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우면 지는거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3.29 정유정 - 『7년의 밤』 16
  2. 2011.03.22 토론의 기술 10
  3. 2011.02.25 이중잣대 6

책을 읽고 난 감상을 좀처럼 쓰지 못하는 지병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몇자 적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정말 대단한 작가, 대단한 소설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몇년 전 나온 『내 심장을 쏴라』가 퍽 괜찮다는 후문을 더러 듣고도 읽지 않았던 건 무슨무슨 상을 탔다는 수상작에 대한 괜한 반감과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친구가 책을 디밀며 극구 권했다. 한번 읽어봐, 후회하지 않을 거야, 라면서. 알았다고 대답하고 보니 구경다니는 블로그 주인장들이 앞다투어 올해 최고의 소설감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읽고 보니 그럴만 했다. 어휴...
 
띠지와 뒤표지에 적힌 박범신의 추천사처럼 '괴물' 같은 작품이다. 번역료를 인세로 받든 매절로 받든 상관없이 이왕이면 책이 잘 팔리면 좋겠다는 마음에 한결같이 찬양일색인 주례사 후기를 남발하다 보면, 부끄럽게도 뒤표지에 역자후기 일부가 인용되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그러면 또 앗 뜨거라 싶어서 사탕발린 역자후기의 수위를 조절하는데, 몇년 전엔 그래도 꽤 괜찮은 책이다 싶어 최고의 찬사를 날린 적이 있다. 찬찬히 곱씹으며 읽어야할 문장임에도 일단은 뒷 이야기에 대한 조바심이 나서 체하든 말든 급히 책장을 넘겨야 직성이 풀리는 책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칭찬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서 써먹었어야 옳다는 생각이 독서 중에 불쑥 들었다. 처음엔 간결한 문장 하나 하나, 섬세한 표현과 묘사를 음미하며 읽어야지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헐레벌떡 숨가쁘게 읽고 있더라는 뜻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언제 다 읽었는지 모르겠고, 결과가 궁금하면서 동시에 책이 끝나는 건 안타까웠다.

7년전 열두살 소녀의 시체가 댐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용의자였던 댐의 보안팀장은 곧이어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댐의 수문까지 열어 마을주민 절반을 몰살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로 손가락질 받게 된 서원은 친척에게뿐만 아니라 온 사회에서 버림받아 모든 관계에서 격리되다시피 떠돌며 세상을 살아간다. 모든 것이 아버지 탓이므로, 서원은 스스로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 되는 상상을 하지만 한편으론 무언가 다른 진실이 있기를 막연히 기대한다. 그간 서원을 거두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댐 보안팀의 직원 하나. 7년 전 밤에 일어났던 일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음험하고 섬뜩한 복수의 그림자는 현재까지 드리워져 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치밀한 짜임새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도 대단하다고 느낀 건 탁월한 인물의 심리묘사라 7년 전 그날밤의 사건을 풀어내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에 나는 매번 홀딱 빠져들었다. 짠하고, 안타깝고, 오싹하고, 으스스하고, 참담하고, 화나고, 통쾌하고... 슬프다(두어 번 울었다). 수많은 감정에 휩쓸리다 책장을 덮고 나서 여운도 길다. 결국 나는 혀를 내두르며 책 날개의 저자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뭐 이런 작가가 다 있냐 싶어서. 아무래도 『내 심장을 쏴라』,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까지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천천히 쉬어가며 이 책부터 다시 읽고 나서. -_-;

급히 읽느라 인상적인 구절을 공책에 적어놓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용을 더 발설하면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작가의 말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체하련다.

우리는 최선의 -- 적어도 그렇다고 판단한 -- 선택으로 질풍을 피하거나 질풍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할 상황도 빈번하게 벌어진다(일간지 사회면을 점령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보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Posted by 입때
,

우리나라 사람은 참 토론을 못한다. 지금은 아예 볼 생각도 안하지만, 손석희 교수가 진행을 하던 시절의 <100분 토론>을 보아도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주장을 바락바락 우겨댈 뿐인 패널들을 보는 게 지치고 짜증스러워 중간에 채널을 돌리기 일쑤였다. 다른 토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고, 토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국회 청문회는 아예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다. 과거 청문회에서 '스타'로 떠오른 정치인을 다분히 의식한 국회의원들이 조목조목 논리로 검증하는 건 못배우고 대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호통치는 것만 따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보면 온 국민이 토론에 익숙하지 않고 토론을 못하는 게 당연하다. 평생 주입식 교육만 받아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앞뒤 맥락에 맞는 언어와 주장으로 토론에 끼어든단 말인가. 대학에서도 대부분이 강의식 교육만 받는 실정이니까. 그러다 보니 소수 세미나 수업으로 진행된다는 대학원 수업도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지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수업마다 발제자가 있어 발제문을 줄줄 읽고 나면 몇몇 도드라지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상투적인 질문이, 또는 너무 뻔한 질문이 이어지고 그나마 성의 있는 교수의 경우 다양한 논쟁거리를 제시하고 주제를 아우르는 정도다. 페미니즘 분석의 경우 간혹 재미있는 말들이 오가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상대의 논리적 오류를 짚어내는 토론으로 무언가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점을 도출하기보다는 그저 놀라운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는 때가 많았다. 세미나식 수업의 목표는 발제자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다퉈 입증해야 한다는 것인데,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이 기존 연구자들의 논문과 주장을 이리저리 참고해 이른 대학원생 수준의 결론엔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도 사실 없다. 괜히 누군가 뭣 하나 물고 늘어져 수업이 길어지면 오히려 눈총만 받을 뿐.

마이클 샌델 본인도 의아해했다는 한국인들의 '정의' 열풍에 힘입은 덕분인지 EBS에서는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라는 <정의란 무엇인가> 수업 동영상을 벌써 몇번째 방영하고 있다. 빠짐없이 전회를 다 본 건 아니지만 연말엔가 처음 채널을 돌리다 프로그램을 알게 된 이후, 부러 시간을 기다려 일부러 찾아본 강의 수업에서 나는 강의 내용은 일단 제쳐두고 교수가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학생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따라 논리를 펼치고, 각자 생각에 따라 학생들이 편을 나누어 논리를 지원하고 보태다가 다시 강의 주제로 돌아와 다양한 정치철학을 제시하는 토론식 수업법이 너무도 매력적이고 경이로웠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개인의 기본권은 얼마나 침해되어도 좋은지, 완전한 자유주의가 공동체의 이익과는 어떻게 상충되는지를 주로 살펴보는 강의 내용은 사실 새로울 건 없는 것 같다(라고 주장하며 책은 안읽을 생각이다. 역시 나는 문자 매체보다 영상매체를 선호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음. ㅠ.ㅠ). 그런데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배경을 안고 모인 수많은 학생들이 본인의 입장에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거침없이 일어나 주장하고, 교수는 또 그런 주장에 대한 반박 의견을 이끌어내고 모든 학생들의 주장을 일일이 기억했다가(학생들의 이름까지!) 강의주제와 연결해 결론을 내리거나 철학적인 논리를 설명하는 외적인 강의 모양새가 참 감탄스럽다. 

내게 놀라운 건 자칫하면 바보 되기 십상인 편협한 주장을 펼치는 학생들도 매우 당당하고 나름 논리적 근거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교수가 이끄는 반대토론을 거쳐 학생들 스스로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게 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조단조단 또박또박 설명하는 마이클 샌델의 목소리와 말투는 또 얼마나 정갈한 느낌인지. 하버드대학이나 서울대의 엘리트주의가 나라를 망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강의 동영상을 보며 불쑥 나도 저런 명강의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더불어 손석희 교수의 강의도 문득 궁금하다). 물론 나는 토론되는 사안에 대한 내 주장이 어느 쪽인지 자신이 없어서 (실제로 강의 동영상 보며 어느 쪽이 옳고 정의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주제들이 꽤 있었다) 절대로 손들고 나서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일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간혹 전해듣는 현실속 학교 현장은 여전히 한심스럽다. 중학생이 된 조카는 요즘 이른바 교사들의 '군기잡기' 분위기에 퍽 괴로운 모양이다. 자유로운 초등학교 분위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뭔가 부당하다고 느껴 이의를 제기하면 선생님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식으로 반응한단다. 나도 겪어본 일이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처음이라 주도권 잡으려고 더욱 그럴 거라고.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일방적인 소통은 억울할 수밖에 없고, 부당한 건 부당한 거다. 하물며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성적인 토론의 자질이 어떻게 싹틀 수 있겠나. 

예를 들어, 체육복 문제. 산꼭대기 학교의 특성상 대운동장은 건물 바로 앞이 아니라서 산너머 언덕을 한참 내려가야 한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엔 절대로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까지 시간 내에 갈 수 없다. 체육시간 전에 미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어야 한다. 체육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교실로 돌아와 다음 수업 이전에 교복으로 갈아입을 시간 역시 없다. 그런데 체육시간 바로 직전이나 직후에 배정된 일부 과목 교사는 애들이 '모양빠지게' 체육복을 입고 자기 수업을 듣는 걸 못견딘다. 다음 수업이 체육이든 아니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충분하든 말든, 자기 수업시간엔 모두 교복을 단정히 입고 있으라는 주장이다. 아 왜??? 물론 체육교사는 이전 과목 선생의 취향이 어떠하든 자기 수업시간에 늦는 학생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체육 수업에 많이 늦었다간 벌로 언덕배기 중간에 있는 감나무까지 선착순 뛰기를 몇번이나 해야할지 모른다. 딜레마다.

30여년 전에도 교사간의 알력은 우리를 괴롭게 했다. 설마 중학교 신입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왜 아직도 그러고들 앉았는지! 물론 체육복을 입고 있어도 이해해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원칙이 뭔가 더욱 헷갈린 거다. 과거에 우리는 그나마 만만한 체육선생에게 부탁했다. 체육복 미리 입지 말라고 강요하는 선생을 설득해달라고. 결과는? 둘이 교권을 두고 으르렁거리며 싸웠을 뿐이다. -_-; 조카에겐 별 수 없이 과거 우리의 비법을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체육복 바지만 미리 갈아입고 위엔 교복을 입은 채 다른 수업을 받으라고. (그런데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복 웃도리에 체육복 바지만 입고 있는 건 정말 더욱 모양빠지는 일이다! 흉측하기 이를데 없는! 게다가 그 꼴로 화장실이라도 갈 때 학생부 교사에게 걸리면 '복장불량'이란 지적을 받는다. 체육복이면 체육복, 교복이면 교복을 입으라고. 대체 어쩌라는 거냐!) 그러고서 한편으로는 반장을 보내든지 해서 선생과 다시 협상을 시도해보라고 권했다. 교실에서 단체로 아이들의 왁왁대며 불평을 쏟아내는 건 교권에 대한 발칙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교사들이 좀 많은가. 은밀히 교무실로 찾아가 '간절히' 부탁하면 권위를 세울 수 있으니 혹 들어주려나... 물론 과거처럼 괜히 교사들끼리 싸움만 붙이는 수도 있겠지만. ㅎㅎ

아직도 윽박지르고 일방적인 주장을 강요하면 씨알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느 분야에든 많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기주장이 강한 요즘 아이들은 그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어린 조카들도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의견을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던데 교육학도 배운 사람들이 왜들 그러실까. 답답하다. 하기야 그러니까 너도나도 팍팍한 이 나라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조기유학을 보내거나 이민을 떠나는 것이겠지. 그리고 대대로 토론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나면 모든 주요 협상 테이블에서 늘 불리할 수밖에 없을 테고. 

조카의 고민을 듣고 돌아온 탓인지 리모컨질 하다 걸린 EBS 정의 재방송을 또 한번 구경하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나라 애들도 저렇게 멋지게 토론하는 어른으로 커야 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그저 시스템과 어른들이 문제다. 
Posted by 입때
,

이중잣대

투덜일기 2011. 2. 25. 00:20

오전에 한참 곤히 자는데 전화가 울렸다. 화면엔 0050******** 엄청 긴 숫자가 떴고 잠결에도 국제전화인가보다 짐작했다. 동생네인가? 뜻밖에도 후배 S였다. 과테말라에 있단다. -_-; 작년 여름에 만났을 때 S는 회사를 관두고 모은 돈을 톡톡 털어 1, 2년 예정으로 연말쯤 세계일주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걱정하는 부모님에겐 현지에 아는 선배가 있어서 그쪽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안심시키기로 했다나. 실제로 베트남에서 중고 컴퓨터 사업을 하는 선배가 있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유럽과 북미는 이미 구석구석 거의 다 다녔으므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속속들이 다녀보는 것이 S의 목표였다. 떠나기 전에 한번 더 얼굴을 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미안하게도 그간 나는 그가 여행을 떠났는지 말았는지도 잊고 있었다.

계획성이 철저한 S는 작년 연말까지 회사일을 마무리하고 (회사에선 멋진 계획이지만 미친 거 아니냐고 했단다 ㅋㅋ) 스페인어를 열심히 익힌 뒤 드디어 올초 비행기를 탔단다. 그래서 현재 여정이 과테말라. 막 카약을 타고 들어와 저녁 요가수업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안하던 요가수업을 과테말라에서? 참 신기한 친구다. 거기서 만난 현지인 친구가 좋다고 해서 같이 다니고 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단다. 염려했던 치안 문제는 지금까지 괜찮은 듯. 원래도 좀 까무잡잡한 얼굴이지만, 현지인과 별 차이 안나게 더 새까맣게 태우라고 말해주고는 부러워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다 때려치우고 전재산을 털어 홀로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니, 진짜로 그걸 실행에 옮기는 이가 내 주변에도 있었구나 싶어 정말 신선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아마 올해로 서른여섯인가 일곱일 거다) 돌아와서 어떻게 다시 자리를 잡을 생각이냐고 지인들이 대부분 만류했던 데 반해, 나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찬성이라며 쥐뿔도 모른 채로 마구 부추겼다. 홀몸이라 나중에 돌아와서도 NGO 단체에서 가난하지만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인데 뭐가 걱정이랴. 이미 터키, 이집트 같은 말 잘 안통하는 데 가서 무전여행에 가까운 생고생도 다 겪어본 인간이고. 나도 역마살이 있다고 가끔 이야기하지만, S야말로 진짜 역마살을 즐기는 인생이 아닌가. 최고다. S가 건강하고 신나게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유람한 뒤 이야깃거리를 잔뜩 안고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는다.

우유부단함의 특징은 노상 경우의 수에 따라 고민만 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실천력과 추진력이 매우 떨어져 팍팍 저지르고 사는 이들을 부러워한다는 점이다. 헌데 막상 그들을 부러워하면서도 간간이 못되게도 꼬투리를 잡고 앉았는 내가 보인다. 예컨대, 동생네는 아이들 봄방학을 맞아 난데없이 며칠 만에 전격 여행을 결정하고 동유럽으로 떠났다. 콧바람 들어 여행가고 싶다기에 가까운 일본이나 다녀오려나보다, 그랬더니 내친김에 유럽이란다. 오 놀라운 추진력! 게다가 악! 마흔살이 넘도록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빈의 거리를 열네살, 아홉살 조카들이 제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거닌다니 어찌나 부럽던지. 그런데 곧 걱정이 들었다. 일정상 돌아온 이틀후가 곧장 개학, 입학이다. 가뜩이나 중학교 올라가 새학교와 새친구 적응에 스트레스 많을 텐데 시차적응까지 하려면 힘들지 않을까? 제 부모도 걱정 안하는 걸 왜 고모가 걱정하고 앉았는지 원! 설마 이게 시누이의 심술? 그건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다만 나는 암울한 인간형이 되어 좋은 면보다 안 좋은 면, 미리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항상 먼저 하고 앉았는 사람이 된 것 뿐이다.

예산부족으로 2년 계획을 1년으로 줄이긴 했지만 최대한 여유롭게 남미 대륙과 아프리카를 훑고 다니겠다는 S와 통화를 끝낸 뒤 다시 잠을 청하며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이번에도 친구와 가족에게 이중잣대를 들이댔었다는 사실이다. 늘 그렇듯 친구나 지인에겐 유독 관대하다. 같이 떠안을 책임감의 비율이 적기 때문일까. 반면에 가족에겐 그 누구보다 너그러워야하는데 꼭 옹졸함을 부려 간섭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족이 멍에처럼 느껴지고 피곤하다고 항상 불평하면서도 말이다. 요번에 동생네에게도 겉으로는 재미있게 잘 놀다오라고 말하면서 내심 왜 하필 이런 '중대한' 시기에 여행을 떠났는지 나무라며 혀를 끌끌차고 있었다는 얘기다. 학기 중에 애들 학교 안보내고 여행 떠나겠다고 했으면 더욱 어처구니없어 했으려나? (아니다, 나도 따라갈래~~!)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이렇게 나름 '중대한' 시기에 여행을 갔으니 그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어쩌면 더 큰 스트레스와 바쁨을 안겨줄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마지막 방학을 신나게 죽어라 놀면서 보내는 거잖아! 긴 여행의 묘미는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최대한 누리고 대접받고 멋진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음미하는 것일진대, 이보다 더 통쾌한  결정이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조카들도 새학기 시작을 앞둔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잊고 열흘간 토실토실 정신과 마음에 살이 올라 돌아오겠지. 그러고 나서 나중에 2011년을 회상할 때, '시금치 같은 흉측한 초록색 교복'을 입어야 하는 괴로운 중학교의 첫 인상 대신 멋진 유럽여행으로 시작한 한 해라고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저녁때 통화해보니 오늘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들어갔대고 모름지기 클림트의 그림을 보러갔을 거다. 악, 부럽다. 괜히 심술부리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부러워'만'하자는 의미에서 괜히 구실을 붙여 유럽 여행이나 남미 여행을 다닐 때 편할 것 같은 운동화를 샀다. 그거 신고 춘천 가서 닭갈비나 먹어야지. -_-;

(아 그러고 보니 유럽과 남미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한날에 받은 역사적인(?) 날이로군. 참 별것에 다 의미를 두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살면서 또 몇번이나 되겠느냐고! 이래저래 포스팅할만한 날이었다고 볼란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