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01.03 2015년 10
  2. 2011.06.02 소중한 침 17
  3. 2011.05.17 아는 게 병 11
  4. 2010.12.21 감기약 테라플루 10
  5. 2010.05.28 먹어서 낫기 4
  6. 2010.04.03 병원 공포 11
  7. 2009.05.21 품위있게 죽을 권리 3

2015년

투덜일기 2015. 1. 3. 17:20

보통 새해가 밝고서도 한달은 지나야 새해 숫자를 쓰는 어색함이 덜어지는 것 같다. 올해도 마찬가지.

아직도 2015년이 밝았고 내가 한 살 더 먹어 드디어 '아홉수'를 만난 중늙은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진 않는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번엔 새해 달력을 하나도 미리 마련해두지 못해 뭔가를 기록해두어야 할 때마다 메모할 탁상달력도 벽걸이 달력도 없어 난감한데, 그 때에야 비로소 아 새해구나 싶다. 


2014년은 정말이지 12월 31일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다사다난했다. 막판엔 2014년 어서 가버려라, 그런 마음이었던 듯. 슬픈 일 가슴 아픈 일, 속상한 일이 한해 마지막 날까지 강타할 줄은 정말 몰랐다. 2014년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잔인한 해'라고 해야겠다. 그래서 되돌아보며 정리할 마음도 차마 들지 않는...


그래서 새해를 바라보련다.

2015년은 내가 밥벌이로 번역을 시작한지 딱 20년째 되는 해다. 첫 번역서의 발행일이 1995년 12월 10일. 10주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나갔던 것 같은데 20주년은 뭔가 기념해야 되지 않나 싶어서 뜬금없이 자축파티를 열어 친구들을 초대할까 뭐 그런 생각을 작년 내내 좀 하기도 했다. 같은 분야에서 20년이면 그래 너 장하다고 칭찬해줄만도 하지 않나. 특히나 이렇게 열악하고 가난한 대한민국의 출판환경에서 잘 버텼으니... ㅠ.ㅠ  (미래는 뭐 일단 접어둔다고 해도 말이다. 혹시나 번역인생 30주년 파티 따위는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세월 참 빠르다... 고 중얼거렸더니 그럼 뭐하냐, 그래도 대통령은 아직 안 바뀌었다고, 이후엔 또 얼마나 끔찍한 지도자가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누군가 지적해서 절망스러웠는데, 이 나라 절망스러운 건 뭐 하루이틀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 손으로 찍은 대통령이 선출되서 기뻐했던 시절에도 배신감에 부르르 떨었던 정치행각이 어디 한둘이었나. 사회의 부조리에 완전 무관심할 순 없겠으나, 일단은 이기적이든 말든 철저히 내 개인사와 일신 상의 안위에만 집중해 살겠다.


이미 건강 위험분자로 찍혀서 보건소에서 전화가 걸려오는 신세임을 감안, 운동도 많이 하고, 어차피 끌려다니기로 자청한 산에도 더 열심히 쫓아다녀 폐활량도 근력도 높이고, 그렇게 다진 체력으로 일도 더 꾸준히 열심히 하고, 가난이 곧 청렴이자 미덕은 아니란 걸 명심할 작정이다. 덜덜거리는 15년 된 차는 이제 좀 바꿔타야하지 않겠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전화기 꺼두고 도망치려는 비겁자의 마음도 떨쳐버려야한다. 점점 더 까칠한 쌈닭으로 변해가고 있는 뾰족함과 가시는 부디 가까운 사람들을 찔러대지 말고 더 멀리 밖으로 향하기를. 그래서 남들에겐 너그럽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겐 인색한 잣대를 거꾸로 돌려 잡아야겠다. 자책과 자학도 이젠 그만.  


공교롭게도 딱 새해 3일째 되는 날에 이런 작심을 적어놓고 있다니 웃기다. 작심3일의 새 의미를 정하자는 건가. ㅎㅎ 아무튼 습관처럼 건네는 새해 덕담이 아니라 블로그 이웃분들, 친구들, 이렇게 저렇게 아는 분들, 모두모두 새해엔 바라는 일 죄다 이루어지시고 부디 좋은 일, 행복한 일만 가득한 하루하루 맞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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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침

투덜일기 2011. 6. 2. 11:58

학창시절 앞자리에 주로 앉아야 하는 단신이라 침을 많이 튀기는 선생들에게 가끔 봉변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중학생 때는 착한 척을 하느라 싫은 내색도 못하고 슬쩍 닦는 걸로 그쳤지만 고등학생 때는 짝꿍과 동시에 야유를 보내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러면 선생은 뻔뻔하게 스승님 침은 로열젤리라 피부에도 좋으니 고맙게 알라고 응수했다. 흥!

아무리 깨끗해도 밖으로 튀긴 침이 남에게 로열젤리일 리는 없겠으나 본인에게는 로열젤리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걸 요번에 배웠다. 역시나 진료과를 또 한 군데 개척하신 엄마 덕분이다. 증상은 잇몸이 붓고 혀가 아파 고춧가루는 단 한 알갱이도 못 견딜 정도고 맛도 못느꼈다. 틀니를 해넣은 동네 치과에 갔더니 피곤해서 그런거라며 잇몸 가라앉을 때까지 한동안 틀니를 빼고 살라고 했다. 그러고도 좀체 나아지질 않아 교수 지정 특진은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대학병원 구강내과에 일반진료로 예약을 해 한달뒤로 날을 받았다. 그 사이 상태가 좀 나아지긴 했지만 나도 엄마도 내심 겁이 나서(심각한 병명을 마구 상상했다) 예약한 날에 진료를 받아보니, 궤양이나 염증은 전혀 없고 그냥 침 부족 때문이란다.

어떤 약이든 입마름이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엄마가 드시는 약은 무려 십수종. 약을 끊을 수도 없으니 침이 부족한 건 당연한 일이나, 입안에 침이 없으면 세균이 마구 번식해 곰팡이가 난단다. ㅠ.ㅠ 그래서 따로 염증이 없더라도 혀가 갈라지고 통증을 느끼고 맛을 모르게 된다는 것. 치료법은 곰팡이균을 2주간 약으로 없애고 수시로 인공침을 바르는 것이다. 인공 눈물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인공 침도 있더라. 그것도 스프레이 형태, 젤 형태로 다양하게. 스프레이는 낮동안에 한두번 뿌리고, 젤 형태는 자기 전에 혀에 바르고 자면 아침까지 세균번식을 막아준다는 듯. -_-;

상아질이 마모될 정도로 열심히 이를 닦는다고 닦는데도 자꾸만 충치가 생기는 사람이 있고, 양치질을 게을리 하는둥 마는둥 하는데도 이가 썪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 역시 침이 훌륭해서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전자에 속하므로 소중한 침이 별로 많이 안나온다는 뜻이다. 유난히 말할 때 침 튀기는 사람 정말 싫어하는데,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서 그렇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분비되는 침이 본인에게는 엄청 이롭겠다는 생각 처음 들었다. 아울러 잘 때 침흘리는 사람도 나쁜 게 아니라 건강엔 좋은 거겠지. 엄마 덕분에 알게되는 놀라운 인체의 신비. 또 뭐가 남았을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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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병

투덜일기 2011. 5. 17. 17:41

이 세상에 감기를 치료하는 약은 없으며, 모든 감기약은 증상완화제일 뿐이다.
어차피 감기는 약 먹으면 2주, 안 먹으면 보름만에 낫는다.
물 많이 마시고 밥이랑 과일 잘 챙겨먹고 잠 잘자서 몸의 면역력을 높이면 감기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감기약 먹으면 졸리고 멍해서 정신집중이 안된다.
감기약 먹고 운전하면 사고날 확률이 늘어난다. (무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본 것 같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지어주는 감기약의 알약 갯수를 보면 딴나라 의사들은 기함을 한다. 약 흡수 잘 되라고 소화제까지 처방하는 의사들 여기밖에 없다더라.

이상은 감기에 대한 평소 나의 지식이랄까 믿음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근거로 거의 3주간 계속 버텼다. 이번 감기는 다른 증상 없이 그냥 기침만 나왔던 터라 더욱 소신껏 밀고 나갔던 것 같다. 사실 무작정 버틴 건 아니고 지난번 먹고난 테라플루도 몇번 먹어주었다. 크게 효험은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기침도 낮엔 얼추 괜찮다가 밤에만 좀 많이 나왔다. 원래 기압이 낮아져 기침은 밤에 더 심하진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지난주초엔 기침을 하느라 뱃가죽이 당기는 수준까지 이르긴 했으나 나로선 별로 불편할 게 없었다. 나을듯 나을듯, 떨어질 듯 떨어질듯 하다가 밤만 되면 다시 도지는 기침이 그저 얄미울 정도였다. 그런데 왕비마마는 나의 기침을 못견뎌했다. 기침 소리 들을 때마다 병원으로 끌고 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기침보다도 그놈의 잔소리가 지겨워 결국 어제 동네 내과를 찾았다. 목안을 들여다본 의사는 내 짐작과 별 다를 것 없는 말을 했다. 염증이 좀 있기는 하지만 심하지 않다. 낮에 물 많이 마시고 체온관리 잘 하고 푹 쉬는 정도로 나을 수 있겠지만 약을 먹으면 좀 더 빨리 나을 테니 이틀치 처방을 내려주겠다. +_+

주사는 맞고 싶으면 맞으라고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당연히 안 맞기로 했다. 약만 타가지고 돌아와 어제오후부터 시간 맞춰 열심히 먹고 있는데.... 

젠장,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밭은 기침은 콜록콜록 똑같고 괜히 정신만 멍하다. 알러지 약까지 들어 종류도 6가지나 되는데 왜 효과가 없는 거냐!(콧물에다 몸살까지 겹쳤으면 약을 열개는 처방했으려나? -_-;) 엄마는 주사를 안 맞아서 그런다며 약 다먹고 내일은 주사까지 맞으라고 또 성화다. 나는 애당초 병원에 갔던 걸 후회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 것 같다. 의사와 약의 권위를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가짜 약을 먹고도 30%쯤의 환자들은 증상이 완화된단다. 그래서 그런 착한(?) 환자들과 의심 많고 부정적인 태도의 환자들은 치료효과가 두배나 차이를 보인다. 플라시보 효과 대신 역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걸 노시보 효과라고 한다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딱 그짝이다. 이 세상 감기약을 죄다 불신하는 나에게 감기약이 효력을 제대로 나타낼 리 없잖은가. ㅋㅋㅋ 병도 병이지만  나는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인 셈. 어쩌면 아는 게 병이 아니라, 불신과 회의가 병일지도...  역시나 믿을 건 내 몸과 오기밖에 없다 싶다.

이놈의 기침 감기 바이러스, 내 오늘부터 너를 물에 빠뜨려 죽여주마!
기를 쓰고 물을 마시고는 있는데...
계속 화장실 다니느라 귀찮아 죽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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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약 테라플루

투덜일기 2010. 12. 21. 01:44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병원도 안 가고 약도 안먹고 버티며 '잘 먹어서 낫는' 식탐 요법을 주로 찾는 나지만 '레몬차처럼'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감기약이 있다니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제부터 콧물이 심해 줄줄 흘러내리지 않으면 코가 꽉 막혀 제대로 호흡이 곤란한 지경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먹어보겠단 생각도 안했겠지만 말이다.

요즘 그 감기약이 유행(?)이라지만 과연 우리 동네 약국에서도 팔려나 약간 의아했는데, 확실히 인기품목인지 "테라플루라는 감기약 혹시 있나요?"라고 예상 질문까지 연습하고 간 것이 무색하게도 약사 바로 앞 카운터에 가격표까지 붙은 채 따로 진열되어 있어 말 한 마디 없이 살 수 있었다. 밤과 낮 용으로 나뉘어 한 상자에 각각 6천원.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종합감기약 종류는 10알 한 상자에 2-3천원쯤이면 살 수 있는 데 반해 차 형태라서 아무래도 좀 비싸군 싶었다. 

어쨌거나 얼른 물을 끓여 찻잔에 담아 한 봉지 타 마셔본 첫 소감은 '맛없다!'였다. 레몬차 맛이 나기는 하는데 뒷맛이 몹시 쓰고 떫은 느낌. 인공적인 단맛에 뒤이어 섬뜩한 쓴맛이 파고드는 애들 감기약 시럽과 비슷한 맛이랄까. 으윽. 큼지막한 알약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도 못할 노릇이지만, 나로선 그 달달씁쓸텁텁한 감기약을 차로 한 잔 다 마시는 것도 꽤나 고역이었다. (차라리 한번에 꿀꺽 삼키는 알약이 낫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음) 하지만 벨로도 처음엔 맛 없어서 외면했다가 두번째 다시 시음한 뒤 맛있다고 여겼다니 나도 첫인상에 너무 얽매이진 않기로 마음 먹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내가 걸린 감기의 주요 증상은 어제부터 두통과 콧물, 코막힘이었는데 약을 먹고 나선 일단 코막힘 때문에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했던 상황은 좀 나아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콧물은 금세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4-6시간 간격으로 먹으라는 복용 설명에 맞춰 인상을 팍팍 써가며 두잔째 마시고난 지 세 시간쯤 지난 지금, 한 시간 전부터 주체할 수 없는 콧물의 공격으로 계속 팽팽 코를 풀어대고 있다. 나에겐 별로 맞지 않는 감기약인가? -_-;; 실은 제약회사를 탐탁지 않아 하는 나의 심리가 약효를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약을 타서 마시기 전에 복용 안내를 확인하다 보니 제약회사가 하필 '노바티스'였다. 일찌기 장 지글러 선생께서 탐욕스러운 다국적 제약회사의 선봉으로 고발한 바로 그 회사란 걸 알고 나니 어찌나 기분이 찝찝하던지. 하기야 유명 제약회사 치고 탐욕스럽지 않은 데가 없지만, 노바티스는 특히 백혈병 치료약 글리벡으로 전세계적으로 치사한 짓을 벌이고 있는 곳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백혈병 환자들이 청원한 가격 인하 청구 때문에 소송중일 거다.) 약에 대한 믿음이 발휘하는 플라시보 효과가 최소한 30퍼센트나 된다는 걸 감안하면, 노바티스에 대한 불신과 마뜩찮음이 약효에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ㅋ (언제부터 그렇게 정치적인 걸 그리 꼼꼼히 따졌다고!)

하긴 아래 포스팅한 네스프레소 기계도 말 나온김에 정말 확 질러? 싶은 충동에 좀 더 알아보니 네슬레에서 만든 거라고 했다. 네슬레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분유로 장난 치고 노동자 핍박하는 악덕 다국적 기업이라는데, 정치적으로 상당히 진보 성향을 띠고 있는 클루니가 그런 회사 광고를 찍었다니 급 실망스럽기도 하고, 과연 모르고 찍었을까 알고도 그냥 찍은 걸까 마구 궁금해졌다. (하기야 나도 <탐욕의 시대>를 읽기 전엔 인스턴트 커피 땡길 때 맥심 커피 대신 꼭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를 샀었으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하다.) 어쨌거나 나는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으니 훗날 캡슐형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게 되더라도 네스프레소는 사지 못할 거다. 조지 클루니와 광고만 소비해 주는 수밖에. -_-; 

트랙백할 욕심에 감기약 얘기 쓰다가 갑자기 장 지글러 선생 타령하고 있는 걸 보면 코를 하도 풀어대 정신이 없는 건 분명하다. ㅎ 암튼 겨우 두 봉다리 마셔본 결과로는 별로 쓸만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며, 특히 가격 대비 효용을 따진다면 괘씸할 정도다. (병원 거부증을 참아내고 차라리 동네 의원엘 갔더라면 진료비와 약값을 다 포함해도 4-5천원 안쪽이었을 텐데! 아깝다, 만이천원 -_-;; 그리고 더더욱 아깝다, 매달 내는 나의 건강보험료 십몇만원 ㅠ.ㅠ)  그래도 이왕 산 거, 끝까지 마셔볼 작정이긴 하다. 밤 약은 잠 올까봐 아직 못 마시고 있는데 그건 좀 약효가 다르려나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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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서 낫기

삶꾸러미 2010. 5. 28. 15:31

그리스, 로마 시대는 물론이고 19세기까지도 내과의사들은 대부분 식물학자였단다. 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과학자와 식물학자들은 병을 고칠 해답을 식물에서 찾아왔고, 신약개발 얘기를 들어봐도 과학자들이 아직도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는 게 맞다. 한방에서 아직도 요긴하게 참조하는 동의보감도 거의 다 식물 약재 비법 아닌가 말이다. 밥이 보약이고 밥상으로 병을 고친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거다. 독초도 조금만 먹으면 약으로 쓸 수도 있다잖은가. 어차피 인체는 스스로 치유하고 나으려는 에너지와 비밀스런 방편을 갖고 있는 유기체이므로, 치명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면 병은 낫게 되어 있다.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 몸을 잘 못 돌봐서 그렇지.

보호자로서 평균 일주일에 한번은 대학병원을 들락거리고는 있지만 의학과 약효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점점 회의가 들어 웬만해선 병원을 찾지 않는 나의 성향이 더욱 고착되는 중이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라는 사람들이 환자를 두고 하는 말은 거의 다 가정이고 가능성이지 않으면 협박이다. 이런저런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으면 나을 거라고 환자에게 확신을 주는 게 아니라, 일단 한번 복용해보고 주사도 맞아보자는 식이다. 의료과실을 입증하는 게 쉽지도 않은 나라지만, 어쨌거나 그런 의료사고의 가능성을 최대한 피해가려는 수법이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나 모든 부작용과 문제점에 대한 책임은 환자가 지라는 거다.

의료진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하도 오묘해서 같은 약도 사람에 따라서는 효과가 달리 나타나며 웬만한 위약의 플라시보 효과는 무려 30%에 달한다니 가끔 불치병이 기적처럼 나았다는 사례들은 엄밀히 말해 인간과 인체의 정신력과 체력의 승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임상효과가 입증된 약일지라도, 대조실험을 해보면 약에 대한 신뢰성을 지닌 집단은 탁월한 효과를 보는 반면에 약효에 대한 회의를 품은 집단은 약이 잘 듣질 않는단다. 딱 울 왕비마마 같은 분 얘기다. 멀쩡한 음식도 '혹시나 상했나' 의심하는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왕비마마는 주치의에 대한 신뢰도에 따라 드시는 약의 효과가 죄다 다르다. 특히나 진통효과를 내는 약이나 주사나 패치 따위에 대한 불신은 놀라울 정도라 남들보다 30%(플라시보 효과 만큼이다)는 약효가 떨어질 게 틀림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나로선 통 믿음이 가지 않는 민간요법이나 '카더라 통신'에 대한 신뢰와 효과는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대단하게 나타난다. '친구분의 권유 대로 매일 사과발효 식초를 먹었더니 머리와 다리가 확실히 거뜬해졌다'고 믿는 식이다. 결론은 하나다. 모든 것은 왕비마마의 마음과 생각에 달렸다는 것.

모전녀전이라고 나 역시 회의와 불신이 많은 인간이지만 식탐녀 답게 먹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몸을 다스릴 수 있다는 부분엔 믿음이 간다. 특정음식에 심한 알레르기를 보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모든 인체는 해로운 음식에 어떤 형태로든 거부반응을 보이며 이로운 음식엔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난다. 고혈압 당뇨 환자에게 육류를 줄이고 열심히 유기농 채소를 먹게 하면 반드시 혈압과 혈당 수치가 좋아진다. 왕비마마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하고 끼니마다 나물반찬과 샐러드 따위를 떨어뜨리지 않은 결과 1년 반만에 약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기에 자신있게 하는 말이다. 운동량을 늘여서 체중만 줄이면 당뇨 약을 끊어도 될 터인데 그것까지는 이룰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중년에 접어든 내 몸도 마찬가지다. 평생 변비 같은 건 모르고 살지만 외식을 했다든지 불균형하게 끼니를 떼워 푸성귀를 좀 덜 먹은 다음날은 확실히 화장실 가기가 어렵다. 이젠 몸도 적응했는지 채소와 과일을 좀 덜먹었다 싶은 날은 오밤중에라도 나도 모르게 우적우적 오이와 양배추 과일 따위를 씹어먹고 앉았다. 이 또한 심리적인 작용임을 잘 안다. 음, 나 오늘 채소를 좀 덜 먹었네. 내일 배변이 어려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몸을 지배해 현실로 벌어진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이런 미묘한 심리와 몸의 경향을 나는 다 '먹는 것'으로 해결하려 들고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닭고기가 먹고 싶으면 몸에 동물성 단백질이 부족하다는 의미고, 새콤달콤한 과일이 땡기면 몸이 비타민을 원한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한다.
 
몇달째 감기기운으로만 들락거리던 바이러스의 힘이 드디어 창궐하여 목이 붓고 콧물이 줄줄 나는 상황에 놓이면 즉각 나는 보신용 음식으로 대처한다. 예로부터 몸이 아파 입맛이 떨어지면 죽을 먹는 게 전통이지만 나는 '죽쑤는' 것도 싫고 별 씹을 것 없이 우물거리다 삼켜야 하는 죽도 싫다. 말이 보신용 음식이지, 맥 떨어지고 입맛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냥 머리에 '퍽' 하고 떠오르는 음식이 곧 내 몸이 원하는 보신용 음식이다. 이번에 그렇게 '퍽'하고 떠오른 음식은 난데없이 '치킨수프와 미나리'였다. 오래 전 <**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시리즈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지만 원래도 치킨수프의 뉘앙스는 서양인들이 몸 아플 때 먹는 심신의 보양식이다. '국물' 음식이 드문 서양식 가운데 그나마도 따끈하게 몸을 덥혀주는 음식이기 때문일 거다. 뜬금없이 미나리 생각은 왜 났는지 모르겠는데 미나리 특유의 상큼한 향이 그리워진 걸 보면 코감기로 둔해진 후각이 콕 찝어서 미나리 열망을 뇌에 전달한 모양이었다. ^^

아직은 사흘째 밤마다 열이 올라 후끈후끈 덥고 팽팽 코를 풀어대느라 코밑이 빨갛지만 온갖 채소를 듬뿍 넣은 치킨 수프와 미나리숙주 무침을 이틀 내리 먹어주었더니 얼추 감기가 나아가고 있는 기분이다(순전히 기분일지도).  열이 나는 건 내 몸의 백혈구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의미라 기특해서 얼음물을 마셔가며 열심히 지원을 해주고 있다. 어차피 감기 바이러스는 2주면 물러간다는데 꾸역꾸역 먹어서 나으려는 식탐녀의 노력으로 며칠 안에 똑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오늘은 비타민B군 섭취를 위해 돼지고기를 삶아서 쌈밥을 해먹을 것이기 때문. 거슬러 올라가면 음식과 약은 기원이 같다는 진리를 신봉하게 된 자의 몸부림은 곧 식탐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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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얘기긴 하지만 요번에 번역한 책에 이런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 미국 의학협회가 2000년에 발표한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고속도로 교통사고, 유방암, 에이즈를 포함한 여러가지 주요 사망원인보다 병원에서 의료 과실로 죽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 그 수가 연간 9만 8천명이 이르렀다고. *_* 우리나라랑 미국이랑 인구 비율이 워낙 다르긴 하지만,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닌가!

사실 우리 아버지도 119를 불러 타고 가기는 했지만 두발로 멀쩡히 응급실에 걸어들어가셨는데, 쓸데없이 말라리아니 뭐니 엉뚱한 추측으로 밤새도록 온갖 검사 다 받고도 발열과 오한의 원인을 못찾다가 아침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위중한 순간이 된 다음에야 의사들은 심증이 가는 병명을 <짐작>해냈었다. 물론 그땐 이미 늦은 뒤였다. 의료 과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두뇌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심증뿐 의구심을 밝혀낼 도리도 없었고 워낙 황망해 아무런 경황이 없어, 우리로선 그래도 그 못미더운 의사들에게 매달리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닥터 하우스 팀도 병명을 알아내기까지 며칠씩 걸리기도 하지 않더냐고 속으로 애써 위로를 하면서.

책의 저자는 그런 의료 과실의 가장 큰 원인이 의료진의 무능이 아니라 안일하고 무심한 태도 때문이라며, 흔히 건강에 관한 한 주도권을 의료진에게 모두 맡기는 게 보통이지만 환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의료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게 귀찮을 만큼 묻고 의견을 제시하고 대안을 촉구하라고 권한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실수를 범하는 인간인데, 또 바로 그 전문가라는 위치 때문에 실수가 있어도 제도적으로 다들 쉬쉬하며 덮기에 급급해 수많은 과거 실수에서도 통 배우는 게 없단다. 게다가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수의 통계 자료를 지식으로 갖고 있는 의료진이 아니라 바로 본인므로, 최대한 치료 효과를 높이려면 환자 본인이 주도권을 갖는 수밖에 없단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건강을 극단적으로 위협받는 순간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겠지만, 그 전엔 최대한 대체의학이나 믿음직한 민간전승요법에 더 기대어 건강을 챙기겠다는 사람이다.

온갖 지병을 다 갖고 계신 왕비마마 덕분에 한달에 평균 두세 번은 종합병원엘 가야하는 형편인데, 이 나라에선 의료 과실을 입증하는 게 미국보다 훨씬 더 어려운 탓에 돈 많은 사람들 아니고선 감히 거대권력인 의료계와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걸 감안할 때 정말이지 환자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약 처방의 날짜계산이 잘못되었다거나, 약을 하나 빠뜨렸다거나, 다음 진료예약이 상담시 정한 날짜와 달라진다거나 하는 행정적인 착오는 실수 축에도 들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걸핏하면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미국에서야 연간 의료 과실로 판명된 사망자 통계가 9만 8천명이라지만, 우리나라는 아마 의료 과실로 환자가 사망했음을 인정한 건수가 역사상 통틀어도 98건도 되지 않을 것 같다. CT 조영제 주사 하나를 맞아도 온갖 부작용으로 인한 결과는 본인 책임이라는 사유서에 서명을 받는 형편이니 뭐. -_-;;

월말에 또 왕비마마의 병원 거사가 잡혀 있어 어제는 그 건과 관련하여 무려 여섯 개 과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협진 상담을 하고 수술동의를 받아야했는데, 마지막 코스였던 심장전문의와 마취전문의는 수십 가지가 넘는 약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조차 난감해 했다. 외부 병원 약도 아니고 다 지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이라 컴퓨터 모니터에 진료과목 별로 종류 별로 다 뜨는 게 내 눈에도 확인되던데도! 미리 수술관련 안내문을 숙지하고 있던 내가, 그리고 작년 수술에서 이미 어떤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익히 겪어본 내가 이런이런 약은 지혈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미리 끊어야하는 게 아니냐고 넌지시 알려줘야 했다. +_+ 

아침부터 다저녁때까지 온종일 층층마다 병원을 뺑뺑 돌며 여러 과에서 의사들이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이유는 울 엄니가 워낙 고위험군 환자이기 때문일 텐데, 의례적인 절차라고는 해도 어쩜 다들 그렇게 건성건성인지 원 도무지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왕비마마가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는 대여섯개 진료과에서 그나마 정성스럽게 오랜 시간 문진으로 시작해 이런저런 점검을 하고 검사 결과를 알려주고 다정히 환자를 안심시키는 주치의는 딱 두명 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잘 지내셨어요? 별다른 일은 없으셨죠? 그럼 드시던 약 또 처방해드릴게요."라며 1분만에 진료를 끝내는 식이다. 환자인 울 엄마도 보호자인 나도 특별히 물어볼 게 없으면 더 시간을 빼앗는 게 민망할 지경.

간병 무수리 생활을 하도 오래한 전적 덕분에 이젠 병원 돌아가는 판세가 빤히 눈에 보이는 것 같고, 그놈의 행정절차와 의료계의 자존심 때문에 환자 측에서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소용없는 일이 무언지 대강은 파악이 된다. 요번에 번역한 책 때문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나는 의료진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고 수긍하는 <착한> 보호자였지만, 허망하게 아버지를 잃고 나선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게 커져 사사건건 의구심이 생겨 자꾸 꼬치꼬치 묻고 따지게 된다. 그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쓸데없이 키우지 않는 건 물론이다. 게다가 어리바리하게 주치의 지시를 잘못 알아듣는 인턴이나 간호사들의 실수를 미연에 막으려면 정말로 환자와 보호자가 똘똘하고 영악해질 수밖에 없다. (몇년 전엔 퇴원을 위해 항생제를 이틀전부터 끊기로 했는데, 멍청한 초짜 간호사 하나가 항생제를 새로 매다는 바람에 퇴원이 지연될 뻔하기도 했었다. 엉뚱한 약을 잘못 놓지나 않은 걸 고마워야 하는 건지도...)

병명도 다양하게 골고루 끼고 계신 왕비마마를 보필하려면 병원과 의사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매번 다니면서도 참 멀리하고픈 곳이 또 병원이다. 박수근 그림이 걸려있고 한켠에 갤러리와 카페가 생겨난 대학병원 로비는 마치 백화점에 쇼핑 다니듯 병원도 소일거리 삼아 다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애쓰는 듯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구태의연하게도 의술이 인술이라는 사실이다. 병을 다루는 게 곧 사람을 다루는 일임을 젊고 늙은 의사들이 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면 좋겠건만, 단지 하나의 그럴싸한 직업으로 선택되어 가는 양상이 짙은 의사라는 직업이 점점 안타깝고 염려스럽다. 눈에 불을 켜고 왕비마마를 지켜야하는 병원생활이 또 3주 뒤로 다가왔다. 왕비마마는 수술이 무서워서 심장이 벌렁거릴 뿐, 온통 관심이 집중되는 입원생활 자체는 막상 퍽 즐기는 양상을 보이시는데 간병무수리는 숨막히는 병원공기와 차고 좁은 보호자 침대에서 버티는 쪽잠 생활이 싫고 겁나서 역시나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나저나 참, 저 책은 과연 잘 팔릴까?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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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대법원에서 존엄사 권리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소송중이었던 환자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 같은데, 얼마 전 서울대병원에서도 말기암 환자의 경우엔 별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을 존엄사의 범위와 관련법 제정 문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진척이 있는 듯 해 기쁘다. 소모적인 중병으로 오래 앓지 않고 편히 자연사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사람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수명이 나날이 길어지면서 말년에 온갖 병마에 시달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게 사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죽음을 맞게 되어 있지만, 자살을 제외하곤 그 운명의 순간을 자기 의지대로 결정할 방도가 없었다.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는 물론이고 이제껏 중병에 걸린 환자의 치료방향에 대한 결정권은 언제나 의사와 보호자의 몫이었다. 입원할 때부터 치료비를 담보할 수 있는 연대보증인을 반드시 세워야 하고, 아주 간단한 수술에도 각종 의료사고에 대한 온갖 책임을 다 짊어지겠다는 보호자의 동의서가 필수적인 이 나라 의료체계에서는 무엇 하나 환자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회생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 의미도 없고 소모적이기만 한 연명치료를 무작정 이어가며 환자 본인과 가족들을 경제적,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뜨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치료비가 없거나 병상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살아날 가망성이 있는 환자의 목숨을 비정하게 끊어버려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당연히 살인이고 파렴치한 범죄임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치료의 단계가 아예 불가능해져서 진통제로도 고통을 제대로 줄여줄 수 없고, 전적으로 기계장비에만 의존해 고통스럽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죽음의 순간을 억지로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라면, 그 환자가 바로 나라면 나는 환자의 인권따위를 운운하는 게 하찮게 보이는 중환자실의 숨막히는 공기를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을 것이고, 기꺼이 편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가족의 입장에선 또 마음이 달라짐을 나 역시 잘 안다.
2년 전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멀쩡히 걸어다니며 농담을 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시지 않았을 때, 우리 가족들은 냉정하게 가망성을 낮춰 말하는 의사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린 의사들을 믿느니,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 등산을 다니시던 울 아버지의 의지력과 건강을 믿는다며, 고집을 부렸다. 겨우 2주만에 뇌손상으로 적극적인 치료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요양병원 같은 곳으로 모시고 나가라는 세브란스 병원측의 몰인정한 통보를 받고도 우린 아버지가 곧 깨어나실 것이기 때문에 믿음직한 의료진이 없는 요양병원 같은 곳은 절대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온갖 연줄과 인맥을 동원해 다른 대학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나서도 우린 희망을 버릴 수 없었고, 의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든말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장기 입원에 대비해야 한다고 의논을 했었다. 그땐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렇게 온갖 주사와 약물로 버티고 있으면 기적 같은 게 일어나 아버지가 조만간 번쩍 눈을 뜨실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날이 약물과 주사의 양이 늘어났고, 체액순환이 거의 안되는 아버지의 체중도 늘어났다. 의사들은 <뇌사 직전의 상태>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아직 뇌사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고 우기는 우리들에게 의사들은 그나마 아버지가 그 어떤 고통도 느끼실 수 없으니 다행이라는 식으로, 아버지를 우리가 쓸데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었다. 마지막엔 거의 협박처럼 들리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보호자들의 고집 때문에 무리한 치료를 계속하게 되면 나중에 임종후에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고. 우리 아버지도 그 병원으로 옮긴 뒤부터 따져도 이미 10kg이나 체중이 늘었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의사들이 냉혹하게 퍼센티지로 말하는 가망성에 연연하지 않고 온갖 치료방법을 동원해 아버지를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최선을 다해보지도 않고 쉽사리 처음부터 포기할 가족이 어디 있겠나. 야속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한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는데, 너무 많이 부어 평소의 모습과 퍽 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켠에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한다. 억지로 온갖 약물과 주사액을 주입하던 과정에서 혹시 아버지가 고통을 느끼셨던 건 아닐까, 내 마음 편하자고 심한 고집을 부린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죄송한 마음은 마음이고, 가족으로서 품는 희망은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쪽을 선택했더라도 후회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여한없이 노력하고 버텨보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환자의 입장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센터 중환자실에 계시는 동안 그곳 의료진들은 무의식인 환자의 치료를 편하게 하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버지에게 환자복도 입히지 않은 채 얇은 시트로 덮어놓기만 했었다. 중환자실에서도 홀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체온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해당 바이러스에 맞는 항생제를 찾는 게 시급한 상황이긴 했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인권을 찾는 게 사치일 순 있어도, 평생 점잖으셨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내가 아무리 의식이 없는 환자라도 발가벗겨져 아무렇게나 의료진의 손길에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품위 있게 죽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조목조목 따질 순 없지만,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으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기필코 나는 그 방법을 택하겠다. 타인이 주체가 되어 거의 의도적인 살인의 의미마저 풍기는 <안락사>라는 말 대신 <존엄사>라는 말이 쓰이게 된 배경에도 환자 본인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들어있을 것이다. 존엄사 결정권에 대한 엄밀한 법적 통제와 의사들의 정직한 직업윤리, 환자 및 보호자의 인권을 모두 감안한 도덕적인 존엄사의 존재는 정말로 환영할 일이다. 부디 엄숙한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이 제도가 맹목적인 종교 윤리를 앞세운 무작정 반대나 패륜의 도구로 이용되는 일 없이, 진짜로 품위있게 죽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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