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한참 곤히 자는데 전화가 울렸다. 화면엔 0050******** 엄청 긴 숫자가 떴고 잠결에도 국제전화인가보다 짐작했다. 동생네인가? 뜻밖에도 후배 S였다. 과테말라에 있단다. -_-; 작년 여름에 만났을 때 S는 회사를 관두고 모은 돈을 톡톡 털어 1, 2년 예정으로 연말쯤 세계일주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걱정하는 부모님에겐 현지에 아는 선배가 있어서 그쪽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안심시키기로 했다나. 실제로 베트남에서 중고 컴퓨터 사업을 하는 선배가 있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유럽과 북미는 이미 구석구석 거의 다 다녔으므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속속들이 다녀보는 것이 S의 목표였다. 떠나기 전에 한번 더 얼굴을 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미안하게도 그간 나는 그가 여행을 떠났는지 말았는지도 잊고 있었다.
계획성이 철저한 S는 작년 연말까지 회사일을 마무리하고 (회사에선 멋진 계획이지만 미친 거 아니냐고 했단다 ㅋㅋ) 스페인어를 열심히 익힌 뒤 드디어 올초 비행기를 탔단다. 그래서 현재 여정이 과테말라. 막 카약을 타고 들어와 저녁 요가수업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안하던 요가수업을 과테말라에서? 참 신기한 친구다. 거기서 만난 현지인 친구가 좋다고 해서 같이 다니고 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단다. 염려했던 치안 문제는 지금까지 괜찮은 듯. 원래도 좀 까무잡잡한 얼굴이지만, 현지인과 별 차이 안나게 더 새까맣게 태우라고 말해주고는 부러워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다 때려치우고 전재산을 털어 홀로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니, 진짜로 그걸 실행에 옮기는 이가 내 주변에도 있었구나 싶어 정말 신선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아마 올해로 서른여섯인가 일곱일 거다) 돌아와서 어떻게 다시 자리를 잡을 생각이냐고 지인들이 대부분 만류했던 데 반해, 나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찬성이라며 쥐뿔도 모른 채로 마구 부추겼다. 홀몸이라 나중에 돌아와서도 NGO 단체에서 가난하지만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인데 뭐가 걱정이랴. 이미 터키, 이집트 같은 말 잘 안통하는 데 가서 무전여행에 가까운 생고생도 다 겪어본 인간이고. 나도 역마살이 있다고 가끔 이야기하지만, S야말로 진짜 역마살을 즐기는 인생이 아닌가. 최고다. S가 건강하고 신나게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유람한 뒤 이야깃거리를 잔뜩 안고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는다.
우유부단함의 특징은 노상 경우의 수에 따라 고민만 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실천력과 추진력이 매우 떨어져 팍팍 저지르고 사는 이들을 부러워한다는 점이다. 헌데 막상 그들을 부러워하면서도 간간이 못되게도 꼬투리를 잡고 앉았는 내가 보인다. 예컨대, 동생네는 아이들 봄방학을 맞아 난데없이 며칠 만에 전격 여행을 결정하고 동유럽으로 떠났다. 콧바람 들어 여행가고 싶다기에 가까운 일본이나 다녀오려나보다, 그랬더니 내친김에 유럽이란다. 오 놀라운 추진력! 게다가 악! 마흔살이 넘도록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빈의 거리를 열네살, 아홉살 조카들이 제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거닌다니 어찌나 부럽던지. 그런데 곧 걱정이 들었다. 일정상 돌아온 이틀후가 곧장 개학, 입학이다. 가뜩이나 중학교 올라가 새학교와 새친구 적응에 스트레스 많을 텐데 시차적응까지 하려면 힘들지 않을까? 제 부모도 걱정 안하는 걸 왜 고모가 걱정하고 앉았는지 원! 설마 이게 시누이의 심술? 그건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다만 나는 암울한 인간형이 되어 좋은 면보다 안 좋은 면, 미리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항상 먼저 하고 앉았는 사람이 된 것 뿐이다.
예산부족으로 2년 계획을 1년으로 줄이긴 했지만 최대한 여유롭게 남미 대륙과 아프리카를 훑고 다니겠다는 S와 통화를 끝낸 뒤 다시 잠을 청하며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이번에도 친구와 가족에게 이중잣대를 들이댔었다는 사실이다. 늘 그렇듯 친구나 지인에겐 유독 관대하다. 같이 떠안을 책임감의 비율이 적기 때문일까. 반면에 가족에겐 그 누구보다 너그러워야하는데 꼭 옹졸함을 부려 간섭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족이 멍에처럼 느껴지고 피곤하다고 항상 불평하면서도 말이다. 요번에 동생네에게도 겉으로는 재미있게 잘 놀다오라고 말하면서 내심 왜 하필 이런 '중대한' 시기에 여행을 떠났는지 나무라며 혀를 끌끌차고 있었다는 얘기다. 학기 중에 애들 학교 안보내고 여행 떠나겠다고 했으면 더욱 어처구니없어 했으려나? (아니다, 나도 따라갈래~~!)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이렇게 나름 '중대한' 시기에 여행을 갔으니 그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어쩌면 더 큰 스트레스와 바쁨을 안겨줄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마지막 방학을 신나게 죽어라 놀면서 보내는 거잖아! 긴 여행의 묘미는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최대한 누리고 대접받고 멋진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음미하는 것일진대, 이보다 더 통쾌한 결정이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조카들도 새학기 시작을 앞둔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잊고 열흘간 토실토실 정신과 마음에 살이 올라 돌아오겠지. 그러고 나서 나중에 2011년을 회상할 때, '시금치 같은 흉측한 초록색 교복'을 입어야 하는 괴로운 중학교의 첫 인상 대신 멋진 유럽여행으로 시작한 한 해라고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저녁때 통화해보니 오늘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들어갔대고 모름지기 클림트의 그림을 보러갔을 거다. 악, 부럽다. 괜히 심술부리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부러워'만'하자는 의미에서 괜히 구실을 붙여 유럽 여행이나 남미 여행을 다닐 때 편할 것 같은 운동화를 샀다. 그거 신고 춘천 가서 닭갈비나 먹어야지. -_-;
(아 그러고 보니 유럽과 남미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한날에 받은 역사적인(?) 날이로군. 참 별것에 다 의미를 두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살면서 또 몇번이나 되겠느냐고! 이래저래 포스팅할만한 날이었다고 볼란다.)
계획성이 철저한 S는 작년 연말까지 회사일을 마무리하고 (회사에선 멋진 계획이지만 미친 거 아니냐고 했단다 ㅋㅋ) 스페인어를 열심히 익힌 뒤 드디어 올초 비행기를 탔단다. 그래서 현재 여정이 과테말라. 막 카약을 타고 들어와 저녁 요가수업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안하던 요가수업을 과테말라에서? 참 신기한 친구다. 거기서 만난 현지인 친구가 좋다고 해서 같이 다니고 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단다. 염려했던 치안 문제는 지금까지 괜찮은 듯. 원래도 좀 까무잡잡한 얼굴이지만, 현지인과 별 차이 안나게 더 새까맣게 태우라고 말해주고는 부러워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다 때려치우고 전재산을 털어 홀로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니, 진짜로 그걸 실행에 옮기는 이가 내 주변에도 있었구나 싶어 정말 신선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아마 올해로 서른여섯인가 일곱일 거다) 돌아와서 어떻게 다시 자리를 잡을 생각이냐고 지인들이 대부분 만류했던 데 반해, 나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찬성이라며 쥐뿔도 모른 채로 마구 부추겼다. 홀몸이라 나중에 돌아와서도 NGO 단체에서 가난하지만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인데 뭐가 걱정이랴. 이미 터키, 이집트 같은 말 잘 안통하는 데 가서 무전여행에 가까운 생고생도 다 겪어본 인간이고. 나도 역마살이 있다고 가끔 이야기하지만, S야말로 진짜 역마살을 즐기는 인생이 아닌가. 최고다. S가 건강하고 신나게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유람한 뒤 이야깃거리를 잔뜩 안고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는다.
우유부단함의 특징은 노상 경우의 수에 따라 고민만 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실천력과 추진력이 매우 떨어져 팍팍 저지르고 사는 이들을 부러워한다는 점이다. 헌데 막상 그들을 부러워하면서도 간간이 못되게도 꼬투리를 잡고 앉았는 내가 보인다. 예컨대, 동생네는 아이들 봄방학을 맞아 난데없이 며칠 만에 전격 여행을 결정하고 동유럽으로 떠났다. 콧바람 들어 여행가고 싶다기에 가까운 일본이나 다녀오려나보다, 그랬더니 내친김에 유럽이란다. 오 놀라운 추진력! 게다가 악! 마흔살이 넘도록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빈의 거리를 열네살, 아홉살 조카들이 제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거닌다니 어찌나 부럽던지. 그런데 곧 걱정이 들었다. 일정상 돌아온 이틀후가 곧장 개학, 입학이다. 가뜩이나 중학교 올라가 새학교와 새친구 적응에 스트레스 많을 텐데 시차적응까지 하려면 힘들지 않을까? 제 부모도 걱정 안하는 걸 왜 고모가 걱정하고 앉았는지 원! 설마 이게 시누이의 심술? 그건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다만 나는 암울한 인간형이 되어 좋은 면보다 안 좋은 면, 미리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항상 먼저 하고 앉았는 사람이 된 것 뿐이다.
예산부족으로 2년 계획을 1년으로 줄이긴 했지만 최대한 여유롭게 남미 대륙과 아프리카를 훑고 다니겠다는 S와 통화를 끝낸 뒤 다시 잠을 청하며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이번에도 친구와 가족에게 이중잣대를 들이댔었다는 사실이다. 늘 그렇듯 친구나 지인에겐 유독 관대하다. 같이 떠안을 책임감의 비율이 적기 때문일까. 반면에 가족에겐 그 누구보다 너그러워야하는데 꼭 옹졸함을 부려 간섭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족이 멍에처럼 느껴지고 피곤하다고 항상 불평하면서도 말이다. 요번에 동생네에게도 겉으로는 재미있게 잘 놀다오라고 말하면서 내심 왜 하필 이런 '중대한' 시기에 여행을 떠났는지 나무라며 혀를 끌끌차고 있었다는 얘기다. 학기 중에 애들 학교 안보내고 여행 떠나겠다고 했으면 더욱 어처구니없어 했으려나? (아니다, 나도 따라갈래~~!)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이렇게 나름 '중대한' 시기에 여행을 갔으니 그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어쩌면 더 큰 스트레스와 바쁨을 안겨줄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마지막 방학을 신나게 죽어라 놀면서 보내는 거잖아! 긴 여행의 묘미는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최대한 누리고 대접받고 멋진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음미하는 것일진대, 이보다 더 통쾌한 결정이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조카들도 새학기 시작을 앞둔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잊고 열흘간 토실토실 정신과 마음에 살이 올라 돌아오겠지. 그러고 나서 나중에 2011년을 회상할 때, '시금치 같은 흉측한 초록색 교복'을 입어야 하는 괴로운 중학교의 첫 인상 대신 멋진 유럽여행으로 시작한 한 해라고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저녁때 통화해보니 오늘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들어갔대고 모름지기 클림트의 그림을 보러갔을 거다. 악, 부럽다. 괜히 심술부리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부러워'만'하자는 의미에서 괜히 구실을 붙여 유럽 여행이나 남미 여행을 다닐 때 편할 것 같은 운동화를 샀다. 그거 신고 춘천 가서 닭갈비나 먹어야지. -_-;
(아 그러고 보니 유럽과 남미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한날에 받은 역사적인(?) 날이로군. 참 별것에 다 의미를 두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살면서 또 몇번이나 되겠느냐고! 이래저래 포스팅할만한 날이었다고 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