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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01.28 경주를 가다 11

生還

여행담 2010. 4. 14. 14:44
일요일에 떠나 어제 무사히 돌아왔음. 동생들은 사흘이 후딱 갔다면서 벌써 와서 아쉽겠다고 위로했지만, 모녀의 2박3일은 어찌나 길었는지 원래 예정대로 3박4일이었으면 큰일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나의 바람과 달리 도착하는 날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바람에 소망하던 꽃비는커녕 육중한 노친네 부축하고 우산 받쳐들고 다니느라 무수리는 완전 녹초 상태로 몸살 직전까지 빌빌대야 했다. 게다가 어제 인천공항에 내리니 갑자기 겨울 날씨! 삭신이 쑤셔서 어젯밤부터 오늘오전까지 두 모녀는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끙끙 앓았음. ㅠ.ㅠ

동해바다에 면한 곳이라 느낌이 속초나 강릉 즈음으로 여겨지는 톳토리현, 시마네현 일부를 보고 온 주제에 일본이 어쩌니 저쩌니 말하는 건 가당찮은 짓이겠지만 어쨌거나, 처음 가본 일본에 대한 느낌을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 생각보다 벚꽃이 별로 없더라. 끝물이기도 하고 비가 와서 많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아직 벚꽃축제기간이라는데 공원에 서 있는 벚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음. 진해나 여의도처럼 일본에도 일부 대도시에만 대규모로 벚꽃길이 조성되는 건가? 
- 화산지역이라 당연하겠지만, 일본 온천물 우리나라 온천물보다 좋더라. 온천욕 별로 안 좋아해서 효능 따위 잘 모르는 편인데, 머리감고 나서 곧장 매끈거리는 머릿결이 느껴졌음. 떠나는 날 아침에 한번 더 담그지 못하고 돌아온 걸 모녀 둘 다 후회스러워했다. ㅋ (나이가 들면서 온천이 좋아지는 걸지도.. -_-;;)
- 다다미방으로 된 온천료칸 체험, 은근 매력있다. 다다미를 해마다 바꾸는지 어쩐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싱그러운 돗자리 냄새 같은 다다미 냄새가 풍겼고, 저녁 먹으러 다녀오는 사이에 다기 놓여있던 테이블 치우고 이불 깔아놓는 서비스 마음에 들었음. 
-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음식맛과 염도에 차이가 있으니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어쨌거나 이번 여행의 현지음식은 절반 정도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모험정신 강하고 식탐 많은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겠나. 일행 중엔 컵라면과 과자부스러기로 거의 연명한 이도 있었다. ㅋ 
- 귀엽고 아담한 경차가 정말 많더라. 경차 비율이 30퍼센트가 넘는다는 말만 들을 때랑 직접 보는 거랑 역시 느낌이 다르다.
- 전통과 옛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였다. 전국 어딜 가나 도시든 시골이든 볼썽사나운 아파트와 시멘트 양옥집 투성이인 이 나라와 달리, 오래된 일본집스러운 느낌의 나무로 된 집들이 참 많았다.

본격후기는 슬슬 밀린 일 눈치 봐가면서 올리도록 하겠음. 여행은 늘 좋지만, 집에 돌아오는 건 더 좋다. 예전엔 판에 박힌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싫어서 항상 여행 끄트머리에 느끼는 아쉬움이 몹시 컸던 것 같은데, 이번엔 진심으로 귀가를 기다렸다. 오죽하면 제목이 <살아돌아옴>이겠나. 집에 와서 기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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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주도 4

여행담 2008. 8. 6. 15:12
어쩐지 아쉬워서 두고두고 조금씩 후기를 올려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기간이 너무 길어질 것도 같고 기억력도 가물거려 나중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마무리를 해야겠다.

2008. 8. 1.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날.
아침식사용으로 사놓았던 소박한 양식(바나나, 사발면, 포장용기 밥 따위)들은 거의 떨어져 우유와 주스 정도만 남았지만 그나마도 모두 해치우고 가야한다는 일념에 모두들 우유와 주스를 두잔씩은 벌컥벌컥 마셔댄 것 같다.
호화로운 나인브릿지 빌라와는 일찌감치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는데, 밤중 귀가길에 앞좌석에 앉았던 잇점을 살려 얼핏 풀 뜯어먹는 노루를 구경한 벨로와 키드님과 달리 당시 뒷자리에 앉았던 지다님과 나는 결국 한라산 중턱에 사는 노루를 볼 기회가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숙소 주변을 산책했더라면 또 모르겠는데, 잠자리가 설어 토끼잠에 시달리는 데다 아침잠까지 많은 내가 그런 부지런을 떨 수는 없었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다.

마지막 날엔 다들 꼭 가보고 싶었다고 손꼽았던 김영갑님의 두모악 갤러리를 먼저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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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가 좋아서 제주도 사진만 찍다가 병든 몸으로도 제주도에 남아 그곳에 묻혔다는 사진작가의 일대기가 아니더라도 길쭉하게 제주도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은 참 아름답고 정겨워서 슬펐다.
접사는 금지되어 있다는 안내문을 보고서 이 정도면 접사일까 아닐까 고민하면서 굳이 서툰 솜씨로 찍어본 사진들은 그분 작품에 대한 훼손일 것도 같아서 올리지 않기로 했다.
마치 아프리카 대초원의 바람을 담은 듯한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처음엔 갤러리 바깥에 조성된 정원에 옹기종기 장식되어 있는 작은 조각들도 혹시나 사진작가의 작품일까 열심히 사진에 담았는데 어느 여성화가의 작품이라는 듯하여 맥이 좀 풀렸다. 어쨌든 현무암 하나하나를 쌓아올리고 곳곳에 나무를 심어 가꾼 정성은 본인의 것이라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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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 줄지어 놓인 작은 돌 연못도 예쁘다.

공항 시간에 맞춰 한 군데 더 어디를 갈 것인가 고민했던 우유부단한 일행들은 갤러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물 자연휴양림을 선택했다. 산굼부리와 휴양림 가운데 고르라고 칼자루를 지다님께 쥐어주었는데 단칼에 "휴양림이요!"라고 대답해주어서 속으로 얼마나 고마웠는지. ^^;;
산굼부리는 산등성이 중간쯤에 형성된 분화구라 가을엔 단풍과 억새밭이 장관이고, 봄에도 꽃구경이 흥미롭지만 한여름 뙤약볕에 그늘 하나 없는 그곳으로 올라가려면 죽을 맛이기 때문이다.

휴양림에 가기 전에 먼저 점심을 떼우기로 했던 우리는 전날 우도 정자 옆 간이 식당에서 본 열무국수를 계속 부르짖으며 비빔밥 같은 것도 좋지만 열무국수를 먹고싶다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주워섬겼는데, 토룡마을을 이끄는 뛰어난 영도력과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눈썰미마저 빠른 키드님이 전격적으로 국수전문점을 발견하여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시원한 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콩국수는 비싼 흰콩을 아끼느라 땅콩을 너무 많이 넣은 맛이기는 했지만 비교적 훌륭했고
열무국수 또한 담백하고 시원하여, 더불어 시켰던 해물파전과 먹기엔 금상첨화였는데 어찌나 양이 많던지
모두들 국수와 파전을 조금씩 남기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먹은 국수와 파전까지... 이번 여행의 먹거리는 <제주도에선 맛난 음식을 기대하면 안된다>는 나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주었다. 예전 제주도 여행에선 친한 현지인이 권해준 식당이 아닌 한, 늘 먹고도 별 맛도 없으면서 터무니 없이 바가지 쓴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는데, 제주도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가격을 내리고 정비를 했다더니 먹거리 문화까지 개발된 것 같아 흐뭇했다.

절물 휴양림은 역시 지난번 막내동생의 여행담을 주워듣고 알게 되어 처음 가본 것인데, 손바닥만한 공간을 휴양림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입장료를 받는 기분 나쁜 과거 경험과는 차원이 다른, 퍽 괜찮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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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넓은 중앙로엔 그늘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골진 나무판자가 정갈하게 깔린 오른쪽 숲길로 무조건 접어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오로지 우리의 목표는 그늘진 평상을 찾아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드러누워 산림욕과 낮잠을 즐기는 것이었다. ^^
그렇게 평상에 드러누워 올려다본 하늘이 어찌나 맑고 파랗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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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에 드러누워 이 사진을 찍을 땐 드러난 하늘 모양이 나비 같다고 생각하며 자랑삼아 찍은 것인데 와서 보니 막상 그 느낌이 별로 없다. 솜씨 탓도 있겠지만, 특히 자연은 마음에 담기는 것처럼 푸근한 모습으로 사진에 담겨주질 않는 듯.

숲속에선 피톤치드가 나오네, 음이온이 발생하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야 없는 법인데
이곳 평상에 드러누웠을 땐 확 트인 공간에서 절대로 잠들지 못하는 까칠한 인간답지 않게 나도 까무룩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숲의 심신 안정 효과가 그만큼 탁월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

아쉽게 휴양림을 떠난 우리는 공항까지 21분 걸린다는 네비게이션의 말을 믿고 시간을 안배했건만
마지막에 연료탱크를 꽉 채워 렌터카를 돌려줘야하는 상황에서 공교롭게 마지막 주유소를 지나치는 바람에 다시 공항에서 빠져나와 뺑뺑도는 난항을 겪기도 했지만, 무사히 차를 넘길 수 있었다.
이번에 새삼 알게 된 건 제주도 휘발유 값이 서울보다 훨씬 싸다는 것!
서울에선 2천원이 넘는데, 제주도는 리터당 겨우 1810원!
연료통을 가득 채우면 거의 만원 가까이 차이가 날 거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제주도에서 살고 싶어졌다.  +_+

제주도가 특별자치도가 되면서 국내여행이지만 공항에서 면세쇼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 듯한데
한도액이 40만원이다보니 아주 값비싼 명품 가방같은 것들은 있지도 않고 주로 화장품과 선글라스 정도인데도 사람들이 완전 미친듯이 쇼핑을 하더군.
나도 화장품을 사기는 했지만 대단히 정신없는 도깨비 시장 같은 분위기라 오래 구경하진 못할 듯했다.

다들 몹시 피곤하여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들 꾸벅꾸벅 조는 분위기였는데, 돌아오는 한성항공은 착륙을 앞두고 어찌나 불안하게 흔들거리는지 뱃속과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고 설상가상 통로 반대편에 앉은 몰상식한 인간이 계속 휴대전화를 끄지 않고 뭔가를 하고 있어 <다이하드>에서 몰래 기내에서 전화질하는 기자에게 주먹질을 했던 브루스 윌리스 부인의 장면이 떠오르질 않나, <아는 여자>에서 동치성 부모님이 기내에서 동치성이랑 통화하다 꽝 추락사하는 장면이 떠오르질 않나 불안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물론... 김포에 무사히 착륙했으니 이렇게 후기를 올리고 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내 몰상식 비율을 봐서라도 비행기 같은데선 아예 휴대폰 전파가 안잡히게 해야하지 않을까 공연히 부르르 주먹쥐고 떨었었다.
-_-
사실 여행을 다니면서 비행기 이착륙할 때 매번 불안하지만, <그래도 비행기 사고로 죽으면 보상금도 많이 나오잖아>라고 위로하며 자신을 달랬었는데 저가항공 비행기가 떨어지면 어쩐지 보상금도 적게 나올 것 같아 앞으로는 더더욱 좀 덜 흔들리고 안전한(확실하진 않지만;;) 비행기를 타기로 결심했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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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주도 3

여행담 2008. 8. 5. 14:03
셋쨋날(2008. 7. 31)은 드디어 내가 우도에 발을 디디는 날이었기에 더욱 설렜다.
스물한 살 이후 제주도엘 꽤 여러번 가봤지만 우도에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 수학여행이나 패키지 여행상품엔 우도행이 포함되지 않았었고 나중에 렌터카를 빌려 제주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됐을 땐 늘 날씨가 나빠 배를 탈 수 없거나 시간이 촉박해 매번 우도를 포기해야 했는데
우도에 하필 국내 유일의 산호해변이 있다는 말에 더욱 동경을 키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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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다 못해 검은 머리가 지글지글 타버릴 것 같은 강렬한 태양과 새파란 하늘 아래 우도행 배는 더욱 푸른 바닷물을 헤치고 출발했고,
방파제 위에 마주보며 서 있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사이로 성산항을 빠져나갔다.



















돌아보니, 일년 중에 말갛게 얼굴을 드러내는 날이 절반도 안된다는 한라산이 저 멀리서 우릴 배웅하듯 구름을 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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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항에서 빤히 건네다보이는 우도는 어느새 우리 눈앞에 나타났고 역시나 제일 먼저 빨간 등대가 눈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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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우릴 반기는 건 검은 바위 해안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갈매기들.
서해안 갈매기는 새우깡에 목을 매고 기를 쓰며 달려드는 데 반해 제주도 갈매기들은 인간들이 귀찮다는 듯 다가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

나름 서둘러 나선다고 생각했지만 우도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오후 2시.
가장 뜨겁고 더운 시간에 자전거로 우도를 한바퀴 돌아야 한다니 내심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최대한 넉넉하게 마지막 뱃시간에 맞춰 자전거를 빌린 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전거 초보자가 어련하겠나. 출발 직후 처음 만난 번잡한 삼거리에서 다가오는 트럭을 피하려던 나는 그만 어이없게 자전거와 함께 옆으로 넘어져 시멘트 차단벽에 무릎을 갈았다. 나중에 보니 바지에도 살짝 구멍이 났더군. -_-;;
그나마도 이후엔 피를 보는 사고는 없어 다행이었다.

처음 자전거를 세운 곳은 기대했던 대로, 하얀 산호가 깔린 해변이라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볼 수 있다던  서빈백사 해수욕장. 봄에 동생이 사진에 담아왔을 때만 해도 날이 흐리긴 했어도 이런 모습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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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우도에 간 지우











































미세하게 부서진 돌멩이처럼 새하얗고 동글동글한 산호 백사장은 똑같았으나
사람들이 들어가 휘저어 놓은 바다는 해초들이 떠올라 에메랄드빛은 커녕 뿌연 미역국 같았다. +_+

실망을 애써 감추고 다시 해안도로로 페달을 밟으니 드디어 백사장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옥빛 바다를 발견할 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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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앞에서 풀을 뜯고 있는 예쁜 어미말과 새끼말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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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다님과 벨로가 실제로 말을 타고 작은 마당을 한바퀴 돌며 신나게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벌써부터 기진맥진해진 나는 그늘에서 기력을 회복한 뒤, 근처 정자에서 전날 내기했던 대로 우도반점에서
자장면을 배달해 먹고는 잠시 행복해했으나 4시 넘어 늦은 점심을 먹고난 뒤의 체력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다행히 우도의 절반은 돌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햇빛은 숨막히게 뜨겁고 어느덧 맞바람까지 치고 있는데다 다리는 점점 무거워져 계속해서 일행들보다 최소 50미터는 뒤쳐져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막판 고비인 언덕이 시작되었으니 자전거를 끌고 올라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전망대가 있을 법한 우도 꼭대기의 등대 주변에서 잠시 쉴 때는 거의 내 정신이 아니었다.

아득하고 혼미했던 나의 정신이 반영된 듯 그 때 찍은 사진은 이렇게 뿌옇다.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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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미 상당히 얼이 빠져 헉헉대던 나는 이 사진을 찍고 나선 난간 기둥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깜박 잊었다가 나중에 자전거 세워둔 곳까지 가서야 비로소 기억해내고 후다닥 다시 가져오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으니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알만하다.

우도를 자전거로 1시간이면 돌 수 있다는 말은 확실히 거짓말이다.
우리는 서빈백사 해수욕장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는데 나중의 언덕 고비를 생각하면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반대방향으로 돌았더라면 초반부라 힘이 더 있기는 했겠지만 더 오랜 시간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야했을 터.
중간에 자장면을 배달시켜 한참 기다렸다가 점심을 먹고 중간중간 쉰 시간까지 합해서 꼬박 3시간 반이 걸렸는데, 아마 마지막 배를 놓쳐선 안되며 5시반까지 자전거를 돌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다면 나 혼자선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 같다. 아니, 앞으로 다시는 우도를 자전거로 돌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거다. ㅠ.ㅠ
지난 봄 자동차로 우도를 돌아보았던 막내동생은 내가 이번에 바구니 달린 자전거로 우도를 한바퀴 일주했다고 하자,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이 장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 나도 내가 자랑스러웠다.
우도 자전거일주는 남들에겐 별것 아니었을지 몰라도, 내겐 철인3종경기 못지 않은 레이스였음을 고백한다.
마지막 언덕을 오를 땐 첫날 느루를 타고 나갔다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어지러움증도 느껴졌으므로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사례를 할 터이니 트렁크에 자전거를 실어달라고 부탁을 할까,
트럭을 불러서 자전거를 보낸 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갈까,
일행들은 먼저 마지막 배로 돌려보낸 뒤 나는 우도에 남아 어디서든 일박을 하고 다음날 합류할까,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을 다 했었지만, 결국엔 무거운 몸과 자전거를 이끌고 마지막 언덕을 올랐고
생존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이후 우도 항에 도착해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시 배에 올라 성산항으로 돌아오던 과정은 과음 후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단편적이다. 선실에서 다짜고짜 드러누워 늘어져 있던 모습을 벨로가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지 않았다면 내 몰골이 얼마나 흉측했는지 몰랐을 듯.


성산항에서 가까운 섭지코지는 일몰이 가까운 시간에 가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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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유명한 건축물을 보겠다며 일행들은 검은 오솔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고
우도 이후 체력이 고갈된 나는 뒤에 남아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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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난간에 앉았다가 옆을 돌아보니 섭지코지의 또 다른 등대와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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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시나브로 기울어가는데 일행들은 돌아올 생각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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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이라 실제보다 어둡게 나와서 그렇지 아직 꽤나 밝았고, 사실은 일행들도 금세 돌아왔음 ^^;;)

섭지코지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9시까지 운영한다는 콘도 식당에서
<활어해물탕과 가마솥밥>을 먹을 일념에 열심히 달려왔으나 너무 늦어 방에서 사발면, 사발우동 따위로 저녁을 떼워야했지만 별로 배고픈 줄도 모르는 피로 뒤끝이라선지 그것 또한 감동적으로 맛있었다.

일행들은 또 다시 마지막 밤까지 포켓볼 열정을 불태우러 나갔지만 나는 홀로 남아 소파에서 뒹굴며 맥주를 홀짝였는데, 당연히 쏟아질 줄 알았던 잠은 놀랍게도 피로에 지친 마지막 밤까지 나를 배신하였으니... 오후 늦게 우도에서 원샷했던 커피 탓을 해보아도 이미 후회하기엔 늦은 뒤였다. 쓸데없이 예민한 잠버릇은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을는지 원...
암튼 그렇게 제주도의 마지막밤은 광란의 음주나 유희 없이 소근소근 가벼운 맥주 한잔과 함께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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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주도 2

여행담 2008. 8. 4. 17:10
사실 제주도로 떠나기 전에 나에겐 끝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원서 읽고 리뷰 쓰기를 죽도록 싫어하긴 하지만, 지난 원고를 워낙 늦게 넘겼던 터라 벌 서는 셈치고 출판사의 부탁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넉넉하게 2, 3주 동안 소설을 한 권 읽고 검토서를 보내달라는 약속날짜가 바로 제주도 출발 직전의 월요일.
그러나 또 내가 누군가.
원고 마감일에 관한 한 이미 거짓말쟁이 양치기소녀가 된 지 오래.
제주도 가기 전에만 보내면 되겠거니 차일피일 미루며 영화보고 친구 만나고 맛있는 거 사먹으러 다니며 실컷 놀다간 또 다른 책 역자후기 때문에 일주일 또 낑낑댔으니, 출발일 전날 새벽 3시 반까지 검토서를 정리하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책을 싸들고 가자 결심하고 말았다.

겨우 4시간 자고 일어나 제주도 여행을 시작했고 밤중에 일행들과 맥주도 한 잔 걸친 셈치고는 새벽까지 꽤나 양호하게 정신이 말짱했다. 역시 습성을 속속들이 잘 모르는 일행들과의 여행 때문에 소심한 인간답게 퍽 긴장을 했던 모양인데다, 더 늦기 전에 검토서를 마무리하고 남은 기간 부담없이 놀아야겠다는 욕망이 작용한 듯했다.
해서 모두들 잠든 새벽 (실은 닌텐도 동물의 숲에 심취한 벨로가 게임하는 소리가 딩동딩동 꽤나 오래까지 아어지긴 했지만;;) 게으름녀의 여행 첫날밤은 일과 함께 3시 반이 넘도록 이어졌다. ㅠ.ㅠ
원래 계획은 일을 끝내는 대로 클럽하우스로 걸어가서 24시간 사용할 수 있다는 컴퓨터로 문서를 정리해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새벽 4시가 다 된 시간에 숲속으로 난 꽤 먼 오솔길을 홀로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해서 또 다시 눈을 붙였다 떴다 4시간쯤 토끼잠을 잔 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고는
일행들이 일어나기 전에 숙소로 돌아올 심보로 몰래 카드 키를 들고 컴퓨터로 향했으나...

애당초 검토서가 늦어졌던 이유, 출간을 권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론을 좀처럼 내릴 수가 없었으니
타이핑을 다 끝낸 뒤에도, 결정적인 검토 소견을 마무리하지 못해 전전긍긍 급기야 일행들이 모두들 잠에서 깨어나 외출준비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놀 때까지 2시간을 넘기고서야 마무리를 할 수가 있었다.

기상청의 날씨예보 어긋나기는 제주도에서도 어김이 없었고
오전오후 비올 확률이 각각 60%나 된다는 예보와 달리 화창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에 우린 셋쨋날로 미뤘던 해수욕을 전격적으로 당겨 즐기기로 결정.
미리 수영복을 챙겨입고 놀기 가장 좋다고 벨로가 추천한 협재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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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은 올려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후련했고, 공기가 맑기 때문인지 제주도 하늘의 구름은 늘 손을 뻗으면 잡힐듯 낮게 깔려 바람따라 떠돌았다.



허나.. 이틀 내리 수면부족에 시달린 내가 제정신을 차렸을 리 없으니, 놀랍게도 협재 해수욕장에선 사진을 단 한장도 찍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ㅠ.ㅠ
완만하고 고운 모래의 백사장과 옥빛 바다, 그 주변에 어우러진 검은 현무암의 해안, 건너편에 바라다 보이는 초록과 연둣빛 비양도의 모습을 남겼어야 하는 건데...
미치도록 뜨거운 햇살 아래 다들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나는 가방도 지키고 뙤약볕 아래 우산을 쓰고서라도 어떻게든 눈을 붙여볼 요량으로 홀로 남았으나 쓸데 없이 예민한 인간이 그런 해변에서 잠들 수 있기를 바란 것이 잘못이지.
더위에 헐떡이다 잠시 바다에 몸을 식혔다가 또 금세 돌아와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는 나에게 벨로는
<애들 노는 거 지키는 엄마 같다>며 정곡을 찔렀다. ^^;
실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내심 나이가 들면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노는 재미도 줄어드는 것인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날은 암튼 덥고 피곤하고 가방과 돗자리를 지키는 책임감은 내 몫이라는 생각에 마냥 심신이 늘어졌던 것 같다.
암튼 경사가 완만해서 서해안처럼 가도가도 물이 얕고 깨끗하고 파도도 적당히 치는 협재 해수욕장은 가족단위로 파도타기에 아주 좋은 해변이었다. 과거에 함덕해수욕장과 하얏트 호텔쪽 중문 해수욕장에서 놀아본 적이 있었는데 중문은 경사가 급하고 모래가 굵어 발바닥이 좀 아팠던 반면, 함덕 해수욕장은 모래가 거의 밀가루 수준으로 곱고 백사장이 넓어 흡족했었는데 제주도에서 해수욕하려면 협재, 함덕처럼 북쪽 해변이 놀기 좋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겠다.  

오후들어 백사장에서 시켜먹은 '주황색' 치킨 한 마리와 미리 싸 간 천도복숭아로 점심을 떼운 우리는
주섬주섬 해수욕을 마무리하고 차디찬 물로 바닷물과 모래만 대강 닦은 뒤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로 했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선 다들 최대한 여유롭고 헐렁한 일정을 목표로 삼았던 데다 대체로 무얼 하든 다 좋은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선보였으니, 매번 가장 어려운 점은 행선지를 정하는 것이었던 듯. ^^

바닷가에 가서는 반드시 해산물과 회를 먹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는 했지만
이번 여행엔 회를 못 먹는 일행이 둘이나 되었으므로, 거나한 횟집을 가는 것은 당연히 횡포였기에
비교적 저렴하고 푸짐한 동복리 해녀 잠수촌의 포장마차 같은 간이 횟집엘 가자고 내가 주장했는데
그리도   푸짐하던 해녀 할머니들의 인심도 성수기 관광철엔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걸 실감하여 마음이 상했다.
4년 전 봄에 갔을 땐 냉장고 대신 바닷가에 담가 놓았던 그물에서 건져올린 해삼과 멍게를 푸짐하게 잘라주고도 무조건 한 접시에 만원이었으며, 삶은 문어와 구운 석화도 대단히 넉넉했었는데 이번엔 아예 석화도 없고 접시는 하나같이 바닥에 깔린 정도.
내 마음도 상했지만, 굳이 해산물 싸게 먹자고 거기까지 데려간 일행들에게 미안해서 더 화가 났다. -_-;;

이어 보성 녹차밭보다 훨씬 더 넓고 볼만하다는 지인의 귀띔을 들었던 터라 오설록 녹차박물관에 가자는 내 의견에 다들 그러마고 하긴 했는데, 예상과 달리 입장료가 없는 건 좋았고 뜻밖에 10년만에 대학동창을 만나기도 했지만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겉에서만 바라본 제주 녹차밭은 큰 감흥이 없었다.
골이 좁은 밭고랑으로 일일이 사람들이 들어가 차잎을 따는 광경을 상상만해도 대단히 노동집약적인 차 농사의 어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제주도의 비경은 역시 바다와 오름이라는 사실만 백만번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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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이나 부실했던 둘쨋날의 먹거리에 그나마 식탐의 기쁨을 준 건 저녁에 찾아간 유리네 식당의 갈치조림.
늘 관광버스 줄지어 서 있고 왁자지껄 요란하여 순번을 기다리기 일쑤인 그곳에서 우린 운 좋게 가자마자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고 3만5천원에서 전격적으로 값을 내려 3만원(공기밥 값은 따로^^)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싱싱한 갈치조림을 맛있게 먹으며 다들 공기밥을 후딱 비웠다. 딸려나온 게장과 다른 반찬들도 괜찮았는데, 시끄럽고 번잡하긴 해도 제주도 갈치조림은 역시 유리네만큼 맛있는 데가 없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갑자기 불붙은 포켓볼 열정...
운동신경 젬병인데다 기억력도 나쁜 나는 소싯적에 시도해 본 당구와 포켓볼을 평생 멀리하며 살리라 다짐했건만 콘도에 마련된 당구 테이블을 발견한 일행들은 전의를 불태웠고...
난생 처음 쳐본다면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 키드님과 지다님, 그리고 다른 데 가서는 형편없는 실력이라지만 우리들에겐 완전고수로 보였던 벨로의 내기 본능에 편승하여 얼떨결에 시작된 2:2 게임에서 막상막하의 막당구 내공을 보이던 라니와 지다의 하수팀은 결국 우도반점 자장면 내기에서 분패하고야 말았다.
팔다리가 짧은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하느라 낑낑거린 나는 이미 두번째 게임 즈음에서 지루해져 하기 싫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찌나 재미있어 하던지, 낮에 해수욕장에서 비교되었던 파도타기의 열정과 더불어 나의 나이듦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ㅜ.ㅡ
 
어쨌거나 둘쨋날도 시원한 맥주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며
벌써 이틀이 지났다는 사실에 마구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2008. 7. 30)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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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주도!

여행담 2008. 8. 4. 15:51
나는 웬만한 동남아시아의 휴양지보다 제주도가 백번 낫다고 생각하기에
<그 가격이면 차라리 외국을 가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 가격이면 차라리 제주도를 가지!>라고 추천한다.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맑은 옥빛 바다와 절경이야 비슷하다 쳐도, 더 가깝지, 훨씬 더 깨끗하지, 더 안전하지, 말 잘 통하지, 직접 운전해 돌아다니든 택시를 부르든 싼값에 맛난 음식 골라먹을 수 있지, <기브 미 원 달라>라고 외치며 쫓아다니는 눈동자 풀린 아이들이나 기념품을 팔려는 가난한 현지인들을 감당할 필요도 없으니 하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가깝고 가기 쉽지만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이라는(대학 수학여행 때 목포에서 배 타고 한 번 가봤는데 ㅠ.ㅠ 8시간이던가 끔찍이도 오래 걸렸던 뱃길로는 두번 다시 제주도에 가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리적 특성 때문에 어쩐지 제주도는 내게 늘 동경과 그리움의 장소이건만 이번엔 무려 4년만에 제주도를 다시 찾았다.

난생 처음 타보는 한성항공은 저가 항공사답게 작고 허름한 비행기로 (내가 싫어하는) 롤러코스터의 스릴을 만끽하게 해주었으나, 기내에서 물 한잔도 안 주더라는 '카더라' 통신과는 달리 주스와 생수는 한잔씩 마시게 해주는 성의를 보였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도 큰 비행기는 게이트에서 곧장 탈 수 있지만 작은 비행기에 배정되었을 땐 공항내 버스를 타고 활주로까지 친히 나가야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게이트에서 다시 버스로 비행기까지 가야하는 건 그러려니 했으나 문제는 비행시간. 예정 시간은 1시간 5분이었지만, 갈 때 올 때 실제 걸린 시간은 각각 1시간 반이었다. -_-;;

째뜬 벨로의 신분증 사건과 예약없이 극성수기에 렌터카 확보하기 과정에서 식겁하는 순간이 있기는 했으나
모두 극적으로 해결되어 꿈결같은 제주도 여행이 시작되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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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가다

여행담 2008. 1. 28. 17:31
방방곡곡 아직 안 가본 곳이 더 많기는 하지만
경주는 내가 제주도 다음으로 좋아하는 국내 여행지다.
제주나 경주나, 그저 눈길 닿는 곳이면 다 아름다운 그림이 되고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느낌이라
갈 때마다 그 감흥이 조금씩 달라지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달까.

고등학생 때 기차를 타고 처음 찾아가 불국사 근처의 형편없는 여관촌에서 먹고자며
둘러본 경주 수학여행은 '경주'보다 '수학여행'에 방점이 찍히는 기억으로 남았었다.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따위의 기억은 죄다 그 앞에서 60명이 빨간 모자를 똑같이 쓰고 찍은
단체사진으로 남았을 뿐이었고, 천년 고도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서의 경주 느낌 보다는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 기관사 아저씨를 구워삶아 객차 불을 끄고는 선생들에게 밀가루와 생닭발을 던진 일,
여관방에서 단체로 몰래 술마시다 뛰쳐나가 주정 부린 친구때문에 모든 것이 발각돼 단체기합을 받던 일,
토함산 일출을 본다며 깜깜한 새벽에  몽둥이 든 양치기에게 몰린 양떼처럼 바삐 산길을 오르다
숨이 딸려 몰래 뒤쳐진 것 뿐인데, 뒤 따라 오는 남학교 학생들과 모종의 접선(?)을 시도하려는 몹쓸 문제아 취급을 받아 억울했던 일, 모든 반찬이 비리고 짜기만 해서 너무도 맛 없었던 여관 음식 때문에 단식투쟁(?)을
하며 초코파이로 버텼던 일... 등등 주로 사고 치고 즐거워 했던 수학여행의 추억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후 10년쯤 지나 가을 단풍이 예쁠 때 찾아간 경주는 정말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겼고
똑같은 자리에서도 나는 전혀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운 좋게도 분황사 터에서 만난 어떤 대학원생 덕분이었다.
박사 논문을 준비중이라던 그는 안내문을 대충 읽고 종알종알 떠들면서 몰려다니는 우리에게
국사책에서 그림으로만 봤던 모전석탑을 제대로 보는 법을 설명해주었고
유적지 한 귀퉁이에 그냥 아무렇게나 놓여 굴러다니는 바위 하나도 예전엔 어느 돌부처의 몸뚱이나 어깨였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정말로 어느 마당 한 구석에 절반쯤 파묻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석상과 돌부처를 발견하는 재미를 알게 해주었다.

이번엔 1월이라 무료 문화재 설명 도우미도 없었고 운 좋게 신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냥 아는 만큼, 모르는 만큼 휘적휘적 돌아다니며 어설피 구경한 경주도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50년만에 다시 경주를 찾은 엄마와
20년 만에 다시 경주에 간 막내, 15년 만인 올케,
10년이 조금 넘은 나, 그리고 난생 처음 경주에 가본 어린 조카의 느낌을 비교하는 묘미가 워낙
특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여행지에서 매번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어쩌면 달라진 내 나이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통점이라면 수학여행 이후 늘 그랬듯 이번 경주여행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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