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옥수수의 계절이다. 겨울과 봄을 거쳐 햇옥수수가 나오기 전까지도 줄창 중국산 냉동옥수수를 쪄서 파는 좌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계속 사다먹긴 했다. 그러면서도 진짜 옥수수의 계절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일찌감치 찾아온 폭염에 올해는 옥수수가 일찍 익었다며, 6월 말부터 5천원에 3개씩 담아 파는 국산 햇옥수수도 깨나 사다먹었는데 드디어 두둥~ 괴산을 오가며 공동농장 농사를 거들던 후배가 옥수수 수확 시기를 알려왔다. 선주문하면 밭에서 딴 옥수수를 곧장 자루에 담아 보내주겠노라고.
30개들이 한자루 얼른 주문하고 오매불망 기다렸다가, 택배 도탁하자마자 들통에다 찰옥수수를 한꺼번에 다 삶았다. 옥수수를 맛있게 먹으려면 따자마자 푹푹 삶아줘야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그대로! ㅋㅋ
사방팔방 자랑했더니 옥수수 싫어하는 이들이 비웃어댔다. 먹기 지저분하고 이빨에 끼고 별로 맛도 없다나... 아니, 어떻게 그런 옥수수를 모욕하는 발언을! 이북 출신인 가족이라 그랬는지, 우리 집에선 옥수수 지저분하게 먹으면 어려서도 혼이 났다. 한줄씩 가지런하게 깨끗하게 똑똑 떼어먹으면 지저분해질 이유가 없는데!
하여간 옥수수 맛있게 삶는 법은 간단하다. 괴산대학찰옥수수 사먹을 때 그쪽 농장에서 쪽지에 보내준 내용대로 몇년째 계속 실천중. 옥수수를 속껍질 한두장 남겨서 잘 씻은 다음(유기농이라 안씻어도 된다지만 난 꼭 씻는다! ㅋㅋ) 물을 넉넉히 붓고(옥수수가 다 잠기게) 천일염 한줌 넣어 푹푹 끓이는 거다. 2, 30분이면 완성.
귀찮다고 껍질을 다 떼버리고 삶으면 확실히 단맛이 덜해지는 것 같다. 누군가는 옥수수 수염도 잘 씻어서 함께 삶는다고 함.
식혀서 일부는 냉동실에 잘 넣어둔 다음, 간식으로 먹고 주식으로 먹고 며칠째 원없이 옥수수를 먹고 있는데도 뭔가 조바심이 든다. 옥수수의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맛있는 옥수수 몇 자루 더 사먹어야하는데 싶어서..
너무 덥다는 핑계로 국이며 찌개며 끓이는 요리는 하나도 안하겠다 선언해놓고, 옥수수 삶는 건 하나도 안덥고 신이 났다. 오죽하면 들통 인증샷까지 찍었을라고. ㅋㅋㅋ 암튼 이 여름 찰옥수수는 진리!
8월말부터 확실히 하늘빛이며 공기의 냄새며 바람의 질이 달라진 건 느끼고 있었다. 일교차가 벌어져 아침저녁으론 선들선들. 포근한 이불을 덮지 않으면 차게 식은 발이 잘 따뜻해지질 않아서 좀체 잠들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암튼 그래도 낮엔 꽤나 더워서,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집안에서 일할 때 민소매 아니면 못버티겠더니, 심지어 오늘은 비온 뒤끝에 종일 춥고 발시리려서 저녁땐 보일러를 돌렸다. 따뜻한 방바닥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ㅠ.ㅠ
추석이 하도 일러서 요번 추석때도 에어컨 깨나 틀었다 껐다 많은 식구들 취향 맞추느라 번잡하겠구만 싶었더니만 이거 뭐지. 최저기온 17도면 나는 발이 시리다는 걸 오늘 머리에 새겨두기로 했다. 그래도 내일 낮엔 29도까지 올라간다니 또 더워지겠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변해가는 날씨가 좀 무섭다. 금방 눈 내리고 얼음얼게 생겼어! 흑... 이 여름의 끝을 잡고... 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 매달고 싶은데 어쩌면 이미 가을인지도 모르겠다. 밤마다 들리던 풀벌레 소리가 정녕 귀뚜라미였던 것이냐. 새삼 세월무상.
3년째 쓰고 있는 아이폰이 점점 느려지고 액정 안에 습기가 찾는지 작은 얼룩이 보이면서 휴대폰을 바꾸긴 바꿔야겠는데 뭘로 바꾸나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이튠즈에 푹 연결만 하면 더 골치아플 일 없게 그냥 아이폰6이 나오면 그거 나 살까 하는 생각이 가장 유력했고, 안드로이드폰 중에선 그래도 G3가 젤 나아보이는데 내 취향엔 좀 너무 크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아서, 에라이 뭐하러 미리 고민하나 나중에 9월 되면 생각해보지 그랬다. 그러고는 9월이 아직 아주 멀리 있는 줄...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네그려. 아까 누가 내 휴대폰을 보고 바꿀 때 됐다고 그러길래, 9월에 아이폰6 나오면 구경해보고 마음 결정해볼라고요, 했다가 다음주 출시래요.. 하는 말을 들었다. 으악. 월말로 약속했던 일들과 추석 때문에, 9월이 무서워서 나는 아직도 계속해서 8월에 살고 있었구나야. 얼른 정신차려야겠다.
볕이 너무 뜨겁고 더워도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걸 처음 실감했던 올 여름. 생각보다 빙수는 많이 먹으러 다니지 않았다. 빙수 한 그릇 먹을까 싶다가도 막상 시키려고 보면 달디 단 빙수보다는 얼음 잔뜩 넣은 쌉싸름한 아이스커피가 더 땡기는 걸 어쩌겠나. 유명한 빙수집을 잘 모르는 것도 그만큼 내가 빙수를 즐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여름을 통틀어 빙수는 너댓 번 먹은 게 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뭘 또 굳이 적어두나 싶지만 마침 휴대폰 사진 정리하다 나온 사진 석장에 기록의 유혹을 느꼈다. 내년 여름에도 혹시 빙수 생각나면 참고해야지.
북촌 한옥마을 가던 날 안국역 지하에 있는 (아마도) 파리크라상에서 먹은 올 여름 첫 팥빙수. 이름이 <얼음공주>였다. 화이트초콜릿으로 만든 티아라를 얹은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나, 나는 딱 한 입 먹어보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엄청 달아~! 달아도 너~~~무 달아서.... 지금도 몸서리가 부르르.
위에 얹은 인절미는 부드럽고 쫄깃했던 것으로 기억되나 팥은 그냥 중국산 통조림 팥이 분명하다. 가격은 9500원쯤 했던 듯.
다시 먹고픈 마음은 없다.
저 멀리 판교까지 가서 먹은 '아임홈'의 <밀크빙수>.
후배가 유명한 곳이라며 데려갔는데, 알고 보니 I'm Home이라는 카페가 여기저기 프랜차이즈로 있는 모양이다. 분당에도 있고 죽전에도 있고... 서판교였던가 동판교 였던가 암튼 거기도 카페거리가 있던데 딱 보정동 카페거리처럼 생겼다.
후배 말로는 위에 얹은 아이스크림도 직접 만든 수제아이스크림이라고. 곱게 간 우유얼음 아래 견과류와 팥이 숨어 있다. 견과류 좋아하는 나는 별로 달지 않고 고소해서 좋아라했는데, 인절미 대신 찹쌀떡이 나에겐 에러! 난 찹쌀떡이 달아서 싫다.
11000원이었던 걸로 기억. 밥 잔뜩 먹고 갔던 터라 둘이 먹다 다 못먹고 남겼다. 사진 찍어온 빙수 셋 중에선 단연 독보적인 1위. 그러나 최고의 빙수라고 할 순 없다...
신촌 명물거리에서 기차역쪽에 가까운 대로변에 있는 '호밀밭'의 <밀크빙수>. 줄서서 기다렸다 먹는 빙수집으로 워낙 유명하다며 꼭 한번 가보자는 친구 말에 싫단 말도 못하고 따라갔다. 정말로 20분쯤 줄 서서 기다렸다 먹었는데, 대체 왜 그렇게 유명해진 건지 나로선 좀 의아했다. 혹자는 <밀탑> 빙수의 맛과 견주던데, 팥 리필해주는 거 말고 어디가 비슷하다고! 통단팥의 씹히는 맛으로 보아 여기서 직접 만든 것 같기는 했고, 콩고물 안 묻힌 찹쌀떡 얹어주는 것도 밀탑 식이긴 하다. 하지만 빙질과 맛은... 으음. (밀탑 빙수 먹어본지 오래됐긴 하다만;) 어쨌든 가격은 저렴했다. 단돈 5500원. 당연히 양이 적은 편인데, 둘이 하나 시켜놓고 팥 리필 두번이나 해서 먹는 사람들도 있더라. 으어.... 달랑 두개 나온 찹쌀떡은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 팥소를 처음부터 아예 따로 주는 건 마음에 들지만 우유얼음을 너무 곱게 갈아서 숟가락질 몇번 하면 금방 물이 되어버린다. 팥 없이 그냥 얼음만 먹으면 딱 <서주아이스주> 맛이라고 내가 말했더니 친구도 동의했다. ^^;
부산 광안대교 주변인가 그렇게 팥빙수 골목이 유명하다는데, 정말 싸고도 별로 안 달고 맛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워낙에도 단팥을 좋아하지 않으니, 막상 가보면 시큰둥하게 될듯...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최고의 맛으로 각인된 빙수의 추억은 두 군데가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닌 세검정 모 대학 언덕배기에 있던 그랑빌 분식의 커피빙수. 수십년 전이라 그저 빙수 얼음에 가루커피와 연유를 듬뿍 얹어주는 게 전부였는데도 정말 너무너무 맛이 있었다. (내 키가 요렇게 작은 이유가 정말로 중학생 때부터 탐닉한 인스턴트 커피 때문인지 아닌지 못내 궁금타;;) 그집은 그랑빌 국수라고 해서 쫄면을 칼국수처럼 끓인 국수가 엄청 맛있고 유명했는데, 뜨끈한 그랑빌 국수를 후후불어 먹고 나서 후식으로 커피빙수를 먹으면 정말이지 세상이 내것인 듯 기분이 좋아졌었다. 졸업후에도 그 맛을 못 잊어 가봤더니 분식집이 통째로 없어졌두만...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데, 아 글쎄 신촌 호밀밭의 커피빙수도 인스턴트 가루커피를 얹어주길래 깜짝 놀랐다. 호기심이 약간 동하긴 했으나 먹어보고 싶은 생각은 안드는 비주얼. 그 옛날 그랑빌의 커피빙수는 가루커피에 우유랑 연유를 듬뿍 얹어주어 진짜 맛있었는데...
두 번째 역시 공교롭게도 분식집에서 팔던 빙수다. 하기야 수십년 전엔 지금처럼 카페가 많지도 않았고, 빙수는 여름에 제과점에서 주로 파는 한정 상품이었다규~! 암튼 내가 반했던 두 번째 빙수는 바로 이대앞 가미분식의 수박 빙수. 가미도 여름 한철 수박빙수에 연유를 듬뿍 얹어 내주었던 것 같다. 나 설마 빙수가 아니라 연유 맛을 좋아했던 것 아니겠지? ㅋ 째뜬 가미분식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주인이 바뀐 이후로 맛이 완전히 달라져 발길을 끊은지 10년도 넘은 것 같다. 고등학생 때는 정말이지 시험 끝난 다음이나 여름 방학 때 큰 마음 먹고 이대앞에 나가 가미분식 찾아가는 걸 대단한 행사로 여겼었는데...
이제는 사라져버린데다 추억이 가미되어 더 맛있었다고 느껴지는 그런 상상의 빙수맛 말고, 진짜로 내 입맛에 꼭 맞는 빙수가 어디엔가는 있으려니 싶어서 해마다 여름이면 빙수를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어디 커피빙수 맛있게 하는 집 없을까, 하는 나의 로망은 이번에도 내년으로 넘겨야할듯.
매년 이웃주민들이 록페스티벌에 다니는 걸 보며 마냥 부러워만 하다가 올해는 전격적으로 나도 가보자고 나섰다. 아 글쎄, 라디오헤드가 온다지 않는가! 처음엔 라디오헤드 오는 날 하루만 갈 작정이었다. 어차피 사흘 내리 묵으려면 일찌감치 3월쯤부터 숙소를 예약해야한다는데 나는 그런 발빠른 사람도 아니고... 오래 전 숙소확보를 마친 이웃 주민들에게 뜬금없이 나도 잠자리에 끼워달라고 무작정 떼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헌데 나에게 한음파를 향한 팬심을 심어주려 노력한 지인의 집이 지산 리조트 바로 옆(?)이고, 일요일에 한음파 공연도 잡혀 있어 팬들이 여럿 그리로 움직일 예정이라 내게도 숙소를 제공해주겠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쾌재를 부르며 나는 곧장 3일권을 끊고 7월말이 되기를 기다렸다. 한음파 팬들이야 1일권을 끊고 오겠지만 나는 뭐 간간이 다른 주민들과 만나서 놀면 되겠지(;;그러나 폭염으로 인하여 이 상상은 헛된 꿈이 되고 만다 ㅋ)
어쨌거나 드디어 대망의 7월 27일. 1시쯤 양재근처에서 지인을 만나 지산으로 출발. 덕평IC를 빠져나오자마자 삼거리에서 지산리조트쪽 좌회전길은 꽉 막혀 있는데 우린 반대로 우회전. 아싸~. 읍내 하나로마트에서 조촐하게 장을 봐가지고 숙소에 도착하니 2시반쯤? 우리가 편히 지내도록 서울 집으로 올라가시는 지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뒤, 둘러보니 아 이곳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5도2촌의 천국!? 스누피 마을의 찰리 브라운네 노란 통나무집과 스머프 마을의 아기자기한 텃밭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내년에도 지산 펜션 운영하게되면 쓰라고 찍은 사진 ^^;
정말 닮지 않았슴까? ^^;
장볼 때 쌈채소며 오이 같은 건 다 집에 있으니 사지말라더니만, 우왕 옥수수부터 토마토, 오이, 가지, 양배추, 콩, 고추, 블루베리까지(스머프 마을 작물과 진짜 많이 겹침;; ㅋ) 없는게 없더군.
원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점심을 밖에서 사먹으려 했으나 마땅히 사먹을 곳도 없고 막상 집에 가니 더워서 라면을 끓여먹을 생각도 안들고, 옥수수와 수박으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는 작렬하는 해가 한풀 꺾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으음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산리조트로 가려면 논길로 30분쯤 걸어가야 한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어떻게 음악소리가 하나도 안들리지?? +_+
어느새 시간은 4시가 넘어가는데 뜨거운 햇살은 도무지 변함이 없고, 5시 40분부터 빅탑스테이지에서 하는 김창완 밴드부터 슬슬 볼 마음이 있었기에 마침내 지인과 강아지 두 마리의 안내로 집을 나섰다. 티켓과 팔찌도 바꿔야 하고 맥주와 먹거리를 사먹으려면 티머니카드도 사야한다니까...(온 집안을 다 뒤져도 왜 티머니카드 하나가 없는지 원! 출발 전 우리집 앞 가게에서 하나 사간다는 걸 까먹는 바람에 결국 된통 고생;;)
본격 다랑이논은 아니지만 산비탈이라 논이 계단식;;
도라지밭인데 너무 멀리 찍었나...
초록으로 펼쳐진 논도 예쁘고, 길 옆에 핀 도라지꽃도 예쁘다고 감탄하며 걷던 여유도 잠시... 우어 덥고 힘들다! ㅠ.ㅠ 챙넓은 모자를 쓰면 뭐하나 바람에 막 날아가고, 땀은 줄줄줄 흘러내리고... 논길이 끝나고 드디어 산길에 접어드니 정말로 떠난지 딱 30분만에 지산리조트 캠핑장이 보였다. 허나 몇년 째 매년 아무런 제재도 없었다는 리조트 뒷길 입구에는 불길하게 노란 테이프가 쳐져 있었다. 다행히 첫날이라 아직 아무도 지키는 사람은 없는 상태. 나는 지인과 강아지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개구멍 들어가듯 테이프 밑으로 몸을 숙여 리조트로 진입했다.
팔찌 안찼다고 누가 뭐라고 그러면 어쩌나, 안그래도 티켓 바꾸러 가는 중이라고 당당히 말해야지, 괜스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개울 옆 캠핑장을 지나 스테이지 옆을 가로질러 입구를 찾아 헤매는데, 나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한시름 놓았다. 드디어 하얀 천막을 쳐놓은 입구에서 줄을 서 티켓을 팔찌로 바꾸고, 술 사마시려면 필요하다니 신분증 보여주고 19세 인증 팔찌도 하나 더 차고, 그나마 줄이 제일 짧아 보이는 곳에서 티머니 카드를 사기 위하여 하염없이 줄을 섰더니..... 시간은 이미 6시. ㅠ.ㅠ 공연 하나 못보고 줄서서 기다리다 지쳐버렸다! 이어지는 공연 계속 보려면 저녁도 먹어야하는데! 투덜투덜 구시렁구시렁 욕을 하며 드디어 충전을 마친 티머니 카드로 샌드위치와 아이스커피를 사가지고 달려간 곳은 빅탑스테이지 앞 잔디밭. 김창완 밴드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이미 땀을 두바가지나 흘렸던 탓에 맥빠지고 기운 없어서 김창완 밴드의 공연은 어떻게 봤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막판에 노장의 힘 같은 게 느껴져 약간 울컥했는데, 첫날 내가 느낀 지산에서의 정서는 대체로 '노장 투혼에 대한 감동'이었던 것 같다. 혼자 그 뙤약볕에서 버틴 나를 포함해서! ㅠ.ㅠ
원래는 김창완밴드 공연 끝나면 그린스테이지로 가서 검정치마 공연을 볼 작정이었는데, 도저히 거기까지 또 갈 마음이 안들더라. 대신에 맥주 한잔 사들고 잔디밭에 퍼질러 앉아 엘비스 코스텔로 공연을 기다렸다. 라디오헤드 공연 보려면 체력도 비축해야 해! 아직 해도 지지 않아 무더운데 재킷까지 떨쳐입은 엘비스 코스텔로 아저씨가 바가지땀을 흘리며 열기를 뿜어대는 공연을 보자니 알코올의 힘인지 슬슬 나도 기운이 나는 듯했다. 들국화 공연을 볼까말까, 명당자리(가운데 박스는 아니어도 무대 왼쪽 철책 안이라 가까운데 첫날엔 돗자리도 깔게 해줬다.)를 놓치기 아까워 계속 버틸까 고민하던 끝에 나는 다시 그린스테이지로 옮겨갔다. 얼마전 재결성한 들국화 공연이 그렇게 좋다는데 봐줘야지. 멀리서 첫곡 <행진>이 울려퍼지는 걸 듣으며 걸음을 서두르는데 우왕 가슴이 설렜다. 연주와 노래가 녹슬지 않았어!! 오래 전 대학로로 전인권 콘서트 보러 갔을 때, 술인지 대마초인지에 취해 노래도 제대로 못하고 기타줄만 연거퍼 끊어먹다 티켓 다시 나눠주고 관객을 돌려보냈던 전인권 아저씨의 기억도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다음 밴드 공연을 위해서 다들 앵콜은 전혀 안하던데, 들국화는 다들 가버릴까봐 걱정된다며 30초쯤만에 다시 올라와 앵콜곡까지 불러주었다. 라디오헤드 보러 가야해서 자꾸 시간 확인하며 앵콜곡은 안들어야지 돌아섰던 나도 결국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또 한번 느낀 '노장 투혼에 대한 감동'.
들국화가 앵콜곡까지 깔끔하게 9시 20분에 공연을 끝내주어 희희낙락 다시 빅탑스테이지로 향하는데 아뿔싸, 뭐냐 벌써 공연이 시작됐잖아! 30분 예정인데 더 일찍 시작하는 건 또 뭐람. 꽉 막힌 사람들 틈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낭패다 싶었지만 무려 2시간을 훌쩍 넘긴 공연시간을 생각하면, 라디오헤드로선 보여줄 게 너무 많아서 서둘러 나왔던 거다. 어우 감격 또 감격. 깔려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원래 명당으로 생각했던 무대 왼쪽 철책 앞자리를 어렵사리 다시 확보한 나는, 조명이며 대형스크린 디스플레이까지 완벽하게 짜임새를 갖춘 공연에 빠져들었다. 꽁지머리로 끊임없이 오징어춤을 추어대는 톰 요크가 워낙 작게 보여서, 다른 공연처럼 큰화면으로 무대 위를 비쳐주지 않는 게 처음엔 불만이었지만, 분할 화면으로 일일이 중앙과 좌우 대형 스크린을 구성한 건 꿈결인듯 신비롭고 혼을 쏙 빼는 것 같은 음악에 딱 맞게 다 짤 짜여진 무대였던 셈이다. 비록 예습을 소홀히 해서 내가 모르는 노래들이 더 많긴 했지만, 우왕 멋져라. 1시간 반 예정인 공연이 2시간을 넘기고 12시가 가까워지면서, 나는 점점 허리와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피곤해 철책에 기대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마약이 따로없도다! 끝인가 싶으면 다시 이어지는 앵콜곡까지... ㅠ.ㅠ 15만원쯤 내고 보러 간 단독 내한공연 못지 않은 무대를 보며, 나는 이미 3일권 끊은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뙤약볕에 줄 서서 기다릴 때만 해도 내가 미쳤지, 이 나이에 이 무슨 못할 짓인가, 다시는 못할 노릇이로다, 뭐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라디오헤드 공연을 보고 나니 마음이 또 달라졌다. 오길 잘했지 뭔가. ㅎㅎㅎ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원래 지인은 공연 끝날 시간에 맞춰 다시 자기가 강아지들을 데리고 산밑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었으나, 가로등도 없는 산길과 논길을 걸어 돌아간다는 게 너무 위험한 것 같아 나는 셔틀버스와 택시를 타고 멀리 돌아 귀가할 터이니 염려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인이 그새 라디오헤드 공연을 보러 온 다른 멤버를 섭외하여 놓았다는 것. 라디오헤드 때문에 초저녁 지산리조트 입구 또한 아수라장이라고 하니, 그들도 편하게 차를 지인네 집앞에 세우고 후문으로 입장을 했었다나. 캠핑장 입구와 후문 입구에서 보안요원과 통행이 되네 마네 말씨름을 벌이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깜깜하고 무서운 산길과 논길도 떼거지로 걸으니 갈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게다가 하늘에 다닥다닥 떠 있는 별들! 손에 닿을 듯 내려온 북두칠성을 발견 한 게 정말 얼마만인지...
숙소에 당도해 삼겹살 안주에 복분자주, 이름모를 과실주, 막걸리에 맥주까지 폭풍흡입을 하고 나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라디오헤드 공연을 보러와서 나와 밤산길을 동행했던 모 밴드(!) 멤버들은 1시쯤 유유히 상경하고(나중에 들으니 첫날 라디오헤드 공연 끝나고 리조트 입구에서 사고가 나 2시간 동안 버스가 꼼짝도 못했다고 한다. 나도 셔틀버스 타고 옆 마을로 오려 했으면 꼼짝없이 거기 갇혀 있었을 걸 상상하니 ㅎㄷㄷ), 내가 공연보러 간 사이 퇴근 후 합류한 또 한 명까지 세 사람은 노란 통나무집에서의 첫날밤을 뿌듯하게 보냈다.
둘쨋날의 아침은 당연히 숙취와 더위로 시작.
12시까지 깨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잠들었는데, 워낙 부지런한 숙소 주인이야 그렇다치고 나까지 9시도 되기 전에 잠이 깨는 걸 어쩌란 말인가. 밤새 꽁꽁 문단속 해둔 문을 다시 활짝 열어놓고 재차 잠을 청해보아도 11시. 전날 무리해서 몸은 젖은 솜처럼 늘어지는데 잠도 오질 않았다. 둘쨋날 공연 밴드 가운데서는 아울시티와 제임스 블레이크, 이적 정도가 관심 있었으나, 뜨거운 햇빛 속을 또 걸어나갔다가 오밤중에 홀로 돌아올 자신도 없고, 전날 이미 본전을 대거 뽑았다는 생
각에 돈 아까운 줄도 모르겠고, 결국 나는 둘쨋날은 지산을 외면하고 고스란히 쉬기로 결정했다. 심혈을 기울여 골라간 책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으면서.
워낙에 TV도 에어컨도 없는 집이라 선풍기를 휘휘 돌리며 제일 시원한 곳에 각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했는데, 기대는 걸 선호하는 내 독서 자리는 주로 2층 계단 입구였다. 중간 계단참에 기린가족 세 마리가 자리잡고 있는 사랑스러운 공간. 으음.. 나는 돈을 얼마나 더 벌어야 근교에 이런 집을 짓고 살 수 있을까나. ㅎ
지산 쪽에선 가끔 바람을 타고 음악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그래도 해떨어지면 헤드라이너는 보고 와야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담날 낮부터 땡볕에 돌아다니려면 무조건 쉬어야 하오...
집앞 테라스엔 내가 스머프 마을에서 단계 올라가고 지폐 모이면 꼭 살테닷, 마음먹었던 그네 소파도 있었기에 해 좀 떨어진 다음엔 밖에 나가 그네에 앉아 책을 읽었다. 윙윙대는 벌이 무서워서 오래는 못있었지만...
좀 모자랐던 맥주를 더 사온 뒤 저녁으론 삼겹살과 목살을 배터지게 먹는 것까진 좋았는데, 초저녁에 쌈 싸먹을 깻잎을 뜯으러 반바지 차림에 무방비(뱀 주의 하라고 해서 작업용 장화는 신었으나 뱀은 못만났음;;) 상태로 텃밭에 들어갔다 나왔던 나는 벌레에 그토록 수없이 물어뜯긴 줄도 모르고 있다가 밤부터 미칠듯한 가려움증에 시달려야 했다. 다 뜯어먹히고 나서 벌레퇴치용 팔찌를 차고 스프레이를 뿌려댄들 무슨 소용이랴 ㅠ.ㅠ
대망의 마지막날인 일요일.
라면으로 아점을 먹고 나서 1시 한음파 공연에 맞춰 일찌감치 12시부터 집을 나섰다. 예상은 했지만 지산 리조트 후문 잎구 노란 테이프 안쪽엔 보안요원 둘 떡하니 지키고 서서 대뜸 못들어간다고 막았다. 메인 출입구로 다니라나. 아니 숙소가 바로 요 아랜데 한두시간씩 걸리는 걸 돌아다니라고?! 나야 3일권 팔찌를 흔들어보였으나, 일행은 아직 1일권 티켓을 팔찌로 바꾸지도 않은 상태. 오래 살고 보니 그렇게 묘한 권력의 힘을 휘두르는 상대에겐 뻣뻣하게 싸워봤자 약자만 손해다. 지인이 몇년전부터 그렇게 후문으로 지산에 들락거린 마장면 마을 주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사흘 내 그리로 다녔다고 우기면서 협상에 성공했다. 그나마 좀 착해보이는 요원 하나가 마장면 해월리 주민들에게 집집마다 나눠주었다는 연분홍색 팔찌를 두개 뜯어주며, 나중에 밤에도 이리로 오면 자기네는 보내주겠으나 다른 팀이 캠핑장 입구막는 건 어쩔 수 없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연구역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햇살이 정말... ㅠ.ㅠ 게다가 첫날엔 군데군데 파릇파릇 잔디밭이 퍽이나 시원해보였던 무대 앞 박스 안은 완전 초토화! 잔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누런 흙먼지가 막 날리고 사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마구 풍겨왔다. 이것은 쓰레기 썩는 냄새? 으으으... 나무 그늘이건 건물 그늘이건 그늘마다 돗자리 편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틈에서 우리도 잠시 쉬었다가 그린스테이지로 향했다. 왜 하필 한음파 공연시간은 1시냐고!! 지인은 팬심을 발휘해 무대 앞으로 나갔으나 나는 돗자리 펴고 뒤에 앉아 관람하면서도 숙소에서 양산 가져오지 않은 것을 급후회했다. 아 살인적인 햇살과 더위...
그 더운데도 낮부터 무대 맨앞에서 방방 뛰는 이들은 정녕 인삼녹용이라도 씹어먹었을까, 놀랍기 그지없었다. 하기야 그 뙤약볕에 나와 오밤중까지 버틸 작정을 한 우리들도 놀랍긴 마찬가지. 하지만 중간에 숙소에 들어갔다간 지쳐서 뻗어버려 다시는 나오지 못할 듯했다. 더워도 그저 버티는 수밖에...
빅탑 스테이지쪽으로 이동하다 그간 줄서는 거에 하도 질려 계속 외면했던 홍보 천막들 앞을 지나는데, 마침 첫번째 천막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바디피트' 홍보천막이었다. 설문지를 적고 다트를 던지긴 해야 하지만 얼핏 보니 문항도 몇 개 안되고 금세 끝날 것 같아 한번 해보자고 내가 지인을 부추겼다. 내가 던진 다트는 샘플 4개 당첨. 그런데 지인이 던진 다트는 1상자에 철커덕! 그들 말로는 1년치라나. ㅋㅋㅋㅋㅋ 그걸로 1일권 본전 다 뽑았다고 킥킥대긴 했으나 밤중까지 생리대 박스를 들고 다니기엔 민망해! 들고다니며 의자처럼 깔고 앉을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사물함에 넣어두고 나중에 찾아가기로 했다.
5시 40분부터 하는 넬 공연까지는 별로 보고픈 밴드도 없고 땡볕이 너무 무서워 돌아다닐 엄두도 나질 않았다. 해서 시끄러워 죽을 것 같긴 해도 멀리 빅탑스테이지도 보이면서 파라솔 밑 의자에 앉을 수도 있는 홍보천막 앞에서 계속 죽때리기. 덥고 시끄러워 책은 눈에 안들어올 것 같아 가져가지 않은 걸 어찌나 후회를 했던지! 지인은 그 와중에 이탈리아어 공부삼매경.. +_+ 중간에 <샴페인>이었던가 일본 밴드인 것 같은데 보컬이 퍽 꽃미남이라 반색하면서도 음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늦은 오후부터 서서히 잔디밭에 나무 그늘이 깔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얼른 돗자리를 펼치고선 덥거나 말거나 드러누워 팍팍한 다리와 허리를 쉬었다. 에고고 삭신이야... 누워서 올려다본 하늘엔 뭉게구름도 다 날아가고 새파란 하늘에 작은 조각 구름 하나만 둥실 떠다녔다.
멀찌감치서 본 <넬> 공연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앞으로 갈까말까 망설이다 그냥 뒤에서 편히 보기로 한 <비디아이> 공연도 좋았다. 첫해 <오아시스> 공연때 봤더라면 얼마나 더 감동이었을까 ㅠ.ㅠ
근데 리암 갤러거 왤케 늙은 것이냐... ㅎㅎㅎ
일어서 구경할 기운도 없어 잔디밭에 앉아 구경한 나도 뭐 늙었다만;;
한시간 반이 훌쩍 지나고 비디아이 공연이 끝난 뒤엔 장필순 공연을 보느라 이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감격적으로 이웃주민들과 이동 중간에 접선에 성공! ㅠ.ㅠ 지산은 참으로 좁고도 넓은 공간이다. ㅋㅋ
장필순을 좋아하긴 해도 무대 앞으로 달려갈 만큼의 열정과 체력은 부족했기에 들국화 공연을 봤을 때와 거의 비슷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그래도 들국화 볼 땐 서 있었구나;;). 어우.. 조용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힘있는 목소리가 나오는지. 록페스티벌 특집이었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살짝 장필순도 예습을 했기에 인상적인 노랫말을 생생하게 다시 들으니 새삼 가슴이 찡하는 부분이 있었다. 제일 좋았던 건 역시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랑 <그대로 있어주면 돼>였지만...
이어지는 헤드라이너 <스톤로지스>를 보러 다시 빅탑으로 이동. 장필순 대신에 CJ 특설 스테이지에서 한 <한음파>의 어쿠스틱 버전 공연을 봤던 지인과 다시 잔디밭에서 합류해 귀여움 쩌는 이언 아저씨를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ㅋㅋㅋ 마지막날 헤드라이너로는 좀 부족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야 내가 노래를 잘 몰라서 그럴테고 광분해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앞쪽 팬들과 뻘뻘 땀흘려 연주하고 노래하는 그들을 보며 덩달아 흐뭇했다.
그러고선 그 유명한 지산의 불꽃놀이. 뻥뻥 터지는 불꽃을 보며 그게 마약이라고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뭔가 가슴이 짠해지면서 울컥...
그렇게... 나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확률이 높은 지산록페스티벌의 사흘이 막을 내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캠핑장 입구에서 또 한번 실랑이를 벌일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으나 마침 어디선가 나타난 자동차를 인도하느라 요원들 서넛이 다 바뻐! ㅎㅎㅎ 입구는 무사히 통과, 중간에 한 번 더 제지를 받기는 했으나 마장면 주민용 팔찌(여밈 버튼도 없는 거;;)를 흔들며 옆마을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작별을 고했다. 아마 내년에는 정말로 후문 출입구가 봉쇄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꽤나 훤한 반달이 있긴 해도 휴대폰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두 여자가 밤 산길과 논길을 걷자니 새삼 기분이 으스스했다. 나중엔 우리 인원을 알리면 안된다며 플래시를 끄기까지. -_-; 몇군데 더 벌레한테 공격을 받고서 무사히 숙소로 돌아와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은 그야말로 꿀맛! 내년 지산을 기약할 수 없기에 더더욱 역사적인 밤이었다. ㅋ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부지런한 숙소 주인은 또 다시 텃밭 물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역시.. 귀촌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이어지는 가뭄 때문에 모든 밭에 그렇게 매일 아침 물을 주고 단속을 해놓아야 한다고... 통나무집 전원주택과 스머프 마을 같은 텃밭 가꾸기는 그러니까 상상의 세계 속에서나 낭만적인 것이었다.
스머프들이 왜 노상 그렇게 밭에 조리로 물을 주나 했더니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거였다. 그리고 뱀과 온갖 벌레, 풀잎에 베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선 저렇게 긴팔, 긴바지 작업복에 장화까지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근데 나는 저길 팔다리 다 드러내고 들어갔으니 벌레들이 얼마나 반색(혹은 질겁?)했을까나. 오른쪽은 그날 아침 수확해온 먹거리들이다. 감사하게도 나까지 바리바리 싸주어 오늘까지도 맛있게 먹고 있음.
쓰고 보니 지산록페 후기가 아니라 전원주택 체험기가 절반을 넘는듯. ㅋ 그래서 더욱 인상적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록페스티벌 가기 전에 예습해서 음악을 익혀간다는데, 가기 전에 이래저래 바빠 예습에 소홀했던 나는 새삼 라디오헤드랑 장필순 노래 찾아 들으며 수시로 흥얼흥얼 후유증을 앓고 있다.
TV와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 3박4일간 지내다 돌아와 어제는 가려움과 싸우느라(산길과 밭에서 벌레한테 팔다리를 무려 서른한군데나 뜯어먹혔다 ㅠ.ㅠ) 정신이 없었다. 한낮의 열기는 죽을 것처럼 뜨거웠어도 산밑이라 그런지 밤엔 서늘해져 큰 타월이라도 덮어야했는데, 서울은 어김없이 열대야. 어젯밤 선풍기를 계속 돌리면서도 자다깨다를 반복했더니 오늘도 대체로 멍하다. 이것은 어김없는 휴가 후유증. 휴가땐 하도 먹어대서 당연히 체중이 불어 오지만, 이번엔 하도 땀을 빼 +/- 제로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했으나 체중계에 올라보니 어김없이 무거워져 있다. ㅋㅋㅋ 주로 밤에 몰아서 먹고 마셔댔으니 당연한 건가.
오후 들어서야 통째로 뽑아놓았던 플러그들을 콘센트에 끼고 슬슬 일 모드에 돌입하려 했으나, 컴퓨터를 켠 이후론 계속 인터넷질만 하고 앉았다. 아무래도 저녁이나 먹고 나야 슬슬 꼬부랑 글씨들이 눈에 들어올 모양. 생각해보니 여름에 제대로 휴가를 떠난 게 제주도 이후 처음이니 몇년 만이었다. 그땐 왕비마마를 동생네 모셔다두고 가야해 괜히 찜찜했었는데 올핸 훨씬 더 팔팔해진 엄니를 혼자 집에 두고 떠나면서 하나도 걱정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위 먹을라, 찬물은 싸갔냐, 공연은 재밌냐, 노친네가 내 걱정을 더 많이 했던 듯. 이 추세라면 좀 더 긴 휴가 계획도 별 걱정없이 세울 수 있겠다 싶어 의기양양 기쁘다.
본격 후기를 후딱 쓸까 했는데 며칠 만이라고 자판도 낯설어 계속 오타를 내는 걸 보니,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도 적응이 필요한 것 같다. 끼니때마다 뭐 먹나 걱정해야 하는 밥순이의 삶에도 적응이 필요한 것처럼. 에구구, 젠장 여섯시 다 됐다.
등잔밑은 확실히 좀 어둡다. 전국방방곡곡은 물론이고, 나고 자라 살고 있는 도시만 해도 안가본 동네를 꼽아보면 아직도 많다. 유명한 곳일수록 더 그렇다. 각자 서울서 산 세월이 40년을 넘겼지만 삼청동은 꽤 다녔어도 길 하나 위에 있는 북촌은 골목골목 제대로 구경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누군가 가보자고 나섰다.
북촌 한옥에 대해선 책을 먼저 읽었다. 몇채 안남았다는 건 알고 갔는데도 골목이 금세 끝나 허무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도 들고 다니며 북촌 7경이니 8경이니 순례를 다니더라. 째뜬 이나마 남아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인데, 박제되어 먼지 낀 짐승을 보듯 마음이 무거웠다. 제대로 원없이 사람냄새 나는 한옥을 보려면 그러니까, 안동이나 전주 같은 델 가야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를테면 여기가 북촌 한옥마을의 '메인스트리트'다. 저 골목 끝 언덕 꼭대기에서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것이 포인트라고 지도에 안내되어 있는지, 너도 나도 그 지점에서 사진을 찍었다.
올라가다 나도 슬쩍 돌아보았지만 한옥 처마 사이로 보이는 부연 하늘과 볼품없는 건물들과 남산타워는 하나도 멋지지 않던데. 뭐가 멋있다는 건지. 흠.
저런 아치형 문은 대문엔 안 쓰고 궁궐 중문에서나 본 것 같은데.. 이른바 퓨전한옥인가보다, 그랬다.
그렇지만 기와 넣어 쌓아올린 황토담과 어우러져 예쁘긴 하다. 저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나. 북촌 한옥에 사는 건 뿌듯하다 해도 노상 사람들이 와글와글 돌아다니니 참 시끄럽겠다. 오죽하면 골목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니 조용히 해달라고 팻말이 적혀있을라고...
같은 집 담장은 아니지만... 왼쪽 집은 시원시원한 느낌이고 오른쪽 집은 아담하니 정겨웠다. 담장 밑에 내놓은 화분도 꽤나 부지런히 가꾼 흔적이 보인다.
<한옥이 돌아왔다>라는 책에서 북촌 한옥 이야기를 읽긴 했는데 어느 집이 그집인지 'OO헌'이었다는 것 말고는 통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책에서 이렇게 담장에 낸 창문 사진을 본 적은 있다. 이집이 그집일까, 잘 보이지도 않는 저 창살 틈새로 기웃기웃 안마당을 들여다보다 킥킥거리며 포기했다. 새어나온 담쟁이랑 다 예쁘다.
한옥 사이에 자리한 어느 양옥집 담장 너머로 축 늘어진 감나무 가지에 열매가 어찌나 다닥다닥 탐스럽게 열렸던지... 가을까지 안떨어지고 잘 버티면 좋겠다.
우리집앞 골목길 감나무는 얼마 열리지도 않은 열매가 노상 떨어져 바닥에 으깨져 있어 볼 때마다 심난했는데 튼실한 초록감을 보니 괜스레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골목을 벗어나 밥먹으러 가려다가 해무리를 봤다. 아직 저렇게 어둡진 않았는데, 한옥에 초점을 맞추면 해무리가 안보이고, 해무리를 찍자니 한옥이 그림자로만 나왔다. 가뜩이나 구도도 엉망인데 전깃줄이라도 없으면 딱 좋겠구만.
날짜는 또 월말이고 일은 밀려있고 그러나 역시나 일은 하기 싫고 낮엔 여우비가 내리더니 이젠 아예 주룩주룩 쏟아져 맥주일잔이 땡기고 돌아보니 변변한 휴가를 즐겨본 게 언제인지 생각도 나질 않고....
그래서 콩밭에 간 마음을 담아 사진폴더를 뒤졌더니
지난달에 번개치듯 선운사에 다녀온 추억이 콧바람을 부추긴다.
콩밭에 간 이놈의 마음 어찌 돌려야 하나.
아무때나 내려오라던 절간 친구는 그날따라 행방이 묘연해져 우릴 바람 맞히는 바람에 선운사 대웅전 마당은 유독 뜨겁게 느껴졌지만, 7월의 녹음 우거진 오솔길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바람 맞은 마음 달래러 들른 변산 해수욕장과 하늘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예뻤다. 키가 30센티미터만 더 컸더라면 손에 잡힐 것처럼 유독 낮게 깔렸던 그날의 어여쁜 구름을 보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도 같고....
오늘도 아침 내내 집앞 나무에서 시끄럽게 울어대 올빼미족의 단잠을 방해하던 매미들이 오후들어 쥐죽은 듯 조용하다. 돌연 마음 한 구석이 싸해진다. 장마 때는 별로 큰 비를 안 내리다가 오히려 그 이후에 간간이 밤새 한번씩, 때로는 새벽이나 아침나절에, 또는 오후에 무섭게 쏟아지던 소나기와 폭우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울어대던 매미들이 아닌가. 밤인 줄도 모르고 울어대는 도시의 매미는 낮밤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을 밝힌 보안등과 가로등 때문에 감각이 마비된 탓이니 녀석들을 미워해선 안된다는 얘기를 들으며 이미 또 마음이 한번 짠했었다.
어제부터 다시 날씨가 더워지긴 했지만, 낮에도 선풍기가 필요없을 정도로 선선해졌던 요 며칠간 드디어 한여름 무더위도 힘을 잃었구나 생각하니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산한 가을이 기어이 오는 것인가 싶어 잠시 망연했다. 어제 얘기를 들으니 일산 사는 동생네는 선선했던 그 며칠 사이 매미들이 벌써 생을 마감해 바닥에 떨어져 있더란다. 선선한 날씨에 여름이 다 간줄 알고 성질 급한 녀석들이 살 힘을 놓아버렸던 모양이다.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야 하는 세월이 몇년이라는데 그렇게 오래오래 뜸들이며 참다가 겨우 한 철 매미로 사는 주제(?)에 어딜 가나 성질 급한 놈들은 있기 마련이구나 생각했다가, 오히려 그렇게 어렵사리 기다림 끝에 얻은 세상이라 끝에 대한 절망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매미 우는 소리도 시끄럽고 더위는 좀 물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을이 오는 건 또 아직 두렵기만 하니 뭘 어쩌자는 건가. 입추, 말복 다 지난 건 알았어도, 새삼 달력을 보니 다음주 월요일이 처서다. 어려서부터 익히 들어온, 처서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은 이제 사장된 표현이지만 그래도 이름마저 '처량맞게' 들리는 처서를 지나고 나면 제 아무리 아열대 기후권에 돌입했다는 한반도에도 스산한 계절이 올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가을 지나면 또 무서운 겨울이잖아! 새삼 여름을 붙잡으려면 매미채 들고 나가 옆 동네로 날아가버린 매미들이라도 다시 몰고 와야할 것만 같다. 매미들아, 변덕 부려서 미안한데, 한동안은 좀 더 울어다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