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제주도 3

여행담 2008. 8. 5. 14:03
셋쨋날(2008. 7. 31)은 드디어 내가 우도에 발을 디디는 날이었기에 더욱 설렜다.
스물한 살 이후 제주도엘 꽤 여러번 가봤지만 우도에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 수학여행이나 패키지 여행상품엔 우도행이 포함되지 않았었고 나중에 렌터카를 빌려 제주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됐을 땐 늘 날씨가 나빠 배를 탈 수 없거나 시간이 촉박해 매번 우도를 포기해야 했는데
우도에 하필 국내 유일의 산호해변이 있다는 말에 더욱 동경을 키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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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다 못해 검은 머리가 지글지글 타버릴 것 같은 강렬한 태양과 새파란 하늘 아래 우도행 배는 더욱 푸른 바닷물을 헤치고 출발했고,
방파제 위에 마주보며 서 있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사이로 성산항을 빠져나갔다.



















돌아보니, 일년 중에 말갛게 얼굴을 드러내는 날이 절반도 안된다는 한라산이 저 멀리서 우릴 배웅하듯 구름을 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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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항에서 빤히 건네다보이는 우도는 어느새 우리 눈앞에 나타났고 역시나 제일 먼저 빨간 등대가 눈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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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우릴 반기는 건 검은 바위 해안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갈매기들.
서해안 갈매기는 새우깡에 목을 매고 기를 쓰며 달려드는 데 반해 제주도 갈매기들은 인간들이 귀찮다는 듯 다가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

나름 서둘러 나선다고 생각했지만 우도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오후 2시.
가장 뜨겁고 더운 시간에 자전거로 우도를 한바퀴 돌아야 한다니 내심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최대한 넉넉하게 마지막 뱃시간에 맞춰 자전거를 빌린 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전거 초보자가 어련하겠나. 출발 직후 처음 만난 번잡한 삼거리에서 다가오는 트럭을 피하려던 나는 그만 어이없게 자전거와 함께 옆으로 넘어져 시멘트 차단벽에 무릎을 갈았다. 나중에 보니 바지에도 살짝 구멍이 났더군. -_-;;
그나마도 이후엔 피를 보는 사고는 없어 다행이었다.

처음 자전거를 세운 곳은 기대했던 대로, 하얀 산호가 깔린 해변이라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볼 수 있다던  서빈백사 해수욕장. 봄에 동생이 사진에 담아왔을 때만 해도 날이 흐리긴 했어도 이런 모습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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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우도에 간 지우











































미세하게 부서진 돌멩이처럼 새하얗고 동글동글한 산호 백사장은 똑같았으나
사람들이 들어가 휘저어 놓은 바다는 해초들이 떠올라 에메랄드빛은 커녕 뿌연 미역국 같았다. +_+

실망을 애써 감추고 다시 해안도로로 페달을 밟으니 드디어 백사장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옥빛 바다를 발견할 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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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앞에서 풀을 뜯고 있는 예쁜 어미말과 새끼말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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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다님과 벨로가 실제로 말을 타고 작은 마당을 한바퀴 돌며 신나게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벌써부터 기진맥진해진 나는 그늘에서 기력을 회복한 뒤, 근처 정자에서 전날 내기했던 대로 우도반점에서
자장면을 배달해 먹고는 잠시 행복해했으나 4시 넘어 늦은 점심을 먹고난 뒤의 체력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다행히 우도의 절반은 돌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햇빛은 숨막히게 뜨겁고 어느덧 맞바람까지 치고 있는데다 다리는 점점 무거워져 계속해서 일행들보다 최소 50미터는 뒤쳐져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막판 고비인 언덕이 시작되었으니 자전거를 끌고 올라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전망대가 있을 법한 우도 꼭대기의 등대 주변에서 잠시 쉴 때는 거의 내 정신이 아니었다.

아득하고 혼미했던 나의 정신이 반영된 듯 그 때 찍은 사진은 이렇게 뿌옇다.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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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미 상당히 얼이 빠져 헉헉대던 나는 이 사진을 찍고 나선 난간 기둥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깜박 잊었다가 나중에 자전거 세워둔 곳까지 가서야 비로소 기억해내고 후다닥 다시 가져오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으니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알만하다.

우도를 자전거로 1시간이면 돌 수 있다는 말은 확실히 거짓말이다.
우리는 서빈백사 해수욕장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는데 나중의 언덕 고비를 생각하면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반대방향으로 돌았더라면 초반부라 힘이 더 있기는 했겠지만 더 오랜 시간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야했을 터.
중간에 자장면을 배달시켜 한참 기다렸다가 점심을 먹고 중간중간 쉰 시간까지 합해서 꼬박 3시간 반이 걸렸는데, 아마 마지막 배를 놓쳐선 안되며 5시반까지 자전거를 돌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다면 나 혼자선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 같다. 아니, 앞으로 다시는 우도를 자전거로 돌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거다. ㅠ.ㅠ
지난 봄 자동차로 우도를 돌아보았던 막내동생은 내가 이번에 바구니 달린 자전거로 우도를 한바퀴 일주했다고 하자,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이 장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 나도 내가 자랑스러웠다.
우도 자전거일주는 남들에겐 별것 아니었을지 몰라도, 내겐 철인3종경기 못지 않은 레이스였음을 고백한다.
마지막 언덕을 오를 땐 첫날 느루를 타고 나갔다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어지러움증도 느껴졌으므로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사례를 할 터이니 트렁크에 자전거를 실어달라고 부탁을 할까,
트럭을 불러서 자전거를 보낸 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갈까,
일행들은 먼저 마지막 배로 돌려보낸 뒤 나는 우도에 남아 어디서든 일박을 하고 다음날 합류할까,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을 다 했었지만, 결국엔 무거운 몸과 자전거를 이끌고 마지막 언덕을 올랐고
생존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이후 우도 항에 도착해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시 배에 올라 성산항으로 돌아오던 과정은 과음 후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단편적이다. 선실에서 다짜고짜 드러누워 늘어져 있던 모습을 벨로가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지 않았다면 내 몰골이 얼마나 흉측했는지 몰랐을 듯.


성산항에서 가까운 섭지코지는 일몰이 가까운 시간에 가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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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유명한 건축물을 보겠다며 일행들은 검은 오솔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고
우도 이후 체력이 고갈된 나는 뒤에 남아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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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난간에 앉았다가 옆을 돌아보니 섭지코지의 또 다른 등대와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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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시나브로 기울어가는데 일행들은 돌아올 생각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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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이라 실제보다 어둡게 나와서 그렇지 아직 꽤나 밝았고, 사실은 일행들도 금세 돌아왔음 ^^;;)

섭지코지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9시까지 운영한다는 콘도 식당에서
<활어해물탕과 가마솥밥>을 먹을 일념에 열심히 달려왔으나 너무 늦어 방에서 사발면, 사발우동 따위로 저녁을 떼워야했지만 별로 배고픈 줄도 모르는 피로 뒤끝이라선지 그것 또한 감동적으로 맛있었다.

일행들은 또 다시 마지막 밤까지 포켓볼 열정을 불태우러 나갔지만 나는 홀로 남아 소파에서 뒹굴며 맥주를 홀짝였는데, 당연히 쏟아질 줄 알았던 잠은 놀랍게도 피로에 지친 마지막 밤까지 나를 배신하였으니... 오후 늦게 우도에서 원샷했던 커피 탓을 해보아도 이미 후회하기엔 늦은 뒤였다. 쓸데없이 예민한 잠버릇은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을는지 원...
암튼 그렇게 제주도의 마지막밤은 광란의 음주나 유희 없이 소근소근 가벼운 맥주 한잔과 함께 마무리 되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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