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들이 찜질방을 '복합가족놀이공간'이라고까지 극찬하는 말을 들었지만
난 워낙 뜨거운 곳을 잘 견디지 못할 뿐더러
남들이 입었던 옷을 빌려입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찝찝한 데다(언젠가는 세탁 부실한 찜질방 옷에서 '이'가 옮았다는 엄청난 소동도 들은 바 있었으니!)
찜질방이든 사우나든 일단 '대중목욕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단체 누드'의 민망한 순간을 언제든 겪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껏 단 한번도 찜질방엘 가본 적이 없었다.
사우나야 가끔씩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다지만 아무래도 찜질방은 떼로 몰려가 즐겨야 하는 곳일 터인데, 그간엔 고맙게도 찜질방행을 강요하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찜질방의 장점에 대해선 익히 듣고는 있었다.
온가족이 총출동해서 온종일 놀다가 그 안에서 한끼 정도 해결하고 올 수도 있으니
주부들이 특히 좋아하며
심지어는 엄마 따라 '맛을 들인' 5, 6학년 정도 여자애들이 시험 끝난 날 따위에
보드게임이나 퍼즐 같은 걸 싸들고 지들끼리도 찜질방엘 간다더군.
하지만 24시간 영업을 하는 탓에, 집 나온 청소년 또는 어른들의 값싼 쉼터 역할을 하기도 하고, 수많은 종류의 찜질방 가운데  이불이나 거적을 덮어야 하는 일부 서늘한 방이나 수면실에선 차마 눈 뜨고 못 볼 짓거리들을 해대는 젊은/혹은 늙은 연인들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공연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광경을 TV로 볼 때도 내게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것 같고, 뻔들뻔들 땀을 흘리면서 '건강 데이트'를 한다는 연인들의 이야기도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런 내가 전격적으로 찜질방엘 가보게 된 것은 순전히 조카들 덕분이었다.
토요일에 와서 하루 자고 가기로 한 조카들은, 아파트에서 침대 생활을 하는 자기네 집과 달리 주택이라 방바닥이 뜨끈뜨끈한 우리집 방에 이불을 깔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선
대뜸 '찜질방 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ㅡ.ㅡ;;

아이 따뜻해..라고 중얼거리며 요 밑으로 파고들어 나란히 누워있던 조카들은
나를 꼼짝도 못하게 눕혀놓고 각종 소꼽놀이 도구를 챙겨와선 '검은 계란'이라며
까먹으라고 했고, 연이어 식혜와 주스, 각종 과일도  날라다주었다(물론 다 장난감^^).
찜질방 경험이 전혀 없던 나와 달리, 조카들은 제 엄마아빠와, 이모들과 여러번 다녀본 품새였다. ㅋㅋㅋ

잠들기 전에도 '찜질방 놀이'를 더 해야한다고 난리를 치던 조카들에게
다음날 진짜로 찜질방엘 가자고 약속한 뒤 겨우 재운 터라, 걱정반 기대반으로 엄마 모시고
우리도 3대가 찜질방엘 진출했던 것인데...
일단 여자들은 무조건 분홍색 옷(그나마 울 엄마처럼 뚱뚱한 사람들은 흰색 티셔츠를 남자들과 공유하더군), 남자들은 무조건 청회색으로 구분시키는 성차별부터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나마 아이들은 모두 노랑색 옷을 나눠주기에 못마땅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

일요일이라 빈 사물함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찜질방은 완전 만원이었고
구운 달걀과 음료수 하나를 사먹으려 해도 매점에 줄을 서야 했지만
그래도 할머니, 고모와 둘러 앉아 식혜에 '검은 계란'을 까먹으며 행복해 하는 조카들을 보니 나도 그럭저럭 즐거워졌다.

둥글게 이글루스 모양으로 입구를 만들어 놓은 여러 찜질방 입구엔 황금참숯방, 천연보석불가마, 황토소금방, 알프스아이스방 따위의 재미난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온도가 심히 높고 거의 엉금엉금 기어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들어 놓은 불가마엔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60도를 전후로한 찜질방은 뜨거운 걸 못견뎌하는 나도 제법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뜨거운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을 자는 사람들!
그리고 드넓은 홀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딱딱한 목침을 베고 코까지 골며 자는 아저씨들.. 가끔은 어려 보이는 여자애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남들 발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셈인데 어떻게들 그렇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는지 원...
맨날 혼자 자다가 조카들과 올케와 동침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나와는 참 다른 세상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방마다 다정스럽게 누워있는 연인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래도 대낮부터 심각하게 눈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는 이들은 없어 다행이었다.

암튼 TV에서 본 것처럼 우리도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어 하나씩 쓰고 ^^;;
뜨거운 방에서 땀을 흘리고 나와선 아이스티와 녹차 따위를 마시며 탱자탱자 놀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후딱후딱 지나갔고, 사용료가 10분에 천원인 마사지 의자에 앉아 잠깐 마사지도 받고 나니 직업병인 어깨 결림이 조금 풀린 것도 같았다.

마지막 목욕탕에선 장난감까지 싸들고 가서 마냥 놀 작정을 한 조카들을 말리느라
전투적으로 샤워를 마치고 후다닥 나와야했지만 ^^;;
난생 처음 겪은 찜질방의 경험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물론 누구든 같이 가자고 청하면 얼씨구나 좋아라 따라갈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몸이 찌뿌드드할 때, 번잡한 시간을 피해 가족들과 나들이 삼아 가보는 건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ㅋㅋ 그럼 결국은 나도 찜질방이 '복합가족놀이공간'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건가?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찜질 가운이 촌스러운 분홍색이 아닌 곳이면 좋겠고 ㅡ.ㅡ;;
남녀차별없이 같은 색 옷을 대단히 깔끔하게 세탁해서 주는 곳이면 더욱 좋겠고
얼음 동동 띄운 수정과도 파는 곳이면 좋겠다! (어제 가본 그곳은 치사하게 식혜만 팔아서 맘상했다. 난 수정과가 더 좋은데;;)

아무려나 별것도 아닌 찜질방 탐방기 끝!

Posted by 입때
,

무슨 한풀이를 하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젠 온종일 문화생활에 힘쓰느라, 평소 걷는 양의 10배쯤 되는 걷기를 통한 육체노동(?)과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를 겪고 보니 오늘은 살짝 몸살 기운마저 있다.
그렇지만 흐뭇하기 짝이 없던 하루를 기록해두지 않을 수야 없지.
역시 문화생활이란 내 두뇌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주변에 자랑을 일삼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희열이 궁극의 목적이 아니겠나. (아.. 속물스러워라~~ ^^;)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