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에 왔다. 작년 여름 최단기간 입원이었다고 기뻐했던 것 같은데 요번에도 날짜상으론 얼추 같은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귀찮아서 지난 포스팅 찾아보고 싶지도 않지만.
이번엔 병실 운이 좋아서 2인실 옆 침대가 계속 비어 있는 덕분에 좁고 낮은 보호자용 간이침상 대신 나도 버젓이 환자용 침대에서 잘 수 있었고, 다들 정신적인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들만 모인 병동이다 보니 간호사들도 밤새 두어번 살짝 문만 열어보고 나가는 식이라 다른 때보다는 나도 훨씬 더 잘 잔 편이었는데도 나이 탓인지 체력 탓인지 어제 오후부터 오늘까지도 끼니 때만 빼곤 정신 못차리고 계속 잤다. 머릿속으론 밀린 일해야 하는데, 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몸이 늘어지는 걸 무슨 수로 막겠나. 일단 자고 보자, 배째라는 마음이 더 컸다.
5박6일간 좀 비싼 건강검진을 받은 셈 치자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지난주의 충격과 당혹감이 혹 착각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왕비마마는 거의 말짱해지셨다. 물론 몇 가지 약을 끊은 바람에 무릎 통증과 손발저림은 심해졌지만 일단 그건 원인도 치료법도 아는 병이니 차차 다른 약으로 대체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건, 1년 가까이 복용해온 약들이 왜 새삼 이제와서 '충돌'을 일으켜 사람을 놀라게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의사들도 모르겠다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겠냐마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다.
그나마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수확을 찾아본다면 없는 것도 아니다. 온갖 성인병을 지닌 종합병원 수준의 몸이지만, 결정적으로 왕비마마의 뇌와 심장은 나이에 비해 꽤나 건강한 편이란다. 방금 했던 말도 까먹는 기억력 감퇴 현상 때문에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만;;) 혹 치매 아니냐고 노상 전전긍긍하셨는데 큰 걱정을 덜었다. 입원 첫날부터 100에서 7을 계속 빼보라는 의사의 요구에 거의 거침없이 대답하는 왕비마마를 보며 나도 좀 놀랐다. 수맹인 나는 속으로 같이 계산해보면서 93에서 7을 빼면 얼만가 머리가 멍해지면서 통 답이 안나와 끙끙 앓았는데 말이다. 지금도 93에서 7일 뺀 답이 86임을 아는 건 몇번에 걸친 연습의 각인 효과이지 즉각 암산해서 나오는 답은 아니다. -_-; 마흔다섯 살 딸보다 셈을 더 잘하는 일흔한 살의 노모라니, 훌륭하지 아니한가. ㅎㅎ
어쨌든 집에 오니 좋다. 며칠 새 더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낼 기력은 아직 없지만 먼지 속에 뒹굴어도, 출판사에서 원고확인 전화 올까봐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속이 뜨끔뜨끔해도, 아무튼 집이 최고다. 집밥과 집잠이 이렇게 달디달다는 걸 나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 가끔가다 한번씩 왕비마마가 식겁하는 상황을 만드는 건 설마 아니겠지? 병원에 있는 동안 발생한 디도스 공격으로 혹 내 컴퓨터 하드도 날아갔으면 어쩌나 살짝 고민도 했는데 기우였다. 하기야 모르긴 해도 그 사이 컴퓨터가 아예 꺼져 있었으니 공격을 하려야 할 수도 없었을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그저 바짝 정신차리고 밀린 일을 하는 것뿐. 일하자 일!
역시나 6시 모닝콜로 눈을 뜬 아침. 평소엔 늘 새벽 6시쯤 잠드는 올빼미가 6시 모닝콜에 잠을 깨는 생활은 아무리 여행지라도 적응하기 참 어렵더라. 그래도 다른 날보나 창밖이 훤한 듯하여 몸을 일으켜보려 했더니 말을 듣질 않았다. 까마득히 오래 전 부실한 몸으로 체력장을 치른 다음날처럼, 허벅지와 장단지, 무릎과 허리가 죄다 쑤셨다. 왕비마마가 이렇게 아파서 걸음을 제대로 못걸으시는 건가 어렴풋이 실감될 만큼 심각한 근육통. 혹시나 해서 새벽 온천 한번 더 하시겠느냐고 엄니에게 물으니 니 맘대로 하란다. 나야 물으나마나, 온천물이 아무리 좋아도 잠보다 좋을소냐 당연히 잠을 택했다.
그래도 출국날이라 훨씬 더 서둘러야 하기에 조금 더 미적거리다 억지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한발 한발 뗄 때마다 앞다리 뒷다리가 다 땡겼다. 사다리 같은 계단으로 30미터 높이 천수각에 뛰어 올라갔다 내려온 15분도 안되는 사이에 중년의 몸은 그렇게 망가지고 말더라. ㅎㅎ
료칸 건물은 전날 묵은 데보다 더 현대적인데 실내장식은 이쪽이 더 고풍스러웠다. (전날 묵은 료칸 창엔 두툼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음) 우리나라 한옥의 아기자기 예쁜 창살과는 느낌이 다르지만, 창호지 바른 저 창문 무늬도 깔끔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ㅋㅋ 설정사진 티나게 맨 왼쪽 문이 덜 닫혔다.
생각해보니 일본료칸온천 체험 못지 않게 한옥고택체험도 열망하며 살았는데 일본엘 먼저 가 본 셈이다. 언제고 꼭 행랑아범 냄새 안나는 깨끗한 고택을 골라 한옥체험도 해보고 말리라!
창문을 여니, 짠하고 사흘만에 햇살이 보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일본을 떠나는 날 반나절이라도 비와 우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왕비마마의 불편한 다리를 감안해 방배정을 1층으로 받는 바람에 전망이 나빠진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나무 사이로 조만큼이라도 바다가 보이는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저게 바로 동해바다 아닌가. 료칸에선 <대정원>이라고 이름붙여 자랑하는 안뜰과 바닷가 산책로를 권했었는데, 우린 이렇게 창밖으로 내다보는 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아침식사도 부페식이 아니라 저녁 먹은 그 자리에 정갈하게 개인별로 마련된 간소한 정식이었으나, 카메라질에 익숙하질 않아 몸만 덜렁 내려간 탓에 증거사진이 없다. 미소된장을 각자 풀어서 즉석 국을 끓여 밥과 함께 먹는 식이었다. 달걀찜과 샐러드도 있었고, 알록달록하게 튀긴 감자 고로께 같은 반찬도 있어서 난 전날 카이세키
코스요리보다 아침 정식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서둘러 아침을 먹자마자 곧장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해야했으므로, 전날 아침 방에 준비된 다기로 차를 끓여서 잠시 음미하며 부렸던 여유도 생략했다. 그 대신 료칸 방과 아쉬운 작별의 의미로 사진 몇 장.
우리가 묵은 128호 방 한가운데 벽엔 저렇게 약간은 조악한 정물화가 매달려 있고 그 아래 수수한 꽃꽂이 수반이 자리잡고 있었다. 호텔 로비는 물론이고 복도 곳곳에 작고 앙증맞은 수반과 꽃꽂이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별 거 아니라도 이런 세부적인 데 신경쓰는 마음씀씀이가 나는 참 좋다. 며칠 전 잡지 기사를 보니, 교토 쪽엔 호시노야 리조트 계열 료칸 가운데 정말 역사가 오래된, 각각 별채로만 이루어진 전통료칸도 있다더라. 혹시라도 또 한번 온천료칸 여행을 꿈꾼다면 참고해야겠다.
아 맞다, 로비 커피하우스에서 무료로 커피도 마실 수 있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포기해야했다. 아까비...
방열쇠에 저렇게 꽤 큼지막한 나뭇조각이 달려있었다.
열쇠가 두개인 이유는 하나가 금고열쇠이기 때문인데, 옷장 아래쪽에 작은 철제 금고가 자리잡고 있더라. 나는 열어볼 생각도 안했다.
어쨌든 저 열쇠 덕분에 료칸이름 토코엔을 한자로 東光園(동광원)이라고 표기한다는 걸 알게됐음.
아침햇살에 빛나는 대정원은 그야말로 3초쯤 얼굴만 내밀어 보고 돌아섰다. 박석 같은 저 돌 위로 걷는 기분도 꽤나 괜찮았겠다...고 짐작.
마지막 날 첫 행선지는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유형의 관광지인 배 박물관이었다. 내가 일본 배 박물관엘 뭣하러 가서 홍보영상물까지 봐야한담... 여러 종류의 배를 실컷 시식하게 해준다고 해서 그나마 좀 참았다. ㅋㅋ
20세기 배라나 뭐라나가 돗토리현 특산품이라는데 색깔이 우리나라 배처럼 노란 갈색이 아니라 연두색인 게 특징이래고, 좀 아삭한 품종은 시큼하고 그나마 좀 단 놈은 푸석거렸다. 시식이 끝난 후엔 왕비와 곧장 로비 의자에 앉아 빈둥거리며 박
물관에 대한 무관심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시간을 죽였다.
그나마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배 박물관 건물의 뼈대... 얼핏 봤을 땐 대나무이거나 최소한 나무 소재인 줄 알고 허걱 놀라 한참 올려다봤다. 다니는 곳마다 산에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대나무 쪼개서 만든 부채살처럼 곡선으로 배 형상을 본떠 만든 건물이 밖에서 볼 땐 좀 우스꽝스러운데 안에서 볼 땐 꽤 근사했다.
건물 골조가 뼈처럼 드러나는 저런 구조를 내가 선호하는 건가?
어슬렁 거리며 건물을 나와 주차장에서 맞닥뜨린 건 어딜 가나 보이는 일본의 경차들.
경차는 노란 번호판을 단다는데 브랜드도 모양도 정말 다양하게 많더라. 일본 자동차는 각진 게 유행인지 경차든 아니든 각진 모양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저런 차 한번 운전해보고 싶었다. +_+ 그치만 차선이 반대라 사고내기 딱 좋겠지...
마지막 행선지는 쿠라요시? 에도시대 옛거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였다. 이른바 아카가와라(적와, 빨간 기와라는 뜻이랜다) 시카라베 토장군 거리. 맷돌로 커피 갈아주는 데가 있다고 그래서 지도 들고 찾아가보려고 했으나(규모가 인사동 만큼도 안 되는 듯;;) ㅠㅠ 날씨도 다시 껌껌해지고 빗방울도 뿌리기 시작하는데다 왕비마마의 다리가 비협조적이어서 그냥 눈에 띄는 데만 돌아다녔다.
늘 복작거리는 인사동과 달리 완전히 한산했다
아주 어린 시절 나도 개울을 낀 이런 집에서 산 적 있다!
이런 창고를 개조해서 공방과 기념품점으로 만들었다지
가게주인들은 물건 팔 생각이 없어보인다 -_-;
작은 시가지 중심에 실개천 같은 저런 개울이 흐르고 골목골목 더 좁은 수로가 이어지는 곳도 있는데 야트막한 물속에 팔뚝보다 더 굵은 색색깔의 잉어가 돌아다닌다. 나는 인공색소로 물들인 것 같은 잉어를 좀 징그러워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신기해서 사진 찍으려다가 매번 놓쳤는데, 이 사진엔 운 좋게 난간 사이로 한 마리 보인다. ㅋㅋㅋ
무슨 환경 다큐멘터리에서 보니 징그러워 보여도 저 잉어들이 생활오수에 포함되어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먹어치워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던데, 여기도 그러는 걸까 궁금해도 어디 물어볼 데가 없어 답답했다.
맷돌로 갈아주는 커피집은 포기했어도 지도를 보니 일본 절이 눈에 띄어 얼른 왕비마마 모시고 찾아갔다. 대
대련사였을 거다;;
대로 세습되는 직업이라는 일본 승려와 절은 낯설기도 하고 솔직히 좀 비호감으로 느껴진다. 일본 스님들의 염불소리도 심히 꾸미는 것 같고 말이지.... ;-p
그러거나 말거나 왕비마마는 일본 절 부처님 앞에 백엔짜리 몇개 보시하고 싶어하셨는데, 드디어 원풀이했다. 온 동네가 그렇듯 여기도 꽤 오래된 느낌이던데 유독 절마당 한구석에 마련된 납골묘만 화려번쩍 으리으리했다.
지도에 표시된 걸 보니 절 앞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에 <대련사 대로>(절 이름 맞다고 치고) 적혀 있었다. 일본 사람도 뻥이 참 심하다는 걸 느껴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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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 이런 골목에다 <대로>를 붙이다니...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딱 편할 정도의 폭이다.
수공예품을 전시도 하고 팔고 있는 가게 몇군데를 들어가보기도 했지만, 엄청난 가격대에 비해 물건은 어찌나 조악한 느낌인지... 사고싶은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러더라. 이런 데 비하면 우리나라 인사동이나 삼청동은 정말 세련되고 멋진 곳이라고. ㅋㅋ
모든 일정의 마지막은 이 거리 한 구석에 있는 떡 샤브샤브집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사흘간 하도 음식에 실망을 했던 터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맛있어서 감탄하며 먹었다. 열심히 외웠던 <오이시이데스네>를 쓸 수 있었던 유일한 음식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쓸 기회가 없었다. ㅋㅋ
랩이나 좀 벗겨내고 찍을 것을... 본디 음식 앞에두고 유별나게 사진찍어대는 인간들을 혐오해왔던 터라 민망하여 얼른 슬쩍 한장 찍고는 먹기에 바빴는데, 거의 다 먹고 나니 샤브샤브에 찹쌀떡을 넣어 끓여먹는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기록해둘만한 가치가 있을만큼 맛있어서 딱 하나 남았던 떡을 찍었다. 끓는 육수에 10초 정도만 넣으면 말랑말랑해지는데, 너무 오래 두면 흐물흐물 집을 수도 없게 녹아버린다.
우린 공항가느라 영업시작하자마자인 듯 미리 세팅된 자리에서 11시반부터 먹어댔는데, 꽤 유명한 집인 모양으로 12시가 넘자 일본인들이 바글바글 모여들더니 급기야 문밖까지 줄을 서서 기다렸다. 식당 이름이나 알아올 것을... 잠든 도시인 것처럼 우리 일행 말고는 거의 사람도 보이지 않던 거리에서 유독 그 음식점만 사람들로 들끓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오찬이 흡족해서 그랬는지 검게 변한 하늘에선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떠나는 발걸음이 여유로워졌다. 이미 우산은 짐가방에 넣고 싸버려서 다시 꺼낼 수도 없는 일이고...
빗길을 달려 요나고 공항까지 한시간 반쯤 걸렸던가 모녀는 처음에만 아쉬운 마음에 창밖 풍경에 시선을 돌렸을 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공항 규모가 하도 작아서 수속하는 승객들도 딱 우리가 탈 비행기 인원밖에 없었는데도 줄은 참 엄청 오래 섰던 것 같다. 그 시간에 비하면 돌아오는 비행시간 1시간 20분은 어찌나 짧게 느껴지던지. 올 때와 똑같이 성의 없는 기내식을 물리치고 간만에 종이 신문 하나를 다 훑었더니 벌써 착륙준비를 하겠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던 파아란 한국 하늘. ^^*
그러나 저 구름을 뚫고 내려오니 이 땅도 잔뜩 흐렸었다.
그러고 보니 2주 전 일인데 두어달은 된 일처럼 아득하다. 그래도 전혀 짧지 않은 사흘이었다. 요번 여행에서 깨달은 것 두 가지.
1. 앞으로 또 모녀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냥 국내 여행지만 실실 다니는 게 낫겠다. 물론 그마저도 섣불리 떠날 마음은 먹기 어려울 것 같다. ㅠㅠ
2. 내 일본어 발음이 꽤 괜찮은가보다! 다음 일본여행을 위해 (행여나?!) 일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볼까나? ㅋㅋ 답례 인사 따위로 내가 쓴 말은 딱 두 가지,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랑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였는데 내가 저 말을 하면 일본인인줄 착각하거나 일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지 다들 막 말을 더 붙였다. 예를 들어, 토장군 거리에서 앙증맞은 검정콩 붕어빵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우리 일행을 보자 우리말로 "검정콩 드세요. 맛있어요!"라고 하면서 시식용 빵을 내밀었다. 계속 "검정콩!"을 외치는 아저씨에게 나는 예의상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하면서 하나 집었는데 그 아저씨가 막 당황하면서 "아하, 스미마생... 어쩌고 저쩌고... " 그러면서 빠르게 다시 일어로 지껄이는 거다. 놀라고 당황한 나는 고개만 꾸벅하고 얼른 도망쳤다. +_+
외국인이 우리말로 하는 "감사합니다"는 어쩐지 어색해서 금방 알지 않나? 흠...
아시아나 승무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뜸 내게 일어로 말을 걸지 않나... 하여간 이상하다!
다시 유럽에 갈 날을 꿈꾸며 사두고 구경만 하다가 요번에 짐가방에 매달고 간 이름표를 잃어버렸다. 흑...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둘쨋날 버스에서 기사 아저씨가 내려준 짐을 보니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딱 한번쓰고 이별이라니... 마구 던지고 험하게 굴리는 짐가방에 매다는 항공용 이름표 고리를 그따위로 약하게 디자인한 인간이 나쁘다! 그나마 사자마자 자랑용으로 찍어둔 이 사진이라도 있어서 다행인건가.. ㅠ.ㅠ
비바람 속에 첫날을 보내느라 제풀에 지친 모녀는 전날 밤 일본 말도 모르면서 TV를 틀어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 일기예보를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일본열도 아래쪽은 죄다 우산 그림이었다. 6시부터 울린 모닝콜에 눈을 떠 커튼을 젖혀보니 당연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 아침 먹기 전 온천욕 한판의 욕심은 내리는 비와 함께 꼬리를 감추었다. 비오는 날 뽀송뽀송하고 푹신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마저 풍겨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4월 12일. 또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은 9시였으므로 우리는 최대한 뭉기적거리며 아침시간을 잠으로 축내다 드디어 아침을 먹으러 로비 식당으로 향했다. 둘쨋날의 첫번째 식사는 부페식. 전날 가이드가 나누어준 식권을 내자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 종업원이 빈 접시와 나무 젓가락이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놓고 한바퀴 휘 둘러보니, 대부분은 일본식 밑반찬과 각종 생선구이류가 대다수였고 식당에 드글드글한 료칸 숙박객도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내가 먹을 수 있겠구나 싶은 건 약간의 샐러드와 토마토, 빵, 오렌지 주스, 우유 정도. 원래 아침을 안 먹는 인간이지만 강행군 여행을 떠났을 땐 반드시 잘 챙겨먹는 것이 원칙인데, 아침부터 맥이 빠졌다. 그나마 왕비마마는 먹을만 하다며 하얀 밥 한공기에, 샐러드, 생선구이, 미소시루 한 그릇으로 요기를 했다. 쓴 커피까지 대충 먹고난 나는 방에 올라가서 슈크림이 든 빵으로 배를 채웠고...
숙소를 한군데 정해두고 돌아다니는 여행이 더 좋지만 아쉽게도 이번은 명탕 <순례>라 료칸을 하루씩만 묵어야 했으므로 얼른 짐을 꾸려 내려간 나는 왕비마마를 로비에 앉혀놓고 재빨리 료칸 주변을 살폈다. 대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온천 마을에서 그냥 목욕 한 번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ㅠ.ㅠ 역시 패키지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다.
료칸 앞은 바로 개울이었고 개울을 따라 나무판자가 깔린 산책로 같은 게 조성되어 있었다. 종일 비가 내려 물이 많아진 것인지 찰랑찰랑 흘러가는 개울이 위험해 보이는 듯도 했는데, 못내려가게 하는 표지판도 없는 걸 보면 수심이 깊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나 군데군데 피어있는 벚꽃은 죄다 떨어져 아쉬움을 더했다. 휘날리는 벚꽃 비 대신에 진짜 비를 맞아야 하는 여행이라니 우쒸!
기모노에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료칸 앞 다리까지 나와 양쪽에 줄지어 서서 떠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찾아간 우리의 첫 행선지는 시마네현 마쓰에 시에 있는 마쓰에 성. 우리나라로 치면 행주산성쯤 되려나? 벚나무가 8천그루나 있어서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 드는 곳이라던데 뭥미 싶을 정도로 벚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이런 엄청난 장수목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일본말을 모르니 무슨 나무인줄은 모르겠고 수령이 350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쩐지 뿌리 드러난 모습이랑 생김새가 토토로 같은 데서 많이 봤음직하지 않은가?
이런 나무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 꽤 많이 내리는데도 공원 곳곳에서 위아래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쉼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환경미화원들은 비가 와도 서울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공원이나 고궁에선 비오면 아무도 일 안하던데... 주로 갈쿠리 같은 걸로 자잘한 돌이 깔린 성 마당을 고르게 다듬는 사람들이었는데, 계속해서 관람객이 드나들어 발자국이 찍히는 걸 어쩔 수가 없을 텐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갈쿠리질을 해댔다. 우리가 지나가서 또 발자국을 만드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비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원수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대부분 할머니이거나 할아버지였다. 다들 날씬하고 자세가 꼿꼿해서 언뜻 보아서는 노인임을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로 일본에서 지내는 사흘동안 울 엄마처럼 뚱뚱한 할머니는 단 한명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비마마는 더욱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그들과 비교되어 걸음도 잘 못걷는 뚱뚱한 노인이 무슨 관광이랍시고 일본을 휘젓고 다니느냐고... 휠체어를 타고서도 구경 다니는 일본 노인들과 맞닥뜨린 적도 있으므로 그들을 가리키며 용기를 북돋아드리려 해보았지만, 그들은 일본 사람이니까 괜찮단다. ㅜㅜ
왕비마마 특별출연 ^
암튼 마쓰에성 천수각은 이렇게 생겼고 5, 6층 높이인 제일 꼭대기까지 가려면 저 가운데 검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어두고, 맨발로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왕비마마는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라는 경고에, 입구 들어가자 마자 놓여 있는 관리인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한국 같았으면 절대 안올라가봤을지 모를 성 꼭대기에 엄마를 대신해 오르기 시작했다.
왕비마마의 눈빛은 당신도 올라가보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과장 안하고 경사가 6, 70도쯤 되는 나무 계단들은 확실히 노인들에게 무리였고, 층마다 무사들의 갑옷이며 투구, 옛날 지도, 무기류, 우물이 전시되어 있는 걸 보는둥마는둥 뛰다시피 가파른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층층이 올라가 증명용 사진을 찍었다.
왕비마마에게 사진으로라도 보여드려야하니까... 멀리 보이는 건 신지코 호수라는 것도 같고.. 어쨌든 마쓰에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기는 하더라. 사진에 보이는 저 분홍자줏빛 나무들이 벚나무라는 얘긴데, 8천그루는 다들 어디에 숨은 건지 사방팔방 둘러봐도 잘 안보이기에 내심 벚꽃이 만개했을 때도 별볼일 없었겠구라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ㅋ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마쓰에성 바로 옆에 자리잡은 사무라이들의 고택. 해자로 둘러싸인 성안에는 오로지 성주와 식솔들만 살고, 무사들은 성밖에 따로 집을 마련해 살았단다. 암살당할까봐 그랬겠지 뭐. 사무라이들의 집을 복원한 건지 보존해 놓은 집들은 딱 남산 한옥마을이 떠올랐다. 소박하게 기와를 얹고 나무로 지은 집들이며 우물, 부엌에 놓인 그릇, 대청마루 다다미방 한 가운데 앉혀놓은 사무라이 마네킹까지! ㅎㅎ
수수한 집들은 뭐 그리 예쁘다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굵은 모래인지 자잘한 자갈인지 암튼 신발에 닿는 감촉이 좋은 정갈한 마당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구석구석 쏘다니는 대신 툇마루 비슷한 데 앉아 쉬고 있다가 문득 발견한 것은 나무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마리! 크기가 엄청 컸다. 집에서 쌈채소 씻다가 작은 민달팽이를 더러 발견한 적은 있어도 실제 집 매달고 기어가는 달팽이를 목격한 건 최소한 20년은 넘은 것 같아 더 반가웠다.
일본 달팽이!
무사의 집에서 나오면 길 건너편에 바로 강물 같은 해자가 흐르는데, 우리도 저 배를 타고 해자를 한바퀴 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총 몇개라던가, 그런 설명은 당연히 까먹었는데 암튼 저 배(저래 뵈도 이름은 호리카와 유람선!)를 타고 나즈막한 나무다리를 지나려면 위에 씌운 지붕이 내려와 더욱 납작해지고 안에 탄 승객들은 잔뜩 고개와 상체를 수그려야 한다. 추울 땐 코다츠도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드디어 코다츠를 경험해보는가 기뻐했더니만, 그래도 봄이랍시고 코다츠는 없고 이불만 놓여있었다.
사실 이날은 전날만큼 비바람도 심하지 않고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서 나는 크게 추운 걸 몰랐지만, 왕비마마는 50분간 배를 타는 사이 춥다고 덜덜 떨으셨다. 이불이라도 있으니 어찌나 다행인지!
뱃사공 할머니, 허락받고 사진찍었다. 막판엔 노래도 불러주심^^
이불 뒤집어쓴 왕비마마 또 출현
한국 관광객이 꽤 많이 오는지, 뱃사공 할머니는 지붕이 내려오면 숙이는 연습을 처음에 한두번 시키더니 이내 한국말 안내방송을 틀어주었다. 물가에 서 있는 집들을 보노라니 가보지도 않은 베네치아가 잠깐 떠올라 이 무슨 엉뚱한 비약인가 싶기도 했는데, 아주 낮은 다리를 지나는 동안 네다섯 번 정도 지붕이 내려와 다 함께 찌그러져야 하는 경험이 예상외로 꽤나 재미있었다.
배타고 지나다 보니 좀 전에 가본 사무라이 저택 앞으로 빨간 버스도 지나가고...
저 멀리 천수각도 올려다보이고....
다리마다 난간 조각도 달라서 아주 짧은 다리도 있고 아래쪽은 콘크리트로 된 다리도 있는데, 주로 사람들만 건너다닐 수 있는 좁은 다리들이 훨씬 예쁘더라.
유람선을 끝으로 오전일정은 끝이 났으니 기다리던 점심시간. 시마네현 특선음식인 이즈모 소바정식에다 신지코 호수에서 잡힌 빙어 튀김도 나온다고 해서 살짝 기대를 했는데... 했는데...
메밀 소바는 한 젓가락씩 작은 찬합에 세 단이나 들어 있으되 한국에서 먹는 메밀국수처럼 갈은 무와 파를 듬뿍 넣은 국물에 푹 담가 먹는 게 아니고 그냥 작은 주전자에 든 국물을 살짝 부어 <비벼> 먹어야 하는 수준이다. 국물이 워낙 짜서... 거기다 밥 한그릇이 나왔는데 그냥 쌀밥이면 좋겠구만 버섯과 재첩(역시나 신지코 호수 특산물이란다)을 넣어 간장으로 간을 해 지은 거무스름한 밥이었다. 근데 왜 밥맛이 비리냐고!? 빙어튀김은 새끼손가락 만한 거 딱 두 조각. 그나마도 차갑고...
해서 우리 일행은 다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얼른 아래로 내려가 핫바 같은 걸로 빈 속을 채웠다. 핫바 값은 한국이랑 비슷하게 200엔. 대신 크기는 훨씬 작더라. ㅠ.ㅠ
다음 행선지는 아다치 미술관. 미술작품보다는 정원으로 더 유명한 곳이란다. 일본식 정원의 최고봉이라나 뭐라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었고.. ㅋㅋ 그래도 정원이며 마당 예쁜 건 좋아라 하니 기대했는데, 나가볼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아래 사진은 다 거대한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찍은 거다. 미술관의 자랑인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미술관 1, 2층을 돌아다니며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저런 정원 사진을 매번 찍고보니, 죄다 비슷해보였다. 정원마다 이름도 다 다르더구만...
경치 좋은 산자락 아래 같은 데를 일부러 배경으로 골라서 이렇게 인공미 넘치는 정원수로 꾸미는 게 일본식 정원 가운데서도 무슨 형식이라고 하던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글동글 깎아놓은 정원수를 보노라니 나는 어디선가 텔레토비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슬몃 웃음도 났고, 공원묘지에 가면 수없이 볼 수 있는 봉분 생각도 떠올라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렇게 숨막히는 정교함으로 꾸며놓고 사람 발길 못닿게 한 채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조금 흐트러졌더라도 들어가서 거닐고 숨쉬고 어루만지는 쪽이 나는 더 좋단 말이지...
주로 일본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는 미술관은 그야말로 <왜색> 짙은 그림과 글씨 투성이라 건성으로 지나다녔다. 얼마 전 동화 원화 전시회에서 본 제비랑 아기
그림이 눈에 띄여서 반갑긴 했어도, 마음에 든 작품은 딱 이거 하나였음. 아저씨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 나도 듣고 싶다고 불현듯 생각...
둘쨋날 여정의 마지막은 역시나 인공미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하나카이로 정원. 나는 식물원 같은데 별로 안 좋아하지만, 흐드러진 꽃구경은 왕비마마가 특히 좋아하시는 거라 상품 검색하면서 은근 기대했고, 역시나 전 일정 가운데 왕비마마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며 흡족해했던 듯하다. 워낙 넓은 곳이고 시간도 촉박해 산책 대신 코끼리열차 비슷하게 생긴 빨간 기차를 타고 한바퀴 휘휘 돌아본 것도 다리를 쉬기에 좋았고.
계절마다 다양한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는데, 봄이라 주로 보이는 건 튜울립과 히야신스였고, 동산 가득 양귀비가 피어나는 중이기도 했다. 입구부터 꽃향기가 진동하여 눈과 코가 잠시 즐거웠음.
이 정도 튤립이야 에버랜드에도 있지 않나..
돔안으로 들어가면 어지러울 정도의 양란 천국
돔에서 사방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난 꽃보다 이런 조형물이 더 좋다
관광을 모두 마치고 료칸으로 가기 전에 일본의 이마트라는 자스코에 잠시 들르기는 했다. 혹시나 예쁜 장화가 있으면 사오려는 욕심을 품고 갔으므로 확인해보았지만, 지방 소도시 마트에 예쁜 장화가 있을리 없잖아! 해서 슈퍼에 들러 그날 저녁 목을 축일 캔맥주 세 개랑 찝찔한 과자부스러기만 사가지고 나와 버스에서 마냥 일행을 기다렸다.
둘쨋날 간 온천 이름은 카이케 온천이고 일왕이 묵었다고 해서 유명하다는 료칸은 토고엔이었다. 일본 전역에 체인망을 갖고 있는 호시노야 리조트 계열의 료칸이라더라. 전날 묵은 료칸처럼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안내하는 곳이 아니라 현대식 호텔처럼 검정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여전한 친절함으로 우릴 맞이했다. 여행 일정을 계속 바꾸고 조정하느라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합류한 탓인지,전날 방배정에서 하필 제일 먼 끝방에 묵느라 왕비마마가 고생하셨기 때문에 미리 가이드에게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방을 부탁하였더니, 료칸에선 다른 일행과 달리 우리만 1층에 방을 내주었다. 그것도 지하에 있는 온천과 2층 식당으로 갈 수 있는 별관 엘리베이터 바로 옆방으로. 그 정도 배려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는데, 짐을 풀자마자 다시 저녁을 먹으러 올라간 식당에서 우린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가이드는 다리가 불편한 분이 있다는 말로 방 배정에 편의를 부탁한 것뿐인데, 식당에 가보니 울 엄마 자리에만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음식을 차려놓은 것이 아닌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 게 불편하긴 해도 남들이 다 올려다보는 높은 자리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에 왕비마마는 난색을 표하며 민망함에 밥도 제대로 못드셨지만 (그래서 고맙지만 담날 아침 식사는 그냥 남들과 똑같이 밥상에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로선 료칸 측의 배려가 정말 인상 깊었다.
오른쪽에 살짝 비치는 테이블 다리가 왕비마마의 개인 식탁이다
료칸의 규모도 훨씬 크고 웅장한 데다 울 엄마에 대한 배려로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인지 카이세키 요리도 전날보다는 입에 맞는 편이었다. 전날엔 식당에 내려가니 이미 티라이트에 불을 붙여놓아 스키야키와 스테이크가 제멋대로 익어가고 있었지만, 여기선 일일이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에야 불을 붙여주었고, 찹쌀떡이 이상한 국물에 담겨있는 걸 비롯해 밥과 미소시루 이외에도 여기 보이지 않는 코스가 서너 가지 더 나왔다. 물론 오른쪽 위에 있는 소바는 점심에 먹은 소바를 떠올리게 했고, 회접시에 있는 가운데 생선은 방어로 짐작되는데 역시나 비렸다. 그나마 오징어(한치일수도..) 회와 나머지 회는 악착같이 다 먹어주었다. 저기 맨위 왼쪽 뚜껑 덮여 있는
이름하여, 딸기 치즈 무스
스끼야끼 국물이 맛있어서 밥 한공기를 다 먹을 수 있었음. 게다가 마지막에 나온 디저트가 흡족하다보니 전체적으로 꽤 괜찮은 식사를 한 느낌이 들더군. ^^
다시 방에 올라가 배가 좀 꺼지기를 기다리던 모녀는 아마도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거의 6층이나 되던 마쓰에성 천수각 사다리를 무슨 경주하는 사람처럼 뛰어오르고 내려온 탓에 나도 다리가 욱신거렸고, 여행오기 사나흘 전부터 홍제천변 산책길에서 사전준비를 하긴 했지만 역시나 운동 총량으로 볼 때 무리를 한 셈인 왕비마마도 녹초가 된 터였다.
하지만 뜨거운 몸을 담가 피로를 풀 수 있을 거라며 모녀는 묵직한 몸을 이끌고 다시 온천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온천 료칸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유카타 기념촬영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얼른 왕비마마를 앉혀놓고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피로에 지쳤는지 이미 엄니 표정은 별로 좋지않다.
처음 방으로 안내 받을 때 방에 준비되어 있는 유카타는 두벌 다 s 사이즈라면서, m사이즈를 친히 가져다준 직원의 친절도 왕비마마에겐 민망함이었다. 아 왜 일본 사람들은 그리도 날씬한 거냐고! 쳇...
전날 묵은 마츠노유 료칸 온천은 딱 우리나라 목욕탕 분위기가 강했는데, 그 이유는 대중탕에서 흔히 보는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와 플라스틱 대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토고엔 료칸 온천에는 옻칠한 나무 의자와 나무로된 대야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ㅎㅎㅎ
온천탕엔 당연히 디카를 가져가지 않았으므로 그 생김새를 보여줄 순 없지만, 우리방 욕실에 놓여있던 나무 의자와 대야로 느낌이나마 전하려고 찍어왔다. 둘다 진한 옻칠을 해서 빤질빤질한 느낌을 살리고, 의자 높이를 두배로 높이면 딱 온천탕에 놓여 있던 의자와 대야다. 한국 일식집에 가보니 저런 나무통에다 밥을 섞어서 요리를 만들어주던데.... 설마... 그들이 용도를 헷갈린 게 아니라 저런 나무 용기가 일본에서도 다방면으로 쓰이는 것이겠지?
온천탕엔 8시반쯤 내려갔는데 우리 일행들은 벌써 다 온천욕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고 월요일 밤이라 그런지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어서, 온천은 그야말로 왕비마마와 나의 독탕이었다. 2천엔 쯤 내면 별도로 가족탕을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2천엔 번 셈이다. 온천 료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벌써?) 또 언제 와보겠나 싶은 나는 왕비마마를 살살 꼬드겨 노천탕에도 나가보자고 설득했다. 전날밤보다는 확실히 덜 춥기도 하고, 낯선 데 홀로 있는 걸 겁내는 왕비마마를 두고 혼자 나갈 수도 없으니 어쩌겠나. 다행히도 왕비마마는 엉거주춤 나를 따라 노천탕으로 나가주셨고, 일부는 빨간색 뾰족 지붕을 덮어 물이 식는 것을 막았지만 가장자리에선 소나무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진기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별빛이라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새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선 소나무 아래로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로 땀을 식히며 즐기는 노천탕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전날 료칸은 온천 운영시간이 자정이면 끝났지만, 이곳은 24시간 운영이라고 했다. 1시반 부터 2시반 사이에청소를 하고, 새벽 청소가 끝나면 남탕과 여탕이 서로 바뀐단다. 양기와 음기를 섞기 위함이라는 얘기를 진즉에 들었는데 진짜로 그런 료칸 온천엘 왔구나 싶었다. 모녀는 또 다시 새벽에 탕이 바뀐 뒤 한번 더 온천을 하고 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염원을 다지며 방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방에 돌아온 우릴 반겨준 건 푹신한 이부자리. 심지어 들어가기 쉽게 이불도 저렇게 젖혀놨더라. ㅎㅎㅎ
몸은 젖은 솜 같았지만 마지막 밤을 좀 더 불태워(?)야 한다는 생각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캔맥주(산토리, 기린, 예츠비)를 꺼내 왕비마마는 한모금만 따라드리고 혼자서 기분을 냈다. 온천 내려갈 때 싸가지고 가서 노천탕에서 마실 걸, 하는 뒤늦은 회한이 들었지만 다 쓸모없는 짓... '다음번(과연?)엔 기필코!' 라고 생각하며 겨우 캔 하나에 얼굴이 벌게져가지고 잠을 청했다.
여행후기를 더 미루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거라는 조바심에 틈틈이 적어놓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러다 또 발동 걸리면 일 미뤄두고 포스팅에 열을 올리겠지만서도, 사진 크기 일일이 줄이고 올리는 게 번거로워서라도 하루씩 정리하는 게 좋겠다. 겨우 사흘간의 여행이 심리적으로는 일주일 이상 길게 느껴졌으니, 아마 후기도 쓸데없이 투덜투덜 주절주절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간만의 여행이었기도 하니까.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마감중에 여행이라니!) 예상했던 대로 한시간이나 눈을 붙였을까 서둘러 일어나 세면도구를 마저 챙기고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12시반 출발인데 공항 집결 시간은 10시까지. 집에서 공항까지 리무진 버스로 한시간이면 충분하지만, 30분에 가까운 배차시간을 감안하면 아침 일찍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인천공항 고속도로 이용료 7500원이 아까워서 늘 당연히 집앞 정류장에 서는 리무진버스를 이용하는데, 두 사람의 왕복 버스비 3만 6천원을 감안하면 동생 말마따나 차라리 차를 가져가서 주차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이 왕비마마의 편의를 위해서도 낫겠다는 걸 요번에 처음 깨달았다. 과연 앞으로 또 두 모녀가 해외여행을 할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_-;;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던 지인에게 일본 노선이 제일 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시간 남짓한 비행 시간동안 음료수도 나눠주고 식사도 나눠주고 기내 면세품까지 팔아야해서 번개불에 콩 볶듯 쉴틈없이 서둘러부쳐야 하기 때문이란다. 우리의 목적지인 돗토리현 요나고까지 예상시간은 겨우 1시간 10분. 당연히 기내식도 간단하고 부실한 도시락이었다. 기내식이 부실하니 미리 공항에서 요기를 해두라는 가이드의 조언을 들었던 터라, 나는 기내식을 먹는둥 마는둥 짧은 시간에 몇 개 안되는 일본말 외우기에 돌입했다. 아는 일본말이라곤 <스미마생>,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밖에 없는데, 왕비마마 간식이라도 사드리려면 <이꾸라데스까-얼마입니까> 같은 정도는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몇 마디 수첩에 적어간 터였다.
나쁜 머리로 내가 열심히 외운 일본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꾸라데스까? (얼마입니까)
고레오 구다사이 (이것 주세요)
오미즈/오차 구다사이 (찬물/녹차 주세요)
오이시이데스네 (맛있네요)
와까리마시다 (알겠습니다)
~와 도꼬데스까? (~는 어디입니까?)
그밖에도 몇 개 더 적어갔지만 짧은 비행시간 동안 외우는 건 무리였는데, 다 외웠더라면 억울할 뻔했다. 결과적으로 사흘간 저말은 한번도 쓰지 못했으니까. 얼마라고 물어서 대답해 주면 알아는 먹을 거냐고! 게다가 맛있다고 감탄할 만한 음식은 사흘간 6끼니 동안 딱 한번뿐이었으니... ㅠ.ㅠ
여행상품 검색하면서 난생 처음 들어본 요나고는 정말 작은 도시인듯 공항 규모가 정말 작았다. 오래 전에 가본 속초 공항에 비할까. 타고간 비행기도 작은 편이었는데, 외국인은 인솔 가이드 포함하여 우리 일행 14명이 유일했다. ㅋㅋ 덕분에 지문과 사진을 찍어 입력해야 하는 입국수속은 금세 끝났고, 옛날에 주민등록증 만들 때처럼 양손가락에 시커먼 롤러로 잉크를 발라 지문날인을 해야하는 것으로 상상하며 막연히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던 외국인 지문입력은 그냥 손가락 스캐너에 양손 검지를 대는 것으로 끝이라 오히려 좀 의아했다.
예상은 했지만 일본 기상청도 구라청이기를 바랐던 마음도 무상하게 요나고 공항 밖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국이랑 기온 비슷하다더니만 엄청 더 춥고! .ㅠ.ㅠ 비교적 따뜻하게 처덕처덕 입은 터라 인천공항과 기내에선 겉옷을 벗어 들고다녀야했는데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하늘이 하는 일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위로를 들으며 버스에 올라탄 뒤 드디어 조촐한 관광이 시작되었다.
첫 행선지는 사카이미나토. 사카이미나토에 조성되어 있다는 미즈키(엥? 미즈키 님?) 시게루의 요괴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서 미니버스에서 내려 기차를 타야했다. 만화 주인공들로 꾸며진 요괴기차를 타고 사카이미나토에서 내려 요괴 거리 곳곳에 서 있는 청동상이며 캐릭터를 살려 꾸민 가게를 구경하는 게 관광의 목적이었으니, 비까지 내리는 와중에 울 엄니가 그런 구경을 반길 리 없었고 일행 중 결혼 21주년을 맞아 여행왔다던 중년 부부도 울 왕비마마와 함께 버스를 지켰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만 후다다닥 수박 겉핥기 식으로 구경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나야 미즈키 시게루도 모르고 주인공 기타로도 모르지만 시간 들여 꼼꼼이 구경하고 싶은 거리여서 좀 안타까웠다.
이름 모를 역의 풍경, 나무가 신기하게 생겼다
마침 기타로 열차가 지나갔다
우리가 탄 열차? 전철?
천장에도 온통 요괴 캐릭터 그림
역 광장 초입에 있는 청동상 - 가운데 할아버지가 미즈키 상일까?
공원 가로등은 물론이고 택시에도 눈알요괴가 달려있더라 ㅋ
미즈키 로드 인증샷 - 미즈키 니의 거리가 있다니!
우산은 포기하고 후드 티 뒤집어 쓰고 돌아본 거리에서 발견한 벛꽃은 죄다 이런 수준이었다. 일주일만 더 일찍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ㅠ.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겠나.
어쨌거나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상점과 요괴상을 찾아보는 재미가 뭐 그리 쏠쏠할까 싶었던 처음 생각과 달리, 요괴 캐릭터 모양으로 빵을 구워 파는 빵집이 없나 (3종류 사먹었는데 맛도 좋았다!) 정원 예쁜 찻집이 없나, 캐릭터 상품점이야 별로라고 쳐도 반나절쯤 돌아다녀도 좋겠다 싶은 곳이었다. 만화내용을 알고 왔더라면 더욱 금상첨화였겠지만...
주인공을 안찍을 수야 없지. 얘가 기타로다
젤 귀엽던데 얘 이름은 까먹었다 ㅠ.ㅠ
[#M_요괴 빵?|접기|
우리가 타고갔던 기차 캐릭터 모양의 빵 - 좀 뭉개졌는데..담날 아침에 먹었다 ^^
뭐니뭐니해도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따라가서 제일 싫은 건, 내 마음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가이드가 정해준 시간에 맞춰 헐떡거리며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도 일부러 꾸며놓은 거리 안쪽으로 그냥 동네 구멍가게 같은 잡화 식료품점에서 나 어릴 때 '미깡'이라며 사먹던 옛날식 밀감도 발견했고, 시골스러운 쌀집도 구경하며 신기했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 다음 코스를 위해 억지로 버스에 올라야 했다. 으휴.
동해에 인접해 일몰이 절경이라는 신지코 호수가 다음 행선지였으나, 비바람치는 오후에 일몰은 무슨 일몰. 가운데 소나무섬을 만들어놓았으니 그거라도 구경하라는 말에 버스에서 내려 한 다섯발자국 가다가 사진 한방 찍고는 그냥 돌아섰다. 그래도 이 사진속의 두 연인은 젊어서 비바람 무릅쓰고 한참이나 다녀오더라마는...
동해바다 내려다보러 올라간 그 다음 전망대도 당연히 나는 시큰둥했고, 어서 온천료칸에 가서 푹 쉬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코스정식 카이세키 요리에 대한 기대도 허기와 함께 부풀어올랐고... 대체로 요번 일행들의 목적은 온천료칸 체험인듯 했으므로, 시답잖은 관광 코스는 한둘 정도 빼고 푹 쉬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혹시라도 불만을 품은 사람이 나중에 여행사에 항의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그 바람을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다. 괜찮은 온천 료칸 골라서 푹 쉬는 여행을 계획하려면 그저 호텔팩이나 자유여행밖에는 방법이 없는듯.
<명탕순례>랍시고 우리가 첫날 간 곳은 타마즈쿠리 온천. 돗토리현 공항에 내리긴 했어도 이미 어느 시점엔가 시마네현으로 넘어가 그곳 주소는 시마네현이라고 했다. 온천 역사가 1300년이나 된다고 해서 저녁이나 아침에 짬 내서 온천마을 산책도 할 작정을 품고 떠났으나, 여행 가서 내가 그런 부지런을 떨어본 역사가 없으니 당연히 패스~. 게다가 반나절 만에 이미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듯한 왕비마마를 모시고선 그저 온천욕이나 할밖에 아무것도 계획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숙소인 마츠노유 료칸
료칸 안뜰 -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온천욕탕이다
원래 내가 꿈꾸었던 온천료칸 체험은 역사가 몇백년씩 되는 소규모 전통 료칸에서 기모노를 차려입은 오카미상의 깍듯한 시중을 받아보는 것이었으나 ㅠ.ㅠ 그런 곳은 단체손님을 받지 않는 듯, 패키지 상품으론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항공권과 숙박 예약만 대행해주는 자유여행 상품은 더러 있었으나, 일본말도 못하면서 왕비마마를 모시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진즉에 포기한 뒤, 그나마 좀 괜찮은 온천료칸 상품을 검색해본 터였다. 숙소 건물에 들어가자 마자 풀냄새 같은 다다미 냄새가 느껴지더니 방에 들어가자 확실히 다다미방의 향취가 느껴졌다. 바로 이거야, 싶은. 온천료칸에 가면 저녁 먹기 전에 먼저 온천욕부터 하는 거라는데, 우리는 체크인 시간이 늦어 곧장 저녁을 먹어야 했다. 내가 꿈꾸었던 카이세키 요리 또한 다다미방으로 가져와서 차려주는 것이었으나, 식당으로 내려가야 했으니 또 한번 실망...
이것이 카이세키 요리
그렇다고 대규모 식당에서 객실손님 전체가 와글와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행을 위해 따로 마련된 소규모 연회실 같은 곳에서 각자 한 상씩 차려진 저녁밥을 먹는 식이었고,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종업원들이 깍듯하게 시중을 들기는 했다. 열심히 외운 오미즈(찬물)이며 오차(녹차)를 달라고 입도 떼기 전에 눈치 빠르게 따라주시고... 일본인들의 친절함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매번 납작 엎드리듯 무릎 꿇고 시중드는 건 어째 영 불편하더라.
암튼 지역특산물인 게요리, 쇠고기 스테이크, 스키야키, 사시미, 소바... 온갖 진미가 나오는 것으로 기대했던 코스정식의 겉모습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맛이!!
우리나라 활어회와 달리 일본 사시미는 약간 숙성한 맛을 최고로 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바닷가에 가까워서 특선요리가 생선이란 것쯤은 짐작했음에도, 첫날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나는 허기를 빵과 과일로 달래야했다.
나말고도 열심히 큼지막한 카메라를 가는 데마다 들이대는 여학생이 있기는 했지만, 괜스레 자꾸 사진찍는 게 민망해서 얼른 한장 누르고 마느라 저 사시미 위에 덮인 종이도 걷지 않아 좀 민망하다. 아무려나 네다섯 점 올려 있던 생선회는 비려서 먹다 남겼고, 게다리는 차가웠으며 특히 제일 위 가운데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요리는 생선과 가지, 두부를 연잎 같은 데 싸서 찐 거였는데 어찌나 비린지 단박에 비위가 상할 정도였다. ㅠ.ㅠ 왼쪽 위 뚜껑 덮여 있는 스키야키는 어찌나 짠지 아래 있던 날 달걀을 풀어 넣어도 간이 맞질 않고 나머지 밑반찬은 차거나 비리거나 밍밍해서, 첫날 저녁 제대로 먹은 건 하얀밥과 미소시루와 쇠고기 몇점이 다였다. 카이세키 요리 엄청 맛있다고 들었는데 이곳만 실망스러운 걸까? 우쒸...
식탐녀의 상한 마음을 그나마 달래준 건 방으로 돌아와 발견한 푹신한 이불 두 채였다. 다녀와서 알아보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규모 료칸도 식당은 별채에 마련해두고, 아침 저녁 밥 먹으러 다녀오는 사이 이불을 개고 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듯하다.
이불을 보니 하루만에 너무 피곤해서 온천이고 뭐고 한숨 먼저 자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애써 몸과 마음을 추스려 유카타로 갈아입은 뒤 온천으로 내려갔다. 굳이 목욕탕에 귀중품을 가져갈 이유가 없겠지만, 어쨌든 일본 온천에는 열쇠로 잠그는 라커 없이 그냥 바구니 아니면 나무로 짜놓은 칸막이에 옷을 벗어놓는다. 들어갈 때 자기 번호만 눈여겨 보면 그만이다.
온천 성분 같은 거 전혀 모르긴 하지만, 완전히 말간 물은 적당히 따뜻했고 대강 씻었는데도 머리칼과 살결이 매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료칸에 딸린 온천탕이므로 규모는 당연히 그리 크지 않고, 탕이 종류별로 마련되어 있는 일반 목욕탕 정도를 상상하면 될듯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온양온천이랑 강화도 해수온천에 가본 적 있는데, 거기나 여기나 느낌은 다 비슷했다. 노천탕도 있었지만, 춥고 피곤해서 우린 나가볼 엄두도 내지 못해 그건 좀 아쉬웠다. 물이 다르다고 칭찬을 거듭하며 모녀는 다음날 새벽에도 한번 더 온천욕을 하자고 작심했지만 ㅋㅋㅋ 막상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당연히 온천욕 대신 잠을 더 욕심냈다. 아무렴, 잠이 더 중요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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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떠나 어제 무사히 돌아왔음. 동생들은 사흘이 후딱 갔다면서 벌써 와서 아쉽겠다고 위로했지만, 모녀의 2박3일은 어찌나 길었는지 원래 예정대로 3박4일이었으면 큰일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나의 바람과 달리 도착하는 날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바람에 소망하던 꽃비는커녕 육중한 노친네 부축하고 우산 받쳐들고 다니느라 무수리는 완전 녹초 상태로 몸살 직전까지 빌빌대야 했다. 게다가 어제 인천공항에 내리니 갑자기 겨울 날씨! 삭신이 쑤셔서 어젯밤부터 오늘오전까지 두 모녀는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끙끙 앓았음. ㅠ.ㅠ
동해바다에 면한 곳이라 느낌이 속초나 강릉 즈음으로 여겨지는 톳토리현, 시마네현 일부를 보고 온 주제에 일본이 어쩌니 저쩌니 말하는 건 가당찮은 짓이겠지만 어쨌거나, 처음 가본 일본에 대한 느낌을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 생각보다 벚꽃이 별로 없더라. 끝물이기도 하고 비가 와서 많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아직 벚꽃축제기간이라는데 공원에 서 있는 벚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음. 진해나 여의도처럼 일본에도 일부 대도시에만 대규모로 벚꽃길이 조성되는 건가?
- 화산지역이라 당연하겠지만, 일본 온천물 우리나라 온천물보다 좋더라. 온천욕 별로 안 좋아해서 효능 따위 잘 모르는 편인데, 머리감고 나서 곧장 매끈거리는 머릿결이 느껴졌음. 떠나는 날 아침에 한번 더 담그지 못하고 돌아온 걸 모녀 둘 다 후회스러워했다. ㅋ (나이가 들면서 온천이 좋아지는 걸지도.. -_-;;)
- 다다미방으로 된 온천료칸 체험, 은근 매력있다. 다다미를 해마다 바꾸는지 어쩐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싱그러운 돗자리 냄새 같은 다다미 냄새가 풍겼고, 저녁 먹으러 다녀오는 사이에 다기 놓여있던 테이블 치우고 이불 깔아놓는 서비스 마음에 들었음.
-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음식맛과 염도에 차이가 있으니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어쨌거나 이번 여행의 현지음식은 절반 정도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모험정신 강하고 식탐 많은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겠나. 일행 중엔 컵라면과 과자부스러기로 거의 연명한 이도 있었다. ㅋ
- 귀엽고 아담한 경차가 정말 많더라. 경차 비율이 30퍼센트가 넘는다는 말만 들을 때랑 직접 보는 거랑 역시 느낌이 다르다.
- 전통과 옛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였다. 전국 어딜 가나 도시든 시골이든 볼썽사나운 아파트와 시멘트 양옥집 투성이인 이 나라와 달리, 오래된 일본집스러운 느낌의 나무로 된 집들이 참 많았다.
본격후기는 슬슬 밀린 일 눈치 봐가면서 올리도록 하겠음. 여행은 늘 좋지만, 집에 돌아오는 건 더 좋다. 예전엔 판에 박힌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싫어서 항상 여행 끄트머리에 느끼는 아쉬움이 몹시 컸던 것 같은데, 이번엔 진심으로 귀가를 기다렸다. 오죽하면 제목이 <살아돌아옴>이겠나. 집에 와서 기쁘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