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장의 기억

추억주머니 2006. 10. 25. 13:22

체력장 다음날 느껴지는 온몸의 뻐근함을 다들 기억하는지.
분명 체육시간마다 미리 100미터 달리기며, 윗몸 일으키기, 공던지기, 매달리기 따위의 연습을 시켰을 터인데도
몸과 머리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뇌에서 시키는 일을 팔다리가 제때 힘써 해내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점을 지니고 있는 나는
본격적으로 체력장을 하고 난 다음날, 늘 배가 당겨 누웠다가 일어나기가 거북하여
으아... 엄살 섞인 신음을 내뱉었고,
허벅지며 뒷다리가 당겨 계단을 오르내기기가 불편한 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움직이다
장난스런(그리고 운동신경이 뛰어나 뻐근함이 거의 없거나 덜한) 친구들이 일부러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리닫으면, 으아악... 비명과 까르륵 웃음을 함께 터뜨리느라
당기는 뱃가죽이 더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온 몸을 불살라가며 체력장에 힘썼어도 중고등학교 시절 체육점수는 '미'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기에 더욱 슬프고도 처절한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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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부터 이미 허벅지가 심히 당김이 느껴져 이거 마치 체력장 한 다음날 같군..
생각했더니 역시나.
오늘 일어나니 뱃가죽까지 심히 당겨, 쿡쿡 웃음이 난다.
미루어 짐작되는 원인은 두 가지.

하나는 어제 아침 같은 동네 사는 조카 유치원에서 있었던 '거북이 마라톤 대회' 구경에
늦는 바람에 헐레벌떡 500미터쯤 되는 거리를 달려가야 했던 것.
중고등학교 시절 각각 600미터와 800미터 오래달리기를 하고나서 늘
양호실에 실려가거나,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끼며 친구 다리 베고 땅바닥에 누워 있곤 했던
전적을 떠올리면, 어젠 그 뒤에도 멀쩡히 사진 찍겠다고 촐싹댄 게 신기할 정도다.
앗.. 그러고 보니, 몇년 전 거금 들여 마라톤화 사들인 뒤
매일 동네 개천변 산책로에 나가 남들 걷는 속도로 달리기를 시도했던 효과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겐가??

아무튼 다행히 행사가 지연되어 늦지는 않았지만.. 달리는 조카 사진 찍어준다고 덩달아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도 역시 운동부족이 심한 나에게는 무리가 되었을 듯.

다른 하나는 난데없는 총각김치 담그기. ㅡ..ㅡ;;
어제 하남시에 전원주택 짓고 살며 텃밭도 가꾸시는 외삼촌이 총각무를 뽑아 갖고 오시겠다
하였을 땐, 살짝 염려가 되긴 해도 구체적으로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줄 차마 모르고 있었는데... 예쁘게 다듬기까지 하여 가져오신 총각무를 보니, 거의 김장수준이더라.

해서.. 어젯밤, 총각무를 한시간 반에 걸쳐 하나하나 수세미로 씻고
큰 플라스틱 통에 켜켜로 앉혀 굵은 소금에 절여놓았는데,
난생처음 김치 담글 걱정을 하고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일어나고 보니 온몸이 체력장 다음날 같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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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손놀림도 잘 안되고, 게다가 요새 좀 편찮으신 엄마 대신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펑펑 치기는 했지만..
좀 걱정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닌데 ㅎㅎㅎ
인터넷으로 찾아본 레시피와 엄마의 조언대로 찹쌀풀까지 쑤어서
방금 총각김치를 버무려 통 세개에 나눠 담아 베란다에 내다놓았다.

느낌은 버얼써 성공한 것 같지만
과연 어떤 맛이 나와주려는지... 진짜 성공여부는 얼마 후에나 알 수 있겠지.
체력장 후유증 같은 이 뻐근함이 다 풀릴 무렵, 맛있게 익은 총각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히히.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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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삶꾸러미 2006. 10. 22. 21:48
아주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점심무렵부터 추적추적...
사실 며칠 전에도 밤새 조금씩 비가 내렸던지, 요새 차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뽀얗게 앉은 먼지에 빗방울이 말라붙어 온통 차체가 알금알금 얽은 것 같더니
제법 오래 내린 비에 말끔히 씻겨 내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듯했다.

하도 변덕스러워 비가 싫을 때도 있고 반가울 때도 있는데
오늘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이 커피도 더 맛있고, 음악도 더 감미롭고
그간 내 심신도 매우 메마르게 건조했다가 촉촉한 습기에 진정이 좀 되는 것 같다.
(다만 일이 잘 안되는 것이 문제인데.... 요일 따질 것 없는 준백수 주제에 주말엔 늘
일이 잘 안되는 편이다. ㅠ.ㅠ)

게다가 어제 온 집안을 들쑤시듯 까르륵 거리는 웃음과 비명과 울음의 여운을 남기고 간 조카들 때문에 더욱 집안이 고즈넉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컴퓨터 의자 하나만 보아도, 녀석들이 어제 돌아가며 의자에 앉아
뱅글뱅글 서로 돌려주면서 가짜 돈을 내고 받고
제법 그럴듯하게 회전의자 놀이기구 시늉을 하던 장면이 떠올라 비싯 웃음이 배어나왔다.

나른한 기운을 떨쳐보려고
굳이 작업실까지 나왔는데도, 커피, 루이보스차, 둥글레차... 종류별로 바꾸가며
따끈한 차 마시고 음악들을 궁리나 할 뿐 도통 진도가 나가주질 않는다.
바야흐로 초절정마감모드임에도 말이다.

게다가 블로그 시작하고 뜸했던 게 미안해
싸이에도 글 하나 올리고 보니, 여긴 더 쓸말이 없는 것 같더라.
이것저것 써보고 싶은 글은 많은데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았고
마감모드라는 것도 자꾸 좀 진지한 글쓰기는 뒤로 미루게 하는 듯.
그치만 생각해보면
나는 늘 마감모드에 허덕일 때 더 다른 짓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그렇다고 용감한 블로그 이웃들처럼 한달쯤 블로그 포스팅을 작파하고
열심히 일에만 전념할 자신도 없다.
글만 안 쓰면 뭐해. 맨날 수시로 기웃거릴 게 뻔하니까.

가늘어졌던 빗줄기는 밤이 내리면서 다시 굵어졌는지
창밖으로 다니는 자동차들이 내는 젖은 바퀴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차선이 안 보여서 빗길 밤운전은 좀 위험하지만
윈도 브러시가 슥삭슥삭 너무 빠르지 않게 팔을 휘저어 앞유리를 닦아대고
그 위에 맺힌 물방울 때문에 주황색 가로등이 아련하게 수백만개 별처럼 반사되는 걸
홀로 음미하면서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하나 흘러나오면
그길로 난 아주 멀리까지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오늘도 집까지 겨우 5분 거리가 너무 짧고 아쉬워서
공연히 먼 동네까지 한바퀴 돌고 집에 가게 되는 건 아닌지.

촉촉하게 비가 내리는 어느 일요일
확실히 감상의 과잉에 허덕이고 있다.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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