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사기

책보따리 2006. 10. 12. 17:57
이 세상엔 참 많은 종류의 사기꾼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지만
교묘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수많은 지적 사기에 대해서는  
다른 유형의 사기극에 비해 응징이나 처벌이 훨씬 덜 이루어지는 듯 하다.
워낙 지능적으로 절묘하게 자행되는 사기극인 탓도 있지만
어차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기도 때문이리라.

거의 1년 가까이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던 책의 옮긴이로 더욱 주목을 받은 유명 아나운서 대신 실제로 그 책을 번역했다는 대리 번역자가 나서면서
또 한 번 출판계가 떠들썩한 모양이다.

처음 그 아나운서 이름을 옮긴이로 달고 책이 출간되어 홍보를 할 때부터
나는 믿지 않았었다.
번역 원고료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잡족이 되는 수는 있어도
아나운서처럼 바쁜 직업을 가진 사람이 기사 한 꼭지도 아니고 책 한권을 턱하니
번역할 시간을 내는 건 그리 쉽지 않을 게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법 유명한 사람을 옮긴이나 지은이로 달고 나오는 책치고, 원래부터 문인이 아닌 한 진짜로 그 사람이 번역하거나 지은 책은 역사상 단 한권도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유명한 무용가나 사업가들이 내는 책도 본인은 에피소드만 제공할 뿐, 다 대신 써주는 작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만큼 출판계에 대리번역의 관행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뜻인데
멀리 보지 않더라도,
영문과 대학원에 있는 동안 본 바로도 과사무실을 통해 수많은 번역 아르바이트가 쏟아지더라. 일부는 그냥 참고 교재로 두고 볼 개인적인 번역 의뢰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버젓이 다른 학과 전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출간될 번역서를
뻔뻔하게 대학원생들에게 원고를 "찢어" 번역을 맡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어차피 대학원생들도 바쁘다 보니 1권 분량을 누군가 한 사람이 맡을 수는 없는 것이고
품앗이 하듯 여럿이 나눠 번역을 하는 거다.
나는 어차피 수업 따라가기에도 벅차 그런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도 없었고, 시간이 있었더라도 할 마음이 없었지만, 당시 씁쓸한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차라리 수업에 쓴 교재를 제자들에게 초벌번역을 맡기고 그 원고를 취합해
나중에 교수 이름으로 번역서를 출간하는 건 완전히 애교스러울 정도다.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 나서서 최소한 용어 통일과 문체 일관성 확보에 힘을 쓴 흔적이라도 있을 터이고, 교수의 역자 후기에 "원고 교정에 힘쓴 제자 누구누구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라도 남겨주는 게 '관례'이니 말이다.

이렇게 교수들의 번역서는 죄다 조교나 제자들이 도맡아 하는 관행이 너무도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교수들의 연구업적 평가에서 번역서는 고작 학술지에 논문 1편 발표한 것과 점수가 같다고 들었다. 저서를 출간한 경우 10점이라면, 번역서는 겨우 1점이라나...
실제로 당신이 손수 한 문장 한 문장 1년여에 걸쳐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  번역에 힘쓰시는 선생님들에겐 참으로 억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지만, 그만큼 학계에선  아직도 교수들이 대리번역을 양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는 듯 하지만, 얼마 전 국무총리에 지명되었다가 국회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대단히 단명한 국무총리가 된 어느 전직 교수가 청문회에서, 국내에서 논문을 중복되게 학술지에 게재하는 일을 문제 삼으면 그런 기준에서 자유로울 교수는 아무도 없다는 발언을 하여, 같은 학교 교수들이 벌컥 화를 내며 성명서를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나? 교수들이 논문 하나로 이리저리 조금씩 다듬어서 여기저기 학술지에 실어 연구업적을 높이는 게 '당연한 관행'이라는 거 말이다. ㅡ.ㅡ;;

대리번역...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그리고 다량으로 그런 비행이 저질러지는 경우가
교수들을 앞세운 번역물이다보니, 그쪽으로 괜히 더 거품을 물고 씹어대긴 했지만
골프서적을 비롯한 수많은 실용서들은 그 분야의 유명인을 앞세우고 실제로는
대리번역을 시키는 경우가 아예 정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의 <마시멜로 이야기>를 출간한 출판사처럼
다들 투자비를 뽑아내기 위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그런 사기극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유명인을 앞세워야 독자들에게 책이 '먹힌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책을 잘 읽지 않는 이 나라 국민들에게 그나마 '먹히는' 책이 있다는 걸 감지덕지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출판 시장은 나날이 축소되고, 마케팅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대형 출판사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세월이 되었으니 서글픈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라는 소중한 문화형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러한 뻔뻔한 지적 사기 행각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용인해줄 수는 절대 없다!
누가 뭐래도 대중을 속이고 뻔뻔하게 책을 팔아먹은 출판사는 나쁜 놈들이고
수많은 지적 사기꾼들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하고 있는 출판계는 어서 반성하고 악습에서 벗어나야 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자기 이름 대신 유명인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기로 비밀 계약을 맺어 온 수많은 대리번역자들이 당당하게 세상의 빛을 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이렇게 떠들썩하게 난리를 피우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잊고
똑같은 사기극에 놀아나지 말고, 이참에 확실하게 번역을 둘러싼 출판계의 지적 사기극을 단죄하거나 미연에 방지할 방법이 있으면 더욱 좋겠고...
(역시 자기 밥그릇 관련된 일이니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이기주의는 버리지 못하는군 ㅠ.ㅠ)

하여간에 더불어... 처음부터 내 이름을 걸고 책을 출간하게 해준... 지금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작은 출판사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한다.

(역시... 글이 길어지면 논지가 마구 흐려지는 단점이 마구 드러나누만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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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중독

추억주머니 2006. 10. 11. 02:44
내가 온라인으로도 오프라인으로도 수시 구경을 즐기는
어느 문방구 가게 (디자인 소품 상점이라고 해야 정확하려나?)에서 개점 5주년 행사로
1주일간 20퍼센트나 할인판매를 단행한다는 이메일이 날아왔다.
다른 광고는 읽어보지도 않고 삭제를 하면서
유독 그 사이트에서 날아오는 광고 메일은 어김없이 열어보고선
입을 헤벌리고 한참이나 구경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가끔은 쓸데없이 귀여운 책 스탬프와 잉크패드, 메모지, 스프링 달린 수첩,
스티커, 앙증맞은 공책, 알록달록 모양이 예쁜 박스 포장용 테이프 따위를 사들인다.

그나마 오늘은 그동안 사려고 별러두었던
명함 앨범을 거의 2천원이나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갔던 것인데...
또 한 시간도 넘게 이것저것 문방구를 뒤적이다
잔뜩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놓았다가는 딱히 급히 쓸모 있는 물건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반성하는 의미에서 곧장 구매하지 않고 wish list로 옮겨놓은 뒤 얼른 나왔다.

나말고도 이런저런 문방구를 욕심껏 사들이는 지인들이 꽤 여럿이다.
다 쓰지도 않으면서 색색깔의 펜들을 사들여 필통에 꽂아두고 흐뭇해 하는 이가 없나
역시나 다 쓰지도 못할 아담한 크기의 각종 수첩과 노트를 보는 족족 사들이는 이가 없나
스티커만 보면 눈을 반짝이는 친구가 없나...

대체 "다 큰 우리들"이 이러는 이유는 뭘까?
나 같은 경우 그닥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으므로
문방구에서 늘 사고 싶었던 색연필이나 예쁜 지우개, 손에 잡히는 감촉부터 남달랐던
앙증맞은 일제 샤프펜슬, 수첩, 지갑 따위를 만지작거리며 오래오래 지켜만 보다가
뭔가 특별한 날 아주 큰 마음을 먹고 사들이는 형편이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쳐도,

상당히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터라 출장 다니시는 아버지 편에 수많은 일제 문방구들을
다 섭렵했고, 내가 몹시도 부러워했던 철제 케이스에 든 48색 색연필(아마도 독일제나 스위스제였을 거다)은 물론이고 요새 다시 유행한다는 다이모를 그 옛날에도 들고다니며 제 학용품에 이름표를 죄다 붙이고 뽐을 내, 우리들 기를 죽였던^^ 친구도 여전히 내가 대형 문방구에 들어가보자고 하면 얼굴을 빛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방구 선반을 뒤져대는 걸 보면
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 아예 키덜트 상품이라는 것이 버젓이 개발돼 나오고 있겠지만
나는 이른바 피규어figure를 비롯해 각종 인형이나 테디 베어류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 싫어하는 것 만큼이나 인형도 싫다! 먼지나 풀풀 나고 말이지... )
오로지 문방구, 특히 서지류에만 중독이 심하다. ㅎㅎㅎ

얼마 전 추석 대청소 하느라 책꽂이 맨 아래 놓인 상자를 여니
예전에 사들인 편지지 세트가 잔뜩 들어 있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편지쓰기를 관둔 게 최소한 10년은 넘었으니 그 역시 10년은 넘었을 게다.
철철이 사둔 카드야 아무 때나 쓸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해묵은 편지지는 기껏해야 조카한테나 물려줄 수밖에 없겠지.

또 앞으로 10년쯤 후에 상자에 담아 치워둔 조무라기 수첩과 공책들을 보며 스스로 한심스러워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문방구 사들이는 일을 좀 자제해야 할 터인데
과연 어쩌려나 모르겠다.
참... 앞으로 10년 후면 내 나이가 몇이냐 말이다. ㅠ.ㅠ

반성문이랍시고 이렇게 적어놓고
분명 내일 난 득달같이 그 문방구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못 이기는 척 물건 하나쯤 내려놓은 다음 낼름 계산할 게 뻔하다.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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