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6.04 엄마표 김밥 21
  2. 2009.06.01 5월 31일 12
  3. 2009.05.12 토룡마을 하층민의 첫 자전거모임 18
  4. 2009.05.08 미술관 옆 동물원 18

엄마표 김밥

식탐보고서 2009. 6. 4. 17:57

누구나 오랜 역사와 추억의 양념 때문에라도 자기 엄마표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김밥집이 흔하지도 않았고, 김밥 먹는 날이 일년에 몇번 학교에서나 집에서 소풍 갈때로 국한되어 김밥이 꽤나 <귀한> 음식이었던 나 같은 옛날 세대에겐 더더욱.
나 역시 김밥을 아무리 손수 <싸>먹거나 <사> 먹거나 <얻어> 먹어보아도, 옛날에 울 엄마가 싸주셨던 추억의 김밥만큼 맛있는 건 없었다고 회상하게 된다. 식성에 따라 김밥 내용물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는 하지만, 생김새부터 맛까지 거의 천편일률적인 김밥들 사이에서 울 엄마표 김밥은 정말 조금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당근을 채썰어 볶는 것이 아니라 다져서 볶은 뒤 밥에다 섞는다는 것. 그리고 달걀부침도 지단으로 얇게 부쳐 잘라넣는 대신 스크램블드에그 하듯 마구 뒤적여 잘게 부숴 역시 밥과 함께 볶거나 밥에 섞었다. 나는 우리집 삼남매가 익힌 당근을 워낙 싫어하기 때문에 엄마가 어떻게든 당근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들으니 다른 사연이 있었다.
가난하던 그 시절 우리집은 비싼 일반미 대신 정부미를 주로 사먹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를 정부미는 값이 싼 대신 당연히 일반미보다 질이 떨어졌다. 색깔도 새하얀 일반미보다 당연히 탁하고 거무스름했던 듯. 평소엔 당시 혼식장려 캠페인 때문에 강제로라도 다들 보리를 넣어 도시락을 싸가야 했으므로 정부미밥도 다른 애들 밥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소풍날 혼식 검사를 할 리도 없고, 특별식인 김밥을 쌀때엔 당연히 쌀로만 밥을 짓는 것이 정석이었던 모양이다. 새하얀 쌀밥 한 가운데 정갈하게 속 고명이 들어간 김밥들 사이에서 거무스름한 쌀로 지은 김밥을 비교당하게 만들기 싫었던 울 엄마는 밥에 참기름 말고도 다진 당근과 달걀부침을 부숴 넣어 버무리는 묘안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어린 우리들은 그저 김밥이라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기뻐서 밥 색깔이 조금 다른 것쯤 신경도 안 썼을 것 같은데, 그 옛날부터 울 엄만 참 별 걸 다 신경쓰는 아줌마였다는 얘기다.
아무려나 볶음밥으로 다시 김밥을 싼 것처럼, 약간 노르스름한 밥에 시금치와 소시지(옛날엔 햄 대신 당연히 소시지로 김밥을 쌌다!), 어묵, 단무지를 넣은 울 엄마표 김밥은 소풍 때마다 단연 인기였다. 소풍 가서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끼리 서로 엄마 음식솜씨를 품평하듯 김밥을 하나씩 서로 바꿔먹곤 했는데, 깔끔해 보이진 않지만 전체적인 간도 딱 맞고 전혀 뻑뻑하지 않은 울 엄마표 김밥만큼 맛있는 김밥은 없었다. 부잣집 친구가 싸온, 쇠고기를 볶아넣고 자른 김밥 하나하나마다 정갈하게 한 가운데 깨소금을 얹은 최고급 김밥보다도 나는 정말이지 울 엄마가 싸준 김밥이 더 맛있었다. 단순히 팔이 안으로 굽는 것만은 아니어서, 친구들도 너도나도 내 김밥을 하나 얻어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고, 소풍에 따라오신 친구 엄마들도 울 엄마한테 김밥 만드는 비법을 묻기도 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엔 우리도 일반미를 먹을 형편이 되었지만, 우리집 김밥 만드는 법은 바뀌지 않았다. 쌀이 아무리 좋은 거라도 맨밥에 참기름과 소금만 버무려서는 절대로 울엄마표 김밥 맛이 나지 않는 걸 어쩌랴.
우리들이 다 자라 학교에서 소풍가는 일이 더는 없게 된 뒤에는 정말로 연중행사처럼 드물게 엄마표 김밥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조르거나, 김밥을 특히 좋아하는 막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해주셨는데, 옆에서 내가 거드느라 엄마의 코치대로 김밥을 말아보면 영낙없이 옆구리가 터지거나 내용물이 한쪽으로 쏠렸다. 요리솜씨 뛰어난 엄마의 유전인자를 어느정도 물려받아 웬만한 음식은 흉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예쁘게 김밥 마는 비법은 도무지 터득할 수가 없었다. 김밥집에서 파는 것처럼 밥을 잔뜩 많이 넣으면야 나도 내용물을 한가운데로 몰리게 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한입크기로 적당히 얇으면서 내용물이 정 가운데 들어가도록 하는 것인데 난 왜 그게 안되는지! 그걸 터득하겠다고 허구한 날 김밥을 싸먹을 순 없는 일이어서, 얼마 전부터 나는 너무도 귀찮은 김밥싸먹기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울 왕비마마는 와병 후 살림에서 손을 뗀지 수년이고, 제대로 된 엄마표 김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건 아마도 1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가 아무리 솜씨를 부려도 김밥만은 추억의 그 맛과 모양을 살려낼 수가 없었다. 정 집에서 싼 김밥이 먹고 싶으면, 조카들의 잦은 소풍 뒷바라지에 이젠 김밥달인이 되었다는 올케들에게 살짝 몇 줄 더 싸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인 걸 뭐. ;-p (이러니깐 시누이 소리 듣는 거라고?? ㅋㅋ)

하지만 또 내가 누구인가. 식탐 앞에선 웬만한 결심도 손바닥 뒤집듯 하고 의지력을 바닥내는 단세포 동물.
얼마 전 집에서 싼 김밥이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다른 요리는 후다닥 뚝딱 잘도 하겠는데 김밥은 정말로 귀찮아서 다시는 만들어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걸 뒤집을 만큼 욕망이 컸다. 얼른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다가 준비하고 있으려니 아차 싶었다. 집에 흰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다. 엄마의 건강을 위해 매번 항아리에 백미, 현미, 흑미, 서리태, 보리, 율무, 기장쌀까지 모두 적당한 비율로 섞어 넣어놓고 밥을 해먹고 있으니, 흰쌀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영양가야 더 많겠지만 김밥을 시커먼 밥으로 싸야하다니... 속상한 일이었다. 밥도 어지러운데 다진 당근과 달걀을 섞어 넣는 건 곤란할 것 같아 당근은 아예 넣지 않기로 했다. 익힌 당근 싫어!

사진은 그렇게 해서, 아마도 수년만에 내가 싼 깁밥의 몰골이다. 심혈을 기울여 치즈까지 넣었지만 밥이 너무 뜨거워 금세 녹아 더욱 볼품없어졌고, 내용물은 역시나 한쪽으로 밀린데다 크기도 들쭉날쭉 가관이었다.
내용물에 다 따로따로 간을 했어도, 원래 방식대로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싱거워 30% 이상 부족한 깁밥을 꾸역꾸역 집어 먹으며 나는 또 중얼거렸다.
"내 다시는 집에서 김밥 싸먹나 봐라..."

엄마는 좀 싱겁긴 해도 먹을만하다고(맛있다고는 절대 하지 않으셨다!) 했지만, 들인 품과 기대에 비하면 결과물은 실망스럽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랏간 무수리의 삶을 이어오면서 느끼는 건, 아무렇게나 쉽게 대충 해서 먹을 때 결과물이 더 흡족하다는 사실이다. 괜히 공들여 절차가 복잡한 요리를 하면, 가사노동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그 과정에 이미 지치고 화가 나는데다 식탐과 식욕 기대치 또한 높아 웬만해선 만족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왜 또 그렇게 먹고 싶은 건 많은지 원...
벨로와 키드님이 통영 여행에서 먹은 충무김밥 자랑하는 거 보고 식탐이 동해 해먹은 짝퉁 충무김밥도 그랬었다. 역시나 잡곡밥으로 싼 김밥은 보기에도 먹음직하지 않았고, 모나브님의 요리법대로 애써본 오징어무침도 어딘가 심히 부족한 맛이었다.
ㅠ.ㅠ
채썬 무를 미리 절였다가 손아프게 짜서 무쳤는데도, 왕비마마의 촌철살인.
"무가 좀 더 아작아작했어야지."
당연히 나는 그때도 투덜거렸다.
"다시는 해먹나 봐라..."

오늘은 또 무얼 해먹나 오후 내내 무수리의 고민을 잇다보니 문득 엄마표 김밥 생각이 나서 3월과 5월에 찍어둔 사진을 찾아 주절거리기 시작했는데, 결론은 없다. 김밥 싸는 엄마 옆에 앉았다가 김밥 꽁지 낼름낼름 집어먹으며 행복하던 그 때가 그저 그리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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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투덜일기 2009. 6. 1. 15:50

얼마전 토룡마을 주민들과 자전거를 타러 갔던 날, 홀로 집을 지키던 엄마가 전화로 말했었다.
"월드컵 공원 좋아? 엄마도 가보고 싶다."
서울서 태어나고 자라서 오히려 서울 곳곳을 <관광>하러 다니는 게 어색한 우리 엄마는 특히 최근들어 생겨난 크고 작은 공원 같은 곳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있는 듯해, 몇년 전부터 가끔씩 모시고 다니리라 다짐은 했지만 실천에 옮기는 건 늘 게으름에 밀리기 일쑤다. 하늘공원은 작년엔가 막내네가 모시고 다녀왔지만, 바로 아래쪽 평화공원엔 왕비마마가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더불어 서울숲과 올림픽공원, 한강 둔치, 유람선도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더 더워지기 전에 월드컵 공원 소풍을 계획하고 나선 것이 어제. 엄마는 걷는 운동을 하고 나는 자전거를 차에 싣고 가 타기로 마음 먹었더니, 소풍 계획을 알게된 정민공주네도 합류하고 싶어 했다. 온집안에 몰아친 자전거 열풍에 휩쓸려 자기도 어린이용 자전거 말고 <기어> 달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공주가 드디어 소원을 이루어 <우베공>을 장만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와 똑같은 하얀색. 당연히 작은 사이즈로 샀을 줄 알았더니, 자존심 상하게도 M사이즈였다. ㅠ.ㅠ 좀 더 있으면 당연히 공주가 나보다 키가 커지겠지만, 제 아빠도 같이 타려면 큰 걸 사는 게 정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모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뭐든 고모 자전거랑 똑같아야 한다며 욕심을 부리던 공주는 제 자전거가 더 크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모양이더니, 벨로 언니도 M사이즈라니깐 그제야 생글생글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M사이즈 살 걸! 안장 제일 낮추면 지금 내 안장 높이랑 똑같던데 ㅠ.ㅠ;;

원래 계획은 왕비마마를 모시고 월드컵 공원을 한바퀴 돌아 <빡시게> 운동을 시키는 것이었지만, 초장부터 다리 아프다며 드러누워 좀체 운동을 하려하지 않는 왕비마마를 독려하는 건 불가능했다. 속으로는 정말로 눌린 척추신경을 복원하는 수술을 해야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인지 겁부터 나는데, 겉으로는 엄살부린다며 엄마한테 자꾸 짜증을 내고 있었다. 왕비마마는 자꾸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주고 가는 중국집, 치킨집 먹거리에 끌리는 모양이었고 공주네 식구도 잔디밭에 앉아 짜장면과 짬뽕을 먹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단호히 그들을 말렸다. 말이 소풍이지 본래 목적은 가열찬 운동이건만, 나와서 잔뜩 먹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람!  

왕비마마의 운동량은 오히려 평소 홍제천 산책 때보다 적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훌륭한 편이었다. 월드컵 공원에 간 게 수차례이면서도 구석구석 다 돌아본 적 없던 나는 거의 공주에게 끌려다니다시피 공원을 여러바퀴 돌아야 했고, 심지어 공원이 너무 좁아서 자전거 타는 맛이 안난다는 공주를 데리고 한강으로 나가 성산대교, 양화대교를 지나 당산 철교까지, 그리고 다시 돌아 가양대교 방면으로 자전거길 조성공사를 새로이 하느라 길을 막아놓은 곳까지 다녀왔으며, 귀가길에도 차는 동생에게 맡긴 채 홍제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_+
자전거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올케 역시 핸들이 좀 흔들리긴 해도 꽤나 진척이 있어 사람들이 많지 않은 길에선 퍽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으며, 잠시 한강변 답사를 다녀온 큰동생도 우리집에서 반포대교까지는 무리없이 출퇴근할 수 있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원래 언덕 위 우리집에서 월드컵공원까지 자전거로 걸리는 시간은 25분에서 30분. 차로 가면 주차시간까지 합해도 15분이 안 걸린다. 시간상으로는 당연히 자동차가 빠를 수밖에 없지만, 돌아오는 길에 과연 누가 빨리 도착할 것인지 궁금했는데, 예상외로 자전거를 타고 온 우리가 훨씬 빨랐다. 자전거길 조성공사로 군데군데 공사중이던 홍제천변 산책로 포장이 거의 끝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공원 주차장에서 차 두대가 빠져나오는데만도 엄청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팍팍한 다리로 자전거를 끌고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며 나는 정말 죽을 맛이었는데, 여전히 팔팔하게 기운이 넘치는 공주는 공원에서 고모네 집까지 생각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실망이라고 했다.

어느새 너무 익어 마당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앵두를 올해 처음 따면서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정말 감개무량했다. 느루를 장만하고 1년 넘게 내가 자전거를 탄 시간은 하루에 길어야 1시간 남짓. 다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하면 이내 쉬면서도 홀로 흡족해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젠 중간에 쉬엄쉬엄 타기는 했어도 꼬박 3시간은 자전거를 탔을 거다. 막판엔 엉덩이가 찢어질 듯 아프고 다리도 묵직하다 못해 거의 뻣뻣해졌으니까. 밤 10시도 되기 전에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일어난 오늘도 여전히 삭신이 쑤시는데, 예상보다는 거뜬하다. 지난주에 미리 좀 걷고 자전거를 타둔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 왕비마마도 자전거를 타실 수 있다면 다리가 좀 아파도 운동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프렌즈>에서 피비가 타던 어른용 네발 자전거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엔 어른용 네발 자전거 없나? +_+ 알아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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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름이 하필 '토룡'이어서 모임 날짜만 잡으면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는 징크스는 아마도 이제 깨진 것일까? 한달쯤 전부터 거창하게 날을 잡았던 예전 모임과 달리 번개치듯 긴급하게 잡은 날짜라 하늘이 미처 손을 쓸 새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어쨌든 토룡마을 주민들의 5월 자전거 모임은 화창하다못해 푹푹찌는 여름날씨 같은 주말을 마음껏 즐기는 기회가 되었다.
느루를 장만한지 1년이 넘고도 석달이 지나 드디어 토룡 마을 주민들의 자전거모임엘 참석하며 나는 정말 감개가 무량했다. 자전거 장만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토룡마을 주민들의 자전거 모임에 나가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꿈의 자전거인 토룡왕자님의 브롬톤을 알현하고 잘하면 시승해보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으니! (자알~ 생긴  데다 씽씽 잘 나가기도 하는 브롬톤을 시승해본 것은 물론이고, 무려 18초만에 브롬톤을 접고 30여초만에 다시 펴는 키드님의 신공을 구경할 수 있었다!! @.@)
유일한 난관은 도시락 준비였는데, 약식을 만들어가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지난번 모임 때 날이 궂어 회동이 취소되면서 준비해둔 재료를 마냥 썩히기도 뭣해 그 다음주에 당장 약식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이다. 다시 장을 봐다가 새로 만들면 되겠지만 <미술관 옆 동물원> 프로젝트(?) 이후 심신이 피폐해진 데다, 냉동실에 절반 잘라 넣어둔 약식을 재활용할 수도 있겠다는 요행심에 그냥 버티긴 했는데, 워낙 여름날씨 같은 오후 기온에 신선하지 않은 약식이 상하지 않고 무사할지 내심 겁이 났다. 결과적으로 모두 모여 나무그늘에 앉아 소풍나온 이들처럼 점심을 먹을 때까진 맛이 무사했으니 다행이긴 하다. 저녁시간까지 남아 있던 녀석들도 과연 쉬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어쨌거나 첫번째 자전거모임에 전격 참석해본 결과 내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토룡마을에서 내가 최하층민이라는 사실이었다. 왜냐고?
일단 두 왕족부터 따져보자면, 그들은 내 기준으로 볼 때 뭣 하나 부족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소문과 사진으로만 알던 토룡왕자의 하늘색 브롬톤의 유려한 자태 때문이 아니다. 벨로 공주의 경우엔 검소하게도 하층민인 나와 같은 우베공을 타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그 둘은 각각 루이가노와 브랑셰, 이름 모를 오래 된 자전거까지 다수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토요일에 내가 확인한 바로는 토룡마을의 계급은 단순히 부의 크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선 계급을 결정하는 기준이 다음과 같다고 확신한다.
첫째. 자전거 타기 기술
둘째. 운동신경
셋째. 체력
넷째. 요리솜씨

어려서부터 내가 품고 있는 자전거 타기 기술의 로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한손으로 핸들 잡고 타기. 두 손 다 놓고 탈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ㅠ.ㅠ
또 하나는 한 발만 페달을 밟고 자전거 옆에 섰다가 자전거를 밀며 출발해 남은 다리를 유연하게 들어올려 안장에 앉아 자전거를 출발시키는 기술이다. 
현재 내 수준은 아주 잠깐, 한 1초쯤 한쪽 손을 놓고 얼른 머리를 넘긴다든지 안경을 올리고는 금세 핸들을 잡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핸들은 불안하게 흔들려 넘어지기 직전까지 바퀴가 버벅대기 일쑤다. 그런데 그날 토룡왕자와 벨로공주는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듯, 한손에 샌드위치가 든 종이가방을 들고 자전거를 몰고 오질 않나, 묵직한 과일 도시락이 든 쇼핑백을 들고오질 않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아무 어려움 없이 전화를 받질 않나... ㅠ.ㅠ
자전거 초보인 통통님과 나의 경우, 중간에 잠시 굳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자전거 타고 물을 사러 매점엘 간 적이 있었는데 매점에서 파는 냉커피와 아이스티를 본 순간 옳타구나 하나씩 사가서 나눠먹자며 사들고 나서는 이내 난감해졌다. 우리 실력으론 밀봉되지도 않은 음료수는커녕 밀봉된 물병도 비닐봉지 없이 들고 자전거를 운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 마신 뒤 버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통통님이 쓰레기통으로 향했을 때, 나는 어렵사리 물병을 바지 주머니에 끼우고는 절반쯤 남아 좀 덜 흘릴 듯한 냉커피를 왼손에 쥐고 핸들을 살짝 같이 잡는 만용을 부려봤지만 브레이크만 안 밟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 짧은 거리를 오는 사이 당연히 바지에 커피를 흘리고야 말았다. 헌데 토룡왕자는 자전거 타면서 휴대폰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문자 메시지도 보낼 수 있다고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자전거 옆쪽에서 한발로 페달을 밟고 자전거를 출발시키는 기술은 토룡왕자도 못한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을 놓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자전거 기술을 익혀왔을 왕족들한테 내가 어찌 비교될 수 있겠는가 하는 서글픔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운동신경과 체력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자전거 모임에선 여흥으로 <고무줄놀이>와 <배드민턴 치기>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노나또님과 지다님은 어찌 그리 나비처럼 사뿐사뿐 폴짝폴짝 고무줄을 하시던지! 애당초 고무줄 잡는 역할이나 하겠다고 했던 나도 미친 척 시도해보았지만 한두번 뛰고도 무거운 몸이 출렁거려 다시는 시도해볼 마음도 안생기는 나와 달리 고무줄 놀이의 대가 지다님과 노나또님은 그야말로 펄펄 나는 듯했다. 고무줄 놀이가 상대적으로 천한 계층의 유희였던지 두 왕족은 고무줄에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어 시작된 배드민턴 경기에선 악천후 바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순발력과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고무줄 놀이 때는 나와 더불어 고무줄 잡는 역할에 충실하여 잠시나마 나와 비슷한 계층이 아닐까 희망을 품게 만들었던 통통님 마저도 배트민턴에선 대단한 파워와 승부근성을 보이며 뛰어난 운동신경을 자랑했는데, 머리 나쁜 나는 그제야 통통님 역시 결코 나와는 같은 계급일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남산부터 한강까지, 그리고 다시 성산대교를 지나 근 2시간에 이르는 장거리를 물 한 모금 없이 주파한 강철체력의 통통님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1차로 자전거 모임에 참석한 뒤 바삐 성남으로 축구경기 응원을 떠난 노나또님의 체력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ㅠ.ㅠ
저질 체력인 나는 겨우 40분 거리도 혹시 더위 때문에 늦어질까 조바심을 내며 페달을 밟아야했기에, 점심을 먹고 나선 고무줄도 배드민턴도, 농구에도 흥미가 없어 그저 푸르른 잔디밭에 누워 쉬고 싶었거늘... 나를 뺀 모든 이들은 그저 쉴새없이 공원을 뛰고 또 뛰어놀며 온갖 재주와 실력을 선보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 요리솜씨라면 나도 명함을 들이밀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우선 노나또님이 익히 블로그에서 자랑하시던 주먹밥과 유부초밥은 되직하게 지은 밥에 갖은 양념을 해 맛도 일품인 데다 모양새까지 앙증맞고 먹음직스러웠다. 처음 차려놓았을 땐 양이 많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한톨 안 남기고 모두들 먹어치웠을 정도이니 말해 뭣하랴. 게다가 키드님의 그 유명한 <치킨> 샌드위치 역시 맛과 모양 면에서 다들 "사온 것 같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드물게 내가 집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보면 언제나 싱겁던데.... +_+
그에 비하면 내가 무성의하게 데워간 약식은 자른 크기도 들쭉날쭉, 견과류 내용물도 들쭉날쭉, 말들은 안했어도 분명 군데군데 너무 딱딱한 부분이 있었을 거다. 그나마 지다님과 통통님이 바쁜 관계로 도시락을 <싸>오지 않고 <사>는 바람에 은근히 안도했다고나 할까. 수박을 두 그릇이나 정갈하게 잘라와 모두의 갈증을 해소해 준 벨로공주는 요리솜씨로 쳐줄 수 없긴 해도 일단 왕족이고 자전거 솜씨가 가장 탁월하니 계급 결정에 영향을 제일 약소하게 미치는 마지막 기준이야 아랑곳하지 않을 게다.

하층민으로서의 서글픈 깨달음을 이렇게 주절주절 적고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나도 토룡마을 자전거 모임에 드디어 참석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나 같은 저질 체력 운동부족 하층민에게도 동등하게 즐길 기회를 준 걸 감사하며, 계급이야 어떠하든 앞으로도 열심히 자전거 타기에 힘쓰겠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자 나의 결론이다.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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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저 영화 제목은 참 잘도 지었다.
과천 현대미술관과 동물원을 동시에 떠올리면 자연스레 우리도 영화 찍는 기분이 드니까.
가까운 미술관은 더러 기웃거려도 과천까지 가는 건 제법 큰 걸음이라 생각했는지, 영화 찍는 기분으로 미술관과 동물원을 한쾌에 둘러볼 작심을 한 건 돌이켜보니 무려 십수년만이었다. 소풍가는 아이처럼 기린도 보고 미술관 구경도 하자고 조르던 지인과의 약속을 한 달이나 질질 끌다 전격적으로 어제로 날을 잡으며, 더 늦어지면 너무 덥고 냄새나서 동물원 구경하기 어려울 거라는 위기감을 느꼈는데, 여름날씨를 방불케 하는 어제 기온은 이미 너무 더웠다. 좀 더 일찍 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면서도 5월의 신록이 하도 아름다워 그늘로 짚어다니며 기뻐할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다.
그 옛날에도 상설전시 중이었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그대로였는데, 그 옆 벽엔 새로이 강익중의 <삼라만상>이 빼곡하게 뒤덮여 있었다. 25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손바닥 반만한 나무판자 그림과 조형물들은 아이들 장난 같은 모양이 하도 많아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겠다 싶었다. 20년 넘게 6만 5천개나 된다는 나무조각을 하나하나 작업했을 화가의 끈기가 놀랍다. 나 같으면 짜증내며 중간에 내팽개쳐버렸을 텐데... ^^

사실 우린 이 중앙 전시실보다는 층층마다 마련된 우리나라 근대미술 작품들을 다시 보려고 했던 것인데, 교체전시를 하는지 기대했던 그림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지난번 덕수궁에서 본 근대미술 걸작전 그림들을 몇 점 찾아내곤 뿌듯해 했으나, 나로선 영 이해도 못하겠고 훌륭한 줄도 모르겠는 현대 추상미술품들이 대부분이라 새삼 내가 왜 과천 미술관엘 십수년만에 왔는지 실감되었다. 미학적인 심미안 따위를 갖추지 못한 내 눈엔 추상적인 현대 미술품들이 죄다 젠체하는 화가들의 자기자랑일뿐 당최 '아름다운' 예술품이란 느낌이 안드니 어쩌겠나. 심지어 백남준 선생의 그 유명한 비디오 아트 작품도 난 그리 뛰어난 줄 정말 모르겠다. ㅡ.ㅡ;

이렇게 찍으니 예뻐보이는 것도 같고...

내눈엔 명멸하는 브라운관의 화면이 이루는 아름다움보다 작품에 뽀얗게 앉은 먼지가 더 눈에 들어오고 브라운관 아래 찍힌 제조업체 로고가 더 눈에 들어오는 걸 어쩌라고!

백남준과 강익중의 두 작품을 같이 전시해놓은 기획을 <멀티플 다이얼로그>라고 이름 붙였던데, 아쉽게도 나는 그 안에서 다양한 언어교류의 느낌을 받는 대신 새로 지은 건물이나 갓 도배한 집에서 나는 매캐한 본드 냄새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ㅎ
기획전시로 인도현대미술전을 하고 있던데, 역시나 현대미술품이라니 굳이 2천원씩이나 내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2, 3층 전시실 난간에서 내려다 보이는 코끼리 조각상과 금빛 오토바이 구경만으로도 우린 흡족했다. 

주린 배를 약소한 과일로 달래고 얼른 동물원으로 이동한 뒤에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고나서 돌아본 서울대공원 동물원은 그새 참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못보던 동물도 많고(특히 아프리카 동물들!) 이름도 외기 어려운 신기한 녀석들을 건성으로 보며 감탄을 했는데 뭐니뭐니해도 나는 동물원에서 기린구경이 제일 신나고 즐겁다. 길쭉길쭉 늘씬하고 우아하게 돌아다니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마스카라를 칠한 듯 짙고 기다란 속눈썹도 그렇고, 아래턱을 좌우로 요란하게 움직이며 풀잎을 씹어대는 모양새도 그렇고... 기린사 앞에 전망대도 높이 올려 바로 코앞에서 먹이를 먹는 녀석들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게 해놓아 더더욱 탄성을 내지르며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생김새부터 정말 볼수록 신기하지 않은가! 게다가 안내판에 적힌 글을 보니 우리 앞에서도 끊임없이 풀잎을 씹어대던 기린은 원래 하루 12시간 동안 내리 먹이를 먹는 반면, 잠은 틈틈이 짬짬이 눈을 감으면서 고작 하루 20분밖에 자지 않는단다! 켁...

기린 무늬의 아름다움을 새삼 실감

기린 뿔 두갠줄 알았는데 세개더라

하마의 저 똥똥하고 귀여운 자태!


다리 아프고 덥다는 핑계로 사자랑 하마 코끼리, 바다사자 빼고 다른 동물들은 셔틀버스 타고 차안에서만 대충 훑어본 터라 찍은 사진도 별로 없다. 사자 같은 녀석들은 어차피 가까이 찍을 수도 없어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평일인데도 미술관, 동물원 모두 사람들이 꽤 많아 조금 놀랐다. 주말엔 얼마나 더 바글거릴까. 벌써부터 퀴퀴한 동물냄새가 진동을 하는 동물원은 앞으로 또 십년쯤 있어야 가볼 마음이 생길 듯하지만, 숲과 나무가 싱그러웠던 미술관옆 산책로는 날이 흐린 날, 아니면 비가 오는 날 또 가보고 싶은 욕심을 품고 돌아왔다. 평일 퇴근시간과 맞물리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은 죽도록 막히는 괴로운 경험이었지만, 이 하루의 행복한 나들이로 부디 일주일은 나의 심술이 잠잠해지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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