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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벚꽃놀이

삶꾸러미 2007. 4. 15. 23:56

벚꽃 축제로 유명하다는 진해나 여의도 윤중로엔 일부러 행사기간에 맞춰 가 본 적이 단 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가고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득시글 거리는 데도 싫지만, 벚꽃의 흐드러진 아름다움보다
음식냄새 진동하는 포장마차들이 더 즐비한 그런 곳... 제 아무리 축제엔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지만 나는 그런 분위기가 정말 싫다.

그런데 우리 동네 근처에도 꽤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들이 늘어선 벚꽃길이 있다.
해마다 봄이면 구청에서 벚꽃길 걷기 축제도 하고 그러는데 요즘이 만개철인지
며칠 전부터 엄마가 벚꽃 구경하러 가자고 성화였다.
그치만 나는 완전히 초절정 마감모드였던 지라 (하도 열심히 블로그질을 해대서 티는 안났겠지만 ㅋㅋ) 계속 모른 척 했는데,
오늘은 급기야 엄마가 동네 친구 아줌마랑 둘이 먹을 것까지 싸들고
구청 뒷산에 있는 벚꽃길로 놀러가시더니, 너무 좋으니 어서 아부지 모시고 구경오라고 전화까지 해댔다.
아버지는 어제 오랜 산행 끝에 발목이 아픈 상태고
나는 아침까지 원고와 씨름하다 간신히 잠든 상황이라 몹시 쌀쌀맞게 엄마나 많이 보고 오시라고 마다하며 전화를 끊고는 조금 찔렸더랬다.

그런데 역시 나보다 효자인 큰동생과 올케가 엄마 전화를 받고선 벚꽃도 볼겸 저녁 먹으러 들이닥친 것.
결국 우린 저녁을 먹고 나서 단체로 밤벚꽃놀이에 나섰다.
청사초롱이 길게 매달린 벚꽃길은 제법 그럴듯했고, 시끄러운 스피커를 매단 장사치들도 하나 없는 오솔길은 몇년 전에 낮에 와봤던 때보다 쾌적했다.
알록달록 촌스러운 색깔의 조명을 비춰 노랑, 분홍, 초록, 하늘색으로 보이는 벚꽃을 보며 울 정민공주를 비롯해 거기 나온 사람들은 마구 감탄했지만, 나는 조명이 좀 덜 인공적인 색깔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으며 시큰둥하게 오솔길을 걸었다.

벚꽃놀이를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나는 벚꽃이 만개해 있는 것 자체보다, 하얀 꽃들이 눈송이처럼 후두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 그야말로 꽃비가 마구 날리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환성을 지르며 좋아하자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당신은 벚꽃이 한창 예쁘게 핀 걸 보는 건 좋은데, 휘날려 떨어지는 걸 보면 서글퍼서 싫으시단다.
너희야 앞으로 예쁜 꽃 볼 날이 많지만, 당신은 그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

얼마 안 남긴, 무슨 소리냐고... 앞으로 10년 동안 매해 꽃놀이 모시고 오겠다고 큰소리 치며 대충 순간을 얼버무렸지만 가슴이 짠했다.
같은 꽃을 보면서도 그렇게 느낌이 다르구나...

나도 평균수명 운운하며 이젠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짧을 거라고
늘 엄살을 떠는데, 아버지 말씀에 문득 그런 내 촐싹거림이 부끄러웠다.
울 엄만 서울태생이면서도 아직 한강 유람선도 안 타봤고, 남산 타워에도 신혼여행 가기 직전에 택시타고 둘러 본 게 마지막이고, 그 새 수없이 생겨난 서울의 여러 공원--하늘 공원, 서울 숲 따위--에도 안 가봤다면서 가끔씩 한탄하는 걸 보며, 여유 좀 있을 때마다 모시고 가리라 마음먹지만, 재작년에 선유도 공원으로 소풍 간 걸 마지막으론 또 만날 바쁘다 바쁘다 짜증만 부리며 살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더는 어떻게 잘해드릴 수도 없는 순간이 온 다음에
눈물로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잘해드려야 하는데, 왜 늘 깨달음은 뒤늦게나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 참으로 무서운 진리인데
내 머리가 참 나쁜 게 문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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