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난 감상을 좀처럼 쓰지 못하는 지병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몇자 적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정말 대단한 작가, 대단한 소설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몇년 전 나온 『내 심장을 쏴라』가 퍽 괜찮다는 후문을 더러 듣고도 읽지 않았던 건 무슨무슨 상을 탔다는 수상작에 대한 괜한 반감과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친구가 책을 디밀며 극구 권했다. 한번 읽어봐, 후회하지 않을 거야, 라면서. 알았다고 대답하고 보니 구경다니는 블로그 주인장들이 앞다투어 올해 최고의 소설감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읽고 보니 그럴만 했다. 어휴...
 
띠지와 뒤표지에 적힌 박범신의 추천사처럼 '괴물' 같은 작품이다. 번역료를 인세로 받든 매절로 받든 상관없이 이왕이면 책이 잘 팔리면 좋겠다는 마음에 한결같이 찬양일색인 주례사 후기를 남발하다 보면, 부끄럽게도 뒤표지에 역자후기 일부가 인용되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그러면 또 앗 뜨거라 싶어서 사탕발린 역자후기의 수위를 조절하는데, 몇년 전엔 그래도 꽤 괜찮은 책이다 싶어 최고의 찬사를 날린 적이 있다. 찬찬히 곱씹으며 읽어야할 문장임에도 일단은 뒷 이야기에 대한 조바심이 나서 체하든 말든 급히 책장을 넘겨야 직성이 풀리는 책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칭찬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서 써먹었어야 옳다는 생각이 독서 중에 불쑥 들었다. 처음엔 간결한 문장 하나 하나, 섬세한 표현과 묘사를 음미하며 읽어야지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헐레벌떡 숨가쁘게 읽고 있더라는 뜻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언제 다 읽었는지 모르겠고, 결과가 궁금하면서 동시에 책이 끝나는 건 안타까웠다.

7년전 열두살 소녀의 시체가 댐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용의자였던 댐의 보안팀장은 곧이어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댐의 수문까지 열어 마을주민 절반을 몰살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로 손가락질 받게 된 서원은 친척에게뿐만 아니라 온 사회에서 버림받아 모든 관계에서 격리되다시피 떠돌며 세상을 살아간다. 모든 것이 아버지 탓이므로, 서원은 스스로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 되는 상상을 하지만 한편으론 무언가 다른 진실이 있기를 막연히 기대한다. 그간 서원을 거두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댐 보안팀의 직원 하나. 7년 전 밤에 일어났던 일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음험하고 섬뜩한 복수의 그림자는 현재까지 드리워져 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치밀한 짜임새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도 대단하다고 느낀 건 탁월한 인물의 심리묘사라 7년 전 그날밤의 사건을 풀어내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에 나는 매번 홀딱 빠져들었다. 짠하고, 안타깝고, 오싹하고, 으스스하고, 참담하고, 화나고, 통쾌하고... 슬프다(두어 번 울었다). 수많은 감정에 휩쓸리다 책장을 덮고 나서 여운도 길다. 결국 나는 혀를 내두르며 책 날개의 저자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뭐 이런 작가가 다 있냐 싶어서. 아무래도 『내 심장을 쏴라』,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까지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천천히 쉬어가며 이 책부터 다시 읽고 나서. -_-;

급히 읽느라 인상적인 구절을 공책에 적어놓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용을 더 발설하면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작가의 말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체하련다.

우리는 최선의 -- 적어도 그렇다고 판단한 -- 선택으로 질풍을 피하거나 질풍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할 상황도 빈번하게 벌어진다(일간지 사회면을 점령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보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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