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제일 어린 조카의 유치원 재롱잔치에 다녀왔다. 작년에 이미 녀석의 끼가 얼마나 출중한지 깜짝 놀라며 감탄했기에 올해도 기대가 컸는데, 역시나 녀석은 요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울 엄마의 촌평을 그대로 빌리자면, "비싼 돈 주고 가서 본 뮤지컬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신났다". 정말로 무대가 어찌나 화려하고 프로그램도 다양한지 주최측에서 심혈을 기울인 티가 팍팍 났다. 집중력이 5분, 10분도 안되는 꼬마애들을 데리고 얼마나 진을 빼며 연습을 시켰을지 선생님들의 노고도 노고려니와, 개인당 대여섯 개는 되는 출연분량에 따라 율동과 노래, 때로는 대사를 연습하고 무대를 오르내리며 매번 옷을 갈아입어야했을 아이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어휴... 감탄과 더불어 탄식도 절로 나왔다.
10여년 전, 첫조카가 유치원을 다닐 때만 해도 재롱잔치는 그야말로 유치원 강당에서 선보이는 원생들의 소규모 발표회였다. 의상이래봤자 흰티에 청바지, 한복 정도였고 동식물 역할 같은 특수의상도 유치원 선생님들이 약소하게 꾸며 만든 소품이었던 것 같다. 아, 그때도 운동복이나 태권도복을 입고 나와 시범을 보이는 순서는 있었다. 헌데 몇년 지나지 않아 둘째조카 때부터 재롱잔치가 점점 규모도 커지고 화려해지더니, 요샌 의상이며 조명이 가히 아이돌 그룹의 단체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욱 완성도(?) 높은 무대를 위해 전문 시스템을 동원하고 체육관 같은 공연장을 빌려 '빵빵하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 역시 관람을 매우 즐겼기 때문이다. 유치원 재롱잔치의 목적이 아이들의 성취감과 발표력, 혐동심을 높이는 데 있다고 하니, 이왕이면 번듯하게 포장하고 싶은 원장님들의 마음도 알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꼭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의구심이 떠나질 않았다. 어차피 의상비며 소요비용을 학부형들이 부담해야하는 형편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똑같이 무대의상비를 부담했는데, 자기 아이가 입고 나온 무대의상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공연장 대관 형편 때문에 평일 저녁 6시로 잡힌 재롱잔치를 나로선 기쁜 마음으로 보러갔지만, 직장 사정상 참석 못하는 부모는 없을까 괜한 걱정을 했던 게 사실이다. 정말로 콘서트장에 오듯 형광글씨 요란한 피켓까지 만들어들고 집안 식구들 대거 동원해 온 가족들도 있는 반면, 그럴 형편이 안되는 집안도 당연히 있지 않겠나. 작년엔 우리도 피켓이랍시고 스케치북에 색종이를 오려 급조한 응원판을 들었으나, 올해는 쿨하게 스마트폰 전광판을 이용하기로 했고 편한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조카의 순서가 아니더라도 앙증맞은 아이들의 몸놀림이 너무 귀엽고 깜찍해서 웃음과 박수가 절로 나왔다. 특히 올해는 완전히 모든 출연 프로그램의 '메인'을 꿰차고 무대 중앙에서 제일 열심히 신나게 정확한 동작으로 춤과 연주를 보여주는 조카 덕분에 어깨까지 으쓱했다.
그.러.나. 까칠한 인간의 취향은 어디 가도 드러나는 법. 대체로 훌륭했다고 평할 수 있는 공연이건만 중간중간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순간이 몇번 있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싶은 시대착오적인 면이랄까.
첫번째 불만은 유치찬란한 아이들의 의상.
물론 멋지고 괜찮은 공연의상도 꽤 있었다. 짐작컨대 재롱잔치 이벤트 회사에서 프로그램과 안무, 의상까지 촐괄하여 제공하는 모양이다. 작년에 조카가 입고 나왔던 변형한복을 5살짜리 애들이 또 입고 나온 걸 봐도 매번 의상을 새로 제작할 리 없다. 아이들 연령에 맞는 프로그램과 무대복을 교사들이 골라서 정하는 것일 듯.
문제는 장식이 너무 과해 흉측할 정도로 화려한 의상이 많고, 아직도 여자아이들에겐 붉은계통, 남자아이들에겐 푸른계통을 입히는 색깔의 성별 고착화가 여전히 포착된다는 점이다. 아이들과 부모가 혹시라도 상술과 편견에 떠밀려 여자색, 남자색을 구분하더라도, 제대로된 유치원 교육이라면 그런 선입견을 깨뜨려주어야하지 않을까?
남녀아동 공히 같은 색깔과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공연을 펼친 프로그램도 많았지만, 3분의 1 이상은 이런식으로 색깔로 남녀를 구분해 놓았던데 나로선 무척 못마땅했다. 어차피 같은 색깔이라도 여자애들은 거의 스커트, 남자애들은 바지던데 왜 꼭 색깔로도 차별을 하는지? 그리고 솔직히, 저렇게 촌스럽고 요상한 무대의상이 진짜로 애들 예쁘라고 입혀놓은 것으로 보이는가? +_+
게다가 어떤 공연의상은 나의 여자조카가 입었더라면 불끈 화가 났을 것 같은, 천박하고 저급한 쇼걸 의상을 연상시키는 색깔과 모양새였다. 선정성으로 논란이 된 걸그룹 따라하기도 아니고 왜 천진난만한 아이들한테 그런 옷을 입힐 생각을 하는지 기가막힐 정도였다. 발레나 라틴댄스 같은 장르라면야 아무리 한겨울이라도 팔과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걸 안쓰러워하면서라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냥 아이돌 노래에 맞춰 '섹시하게' 춤을 추기 위해 배꼽은 물론이고 갈비뼈까지도 다 드러나는 조막만한 상의를 입힌 건 불쾌했다. 나로선 차마 사진을 찍어오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느낌 전달이 되려나? 부모와 친척들에게 보이는 공연에서 어린 딸들이 왜 그런 야한 옷을 입어야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귀엽고 깜찍하면서도 어린이다운 의상이 얼마나 많을텐데...
두번째는 공연내용에서 드러나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
딱 하나뿐이긴 했지만, 남녀의 역할에 대해서 설마 이게 유치원 교육의 수준과 사고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까 당혹스러운 장면이 있었다. 6세반이었던가... 아마도 유명 아이돌의 노래에 맞춘 춤 공연이었던 것 같은데 (어차피 20가지가 넘는 공연 내내 동요는 서너 곡밖에 들을 수 없었고, 나머지는 거의 아이돌의 최신유행가와 그에 맞는 안무였다. 그 점 또한 매우 불만. 왜 유치원에서마저 어린아이들을 다 아이돌 연습생 취급을 하는지?) 무뚝뚝하게 서서 신문을 보며 외면하는 남자아이들에게 커다란 리본을 묶은 인형같은 차림을 한 여자아이들이 다가가 아양을 떠는 내용이었다. -_-;;
일반 드라마는 물론이고 어린이드라마나 그림책의 삽화 내에서도 구태의연한 성별역할을 허무는 노력을 오래전부터 해왔기에, 요리하는 아빠와 자동차 고치는 엄마의 모습이 당연시되는 선진국의 수준은 나도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땐데 아무리 대한민국의 현실이 고리타분하기로서니, 신문보는 남성마초한테 아양과 교태를 떠는 연약한 여자의 역할을 유치원 아이들한테 주입한단 말인가! 설마 아직도 여성교육의 지상목표가 현모양처요부 양성이란 얘기는 아니겠지?!
저렇게 떡하니 신문으로 얼굴 가리고 선 남자아이들의 파트너로 나온 여자아이들의 모습은 이러했다. 깜찍하게만 보아줄수도 있는 무대를 내가 공연히 삐딱하게만 보았다고 나무랄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선의에 의한 행동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어른들이 정한 안무와 내용이 어떠하였든, 영문도 모른 채 최선을 다해 애쓴 아이들에겐 계속 갈채를 보내면서도 이런 장면에선 찝찝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나의 조카는 이런 못마땅한 프로그램에 한번도 동원되지 않았다는 것이 위안이었달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마 나는 내년이 마지막일 조카의 재롱잔치에 초대되면 또 군말없이 달려갈 것이다. 제발이지 이상한 공연 내용이나 의상 때문에 나의 특출난 조카의 활약이 빛을 잃지 않기를 빌면서. 하지만 재롱잔치를 준비하는 모든 유치원과 어린이집, 이벤트 담당자들에게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다. 부디 더는 구태의연하고 촌스러운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파릇파릇한 아이들한테 세뇌하지 말아달라고. 이미 이토록 화려한 재롱잔치에 익숙해져 조촐한 발표회 수준은 못마땅해할지 모를 철없는 부모들한테도 당부하고 싶다. 대규모 공연이 아이들에게나 교사에게나 얼마나 스트레스 넘치는 일인지 잘 생각해보기를. 무대에선 펄펄 날았던 나의 조카도 사실 그날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신경을 쓰더니 9시 넘어 끝난 공연 탓에 10시 넘어 먹는 저녁밥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구경간 고모와 할머니는 한껏 즐거웠고 녀석도 뿌듯해하는 눈치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꼭 그렇게까지 애들을 잡아야 하나... 진정 어느 쪽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길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 듯하다.
굳이 일본어 포스터를 올리는 건 일어에 익숙하신 이웃 블로거에게 진짜 영화 제목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인지 묻기 위해서다. 영어제목은 <Memories of Matsuko>인데 마츠코 앞에 또 다른 한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수식어가 있는 모양이긴 하지만, 그것이 정말 '혐오스런'인지 궁금했다. (헐.... 찾아보니 혐(嫌)자는 맞다. 혹시 한국 배급사에서 관객 끌기용으로 붙인 건 아닐까 분노했는데 원래부터 있던 제목인가 보다. -_-;;)
암튼 영화 속에서 마츠코를 '혐오스럽다'고 평가하는 건 말년의 극히 일부만을 본 극히 일부의 의견일 뿐이기 때문이다. 혐오스럽다기 보다는... 암담하다.
영화는 유치찬란한 색감과 70년대 미국 뮤지컬 영화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노래, 파란만장 신파의 형태를 띄고 있어서 영화보는 내내 저도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유발하는데, 묘하게도 계속 나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어쩜 이 감독은 여자의 일생을 저렇게도 처절하게 망가뜨려놓고도 그걸 가족주의와 사랑로 포장하려든단 말인가!
이제부턴 스포일러 염려가 있으니 영화 볼 사람은 클릭하지 마시길 ^^
마츠코의 인생이 끊임없이 파국으로 치닫도록 휘말리게 된 이유는 언제나 남자다.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기둥서방들... 놈들에게 두들겨 맞아 눈탱이 시커멓게 되어 코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도 언제나 마츠코는 되뇌인다. "그래도 혼자인 것 보다는 나아"라고... 마츠코를 등쳐먹던 수많은 놈팽이들 가운데 그나마 진실한 사랑이랍시고 하나 나오는 놈마저도 이건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를 또 불행하게 만들 것이 두려워서 기껏 선택하는 길이 교도소 앞에서 출소날을 손꼽아 기다리다 장미꽃 받쳐들고 나온 여자에게 주먹질을 하는 거란 말인가?? 아이 참 욕이 나와서 원... 제아무리 감옥에서 참회를 했다고 해도 18년뒤의 참회는 너무 늦다.
물론 어린시절의 애정결핍과 불행이 많은 이들의 이후 인생을 좌우한다지만 그것 때문에 아름답고 총명한 마츠코가, 생의 바닥까지 떨어져 노숙자처럼 혐오스러운 뚱녀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과정의 수많은 선택들은 그녀에게 내리는 감독의 악의적인 처벌 같았다.
마츠코의 억울한 삶을 결국 존재도 몰랐던 가족의 일원인 조카 '쇼'가 이해해주는 방식이지만(그나마 쇼를 맡은 일본 배우가 몹시 귀엽다^^;;) 자기를 완전히 내몰고 버리고 외면하고 거부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고향과 똑 닮은 강가에서 늘 눈물을 흘리며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대신 마츠코는 왜 더 악착같이 살아내지 못했을까.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용기와 가족보다 진한 정을 나누었던 감방동기 친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마지막 환상 속에서라도 가족과 화해를 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기는 하지만 뒤이은 죽음 만큼이나 그 깨달음은 허무하고 너무 뒤늦었다. 그래서 신파의 극치에서 흘린 내 눈물은 슬픔보다 짜증스러움에 더 무게가 실렸고, 리얼리티를 살린 비극적 결말이라기엔 허겁지겁 모든 균열을 가족과 사랑의 이름으로 풀칠해 마감하려는 것 같아서 괘씸했다.
차라리 친구 구미코와 손잡고 놈팽이 같은 기둥서방 족속들에게 멋지게 복수하고 사랑 그 까짓것.. 하면서 코웃음 치다 장렬하게 죽은 거라면 기쁘게 눈물 흘리며 박수 쳐주련만 아쒸... 혹시 오래 된 영화라 시대에 뒤떨어진 스토리가 된 건 아닌가 눈이 빠지도록 맨 마지막 크레딧까지 확인했더니 웬걸.. 2006년 작품이었다. *_*
하여간... 오래도록 혼자인 여자들 넷이 하늘공원에서 팍팍해진 다리를 주무르며 2시간도 넘게(상영시간이 무려 129분!) 영화관에서 대부분 깔깔대다 나온 뒤끝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우린, 놈들의 잘못을 모두 여자한테 뒤집어 씌워 단죄시키는 영화 딱 질색이란 말이지! 뭐 그래도 볼만은 했지만... ㅎㅎㅎ
<여자의 일생>이나 <테스> 같은 작품 보며 불끈불끈 분개하고 화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영화라고 해야할듯.
밤참 먹고 난 식곤증에 시달리다 졸음 쫒기의 일환으로 적어본다. -_-;; (다 쓰고 나면 부디 잠이 깨길..) 이제는 끝나버린 제9회 여성 영화제에서 본 마지막 영화 두 편. <스파이더 릴리>와 <스무살이 되기까지>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남은 표와 시간 분배와 보고 싶은 영화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영화를 고르다 보니 두 영화를 고르게 되었는데 영화의 느낌은 전혀 달랐지만 내눈엔 비슷한 코드가 감지되었다. 제목에도 적었듯이 나를 둘러싼 가족과 성장, 그리고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것.
이번엔 놓쳤더라도 나중에 개봉할 때 찾아보거나 (<스파이더 릴리>는 5월쯤 개봉한다는 후문^^) 어둠의 경로로 찾아볼 분들을 위해 이제부턴 more 기능으로 해야할 듯.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해보겠지만, 모든 영화 리뷰는 스포일러 요인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므로 알아서들 보시라. ㅋㅋ
<스파이더 릴리>의 두 주인공 샤오뤼(발음이 맞는지 벌써 가물가물... 영어 이름은 Jade였는데;;)와 다케코는 둘 다 이른바 '결손가정'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샤오뤼가 9살 어린 나이에 대뜸 다케코와 사랑에 빠진 건, 본능적인 둘 사이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까. 상처받은 사람들끼리는 묘하게 통하고 알아보는 그 놀라운 교감. 세월은 두 사람을 단절시키지만,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찌릿찌릿 전기파장 같은 교감이 오간다.
개인적으로 연애의 핵심은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이 더 잘산다더라.. 하는 말은 위로를 위해 구성된 거짓말이란 얘기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아, 이 한글 제목 정말 싫다. "Kissing Jessica Stein"으로 그냥 두거나 좀 멋지게 바꿔볼 것이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몸의 상태가 어떠하든 정신적인 면에서 유사한 성별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끼리는 소통이 훨씬 쉽고 공감도 빠르다. 여자들끼리, 남자들끼리 각각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유대와 공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사랑과 연애에 있어서도 나와 비슷하여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쉽지 않겠나.
그런데 둘의 사랑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케코의 가족. 가족의 굴레를 언제나 상기시키듯 다케코의 팔에 새겨진 '스파이더 릴리' 문신은 새길 때의 통증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실에 가깝겠지만 나는 문신처럼 다케코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언뜻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에 내포된 고통 또한 만만치 않은 가족의 멍에 때문에 다케코의 인생이 휘둘려지는 것이 너무도 슬프고 화나고 속상했다. 샤오뤼는 사랑의 기억과 표시로 문신을 새기길 원하지만, 다케코의 문신은 질기디 질긴 멍에 같은 가족에 대한 의무감과 죄책감의 상징이기 때문. 과연 다케코가 그 멍에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는 직접 영화를 보고 판단하시기 바람 ㅎㅎ
독립적인 어른인 듯하지만 아직은 진짜 어른이 아닌 다케코와 철부지 같지만 사랑에 관해선 누구보다 성숙한 마음을 지닌 소녀 샤오뤼의 동반 성장을 담은 듯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서 혼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서늘한 눈매와 시원시원 길쭉한 이목구비의 다케코와 인형처럼 올망졸망 귀엽고 깜찍한 샤오뤼의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 샤오뤼가 계송 흥얼거리는 Jasmine이라는 주제가도 구슬프면서 아름다워 좋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샤오뤼가 다케코에게 외쳤던 말 가운데 "사람을 잊는 건 어른이지, 아이는 사람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던 "나를 기억해줘"라는 말.
드라마든 영화든, 너도 나도 첫사랑에 목매서 발전이 없는 건 참 별로인데... ^^;; 그래도 첫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애틋한 거니까 뭐 특히 이 영화에선 감미롭게 아름다웠음.
배경은 과연 몇년도쯤일까.. 영화보는 내내 궁금했는데 세계사에 약한 내가 그걸 짐작해낼 수야 없는 것이고 암튼 프랑스에서 유태인이 차별을 받고 있고, 고등학교 내 재즈밴드가 줄곧 남자들로만 구성되다 처음으로 여학생 부원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학교에 회의가 소집될 정도이니 어지간히 옛날이긴 하다.
영화를 보며 처음 느낀 생각은, '여성 최초'라는 것의 무게였다. 지금은 그나마 자주 들리지 않는 말이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수없이 들었던 "최초 여성 합격자",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기업 이사 승진", "최초 여성 수석"....따위의 말들. 그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차별과 억압과 편견이 존재했는지, 우리의 수많은 "언니들"이 당당히 실력으로 지혜롭게 그 경계를 넘어서기까지 어떤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이 영화는 그 "여성 최초"의 순간을 단편적이지만 아기자기하고 흥미롭게 담고 있다.
이제 더는 "여자라서" 무조건 차별받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가족의 지나친 간섭과 무관심, 외모와 성별로 사람을 판단하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가뜩이나 괴로운 질풍노도의 시기 열여섯 살을 어렵사리 보내는 한나(프랑스어 발음은 안나인데!)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기랑 비교되는 예쁘고 날씬한 언니들, 말끝마다 살빼라고 구박하는 엄마, 도무지 도움이 안되는 무관심한 아버지까지, 한나에게도 가족은 "수시로" 짜증스러운 멍에지만 결국 푸근하게 기댈 수 있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 (가족에 대한 요즘 내 논리와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원!)
게다가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 쯤, 지나친 가족의 관심과 애정어린 호들갑이 남들앞에선 창피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지 않았나? 재즈밴드 오디션 결과가 나오는 날, 초조하게 기다리던 한나를 응원하겠다며 모조리 학교에 나타난 가족들을 수치스러워하며 결과도 보지 않고 집으로 끌고가는 한나를 보며 나 또한 초등학교 졸업식이 생각나 더욱 깔깔 웃어댔다.
8남매 장남의 첫딸의 초등학교 졸업식. "나름" 우등상을 받는다는 광경을 보기 위해 그날 학교를 찾은 우리 가족은 어마어마했다. 부모님과 두 동생을 비롯해,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아버지 두 분, 큰고모, 막내고모, 외갓집 대표로 막내이모, 사촌동생들까지... @.@ 눈이 녹아 질척대는 운동장 대신 각반에서 졸업식이 거행되는 바람에 교실 뒤까지 주르륵 늘어선 학부모들. 그 가운데 울 아부지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내가 우등상, 개근상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교실 앞까지 들어와 사진을 찍어대고, 식구들은 마구 박수를 쳐대고... 그때의 난 창피하고 민망해서 마룻바닥 아래로 꺼져버리고 싶었고 떼거지로 몰려온 친척들을 어지간히도 미워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때 상장 받고 돌아서다 찍힌 뾰루퉁한 표정의 사진도 소중하기만 하고 바쁜 일 다 팽개치고 첫 손녀, 조카의 하찮은 초등학교 졸업식엘 와주신 그분들의 애정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말이다. ㅎㅎㅎ
암튼 내가 이런 생각을 리뷰랍시고 영화 감상에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이 영화도 가족에 대해선 온정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않는데, 그것이 구태의연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상투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거대 유대자본의 횡포는 싫지만 이방인으로서 차별받는 유대인이란 정체성에 여성이라는 부분까지 가세되어 더욱 힘겨운 한나의 싸움에서 가족은 그야말로 든든한 "빽"이니까.
이 영화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한나의 "재즈 연주"!!! 원래 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에 대해선 무조건적인 동경과 애정을 쏟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나가 별로 뚱뚱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웠는데 콘트라베이스를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땐 완전 반할 정도! 한나에게도 본격적인 첫사랑이 예고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나의 첫사랑은 콘트라베이스인 것 같다. 집안 그 누구도 이해 못하는 아픔과 소외를 치유해주는 아름다운 첫사랑이라니.. 어찌나 부럽던지. 무작정 나도 콘트라베이스를 품에 안고 사랑하고 싶더라! *_*
그리고 "재즈에 대해선 무식한" 가족을 위해 한나가 나에겐 "비야 비야 비야 오지 말아라 장마 비야 오지 말아라 비야 비야 오자 말아라 우리 언니 시집 간단다...." 는 가사로 익숙한 이스라엘 민요(나는 어제까지 이 음악이 우리나라 민요인 줄 알았었다!)를 연주하고 아버지의 눈물 글썽이는 표정이 클로즈업 됐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흘렀다. 옆에 홀로 앉아 있던 젊은 엉아가 울다 웃다 정신 못차리는 나 때문에 좀 난감해 하는 듯 했음. ㅋㅋ
암튼 좌충우돌 한나의 성장기를 깔깔 웃음나게, 또한 눈물 핑 돌게 그린 이 영화를 보니 나도 열여섯 살 때가, 스무살 때가 마구 그리웠다.
참참참... <스파이더 릴리>를 볼 때도 거의 빈좌석이 없었는데 <스무살이 되기까지>는 완전 매진이었다면서 주최측에서 깜짝 이벤트로 선물을 나눠주었다. 물론 재수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대여섯 명 뽑아 주는 이벤트에 당첨될 리 없었지만 9회째인 여성영화제가 그토록 성황리에 매진을 기록하는 걸 보니 주최측이 아님에도 몹시 뿌듯했다. 내년엔 바야흐로 10주년째. 올해는 겨우 3편으로 마감했지만 내년엔 좀 더 미리미리 계획적으로 영화를 골라 좀 더 많은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다짐해 본다.
화창한 일요일, 간만의 외출. 출퇴근 하며 집앞 앵두꽃과 옆집 벚꽃, 목련, 온동네 개나리가 다 핀 건 알았지만 정작 온 거리가 꽃밭이라는 데 조금 놀라며 꽃처럼 화사한 사람들 틈에서 내가 좀 우중충하다는 느낌에 움츠러들었다. 찬란한 햇살 속에 혼자서만 우중충하다는 자의식은 순전히 4개월째 방치한 대책없는 머리칼 탓이렸다. 어서 손봐줘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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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영화제 영화를 드디어 한 편 봤다. 행복의 적들. Enemies of Happiness.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역시 인간의 삶은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는 걸 실감한다. 총탄이 난무하는 남성중심사회 아프가니스탄에서 정치에 뛰어든 젊은 여성의 삶이야 오죽하랴. 1시간만의 짧은 영화에서 참으로 치열한 삶의 진정성을 본 듯하다. 몇년 째 암살의 위협을 받으며 최초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고, 여전히 국회 안에서도 민주주의와 여권 보호를 위해 압제와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는 그녀는 이제 겨우 29살이라고 했다. 게다가 상영이 끝나고 뜻하지 않게 다큐멘터리 주인공 말랄라이 조야(www.malalaijoya.com)와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허울좋은 친미정권은 민주화를 표방하지만 정권을 쥔 자들은 여전히 범죄자 집단과 군벌이고 아직도 어린 소녀들에 대한 강간과 학대가 자행되고 있으며 말랄라이 조야에 대한 죽음의 위협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단다. 자기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민중의 행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박수가 절로 나왔고, 조야의 신변보호와 정치활동을 위한 기금모금을 한다는 말에 당연스레 지갑이 열렸다. 저 위 사이트로 들어가면 달리 기부 방법이 있다고 하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참여바람 ^^
아참.. 벨로와도 심히 공감했지만, 자원봉사자인지 고용된 통역사인지 모를 사람이 어찌나 우리말도, 영어도 핵심을 짚어가며 잘 정리를 해주는지 완전 감동이었다. 이상한(?) 색깔이 대비된 튀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서 앉음새도 민망한 바람에 속으로 대뜸 못마땅해하고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늘 겉모습/외모 지상주의에 편승하는 내가 민망하고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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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아트레온 앞을 오가며 올해도 느낀 건 영화제 전용 티켓박스가 있는 곳 앞의 쉼터에 유독 흡연 여성들이 많다는 것. (다른 땐 주로 쌍쌍이 닭살을 떠는 연인들이 터를 잡고 앉아있는 곳이다) 그리고 행사장엔 늠름한 장정 같은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리땁고 우아한 행사요원들도 많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흡연을 하고 성별 차이에 대한 반발을 겉모습으로 하는 이들이 여성주의 문화를 대변하는 건 아닌가 좀 걱정스러웠다. 그건 내가 학교를 다니던 80년대에도 그랬기 때문... 이젠 좀 더 자연스러워져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아 물론, 구태의연한 내 편견의 잣대로 그렇게 보인 것뿐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나 역시 늘 경험에서 비롯된 불만과 억울함을 토로하는 반항적 여성주의에서 탈피해 좀 더 견고한 사고체계와 대안을 내세울 수 있는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은' 하는데 늘 생각에만 그치는 게 문제다. 행동하지 않는 자는 불만을 품을 자격도 없다고 했거늘...
아무려나 영화제가 끝나기 전에 몇 편 더 볼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기를 빌고 있다. 언제나 즐거운 벨로와의 데이트에 겸해서 ^^
요새 부쩍 아기옷을 사러 가는 일이 잦았다. 출산율 저조 시대라고 언론에서 떠들어대긴 하지만 내 주변엔 조카들도 집집마다 둘씩이고 결혼한 지인들은 어김없이 신기하게 예쁜 아기들을 세상에 내놓고 있기 때문.
아기 옷을 사러 가면 매장에서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정해져 있다. 몇 개월이나 됐느냐는 것, 아니면 여자 아기냐, 남자 아기냐. 그래서 성별을 밝히면 아주 당연하게 남녀 아기에 따라 구분된 색깔의 옷을 보여준다. 분홍색 아니면, 하늘색. 나처럼 색깔로도 성차별하는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을 위해 다행히 흰색과 연노랑색, 가끔 연두색도 눈에 띄지만 무늬마저도 확연한 성차별을 강요한다.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 열기구 따위는 남자 아기 옷인 푸른 계통에 꽃, 과일, 나비, 인형, 구두 따위 모양은 분홍 계통의 옷에 들어 있으며, 중성이라 할 수 있는 곰돌이나 토끼 따위의 무늬는 친절하게(!) 하늘색과 분홍색 두 가지가 모두 갖춰져 있기 일쑤다.
물론 나는 하얀색이나 노랑색 같은 성차별 없는(?) 색을 주로 선호하고 가끔은 일부러 여자 아기에게 자동차 그림이 들어간 하늘색 옷을 선물 하기도 하고 남자 아기에게 자주색 꽃무늬 반바지를 선물하는 등의 파격을 부린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옷을 입은 아기들의 성별을 주변에서 헷갈려하기 때문에 엄마들도 난감해 하고 혹시 모를 혼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자 아기의 민대머리 같은 이마에 레이스 머리띠로 표시를 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쩌다가 푸른 계통은 남자를, 붉은 계통은 여자를 무조건적으로 상징하게 된걸까? 지금은 초등학생이 된 큰 조카 정민이는 원래 분홍색을 좋아하는 핑크 공주이긴 했지만 사촌에게 물려받은 남자 아이 옷도 아무렇지 않게 입었던 터라 다른 계통의 색에 특별한 반감은 없었는데,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초록색 옷을 입고 갔다가 같은 반 친구들이 남자 옷을 입었다고 놀렸다며 그 옷을 다시는 입지 않으려고 했었다. ㅡ.ㅡ;; 그때 나는 몹시 분개하면서 겨우 5, 6살밖에 안된 아이들이 색깔로도 성차별을 하게 만든 몰상식한 어른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 뒤로도 계속 온 사회가 강요하는 성별 색깔론을 우리 조카들에게만은 어떻게든 고착시키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악순환은 계속되는 법이라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린이날에 세발 자전거 하나를 사려고 해도, 짙은 파랑에 로보트 장식이나 자동차 장식이 거칠게 들어간 모양 아니면 공주나 바비인형 같은 그림이나 분홍토끼가 그려진 분홍색과 빨간색 자전거가 양자택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성별 다른 동생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이왕이면 중성적인 느낌의 자전거나 장난감을 사려고 하면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아진다.
이런 말도 안되는 성별 색깔론의 기저엔 하나라도 상품을 더 팔려는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성별 같은 형제자매를 키우는 집은 몰라도, 성별 다른 남매를 키우는 상황에선 색깔로라도 옷이며 장난감을 '차별화'해야 마지못해 부모가 소비활동을 더 하게 될 터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상업주의에서 비롯된 성차별 색깔론이 계속해서 그 아이의 사고방식을 좌우한다는 게 아닐까. 그림에 재능과 관심이 많은 9살된 우리 조카가 며칠 전에 그간 잘만 쓰던 그림물감과 파레트 겉포장이 '남자색'이라서 아이들이 놀리기 때문에 학교에 가져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다 제 부모한테 매를 맞았던 사건과 같은 일들이 앞으로 또 안 벌어질 리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서도 성별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한다. '대개' 여자아이들이 인형놀이와 소꿉놀이 같은 역할 놀이를 좋아하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블록이나 공룡, 자동차, 로보트 같은 난감을 더 좋아한다는 식으로. 그 때문에 남자아이들의 공간감각능력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하는 반면 여자아이들은 감수성과 섬세한 언어 능력 따위가 더 발달한다지. 하지만 그건 '대략적인' 판단일 뿐, 그 안에도 분명 개인차는 존재할 것이고 오히려 그렇게 뭉뚱그린 일반화와 획일화의 틀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타고난 성품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자동차와 로봇을 갖고 놀기를 유독 좋아하는 여자아이나 인형놀이와 소꿉놀이를 몹시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단정적으로 동성애와 결부시키는 섣부른 오해도 종식되어야 할 것 같다. 나 혼자만의 경험을 확대해서 진리처럼 떠벌일 생각은 없지만, 어째뜬 난 어려서도 커서도, 눈껌벅이는 값비싼 인형들이 무섭고 먼지 풀풀 나는 곰돌이 인형 따위를 귀찮아 했었다. (그래서 내가 모든 애완동물을 싫어하게 됐다고 보는 지인들도 있긴 하다;;) 어려운 시절이라 동생들이 값비싼 장남감을 선물 받는 경우도 지극히 드물긴 했지만, 가끔 동생들 몫으로 자동차나 총 따위가 생겨나면 난 그 누구보다 신이 나서 '부릉 부릉' '빵야~ 빵야~'를 외치며 놀기도 했단 말이지.
저 유명한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의 아기가 태어나 처음 공개된 사진 때문에 세계 언론이 떠들썩할 때, 나는 그 아기가 입은 옷이 여자아기임을 상징하는 상투적인 분홍색도, 아기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색도 아닌 중성적인 '회색'임을 지적하며 역시 '안젤리나 졸리답다'고 했던 기사가 잊혀지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회색 신생아 옷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배냇저고리를 떠올려 보자. 모두 흰색 아니면(염료가 안 들어가 가장 아기 피부에 순하다던가) 연한 분홍, 하늘색, 연노랑이다. 그나마 조금 큰 아기들의 속옷이나 완연한 겉옷엔 회색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거다.
아무튼 이번에도 여자아기 옷을 사면서 나는 흰색 내복과 함께 결국 예쁜 디자인 때문에 ㅠ.ㅠ 끄트머리에 노랑 레이스가 달린 꽃분홍색 바지와 꽃무늬 프린트가 들어간 셔츠를 사고 말았다.
색에는 성별이 없노라고 목청 높여 부르짖으며, 편견에 물들지 않은 아기들에게만은 그런 어른들의 잣대를 강요하지 말자고 주장은 하지만 교묘한 상업주의가 파놓은 함정에 매번 이렇게 덜컥 자진해서 걸려든다. 몹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