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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7.11 엄마가 달라졌어요 18
  5. 2010.01.09 섬망증
  6. 2008.10.22 또 우울증 얘기 8
  7. 2008.10.17 우울증 12

기억력

아픈 손가락 2018. 5. 29. 16:44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이젠 그런 말을 하기 민망하다. 책이나 영화 제목, 배우 이름, 여행갔던 장소... 머리속에 이미지로는 맴도는데 콕 찝어서 원하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놓기 힘든 순간들이 점점 많아진다. 걸핏하면 그거 뭐지...라며 말 꺼내는 친구들 놀리던 게 불과 1, 2년 전이었건만... 그 영화 뭐지? 로드무비, 여자 친구 둘이 마지막에 벼랑으로 차 몰고 떨어지는 거... 아, 그거.. 그게 뭐더라. 키 큰 여자 둘이... <델마와 루이스>? 맞다! 근데 그 배우 이름이 뭐였지? 수잔 서랜든이랑.... ㅠ.ㅠ... 

결국 이날 친구들과 나는 포털사이트 검색 찬스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나 데이비스가 도저히 생각이 안나는 거라! 에효...  

오십대 초반인 내가 이럴진대 칠십대 후반인 왕비마마의 기억력이야 점점 나빠지는 게 당연하다. 뭐든 깜빡깜빡 하는 건 중노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려니 해야할 것 같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싫어한다고 부르짖으면서도 엄마도 나도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와 하루 일과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암튼... 기억력이 부쩍 떨어진 건 그러려니 하겠으나, 원래도 조울증 환자라 늘 조마조마한 울 엄마의 경우 지난 봄 환절기를 지나며 퍽 염려스러운 상황이 많았다. LA 친구가 우리집에서 한달 기거하며 무수리 딸이 노상 밖으로 놀러다니느라 약간의 방치를 했던 상황이 노친네에게 녹록치 않아 스트레스가 많겠거니, 나름 감안하더라도 일단 화가 너무 많아지셨다. 

친구와 나는 그래도 나름 하루 건너 한번씩은 종일 집에서 뒹굴며 보필한다고 했는데, 딸 친구가 있건 없건 아랑곳하지 않고 버럭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순간이 많았다. 워낙 남의 시선과 이목을 신경쓰는 타인지향적 태도를 일관해오신 분으로선 의아할 정도였다. 모녀간에 서로 혹독한 언사를 던지는 건 일상 다반사지만 ㅠ.ㅠ 아무리 한달째 기거하는 동거인이라고 해도 딸 친구에게 막 대하실 분은 아닌데... 

본인도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데다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 것 같다는데 동의했고, 결국 인지능력검사를 의뢰했다. 울 엄마를 포함한 모든 노인들의 제1공포가 치매에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나도 모르게 잃어가다 결국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질병이 다 있다니, 어휴 참 끔찍한 일이다. 원래도 엄마는 6개월에 한번씩 보건소 부설 치매지원센터에서 인지검사를 스스로 해보시는 분이다. 그래서 100에서 7을 연속으로 빼는 연산이라든지, 오각형 두개를 겹쳐놓은 그림을 따라 그려보는 테스트 같은 건 아예 암기할 정도다. 아마 나 보다 더 빨리 대답하고 그릴 걸!

친구의 말로는 정밀 인지능력검사는 본인과 보호자 둘 다 문진을 한다고 해서 (그날 먹은 아침 메뉴라던지, 인척들 가족관계, 인생의 큰 사건 같은 게 정말로 맞는지 따로 물어 서로 대조해본다고 한다) 나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뭔가 단계가 다른 테스트였던 듯 세브란스 병원에선 환자만 1대1로 상담을 했다. 울 엄마의 말로는 보건소에서 하는 무료 인지능력검사와 크게 차이도 없었다는 것 같다. 괜히 비싼 검사비만 버렸다고 하심. 진짜 그런지는 나로선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래도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설문이 설마... +_+ 솔직히 나는 뇌사진도 찍어보자고 그럴 줄 알았는데, 문진으로 끝나는 게 좀 의아했다. 물론 울 엄마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으시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암튼 일주일간 두근두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치의 상담을 기다렸다. 검사 당일 불안초조해서 그런지 워낙 잠을 설치고 가셨기 때문에, 결과가 좀 나쁘더라도 그러려니 하시라고 컨디션에 따라서 기억력은 크게 좌우된다고 엄마에게 미리 당부한건 곧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드디어 정기검진 날, 검사 결과가 어떻느냐는 우리 질문에 의사는 '좀 애매하다'고 웃으며 답했다. 보통 동년배 평균 기억력보다 30% 이상 떨어지면 초기 치매 판정을 하는데, 울 엄만 15% 쯤 떨어지셨단다. 100명 중에 50등 하면 되는 건데;; 끝에서 20등 정도 한다고 보면 된다는 설명. ^^; 그래도 기억력이 떨어진 건 맞으니 너무 충격은 받지 말고 '뇌 영양제'라고 생각하며 일단 기억력에 도움이 되는 약을 먹어보라고 했다. 치료도 가능하고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니 염려 마시라고. 학창시절에도 그다지 우등생이 아니었던 덕분인지, 엄마도 쿨하게 꼴지 아니면 됐지 뭐, 그나마 다행이네, 하는 반응이었다. 

처방 받은 '뇌 영양제'를 일주일간 먹어본 엄마는 확실히 기억력이 나아진 것 같다고 평했다. 흐린 날이면 아침인지 오후인지 분간도 잘 못하고, 너 어디 나간다고 했지? 똑같은 질문을 5분 안에 3번씩 하던 증세도 없어진 것 같았다. 환절기를 벗어나면서 전반적인 심신의 컨디션도 좋아졌으니 약의 도움만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닐 수도 있었다. 나 역시 불면에 시달리고 나면 시력이 떨어져 눈도 잘 안보이고 머리가 멍해져 귀도 잘 안들린다. 평소에도 안경을 빼고 있을 땐 전화 통화할 때 상대 목소리가 잘 안들리는 걸 뭐. ㅠ.ㅠ 

문제는 그 '뇌영양제'만 먹으면 엄마가 악몽을 꾼다는 것이었다. 아침 식후와 자기전에 한 알씩 드시는데; 그 약을 먹고 나선 눈만 감으면 무서운 것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심지어 하루는 꿈속에서 괴물(=이불)과 싸우다 침대에서 떨어지셨다. 젠장!

그간 엄마도 나도 바닥애호가라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침대에 누우면 허공에 붕 뜬 느낌? 호텔처럼 집보다 천장이 높은 곳이라면 몰라도.. 특히 한여름엔 서늘한 바닥에 보송하고 푹신한 요를 깔고 자야 숙면을 취할 수 있는데! 암튼 그러나 엄마는 팔다리 근력이 떨어지면서 바닥에 앉거나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어려워졌다. 더욱이 자다말고 선잠이 깬 상태에서 화장실에 가려면 젊은 사람들도 휘청거리기 일쑤인데;; 노년의 엄마야 오죽하랴. 컨디션 안 좋을 때 자다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다 몇번 바닥에 나동그라져 멀리서 내 이름을 외쳐 불렀다는데, 밤샘 작업 중이라면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겠지만 나도 쿨쿨 자고 있을 때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있나. 

해서 결국 엄마 방에 침대를 놓아드리고는 혹시나 떨어질까, 평소 쓰시던 라텍스 매트리스를 옆에 깔아놓았었다. 노인일수록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가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다리만 내려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쉬운 침대 생활이 필수라지만... 노인의 낙상 문제는 어휴.. 정말 흔하게 발생한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1달간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지켜본 결과... 엄마는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워낙에도 잠버릇이 험하고 몸부림을 치며 돌아다니고 주무시는 편인데 침대에서 자면 구석본능이 생겨나 벽에 기대 잔다던데 정말인가? 신기해하며 드디어 두툼한 매트리스를 내방으로 치웠다. 

그러나... ㅠ.ㅠ 매트리스를 치운지 1주일도 되지 않아 엄마는 아침 나절에 침대에서 TV를 보며 노닥거리다 깜박 잠이 들어 결국 낙상을 하셨고 (내가 그렇게 누워서 TV보지 말라고 일렀거늘!!! 으으으) 2번 갈비뼈가 골절됐다. 갈비뼈는 부러져도 깁스를 하지 않는다. 그냥 생활을 조심하며 뼈가 붙기를 2달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침대 낙상사고가 4월 말의 일이었는데... 가뜩이나 충격을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그놈의 '뇌 영양제' 후유증(아마도)으로 꿈결에 괴물과 싸우느라 엄마가 보름 만에 침대에서 또 떨어진 거다! 어휴....

당연히 내 임의로 뇌 영양제는 그만 드시라고 했다. 대신에 온종일 누워 있지 마시고 제발 운동 좀 하시라고! 노인들은 근육에 힘이 워낙 금방 빠져서, 며칠만 누워 있어도 다리가 홀쭉해진다. 그러니 걷는 게 더 힘들어질밖에... 그래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야하는 집에서 밖으로 나서는 걸 엄마가 더 힘들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서 재건축을 하든 이사를 가든 엄마가 더 연로해지기 전에 환경을 바꾸고 싶은 마음인데, 현실이 안 따라주니 괴로울 따름이다. 

우습게도 (웃픈건가?)... 동전의 양면처럼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에도 장점은 있다. 매일매일 보는 일일 드라마를 비롯해 몇몇 예능 프로그램도 처음 보듯 새로워 재미가 있으시단다. 분명 어제, 혹은 며칠 전에 본 드라마/예능프로그램인데 오늘 또 재방송을 보고 계신 게 답답해서 (물론 나도 단지 재미가 있단 이유로, 놓친 장면 보려고 재시청하는 경우가 있으면서!) 물어보면, 아냐, 이건 안 본 거야, 그러신다. 하긴 드라마를 보면서 휴대폰도 들여다보고 나한테 이것저것 참견도 하고 딴 생각도 하노라면 당연히 놓친 장면이 많겠지. ㅠ.ㅠ

해서 벌써 한달이 지나 드디어 내일 다시 정신의학과 정기검진일이다. 뇌 영양제를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하면 되려나? 그건 또 다시 후유증이 없을까, 아무래도 뇌 호르몬에 관여하는 약물일테니 조심스럽고 걱정이 많다. 평소 드시던 약끼리도 돌연 충돌을 일으켜 이상 증세를 경험한 적도 있는 분이라 더더욱.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그냥 서서히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여야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노화는 질병이고 장애 같다. 나부터도 기억력이 무너진 건 물론이고 아침마다 일어나면 손마디가 뻣뻣한 걸 어쩌라고. ㅠ.ㅠ 벌써 이런데 무려 100세시대라고? 그건 너무도 무시무시한 저주가 아닐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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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미국에서 살인죄로(그것도 노수녀님을 죽였다고;;) 복역하던 가톨릭 신부의 죽음과 그 장례를 놓고 논란이 인다는 해외뉴스를 보았다. 아니 성직자가 어떻게?!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현대에서 종교란 단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고, 성직자 역시 그냥 하나의 직업이란 생각에 점점 동조하게 된다.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있듯,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의 동기와 이유와 성향도 다양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어려운 곳, 낮은 곳에서 소신껏 봉사하는 성직자들도 물론 많겠지만, 그건 그냥 개인의 성향일 뿐 성직자가 아니면서도 그러는 착한 사람들도 많은 걸 뭐.


어마어마한 재산 규모와 예산을 집행하는 개신교 대형교회들도 그렇고, 괜히 길 막아놓고는 문화재 보호명목으로 절에 안가는 사람들한테까지 입장료 받아 챙기는 불교계 사찰들도 그렇고 그들에겐 종교가 그러니까 그냥 세금포탈에 엄청 이로운 수익사업에 지나지 않는 거다. 전국 어느 절엘 가보아도 '기와불사'라면서 돈 내고 기와에 이름 적어 소원성취하라고 적혀있는 안내문이 빠지질 않아 눈쌀이 찌푸려진다. 개신교의 십일조 논리도 그렇고, 가톨릭의 성금이나, 불교계의 불전함이나 왜 신을 섬기는 일에는 꼭 돈이 빠지지 않을까. -_-; 


줄곧 심신이 건강했던 엄마는 얼마전부터 약간 흥분과 불안증세를 보였다. 짐작되는 이유도 여럿이었다. 


첫째, 작년 여름에도 그러더니만, 담당자가 공무원 성과주의에 빠진 건지,  암튼 엄마가 다니는 보건소 부설 실버합창단이 무슨 대회엘 나간다고 했다. 작년엔 서울 지역만 참가하는 합창대회엘 나갔고, 거기서 당당히 대상을 받았다. 올해는 전국대회라서 예선도 거쳐야한다는데, 엄마는 작년 대회준비를 앞두고도 스트레스로 많이 힘들어했다. 자기만 틀려서 민폐 끼치면 어쩌나, 입장순서와 동작 순서를 헤매면 어쩌나 뭐 그런 이유였다. 부모들 기쁘게 하자고 유치원 선생들이 재롱잔치 준비로 애들 잡는 거랑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작년에도 욕심 많은 지휘자 선생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었다. 헌데 올해는 전국대회라니, 노친네의 스트레스는 더욱 높아진 것 같았다. 하루종일 집에서 CD를 틀어대고 가사를 외우고... 가사 안외워져 큰일이라고 걱정하고.. 으억~!!! 하마터면 구청 사이트에 민원 넣을 뻔했다. 노친네들 성취감 고취도 좋지만,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도 많으니 괜한 고생 시키지 말고 큰일 벌이지 말라고...  일단은 참고 있다. 


둘째, 12살 조카를 3주 넘게 돌보는 건 나름 평화로운 모녀의 일상에 파격이었고 당연히 노친네에게도 스트레스였다. 지네 집에선 TV도 안켜는 애가 우리집만 오면 할머니방 TV를 점거하다시피하는데 그래도 괜찮은지, 맞벌이로 돈 번다고 애 교육 망치는 건 아닌지, 장사는 잘 되는지도 염려했고, 운전수에 보모 노릇하느라 늙은 딸 고생하는 건 또 안쓰러워보였던 모양이다.   


셋째, 엄마가 다니는 절의 신도회장을 지냈던 어떤 아줌마가 지지난주에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간 듣자하니 그 '보살님'은 좀 말도 함부로 하고 오지랖이 넓은 수준을 떠나 좀 주책스러워 밉상인 짓을 많이 하는 유형이었다. 고인을 두고 꼬치꼬치 따지기 좀 뭣하지만 이런 식이다. 울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루비반지(결혼 25주년때 아버지가 해주신 것)를 보더니 알이 좀 작지만(!) 예쁘네.. 라면서 대뜸 빼보라고 하더란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루비를 유리에 대고 문지른 뒤, 유리에 안붙는 걸 보니 이거 가짜네! 그랬단다. +_+ 그 일로 엄마는 그 아줌마를 속으로 미워하고 (나라도 엄청 미워했을 거다!) 상종하지 말아야지 마음 먹었다는데, 그분이 덜컥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 거다. 아니 그 아줌마 암 걸려 돌아간 게 왜 자기 탓인가! (물론 노인들에게 주변 사람들의 부고가 알게 모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모르는 바 아니다.)


어쨌든 1, 2, 3번의 스트레스 원인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차츰 해결이 돼 나갔다. 1번은 내가 민원 넣어서 합창대회 무산 시키면 오히려 울 엄마가 더 괴로워할 것 같아서 열심히 가사 외우기를 거들며, 노친네들은 합창 틀리는 게 묘미라고 세뇌했다. 그래야 관객들이 재미있어서 웃는다고.. -_-; 2번은 올케가 직원을 뽑으면서, 조카가 우리집에 오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됐고, 3번은 일단 그런 찜찜한 마음을 내게라도 털어놓았으니 치유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ㅋ 우울증환자 보필 30년이면 이 정도 심리파악 풍월은 가능해짐을 양해바람)


저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은 2, 3주 지나면 풀리기 마련인데도, 이상하게 노친네의 불안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무언가 신경쓰이는 일이 더 있다는 의미였다. 길가다 이상하게 웃는 여자얘기부터, 누가 재활용품 이상하게 버려놨더라는 얘기까지 시시콜콜 별의별 것을 다 내게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양반이, 대체 그게 뭔데 나한테 숨길까. 


안되겠다 싶어서 이틀전 달래는 척 집요하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뭔가 나한테 말 안하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분명 있다. 그게 뭔지 어서 털어놔라... 그런 거 없다고 발뺌을 하던 엄마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나중에 편지로 쓰겠다;;고 말했다. 엥? 딱 감이 왔다. 왜, 누구한테 돈 빌려줬다가 떼이셨나? 아님 절에다가 돈 갔다주셨나?  답은 후자였다.


사찰마다 교묘한 수익사업이 참 다양하겠지만, 이노무 절의 수익사업 가운데 하나는 '천불' 모시기였다. 나는 가보지도 않아서 모르겠는데 암튼 불화 전시회도 열었다는 유명한 화가(?)가 부처를 손바닥만하게 천 명이나 그린 벽화를 조성(아마도 화가의 그 노역까지 '보시'라는 이름으로 공짜로 재능기부 받았을 거다)하고 그 부처 그림 하나하나를 개개인의 이름으로 분양(?)해 돈을 버는 식이다(그림 아래 이름표라도 달아주려나? -_-;;) 우리 동네 있던 절이 새 절을 지어 서오릉 근처로 이사가면서, 그런 이야기가 있을 때 울 엄니도 당연히 하나쯤 도맡을 줄 알았고, 그러려니 했다. 결국 큰동생 이름으로 알량한 부처그림에 백만원을 쾌척하셨다. (백만원X1000 명이면 10억. 뭐 재산이 몇백억씩 된다는 대형교회완 쨉도 안되는 수준이겠으나, 나는 얘기 듣고 기가찼다.) 


그게 한 1, 2년 전이던가?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 그런데 알고보니 그 이후에도 (불교신자도 아닌 딸 잘 되라고;;) 내 이름으로도 부처그림에 또 한번 돈을 냈었대고, 최근엔 노친네 본인 이름으로도 또 하나 부처그림값(?)을 내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원래도 부자 신도들은 한집에서 막 10개씩 척척 맡아서 돈내고 그런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수익사업이 원할하게 마무리가 안되니 마지막 바겐세일이라도 하듯--물론 깎아주는 건 아니지만--남은 그림을 분양했던 모양)  그것도 5개월 할부로. ^^*


어차피 엄마 재산(이라고 하니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그냥 연금 통장 정도 ㅋㅋ)은 본인이 관리하시고,  종교생활에 드는 소소한 비용이며 본인 용돈 쓰시는 것 역시 내가 전혀 상관하지도 않는다. 아버지가 남기신 배우자 연금이 엄마 쓰시기엔 넉넉해서 어찌나 감사한지. 그저 감지덕지할 뿐. 그런데 공교롭게 얼마 전 내가 목돈으로 들어온 원고료 일부를 선심쓰듯 간만에 용돈으로 드리며 토를 달았다. 엄마가 놀러다니고 옷사입고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주는 거야, 홀라당 절에 갔다주지는 마셔. 그러면 다시는 용돈 안 줄 거임~


아무래도 복을 받아 편안하게 이 세상 하직하려면 정성스러운 금강경 필사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도 천불 모시기에 동참해야할 것 같아서, 돈 내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온 바로 그 시점에 하필 내가 저런 말을 하며 돈 봉투를 안겼으니... ㅋㅋㅋ 노친네는 차마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 했던 거다. 딸 속이고 하지 말라는 짓 하자니 제발이 저리셨겠지...


사연을 다 듣고 나니 헛웃음이 나면서도 버럭버럭 화가 났다. 돈독 오른 땡중들에게! 순진한 '보살님'들 꼬드겨서 이런저런 수익사업 챙기는 불교계의 작태에! 설교든 설법이든 성직자라는 양반들이 노친네들 앉혀놓고 복을 짓고 선행을 베풀어야 천당이며 극락 간다고, 그리고 그 선행을 돈과 연결시키는 빤한 술수에! 종교단체에 전재산 홀라당 갖다 바치고 길바닥에 나앉는 노친네들 얘기가 그리 먼 사연이 아닐 수도 있다니! 눈뜰 욕심에 분수도 모르고 공양미 삼백석에 딸 팔아먹은 심봉사 같은 인간을 내가 얼마나 혐오하는데! 


으으으... 째뜬 약속은 약속이고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은 하셔야겠기에 내가 결론을 내렸다. 할부는 무슨 할부, 5달이나 신경쓰는 거 절대 반대이니 내일 당장 송금해주고 끝냅시다.... 송금할 계좌번호나 내놓으시오...


심신이 불안해지면 울 엄만 벌써 얼굴표정부터 달라진다. 행동도 안절부절하지만, 특히 나만 알 수 있는 미묘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눈두덩 부분의 주름 방향이 달라져 위로 약간 치솟는 것. ^^;  내가 호랑이눈 됐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3주 가까이 이상하게 절반쯤 호랑이눈이 되었던 노친네 눈주변 주름이 저 대화 이후 하루만에 평온하게 내려앉았다.... 으휴. 


엄마가 속얘기를 차마 못하고 몇주간 끙끙대다 털어놓은 뒤 맘 편해졌듯이, 나도 여기다 시시콜콜 죄다 하소연을 하고나면 나도 반나절쯤 계속해서 투덜투덜, 종교는 둘째치고 탐욕스런 종교인들이 문제야, 순진한 신자들이 문제야, 으억 내돈은 아니라도 3백만원 아까워! 라며 씨근덕대던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지만...  하여간 이번에 또 한번 깨달은 건 내 맘대로 함부로 일반화한 '일부' 종교인들의 탐욕스런 수익사업과 나의 편협함?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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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전 만난 후배가 고부갈등의 가능성을 피해갈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 머리가 시원찮아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진 않는데, 암튼 남아있는 기억으론 시어머니를 자기 남편 예뻐해주는 친절한 옆집 할머니라고 생각하면 그저 매사에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라는 거였다. 크핫, 하고 웃으며 대단한 묘안이라 칭찬해주고보니, 내게도 아주 유용한 발상의 전환이란 생각이 들었다. 맞다, 우리가 또 피붙이들에겐 뾰족한 말 턱턱 내지르고 짜증과 성질 막 부리면서도, 남들에겐, 특히나 이웃 노친네들에겐 좀 친절하고 관대하게 구는가 말이다.

 

물론 가끔 만나서 잔소리 듣는 시어머니와 24시간 붙어 살아야하는 노년의 엄마를 동급으로 취급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그런 태도를 취하는 한은 나 또한 버럭 화도 덜 내고 막말도 덜하고 짜증도 덜 부리지 않을까나. 수년동안 말짱했던 대비마마의 심신이 다시 불안해지면서, 난 왜 그리도 안쓰러운 마음보다 짜증이 더 치미는지 원.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 병이 그러는거라는 걸 머리론 아는데 입에선 이미 뾰족한 말이 튀어나가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노처녀 히스테리(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아니면 갱년기 예비증상이 아닐까 하고 주변에서 염려를 할 지경이다.

 

째뜬 한번 시도해보자 싶으면서도 무딘 머리로는 생각전환이 잘 안돼서 계속 명절증후군과 후유증을 호되게 앓는 며느리에 빙의된 딸노릇을 며칠 내내 하다가는 어젯밤 드디어 '상냥한 이웃집 아줌마 코스프레'를 결심했다. 노파심에 잔소리는 좀 심해도 친절하고 마음 약한 이 이웃 할머니는  청력까지 나쁘시니,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서 버럭 화를 내기보다는 측은지심을 더 발휘해야 할 때라고 굳게 결심한 거다.

 

그 결과 비오는 아침 출근시간과 맞물려 엄청 막히는 길을 뚫고 병원 모시고 가면서 오면서는 물론이고(고백하자면 주변 얌체 운전자들과 멍청한 주차장 직원들한테는 미친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저녁이 다 된 지금까지 아직 인상쓸 일은 없었다. 끈기없는 내가 얼마나 더 이 코스프레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상냥한 이웃집 아줌마 빙의 상태에서 빠져나와 못된 딸년의 본색이 드러나면 얼른 심호흡을 한 뒤 세팅을 다시 하면 되겠지...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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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좋은 칭찬도 계속 되풀이하면 짜증나게 마련인 것을 나는 병든 엄마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만 수년째 해대는 무서운 딸이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소용없는 엄마의 망각과 무심함을 간간이 대놓고 지긋지긋해하면서. 내가 하는 잔소리는 대략 이런 거다.

매일 매일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해야 한다.
과식은 금물, 식사는 천천히, 많이 씹어야 한다.
식후 곧장 드러눕는 건 역류성식도염으로 가는 지름길.
노상 못한다 못한다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시도해봐라.
쓸모없는 인간이라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되지 않느냐. (집안일 좀 도와달라는 뜻;;)
멍하니 TV 많이 보면 바보 되니까 책 좀 읽으셔라.
제발 TV 볼륨 좀 작게 틀어라...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엄마가 내게 하는, 밤에 일하지 말고 일찍일찍 자라, 살 좀 찌게 많이 먹어라, 병원 가라, 따위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듯 엄마도 내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무시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내게 화를 내는 법은 없는데, 나는 엄마가 내 말 안듣는다고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실망스러워 아예 입을 꼭 다물고 대화를 거부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엄마가 칠순을 넘긴 노인이며 각종 성인병 더하기 우울증까지 갖춘 환자이므로 내가 더 많이 이해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은 혼자 반성하는 밤에만 찾아올 뿐,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면 짜증이 치밀었다. 지쳤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딸이 책으로 밥을 빌어먹는 사람이든 아니든 울엄마는 원래부터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시절엔 드문드문 아버지가 들고오는 책을 함께 읽었고, 여성중앙 같은 월간지를 정기구독하기는 했어도, 라디오와 TV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만큼 열심히 독서하는 모습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번역하는 책마다 증정본이 수북이 날아들면 자기도 읽어보겠다면서 괜히 한권씩 가져다가 화장대에 쌓아놓기는 열심히 하셨지만 읽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나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가 흥미를 갖고 읽으실만 한 책도 별로 없었고. -_-;;

구구단 외기보다, 화투치기보다 독서가 치매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책읽기가 복합적인 사고와 감각 활용을 요하는 고도의 두뇌활동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신 시끄러운 우울증 환자가 가만히 집중해 책을 들여다보는 게 쉬울 리 없다. 나 또한 예민함이 극에 달하면 활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데, 왜 그걸 모르겠나. 그러니 더더욱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식사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TV와 함께 하는 엄마를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노친네들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TV라지 않은가.

같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문화센터를 다니며 뭔가를 배우고, 김치를 담가 자식들에게 퍼돌리고 한다는 엄마의 동창들 얘기에 그저 부러움만 품을 뿐이었다. 물론 손자손녀 육아에 허리가 휠 지경인 엄마의 친구분들은 왕비마마처럼 손가락 까딱 안하시는 울 엄마를 일견 부러워한다고 했다. ("얘, 너는 복 많은 줄 알아!") 하기야 나로선 엄마가 한달에 한번 동창모임에 홀로 외출을 하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일년에 못 나가시는 달이 절반 가까이니 원.

그러던 엄마가 최근 좀 달라지셨다. 지난 3월에 입원했을 때만 해도 100에서 7빼는 셈을 나보다도 더 잘하더니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지면서 7빼기 셈은커녕 구구단도 엉뚱하게 대답할 정도라, 나의 애를 태운 게 불과 한달 전이다. 단축번호로 잘 걸던 휴대폰 사용도 낯설어 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일단 TV를 꺼버렸다.(엄마 스스로도 '정신통일'이 되지 않는다며 드라마 따라가기도 어려워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불경 베껴쓰기를 '숙제'로 내주었다. 가뜩이나 악필인 엄마 글씨는 도저히 알아보지 못할 수준으로 흔들렸다. 손이 아프다며 오래 쓰지도 못했다. 차선책으로 나는 다시 책을 내밀었다. 질병이든 노화든 극복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어찌보면 아주 빤한 이야기를 담은 심리실용서였다. 내가 작년부터 입이 아프게 했던 잔소리도 거의 다 그 책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써먹은 거였다. 노인용으로 활자가 크게 찍힌 책도 아니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엄마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조금씩 달라졌다. @.@

백문이 불여일독!? 어려운 용어도 많고 활자도 작아서 진도는 지지부진 형편없고, 자꾸 내용을 까먹어 읽은 데 또 읽고 또 읽고 한다지만, 엄마는 자기 이야기를 쓴 것 같다며 하루에 몇 시간씩 꼬박꼬박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더니 그 내용을 급기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달력에 표기해가며 하던 화분에 물주기를 엄마가 하고 있다. (책에도 요양원 노인들에게 화분 가꾸기 책임을 맡게 하였더니 자존감과 삶에 대한 주도의식이 높아져 수명도 길어졌다는 사례가 나온다;;)
허리가 아파서 통 못하겠다던 설거지도 거의 하루에 한번은 엄마가 해주신다. (야호!)
약의 종류가 하도 복잡해서 어떻게 분류하는지 모르겠다던 아침약, 저녁약 통에 담기도 지난주부터는 엄마가 '혼자' 한다. (그간 약의 종류가 꽤 줄긴 했어도 여섯 칸으로 나뉜 플라스틱 통에 아침과 저녁 약을 종류별로 나눠 담는 건 정말 나도 귀찮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담아놓고 먹어야 매일 약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몇년째 세탁기 돌리는 법도 까먹어서 못하겠다고, 그러니 죽어야 한다고 울상이시더니만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 게 벌써 몇번째다. (비록 헹굼 추가 버튼은 내가 눌러야하지만 이게 어딘가!)
내가 절반도 먹기 전에 밥그릇을 비우던 엄마가 요샌 나보다 더 느리게 드시는 때가 많다. (결과적으로 체중도 꽤 줄었다!)

지금도 집안이 고요하다. 엄마가 책을 읽고 있다는 뜻이다. (고맙게도 아래층 똥개마저 오늘은 조용한 편이다) 집안의 소음 여부가 빈부의 환경 차이에도 기준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물론 부자가 아니지만, 고요함이 주는 평화에 마음이 다 푸근해져서 부자가 된 것 같다.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 엄마의 변화다. 당연히 냉랭하던 모녀관계도 엄청 호전되었다. 나는 남편이 아니니까 애기처럼 기대지 말라고, 온몸으로 밀어내는 제스처를 취하던 딸이 원하는 건 결국 늙은 엄마의 엄마노릇이었던 거다. 뜻밖에 책 한권으로 촉발된 모처럼만의 변화에 고무된 나는 엄마가 흥미를 가질만한 책이 또 뭐가 있을까 벌써부터 고민중이다. 노인용으로 활자 크게 나온 책이 뭐가 있는지 서점엘 나가볼까. 못된 딸년은 기회는 이 때다 싶어 계속 엄마를 부려먹을 생각만 키우고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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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망증

아픈 손가락 2010. 1. 9. 02:43
윙윙거리는 정적 속에 가끔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소리만 툭탁거리는 새벽, 안방에서 자고 있던 엄마가 난데없이 작업실 방문을 열고 말했다. 자다가 생각하니 암만해도 이상해서 일어났다. 니네 아빠 참 이상하다. 어딜 가서 며칠 째 집에 안 들어오는 거니? 밤마다 신경안정제 기운으로 간신히 잠드는 엄마는 가끔 벌떡 일어나 엉뚱한 잠꼬대를 현실처럼 하는 바람에 사람을 놀래키지만, 그날은 나도 당황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멍하니 바라보다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 엄마. 아빠 어디 갔는지 기억 안나?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엄마는 그제야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맞다, 니네 아빠 돌아갔구나. 그걸 어떻게 까먹었을까. 엄마 어쩌면 좋으니...  잠깐동안 더럭 겁이 났던 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엄마를 데리고 안방에 가 이불을 덮어드리고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벽녘 잠결에 벌어진 그 같은 해프닝을 다음날에 엄마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 사람과 쌓은 50년의 추억과 습관이 단 2년만에 지워질 리 없다고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보지만, 우울증이 심해져 가끔 섬망증까지 보이면 더럭 겁이 난다. 이건 분명 약 탓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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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사적인 배설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여기고는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서 좀 더 우울증 이야기를 해두기로 했다.
최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인은 파리 체류중에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놀랐었는데, 돌아오기 이틀 전 갓 서른 밖에 안된 사촌올케의 부음을 듣고 도착하자마자 빈소를 찾아야 했다며 자살이 실로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안타까워 했다.
물론 자살로 세상을 마감한 그 젊은 엄마가 우울증을 앓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가슴이 아파서 물을 수도 없으며 앞으로도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지만, 아이와 남편을 두고 먼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젊은 여인이 겪은 괴로움의 무게가 퍽이나 무거웠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자살의 약 45%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으며,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은 쉽게 지나쳐선 안될 수치다. 우울증은 성인에게 가장 흔한 정신적 장애이며, 성인 6명 중 한명은 일생동안 우울증을 한번 이상 앓는다고 하니 사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가 우울증을 피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가 다니시는 병원에서 집어온 우울증 안내문에 따르면, 우울증의 위험인자들 가운데 첫번째가 <여성>이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2배나 된단다. 여성호르몬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들은 것 같지만, 역시나 전문가가 아닌 내 어설픈 짐작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삶이 훨씬 더 지난하고 척박하다는 뜻이라고 -_-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우울증의 위험인자들
1) 여성
2) 20-40대 또는 노인
3) 우울증의 가족력
4) 별거, 이혼, 가족과의 사별
5) 최근 6개월 이내에 출산한 경우
6) 신체질환 
                 (출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 교실 - 정신건강을 위한 안내 시리즈 [우울증])

단순히 기분이 울적한 정도와 달리, 병적인 우울증으로 진단되려면 우울한 기분의 지속기간(보통 2주 이상)과 불면/식욕저하/체중감소/두통 등 신체증상의 수반 여부, 그리고 우울증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봐야한다. 정신건강 관련 사이트를 찾아보면 우울증 자가진단을 위한 여러가지 문항들(해밀턴 자가진단법벡 자가진단법이 많이 쓰이는듯;;)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테스트해봤을 때 나 역시 중간정도거나 가벼운 우울증 환자에 해당될 때가 더러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최근에 테스트를 해본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는데, 위에 적은 우울증 위험인자 가운데 무려 4개나 해당되는 상황이니 중간정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나온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내가 그리 의존적인 성격도 아니고, 분노를 꾹꾹 참아내지도 않으며 인간관계에 소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심리적 우울증의 원인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강박적인 완벽주의자이거나  타인에 의존적인 성격, 또는 분노를 잘 표현하지 않으며 인간관계에도 소극적임과 동시에 자존감마저 부족한 사람이라면, 가벼운 우울증이 병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앞글에서도 적었듯이 개인의 심리적 원인과 크나큰 스트레스로 작용한 사회적 원인(가족과의 사별이나 실직, 이혼 등) 만으로 우울증이 발병하는 것은 아니고, 그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체에 생물학적인 변화(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 이상)를 가져오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내분비계 질환과 함께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울증으로 의심되면 정말로 <반드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한다.
종합병원 정신과에 진료를 예약하려면 한달쯤 기다려야할지도 모르지만, 전전긍긍 홀로 불안해하는 것보다 단 5분일지언정 만오천원 남짓한 진료비를 들여 전문가와 상담을 해보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개인병원 초진의 경우는 아마 그보다도 더 저렴하지않을까 싶은데, 언젠가 후배를 데려갔던 개인병원의 경우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한 뒤 1시간 넘게 걸리는 심층상담 및 설문(거의 수십장에 달하는 질문지를 집으로 가져가 꼼꼼이 기록해야 했다)에 15만원정도 비용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울증은 개인의 의지력 박약과 상관없는 뇌의 질환이다. 
우리 엄마의 경우 병세가 심해질 때 나타나는 제일 첫 증상은 불면인데,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도 수면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식욕이 줄고 잠을 잘 못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식욕이 늘어 지나치게 먹고 잠이 오히려 전보다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무기력감에 빠져 온종일 잠에 의지하려 드는 때도 있지만, 우울증과 불면은 불가분의 관계인 듯하다.
수면부족으로 기운이 없고 쉽게 피로하기 때문에 일의 능률은 당연히 떨어지고 대인관계도 어려우며, 심하면 음식을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어...>라고 하신다). 우울증 환자는 흔히 과거의 삶을 자책하거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고통스러워하는데, 정말로 우리 엄마의 경우 증세가 심해지시면 수십년전에 저질렀던 사소한 잘못과 실수, 유감스러운 일에 대한 넋두리를 거의 토씨하나 안 틀리게 매번 되풀이하신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 해도 순전히 당신 잘못이었다고, 구급차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평생 남편 속을 썪여 건강한 분을 졸지에 먼저 보냈다고 끊임없이 자책하시는데, 나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치의도 생각을 바꾸라 아무리 말씀드려도 병세가 도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일시적으로 이미 본인의 의지력과 논리적 사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혈압이나 당뇨, 갑상선 질환 등의 지병이 있는 우울증 환자의 경우는 증세가 심해지면 평소 복용하는 약만으로 신체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
우리 엄마의 경우 몇년 전 극심한 우울증으로 식사를 완전히 거부하시는 바람에 혈당조절이 안돼 급성신부전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간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 가족들도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이나 사경을 헤매는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우울증과 제반 합병증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이 사실이다. 

우울증이 확실한 경우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하는 이유는, 초기에 꾸준히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재발을 막고 완치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우울증이 본인과 타인을 위해할 만큼 심해지는 것을 처음부터 막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후우울증에 걸린 산모가 자기 아기를 해쳤다는 뉴스가 그리 낯설지 않을 정도이니, 우울증 환자가 충동적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을 위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절대 허투루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울증 환자의 15%가 시도한다는 자살은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기응징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에 대한 일종의 복수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죽음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주변에 알려 도움을 청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삶의 방편일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 환자의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각별한 배려와 관심으로 환자의 충동적인 일탈행동을 예방해야 할 것이다.

2년 전엔가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 만난 옆 병실의 어느 환자는 정말이지 우울증 환자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늘 쾌활하고 씩씩해보이는 아줌마(우리 엄마처럼 60대였으니 할머니라고 해야하나?)였는데, 간병인과 둘이만 지낼 때는 그렇게 명랑하게 병동의 모든 환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말에 보호자들이 면회만 왔다가면 침울해져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었다. 옆 병실에 있는 우리에게 들릴 정도로, 남편과 아들, 딸이 돌아가며 <복에 겨운 호강 좀 그만 집어치우라>고 <병원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느냐>고 고함을 치다시피 그 아줌마를 구박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우리는 어쩌면 가족들의 무관심과 홀대의 역사가 오래 쌓여 그 아줌마의 우울증 발현에 기여했을지 모르겠다는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우울증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라고 하는, 엄마의 주치의 선생님의 명패 옆에 적혀 있는 진료항목엔 언제부턴가 '화병'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우울증, 조울증, 강박장애, 공황장애, 화병.
한달에 한번 찾아가는 대학병원 정신과 진료실 앞 대기의자에 앉아있는 수많은 아줌마들과 할머니들을 보면서(정말로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70:30인 듯하다), 겉으론 너무도 건강해보이는 그분들의 우울증과 정신장애엔 모두 조금씩 <화병>이 섞여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난리통에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어렵사리 학업과 노동에 힘쓰다 결혼과 육아, 현모양처, 슈퍼우먼의 이데올로기의 압박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왔을 그분들의 정신이 대거 병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전쟁난리통과 뼈저린 절대빈곤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의 여성들도 무한경쟁 사회의 냉혹함과 변함없는 가족주의의 잣대 때문에 과거와 변함없이 우울증을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어쩌겠나. 구조적인 모순과 고질적인 사회병폐를 고칠 길은 알 수 없으니 나로선 그저 우울증을 가벼이 보지 말자는 목소리나 높일 수밖에.
 
예로부터 병은 널리 알리라는 말이 있다.
널리 알려서 허황된 민간요법이나 근거없는 미신까지 받아들이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겠지만, 널리 알려 주변의 배려와 도움을 받고 '용하다는 의원'이나 약을 소개받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요즘 주변엔 정말이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감기에 걸려도 내가 의학을 불신하며 그저 쉬면 낫는다고 여기고 약을 멀리하듯,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병원을 외면한 채 어떻게든 본인의 의지로 이겨보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려할지 모른다. 다행히 증세가 약한 감기라 푹 쉬고 나면 멀쩡해지듯, 하루 30분쯤 햇빛을 쪼이고, 가벼운 운동을 하고,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취미생활을 찾는 따위의 노력(실제로 우울증 환자에게 권유되는 방법이다)으로 가벼운 우울증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절로 낫는 병인 감기와 달리, 우울증은 절대 혼자만의 노력으론 <저절로> 낫지 않는다.

<공인된> 우울증 환자는 아니지만 공연히 찌뿌드드한 날씨 때문에, 병든 엄마 때문에, 밀린 일감 때문에 나도 요즘 계속 수시로 우울함을 느끼는 터라 자꾸 우울증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횡설수설 갈팡질팡 이야기의 두서가 없어지는 것도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이제 그만 닥쳐야지. ^^;

아무튼, 쓸쓸한 가을.
우울함을 이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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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아픈 손가락 2008. 10. 17. 23:52

가을은 우울증의 계절이기도 하다. 1년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은 달이 11월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기도 했지만, 튼튼한 사람들도 계절이 바뀌고 따뜻함이 줄어드는 걸 견디기가 쉽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의 계절나기는 특히 어려운 게 당연할 것이다.

현대인의 30%가 우울증을 안고 살아간다는 통계도 본듯한데, 유명인의 자살과 함께  늘 언급되는 우울증 병력 때문에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이제는 이상한 <정신병>으로 취급받는 일이 드물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우울증을 오해하거나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을 오랜 지병으로 갖고 있는 가족의 존재 때문에 일찌감치 우울증에 대해서 이런저런 지식을 얻게 된 나도, 막상 현실에서 우울증 환자를 대할 땐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뒤 나중에야 후회를 한다. 환자의 불안증세와 강박증이 본래 의중과는 상관없는, 순전히 병의 발현임을 알면서도 버럭 짜증을 내고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병에 대해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럴진대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 어떨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울증에 대한 가장 잘못되고 뿌리 깊은 편견은 <개인적인 나약함>에서 생긴 병이며 <본인의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의지력만으로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기분이 저조해지거나 맥이 빠진 것이지 병리학적인 우울증이라고 할 수 없다. 우울증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한꺼번에 작용하여 생겨나는 <뇌의 질환>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나약함과도 상관이 없다. 우울증 환자에게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하는데,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약을 먹지도 병원엘 가지도 않고 <그저 쉬면 낫는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선 그다지 유용한 표현이 아니다. 우울증은 절대로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병>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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