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순이의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02.25 아른아른... 8
  2. 2011.06.24 <최고의 사랑>이 끝났다 10
  3. 2011.05.20 요즘 보는 드라마 7
  4. 2011.04.15 누가누가 잘하나 7
  5. 2011.04.08 때문이야 15
  6. 2011.04.05 가족이 뭔지 10
  7. 2011.03.22 토론의 기술 10

아른아른...

식탐보고서 2015. 2. 25. 17:40

어떤 요리프로그램이었나, 거기 나온 요리사가 그랬다. 탄수화물을 기름에 튀기면 어떻게 하더라도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고. 온갖 튀김 재료에 특히나 겉에 튀김옷을 입혀 더욱 바삭바삭하게 만드는 건 그 때문인 듯. 


아무튼... 튀긴 음식은 온갖 대사증후군을 지니고 계신 어마마마에게 절대 피해야할 음식이고, 나 또한 탐닉하는 만큼 뱃속은 튼튼하질 못하게 된 고로 웬만하면 튀김을 먹는 일이 드물다. 프라이드 치킨이든, 돈까스든, 탕수육이든... 혹시라도 식탐을 부려 먹게 되면 다음날 속깨나 아픈 걸 감당할 각오를 해야.. (튀김 하나 먹는데 뭐가 이리 비장한가. ㅋ)


하지만 하지 말라는 것,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욕망은 점점 더 커지는 법. '그래, 먹고 죽자' 싶은 심정으로 나몰라라 먹어댈 때가 있다. 주로 '치+맥'의 형태. ^______^ 거기다가 또 하필 요새 정붙일 곳 없이 방황하던 내가 탐닉하는 TV 프로그램은 죄다 먹는 게 주제다. <삼시세끼 어촌편>, <수요미식회>, <냉장고를 부탁해>


막강한 차줌마의 온갖 진기명기 요리솜씨 때문에 자괴감마저 든다는 아줌마들이 주변에 꽤 많은데(홍합 짬뽕 때도 놀랐지만 요번에 화덕을 오븐으로 개조해 테스트 베이킹을 거쳐 식빵까지 완벽하게 구워내는 걸 보고는 두손두발 다 들었다. 그냥 그는 차줌마가 아니라 '차셰프'다. +_+),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게 '스피드'라고 말하는 성질 급한 차승원의 '빨리빨리' 해치우는 요리가 나랑 비슷한 점이 많아 완전 신이 나서 구경하고 있다. 음식 만드는 데 시간 오래 걸리는 거 진짜 싫고, 있는 재료로 대충대충 만들지만 꽤 맛은 비슷하게 내는 거 좋아좋아... ㅋㅋ 다만 모든 양념에 설탕을 넣는 건 불만이다. 매운탕 양념에도 설탕을 넣다니! 으어... 개인적으로.. 감칠맛은 몰라도 단맛 나는 찌개는 싫다규~


<수요미식회>는 허름해도 오랜 전통을 지켜온 가게들 위주로 음식의 통사까지 대충 훑어주는데다 패널 별로 아주 매몰차게 의견이 갈리고 비판도 서슴칠 않는 점이 흐뭇하다. 쓸데없이 유명한데 맛없는 집이 좀 많은가 말이다. 줄서서 먹어야하고 심지어 선불에다 자리에 앉자마자 쫓겨나다시피 흡입해야하는 명동 칼국수집 얘기 나왔을 땐 많이 통쾌했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부모님따라 다닌 집이고, 아직도 그 집 만두와 칼국수 좋아하는 지인이 있어서 일단 마음을 접고 아직도 1년에 한두번 가고는 있지만 먹고 나면 늘 찝찝텁텁. 얼마 전 서울 장안의 '치킨' 집을 다루었을 땐 TV보며 아주 괴로웠다. 하마터면 바로 다음날 반포 치킨 먹으러 달려나갈뻔... (대신에 며칠 뒤 집 근처의 영양센타 전기구이 통닭을 먹어주었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매번 진짜로 출연진의 냉장고를 옮겨다가 그 안의 재료로만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아이디어와 솜씨가 기발하고 놀랍다. 나도 단지 장보러 나가는 게 귀찮아서 냉장고 텅텅 빌 때까지 막판엔 요것조것 '퓨전' 반찬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까. 본인도 내용물의 존재를 잘 모르는 남의 냉장고 들여다보며 놀려대는 재미도 쏠쏠. 이것도 못말리는 관음증이겠지. ㅋㅋ 아무튼 요리엔 맛의 조화를 짐작하는 센스와 순발력, 창의력이 새삼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역시 요리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오랜 시간 공들이고 정성 바치면 누가 못하겠나, 후다닥 단시간(15분!)에 있는 재료만으로 꽤나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낸다는 구상이 딱 내 취향이다. ㅎㅎ 간혹 일반인이 만든 요리가 전문가 셰프의 요리를 이기는 반전도 흥미진진.  


하여간 설날 연휴 내내, 그리고 바로 어제까지도 남아있던 각종 전을 데워먹었고 주말엔 밖에 나가서 '리치'한 ^^; 맛의 토스트와 감자튀김도 먹어주었건만, 자꾸만 휴대폰에 든 먹거리 사진 중에 감자튀김과 맥주 사진이 아른거려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아으...


이 포스팅도 그 감자튀김 열망을 식혀보고자 시작한 것인데 딴소리가 길었다. ㅜ.ㅜ



경복궁 역 근처 체부동 음식점 골목 안쪽, '열정 감자'로 시작했다가 상표 등록 문제로 이름을 바꾼 '청년 감자'의 감자튀김과 맥주다. 고깔모양 봉투를 편의점 앞에서 흔히 보는 플라스틱 테이블 가운데 홈에 푹 꽂아주는 게 특색. 사실 좀 짜고 너무 자극적인 맛이라 일반 튀김도 같이 시켰지만 역시나 나중엔 케이준 맛으로 더 시켜 먹었다. 둘이서 감자튀김 세 봉다리를 먹었네그려... 더불어 크림맥주도 꽤나 마신듯. 파이렉스 계량컵에 맥주를 담아주는 것도 특이한데, 나는 잔도 무겁고 계량컵이라는 원래 용도가 거슬려서 쫌 별로다! 그래도 바삭한 감자튀김이 저렴하니 맛있고, 특히나 '젊고 잘생긴 엉아들'이 마구 뛰어다니며 친절하게 서빙하는 게 마음에 들었었다. ㅋㅋㅋ 알바생이 아니라 다들 정규직원이라는 것 같지 아마. 재미난 별명 등에 적힌 검정색 티셔츠 입고 있었던 여름에 주로 많이 갔었는데, 화장실이 불편해서 한두잔 후딱 마시고 일어나야 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종종 생각난다는 게 함정. 


유학중 남편 먼저 학위 따게 뒷바라지 하랴, 아들 둘 키우랴 본인 공부하랴 엄청 바빴던 친구는 그 놀라운 상황 속에서도 여러 종류 김치를 직접 담그고 심지어 육포까지 집에서 만들어 먹이던 좀 심한 열혈 슈퍼우먼이었는데(미쿡에서 사먹는 김치와 육포는 너무 비싸고 무엇보다도 재료가 못 미더워서였다고;;), 10년 가까이 이어지는 유학 생활 중 쌓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프렌치프라이를 대형 오븐에 두판 쯤 구워서(? 그래도 프렌치'프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먹어댔다는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감자튀김은 아직도 자기에게 스트레스 해소용 힐링음식이라나. 학창시절 '하늘하늘 코스모스 신비소녀' 분위기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친구가 나와 함께 와구와구 감자튀김에 맥주까지 꽤 많이 마셔서 놀랐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다. 


1월 어느날이었던 것 같은데 저 사진 찍은 날도, 자극적인 감자튀김 때문에 맥주를 주량 이상 들이키고는 다음날 수북하게 부은 눈으로 속이 아파 한참이나 빌빌 거렸던 기억이 생생하건만 지금 막 땡기는 건 뭐지... 그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지도.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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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갈수록 처음보다 덜 웃기고 자꾸 안타까워져 본방사수를 안(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다운로드까지 해서 본 어제 최종회로 드디어 <최고의 사랑>이 끝났다. 보나마나 연말에 베스트 드라마 집계 당첨 확률 백프로다. 가볍고 경쾌해서 열광했지만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도 꽤 던져준 드라마였다. 심지어 나는 친지 중에 연예인이 있음에도 괜히 싫어하는 연예인들 굳이 콕콕 찝어 싫다고 밝히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는데, 댓글 하나하나에 파르르 떠는 독고진이 생각나서 앞으로는 좀 말을 삼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해피엔딩을 결혼과 출산이라는 빤한 결말로 보여주어 실망이라는 사람도 있으나 나로선 흡족하다. 독고진이 심장수술하다 죽지 않았으며, 깨진 유리컵과 함께 나뒹굴었던 감자싹이 죽지 않고 화분에 담겨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한 터라, 사실 어떻게 끝나든 좋다는 생각이었다. 인생이란 언제 또 어떻게 뒤틀릴지 모르는 거고, 뭐니뭐니해도 로맨틱코미디라면 열린 결말이든 확정 결말이든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종결되는 동화 같은 마무리가 아무래도 마음 편하다. 현실에선 그런 동화 같은 마무리가 좀 드물어야 말이지. 한편으로는 뭔가 참신하고 새로운 결말을 원하면서도, 결국 똑 떨어지는 해피엔딩이 아니면 못마땅한 이율배반의 심리를 작가들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암튼 똑같이 결혼을 강행하고 졸지에 사내아이들을 셋씩이나 이끌고 나왔던 <시크릿 가든>의 결말보다도 <최고의 사랑> 마지막이 나는 더 좋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통통한 스파이더맨 띵똥 라인이었던 터라 마지막 신까지 귀여운 띵똥 형규가 함께 나와주어 더욱 기뻤다. 엄마의 부재 속에서도 띵똥이 그렇게 속깊고 이해심과 인정이 많은 아이로 자라날 수 있었던 건 분명 구애정 고모 덕이 태반이라고 생각하므로, 계속해서 고모네 가족과 함께 하는 건 당연하다. 


밖에서 대중이 뭐라고 쑥떡대건 상관없이 행복한 구애정과 독고진의 일상을 보여주던 닭살스러운 장면 가운데서도 가장 흐뭇했던 건 독고진 부녀의 취침 장면. (큰 사진을 못 구했다;;) 화면 구성 때문임을 알면서도 아가를 소파 바깥 쪽에 뉘여놓아 떨어지면 어쩌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잠깐 하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이런 평화로운 장면 정말 좋다.


 

므흣하게 이 장면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저 장면과 유사하게 막내동생네가 연출한 사진이 있다는 걸. 이른바 준우네 삼부자 취침사건이다. 어느 휴일 오전, 다 같이 외출을 하려고 엄마가 먼저 한참 씻고 나오니 침대에서 기껏 깨워 거실로 내몰았던 삼부자는 소파에서 다시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올케가 기막혀 하면서도 애틋한 마음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짓다가 괜스레 돌연 울컥했었다. 이젠 더 띵똥과 독고진, 구애정을 볼 수 없게된 허전한 마음을 조카들 사진 보며 극뽀~옥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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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는 드라마

놀잇감 2011. 5. 20. 00:25

<시크릿 가든> 이후 관심을 기울여 볼만한 드라마가 별로 없었다. 배우가 마음에 들면 이야기가 별로고 소재가 흥미로우면 배우와 인물묘사가 마음에 안드는 식으로 뭔가 하나씩 어긋났다. 인물과 이야기가 충분히 흡인력 있는데도 내가 못견디는 드라마도 있었다. <로열패밀리>가 그런 편이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조마조마함과 긴장감을 나는 견디지 못하고 리모컨을 돌려버렸다. 그게 바로 드라마 보는 재미인데! 드라마에서조차 그런 것들이 내겐 스트레스가 되다니 테순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싶긴 했다. 어쨌거나 죽어라 욕하며 조롱했던 국민드라마 <웃어라 동해야>는 드디어 끝나버려서 어찌나 속이 시원한지 모르겠다. 그간 울 엄마를 비롯해 모든 할머니들은 매일 꼭 그 드라마를 봐야하는 의무감 같은 것도 있는 모양이었으나, 막장설정은 관두고라도 무슨 여덟마디 단조로운 노래에 도돌이표를 붙여 돌림노래를 끊임없이 부르듯(텐아시아에서 이런 비슷한 표현을 보고 무릎을 쳤다. 딱이야!), 똑같은 음모와 사건이 반복되는 설정에 나는 정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몇 주일을 안봐도 계속 똑같은 상황이라면 말 다했지;;). 그런데도 이 땅의 나이든 아주머니들은 그 드라마를 안 보면 대화가 안 통하는 지경이었다니 참 신기할 노릇이다. 내가 아무리 기막혀 해도 시청률 40%를 넘긴 '국민드라마'라니까 머잖아 일일드라마는 또 그밥에 그 나물 타령이 이어질 것이다. 하기야 노친네들은 그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하고 또 하고 반복해야 이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전개가 휙휙 이루어지는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울 엄마도 통 따라가질 못해 이해를 못하신다. 요새 낮에 <신데렐라 언니>를 재방송해주고 있는데, 엄마는 예전에 다 본 건데도 두번째 보니까 비로소 좀 이해가 된다며 열심히 시청중이다. 예전엔 문근영이 왜 노상 오만상 찡그리고 화만 내는지 영문을 몰랐단다. ㅋ

암튼 내가 요즘 적응해서 꽤 열심히 보고 있는 드라마는 <반짝반짝 빛나는>, <내마음이 들리니>, <최고의 사랑> 세 편이다. 공교롭게도 셋 다 MBC 드라마인데, 처음부터 마음먹고 본 건 아니고 주말에 재방송 하는 걸 어쩌다 보게 되었거나 그랬다. <반짝반짝>과 <내마음>은 주말에 내리 몰아서 하기 때문에, 평일보다 한껏 늘어져 게으름을 부리는 주말 밤 TV앞을 지키며 보기에 딱이고,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최고의 사랑>은 지난주 목요일 부터 본방사수를 시작했다. 나는 딱히 드라마 취향이라는 게 없고, 노희경, 인정옥 말고는 좋아하는 작가를 따지는 편도 아니다. 드라마를 고르는 제일 중요한 조건이라봤자 내가 싫어하는 배우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그 기준도 들쭉날쭉 원칙이랄 수도 없다. 내가 싫어하는 배우들이 총 집합했기 때문에 <아이리스> 같은 건 볼 생각도 안했다. -_-; 미안하지만 그만한 배우 없다는 평을 듣는 차승원이 나에겐 괜히 별로라서 친구가 극구 추천하는데도 <씨티홀>은 보지 않았다. (* 이제부터 스포일러 나올 수 있음)

그러고 보니 요즘 보고 있는 세 편의 드라마엔 다 내가 별로 마음에 안들어하는 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런데도 그냥 본다. 왜냐고? 재미있으니까! ^^; <반짝반짝>은 정말 김현주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현실성은 대단히 떨어지는 장면들이 대거 연출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수백억대 자산가가 경영하는 출판사가 배경인 것도 흥미롭다. 워낙 탄탄한 출판사라서 소신 있는 편집장이 인터넷서점의 반값할인 강요도 막 거부하고, 그러는 대신 하루 물류비용이 2백만원이나 든다는 재고를 처분하기 위해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한다. 맞춤법 틀리는 건 예사고 비문을 마구 양산하는 인기 작가도 송편집장의 입을 통해 조롱한다. 비출판인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드라마에 책과 책 만드는 과정이 비쳐지는 게, 좀 비현실적이라도 어쨌든 반갑다. (황금란이 출판사로 배달온 인쇄용 필름으로 사고치는 장면은 얼굴 간지러웠다. 그렇게 중요한 필름을 왜 초짜 인턴사원한테! 책임 담당자가 출력소로 가서 확인해야지 말이야.. -_-;) 고두심, 박정수 두 엄마들의 연기도 장난 아니다. 도박중독자 아버지 길용우는 밉상에다 오버스럽지만, 부자 아버지 장용의 연기도 일품이다. 처음인지 아닌지 몰라도 욕망에 불타는 악역을 맡은 이유리의 황금란 연기도 무시무시하고... 또 한편의 유전자 공화국 드라마이긴 하지만, 이미 결과는 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니 놀랍다. 김석훈을 제대로 드라마에서 본 적이 없으면서 그냥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선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일단 김현주의 행복을 절반은 쥐고 있으니 응원하는 중이다.

<내마음이 들리니>는 황정음이 주인공이래서 볼까말까 했다가 윤여정과 정보석 때문에 본다. ㅋㅋㅋ 여기서 욕쟁이 할머니 윤여정은 이미 시베리아어쩌고로 유명해진 욕쟁이 할머니 김영옥과는 또 다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윤여정이 한혜진 할머니로 나왔을 때도 좋았다. 깡마른 몸을 몸뻬바지에 집어넣고 구겨놓은 듯 앉아 술을 마시거나 누워서 꿍얼꿍얼 욕을 해대는 모습이 어찌나 리얼한지 원. 언젠가 윤여정이 무릎팍도사에 나왔를 때 배우가 연기를 제일 잘할 땐 돈이 절실할 때라고 한 걸 기억하는데, 싱글맘으로 애들 키우느라 항상 돈이 절실해 진짜 연기가 몸에서 우러나오나 보다 싶다. 조연시절 없이 억대 몸값 받고 전격 주연으로 발탁되는 젊은 배우들이 발연기를 해대는 건 다 돈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밑바닥부터 좀 굴러야 연기를 제대로 배우는 건데 쯧쯧쯧. 암튼 황정음의 zzz 발음은 여전히 내 귀에 걸리지만, 아역을 했던 작은 미숙이 김새론양과 초반에 명을 달리한 큰미숙이 김여진의 역할이 워낙 인상적이라 그 관성으로 보고 있다. 특히 봉영규 역을 맡은 정보석이 차동주(김재원)가 선물한 랜턴 달린 헬멧을 쓰고 눈을 위로 째지게 하며 '무서운 사람'(이혜영) 흉내를 낼 땐 그 때마다 빵 터진다. 수목원이 배경이라 수시로 꽃나무들이 대사에 등장하는 것도 좋다. 아 맞다, 봉우리 황정음을 어렸을 때부터 짝사랑해온 치킨집 아들 승철이 이규한도 귀엽다. <내이름은 김삼순> 때부터 눈여겨 봤는데 껄렁껄렁하지만 순박한 승철이 역할에 아주 딱이다. 주말에 일이 생겨서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두 드라마를 못 보면 뭔가 손해본 것 같다.

<최고의 사랑>은 홍자매 작가와 공효진에 대한 호감과 차승원, 윤계상에 대한 거부감 사이에서 고민하다 보는 쪽으로 돌아섰다. ^^; 홍자매 작가의 작품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돌그룹을 그렸던 <미남이시네요>를 워낙 재미있게 봤고 공효진은 <네 멋대로 해라> 때부터 팬이다. <파스타>에서 유경 역할도 좀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웠어야지. <미남이시네요>에서도 그랬듯이 홍자매의 만화스러운 장면들은 질끈 눈감고 그저 그러려니 넘겨야 하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은 차승원의 코믹 연기도 가끔 난감하지만, 암튼 5회를 정점으로 독고진(차승원이 맡은 톱스타 역할)마저도 정이 들었다. <미남이시네요> 때 내가 못마땅해하던 장근석을 그냥 황태경으로 보게 만들더니, 홍자매의 인물은 역시 놀랍다. 차승원의 연기가 놀라운 건가? ㅋ
오만불손하고 성질 더럽고 못돼처먹은 국민배우 독고진이 찌질한 비호감 연예인 구애정에게 솔직히 사랑을 고백한 뒤, 그래서 자기가 '수치스럽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심지어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가 떠올랐다(오만한 점 빼놓고는 모두 완벽했던 다아시와 비교하면 독고진은 재력과 외모 빼놓고는 단점 투성임에도!) @.,@  천박하고 무례한 가족들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려고 몹시도 애썼으나 자기 마음 어쩔 수 없었다고 프러포즈를 했던 다아시가 엘리자베스한테 뻥 채였듯이, 독고진도 구애정한테 거부당한다. 뭐, 로맨틱 코미디에서 잘난 남자주인공이 생계형 여자주인공한테 반해서 막 들이대다 처음에 까이고 자존심 상해하는 설정은 드라마의 진부한 클리셰다. 그런데 이건 뭐가 다르다고 내가 제인 오스틴까지 떠올리게 됐을까나.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도 그렇고, 잘나서 오만하고 까칠한 남자주인공이 요즘 드라마의 추세던데. 게다가 엘리자베스한테 거절당하고도 사랑을 접지 못해 곤경에 처한 엘리자베스의 가족을 은밀하게 도왔던 다아시와 달리 독고진은 티나게 엄청 생색내면서 구애정을 돕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미 편견에 눈이 어두워진 나는 비어 있는 독고진의 집에 들어가 물고기 밥을 주는 구애정을 보며, 다아시가 출타중에 아름다운 저택 팸벌리를 돌아보았던 엘리자베스에 대입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보안장치 해제번호도 알만큼 이미 수없이 간 집인데도 새삼 -_-;;). 큭큭큭. 악의는 없으되 속물스럽고 무례하고 천박한 구애정의 가족들도 베넷 가족과 동일시하고. ^^; 물론 독고진의 연적인 윤필주는 사기꾼 위컴과 비교하기엔 심히 착하고 훌륭하지만, 콜린 퍼스가 나온 BBC판 <오만과 편견> 때문에라도 내겐 최고의 로맨스 주인공인 다아시를 감히(?) 독고진에게 비유한다는 건 정말 최고의 찬사다. 

이 세편의 드라마로, 수목토일 잠깐은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워할 수 있게 됐다. 간만에 적응에 성공해 즐겨 볼 드라마가 생겨서 어찌나 기쁜지. 그러니 부디 내가 견딜 수 없는 조마조마한 서스펜스와 음모는 좀 등장하지 않으면 좋겠다. 당분간 드라마 보는 낙으로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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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오후, 거실쪽 TV에선 어김없이 동요가 들려온다. <누가누가 잘하나>를 하는 시간이다. 채널 충성도가 대쪽같은 영자씨가 꼭 놓치지 않고 보는 프로그램이 몇 가지 있는데 <누가누가 잘하나>는 그 가운데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41년생인 영자씨의 어린시절 소원이 <누가누가 잘하나>에 뽑혀 나가 상을 타는 것이었다고 하니 프로그램의 역사가 정말 오래 됐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반 친구가 이 프로그램에 나가서 예선을 통과해 TV에 나왔던 적도 있다. 비록 상은 타지 못했지만 그 친구는 한동안 교내 스타였다. 영자씨는 본인이 못 이룬 소망을 자식들이 이루어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지만 우리 삼남매는 일단 노래실력을 제쳐두고라도 그런 데 나설 만큼 숫기 있는 아이들이 못됐다. 합창할 때도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처지에 감히 독창이라니. 어린시절 TV에서 <누가누가 잘하나>가 방영되면 영자씨는 니들도 저기 나가면 좋을텐데, 라고 몇번 아쉬워 했지만 자식들의 깜냥을 알고 쉽사리 포기했다. 그저 동요를 따라부르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듯했고, 지금도 못말리는 동요 사랑은 여전하다. 

영자씨는 장래 희망이 한때 성우였을 만큼 목소리도 고운 편이다. 음치는 아니라서 옛날 동요는 거의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불러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심한 박치다. TV를 보며 동요를 따라 불러도 늘 혼자 뒤쳐지면서 숨차다고 막 짜증을 낸다. 본인도, 자식들도 <누가누가 잘하나>에 못나간 한이 어찌나 깊은지 영자씨는 손자들한테도 잠시 희망을 품었었다. 문제는 손녀손자들이 아주 잠깐 동요를 즐겨부르다 이내 가요로 관심이 넘어가는 바람에 <누가누가 잘하나> 같은 프로그램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금요일 오후가 되면 손녀딸한테 전화를 걸어 <누가누가 잘하나> 하니까 니들도 좀 보라고 종용하곤 했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는 <누가누가 잘하나>에 어린이만 출연하는 게 아니라 아무나 다 나온다. 동요를 좋아하는 애어른이 연합으로 가족 팀을 이루어 나오기도 하고, 할머니나 대학생이 혼자 나와 동요를 부르기도 한다. 평생 염원을 품었던 영자씨는 옳다구나 싶었던지, 언젠가 "우리도 노래 하나 연습해서 저기 나가면 저 사람들보다 잘하지 않을까..."라고 말을 흘렸다. 당연히 나는 펄펄 뛰었다. 창피하게 온 가족이 TV엘 나가서 노래를 부르자고요??? +_+ 동요야 요즘 아이들에게도 길이길이 전해야할 문화유산(?)이라고 나도 동감한다.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잘 부르는 요즘 아이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지만 동요 부르기 운동을 위해 직접 나설만큼은 아니다. 게다가 영자씨의 노래솜씨는 결단코 '대회'에 나갈 만한 수준이 아니시라고요! 가족 중창단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우린 도무지 구성원이 안나온다. 대학시절 노래 깨나 한다고 껄렁댔던 동생들은 둘 다 혼자 질러대는 스타일이지 결코 조화로운 합창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고, 올케들도 음치를 면한 정도일 뿐 대회 재목은 아니다. 집안 내력 따라 숫기 없는 조카들은 또 어떻고!

그러고 보면 영자씨는 동요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몇년 전까지는 구청에서 하는 노래교실도 꽤 오래 쫓아다녔다. 아무리 노래교실을 다니며 새 노래를 익히고 연습해도 그놈의 고질적인 박자 틀리기는 변함없었지만서도. <전국노래자랑>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같은 다른 노래 프로그램도 열심히 보는 편이지만, 영자씨가 노래를 따라부르기까지 하는 열정을 드러내는 건 어디까지나 <누가누가 잘하나> 하나 뿐이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 결론은 하나다. 중간에 TV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작된 <누가누가 잘하나>가 앞으로도 계속 방영되어 영자씨의 동요 열망을 일부나마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 다음엔 이왕이면 영자씨가 제일 좋아하는 동요 '오빠 생각'을 누가 나와서 불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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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야

투덜일기 2011. 4. 8. 12:47

차두리가 이상하게 엇박으로 몸을 움직이며 "간 때문이야~"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CF를 볼 때마다 비싯 웃음이 난다. 그 제약회사는 그 광고에 힘입어 매출이 엄청나게 올랐다니, 확실히 성공한 광고 사례다. 차두리의 매력과 중독성 강한 CF송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내 생각엔 어린시절부터 누구나 "@@때문이야!"라고 핑계대는 화법에 익숙해서 광고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던 게 아닐까 싶다. 친구랑 놀다가도 "너 때문에 망쳤잖아!"라거나 "쟤 때문에 안 놀아!", 부모나 동생에게 "엄마(너) 때문에 TV 못 봤잖아!"라고 했던 기억 누구나 있지 않을까.

어제는 종일 비 내린다고 괜히 분위기 잡다가 정말로 호박 부침개 부치면서 빈속에 먼저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더니 전도 술도 어찌나 맛이 있던지 헬렐레 기분까지 좋아졌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간만에 마신 술에 적응이 안됐는지 금세 알딸딸, 결국엔 초저녁에 뻗고 말았다. 밀린 일 할당량은 어쩌라고 술을 마셨던고 나중에 후회해봐도 소용없는 일. 벌개진 얼굴로 누워 속으로 외쳤다. 비 때문이야! 호박 부침개 때문이야! 맥주 때문이야!

물론 시작은 나 때문이다. ㅋㅋ
 

광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차두리의 간 영양제 광고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반대로 요즘 볼 때마다 내가 기분나빠하는 광고가 하나 있으니, 바로 ㅇ사의 브랜드 광고다. 아리따운 아이돌 여가수들이 떼로 몰려나와서 엄마를 하녀 부리듯 "엄마, 시원한 물 한잔 부탁해~!", 세수하고 나서는  "엄마, 수건 좀 부탁해!"라는 식으로 온갖 잔심부름을 시키며 "부탁해~!"라고 외치다가 그럼 엄마는 누구한테 부탁하느냐고 묻는 줄거리다. 엄마는 ㅇ사에 부탁하면 된다나. 악!!!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진짜 짜증난다. 신경숙의 소설이 워낙 잘 나가니까 그 제목을 패러디했다는 건 알겠으나, 내 맘에 안드는 건  안드는 거다. 물론 아직도 자식을 하늘 떠받들듯 공주 왕자 모시듯 보필하는 엄마들이 세상엔 많겠지만 이건 뭐, 물 한잔도 엄마에게 시켜먹으라고 대놓고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뭐냐고! 나의 조카들은 대여섯 살만 되면 물은 자기가 알아서 따라먹을 수 있더구만, 왜 다 큰 멀쩡한 지지배들이 겨우 손톱 칠하느라고 엄마를 부려먹는지 원. 혹시라도 그 광고 때문에 애들이 새삼스레 엄마를 더 부려먹게 될까봐 염려하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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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뭔지

놀잇감 2011. 4. 5. 12:41

친구에게 회사 추천을 했더니 가족 같은 분위기라 싫다고 했다는 블로그 이웃의 포스팅을 보다 생각났다. 아직도 소규모 회사의 경우 구인광고를 낼 때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를 자랑으로 삼는 데가 많지만, 이제 구직자 쪽에선 대개 그걸 식겁하는 조건으로 여긴다. 가족은 하나로도 버겁고 족하다고 말이다.

내가 벌써 구세대라 그런지, 솔직히 나는 얼마전까지도 '가족 같은 회사'가 정말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옛날 조직원의 삶에 충실했던 나를 돌아볼라치면, 그런 가족같은 대우와 처사에 막 감동했었다. 그러고 보면 이십대까지 가족이야말로 나의 영원한 등대이자 울타리, 안식처라고 철썩같이 믿고 살았다. 절대로 내 발목을 붙드는 족쇄일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참 순진하기도 하지. 암튼 가족에 대한 견해가 그토록 아련하고 긍정적이니, 가족 같은 회사라는 말도 좋게만 생각됐던 모양이다. 회사의 경영진과 관리자 측에서 '가족' 운운하는 건 다 노동력 착취와 유리한 위치 선점을 위한 포석이란 걸 나중에 깨닫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성이랄까 습관이 든 때문인지 그 관계를 떨치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사이비든 아니든 '가족'이라는데.

주말마다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시즌3의 마지막 경쟁미션의 주제는 뜬금없게도 가족이었다. 가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을 완성하라는 것. 후보 디자이너들의 어린시절 가족사진이 화면에 등장하고, 가족들의 응원 영상이 나타나자 스튜디오는 울음판이었다. 나 역시 깜깜한 거실에 홀로 앉아 TV 앞에서 덩달아 울며 막 짜증이 났다. 아, 정말 억지 감동과 스토리를 짜내려는 찌질한 제작진의 심보가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디자인 실력만 평가하면 될 것을 왜 꼭 그렇게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안달인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디자이너들도 어느 정도 '신상이 털리는' 상황은 예상하고 수긍했겠지만, 그런 식으로 사생활을 파고드는 제작 태도엔 내가 다 막 화가 나고 불쾌했다. 디자인 경쟁프로그램마저 가족과 배경 자랑의 장이 되거나 동정의 빌미가 되어선 안되는 거 아닌가?

어쨌든 5회미션부터 눈에 들어 개인적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있던 디자이너의 경우엔 이십대 중반의 어린 나이임에도 가족이 곧 엄청난 상처이고 아픔이었다는 사실이 이번 가족 미션에서 드러났다. 디자인 외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너무 튀는 외모와 욕설도 서슴지 않는 거친 입담 때문에 나랑은 취향이 잘 안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노련한 솜씨가 느껴지는 디자인이 내 눈엔 그저 예쁘고 좋아서 탑3에 뽑히기를 몹시 바라는 마음이었다. 파리나 뉴욕에 있는 유명 패션스쿨 출신의 유학파와 비교되는 순수 국내파에 대한 심정적인 지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을 것에 비하면 국내에서 의상학과나 디자인학원을 다닌 사람들은 아직도 '패션은 본고장인 서양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대주의 사고에 희생당하기 십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국내파라도 내 눈에 예쁘고 멋지지 않은 디자인을 보여주는 후보를 무조건 응원할 수야 없는 일인데, 신주연 씨의 의상은 대체로 훌륭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아마추어인 내 견해로만 그런 게 아니라 우승도 두번이나 했을 정도이고, 미션마다 거의 상위권이었다. 비록 9회 자전거 미션에선 내가 보기에도 너무 아니올시다, 80년대 아줌마옷 같은 투피스를 선보이는 바람에 떨어질까봐 조마조마했지만서도...


런웨이에 올라 가족에서 영감을 얻은 각자의 디자인을 설명하며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울먹거리거나 통곡하는 수준이었다. 가족이란 누구에게나 짠한 부분이고 아픔이라는 방증이다. 하지만 가족이 남긴 찢어지고 곪아터진 상처를 그냥 덮어 꿰매어 놓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자꾸만 틈이 벌어져 아픔이 삐지고 튀어나온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폭로한 신주연씨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는 아예 머리가 멍해졌다. 가족이 뭐라고...

글이란 게 참 묘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줏대가 없는 건지 글이 좀 길어지면 처음 쓰려고 생각했던 이야기와 결말이 같아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지금도 내가 어쩌려고 가족 이야기와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이야기를 같이 꺼냈는지 잘 모르겠다. 가족이 멍에이고 상처라도 개인의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던가? -_-; 나도 갈피를 못잡겠다는 것으로 급마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은 이제 내게 너무 어려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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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은 참 토론을 못한다. 지금은 아예 볼 생각도 안하지만, 손석희 교수가 진행을 하던 시절의 <100분 토론>을 보아도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주장을 바락바락 우겨댈 뿐인 패널들을 보는 게 지치고 짜증스러워 중간에 채널을 돌리기 일쑤였다. 다른 토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고, 토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국회 청문회는 아예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다. 과거 청문회에서 '스타'로 떠오른 정치인을 다분히 의식한 국회의원들이 조목조목 논리로 검증하는 건 못배우고 대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호통치는 것만 따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보면 온 국민이 토론에 익숙하지 않고 토론을 못하는 게 당연하다. 평생 주입식 교육만 받아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앞뒤 맥락에 맞는 언어와 주장으로 토론에 끼어든단 말인가. 대학에서도 대부분이 강의식 교육만 받는 실정이니까. 그러다 보니 소수 세미나 수업으로 진행된다는 대학원 수업도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지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수업마다 발제자가 있어 발제문을 줄줄 읽고 나면 몇몇 도드라지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상투적인 질문이, 또는 너무 뻔한 질문이 이어지고 그나마 성의 있는 교수의 경우 다양한 논쟁거리를 제시하고 주제를 아우르는 정도다. 페미니즘 분석의 경우 간혹 재미있는 말들이 오가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상대의 논리적 오류를 짚어내는 토론으로 무언가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점을 도출하기보다는 그저 놀라운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는 때가 많았다. 세미나식 수업의 목표는 발제자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다퉈 입증해야 한다는 것인데,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이 기존 연구자들의 논문과 주장을 이리저리 참고해 이른 대학원생 수준의 결론엔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도 사실 없다. 괜히 누군가 뭣 하나 물고 늘어져 수업이 길어지면 오히려 눈총만 받을 뿐.

마이클 샌델 본인도 의아해했다는 한국인들의 '정의' 열풍에 힘입은 덕분인지 EBS에서는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라는 <정의란 무엇인가> 수업 동영상을 벌써 몇번째 방영하고 있다. 빠짐없이 전회를 다 본 건 아니지만 연말엔가 처음 채널을 돌리다 프로그램을 알게 된 이후, 부러 시간을 기다려 일부러 찾아본 강의 수업에서 나는 강의 내용은 일단 제쳐두고 교수가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학생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따라 논리를 펼치고, 각자 생각에 따라 학생들이 편을 나누어 논리를 지원하고 보태다가 다시 강의 주제로 돌아와 다양한 정치철학을 제시하는 토론식 수업법이 너무도 매력적이고 경이로웠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개인의 기본권은 얼마나 침해되어도 좋은지, 완전한 자유주의가 공동체의 이익과는 어떻게 상충되는지를 주로 살펴보는 강의 내용은 사실 새로울 건 없는 것 같다(라고 주장하며 책은 안읽을 생각이다. 역시 나는 문자 매체보다 영상매체를 선호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음. ㅠ.ㅠ). 그런데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배경을 안고 모인 수많은 학생들이 본인의 입장에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거침없이 일어나 주장하고, 교수는 또 그런 주장에 대한 반박 의견을 이끌어내고 모든 학생들의 주장을 일일이 기억했다가(학생들의 이름까지!) 강의주제와 연결해 결론을 내리거나 철학적인 논리를 설명하는 외적인 강의 모양새가 참 감탄스럽다. 

내게 놀라운 건 자칫하면 바보 되기 십상인 편협한 주장을 펼치는 학생들도 매우 당당하고 나름 논리적 근거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교수가 이끄는 반대토론을 거쳐 학생들 스스로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게 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조단조단 또박또박 설명하는 마이클 샌델의 목소리와 말투는 또 얼마나 정갈한 느낌인지. 하버드대학이나 서울대의 엘리트주의가 나라를 망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강의 동영상을 보며 불쑥 나도 저런 명강의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더불어 손석희 교수의 강의도 문득 궁금하다). 물론 나는 토론되는 사안에 대한 내 주장이 어느 쪽인지 자신이 없어서 (실제로 강의 동영상 보며 어느 쪽이 옳고 정의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주제들이 꽤 있었다) 절대로 손들고 나서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일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간혹 전해듣는 현실속 학교 현장은 여전히 한심스럽다. 중학생이 된 조카는 요즘 이른바 교사들의 '군기잡기' 분위기에 퍽 괴로운 모양이다. 자유로운 초등학교 분위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뭔가 부당하다고 느껴 이의를 제기하면 선생님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식으로 반응한단다. 나도 겪어본 일이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처음이라 주도권 잡으려고 더욱 그럴 거라고.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일방적인 소통은 억울할 수밖에 없고, 부당한 건 부당한 거다. 하물며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성적인 토론의 자질이 어떻게 싹틀 수 있겠나. 

예를 들어, 체육복 문제. 산꼭대기 학교의 특성상 대운동장은 건물 바로 앞이 아니라서 산너머 언덕을 한참 내려가야 한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엔 절대로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까지 시간 내에 갈 수 없다. 체육시간 전에 미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어야 한다. 체육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교실로 돌아와 다음 수업 이전에 교복으로 갈아입을 시간 역시 없다. 그런데 체육시간 바로 직전이나 직후에 배정된 일부 과목 교사는 애들이 '모양빠지게' 체육복을 입고 자기 수업을 듣는 걸 못견딘다. 다음 수업이 체육이든 아니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충분하든 말든, 자기 수업시간엔 모두 교복을 단정히 입고 있으라는 주장이다. 아 왜??? 물론 체육교사는 이전 과목 선생의 취향이 어떠하든 자기 수업시간에 늦는 학생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체육 수업에 많이 늦었다간 벌로 언덕배기 중간에 있는 감나무까지 선착순 뛰기를 몇번이나 해야할지 모른다. 딜레마다.

30여년 전에도 교사간의 알력은 우리를 괴롭게 했다. 설마 중학교 신입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왜 아직도 그러고들 앉았는지! 물론 체육복을 입고 있어도 이해해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원칙이 뭔가 더욱 헷갈린 거다. 과거에 우리는 그나마 만만한 체육선생에게 부탁했다. 체육복 미리 입지 말라고 강요하는 선생을 설득해달라고. 결과는? 둘이 교권을 두고 으르렁거리며 싸웠을 뿐이다. -_-; 조카에겐 별 수 없이 과거 우리의 비법을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체육복 바지만 미리 갈아입고 위엔 교복을 입은 채 다른 수업을 받으라고. (그런데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복 웃도리에 체육복 바지만 입고 있는 건 정말 더욱 모양빠지는 일이다! 흉측하기 이를데 없는! 게다가 그 꼴로 화장실이라도 갈 때 학생부 교사에게 걸리면 '복장불량'이란 지적을 받는다. 체육복이면 체육복, 교복이면 교복을 입으라고. 대체 어쩌라는 거냐!) 그러고서 한편으로는 반장을 보내든지 해서 선생과 다시 협상을 시도해보라고 권했다. 교실에서 단체로 아이들의 왁왁대며 불평을 쏟아내는 건 교권에 대한 발칙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교사들이 좀 많은가. 은밀히 교무실로 찾아가 '간절히' 부탁하면 권위를 세울 수 있으니 혹 들어주려나... 물론 과거처럼 괜히 교사들끼리 싸움만 붙이는 수도 있겠지만. ㅎㅎ

아직도 윽박지르고 일방적인 주장을 강요하면 씨알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느 분야에든 많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기주장이 강한 요즘 아이들은 그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어린 조카들도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의견을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던데 교육학도 배운 사람들이 왜들 그러실까. 답답하다. 하기야 그러니까 너도나도 팍팍한 이 나라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조기유학을 보내거나 이민을 떠나는 것이겠지. 그리고 대대로 토론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나면 모든 주요 협상 테이블에서 늘 불리할 수밖에 없을 테고. 

조카의 고민을 듣고 돌아온 탓인지 리모컨질 하다 걸린 EBS 정의 재방송을 또 한번 구경하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나라 애들도 저렇게 멋지게 토론하는 어른으로 커야 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그저 시스템과 어른들이 문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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