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많이들 읽으셨겠지만, 그래도 스포일러 있을 수 있음.

<눈먼 자들의 도시>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해 거의 며칠 만에 읽어 재꼈던 반면 <눈뜬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지음/정영목 옮김/해냄)는 좀처럼 이어 읽지를 못했다. 아마도 읽기 시작한 건 작년이었던 것도 같다. 그만큼 끝마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내 정신사나움 때문이 팔할이요, 나머지 이할은 숨막히도록 절망적인 그 도시 상황이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현실도피일지도 모르겠다. 서로 내기라도 시켜야 할 것처럼 한심스러운 소설 속 정부와 이 나라 정부가 겹쳐지면서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까지 무겁게 느껴졌다.

어쨌든 띠지를 책갈피 삼아 꽂아두었다가 조금 읽다 말기를 거듭하던 책은 일 핑계로 먼지를 뽀얗게 입었다가 지난 3월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책의 3분의 2선을 넘어섰었다. 허둥지둥 사건에 대처하는 정부의 꼬락서니가 정말로 딱이다 싶었고, 눈뜬 자들의 도시에선 과연 어떤 방향으로 사건이 풀려나갈지 궁금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남들보다 뒤늦게 읽으며 신종플루 때문에 더욱 공포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처럼, 백지투표 사건을 처리하는 도시 권력자들의 모습이 연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뉴스에 나와 천안함 사건 진척사항을 보고하는 현실에 투영됐다. 그러다간 또 원고마감과 간병무수리의 삶에 밀려 독서는 다시 뒷전이었다.

여전히 삶은 팍팍하지만 얼마 안 남은 책을 다시 잡게 한 건 <눈뜬 자들의 도시>처럼 지방선거를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의 이 나라 정부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확실한 '물증'으로 제시한 녹슨 철판에 적힌 '1번'이라는 매직 글씨였다. 세.상.에.나. 한 점 의혹 없이 규명하라던 진상조사의 결과 발표에 나는 또 "야로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고 헛웃음까지 킬킬 나왔다. 정부의 진상 발표를 듣고 얻은 결론은, 나도 북한산 매직 한번 써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한국산' 매직과 네임펜으로 낙서질해댄 티셔츠는 세탁 한번으로 다 지워져 '일제' 패브릭 전용 마커까지 사들였지만, 그것으로 그린 그림 역시 나날이 지워져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강철을 녹슬게 만드는 짜디짠 바닷물 속에서도 성분이 유지되는 훌륭한 품질이라면, 티셔츠 낙서질용으로도 딱이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동네 마트에서도 아직은 북한산 표고버섯, 고사리 따위를 쉽게 살 수 있으며 통일전망대에 가면 (키드님 포스팅 참조) 북한산 맥주도 살 수 있다지만 연일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전쟁 준비설에다 개성공단 폐쇄 운운하는 뉴스까지 나오고 있으니 조만간 북한산 매직이 내 손에 들어올 일은 어째 요원할 것 같아 그것이 안타깝다. 

아무려나 현실이 너무 암담해지자 책 속의 도시는 되레 나에게 위안이었고, 희망의 빛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애당초 선거에서 백지투표를 가능하게 했던 시민들의 존재부터, 얕은 술수와 음모로 정부가 아무리 대중을 현혹시키려 해도 끄덕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데다 정부의 하수인인 경찰이면서도 결국엔 인간적인 양심대로 행동한 경정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부와 각료들은 또 얼마나 경멸과 조롱의 대상인지!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된다고 판단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

일주일도 남지 않은 지방선거의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오려는지 몰라도 확실한 건 실명 바이러스 공포를 겪었던 눈먼 자, 눈뜬 자들의 정부와 정치인들 만큼이나 이 나라 꼬라지도 무능력하고 환멸스럽지만, 이 나라 국민들은 그 도시민들만큼 의식이 깨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뉴스에서 연일 전쟁 위기, 간첩 암약, 한반도 긴장 첨예, 대북 심리전, 도발 응징, 주가 폭락 따위의 소식들이 오르내리며 3, 40년전에 써먹던 국민들 겁주기 수법이 똑같이 통용되는 게 아닐까.

어린 시절 5, 6월이면 나는 늘 악몽을 꾸며 울다 깨어나곤 했는데, 그 악몽의 주제는 모두가 전쟁이었다. 학교에선 반공 포스터와 반공 표어를 만들었고, TV에선 한국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북한 소년병이 다리를 쇠사슬에 묶인 탓에(퇴각하는 북한군이 해놓은 짓이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죽는 순간까지 '따발총'을 쏘아대거나 북한군이 '드르르륵'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이 거듭 등장하는 전쟁영화가 흘러나왔다. 저다마 보따리 이고 동생 들처업고서 피난 내려갔던 추억담을 품고 있는 부모님의 이야기까지 더해져, 악몽 속에서 나는 전쟁터에 홀로 버려지거나 북한군이 쏟아붓는 대포 공격을 피해 숨어 있거나 폐허가 된 동네에서 가족을 찾아 헤매곤 했다.

엄마는 키 크려고 꾸는 꿈이라고 나를 달랬지만 어린 나에게 세뇌된 전쟁 공포와 빨갱이 공포는 엄청났다. 정권마다 하도 그 수법을 오래도 써먹는 걸 지켜본 까닭에 이제 난 시큰둥 코웃음치게 되었는데, 큰일 있을 때마다 '북풍'이 여전히 만만찮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걸 보면 다들 내 생각 같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전쟁위험 국가 1위로 손꼽혀서 정말로 얻어지는 게 뭔지 나로선 정말 의문이다. 무모한 애들 힘겨루기도 하니고 원...

의사 부인과 눈물 핥아주는 개를 처리하는 어리석은 정권의 방식은 뒤떨어진 나라들에선 어디나 현재 진행형이고, 책에서도 현실에서도 불확실한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늘 최선이 아닌 '차악'을 뽑아야하는 선거로 뭘 바꿀 수 있겠나 한심스럽지만 온 국민의 '한심도'를 또 한번 확인할 계기가 될 이번 선거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별로 기대할 건 없더라도, 선거 결과를 보면 선거 직전에 터뜨린 일련의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래서 또 앞으로 몇십년간 우스꽝스러운 역사가 반복될지 아닐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요즘은 하려던 이야기에 필요한 낱말도 잘 떠오르질 않는 것뿐만 아니라, 글도 처음 생각했던 대로 쓰여지질 않는다. 원래부터 수다를 떨다가도 곁다리로 잘 빠지는 인간인데다, 글이란 게 일단 쓰기 시작하면 저절로 방향을 잡는 성질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거 좀 문제가 아닌가 싶다. 드물게 올리는 책 리뷰로 시작한 포스팅은 그냥 또 푸념일기로 끝나고 말았다. 내 역량이 요만큼인 탓이겠지. 암튼 성균관, 규장각 시리즈 이후 처음 끝낸 책이다. 이러다간 작년 대비 절반도 못 읽을 듯 ㅠ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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