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부아가 치미는데 어떻게 풀어낼 방법은 없고 부글부글 속을 끓이느라 잠도 잘 못자고 스트레스가 극심해 이러다 내가 쓰러지겠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다 젖혀두고 동네 산을 오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정적'인 행동으로는 쉽게 풀리거나 해소될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뭔가 와장창 부셔버리거나 '파괴적'인 짓을 하고 싶은 심정?
비 그친 마당을 내려다보다 옳다구나 공구함에서 톱을 꺼내고 전정가위를 챙겨 빨간 목장갑을 끼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풀벌레와 모기가 달려들 것을 대비해 작업복으론 긴팔 티에 긴바지도 입었다. 티셔츠 목부분이 좀 많이 파여서 스카프도 매야하나 싶었으나 그럼 너무 더울 것 같았다. 그래, 혹시 달려드는 벌레와 모기는 휘휘 쫓으면 되겠지.
그러고는 느닷없이 마당에 주책없이 가지를 뻗고 마구 자라난 사철나무와 앵두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땅이 얼마 없어선지 앵두는 해걸이와 상관없이 별로 열매가 잘 안맺히는 것도 같고 맛도 별로 없어졌다. 게다가 문제는 바로 사철나무! 조경수로 키우는 사철나무는 늘 다듬어줬어야하는데 몇년 전에 계단 쪽으로 뻗은 가지 하나만 대충 잘라내곤 방치했더니 키도 너무 크고 가지도 사방으로 쓸데없이 많이 뻗어서는 봄부터 쉴새없이 '더러운' 이파리와 꽃과 솔잎 같은 얇은 가지들을 미친듯이 떨궜다. 마당을 엄마가 거의 매일 쓰시는 데도 엉망진창, 사철나무 가지가 절반 이상 차고 위로 드리워져 자동차도 엉망진창 계속 거지꼴이었다.
사철나무는 가지가 대체로 무른 편이고 오히려 앵두나무가 얇아도 가지가 단단해 톱질이 어렵다는 건 이미 몇년 전 가지치기로 터특한 상황. 장마비까지 잔뜩 맞았으니 더 잘 잘릴 것이라고 판단했고, 내 예상이 적중했다. 키 작은 앵두나무는 마당으로, 차고로 늘어진 가지들을 가차없이잘라버렸고, 사철나무는 무조건 손 닿는 부분의 가지들을 하나하나 톱질로 잘라 나갔다.
톱이라고 해봐야 톱날 길이가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휴대용 접이식 톱. 하지만 사철나무가 워낙 무른 편이라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톱질을 하면 굵은 가지도 잘려나간다. 지름 2, 3센티미터 정도 가지 쯤이야 껌이지, 으아아아 괴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잘라버렸고, 위치가 교묘해서 난간 위에 올라가도, 큰 화분 위에 올라가도 애매한 두툼한 가지까지 자르는 데 성공. 그러나 ㅠ.ㅠ 잘린 가지가 차고로 떨어지는 걸 대충 붙들어 빈 공간으로 조준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던 나의 오만은 생각보다 무거운 가지가 차체 부딪치면서 움푹 파이는 결과를 낳았다. 아 젠장.
열 받은 김에 더 굵은 가지도 모두 잘라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아예 차고에서 차를 빼 치웠다. 그러고는 또 다시 미친듯이 까치발을 들고서 쓱싹쓱싹 톱질... 또 다시 괴력을 발휘해서 지름이 7, 8센티미터는 될 듯한 굵은 가지까지 잘라내고 말았다. 굵은 가지는 워낙 무거워서 3분의 2쯤 자르면 부러져버렸다. 그러면 남은 부분만 대충 잘라내는 식. 부러지는 가지에 다치지 않도록 잘 피하는 게 관건인데 워낙 무성해서 별 탈 없이 엄청난 가지들을 차고로 떨어뜨렸다. 꽃 떨어지는 거 더러워서 미워하던 무궁화나무도 뿌리부터 다 썪었는지 올해는 잎이 나질 않고 있었는데, 사철나무 가지 떨어지면서 무궁화나무도 기둥이 중간쯤에서 같이 부러져 나동그라졌다. 아싸.
마음 같아선 사철나무를 아예 없애버리고 싶지만, 기둥이 꽤나 튼실해 양손아귀로도 다 안 잡힐 만큼 굵어진 터라 그러려면 전기톱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걸 어디서 구하나. 구한다 해도 함부로 쓸 자신도 없고... 고소공포증만 없다면 차고 난간 담장 위로 올라가서 더 많은 사철나무 가지를 자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사다리도 세 칸 이상은 못 올라가는 몸이니 원..
산책 나가셨던 엄마는 대체 혼자서 무슨 짓이냐 깜짝 놀라면서도 마당이 다 훤해졌다고 좋아라... 문제는 잘라낸 엄청난 가지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 불법쓰레기 투기가 되겠으나 할 수 없지, 잘 들어올릴 수도 없이 무겁고 내 키보다 큰 거대한 가지들을 질질질 끌고 골목 어귀로 나가서 난간 너머 아카시아 나무 숲에 내던졌다. 낑낑낑.. 온 몸이 땀으로 다 젖었다. 하지만 스스로 나의 괴력이 계속 놀라울 뿐! 계단과 차고를 꽉 채운 무성한 나뭇가지 더미를 옮기느라 낑낑대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옆집 아저씨가 나와서 나뭇가지 버리는 걸 도와주셨다. 옷 버리니깐 그냥 두시라고 해도, 혼자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도 묵묵히 도와주심. ㅠ.ㅠ
결국 잘라낸 나뭇가지를 다 내다 버리고 마당과 차고를 쓸어 깨끗이 치우고, 나뭇가지 하나와 함께 장렬히 떨어져 전사한 빈 화분의 잔해도 다 해결한 뒤, 진흙더미에서 뒹군 것처럼 더럽혀진 옷을 벗고 씻었다. 달려드는 벌레를 대충 쫓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더워서 소매를 잠시 걷었던 패착으로 손목 언저리에 한 방, 목덜미와 턱 밑에 각각 한방. 세 군데를 물렸다. 저녁까지도 사지가 멀쩡하길래 우와 체력이 진짜 엄청 좋아졌구나 생각했더니.... ㅋㅋ 아드레날린이 이제야 소진되었는지 삭신이 쑤시기 시작한다. 손아귀와 어깨 아픈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목은 왜 아프지? ㅎ 이를 악물었나? 그럼 턱이 아파야 정상인데... 아.. 계속 고개 처들고서 높은 가지 톱질해서 그런가?
자학이 따로 없구나 싶은 몸쓰기 경험이었지만, 파괴적인 에너지로 대단히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으니 됐다. 마당은 훤해졌고, 사철나무 썩은 잎과 꽃으로 자동차 더러워지는 일도 좀 줄 테고 모기도 덜 꼬이겠지. 그걸로 됐다. 힘쓰는 사이 잠깐 분노의 이유를 잊었으니 됐다. 삭신이 쑤셔 킥킥 웃음이 나는 순간이라도 애초에 톱질을 왜 시작했었는지 그 이유를 잊을 수 있으니 됐다.
비바람 속에 첫날을 보내느라 제풀에 지친 모녀는 전날 밤 일본 말도 모르면서 TV를 틀어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 일기예보를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일본열도 아래쪽은 죄다 우산 그림이었다. 6시부터 울린 모닝콜에 눈을 떠 커튼을 젖혀보니 당연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 아침 먹기 전 온천욕 한판의 욕심은 내리는 비와 함께 꼬리를 감추었다. 비오는 날 뽀송뽀송하고 푹신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마저 풍겨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4월 12일. 또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은 9시였으므로 우리는 최대한 뭉기적거리며 아침시간을 잠으로 축내다 드디어 아침을 먹으러 로비 식당으로 향했다. 둘쨋날의 첫번째 식사는 부페식. 전날 가이드가 나누어준 식권을 내자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 종업원이 빈 접시와 나무 젓가락이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놓고 한바퀴 휘 둘러보니, 대부분은 일본식 밑반찬과 각종 생선구이류가 대다수였고 식당에 드글드글한 료칸 숙박객도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내가 먹을 수 있겠구나 싶은 건 약간의 샐러드와 토마토, 빵, 오렌지 주스, 우유 정도. 원래 아침을 안 먹는 인간이지만 강행군 여행을 떠났을 땐 반드시 잘 챙겨먹는 것이 원칙인데, 아침부터 맥이 빠졌다. 그나마 왕비마마는 먹을만 하다며 하얀 밥 한공기에, 샐러드, 생선구이, 미소시루 한 그릇으로 요기를 했다. 쓴 커피까지 대충 먹고난 나는 방에 올라가서 슈크림이 든 빵으로 배를 채웠고...
숙소를 한군데 정해두고 돌아다니는 여행이 더 좋지만 아쉽게도 이번은 명탕 <순례>라 료칸을 하루씩만 묵어야 했으므로 얼른 짐을 꾸려 내려간 나는 왕비마마를 로비에 앉혀놓고 재빨리 료칸 주변을 살폈다. 대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온천 마을에서 그냥 목욕 한 번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ㅠ.ㅠ 역시 패키지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다.
료칸 앞은 바로 개울이었고 개울을 따라 나무판자가 깔린 산책로 같은 게 조성되어 있었다. 종일 비가 내려 물이 많아진 것인지 찰랑찰랑 흘러가는 개울이 위험해 보이는 듯도 했는데, 못내려가게 하는 표지판도 없는 걸 보면 수심이 깊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나 군데군데 피어있는 벚꽃은 죄다 떨어져 아쉬움을 더했다. 휘날리는 벚꽃 비 대신에 진짜 비를 맞아야 하는 여행이라니 우쒸!
기모노에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료칸 앞 다리까지 나와 양쪽에 줄지어 서서 떠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찾아간 우리의 첫 행선지는 시마네현 마쓰에 시에 있는 마쓰에 성. 우리나라로 치면 행주산성쯤 되려나? 벚나무가 8천그루나 있어서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 드는 곳이라던데 뭥미 싶을 정도로 벚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이런 엄청난 장수목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일본말을 모르니 무슨 나무인줄은 모르겠고 수령이 350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쩐지 뿌리 드러난 모습이랑 생김새가 토토로 같은 데서 많이 봤음직하지 않은가?
이런 나무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 꽤 많이 내리는데도 공원 곳곳에서 위아래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쉼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환경미화원들은 비가 와도 서울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공원이나 고궁에선 비오면 아무도 일 안하던데... 주로 갈쿠리 같은 걸로 자잘한 돌이 깔린 성 마당을 고르게 다듬는 사람들이었는데, 계속해서 관람객이 드나들어 발자국이 찍히는 걸 어쩔 수가 없을 텐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갈쿠리질을 해댔다. 우리가 지나가서 또 발자국을 만드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비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원수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대부분 할머니이거나 할아버지였다. 다들 날씬하고 자세가 꼿꼿해서 언뜻 보아서는 노인임을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로 일본에서 지내는 사흘동안 울 엄마처럼 뚱뚱한 할머니는 단 한명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비마마는 더욱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그들과 비교되어 걸음도 잘 못걷는 뚱뚱한 노인이 무슨 관광이랍시고 일본을 휘젓고 다니느냐고... 휠체어를 타고서도 구경 다니는 일본 노인들과 맞닥뜨린 적도 있으므로 그들을 가리키며 용기를 북돋아드리려 해보았지만, 그들은 일본 사람이니까 괜찮단다. ㅜㅜ
왕비마마 특별출연 ^
암튼 마쓰에성 천수각은 이렇게 생겼고 5, 6층 높이인 제일 꼭대기까지 가려면 저 가운데 검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어두고, 맨발로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왕비마마는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라는 경고에, 입구 들어가자 마자 놓여 있는 관리인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한국 같았으면 절대 안올라가봤을지 모를 성 꼭대기에 엄마를 대신해 오르기 시작했다.
왕비마마의 눈빛은 당신도 올라가보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과장 안하고 경사가 6, 70도쯤 되는 나무 계단들은 확실히 노인들에게 무리였고, 층마다 무사들의 갑옷이며 투구, 옛날 지도, 무기류, 우물이 전시되어 있는 걸 보는둥마는둥 뛰다시피 가파른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층층이 올라가 증명용 사진을 찍었다.
왕비마마에게 사진으로라도 보여드려야하니까... 멀리 보이는 건 신지코 호수라는 것도 같고.. 어쨌든 마쓰에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기는 하더라. 사진에 보이는 저 분홍자줏빛 나무들이 벚나무라는 얘긴데, 8천그루는 다들 어디에 숨은 건지 사방팔방 둘러봐도 잘 안보이기에 내심 벚꽃이 만개했을 때도 별볼일 없었겠구라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ㅋ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마쓰에성 바로 옆에 자리잡은 사무라이들의 고택. 해자로 둘러싸인 성안에는 오로지 성주와 식솔들만 살고, 무사들은 성밖에 따로 집을 마련해 살았단다. 암살당할까봐 그랬겠지 뭐. 사무라이들의 집을 복원한 건지 보존해 놓은 집들은 딱 남산 한옥마을이 떠올랐다. 소박하게 기와를 얹고 나무로 지은 집들이며 우물, 부엌에 놓인 그릇, 대청마루 다다미방 한 가운데 앉혀놓은 사무라이 마네킹까지! ㅎㅎ
수수한 집들은 뭐 그리 예쁘다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굵은 모래인지 자잘한 자갈인지 암튼 신발에 닿는 감촉이 좋은 정갈한 마당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구석구석 쏘다니는 대신 툇마루 비슷한 데 앉아 쉬고 있다가 문득 발견한 것은 나무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마리! 크기가 엄청 컸다. 집에서 쌈채소 씻다가 작은 민달팽이를 더러 발견한 적은 있어도 실제 집 매달고 기어가는 달팽이를 목격한 건 최소한 20년은 넘은 것 같아 더 반가웠다.
일본 달팽이!
무사의 집에서 나오면 길 건너편에 바로 강물 같은 해자가 흐르는데, 우리도 저 배를 타고 해자를 한바퀴 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총 몇개라던가, 그런 설명은 당연히 까먹었는데 암튼 저 배(저래 뵈도 이름은 호리카와 유람선!)를 타고 나즈막한 나무다리를 지나려면 위에 씌운 지붕이 내려와 더욱 납작해지고 안에 탄 승객들은 잔뜩 고개와 상체를 수그려야 한다. 추울 땐 코다츠도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드디어 코다츠를 경험해보는가 기뻐했더니만, 그래도 봄이랍시고 코다츠는 없고 이불만 놓여있었다.
사실 이날은 전날만큼 비바람도 심하지 않고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서 나는 크게 추운 걸 몰랐지만, 왕비마마는 50분간 배를 타는 사이 춥다고 덜덜 떨으셨다. 이불이라도 있으니 어찌나 다행인지!
뱃사공 할머니, 허락받고 사진찍었다. 막판엔 노래도 불러주심^^
이불 뒤집어쓴 왕비마마 또 출현
한국 관광객이 꽤 많이 오는지, 뱃사공 할머니는 지붕이 내려오면 숙이는 연습을 처음에 한두번 시키더니 이내 한국말 안내방송을 틀어주었다. 물가에 서 있는 집들을 보노라니 가보지도 않은 베네치아가 잠깐 떠올라 이 무슨 엉뚱한 비약인가 싶기도 했는데, 아주 낮은 다리를 지나는 동안 네다섯 번 정도 지붕이 내려와 다 함께 찌그러져야 하는 경험이 예상외로 꽤나 재미있었다.
배타고 지나다 보니 좀 전에 가본 사무라이 저택 앞으로 빨간 버스도 지나가고...
저 멀리 천수각도 올려다보이고....
다리마다 난간 조각도 달라서 아주 짧은 다리도 있고 아래쪽은 콘크리트로 된 다리도 있는데, 주로 사람들만 건너다닐 수 있는 좁은 다리들이 훨씬 예쁘더라.
유람선을 끝으로 오전일정은 끝이 났으니 기다리던 점심시간. 시마네현 특선음식인 이즈모 소바정식에다 신지코 호수에서 잡힌 빙어 튀김도 나온다고 해서 살짝 기대를 했는데... 했는데...
메밀 소바는 한 젓가락씩 작은 찬합에 세 단이나 들어 있으되 한국에서 먹는 메밀국수처럼 갈은 무와 파를 듬뿍 넣은 국물에 푹 담가 먹는 게 아니고 그냥 작은 주전자에 든 국물을 살짝 부어 <비벼> 먹어야 하는 수준이다. 국물이 워낙 짜서... 거기다 밥 한그릇이 나왔는데 그냥 쌀밥이면 좋겠구만 버섯과 재첩(역시나 신지코 호수 특산물이란다)을 넣어 간장으로 간을 해 지은 거무스름한 밥이었다. 근데 왜 밥맛이 비리냐고!? 빙어튀김은 새끼손가락 만한 거 딱 두 조각. 그나마도 차갑고...
해서 우리 일행은 다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얼른 아래로 내려가 핫바 같은 걸로 빈 속을 채웠다. 핫바 값은 한국이랑 비슷하게 200엔. 대신 크기는 훨씬 작더라. ㅠ.ㅠ
다음 행선지는 아다치 미술관. 미술작품보다는 정원으로 더 유명한 곳이란다. 일본식 정원의 최고봉이라나 뭐라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었고.. ㅋㅋ 그래도 정원이며 마당 예쁜 건 좋아라 하니 기대했는데, 나가볼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아래 사진은 다 거대한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찍은 거다. 미술관의 자랑인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미술관 1, 2층을 돌아다니며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저런 정원 사진을 매번 찍고보니, 죄다 비슷해보였다. 정원마다 이름도 다 다르더구만...
경치 좋은 산자락 아래 같은 데를 일부러 배경으로 골라서 이렇게 인공미 넘치는 정원수로 꾸미는 게 일본식 정원 가운데서도 무슨 형식이라고 하던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글동글 깎아놓은 정원수를 보노라니 나는 어디선가 텔레토비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슬몃 웃음도 났고, 공원묘지에 가면 수없이 볼 수 있는 봉분 생각도 떠올라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렇게 숨막히는 정교함으로 꾸며놓고 사람 발길 못닿게 한 채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조금 흐트러졌더라도 들어가서 거닐고 숨쉬고 어루만지는 쪽이 나는 더 좋단 말이지...
주로 일본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는 미술관은 그야말로 <왜색> 짙은 그림과 글씨 투성이라 건성으로 지나다녔다. 얼마 전 동화 원화 전시회에서 본 제비랑 아기
그림이 눈에 띄여서 반갑긴 했어도, 마음에 든 작품은 딱 이거 하나였음. 아저씨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 나도 듣고 싶다고 불현듯 생각...
둘쨋날 여정의 마지막은 역시나 인공미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하나카이로 정원. 나는 식물원 같은데 별로 안 좋아하지만, 흐드러진 꽃구경은 왕비마마가 특히 좋아하시는 거라 상품 검색하면서 은근 기대했고, 역시나 전 일정 가운데 왕비마마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며 흡족해했던 듯하다. 워낙 넓은 곳이고 시간도 촉박해 산책 대신 코끼리열차 비슷하게 생긴 빨간 기차를 타고 한바퀴 휘휘 돌아본 것도 다리를 쉬기에 좋았고.
계절마다 다양한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는데, 봄이라 주로 보이는 건 튜울립과 히야신스였고, 동산 가득 양귀비가 피어나는 중이기도 했다. 입구부터 꽃향기가 진동하여 눈과 코가 잠시 즐거웠음.
이 정도 튤립이야 에버랜드에도 있지 않나..
돔안으로 들어가면 어지러울 정도의 양란 천국
돔에서 사방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난 꽃보다 이런 조형물이 더 좋다
관광을 모두 마치고 료칸으로 가기 전에 일본의 이마트라는 자스코에 잠시 들르기는 했다. 혹시나 예쁜 장화가 있으면 사오려는 욕심을 품고 갔으므로 확인해보았지만, 지방 소도시 마트에 예쁜 장화가 있을리 없잖아! 해서 슈퍼에 들러 그날 저녁 목을 축일 캔맥주 세 개랑 찝찔한 과자부스러기만 사가지고 나와 버스에서 마냥 일행을 기다렸다.
둘쨋날 간 온천 이름은 카이케 온천이고 일왕이 묵었다고 해서 유명하다는 료칸은 토고엔이었다. 일본 전역에 체인망을 갖고 있는 호시노야 리조트 계열의 료칸이라더라. 전날 묵은 료칸처럼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안내하는 곳이 아니라 현대식 호텔처럼 검정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여전한 친절함으로 우릴 맞이했다. 여행 일정을 계속 바꾸고 조정하느라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합류한 탓인지,전날 방배정에서 하필 제일 먼 끝방에 묵느라 왕비마마가 고생하셨기 때문에 미리 가이드에게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방을 부탁하였더니, 료칸에선 다른 일행과 달리 우리만 1층에 방을 내주었다. 그것도 지하에 있는 온천과 2층 식당으로 갈 수 있는 별관 엘리베이터 바로 옆방으로. 그 정도 배려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는데, 짐을 풀자마자 다시 저녁을 먹으러 올라간 식당에서 우린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가이드는 다리가 불편한 분이 있다는 말로 방 배정에 편의를 부탁한 것뿐인데, 식당에 가보니 울 엄마 자리에만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음식을 차려놓은 것이 아닌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 게 불편하긴 해도 남들이 다 올려다보는 높은 자리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에 왕비마마는 난색을 표하며 민망함에 밥도 제대로 못드셨지만 (그래서 고맙지만 담날 아침 식사는 그냥 남들과 똑같이 밥상에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로선 료칸 측의 배려가 정말 인상 깊었다.
오른쪽에 살짝 비치는 테이블 다리가 왕비마마의 개인 식탁이다
료칸의 규모도 훨씬 크고 웅장한 데다 울 엄마에 대한 배려로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인지 카이세키 요리도 전날보다는 입에 맞는 편이었다. 전날엔 식당에 내려가니 이미 티라이트에 불을 붙여놓아 스키야키와 스테이크가 제멋대로 익어가고 있었지만, 여기선 일일이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에야 불을 붙여주었고, 찹쌀떡이 이상한 국물에 담겨있는 걸 비롯해 밥과 미소시루 이외에도 여기 보이지 않는 코스가 서너 가지 더 나왔다. 물론 오른쪽 위에 있는 소바는 점심에 먹은 소바를 떠올리게 했고, 회접시에 있는 가운데 생선은 방어로 짐작되는데 역시나 비렸다. 그나마 오징어(한치일수도..) 회와 나머지 회는 악착같이 다 먹어주었다. 저기 맨위 왼쪽 뚜껑 덮여 있는
이름하여, 딸기 치즈 무스
스끼야끼 국물이 맛있어서 밥 한공기를 다 먹을 수 있었음. 게다가 마지막에 나온 디저트가 흡족하다보니 전체적으로 꽤 괜찮은 식사를 한 느낌이 들더군. ^^
다시 방에 올라가 배가 좀 꺼지기를 기다리던 모녀는 아마도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거의 6층이나 되던 마쓰에성 천수각 사다리를 무슨 경주하는 사람처럼 뛰어오르고 내려온 탓에 나도 다리가 욱신거렸고, 여행오기 사나흘 전부터 홍제천변 산책길에서 사전준비를 하긴 했지만 역시나 운동 총량으로 볼 때 무리를 한 셈인 왕비마마도 녹초가 된 터였다.
하지만 뜨거운 몸을 담가 피로를 풀 수 있을 거라며 모녀는 묵직한 몸을 이끌고 다시 온천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온천 료칸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유카타 기념촬영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얼른 왕비마마를 앉혀놓고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피로에 지쳤는지 이미 엄니 표정은 별로 좋지않다.
처음 방으로 안내 받을 때 방에 준비되어 있는 유카타는 두벌 다 s 사이즈라면서, m사이즈를 친히 가져다준 직원의 친절도 왕비마마에겐 민망함이었다. 아 왜 일본 사람들은 그리도 날씬한 거냐고! 쳇...
전날 묵은 마츠노유 료칸 온천은 딱 우리나라 목욕탕 분위기가 강했는데, 그 이유는 대중탕에서 흔히 보는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와 플라스틱 대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토고엔 료칸 온천에는 옻칠한 나무 의자와 나무로된 대야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ㅎㅎㅎ
온천탕엔 당연히 디카를 가져가지 않았으므로 그 생김새를 보여줄 순 없지만, 우리방 욕실에 놓여있던 나무 의자와 대야로 느낌이나마 전하려고 찍어왔다. 둘다 진한 옻칠을 해서 빤질빤질한 느낌을 살리고, 의자 높이를 두배로 높이면 딱 온천탕에 놓여 있던 의자와 대야다. 한국 일식집에 가보니 저런 나무통에다 밥을 섞어서 요리를 만들어주던데.... 설마... 그들이 용도를 헷갈린 게 아니라 저런 나무 용기가 일본에서도 다방면으로 쓰이는 것이겠지?
온천탕엔 8시반쯤 내려갔는데 우리 일행들은 벌써 다 온천욕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고 월요일 밤이라 그런지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어서, 온천은 그야말로 왕비마마와 나의 독탕이었다. 2천엔 쯤 내면 별도로 가족탕을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2천엔 번 셈이다. 온천 료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벌써?) 또 언제 와보겠나 싶은 나는 왕비마마를 살살 꼬드겨 노천탕에도 나가보자고 설득했다. 전날밤보다는 확실히 덜 춥기도 하고, 낯선 데 홀로 있는 걸 겁내는 왕비마마를 두고 혼자 나갈 수도 없으니 어쩌겠나. 다행히도 왕비마마는 엉거주춤 나를 따라 노천탕으로 나가주셨고, 일부는 빨간색 뾰족 지붕을 덮어 물이 식는 것을 막았지만 가장자리에선 소나무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진기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별빛이라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새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선 소나무 아래로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로 땀을 식히며 즐기는 노천탕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전날 료칸은 온천 운영시간이 자정이면 끝났지만, 이곳은 24시간 운영이라고 했다. 1시반 부터 2시반 사이에청소를 하고, 새벽 청소가 끝나면 남탕과 여탕이 서로 바뀐단다. 양기와 음기를 섞기 위함이라는 얘기를 진즉에 들었는데 진짜로 그런 료칸 온천엘 왔구나 싶었다. 모녀는 또 다시 새벽에 탕이 바뀐 뒤 한번 더 온천을 하고 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염원을 다지며 방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방에 돌아온 우릴 반겨준 건 푹신한 이부자리. 심지어 들어가기 쉽게 이불도 저렇게 젖혀놨더라. ㅎㅎㅎ
몸은 젖은 솜 같았지만 마지막 밤을 좀 더 불태워(?)야 한다는 생각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캔맥주(산토리, 기린, 예츠비)를 꺼내 왕비마마는 한모금만 따라드리고 혼자서 기분을 냈다. 온천 내려갈 때 싸가지고 가서 노천탕에서 마실 걸, 하는 뒤늦은 회한이 들었지만 다 쓸모없는 짓... '다음번(과연?)엔 기필코!' 라고 생각하며 겨우 캔 하나에 얼굴이 벌게져가지고 잠을 청했다.
지금으로부터 딱 5년전인 2005년, 내가 사는 동네에도 재개발 광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년 간 줄곧 재개발 얘기는 있었지만 그저 오며가며 도는 풍문일 뿐이었는데, 2005년도엔 제대로 업자가 나서서 주민회의를 개최하고 계획안을 집집마다 돌리더니 주민동의서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 동네 재개발 계획안은 그야말로 화려번쩍했다. 오래된 다가구 주택 십여채를 허는 수준이 아니라 3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메이저 건설사를 끌어들이겠다나. 그땐 30년 넘은 헌집에서 탈피해 새집에서도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고, 재개발을 해서 아파트를 받으면 이 낡은 집을 끼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이익이라는 논리가 당연한 줄 알았다. 물론 우리집 같은 다가구 주택은 지분이 작아서 큰평수를 받으려면 최소한 1억쯤 돈을 더 부담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지금 사는 집이 두 집을 터놓은 거라 지분이 두 개니까 분담금 대신 한쪽은 내놓으면 된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기야 그때도 재테크나 부동산에 밝은 이들은 펄쩍 뛰었다. 왜 지분 하나를 내놓느냐고, 두개 다 분양 받아서 나중에 팔면 돈이 얼만데 정신 나간 소리 한다고. 어쨌거나 우린 그냥 흐흐 웃고는 일단 재개발이 되봐야 아는 거라면서, 융자가 어떻고 중도금이 어떻고 하는 조언에 귀를 닫았다.
재개발에 대한 주민동의율이 80% 넘겼다는 축하 플래카드가 동네 여기저기 나붙은 뒤 한 1, 2년은 정말이지 금세 뭔 일이라도 벌어져 당장 집 비워주고 이사를 가야하는 건 아닌가 불안할 정도였지만,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동네 재개발은 잠잠하기만 하다. 20층을 넘기는 고층 아파트를 지어야 업자들에게 남는 장사인데 구청 앞이라 15층까지밖에 허가가 나질 않아 메이저 건설사는 관심을 잃었다는 풍문이었고, 3천세대 규모라고 떵떵 큰소리치던 단지 규모도 형편없이 축소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재개발이 얼마나 빛좋은 개살구인지, 어디든 원주민의 입주율이 30%도 안되며 제집 갖고 편히 살던 사람들이 재개발로 쫓겨나 세입자로 전전하는 문제가 연일 신문방송에 오르내렸다. 집주인들도 대거 떨려나는 마당이니 전월세로 살던 사람들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갑자기 한꺼번에 집들을 다 부숴버리는 바람에 아예 들어가 살 집이 없어 전셋값이 폭등해 난리라고들 했다. 그러다 용산 재개발 현장에선 믿기 어려운 참극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내 머리에도 재개발은 부자들을 위한 부동산 잔치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갔고, 5년전 재개발에 찬성 도장을 찍어준 사실이 부끄러웠다. 내가 사는 이 집은 지은지 30년이 넘었어도 목욕탕이 좀 추울 뿐 금간 데도 없고 새는 데도 없는데, 아파트는 30년 넘으면 골조가 위험수준으로 망가져 다시 지어야 한대고 심지어 새로 지어 분양받은 아파트에 물이 줄줄 새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왜 꼭 아파트가 이 나라의 평균 주거공간으로 어딜 가나 흉물스럽게 군집을 이루어야 하는지! 이미 온 나라에 지은 아파트를 가구 수대로 나눠주면 더 짓지 않아도 된다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며칠 전 지네들 마음대로 <재개발 추진위원회>를 만든 사람들이 (그나마도 파가 갈렸는지 비공인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2군데나 된다 ㅋㅋ) 우편물을 보내왔다. 일부 주민들이 구청에 제출한 <재개발 철회 청원>에 대하여 결사 대항하겠다는 취지의 편지였다. 괜스레 흐뭇해서 웃음이 나왔다. 조합 결성도 요원하고 이 추세로는 한 10년 또 말로만 재개발 운운할 판국으로 보였는데, 반대하는 이들도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니 정말로 재개발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사실 왕비마마의 계단 사고 이후 얼른 계단 없는 집으로 이사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잠시 집을 내놓았을 때, 재개발을 노리고 집값을 후려쳐 장사를 하려는 부동산 업자들 대신 진짜로 우리 집에 살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집을 보러 왔었다면 나도 큰 거부감 없이 집을 팔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이웃집을 샀다가 몇달만에 시세차익을 보고 집을 되판 부동산 업자가 득달같이 쫓아와서 집값을 후려치며 흥정을 붙이는데, 나는 정나미가 똑 떨어졌고 낯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집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죽도록 싫어 얼마 안 가 집 안 판다고 선언하고야 말았다.
지금도 이재에 밝은 지인들은 재개발 추진이 극에 달했을 때, 즉 이 동네 집값이 최고로 올랐을 때 팔았어야 했다고 내 옆구리를 쥐어박는다. ㅠㅠ 하지만 멍청한 내 셈으로는 어차피 그 땐 다른 동네 집값도 비쌌으니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라 그 말이 잘 이해되질 않는다. 서울지역 부동산이야 늘 비슷하게 오르내리지 않나? 어차피 내가 돈놀이 하듯 부동산으로 재테크를 하는 인간이 아닌 바에야 이 집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듯 어딜 가든 또 집 한채 깔고 앉아 마냥 살아야 할 텐데... (돈 벌려고 몇년에 한번 이사 다니는 거 상상도 하기 싫다.)
아무려나 그래서 나는 재개발이고 나발이고 신경 안쓰기로 했다는 얘기다. 계단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의 이사 문제도 만날 이랬다 저랬다 마음이 바뀌지만, 점점 거동이 힘들어지고 있는 왕비마마의 노구를 생각하면 언제고 이사를 안할 순 없으니 미칠 노릇이긴 하다. 계단 걱정도 없고 앞으로 또 재개발 광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으면서 낡은 이 집에서 부채 없이 옮겨갈 수 있는 두 모녀의 보금자리는 과연 어딜지 아무리 둔한 머리를 두들겨도 묘안이 나오질 않는다. 나의 로망인 <안 춥게 개조한 아담한 한옥집>에서 <마당>도 누리며 살려면 로또에 당첨되거나, 한 20만부쯤 인세 대박이 나는 수밖에 없고... (둘 다 허황한 꿈인 걸 안다!)
ㅋㅋ 그나마 당장 재개발로 살 집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걸 감사해야 한다고 위로하는 의미로 쓰기 시작한 글이 결국엔 제욕심 차리겠단 결론으로 맺어지누만. 암튼 집값도 안오르는 동네에 눌러앉아 멍청하게 30년 가까이 사느라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못 만들고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지 못한 우리 부모님을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고, 나 또한 어린 마음에 그런 부모님을 못마땅히 여겼는데 막상 그런 결정을 내려야할 입장이 되고보니 핏줄 때문인지 똑같이 망설이고만 있다. 집장만 고민 같은 거 안하고 그냥 붙박이로 100년씩 한 군데서 살 수는 없을까나. 으휴.
늘 궁금했다. 미술관 전시회의 마지막 날엔 평소보다 관람객이 많을까, 적을까?
대부분 마지막날은 주말이므로 당연히 사람이 많을 것도 같지만, 또 대대적인 홍보가 뒷받침되지 않은 전시라면 오히려 한적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마지막 날이라고 개인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처럼 폐관시간 되기도 전에 오후쯤 그림을 회수해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였다.
단 한번의 경험으로 함부로 단정지을 순 없겠으나, 어쨌든 어제 나는 미술관 전시회의 마지막날이 꽤나 번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는 최근에 내가 보고 감동했던 두 개의 전시회, <한국근대미술걸작전>과 <퐁피두센터 특별전>이 공교롭게 나란히 끝나는 날이었다. 서점에서 찾아볼 책도 있고 하여 겸사겸사 시내 외출을 준비하며 나는 며칠째 이어온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 전시 모두 한번 더 보고싶은 욕심이 들기는 했지만, 퐁피두센터 그림들이야 언제고 파리에 가서 볼 수 있을지 몰라도(재수없게 하필 그 시기에 다른 나라에 빌려주지만 않는다면;;) 유족소장품들이며 개인소장품이 많은 한국 근대미술 걸작들을 이렇게 대거 볼 수 있는 기회는 내 생전 다시 없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설 땐 그림을 먼저 보고 나서 서점에 들러 책과 자료를 찾아보겠다는 계획이었으나, 버스를 타고 시청앞을 지나며 보니 덕수궁 대한문 앞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수문장 교대식 시간이라 구경꾼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뜻밖이었던 건 대한문 앞부터 줄지어 선 사람들이 담장을 따라 거의 영국대사관 입구까지 늘어서 있다는 점이었다. 궁궐 입장객을 제한하기 때문인지 단순히 매표소에서 표를 사기 위한 줄인지 확인할 순 없어도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몇명씩 문안으로 들어서는 듯했다. 나는 계획을 바꾸어 먼저 서점으로 가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볼일을 죄다 본 뒤 6시가 다 돼서야 덕수궁으로 돌아왔고, 기다림 없이 천원짜리 표를 사 대한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지난번엔 비가 내렸고 카메라를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똑딱이일지언정 부러 마음을 먹고 디카를 들고갔던 터라 여기저기 몇장 눌러대곤 석조전부터 먼저 들렀다. 또 언제 석조전에 들어가볼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조바심이 첫번째 이유이기도 했지만, 현대미술관 측에서야 그곳을 동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일지 몰라도 본래는 고종이 신식 건물로 세운 석조전이 먼저이고 미술관은 나중에 들어선 것이니 미술관 서관 동관으로 칭하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건축양식 대로 서양인이 설계한 건물이라 외국엘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이지만, 우리 궁궐 마당에 자리잡은 석조전은 느낌이 또 새롭고 주변 건물과 안어울리는 것 같으면서 은근히 어울려 멋진 자태를 자랑한다. 건물한테도 그런 말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 건 나뿐이련가.
나중에 국립현대미술관엘 가면 또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언제 봐도 눈이 즐거운 장욱진의 그림들을 유심히 감상하고, 다시 못볼 확률이 높은 개인소장품들을 남달리 찾아본 뒤 나는 미술관 본관으로 향했다.
뜻밖의 놀라움은 계속 이어졌다. 보통은 맨 마지막에 아트숍에 들러 도록이나 엽서나 기념품을 사는데, 어젠 이상스레 아트숍부터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술관 폐관시간보다 아트숍 문닫는 시간이 더 빠르면 어쩌나 걱정이 들면서.
그러고는 드디어 첫 전시실에 들어섰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에 전시를 함께 본 후배였다. J야! 반갑게 부르니, 마지막 날이라 어떻게든 그림들을 한번 더 보려고 서둘러 동생과 함께 달려나왔단다. 어떻게 그런 우연이...
나야 혼자 갔지만 후배는 일행이 있으니 감상 잘하라며 금세 헤어졌지만, 우린 도슨트의 설명이 시작되자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다시 그앞에서 다시 합류했다. 주말엔 아예 도슨트 설명이 없는 서울 시립미술관과 달리, 역시 국립이 다른 건지 덕수궁 미술관은 주말에도 전시설명이 있었다! 그걸 모르긴 했지만 알았대도 지난번에 이미 도슨트의 설명을 들었기에 이번엔 홀로 그림만 감상할 생각이었는데, 도슨트가 처음 설명을 시작하는 그림이 우리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전시의 마지막 설명을 맡은 도슨트는 지난번 우리가 구경왔을 때와 같은 사람이었다. 덕수궁 미술관을 자주 가면 다른 전시에서 과거에 만난 도슨트를 보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특히 그 도슨트는 지난번 비오는 날 전시 설명때도 비가 와서 석조전엘 가지 못했는데도 정해진 1시간을 넘기고도 해줄 말이 계속 남아 마이크를 끄고 살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들려주어, 역사상 최고의 도슨트라는 생각에 이름이라도 알아두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중에 결국 우리는 팬클럽이라도 결성해야겠다면서 <이애선 도슨트>라는 그분의 이름을 동료들에게 알아냈고, 이왕이면 과천이나 덕수궁 미술관에서 또 그 분의 설명으로 전시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
전시를 자주 다녀보면 매 설명 때마다 녹음기를 틀듯 똑같은 그림 설명을 반복하는 도슨트가 있는가 하면, 그날의 느낌에 따라서인지 아니면 반복해서 찾아오는 관객들을 위한 배려인지 그때그때 다른 설명을 하는 도슨트가 있다. 같은 전시를 두세번씩 다니다 보면 그런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좋은 도슨트를 만나는 것도 그저 운이려니 여기곤 했지만, 역사적인 전시 마지막날 그곳도 마지막 전시설명에 그런 놀라운 도슨트를 또 만나다니. 복터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래도 열정적인 설명을 하는 분이었지만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진 때문인지, 그 도슨트는 마치 학교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에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훌륭한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이었다. 학교가 진정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와 행정 기관으로 전락해버린 요즘엔 도저히 만날 수 없으며, 예전에도 지극히 드물었던 존경스러운 선생님이 떠올랐달까.
다시는 못볼지 모른다는 아쉬움을 잔뜩 담아 또 다시 미술관을 둘러보며 새삼 여러 근대 화가들의 인생과 배경을 들으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교육을 담당하러 온 일본인 미술 교사들은 놀랍게도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명 서양화가의 사사를 직접 받았거나 대학에서 그런 스승들의 화풍을 배우고 일본내 수상경력도 화려한 진짜 화가들이었다. 그런 화가들이 일개 식민지 보통학교에 미술선생으로 부임하여 요즘 따지면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도 화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 정말로 화가를 만들어내다니... +_+
물론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기에 능력이 발굴되긴 했겠지만,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이 되도록 붓 잡는 법도 몰랐던 조선 아이들에게 일본인 교사가 정규 미술 수업 시간에 그림을 가르쳐 3, 4년 안에 조선미술전람회에 뽑히는 화가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워낙 일본인들 가운데 미를 추구하여 보존하고 감탄하고 존경하는 성품을 갖춘 이들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그래서 수많은 우리나라 고미술품이 일본에 팔려갔겠지만;;) 어쨌거나 식민지인 식민국민의 구분을 떠나 스승과 제자로 예술가로 관계를 맺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로선 계속 신기하고 놀랍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친일파로 손가락질 받다가, 해방후엔 좌파였다가 결국 월북하기도 하여 좀체로 이해하기 힘든 정치행적을 보이기도 한 근대화가들의 존재까지 알게 된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다. 고흐, 마티스, 샤갈 타령은 수시로 하면서 정작 우리나라 화가들은 그저 뭉뚱그려 생각했던 나의 태도도 반성할 겸, 근대미술사 책도 좀 읽어봐야겠고 <바람의 화원>으로 살짝 불붙었다 식어버린 옛날 그림들에 대한 관심도 지펴볼 작정이다.
왼쪽 사진은 대한문으로 들어서서 조금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미술전 포스터.
장욱진 선생의 엽서보다 작은 <자화상> 그림이 어두운 조명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속상했는데 크게 확대되어 있어 기뻐하며 찍었다.
오른쪽은 미술관 왼편에 걸려 있는 박수근의 <아기업은 소녀> 걸개그림. 개인소장품이라 과연 또 만날 수 있으려나 아쉬워서...
석조전에 들어가면 한쪽 벽에 서동진 선생의 <뒷골목> 그림을 재현해 놓았다. 가로등 부분에 맞춰 진짜 조명도 만들어놓은 기획자들의 센스가 귀엽다. 사람들이 죄다 거기서 기념촬영을 하던데 나는 2층 로비에서 찍어보았음. 오른쪽 남자가 마치 그림에서 걸어나오는 것 같아 혼자 뿌듯하다.
오른쪽 사진은, 아마도 고종이 현대식으로 꾸민 카페와 실내를 거닐었겠지 생각하니 로비 난간도, 창살도 예사롭지가 않더라.
예전에 울 엄마가 근무하던 검찰청 법원 건물을 개조했다는 서울시립미술관도 좋지만 나는 덕수궁 미술관에서 나와 눈앞에 펼쳐지는 분수대랑 뒤쪽의 중화전 풍경이 참 좋다. 원래 궁궐에선 먹을 것을 반입하는 게 안된다지만 유독 덕수궁은 직장인들이 평일 점심에 도시락 사들고 소풍하듯 먹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그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나도 볕 좋고 꽃 좋은 봄날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매번 갈 때마다 든다. ㅠ.ㅠ
그래도 궁궐에 사진기 들고 갔으니 궁궐 전각도 하나 찍어야겠다 싶어서 찍은 중화전. 유별나게 두드러진 도심 속 궁궐이다보니 창덕궁이나 경복궁 전각들보다 이 중화전은 훨씬 외로워보이는 듯.
몇그루 되지도 않는 나무이건만 2년간 방치했더니 작년 여름 집앞 꼴이 완전 밀림스러웠다.
집이 나무로 가려져 골목어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 나('진짜' 마당 있는 집을 꿈꾸는 자)로선 괜히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키큰 나무가 서로 맞닿아 하늘을 가린 건 멋져보일지 몰라도 입구에 선 작은 사철나무와 라일락이 서로 가지를 이어 놓은 건 흉가 느낌이 났고, 작년에 앵두가 열렸을 때 보니 가엾게도 너무 길게 자란 가지가 무거워 비가 올 땐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쳐졌다. 게다가 나뭇가지가 무성하면 여름에 모기들이 어찌나 많이 꼬이는지! 더욱이 내가 제일 꼴보기 싫어하는 무궁화 나무는 엄청나게 가지를 뻗고 자라, 여름 내내 세차도 잘 안하는 내 차에 더럽게 뭉쳐 떨어지는 꽃뭉치를 퍽퍽 뿌려댔다. 원래도 무궁화꽃 예쁜 줄 모르겠고, 벌레꼬이기 대장인데다 심지어 차위에 떨어져 누렇게 썪는 꽃뭉치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무궁화나무는 예전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확 베어버리시라고 요구했던 나무다.
해서 올해는 봄되면 꼭 가지치기를 해야지 마음먹고, 가지치기의 적당한 시기도 인터넷으로 검색해놓았었다.
가장 중요한 앵두나무의 경우는 2월말에서 3월초에 꽃눈 나기 전에 하는 거라고.
2월말엔 워낙 노느라 바빴기 때문에 3월초에 하지 뭐,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일주일을 다 보낸 어제 며칠을 별러 잡은 날이었기에 전정가위와 톱을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우리집 앵두나무는 심한 편은 아니지만 약간은 해걸이를 한다. 한해씩 번갈아가면서 앵두가 많이 열리고 덜 열린다는 얘기다. 재작년 앵두철은 워낙 경황이 없었던 터라 기억나질 않는데, 작년엔 가지치기도 하지 않았는데 앵두가 정말로 많이 열렸다. 그나마도 다 따먹기 전에 엄마의 입원으로 다 말려버렸지만 말이다.
과실나무들이 다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무학(?)을 전공한 막내동생에 따르면 원래 초봄에 가지치기를 해줘야 열매가 많이 맺힌단다. 어차피 열매는 나무들이 후세를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라, 가지치기를 하면 자기가 죽는 줄 알고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얘기. 그걸 노리고 가지를 잘라버리는 인간들의 심보가 끔찍하긴 하지만 아무렇게나 뻗어 길어진 가지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내가 가지치기의 요령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니니, 막상 나무 앞에 서긴 했어도 막막했다.
작년에 읽은 책의 구절을 염두에 두긴 했었다.
가지치기를 할 때 절대로 무턱대고 가지를 잘라선 안된다. 우선 부러지거나 죽은 가지를 먼저 잘라낸 다음 웃자란 가지를 잘라주는데, 이때는 반드시 눈의 위치를 파악하고 눈 바로 위를 눈의 반대방향이 되도록 사선으로 잘라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빗물이 눈속으로 들어가 얼거나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오경아, <소박한 정원> 121쪽)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언제나 난감할 만큼 거리감이 있다. 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어느 눈의 방향을 확인하란 말인지? 가지가 단단해서 전정가위로 잘 잘리지도 않는데 사선인지 직선인지 신경쓸 겨를이 어디 있나? 톱으로 우툴두툴 자르는 건 절대 안된단 말씀?
젠장. 내 마음대로 손길 닿는대로 <무턱대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작년 초여름에 심하게 늘어졌던 기억이 있는 앵두나무의 긴가지들을 우선적으로 잘라내며 보니 아뿔싸, 이미 꽃눈이 다 돋아났더라. 분홍색 기운이 완연해 보이는 꽃눈이 다닥다닥 달린 가지들을 마구 잘라내며 올해는 앵두를 맛보기 글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앵두나무는 생각보다 꽤나 단단했다. 새끼손가락 굵기도 안되는 가지들도 가위로는 잘 잘리지 않았다. 전정가위를 두손으로 잡고 힘주어 잘라도 잘 안 잘릴 정도로 단단했는데, 상대적으로 무궁화와 사철나무는 꽤나 무르더군. 앵두나무는 가는 가지에 톱질을 해도 잘 안잘라지던데, 무궁화와 사철나무는 난생 처음 해보는 가지치기 톱질임에도 슥삭슥삭 굵은 가지가 잘려나갔다.
생각 같아선 무궁화 가지들을 더 많이 쳐내고 싶었는데 신장의 열세로 손닿는 부분만 자르고 보니 나란히 서서 서로 가지를 얽고 있는 세 그루 나무들의 전체적인 꼬락서니는 꽤나 우스웠다. 그런데도 전정가위와 톱을 들고 나와 망설임없이 쓱쓱 가지를 쳐내는 내 모습이 대단히 전문적으로 보였는지 이웃분들이 나와 한마디씩 거들면서 신기해 했다. -_-a
물론 높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전체적인 나무의 모양새를 잡는 일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사다리가 집에 있기야 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나무 가꾸기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고, 금세 힘도 딸렸다. 이번엔 그저 지저분하게 뻗은 가지들을 시원하게 이발시켜 준 것에만 만족하기로 했다. 초보 나무이발사의 솜씨로 헤어디자이너 같은 스타일을 기대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어쨌거나 좁아터진 마당 한구석이 조금은 훤해져 속이 시원했다.
다만 그것도 일이라고 톱질에 힘쓴 어깨와 가위를 잡았던 오른손아귀가 오늘까지 꽤나 아프다.
아무렇게나 톱질과 가위질을 해놓은 만신창이 앵두나무에서 과연 올해는 수확을 얼마나 보려나, 그것이 궁금하다.
그리고 어제의 교훈: 마당 있는 집에서 예쁜 정원 감상하며 살려면 우선 집을 살 돈도 많이 벌어 놓아야겠지만 꾸준히 정원 가꾸는 인력을 고용할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 정원 가꾸는 솜씨가 있는 사람을 데리고 살거나. -_-
원없이 한옥을 구경하고 너른 마당을 거닐고 싶다면 뭐니뭐니해도 궁궐 나들이가 최고다.
덤으로 단풍구경에 낙엽길 산책까지 욕심을 낸다면 가을에 창덕궁을 찾으면 된다.
걷는 걸 즐기지 않는데도 이상스레 나는 궁궐 나들이가 좋다.
이젠 문화재 보호를 위해 도시락 까먹고 돌아다니는 소풍이나 사생대회가 금지됐다지만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거의 주말마다 경복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고
어른이 된 뒤엔 계절에 따라 눈부시게 변하는 창덕궁과 후원 구경 다니는 것이 낙이었다.
일제때 훼손된 건물들을 복원하느라 창덕궁엘 가보면 늘 한구석은 공사중이었고
궁궐 관련 책을 보면 제대로 다시 짓지 않아 어느 문은 길과 틀어졌고 복원되어 깔린 어느 박석은 기계로 다듬어 인공미를 펄펄 풍긴다고 개탄을 해놓았지만, 그래도 나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인정전이며, 대조전, 이름 까먹은 건물들을 이어놓은 회랑과 난간이 아름다운 복도를 이리저리 구경다니는 게 왜 그리 뿌듯하고 좋았는지.
궁궐 마당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그윽하게 차오르는 것이 흐뭇하고 뿌듯해져 아무래도 전생에 궁궐에 사는 공주였나보다고 내가 중얼거리면, 일행들은 "공주가 아니라 궁녀였겠지!"라고 퉁박을 주기 일쑤지만 암튼 나는 창덕궁에 갈 때마다 후원이 우리집 뒤뜰이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꾼다.
연두색 여린 잎과 꽃잔치가 벌어지는 봄도 예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도 아름답지만
새하얀 눈세상이 된 호젓한 궁궐 흙길에 발자국을 찍으며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겨울 창덕궁도 까무라치게 멋지다.
암튼 작년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창덕궁에 가고 싶어서 궁궐 단풍놀이 가자고 지인들을 꼬드겨 지난 화요일에 다녀왔다.
대장금 (아직도!) 영향으로 일본관광객이 많다는 얘긴 들은 것 같은데, 요샌 나 말고도 궁궐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평일 오후인데도 한번에 들어가는 입장객이 엄청났다. 여나믄 명이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 들을 때나 오붓하고 좋지, 백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려니 설명 듣는 건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고 사진을 찍는 것도 전각 구경도 마음에 찰 만큼 기회가 없었다.
추억이 미화되는 경향을 감안한다 해도 올해 창덕궁 후원의 단풍은 정말 보잘것 없었고(가물어서 전국적으로 올해 단풍이 예쁘질 않다더니, 물도 들기 전에 잎이 반이상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1년 넘게 발길을 끊은 사이 전각들의 기와를 대거 새로이 얹고 단청 또한 죄다 새로 칠해놓는 바람에 너무 새것 같아 나에겐 마냥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왕족들이 사는 것처럼 갈고 닦는다면야 좋긴 하겠지만, 인정전 내부에 걸린 왜식 전등이며 커튼은 새카맣게 때가 찌들었는데 바깥 단청만 화려하게 새로 칠하면 뭣하나. 그렇다고 단청이 죄다 벗겨진 초라한 모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모름지기 궁궐이란 수백년 세월의 무게를 적당히 간직한 모습이어야 격에 맞는 것 같다.
계속된 복원과 보호 때문인지 창덕궁은 갈 때마다 관람코스가 조금씩 달라진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최근에 복원한 낙선재를 매번 보여주더니, 치사하게 낙선재는 특별관람 코스로 나뉘었고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도 특별관람으로나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예약으로 날을 잡아야 하는 특별관람은 이미 인원이 다 차고 없어 우린 결국 3천원짜리 일반관람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2년만에 찾는 창덕궁은 그래도 좋았다.
나는 궁궐에서도 화려한 단청보다 문의 꽃무늬 살대, 기와지붕 옆면의 세모난 공간('합각'이라고 한다)의 장식이며 난간 같은 게 참 좋다. 구석구석 어쩜 저렇게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깃들여놓았는지...
애련지와 애련정
몇해전 가을엔 3초마다 탄성이 나올만큼 아름다웠던 후원의 단풍은 애련지 주변에서나 조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연못 근처라 나무에 물이 올랐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확실하진 않다.
고운 가을단풍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후원은 그저 숲만으로도 아름답고 거기 어우러진 정자와 전각들은 보기만해도 뿌듯하다.
창덕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바로 후원 안에 자리잡은 부용지 주변이다.
부용지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부용정도 아름답지만, 그와 마주보며 언덕에 서있는 주합루는 어쩜 그리도 우아하면서 위풍당당한지. 원래 2층으로 지은 한옥은 1층을 '각', 2층을 '누'라고 부르기 때문에 주합루는 엄밀히 2층만을 부르는 이름이다. 1층은 정조가 세운 그 유명한 '규장각'인데, 올라가볼 순 없었지만 위쪽은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적당히 낡고 풍파를 이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부용지를 굽어보며 서있는 주합루
단아한 부용정
옥류천과 낙선재를 보지 못해 어쩐지 아쉬웠던 우리는 창덕궁을 나서 안국동으로 걷다가 내친김에 운현궁에도 들렀다. 다채로운 단청이 없어도 한옥이 그 자체로 얼마나 우아하고 당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건물들을 실컷 구경하려니 반나절 내리 걸었어도 다리아픈 줄을 모르겠더라.
운현궁 같은 한옥에 사는 건 몇번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겠지만, 아무려나 이런 한옥에 산다면 매일매일 열심히 산책하며 마음을 닦을 수 있을 것만 같다. ㅠ.ㅠ
운현궁의 드넓은 마당에 둘러쳐진 저 아름다운 담장을 보라! +_+
짧은 궁궐 나들이가 아쉬워서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같이 또 오자고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조만간 자유관람이 가능하다는 목요일에 날을 잡아서 마음껏 창덕궁 후원을 쏘다녀 봐야겠다는 생각이 사진을 올리면서 더욱 강해진다.
이왕이면 궁궐지킴이 같은 걸로 후원자도 되고 자원봉사를 해서 전각 안에 들어가는 영광도 누리고 싶지만, 워낙 청소하는 걸 싫어하니 매번 망설이다 포기하게 된다. 아쉬운 대로 철철이 궁궐 나들이나 하는 수밖에.
양머리의 실체를 공개하자면...
이렇다. ㅋㅋ
실로 부용정의 단아한 모습과 어울리는 공주의 자태라고 우기고 싶지만...
왕족이라기엔 너무 좋아라 헤벌쭉 웃고 있다.
콘크리트 계단 옆에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크기의 마당에서 자라는 앵두나무엔 올해도 어김없이 하얀 꽃이 피더니 다닥다닥 열매가 달렸다가 어느 틈에 앞다투어 빠알갛게 익어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색이 진해지는 앵두를 보며 곧 따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그저께 저녁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건너 동네에 집을 새로 짓는 동안 잠시 아래층으로 이사를 와 작년부터 살고 계신 젊고 착한 목사님이었다. 마당에 있는 앵두가 익어서 좀 땄는데 아무래도 올해의 첫 수확인 듯하여 제일 어르신이신 울 엄마부터 드리려고 가져왔단다. 괜찮다고 아이들이랑 그냥 드시라고, 우리는 나중에 따먹으면 된다고 아무리 마다해도 막무가내라 하는 수 없이 두손을 바가지처럼 오므려 앵두를 받아들고 올라와 제법 맛이 든 앵두를 엄마랑 둘이 맛있게 음미했다.
앵두가 일단 익기 시작하면 한 열흘은 계속해서 심심찮게 따먹을 수가 있는데, 어제 일기예보를 들으니 비가 온다고 하여 괜스레 낭패감이 들었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앵두가 비를 맞고 다 떨어지거나 맛이 싱거워지면 어떻게 하나 공연한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밤새 천둥 번개가 치고 굵은 빗줄기가 지붕과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앵두는 과연 무사할까 염려하다 비가 그치자 마자 내다보니 모든 게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듯 다닥다닥 붙은 앵두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다만 초봄에 가지치기를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냥 방치했던 터라 정신없이 사방으로 뻗어난 가지들이 비를 맞고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축 바닥으로 늘어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앵두나무 뿐만 아니라 잎이 돋기 전에 지저분한 무궁화와 사철나무도 가지치기를 해주었어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전정가위를 들고 나가 빗방울이 무겁게 맺힌 쳐진 가지들 중에서 앵두가 달리지 않은 것들로만 일단 잘라주니 순전히 내 상상뿐이겠지만 앵두나무가 무거운 짐을 좀 내려놓은 듯 가뿐해 보이는 듯도 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과,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려면 계절마다 부지런히 품을 들여 마당을 가꾸거나 돈을 써서 정원 가꾸는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늘 내게 별개로 다가온다. 그래서 겨우 나무 세 그루 있는 한 뼘짜리 마당도 돌보지 않는 주제에 과연 내가 어떻게 넓은 마당 있는 집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 같은 순간에나 내 뒤통수를 친다. 물론 작년까진 화분 물주기와 더불어 귀찮은 가지치기 따위는 당연히 아버지의 임무였고, 앞으로 내가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더라도 그 마당에 있는 나무와 식물을 가꾸는 일손 또한 당연히 아버지 몫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엄마와 나는 아직도 매 순간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는 듯 살다가 문득 허망한 상실감에 멍해진다.
어쨌거나 올해도 변함없이 앵두가 익었듯, 올해도 변함없이 조카들이 오면 재잘재잘 떠들며 함께 앵두를 따서 나누어 먹게 될 것이다. 살다보면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음을 새삼 실감하며 빗물 젖은 앵두가 예뻐서 전정가위를 내려놓고 카메라를 들고 내려갔다. 빨간 앵두들이 이슬을 머금은 빨간 보석처럼 어찌나 예쁜지 모른다. *_*
정민공주를 위한 영어수업에서 이번주엔 장소를 묻는 의문문과 함께 집의 구조를 다루었는데 그러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그림엔 외국의 흔한 주택 구조에 따라 자는 방, 화장실, 거실, 부엌, 마당 따위가 그려져 있었는데 공주는 2층에 주로 밀집된 방으로 연결되는 2층의 작은 복도 같은 공간을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거다. 그림 속의 엄마는 바로 그곳에 서서 아이들에게 "너 어딨니?"라고 묻고 있었는데!
언젠가 놀러갔던 펜션과 호텔 복도를 예로 들어 구조를 설명하려 애쓰긴 했지만 (공주는 영어공부와 상관없이 또 궁금한 건 절대로 못참는다 -_-'')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나! 주변에 이층집에 사는 측근이 단 한명도 없고 내 어린시절과 달리 공주는 이층집엘 놀러가서 그 재미있고 독특한 구조를 속속들이 경험해 본 적이 전무했다! 아 물론 우리 친척들이 주로 서민적인 탓도 있겠지만 과거엔 마당 넓은 2층집에 살던 이들도 이젠 아파트나 빌라로 사는 곳을 옮겼거나 그 땅에 건물을 올려 층층마다 임대료를 챙기는 건물주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1층엔 주방과 넓은 거실, 식당 방 따위가 있고 침실은 죄다 2층으로 몰아놓은 서양식 2층집과는 구조가 좀 다르지만, 어린 시절 나의 로망이기도 했던 이층집엘 놀러가면 우선 가장 눈길을 끄는 계단과 2층 베란다, 철제 그네가 놓여있기 십상인 잔디 깔린 마당을 이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대대로 이어진 넉넉한 부유함을 상징하는 평창동이나 성북동 정도에 가면 또 모를까... 아 맞다, 신도시의 단독주택 단지나 새로 뜨기 시작한다는 타운하우스를 찾으면 되긴 하겠군.
어쨌든 우리 동네에 꽤 많았던 예쁜 2층 양옥집들은 지금 죄다 빌라나 다가구주택으로 바뀌었고 초록 잔디밭이 예뻤던 공간은 자동 개폐식 차고문이 달린 주차장으로 탈바꿈했다. 땅덩어리가 워낙 좁고 집이 필요한 사람들의 수는 늘어나기 때문이겠지만, 부동산 문제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는 문득 옛날이 그리워졌다. 물론 나는 마당 넓은 2층집엘 살아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친척집이든 친구네 집이든 푸르른 잔디밭과 정원을 갖춘 2층집엘 드나들며 노는 게 정말로 좋았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오르면 눈앞에 새로운 놀이터라도 펼쳐진 것 같았고, 금상첨화로 다락방까지 있는 집이라면 매캐한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하루종일이라도 그곳에서 놀 수 있었다.
아... 그런데 공주는 그나마 전원주택인 고모할머니나 작은 할아버지댁의 옥상 올라가는 계단 이상의 구조는 상상하기 힘들어 했던 거다. 내가 하도 마당 있는 집 타령을 해대며 아파트 혐오증을 읊어댄 탓에 공주도 아파트 보다 마당 있는 주택이 훨씬 좋은 줄 알고 있었는데, 오늘 그림 속 이층집의 방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뇌며 영어단어를 익히던 공주는 우리도 방 8개짜리 이층집을 지어서 할머니랑 고모랑 같이 살면 좋겠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을 했다.
흠... 그런데 나는 선뜻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야 나도 마당 있는 2층집에 사는 것이 로망이었지만 현재의 로망은 흙냄새 맡으며 기와 얹은 한옥에 사는 것이라 말로라도 '그러자!'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층 한옥이라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경복궁 경회루밖에 없는 것을 어쩌랴. -_-;;
하지만 이 밤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정민공주네가 옛날 느낌의 예쁜 2층 양옥집에 살게 되어 혹시 나를 청한다면 주책바가지 이 고모도 다락방 한귀퉁이에서 계속 무수리로 살아줄 용의는 있을 것 같다. ^^ 아담한 한옥은 까짓거 작업실로 꾸미면 되지!
돈 안드는 상상이라고 아주 마음껏 날개를 펼치는 중이다. 현실에선 아... 그저 돈이 웬수로다.
마음에 깊이 남은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포도원과 텃밭 가꾸기로 다스렸다는 어느 저자의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그 책 옮긴이의 말에도 썼지만 그 책을 작업하는 사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어떤 위로의 말로도 섣불리 위로가 되지 않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자연 속의 명상으로 달래는 지은이의 시도에 나도 크게 공감할 수 있었기에 그 책은 (표지와 장정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지금까지도 꽤나 애착이 간다. 물론 나야 집안에 들인 작은 화분조차 죽여버리기 일쑤지만 대지와 초록 식물들의 생명력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자연의 순환고리와 섭리도 어쩐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어젠 서울 근교에서 텃밭을 일구며 사시는 외삼촌 댁엘 다녀왔다. 토마토며 오이, 가지가 너무 많이 열렸으니 바람 쏘일 겸 엄마 모시고 한 번 다녀가라는 외삼촌과 숙모의 당부에 못이기는 척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간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수분이 너무 많아진 탓에 바알갛게 익은 토마토는 가지에 매달린 채 쩍쩍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터져버린 크고 작은 토마토를 따다가 마당 수도에 씻어 그대로 입에 넣으면 토마토도 이렇게 달콤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20년째 농약이며 비료를 쓰지 않았다는 외삼촌의 텃밭에선 용케도 채소들이 튼실하게 자라나고 있었는데, 텃밭 가장자리의 감자 줄기를 잡아당겨 삽으로 땅을 파내니 알알이 열린 감자와 함께 드러난 지렁이들이 사방에서 꿈틀거리며 달아났다. 다른 벌레 같으면 나 역시 징그럽다고 소리지르며 달아났겠지만 지렁이는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착한 일꾼이란 걸 익히 들어온 때문인지 제법 빠르게 제 구멍을 찾아 들어가는 지렁이까지 감탄스러웠다. 다음주 정도면 토마토를 모두 뽑아버리고 무를 심어야 한단다. 아직도 초록색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토마토가 많던데 아까워서 어찌 뽑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농사란 것이 그렇게 다 때를 맞춰 심고 가꾸고 뽑아버리고 또 가꿔야 하는 게지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어제 바리바리 싸주신 토마토와 옥수수, 감자, 늙은 오이, 햇오이가 삐죽이 얼굴을 내민다. 어제는 조카들과 텃밭을 쏘다니며 잘 익은 토마토와 오이를 따고, 또 먹는 것으로 고문을 당하다시피 오후 내내 먹어대느라 마음과 몸이 풍요롭다못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는데 냉장고 그득한 텃밭의 선물을 보노라니 오늘까지도 마음의 풍요와 너그러움이 쉬 가시질 않는다.
그리고 생명의 신비가 넘치던 어제 그 텃밭의 밭고랑을 돌아다니며 맡은 흙냄새가 떠올라 또 다시 마당 넓은 집에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비록 잡초로 우거진 마당에 살게 되더라도 작은 텃밭 일구며 흙냄새 맡으며 살고프다. 그러면 내 뾰족함과 까칠함도 훨씬 뭉뚱그려져 선하게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요즘 한옥에 관한 책들이 부쩍 많이 나오고 있기도 하지만 한옥에 대한 나의 열망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경제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집을 하나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마당이 갖추어진 한옥을 선택할 것이다. 욕심을 부려도 된다면,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있는 안마당과 더불어 너른 뒷마당과 장독대도 있으면 좋겠고, 요즘 마당에선 잘 보기 드문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수국, 봉숭아를 옹기종기 심으련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도 없지만 나는 정말로 닭장 같은 아파트가 너무도 싫고, 땅에서 붕 뜬 상태로 내 머리를 누군가 밟고 쿵쿵대며 살아가는 공간에서 사는 건 비인간적인 것 같다. 내가 아파트엘 살아보지 않아 그 놀라운 편리함을 모르기 때문이라고들 비웃는 이도 있기는 하지만^^;; 제 아무리 널찍하게 떼어 지은 아파트라고 해도 어떻게든 건너편 동의 아래층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는 도무지 불편하다.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더더욱 싫다. 만약에 그걸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몇십억 씩 돈을 주무른다 해도 나는 이왕이면 성북동이나 평창동에 있는 공기 좋고 마당 넓은 집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거창하고 웅장한 저택보다는 (관리며 청소가 얼마나 힘들까! ;-p) 4, 50평정도의 땅에 소박하게 나무로 지은 한옥이 더 좋다. (난 역시 재테크의 ㅈ도 모르는 인간이지만 평생 그렇게 살거다 ㅋㅋㅋ)
남산 한옥마을에 떼거지로 옮겨다 놓은 한옥들을 보며 사랑채 툇마루의 난간 조각까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관대작들의 한옥도 좋았지만 중산층이나 상민들이 살던 서너 칸짜리 한옥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
어제 만난 친구 하나도 한옥에 살고파서 병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도심의 아파트 8층에 사는 그 친구는 창밖으로 창덕궁 숲이 보이긴 해도 언제부턴가 뭔가 근본적인 것이 부족함을 느끼며 숨이 막힌다고 했다. 흙을 밟고, 나무와 초록의 싱그러움을 들이마시고 싶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고즈녘하게 내다보며 앞마당에 심은 소박한 꽃들을 감상하고 싶다고 했다.
그나마 우리집은 다세대 2층이라 머리 위를 밟고 다니는 이들은 없고 (내가 밟고 사는 쪽;;) 콘크리트로 뒤덮인 좁은 마당 옆으로 손바닥만한 땅에서 앵두나무, 라일락, 무궁화, 사철나무 한 그루씩이 자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난 제대로 된 마당이 그립다.
삐그덕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노할머니가 툇마루 끝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우리를 기다렸던 외할머니댁의 한옥집은 나중에 양옥으로 거의 개조를 했어도,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랑채와 ㄴ자로 꺾인 본채가 네모난 마당을 이루고 있는 구조를 얼마 전까지도 그대로 유지했더랬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좁은 툇마루를 뛰어다니며 놀면, 떨어질까봐 질색을 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댓돌에 올라가 신을 벗고 툇마루로 올라가는 구조의 할머니댁이 놀이터처럼 재미있었다. 뒤뜰엔 시원한 우물도 있고, 예쁜 꽃들이 사시사철 피어나 숨바꼭질하기에도 그만이었는데 우리가 많이 커서 숨바꼭질 놀이에 시들해질 때쯤, 할머니댁의 뒷마당에도 4층짜리 건물을 올리고 층층이 세를 주게 됐던 것 같다.
워낙 이사를 많이 다녀 어렸을 적에 우리가 살던 집은 여러번 바뀌었지만 그 가운데 유독 기억이 남는 집은 대문 바로 앞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있어서 이웃에서도 미루나무집이라고 부르던 마당 넓은 집이었다. 거기선 꽤 여러해 살기도 했지만, 엄마가 마당에 동그랗게 화단을 가꾸고 여러가지 꽃도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잔치가 벌어졌고, 함께 심은 조롱박이 지붕위까지 덩굴을 타고 자라는 바람에 나는 내심 흥부네집 같다고 몹시 흐뭇해 하며 가을에 조롱박을 따서 삶고 말린 뒤엔 친구들에게 선심쓰듯 나누어주기도 했더랬다.
한옥에 대한 나의 열망은 이렇듯 마당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못 하나 쓰지 않고 절묘하게 나무를 짜맞춰 올리는 한옥 건축의 묘미를 어설프게나마 알게된 뒤론 더더욱 한옥에 살고싶어졌다.
새집을 짓고 나서도 시멘트와 각종 접착제에서 뿜어내는 유해물질 때문에 새집 증후군이란 걸 앓아야하는 양옥이나 아파트와 달리, 좋은 나무를 엮어 만든 한옥에선 새집때부터 나무 냄새가 나지 않겠나. 게다가 어렸을 때 가을마다 창호지를 새로 붙일 때면 봄부터 책사이에 넣어 말려 놓았던 꽃잎이며 단풍잎을 곱게 배열해 문과 창문 손잡이 근처를 장식했던 우리 엄마의 미적감각도 따라해 보고 싶다.
물론 이런 나의 열망은 현실적인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ㅋㅋ 북촌 한옥마을에 가끔 매물로 나오는 집을 사서 개조를 하려면 거의 어마어마한 액수의 비용이 들어간대고, 그나마도 요즘 한옥이 붐이라 좀처럼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데 내가 언감생심 언제나 한옥을 장만해보겠나;;
그치만... 어떻게든 몇칸 안되는 한옥이라도 지을 수 있을만한 작은 땅 몇평 장만할 수 있고 (문제는 내가 도시지향적인 인간이라 그 땅이 서울 인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ㅋㅋ) 거기에 한옥 짓는 대목들을 불러들여(아 물론, 개조라도 상관없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살아보리라.
어제 내내 친구랑 한옥 타령하다가 성북동에 있는 상허 이태준의 고택을 개조한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에 다녀오고 나니 더더욱 한옥병이 도졌다.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