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2.02.01 정년 16
  2. 2011.05.13 4
  3. 2010.06.15 어린 취향 11
  4. 2010.03.07 노년의 생일 19
  5. 2010.01.15 변화 8
  6. 2009.12.08 서글픈 고백 21
  7. 2009.09.15 늙음에 대하여 4
  8. 2009.02.02 십년 14

정년

삶꾸러미 2012. 2. 1. 03:00

며칠 뒤면 만난지 꼭 13년째 되는 이들을 주말에 만났을 때 어쩌다 나온 이야기인데, 나를 알기 이전에는 책을 읽을 때 한번도 번역자에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지금도 내가 번역한 책이나 돼야 옮긴이 이름을 눈여겨 볼 뿐, 다른 책은 여전히 무관심하다나. 그렇다면 나는 과거에 어쨌더라? 번역을 생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다음에야 당연히 번역의 질과 번역자가 최고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겠으나, 그 이전에는?

흔히들 가장 훌륭한 번역자는 투명인간이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번역서를 읽고 있으되 번역서를 읽고 있다는 의식이 들지 않을 만큼 문장이 매끄럽고 작품의 결을 살려, 지은이와 독자 사이에서 '번역'이라는 중간단계의 존재를 가능한 한 일깨우지 않아야한다는 뜻이다. 순수하게 책읽기를 즐기고 감동하였다면 그 찬사는 오로지 작가를 향한 것일뿐,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몰라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별 생각 없는 독자 시절에도 확실히 번역자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 옛날 세계문학전집류의 번역이야 다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간간이 손에 들어오는 단행본 번역서의 경우엔 중고등학생의 눈에도 느낌이 달랐다. 같은 루이제 린저의 책이라도 전혜린 번역은 감동스러운데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은 이게 뭔소린가 싶어 여러번 되돌아가며 읽어야했다. 고려원에서 출간되어 라디오에 광고까지 나오던 당대의 화제작들 가운데서도, 밤을 홀딱 새가며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책에서 묘사되는 상황과 인물이 그려지지 않는 책도 있어 짜증이 났다. 그런 부실한 책의 번역자는 부러 눈여겨봐두곤 했다. 나중에 피해 읽으려고. -_-; 특히 고려원의 단골 번역자 중에 영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십수년 뒤 내가 이 분야에 들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하생들에게 원고료 반값도 안주며 번역시키고 자기 이름으로 책 내는 걸로 유명한 분이었다. 아직까지도 현역에서 활동중이시던데 설마 여전히 그러지는 않으니까 출판사에서 계속 일감을 주는 것이기를 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특히 교수입네 하는 사람들이 번역한 책을 유독 못미더워했다. 웬만한 교수님들은 시간도 없고 논문 한편으로밖에 인정해주지 않는 번역에 힘쓸 이유가 없기에, 죄다 제자들한테 번역 시켜 원고정리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공책 같은 건 어떻게 번역본보다 차라리 원서가 더 쉬울 수가 있는지! @.,@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불신을 알면서도 묵묵히, 꾸준히 손수 번역에 힘쓰는 교수님들도 분명 존재한다. 본인이 아니고선 누가 하겠나 싶어 사명감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고, 고전의 경우엔 공신력 있는 번역을 원하는 출판사들이 교수진을 설득해 본인에겐 크게 득될 것도 없는 일감을 맡기는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종신교수직도 갖고 있으면서 번역도 잘하는 분들은 나에겐 워낙 넘사벽이라, 외국어를 두세개씩 전천후로 막 번역하는 다재다능 번역가들에게 품는 질투심 같은 것도 아예 생기질 않는다. 요번에 드디어 줄리언 반스를 읽어보겠다고 사둔 책들을 들춰보니 번역자가 모두 신재실 선생이다. 호흡도 그렇고 소설 내용도 박학다식하여, 쉽지 않았을 것 같은 번역 문장도 마음에 들어 어떤 분인가 슬쩍 약력을 살피니 1941년생이시란다. 그렇다면 울 엄마와 동갑! 올해로 일흔둘의 나이다. 초판이 나온 건 2005년이니까 그보다 몇 해 전에 작업했다고 해도, 60대 초중반에 번역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수 정년이 65세니까 어쩌면 투잡족의 시기에 번역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순전히 내 상상 시나리오에 그칠 수도 있다;;) 2011년 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최신작 <The Sense of an Ending>도 아마 같은 분이 지금 막 번역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파피, 블루고비, 새알밭님이 모두 원서로 읽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품이다;;), 나는 또 괜히 비감에 젖었다.

처음 생업이자 천직이라 여겨 이 길에 들어섰을 땐 정말 득의양양했다. 좋아하는 책 노상 끼고 볼 수 있고, 시간 자유롭고, '정년'도 없고 얼마나 좋은가!
.....

하지만 이 일로 10년을 넘기고 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년'이 없다는 게 그렇게 환상적인 업무조건은 아닐지 모른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딱 예순살까지만 일하고 은퇴해서 소박하지만 유유히 놀고 먹을 순 없을까. 길게 잡아도 예순다섯살까지만 일하고 싶은데!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면 주변에서 끌끌 혀를 차거나 한심해 했다. 늙어서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 얼마나 큰 특혜일 텐데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구나. 그 정도 벌이와 씀씀이로는 아마 너 평생 죽기 직전까지 일해야 할걸? 누가 그때까지 계속 일감을 주기는 한다냐? 

설상가상 요샌 평균수명이 '너무' 늘어 100살까지 산다고들 난리다. 노령화사회의 폐해가 어쩌고 저쩌고 겁을 줘가면서. 심지어 남들은 철밥통으로 알고 있는 종신교수직에 있는 지인도 65세에 정년퇴직하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 사학연금으로는 100살까지 살기 어렵다며 무언가 다른 방도를 내야한다고 엄살을 떤다. 으윽.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내가 '정년'과 '은퇴'에 관한 생각을 바꾸고 십수년전의 나로 돌아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희희낙락 열심히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다. 계속 신뢰를 쌓아 노년에도 계속 찾는 이가 있도록 깊은 내공을 쌓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별 내공도 쌓지 않은 채 올해로 '겨우' 번역 17년째 접어든 나는 자꾸 꾀가 나서, 뭔가 더 내게 잘 맞고 머리를 덜 쓰는 일은 없을까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고... ㅠ.ㅠ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는 좀 쉬라고 노인들에게 말해줄 복지사회 따윈 이 땅에 거의 불가능한 것 같은데 대체 어쩌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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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1. 5. 13. 21:28

끊임없이 창의력을 발휘해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직업을 지닌 동생은 얼마 전부터 전업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이 분야에선 감 떨어지면 생명 끝이야, 라는 그의 비장한 말을 들은 건 꽤 됐다. 20년 가까이 머리를 쥐어짜가며 버티고는 있지만 자꾸만 그 '감'이라는 게 떨어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타고난 재능이 워낙 화수분 같아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감 떨어질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확실히 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노래방엘 가서도 꼭 김동률, 넥스트 같은 노래를 선곡하며 젊은 감각을 유독 자랑하던 부장이 있었다. 다방면의 음악을 들었고 와인을 음미했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정장에 메신저백을 매고 다녔다. 그런데도 이십대였던 우리는 그 사람을 질색했다. 그가 어디선가 물어오는 썰렁한 유머라는 것도 하나같이 고리타분 전혀 웃기지 않았고, 우리들의 유머는 잘 못알아듣고 초를 쳤다. 그럼에도 부하직원들의 사적인 대화에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하는 행동이 밉상이었다. 우리는 애써 젊은 척하려는 그에게 '나잇값' 못한다고 흉을 봤다. 이제는 '나잇값'이라는 말을 치떨리게 싫어하건만, 그 땐 툭하면 쯧쯧 혀를 차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던 걸 보면 한심하게도 나는 조직내 왕언니라는 호칭 때문에 조로 상태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나잇값을 못했던 게 아니라 그냥 자기 나름의 취향을 고수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감이 떨어진 것 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감이 떨어진다는 건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도 서글픈 일이었다. '왕년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 지난 과거를 포장해 자꾸만 추억하는 사람을 보는 때만큼이나 서글펐다. 꼴같잖은 상사나 중노년의 어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던 게 벌써 까마득한 오래 전 일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렇게 감 떨어진다고 비웃던 사람들과 비슷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중년이 되었다고 해서 철이 더 들었다거나 현명해졌다거나 지식이 많아졌다거나 하는 변화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가끔씩 순간순간 스스로 감떨어지는 중늙은이가 됐다는 깨달음이 들어 허걱 하고 놀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늙는 건 마음먹기 달렸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의 나는 간혹 저도모르게 꼰대같은 소리나 툭툭 내뱉고 앉았고 빠릿빠릿한 센스도 한참 뒤떨어졌다. '아'하고 이야기했는데 '어'하고 알아듣는 사람만큼 답답한 게 없다고 노상 떠들어댔으면서 문득 내가 그러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도 원래 자의식에 빠져 움츠러들면 아무것도 아닌 말조차 오해하고 오독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내가 시방 그러는 것 같은 기미가 느껴진다. 서글프다. 가장 슬픈 건 슬쩍 나이탓을 하며 모자란 행동에 면죄부를 씌우려는 무의식적인 나의 태도다. 아니, 감이 떨어졌는지 아닌지 모를만큼 거침없고 무감하게 살 수 없게 된 작금의 상황이 참 슬프다. 

떨어지는 감을 세워올리려면 최첨단 안테나라도 구비해야하는걸까, 아니면 그냥 이렇게 그 옛날 내가 손가락질하며 외면하던 중년의 부장처럼 못나게 몸부림치다 사그라져야 하는 걸까. 비어버린 머리는 어떻게든 두들겨서 뭔가를 집어넣어본다지만, 고성능 최첨단 안테나는 구할 수나 있는 것인지 그걸 몰라 더욱 어깨가 처진다. 감 좀 떨어지면 어때, 하면서 뻔뻔하고 자연스레 수긍하며 살아갈 용기를 찾는 게 더 빠르고 옳은 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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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취향

투덜일기 2010. 6. 15. 17:50

최근 친구 하나가 '미드'에 빠져 연일 날밤을 새며 시즌을 하나씩 섭렵하고 있다며 내게도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촌스럽게도 기회가 되면 간혹 미드를 즐겨보기는 하지만 열성적인 다운로드족이 아닌 나는 그런 걸 추천해줄 입장이 못돼 민망했다.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그 옛날 <프렌즈>, <사인펠드>, <섹스앤더시티>, <ER>로 미드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지만, 그때도 난 다운로드족이 아니라 케이블로 찾아보는 편이거나 dvd를 장만하지 않으면 주변에 빌려봤다. 확실히 나는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아날로그형 낀세대라는 얘기다.

지금도 우연히 마주치면 넋을 놓고 시청하는 <CSI>, <그레이 아나토미>, <하우스>도 파일을 다운받아 본 적은 없으며 <위기의 주부들>은 누가 파일을 보내주겠다고 하는데도 별로 볼 마음이 안생겼다. 뭔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더욱이 TV시청 자세가 퍽이나 불량한 나는 드라마라고 하면 느긋하게 소파나 큰 쿠션에 거의 드러누워 편히 감상해야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는 기분으로 봐야하는게 영 마뜩찮다. 일드를 특히 즐겨보는 부지런한 친구 하나는 열심히 다운받아서 케이블로 TV에 연결해 소파에 드러누워 보기도 하지만, 내가 그 친구 집에 가서 같이 봐주는 건 모를까 내가 몸소 그런 수고를 하고 싶은 생각은 평생 들지 않을 거다.
 
미드 친구는 당연히 <위기의 주부들>의 열혈팬이었고 내가 이름만 대강 아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열변을 토했다. 부업을 하는 가정주부인 친구는 그날 마땅히 다운받아볼 게 없으면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를 여러번 돌려보며 두세번째 시청할 땐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 식기, 패션소품까지 눈여겨봐 참고한다고 했다. 목동사시는 시간 많은 여사님들 사이에선 그게 유행이란다. +_+

추천해줄만한 미드가 생각나지 않는다는데도 굳이 최근에 본 걸 떠올리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자신없게 말했다. "가십걸...? 그 전엔 <OC>라는 것도 봤다...."
친구는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나의 어린 취향이 걱정스럽다고(그녀의 표현은 '취향이 어려서 큰일'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그런 애들 나오는 드라마는 눈에 전혀 안들어온다나. 하기야 다들 <아이리스> 볼 때도 내가 혼자 <미남이시네요> 보면서 설레고 좋아라할 때부터 알아봤단다. 아이돌 가수 몇명을 눈여겨 보며 좋아라하는 것도 그렇고...

결혼과 학부모 역할을 인생의 커다란 '성취'이자 '성숙함'로로 여기며 '비혼'은 미완성 인생과 미숙함의  표상이라는 걸 은연중에 풍기는 주부 친구들이 "너는 참 취향이 어려서 큰일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어쩌면 자격지심 때문에) 발끈하게 된다. 그들의 말엔 종종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잘 보지도 않는 미국 드라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예쁜 학용품에 열광하고 실크블라우스보다 그림 그려진 티셔츠에 더 눈길이 가는 나의 태도를 어리다고 판단한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취향은 곧 개성이라는 게 내 생각이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는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취향을 가질 이유는 없다. 물론 처음부터 취향이 비슷해 급속도로 친해지는 사이도 있다. 그러나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취향이 다른 판국에 복제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취향이 판박이처럼 똑같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겠나. 하물며 어쩔 때는 본인의 취향 마저도 마음에 안드는 것을.

사실 나는 요즘 여러 분야에서 내 취향이 뭔지 선명하게 이야기할 자신조차 없다. 이것도 좋은 것 같고 저것도 좋은 것 같고, 좋아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의 괴리 속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이제껏 그게 내 모습이라고 그려놓은 형상이 순간순간 허물어지고 일그러지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갈팡질팡 우유부단하게 해매는 자신이 짜증스럽기도 하다. 취향에 대해 핀잔을 들으면 발끈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 같다. 나도 잘 모르는 취향을 누가 얼마나 안다고! 하기야 남의 눈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라 더욱 판단이 잘 서는 것일까? 그렇더라도 할 수 없다. 어리다고 놀리든 말든, 난 이렇게 살테닷.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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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생일

투덜일기 2010. 3. 7. 18:13
떠들썩한 환갑잔치를 내가 처음 목격한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수원에 살던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더니 난데없이 주말에 시간 되면 밥을 먹으러 오라며 수원의 어느 갈비집을 알려주었다. 터울이 많은 손위 형제들을 둔 막내였던 친구는 부모님이 옛날 분들이라 환갑엔 꼭 동네잔치를 한다고 했다. 내 조부모님의 경우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도 조촐하게 집에서 가족모임으로 치렀던 터라, 환갑잔치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그날 목도한 사건이 워낙 인상 깊었던 모양으로 같이 간 친구와 내가 축의금 봉투를 가져갔는지 그냥 입만 가져갔던 건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무슨무슨 가든이었던 수원의 갈비집엔 큼직한 방마다 온통 잔치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한 가운데 불판에선 갈비가 익어갔으며 마당으로 연결된 스피커에선 계속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왔다. 결혼한 큰오빠와 큰언니가 낳은 자식들이 친구와 또래일 정도였으므로 잔치상 앞에 앉으신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며 차례로 절을 하던 자손들의 수가 꽤나 많았던 기억이 나고, 식사 후 여흥이 시작되자 춤과 노래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잔치 주인공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자손의 친구들도 다들 앞에 나가 술잔을 올리고 축하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인 모양이었지만, 숫기 없는 우리의 난감함을 알아차린 친구는 싫으면 굳이 안해도 된다고 말해주어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친구 부모님의 환갑이나 칠순에 초대받았던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동네 잔치를 처음 경험한 때문인지 나는 그날 온종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순간순간 불편하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막판엔 지겹고 곤혹스러웠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사회자가 지목하면 무조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고함을 질러야하는 상황도 그렇고 떼로 몰려나와 춤을 추는 모양새도 처음엔 흥겹더니 술판이 무르익으면서는 취객들 때문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수시로 잔치판에 불려다니느라 우릴 챙겨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친구는 그제야 지루해하는 우리 태도를 눈치 챘는지, 먼저 가도 된다며 우릴 배웅했다.

잔치집을 나오며 나는 당시에 아직 멀게 느껴지는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염려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잔치를 원하면 어쩌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구경꾼처럼 모여든 하객들 앞에서 한복을 떨쳐입은 채 무대처럼 마련된 잔칫상 앞에 나아가 술잔과 절을 올린 뒤 나중엔 큰딸이랍시고 노래까지 한자락 불러야 하는 상황을 내 숫기로는 못견딜 듯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고민해야하는 시기가 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요란한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었고, 환갑은 청춘이라며 다들 잔치대신 여행을 떠나는 세태도 나를 도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다닌 직장의 정년퇴직과 맞물린 아버지의 환갑을 그냥 멀뚱히 넘길 순 없었다. 평소 생신에도 몇몇 친지들이 모여 <밥>은 먹어왔으니, 날 잡아서 조촐하게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마다해도 환갑 기념이라며 맏사위를 위해 고운 한복까지 맞춰 보내셨다.  

환갑 안한다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며 화를 내다시피 했던 아버지는 결국 친가, 처가 가족들이 모여 <간단히 밥을 먹는> 그 자리에 장모님 소원대로 엄마와 나란히 한복을 입고 참석하셨다. 음식점에 미리 부탁해서, 그간 은밀하게 아버지의 옛날 앨범을 뒤져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사진을 모아 삼남매와 올케들의 영상편지까지 담은 영상물을 틀었던 그날 우리 삼남매와 다른 친척들은 다들 뿌듯해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버지는 몹시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바로 다음해였던 엄마의 환갑은 연달아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엄마의 완고한 고집으로 부부동반 여행으로 대체되었고, 또 10년은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오래 걸릴 것만 같던 10년이 어느새 흘러 엄마의 칠순생신을 고민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친척분들 모두 환갑은 건너뛰는 분위기여도 칠순에는 다들 모여 맛있는 밥을 먹어왔고, 가뜩이나 홀로 남은 엄마의 칠순 생신은 그냥 넘겨선 안된다는 것이 역시나 집안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늬 아버지를 봐라. 그렇게 빨리 갈 줄 아무도 몰랐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늬 아버지 환갑 안 챙겼으면 어쩔 뻔했니? 니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한이 됐을 거다."

아버지 환갑 때도 음식점을 알아보고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초청하는 과정을 내가 주동한 전적이 있었으며, 그땐 부모님 몰래 큰동생이 영상물 만드느라고 사진 고르고 녹화하고 제법 법석을 떨었는데도 즐겁기만 하더니 이번엔 왜 모든 과정이 온전히 스트레스로만 여겨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에도 주인공이신 왕비마마가 민망하다며 모임 같은 거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다. 하지만 "남편 앞서 보낸 여자가 무슨 염치로 생일잔치를 하느냐"는 엄마의 자학성 핑계는 용납되기 어려운 발언이다. 친척 어르신들은 엄마가 혼자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칠순을 그냥 넘기면 안된다는데!

잔치가 아니라 그냥 밥 한끼 먹는 것 뿐이라며 엄마를 계속 달래는 한 편, 두 동생 부부와 의논하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고 음식을 정하고 참석인원을 확인해 연락을 취하며,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소망이 다시 떠올랐다. 어쭙잖게 니체를 읽고 전혜린을 읽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에게 "딱 예순살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장담하고 다녔었다. 생존해 계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는 상관없이, 단지 나의 노년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생각됐던 것 같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은 최대한 오래 사시는 게 좋겠지만, 나는 홀로 씩씩하게 딱 예순살 까지만 살다가 깨끗하게 죽겠노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그래 어디 두고보자"며 나를 흘겨볼 뿐이었다. 그런데 요번에 엄마 칠순을 준비하며 문득 세월이 흘러 나중에 누가 내 칠순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고 칠순이라며 주인공으로 떠밀리는 게 싫어서라도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저도모르게 하고 앉았더라는 뜻이다.

예순살까지 살겠다던 어린 시절의 나는 분명 환갑 잔치 따위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고 다만 그 이후 노년의 삶이 막연히 구질구질할 것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칠순 생일의 부담으로 또 다시 내 수명을 재단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칠순을 <가족모임> 행사로 치르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밥먹기 행사 대신 칠순에도 가족여행을 떠나는 집이 있다지만, 울 엄마의 건강으로 보나 시기적으로 보나 그건 실행되기 어려운 대안이다. 어차피 매년 우리끼리 생신밥은 먹어왔으니 그걸 좀 확대시킨 것뿐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다. 문제는 부모님 형제가 많아놔서 그 자손들까지 모이면 4, 50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삼남매가 나누어 분담한다고는 해도, 규모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분위기며 음식 맛, 입을 옷까지 시시콜콜 미리 걱정하는 나 같은 소심증 환자에게는 더더욱!

사실 욕을 좀 먹을 각오만 한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아무리 들쑤셔도 엄마 본인의 뜻대로 칠순같은 거 안 챙긴다고 통보한 뒤 시치미 뚝 떼고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 건강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쓸만한 핑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남들(친척도 남이라고 치면) 눈 의식해서 자식으로서 속물스럽게 생색을 내려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옛날부터 환갑이나 칠순 때 잔치를 여는 목적은 장수를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자손들이 그 정도 거나하게 잔치를 해줄 수 있을 만큼 번창했음을 자랑하려는 노인들의 허세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해서 일부 노인들은 자식들의 능력이 되든 말든, 잔치 때문에 빚을 지든 말든 남부끄럽지 않게 소리꾼들까지 불러다가 왁자지껄 노는 잔치를 강요한다던데, 울 엄마가 그런 부류의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깊이 감사할 일이지만 그냥 조용히 밥 한끼 먹는 것뿐이라고 여기래도 난감해하며 지레 생병을 앓아 속을 썩이는 상황도 녹록치가 않다.

과연 울 엄마의 진짜 속마음은 무얼까. 말로는 모임 안 했으면 좋겠다지만 내심 뿌듯해하며 잔칫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의지에 반하는 칠순잔치의 억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노라는 생각이 들만큼 회의를 느낀 내 마음처럼 엄마도 정말로 싫은 걸까. 그렇게 싫다는데 연회 예약을 취소하는 대신 엄마에게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오라고 말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홧김에 다 확 취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드는데, 정말로 그러면 울 엄만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까.

어쨌거나 이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달 넘게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극도로 높인 왕비마마의 칠순 모임이 겨우 엿새 뒤로 다가왔다. 토요일이 후딱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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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투덜일기 2010. 1. 15. 00:23
건강과 관련해서 특별히 신경쓰는 것도 없고 운동과는 담 쌓은 인간이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랑으로 삼았던 것 하나는 고3 이후 체중 변화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명절 연휴에 옴팡지게 많이 먹어 2킬로그램쯤 늘어났다가도 좀 지나면 원래 체중으로 되돌아왔고, 여름보다는 아무래도 겨울에 좀 더 토실토실 살집이 붙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봤자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살이 좀 내리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조금 지나면 어려움 없이 복구되었다. 10년, 15년이나 지나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옷을 아직도 안 버리고 갖고 있다가(헤져야 버리지!) 가끔 입을 수 있는 이유도 크게 몸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라 내심 뿌듯해 했었는데, 올 겨울은 좀 다르다.

딱 요가를 하면서부터 체중이 늘어나는 걸 느꼈는데, 그땐 당연히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해 몸이 체지방을 축적중이겠거니 했었고 20년 넘게 초과해본 적 없는 몸무게의 마지노선을 넘어서 계속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고서도 요가 때문에 근육량이 늘어나나 보다 여겼다. 특별히 먹는 양이 늘어나거나 위가 늘어나도록 과식을 거듭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나도 안하고 만날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그나마 일주일에 세번은 꼬박 외출도 하고 운동도 하니 살이 빠져야 하겠지만 오히려 계속 체중이 느는 건, 요가가 워낙 에너지 소모량이 적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만날 왕비마마 체중만 확인했지 정작 본인 체중은 한 열흘 무심히 살았는데, 오늘 마침 사우나에 간 김에 확인해 보니 불과 두어달 전보다 무려 4.5kg이 많아졌다. +_+ 20대 후반 직딩 시절,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사다리를 타서 간식을 사다 먹고, 그것도 모자라 하루가 멀다하고 회식하고 3차까지 술과 안주에 쩔어 살 때의 사진을 보면 정말 턱이 두개이고 뺨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 때 최고치를 기록했던 몸무게도 평균치에서 기껏해야 2.5kg정도 초과한 정도였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기야 지난 연말모임에서 본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외치긴 했다. "언니! 왜 이렇게 똥그래져서 나타났어?!" 나는 그게 내 머리모양과 얼굴살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라고 내 맘대로 해석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 평소에 몸무게가 고무줄처럼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야 4, 5kg쯤 에게게... 코웃음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성년 이후 20년 넘게 큰 변화가 없던 몸무게가 서서히 요동을 치기 시작하는 이유가 뭘까 겁이 다 더럭 날 정도다.

이런 것도 유전인가? +_+ 울 왕비마마는 처녀시절 워낙 깡 말라서 별명이 <와리바시>였고 아이 셋을 다 낳고 난 뒤에도 원래 몸무게인 45kg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그러다가 직장생활을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자 조금씩 체중이 늘었고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팍팍 몸이 불어 금세 60kg을 넘어섰다. 내가 중학생 때였나, 동네 양장점에서 맞춘 실크원피스를 입어보며 몸이 불어 안 예쁘다고 속상해 하던 엄마의 몸무게가 57kg였던 걸 기억한다. 동네 목욕탕 저울에 올라간 엄마 몸무게가 어느새 나랑 무려 20kg이나 차이 난다는 사실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57kg도 버거워했던 왕비마마는 노년에 접어들어 70kg도 우스운 정도다. 65kg까지만 빼면 당뇨약은 안 먹어도 될 거라며 아무리 쥐어짜도 살이 빠지기는커녕, 왕비마마는 내가 조금만 감시(?)를 게을리 하면 일주일 만에도 2, 3kg이 확 늘어난다. 그건 순전히 고열량 간식 때문이니 이유가 확실한데, 간식도 즐기지 않는 나는 대체 왜???

자꾸만 모든 화살은 중년이라는 나의 나이로 귀결되는 듯해 서글프다. 왕비마마는 그나마 옛날 분치고 키나 크시지, 난쟁이 똥자루만한 키로 마냥 옆으로 늘어나 데굴데굴 굴러다닐 듯한 노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숨이 탁 막힌다! 절대 그렇게 되진 않겠어, 라고 전의를 불태우며 왕비마마 전용으로 사다놓은 실내용 자전거에 올라 씨근덕거리고 있으려니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화가 치밀었다. 늙기도 설워라커든 몸은 왜 변하고 지랄! 차라리 어디까지 가나 두고보자며 확 밤참을 두 배로 먹어버릴까 별별생각이 다 들더라. 가능하다면 최대한 건강하게 몸에도 큰 변화 없이, 지금 마음에 꼭 드는 옷 몇벌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한번씩 입어주며 나는 몸도 마음도 젊게 사노라고 큰소리치는 것이 꿈이건만 내 머리와 몸은 아직 중년에도 적응하기 힘들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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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고백

투덜일기 2009. 12. 8. 16:19

나이가 늘어날수록 자신감도 늘어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확실히 나이와 함께 자신감이 줄어듬을 느낀다. 어쩔 수가 없다. 각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마흔을 넘기고 난 뒤의 나이듦은 성숙을 지나 노화를 향할 수밖에 없나보다.
지난 몇년 새 내 자신감을 특히 좀먹기 시작한 신체적 노화 증상은 바로 노안, 코골이, 흰머리다.

사람에 따라 30대 중반부터 시작되기도 한다는 노안은 <중년안>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어쨌거나 그게 그거다. 노안 대신 <중년안>이라고 박박 우기는 게 더 서글픈 느낌이다. 몇년 전부터 친구들이 휴대폰을 최신형으로, 최대한 액정 큰 기종으로 바꾸면서, 작은 액정에 뜨는 글씨는 당최 보이질 않는다고 할 때는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문자를 보내면 답 문자 보내는 게 골치아파 대신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들을 늙은이라고 놀리며 그들보다 한두 해 젊은 걸 기뻐했던 것 같다. 그때 친구들이 장담했었다. "너도 금방이다! 두고봐라."
아직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게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나도 명함에 박힌 제일 작은 글씨라든가 화장품 상자 구석에 적힌 작은 글씨들을 읽으려면 안경을 벗고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안>이란 안구와 수정체, 각막 따위의 탄력이 떨어져 순식간에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현상을 말할 거다. 처음엔 안경을 벗거나 눈을 찌푸려 애써 초점을 맞춰야 하고, 좀 더 지나면 돋보기의 힘을 빌어야 하는... 
벌써부터 휴대폰 문자를 보낼 때 휴대폰을 코앞에 두는 게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뜨리고 느릿느릿 문자판을 찍는 친구들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 될 거라 생각하면 그야말로 서글프고 괜히 억울하다. 어려서부터 눈이 나빠 고생했으면 노안이라도 건너뛰어야 공평한 거 아닌가!

노안 만큼이나 보편적인 노화현상인 코골이도 나에겐 제법 충격적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누가 옆에 있기만 해도 잠을 못잔다고 타박하던 인간이 코를 골다니. 평소에 코를 골지 않던 사람들도 심히 피곤하면 코를 고는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어려서부터 얌전한 잠버릇으로 유명했다던 내가 자기 코고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루말할 수가 없다. 코골이는 목젖이 늘어지거나 비강이 좁아져 생기는 현상이라고 알고 있다. 마흔 넘어 뺨이 쳐지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보이지 않는 목구멍 살까지 쳐지고 말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옆에서 확인해줄 사람이 없으니 나의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 또한 코고는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지 궁금해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자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걸 확인하는 마음은 더 무거울 것 같아 관두고 말았다.)
요가 강습은 매번 맨 마지막에 팔다리를 약간씩 벌린 채 힘을 쭉 빼고 가만히 누워있는 자세로 끝이 난다. 어둑한 조명과 따뜻한 열기 속에 낑낑대며 몸을 쓰다 드러누워 있노라면 그 3분에서 5분 사이가 참으로 평화롭게 느껴지긴 한데,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에 잠드는 사람이 (가끔 잠드는 어린 정민공주 말고도!) 있다. 의식적인 호흡에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누군가 까무룩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쌕쌕 숨소리가 달라지고, 간혹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5분 뒤 요가 강사가 손가락발가락을 살살 움직이라고 하면서 휴식에서 일깨워주어도 모른 채 잠들었다가 다들 일어나 앉는 소리에 퍼뜩 깨어나는 이를 보노라면 얼마나 피곤했을까 안쓰럽기 보다는 거기서 코까지 골며 잠들 수 있는 무던함이 부러울 정도다. 그러면서 코골다 깨어난 강습생의 나이를 유심히 가늠하며 나를 위로한다. '그래... 쟤는 20대 후반밖에 안됐는데 벌써 코를 골잖아. 넌 40대에 접어든 중년이야. 코 고는 게 큰 흉은 아닐 나이잖니...' 하지만 아무리 자위해 보아도 슬픔은 가지지 않는다. 
게다가 ㅌㄹ 마을 엠티도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조심스러워서 어디 잠이라도 잘 수 있겠나. 생각 같아선 이번 기회에 나의 코골이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오랜만의 떼 취침에 내가 먼저 잠들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엔 흰머리를 한꺼번에 일곱개나 뽑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보다 네 살 어린 막내동생은 20대 중반에 이미 염색이 필요할 만큼 흰머리가 많았고, 큰동생 역시 이젠 머리숱이 적어져 흰머리를 뽑는 게 아까운 지경이 되었으니 같은 유전인자를 타고났을 동생들에 비해선 내 상태가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새치를 한둘씩 보이는 아이들과 달리 얼마 전까지는 새치 하나 없던 사람에게 생겨나는 중년의 흰머리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몇년 전부터 여기저기 가끔씩 보이는 흰머리를 하나 둘 뽑을 때는, 흰머리가 아니라 <새치>라고 극구 우겨보았지만 요번에 양쪽 귀언저리에서 집중적으로 서너개씩 흰머리를 뽑고 나니 귀밑머리부터 센다는 전형적인 노화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는 스스로 스컹크가 되었다며 염색을 하지 않고는 절대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백발이 성성해졌음을 토로하는 이도 있으며, 흰머리를 뽑기는커녕 한 오라기라도 소중히 보호해야한다면서 두드러진 흰머리를 중후함의 상징이라 자랑하기 시작한 친구도 있다. 하지만 흰머리에 대처하는 방식이 누구나 다르듯, 몇가닥이든 수십가닥이든 수백가닥이든 본인이 느끼는 충격의 정도는 다를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 나이가 어떠하든 누구나 동안을 추구하고 젊고 튼튼한 육체가 아니면 손가락질 받는 연령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 분위기에 편승할 필요는 없다고 나의 이성은 부르짖고 있지만, 두드러지는 노화의 증거 앞에 이토록 맥이 빠지는 걸 보면 속으론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는 <나이값>이라는 말이 싫어서 나이와는 상관없이 <나답게> 사는 걸 무모한 철없음과 동격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여겼는데, 이런 두려움은 결국 사십대의 나이값인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더욱이  내 정신은 아직 중년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내 육신은 이미 앞서 노년을 준비하고 있으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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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대하여

삶꾸러미 2009. 9. 15. 18:27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주말에 놀러가 함께 저녁을 먹다 보면 늘 되풀이되는 광경이 하나 있었다. 밥상 아래로 자꾸만 밥풀이나 반찬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타박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
양반은 모름지기 매끄러운 놋쇠 젓가락으로 청포묵 하나를 집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까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젓가락질에 능해야한다며 코흘리개 시절부터 우리 손주들에게 엄하게 젓가락질을 가르치셨던 바로 그 할아버지가 진지를 잡수시면서 뭔가를 흘린다는 건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할머니도 가끔 입가에 밥풀 같은 게 묻었는데 느끼지 못하실 때도 있지만,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할머니는 수시로 입가를 닦거나 스스로 밥상 아래를 살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밥상을 치우고 나서도 매번 지저분한 할아버지 자리와 달리 할머니 자리는 늘 깨끗했다.
게다가 골초였던 할아버지한테선 늘 심한 담배냄새와 함께 할아버지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할머니는 그게 늙은이 냄새라면서 질색을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늙은이 냄새 나면 애들이 싫어한다며 언제나 바지런하게 씻고 로션(할머니 용어로는 여전히 '구루무')을 바르셨는데, 정말로 우리 할머니한테선 노인 특유의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6개월쯤 다시 할머니와 한집에서 동침하며 살던 시절, 내가 새벽녘에 컴퓨터를 끄고 옆방으로 들어가 부시시 할머니 옆자리로 파고들면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는데 팔순이 넘어서도 아기피부처럼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할머니의 팔다리를 어루만지면 금세 잠이 들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 할머니한테선 흔한 노인냄새 대신 우리 할머니만의 달콤한 체취가 났던 것 같다. 역시나 팔순 넘어서까지 전국 방방곡곡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만큼 정정했던 우리 외할머니한테서도 노인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친할머니처럼 잘 때 껴안고 자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주 뵙고 팔다리 주물러드리고 했으므로 충분히 체취를 맡을 기회는 있었을 텐데.

내가 늙음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된 건 엄마 때문이다. 올해 나이 예순 아홉. 아직도 나에겐 아줌마 영자씨가 익숙하지만,  어느 누가 봐도 할머니라고 인정할 나이다. 요즘엔 특히 젊게 사는 노인들이 많아 칠순 넘어서도 펄펄 날아다니며 건강을 자랑하는 분들도 많지만, 지병도 많고 마음도 약하고 의존적이기까지 한 울 엄마는 그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냥 할머니로 늙어가고 계신다. 그간의 여러 병력을 따져본다면 이 정도 회복도 고마워 해야 하는 수준이고, 노인으로선 그게 당연한 건데도 내 마음 속 어린아이는 젊은 엄마를 포기할 수가 없는 모양인지 자연스레 노인의 특징을 보이는 엄마가 매번 놀랍고 속상하고 서글프다가 버럭 짜증이 치민다. 
노인들이 밥풀이나 반찬 양념이 입가에 묻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입주변의 근육과 신경이 노화해 정말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입술과 혀의 놀림도 자연히 전보다 날렵하지 못해 음식을 입에 넣거나 씹을 때도 흘릴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울 엄마는 당뇨 합병증으로 말초신경이 상해 손가락 소근육의 움직임이 원할하지 못해 젓가락을 떨어뜨리기 일쑤이니 오죽하랴. 엄마 티셔츠를 보면 하나같이 앞섶에 보일락말락한 얼룩이 묻어 있다. 음식물을 흘린 자국이다. 미리 알아차렸을 때는 얼른 애벌빨레를 하거나 문질러 지우기나 하지, 몰랐다가 그냥 세탁기에 돌리고 나면 나중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식탁 밑 엄마 자리도 흘린 음식물로 매 끼니마다 어지럽다. 어린 조카 밥먹고 난 자리랑 똑같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치우자면 버럭 화가 난다.
진짜 화가 나는 대상은 인간의 노화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인데, 짜증과 분노는 늘 엄마에게 날아가고 만다. 숟가락질에 서툰 아이가 밥을 흘리는 게 당연한데도, 그걸 치우는 게 짜증나서 애한테 화풀이는 하는 몹쓸 엄마처럼.
며칠 전엔 심지어 울 엄마한테서도 드디어 노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사로잡혔다. 노인 특유의 냄새는 피부 노화로 떨어진 죽은 세포와 각질 때문이라 완전히 피할 순 없으니 잘 씻고 향수를 사용하는 수밖엔 없다고 들은 듯하다. 빨간 립스틱 하나 바르는 게 화장의 전부인 울 엄마가 향수를 쓸 리는 없고, 벌써부터 춥다고 매일 샤워는 안할 태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새삼 느껴진 모양이다. 쓸데없이 민감한 나만 가끔 감지할 정도이긴 하지만, 끈적거린다고 바디로션 바르는 것도 싫어하는 왕비마마의 노인 냄새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청력도 나빠져 TV도 거실을 왕왕 울릴만큼 틀어놓아야 하고, 돋보기가 없으면 작은 글씨는 전혀 볼 수가 없으며 기억력도 현저히 나빠져 했던 얘기를 자꾸 되풀이해 당부하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데도 딸로서 선뜻 수긍하게 되질 않는다. 그건 본인도 마찬가지라 나보다 더 속상할 텐데 화를 내는 건 언제나 못된 딸이다.
조금 전에도 늙은 딸 먹으라고 복숭아를 주고 가면서 끈적끈적한 과일물을 사방에 뚝뚝 흘리며 먹고 다니는 엄마에게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식탐에도 여러종류가 있지만 울 엄마의 식탐 특징은 입 한가득 넣고 씹는 쾌감을 유독 즐기신다는 점이다. 예쁘고 정갈하게 자른 과일을 포크로 얌전하게 찍어먹는 건 절대 울 엄마 스타일이 아니다. 무조건 통째로 들고 우적우적 크게 베어먹어야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보다. 아오리나 홍옥사과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 제맛이라고 인정하지만, 단물 뚝뚝 흐르는 복숭아 같은 건 좀!!!
당연히 눈도 어두워졌으니 늙은 엄마가 닦는다고 해봤자 끈적임을 말끔히 닦아낼 리 만무해 두어군데는 빼먹기 일쑤인데 걸레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목. 결국엔 내몸 편하자고 내는 화풀이였던 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셨던 것도 아니고 팔순 넘어 시들어가시는 그분들을 익히 지켜봤으면서도 늙어가는 엄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잘 안되는 걸 보면 나란 인간은 늙음에 대한 지극한 공포를 품고 있나 보다. 늙기 싫어서 발악하는 사람들의 흉한 모습을 손가락질하면서 말로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게 멋진 거라고 주장하지만, 나 또한 다른 방향으로 흉하게 발악하며 억지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확실히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는 지나버렸으니 아쉽고 중년도 노년의 미래도 선뜻 받아들이는 건 싫으니 천상 이게 철 안든 사십대의 청승이 아니고 무언가. 스무살 무렵의 유치한 나는 예순살까지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적이 있다. 아마 그때도 죽음보다 늙음이 더 무서웠던 건 아닐까.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이치라고 고개 끄덕이기엔 늙음이 가져오는 심신의 흐트러짐이 너무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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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삶꾸러미 2009. 2. 2. 17:18

강산도 변하게 만든다는 세월인 십년은 사람마다, 아니 나이대에 따라 결코 정량의 세월일 수가 없다.
물리적으론 똑같은 시간이라고 해도 본인이 받아들이는 시간의 추이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이와 열살짜리 아이, 열살짜리와 스무살 짜리만 비교해봐도 그 힘은 놀랍다.
몸과 정신이 눈에 보이게 자라나는 각각의 그 십년간은 마치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 카메라를 놓고 찍은 필름을 초고속으로 돌려보는 것처럼 변화무쌍하다.
스무살에서 서른살까지의 십년 역시 누구에게나 퍽 파란만장하기 십상이라, 사실 서른살 이전까지는 인생을 십년 단위로 끊어 조망하기가 오히려 어색하고 민망하다. 그 이후의 세월과 비교하면 서른살 이전엔 그 각각의 일년이 서른 이후에 느낀 10년 세월에 필적할 만큼 촘촘한 길이와 굴곡을 갖고 있는 듯하다.

어제, 온라인 세상에서 난생처음 맺은 묘한 인연이 10년이나 지속되어왔음을 기념하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다들 모이진 못했지만 구성원들 가운데는 처음 만났을 때 겨우 고등학생이었다가 그간 대학을 가고 군대를 다녀와 직장인이 되거나, 역시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갓 결혼해 예비엄마가 된 이도 있었다.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달라 일부러 모아보려고 해도 삶이 겹쳐지기 힘들 것 같은 다양한 구성원이면서, 하찮을 수도 있는 공통된 관심사 하나로 뭉쳐진 우리가 10년이나 계속 만남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 늘 신기해서 10주년이 되면 그럴듯하게 파티를 해야한다고 그간에 서로 너스레를 떨었지만, 막상 10년을 기념하는 어제의 자리는 특별히 감개무량하거나 호들갑스러운 느낌 없이 담담한 일상처럼 흘러갔다. 또 한 번의 10년이 지나더라도 다들 그 자리에 있을 것을 실감했기 때문일까.
특히 지난 10년간 신변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듯한 내가 느꼈던 건 약간의 기시감이었다.
열여덟에서 스물여덦으로 성장한 이는 10년간 자신의 삶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해왔는지를 역설했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깡마른 녀석의 겉모습조차 크게 변함이 없었고, 초기에 서로에 대해 얼마간 수줍고 조심스러운 탐색을 거친 뒤론 거의 속속들이 인생을 지켜보아 알고 있는 터라 어쩌면 이젠 시간이 가도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그렇고
인간의 나이 서른살이 특별한 조망을 받는 이유는, 내가 몸소 지나고 보니 그 뒤로도 서른의 정서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십대 이십대를 거치는 동안 서른 즈음엔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거나,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사뭇 많은 것을 이루어 놓았으리라고 짐작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정말로 큰 성취를 이루어놓은 서른의 인생도 없지는 않겠지만, 내 경우 서른살은 크게 무언가를 이루어놓았기는커녕 겨우 스스로 바라는 인생의 방향을 잡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나이였고 그 뒤로 10년이 더 지났지만 정서적으로는 전혀 그 이상 성숙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철없는 나의 두뇌는 앞으로 10년, 20년이 뭉텅뭉텅 흘러가 노년에 접어들더라도 겨우 요 정도의 성숙도에서 맴돌 것이 틀림없다.

어제 모임에서, 10년이 더 흘러 20주년을 기념하는 날에도 난 분명 지금처럼 남들의 사회적 잣대를 코웃음치거나 그들에게 은근한 손가락질을 받으며 철딱서니없이 계속 이렇게 살고 있을 거라고 장담을 하고 돌아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보기엔 그만큼 훌륭한 인생은 없을 것 같다. 과연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줄곧 서른살의 정서로 살아가는 중년과 노년은 이른바 나이값 제대로 하는 중년과 노년보다 훨씬 더 굴곡진 질풍노도의 세월을 겪을지 몰라도 틀림없이 활기차고 즐거울 테니까!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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