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질

투덜일기 2015. 7. 30. 01:10

분노와 부아가 치미는데 어떻게 풀어낼 방법은 없고 부글부글 속을 끓이느라 잠도 잘 못자고 스트레스가 극심해 이러다 내가 쓰러지겠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다 젖혀두고 동네 산을 오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정적'인 행동으로는 쉽게 풀리거나 해소될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뭔가 와장창 부셔버리거나 '파괴적'인 짓을 하고 싶은 심정?


비 그친 마당을 내려다보다 옳다구나 공구함에서 톱을 꺼내고 전정가위를 챙겨 빨간 목장갑을 끼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풀벌레와 모기가 달려들 것을 대비해 작업복으론 긴팔 티에 긴바지도 입었다. 티셔츠 목부분이 좀 많이 파여서 스카프도 매야하나 싶었으나 그럼 너무 더울 것 같았다. 그래, 혹시 달려드는 벌레와 모기는 휘휘 쫓으면 되겠지. 


그러고는 느닷없이 마당에 주책없이 가지를 뻗고 마구 자라난 사철나무와 앵두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땅이 얼마 없어선지 앵두는 해걸이와 상관없이 별로 열매가 잘 안맺히는 것도 같고 맛도 별로 없어졌다. 게다가 문제는 바로 사철나무! 조경수로 키우는 사철나무는 늘 다듬어줬어야하는데 몇년 전에 계단 쪽으로 뻗은 가지 하나만 대충 잘라내곤 방치했더니 키도 너무 크고 가지도 사방으로 쓸데없이 많이 뻗어서는 봄부터 쉴새없이 '더러운' 이파리와 꽃과 솔잎 같은 얇은 가지들을 미친듯이 떨궜다. 마당을 엄마가 거의 매일 쓰시는 데도 엉망진창, 사철나무 가지가 절반 이상 차고 위로 드리워져 자동차도 엉망진창 계속 거지꼴이었다. 


사철나무는 가지가 대체로 무른 편이고 오히려 앵두나무가 얇아도 가지가 단단해 톱질이 어렵다는 건 이미 몇년 전 가지치기로 터특한 상황. 장마비까지 잔뜩 맞았으니 더 잘 잘릴 것이라고 판단했고, 내 예상이 적중했다. 키 작은 앵두나무는 마당으로, 차고로 늘어진 가지들을 가차없이 잘라버렸고, 사철나무는 무조건 손 닿는 부분의 가지들을 하나하나 톱질로 잘라 나갔다. 


톱이라고 해봐야 톱날 길이가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휴대용 접이식 톱. 하지만 사철나무가 워낙 무른 편이라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톱질을 하면 굵은 가지도 잘려나간다. 지름 2, 3센티미터 정도 가지 쯤이야 껌이지, 으아아아 괴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잘라버렸고, 위치가 교묘해서 난간 위에 올라가도, 큰 화분 위에 올라가도 애매한 두툼한 가지까지 자르는 데 성공. 그러나 ㅠ.ㅠ 잘린 가지가 차고로 떨어지는 걸 대충 붙들어 빈 공간으로 조준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던 나의 오만은 생각보다 무거운 가지가 차체 부딪치면서 움푹 파이는 결과를 낳았다. 아 젠장.


열 받은 김에 더 굵은 가지도 모두 잘라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아예 차고에서 차를 빼 치웠다. 그러고는 또 다시 미친듯이 까치발을 들고서 쓱싹쓱싹 톱질... 또 다시 괴력을 발휘해서 지름이 7, 8센티미터는 될 듯한 굵은 가지까지 잘라내고 말았다. 굵은 가지는 워낙 무거워서 3분의 2쯤 자르면 부러져버렸다. 그러면 남은 부분만 대충 잘라내는 식. 부러지는 가지에 다치지 않도록 잘 피하는 게 관건인데 워낙 무성해서 별 탈 없이 엄청난 가지들을 차고로 떨어뜨렸다. 꽃 떨어지는 거 더러워서 미워하던 무궁화나무도 뿌리부터 다 썪었는지 올해는 잎이 나질 않고 있었는데, 사철나무 가지 떨어지면서 무궁화나무도 기둥이 중간쯤에서 같이 부러져 나동그라졌다. 아싸.  


마음 같아선 사철나무를 아예 없애버리고 싶지만, 기둥이 꽤나 튼실해 양손아귀로도 다 안 잡힐 만큼 굵어진 터라 그러려면 전기톱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걸 어디서 구하나. 구한다 해도 함부로 쓸 자신도 없고... 고소공포증만 없다면 차고 난간 담장 위로 올라가서 더 많은 사철나무 가지를 자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사다리도 세 칸 이상은 못 올라가는 몸이니 원.. 


산책 나가셨던 엄마는 대체 혼자서 무슨 짓이냐 깜짝 놀라면서도 마당이 다 훤해졌다고 좋아라... 문제는 잘라낸 엄청난 가지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 불법쓰레기 투기가 되겠으나 할 수 없지, 잘 들어올릴 수도 없이 무겁고 내 키보다 큰 거대한 가지들을 질질질 끌고 골목 어귀로 나가서 난간 너머 아카시아 나무 숲에 내던졌다. 낑낑낑.. 온 몸이 땀으로 다 젖었다. 하지만 스스로 나의 괴력이 계속 놀라울 뿐! 계단과 차고를 꽉 채운 무성한 나뭇가지 더미를 옮기느라 낑낑대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옆집 아저씨가 나와서 나뭇가지 버리는 걸 도와주셨다. 옷 버리니깐 그냥 두시라고 해도, 혼자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도 묵묵히 도와주심. ㅠ.ㅠ 


결국 잘라낸 나뭇가지를 다 내다 버리고 마당과 차고를 쓸어 깨끗이 치우고, 나뭇가지 하나와 함께 장렬히 떨어져 전사한 빈 화분의 잔해도 다 해결한 뒤, 진흙더미에서 뒹군 것처럼 더럽혀진 옷을 벗고 씻었다. 달려드는 벌레를 대충 쫓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더워서 소매를 잠시 걷었던 패착으로 손목 언저리에 한 방, 목덜미와 턱 밑에 각각 한방. 세 군데를 물렸다. 저녁까지도 사지가 멀쩡하길래  우와 체력이 진짜 엄청 좋아졌구나 생각했더니.... ㅋㅋ 아드레날린이 이제야 소진되었는지 삭신이 쑤시기 시작한다. 손아귀와 어깨 아픈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목은 왜 아프지? ㅎ 이를 악물었나? 그럼 턱이 아파야 정상인데... 아.. 계속 고개 처들고서 높은 가지 톱질해서 그런가? 


자학이 따로 없구나 싶은 몸쓰기 경험이었지만, 파괴적인 에너지로 대단히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으니 됐다. 마당은 훤해졌고, 사철나무 썩은 잎과 꽃으로 자동차 더러워지는 일도 좀 줄 테고 모기도 덜 꼬이겠지. 그걸로 됐다. 힘쓰는 사이 잠깐 분노의 이유를 잊었으니 됐다. 삭신이 쑤셔 킥킥 웃음이 나는 순간이라도 애초에 톱질을 왜 시작했었는지 그 이유를 잊을 수 있으니 됐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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