화는 대형영화관에서 보고 그외 소규모로 상영하던 영화들은 종로에 있는 코아아트홀/씨네아트를 많이 이용할 때라, 혼자 처음 영화를 본 것도 코아아트홀이었던 건 확실하다. 거기서 혼자 <씨클로>를 혼자 보며 울다가 끝나고 민망했던 것도 기억 나지만, 그게 정녕 처음이었는지 그걸 모르겠다. 젠장. 어쨌든 혼자 영화관 가기를 트기는 했어도, 혼자 자주 보러다니진 않았고 늘 영화 파트너를 찾았던 것 같다. 씨네큐브가 생겨난 2000년 이후로는 퍽이나 스스럼 없이 가끔 혼자 영화를 보러 다녔지만, 아직도 영화는 누구랑 같이 봐야 더 재미있고 뿌듯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혼자 보는 영화는 어쩐지 외롭다. ㅋ
볼 때는 좋아라 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이 부끄러웠던 영화
파피는 이 항목에 <타이타닉>을 넣었던데 나도 막 공감했다. 재난영화 별로 안 좋아하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좋아했고 빅토리아시대 풍 배경도 마음에 들어서 얼결에 기회가 되는 바람에 두번이나 봤다. 나중에 케이블이나 TV로 본 것까지 합치면 몇번이나 더 봤을지 원. ㅋ 나는 카메론 감독이 직접 그렸다는 영화 속 그림도 좋았는데! ㅋㅋㅋ 하지만 나중에 그놈의 뱃머리 장면까지 하도 많이들 패러디를 하니까 민망해지더라는;;;
고등학교 때 단체로 본 <사관과 신사>도 그런 영화에 속한다. 주제곡 Up where we belong 까지 엄청 좋아했었는데, 내가 좋아하던 국어선생님이 입에 막 거품을 물고 영화를 막 비판하는 거다. 구태의연한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그렇구나 새삼 생각하며 감상문까지 써놨던 걸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리처드 기어 팬이라 <프리티 우먼>도 헤벌쭉 좋아라 하며 봤고, 당시엔 예뻐 보였던 줄리아 로버츠의 의상(특히 흰색 땡땡이 무늬 갈색 원피스!)도 마음에 들어했으나 뭐 이젠 리처드 기어 본인도 욕하는 영화가(세계 금융을 위기로 몰아넣은 기업 사냥꾼 미화했다고;;) 되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ㅋ
그밖에 절대 두번 볼 영화가 아닌 데 두번 봤다든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는데 본 영화라든지, 그런 항목들은 여전히 기억의 늪에 빠져있다. 착한 어린 시절, 차마 봤다고 말을 못해서 두번 보거나 싫으면서도 꾹 참고 본 영화가 분명 있었는데 말이지... 이번 기억을 더듬으며 깨달은 사실 한가지. 십여년 전 기억보다 왜 까마득한 옛날 기억이 더 선명한 것이냐! 치매형 기억력인 것 같아서 좀 뜨끔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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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어디 잘 둔다고 둔 물건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것은 다반사이고,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전날 계획했던 일도 까맣게 잊는 게 많다. 하물며 몇년 전 일이야 오죽할까. 이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를 저 친구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엉뚱한 기억으로 갖고 있는 경우도 많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는 아예 내가 먼저 뭘 아는 척 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도 있다. 특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귀신같이 잘 기억하고 있는 똘똘한 지인들에게 나의 건망증과 무덤덤함은 때로 배신감을 안기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기야 내쪽에서 더 잘 기억하고 있는 지인들의 에피소드도 더러 있긴 하다. 서로에게 각인되는 사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는 사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데 취약하다. 나와 사적으로 상관없는 유명인의 얼굴과 이름이야 잊어도 해될 것은 없지만, 한두번 대면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그저 공백으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뜨끔하다. 심지어 서너번 만나고도 얼굴이 희멀건 윤곽선으로 남은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 <면치>라고 인정하기로 한 나의 기억력을 통 믿을 수가 없게 된 뒤로, 그래서 나는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를 삼가고 있다. 안전하게 무조건 "안녕하세요"다. 상대쪽에서는 반갑게 알아보는데 내쪽에선 '누구더라, 누구더라, 누구더라...' 초조하게 아득한 머릿속을 헤집고 있노라면 진땀이 날 지경이다.
얼굴은 알아보겠는데 이름이 통 기억나질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그쪽에서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서로 민망하게 웃으면 마음이 편한데, 상대편은 나름 특이한 내 이름을 기억하는 반면 나는 그러지 못할 때 참 미안하다. 다시 안볼 사람이면 상관없지만, 일 때문에 만나는 관계망 안에서 나는 얼굴 알아보기에 관한 한 분명 칠칠하지 못한 인간으로 분류되어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한탄한 바 있는 부실한 기억력 타령을 새삼 또 하고 있는 이유는 키드님의 블로그에서 언급된 <책 읽어주는 남자> 포스팅 때문이다. 케이트 윈슬렛이 <더 리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단 얘기를 듣고는 영화를 한번 봐야겠다 생각을 했었다. 원작도 있으며 부제가 각기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줄곧 과거에 내가 읽은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프랑스 책이었고, 당시에 그 책을 읽은 친구들과 우리도 책 읽어주는 귀여운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크게 베스트셀러가 되진 않았지만 알음알음 꽤 읽혀, 어느 출판사에서는 그 제목을 본따 <~ 해주는 남자> 시리즈물을 기획하기도 했었다.
오늘 문득 똑같은 제목의 책을 프랑스와 독일 작가가 썼단 말인가 싶어, 찾아보니 아니다. +_+
이번에 영화화 된 <책 읽어주는 남자>는 10년 전에 내가 읽은 그 책인 모양이다. 다른 책은 없다. 그런데도 내 기억엔 책을 읽어주는 귀여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 전쟁이니 나치니 하는 주변 상황은 하나도 없고 기막히게도 프랑스어로 책 표지에 적힌 원제를 본 것만 같다. 큭.
하기야, 어떤 책이나 영화는 예전에 본 것인줄도 모르고 끝까지 보다가 기적적으로 기억을 해낸 경우도 있으니 아마 두번째 보면서도 두번째인줄 몰랐던 것들도 더러, 어쩌면 꽤 많이 있을 것 같다. 책이야 두고두고 여러번 보며 감동할 수 있으면 당연히 좋은 것이니 억울할 일은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정신머리없고 기억력 나쁜 내가 한심스럽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의 기억이란 게 자기 좋을 대로 재편집되는 모양이지만, 그나마 뇌리에 남아있는 나의 기억들이 내 마음대로 휘저어 믿음직하지 않은 재구성의 산물임을 깨닿게 되는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슬쩍 겁이 난다. 차라리 그냥 까맣게 잊어버리는 쪽이 낫지 않은가 말이다.
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맏이 부모의 맏딸로 태어난 데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이 다 장수하신 편이라 어른이 된 뒤에도 할머니들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많다.
놀라운 건 두 할머니 모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글만 익히셨으며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까지 쪽머리를 하셨을 정도로 외모로는 <구식> 할머니였고 외출할 때 말고 그냥 집에서 입는 옷은 언제나 <몸뻬> 바지였다는 점, 그럼에도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아들과 손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남아선호사상이야 뼛속 깊이 자리잡은 본능 같은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 딸들과 손녀딸들이 크게 홀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맏손녀딸이다 보니 오히려 특혜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예컨대, 나는 7살에 국민학교에 얼떨결에 입학한 뒤 한 학기 내내 할머니의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다. 당시 전교에서 제일 작은 아이였다는 후문이 있기는 하지만 ㅠ.ㅠ 그래도 매일 손녀딸을 업어 등하교를 시키는 우리 할머니의 정성은 온 동네에 유명했다고 한다. 확실히 두 할머니들은 장손을 각별히 챙기시는 듯해도, 손위 누이인 나에 대한 신뢰는 더욱 전폭적이었고 내 말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다 동의해주셨다.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번역이란 걸 시작할 때도 집안에서 큰 반대는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심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내 결심을 듣자마자 "쟤는 무슨 일을 하든 똑 떨어지게 잘 해낼 거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앞장서서 온 식구들의 우려를 잠재우셨다.
두분은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와 달리 이런저런 사회문제를 의논해도 나와 말이 잘 통했고 애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절대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친할머니 손에서 8살까지 자란 나는 당연히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은 사람이어서 아빠와 엄마보다 순위가 앞섰고, 외할머니와는 친할머니만큼 곰살맞은 관계는 아니어도 늘 나를 감싸주시는 커다란 산 같은 분이라고 여겼다. 두분 다 서울 하늘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사셨으니 그만큼 자주 만나며 지낸 덕분도 있겠지만 나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크고 공고했으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친할머니는 허리가 심하게 굽고 심장이 약해 말년엔 바깥출입이 거의 불편하시긴 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안에선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걸레질과 정리정돈을 하시던 바지런한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마지막 1, 2년을 암 때문에 괴로워하셨지만 그 전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랬기에 내 기억에 남은 두분 할머니는 늘 자애로운 미소에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십여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 용돈까지 일일이 챙기시는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속 상한건 할머니가 된지 오래인 우리 왕비마마 때문이다.
우리 조카들은 고모한테 열광하는 것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워낙 울 엄마가 손녀 손자들을 각별이 예뻐하고 안아주고 사족을 못쓰는 성품이 아니다 보니, 예민한 아이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 때문이다.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셨던 울 아버지는 언제나 온 몸을 던져 손녀손자들과 놀아주셨지만 오히려 엄마는 그렇게 손주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보기엔 당신에게 쏟아져야 할 남편의 사랑이 손녀손자들에게 나뉘어 가는 것조차 질투하시는 듯했다. 내가 조카들에게 몸바쳐 봉사할 때도 겉으로는 늙은 딸 피곤해 할까봐 염려하시지만, 사소한 일로 어린 손녀딸과 말다툼을 벌이는 걸 보면 아마도 속마음은 무수리의 온전한 보필을 당신만 받고 싶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울 엄마는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쌀쌀맞은 속담의 신봉자다. 아이들이 그리워서 거의 매일 손주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의 귀찮은 질문(숙제 다 했니? 밥 먹었니? 유치원에 잘 갔다 왔니?)을 던지고는 쌀쌀맞거나 시큰둥한 반응(그거 어제도 물어봤잖아? 할머니는 왜 만날 밥먹었느냐는 거만 물어요?)에 마음 상해 하고, 손주들이 놀러오기를 학수고대하는 한편, 떼로 몰려온 조카들이 마구 뛰어다니면 정신없다고 타박을 하시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니 눈치 빤한 조카들은 심지어 얼마 전부터 헤어질 때 할머니 볼에는 뽀뽀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_-;;
어린 조카가 장난삼아 일부러 나한테도 뽀뽀를 안해주고 까탈을 떠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라고 위로를 하긴 하지만, 어느새 머리가 굵어져 할머니한테 툴툴거려도 내심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정민공주 이외엔 나머지 조카들이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은근히 할머니를 따돌림하고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녀석들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늘 아프고 온종일 TV나 보고 자기네랑 놀아주지도 않고 귀찮고 빤한 질문이나 해대는 사람인 모양이다. 왕비마마 본인도 그게 섭섭해서 마음 아파하시지만 정작 조카들을 대할 땐 ~~ 하지 마라, 고모 괴롭히지 마라, 뛰지 마라 따위의 잔소리만 해대니 관계가 호전될 리가 없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너무 일찍 빼앗겨 버린 조카들에게 할머니의 추억만이라도 오래오래 감동으로 남겨주고 싶은데 나로선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조카들을 업어주기엔 울 엄마의 건강이 너무 나빠지셨고 할머니들과 윷놀이, 공기놀이를 함께 하던 나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홀로 하는 컴퓨터 게임에 너무 익숙하다. 조카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낯선 게임용어와 컴퓨터 용어에 왕비마마는 더욱 절망하는 판국이니 원...
우리 왕비마마와 어린 조카들의 전격적인 관계 개선을 위한 묘안은 어디 없을까?
시원찮은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가사실습 시간에 만든 음식이 약식이었다.
그 전까지는 문방구에서 반제품으로 파는 앞치마 재료를 사서 바이어스를 손으로 꿰매고 주머니와 앞부분에 자수를 놓는 실습을 했고, 조리실 실습에 들어가는 날까지 앞치마를 완성해 각자 입고 패션쇼를 하듯 줄지어 서서는 선생님의 채점을 받았다.
국민학교 실과 시간에도 이미 단추달기, 홈질, 똑딱단추 달기의 실습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탁월한 점수를 받았던 터라, 앞치마 꿰매기 정도는 중학생이 된 나에게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였다. 요새 학생들은 엄마들이 대신 꿰매주거나 수선집 또는 세탁소에 맡겨 드르륵 박아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땐 그런 걸 상상도 못할 만큼 아이들이 순진할 때라 손재주 여부에 따라 아이들이 입은 앞치마의 몰골은 매우 다양했다.
바이어스가 우글쭈글 찌그러졌거나 자수 실밥이 너덜거리는 앞치마를 입은 아이들 틈에서 매끈하고 촘촘한 바느질과 깔끔한 자수가 돋보이는 앞치마를 입은 나는 조리실에서도 조장으로서 꽤나 쓸모가 있었다.
지금이야 나도 오랜 밥순이 경력을 믿고 이것저것 재량을 부려 대충요리를 감행하지만
요리초보가 지켜야할 첫번째 원칙은 건방지게 융통성을 부리지 말고 레시피 대로 하라는 것이므로
모범생 답게 나는 칠판에 적힌 대로 재료의 계량과 조리시간, 불조절을 칼같이 지켰고 결과물은 당연히 훌륭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의 조리실습은 불려놓은 찹쌀과 온갖 재료를 잘라 들통에 넣고 찌기만 하면 되었던 비교적 간단한 요리였으나 놀랍게도 몇몇 조는 약식이 아니라 거무스름한 찹쌀죽을 만들어놓기도 했는데, 내가 보기엔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었는지 그게 더 신기했다.
당시에 조별로 예쁘게 만들어진 약식은 교무실 선생님한테까지 일일이 나눠드려 맛보게 했었는데, 그때 양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내게 할당된 약식을 남겨 집에 가져가 엄마한테 자랑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며칠 뒤 집에서도 학교에서 배운대로 들통에 쪄서 약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수십년간 집에서 다시 약식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 외할머니의 단골 떡집에서 워낙 맛있는 떡과 약식을 수시로 공수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니 3년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정말로 맛있는 약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가끔 사먹게 되는 약식엔 밤과 잣 따위의 내용물이 터무니없게 부실했고 찰진 맛도 덜했다. 그렇다고 약식을 미친듯이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왜 집에서 손수 약식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정확한 동기는 지금도 모르겠다. 조카들이 약식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던가?
어쨌거나 설날을 앞두고 일벌이기 병이 도졌는지, 대충요리의 달인답게 나는 지난주에 드디어 전기 압력밥솥으로 약식만들기에 도전을 했고 역시나 단번에 성공을 거두었다. 중학교 때 했던 가사실습을 떠올리긴 했지만, 레시피까지 생각날 리야 없는 일이고 손쉬운 인터넷 검색을 이용해 대강 분량을 예측했는데 살짝 질기는 했어도 맛은 정말로 훌륭했다. 이번에 성공을 하면 설날 차례상에 올릴 약식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나의 야심만만한 목표였는데, 그도 별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문제는 대충 대충 재료를 집어넣은 바람에 과연 설날에도 같은 맛을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지만 까짓 것 덜 달 거나 더 달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 실패한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겠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사실습 점수를 잘 받긴 했어도 그땐 내가 이렇게 요리솜씨가 훌륭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가사노동이 싫어서 (매일 밥하고 청소하기 싫어서 결혼 따위 안 할 거야! 라고 늘 부르짖었음)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내가 싱글로서도 만날 밥순이로 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청소는 여전히 내가 넘지 못할 숙제지만 요리마저 잘한다는 점은 내가 무수리 인생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운명 같아서 속이 좀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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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그래도 마냥 투덜거리기만 하는 잡문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책만드는 업계에 한 다리 걸치고 사는 인간으로서 책 관련 포스팅이 제격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힘든 회상이었다.
어쨌거나 블로그 이웃이신 노나또님과 키드님의 바통을 이어본 내 인생의 책.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책은? 언제, 어떤 책인지?
대여섯 살 무렵, 버스, 택시, 삼륜차, 케이블카, 비행기 따위의 탈것과 동물, 꽃 등이 소개된 딱딱한 그림책 시리즈다. ^^
우리 삼남매는 그 책을 <읽으며> 놀기 보다는 주로 집을 짓거나 방 한 가운데에 성을 둘러치고 그 안에서 놀았는데, 총 대여섯권쯤 되는 그 그림책은 제법 탄탄하게 생긴 빨간 가방 안에 들어 있어서 다 놀고 나면 큰누나인 내가 낑낑거리며 어렵사리 책을 그 가방 안에 넣느라 애를 먹었다.
그때만 해도 워낙 옛날이라 책이 꽤 귀했던 것 같은데, 나중엔 그것 말고도 그림책 시리즈가 또 한 질 생기는 바람에 집짓기 재료가 많아져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책 읽는 습관은 어떻게 들이게 됐는지?
취학전부터 책을 줄줄 읽었다는 신동 이웃들도 계시지만, 그 옛날의 나는 7살에 제 이름 석자 쓸 줄 아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대견스러워하는 상황이라 연년생 동생과 터울을 두기 위하여 입학식도 못하고 뒤늦게 덜컥 국민학교엘 입학했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그런 수준이긴 했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1학년땐 꽤나 늦된 아이라 칠판에 적힌 알림장 내용을 <적는>게 아니라 <그려> 오느라 다른 애들 청소할 때까지 홀로 책상에 앉아 낑낑대며 베껴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7월생의 아이를 덜컥 입학시켜놓고 담임으로부터 한글 배우기가 늦어 <이해력>이 약간 딸리는 것 같다는 평을 들은 엄마는 뒤늦게 후회를 하며, 큰 마음 먹고 월부로 동화책 전집을 사들였다.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이었다.
각권마다 사전처럼 빳빳한 책껍데기가 갖추어진 양장본에다 빤질빤질한 노란색 표지, 책등이 빨간색인 그 책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나는 수시로 동화책을 꺼내 읽었다. 처음엔 이야기가 짤막한 안데르센 동화, 이솝 이야기 등부터 읽었고 차츰 장편도 무리없이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고학년이 된 후에도, 심지어 중학생이 된 뒤에도 가끔 심심하면 뽑아 읽을 정도로 계몽사 동화전집은 내 유년 독서의 중심이었다.
동화책을 열심히 읽은 덕분인지, 늦된 아이였다가 2학년부터 비교적 우수한 학생의 범주에 속하게 된 맏딸의 선례에 고무된 울 엄마는 어려운 살림에도 간간이 월부로 전집류를 사주셨다. 재미있는 건, 나와 달리 두 남동생들이 독서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특히 큰 동생 녀석은 책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동네에 월부 책장사가 나타나면 꼭 우리집으로 데려와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남들은 대문도 잘 안열어주는 판국에 앞장서서 장사꾼을 데려오는 아들녀석이라니... 워낙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 울 엄마는 동생녀석의 너스레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월부 책을 들일 때도 있었는데, 내 기억으론 굉장히 두꺼운 백과사전 세트(아마도 4권짜리), 위인전집류도 그래서 생겨났던 것 같다.
독서에 맛을 들인 나는 일단 책을 잡으면 옆에서 누가 불러도 모를 만큼 빠져들었다. 엄마가 밥먹으라는 소리도 못 알아듣고, 만날 책만 본다고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땐 밥먹는 것보다 책의 뒷이야기가 정말이지 더 궁금했다.
살면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절은 언제인가?
우습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중학생때인 것 같다.
국민학교땐 집에 있는 서너 질의 전집류를 읽고 또 읽는 반복독서를 했던 반면, 중학생 때는 드디어 학교 도서실 책을 빌려읽기 시작했고 한권에 300원짜리 삼중당 문고판을 골라 사서 읽는 묘미를 알게 되었으며, 친척 중에 출판사에 다니시는 분들이 생겨나면서 세로판형에 글씨도 깨알같은 한국단편문학 전집, 세계문학전집이 생겨났다.
그뿐인가, 나랑 9살 차이인 막내고모가 읽던 <방황의 끝> <풀잎처럼 눞다> 같은 대중소설도 모두 섭렵했고, 일간지에 연재되던 소설들도 악착같이 찾아 읽었다. 너는 아직 어려서 보면 안된다는 고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꽤나 야하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대중소설을 훔쳐 읽고는 친구들에게 조숙한 척, 어른들의 세계를 다 아는 척 하는 게 재미 있었다.
더욱이 내가 다닌 중학교 국어선생님들이 특이했는지 월말고사 국어 과목에 교과서와 상관없는 필독도서 관련 시험이 세 문제씩 꼭 나왔는데, 책만 읽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시험에 나오는 필독서는 거의 단편소설인데도 아이들은 죽어라 안읽고 시험문제를 찍거나 차라리 컨닝을 시도하는 반면, 나는 해당 단편소설 한편만 읽는 게 아니라 굳이 책 한권을 다 읽느라 오히려 다른 공부를 못하는 형편이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월말고사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어찌나 기쁘던지. 종이는 갱지처럼 싯누렇고 세로판형에 글씨도 작았지만, 표지에 명작 그림이 자랑스레 들어가고 나름대로 책 껍데기(크기만 작았지, 형태는 반양장인 셈이다)도 있었던 삼중당 문고판은 매달 새 책이 몇권씩 나올 때마다 무얼 골라 살 것인가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해주었고, 집에 전집으로 있는 책도 굳이 문고판으로 사서 들고 다니면서 읽는게 좋았다.
김동리, 김동인, 황순원, 염상섭, 나도향을 비롯해 지금은 이름도 가물거리는 근현대작가들의 책을 나는 모두 중학생때 읽었고 순전히 그 때 읽은 <감>으로 대입 학력고사까지 버틸 수 있었을 정도다.
좋아하는 작가는?
과연 내가 아무 사심과 조건 없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싫증을 잘 내는 편이라 누굴 언급해야 하나 막막하다. 좋아했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존경하지만 종종 너무 어려워서 심술나는 작가도 있으니 원.
마가렛 애트우드는 음울하고 비장하지만 꽤 오래 좋아하는 작가였으나 한동안 멀리했다. 어느 순간 너무 힘들어져서.
제인 오스틴은 번역본으로 읽으면 어쩐지 좀 짜증스러워지는데, 어순도 낯설고 말투가 흥미로운 원서로 보면 시간여행을 하듯 그 때로 되돌아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된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
혼불과 최명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에게 우리말과 사투리, 옛말 공부 교과서 같은 존재이지만, 성역화, 권력화된 느낌이 싫어지는 중이다. 책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즐기는 대상이어야 하거늘.
노엄 촘스키, 마루야마 겐지, 수잔 손택, 강준만은 나의 무지를 일깨워 살살 이끌어주는 선생님 같은 느낌이라 좋으면서 동시에 또 너무 거대하고 종종 어려워서 심술난다.
읽다가 포기했던 책은?
<삼국지>, <존재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는 아직 최종적으로 포기는 안했다).
그밖에 단권짜리들도 읽다 말고 던져둔 책들 꽤 많다. +_+ 과거의 나는 책이 재미 없어도 악착같이 끝장을 내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인내와 열정도 사라지더라.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 뉴스를 본 날, 언젠가 사두고 다 못 읽은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고 아직 못 끝냈다.
최근에 독서를 마친 책을 의미하는 거라면 <서울은 깊다>.
내 인생의 책은? 많겠지만 다섯 권 이하로 압축해본다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국민학교 4학년때였을 거다. 활자 빽빽한 동화책과 위인전, 세계명작 전집이 책의 전부인 줄 알던 나에게 친구가 선물했는데 예쁜 그림과 단출한 글귀도 마음에 들었지만, 어린 아이가 서점에 가서 단권으로 책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좋아하는 친구에겐 나도 문방구 선물 대신 이 책이나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선물하곤 혼자 뿌듯해 했다.
<빨간머리 앤>
계몽사의 50권짜리 동화전집 가운데 딱 한권 파본이 있었으니, 바로 <빨간머리 앤>이었다. 잘못된 책을 보낸 뒤 새책을 받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빨간머리 앤>의 내용을 홀로 상상하며 읽고 싶다고 염원하기만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도서실에서 발견한 뒤에야 드디어 읽을 수 있었다. 뒤늦게 읽은 이 책이 어찌나 재미 있던지 책을 훔쳐다가 집에 있는 동화전집 빈자리에 끼워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소심해서 훔치지는 못했지만... <제인에어>와 함께 중고등학생 시절 나의 단골 반복독서용 책이었다.
<제인에어>
부모님이 사주신 세계문학전집의 <제인에어>말고도 중학생 때 나는 집에서 또 한권의 <제인에어>를 발견했었다. 그때도 이미 종이가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던 그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2권으로 1963년 9월에 발행했고 정가가 290원이라고 적혀 있다(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 먼저 읽은 제인에어는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생략된 부분이 있었던 반면, 한 페이지를 상하로 구분해 빽빽하게 세로쓰기로 인쇄된 이 책은 제인과 아델, 소피가 사용하는 프랑스어도 모두 원어로 실리고 주석이 꼼꼼하게 달린 그야말로 <완역본>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너무도 달랐다.
어린 마음에 확실한 이유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막연한 분노와 불편함을 느끼며 못마땅한 구석이 참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속상할 때나 화날 때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정되는 효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도, 어른이 된 뒤에도 가끔씩 읽으며 막연한 불편함의 정체를 찾아보려 애를 썼던 것 같은데, 결국엔 20여년 뒤 석사논문을 제인에어로 쓰게 되더라.
<혼불>
고등학교때 막연하게 대학엘 가면 국문학을 전공해야지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국어선생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때 내가 따르던 국어선생님이 은사님이 쓴 책이라며 <혼불> 1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대보름날 달맞이 하는 장면의 묘사부터 무척이나 매혹적이었고, 종종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순우리말 낱말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나도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쓰는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으며 더불어 국어공부에도 자극제가 되었다.
<태백산맥>
당시 대학생에게 강요되는 사회과학 서적들에 대해 나는 묘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알아야 하는 진실이기는 하지만, 이북 출신에다 빨갱이라면 서슬이 퍼래지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향 때문인지 '용공불순서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금서들이 불편해서 외면했다고나 할까. (80년대 중반 웬만한 사회과학서적은 전부 금서였다^^) 그런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렇게 긴 대하소설인줄도 모르고 한권한권 눈빠지게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헐레벌떡 밤새 읽곤 했는데,태백산맥을 몇권 읽고 나자 그제야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부하듯 관련 역사책을 찾아읽으며 뒤늦게 정치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으니, 나에겐 다른 독서를 이끄는 좋은 책이었다.
좋아하는 구절을 한 구절만 소개해 달라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기록을 하는 습관도 없고 기억력도 나쁜 허당이라 슬프다.
그나마 오래 전 미니홈피 대문에 남겼던 글귀가 있어서 옮겨 적는다.
"네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오늘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 마루야마 겐지 <천년동안에>
이메일과 메신저가 사용되면서 손으로 써보내는 카드니 연하장이 대거 사라져버렸고
더욱이 지인들 사이에선 문자메시지 한통으로 새해인사를 하거나 그것도 생략하는 것이 대세지만
그래도 나는 거의 해마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와 연하장을 장만해둔다.
아마도 문방구 쇼핑중독과도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은데, 매년 사들인 카드보다 보내는 카드의 수가 적어져
책상서랍엔 점점 많은 카드들이 쌓이고 있음에도 올해 역시 11월초부터 카드를 주문했다.
최근 애용하는 카드는 꿩먹고 알먹는 기분으로 사는 유니세프 카드.
올해엔 디자인이 더욱 다양하고 예쁘게 나와서 배달온 카드들을 보며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그러고는 12월초가 되면 우선 외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카드를 보내고 나머지는 중순쯤 써서 날려야지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엔?
당연히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ㅠ.ㅠ
장단기 기억력상실증환자인 내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만 주말에 정민공주의 생일파티에서 조카들에게
크리스마스를 받고나서야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어야 하는 시기가 이미 지나버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엔 굳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필요도 없고 연초까지 연하장을 받아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연하장은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연말까지 받아야 가장 의미가 깊지 않은가!
국내에 있는 지인들에겐 오늘쯤 우체국에 가서 빠른우편으로 보내면 크리스마스 전에 도착시킬 수 있었겠지만 애당초 카드보낼 생각을 했던 멀리 있는 지인들에겐 완전히 기회를 잃고 말았다는 낭패감에다
손글씨로 뭔가를 단체로 끄적여 써보기엔 준비된 게 없어서 그냥 망연히 또 하루를 보냈다.
24장이나 산 데다 예년에 쓰고 남은 카드 십여장까지 합해서... 고스란히 해를 묵힐 확률이 크다.
그러고는 또 내년에 까맣게 잊고 또 새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문하겠지.
나이 든다는 건 점점 망각의 늪으로 빠져든다는 뜻일까.
아니면 유독 나만의 병이 깊은 것인가.
왜 이러고 사는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