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김밥

식탐보고서 2009. 6. 4. 17:57

누구나 오랜 역사와 추억의 양념 때문에라도 자기 엄마표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김밥집이 흔하지도 않았고, 김밥 먹는 날이 일년에 몇번 학교에서나 집에서 소풍 갈때로 국한되어 김밥이 꽤나 <귀한> 음식이었던 나 같은 옛날 세대에겐 더더욱.
나 역시 김밥을 아무리 손수 <싸>먹거나 <사> 먹거나 <얻어> 먹어보아도, 옛날에 울 엄마가 싸주셨던 추억의 김밥만큼 맛있는 건 없었다고 회상하게 된다. 식성에 따라 김밥 내용물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는 하지만, 생김새부터 맛까지 거의 천편일률적인 김밥들 사이에서 울 엄마표 김밥은 정말 조금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당근을 채썰어 볶는 것이 아니라 다져서 볶은 뒤 밥에다 섞는다는 것. 그리고 달걀부침도 지단으로 얇게 부쳐 잘라넣는 대신 스크램블드에그 하듯 마구 뒤적여 잘게 부숴 역시 밥과 함께 볶거나 밥에 섞었다. 나는 우리집 삼남매가 익힌 당근을 워낙 싫어하기 때문에 엄마가 어떻게든 당근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들으니 다른 사연이 있었다.
가난하던 그 시절 우리집은 비싼 일반미 대신 정부미를 주로 사먹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를 정부미는 값이 싼 대신 당연히 일반미보다 질이 떨어졌다. 색깔도 새하얀 일반미보다 당연히 탁하고 거무스름했던 듯. 평소엔 당시 혼식장려 캠페인 때문에 강제로라도 다들 보리를 넣어 도시락을 싸가야 했으므로 정부미밥도 다른 애들 밥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소풍날 혼식 검사를 할 리도 없고, 특별식인 김밥을 쌀때엔 당연히 쌀로만 밥을 짓는 것이 정석이었던 모양이다. 새하얀 쌀밥 한 가운데 정갈하게 속 고명이 들어간 김밥들 사이에서 거무스름한 쌀로 지은 김밥을 비교당하게 만들기 싫었던 울 엄마는 밥에 참기름 말고도 다진 당근과 달걀부침을 부숴 넣어 버무리는 묘안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어린 우리들은 그저 김밥이라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기뻐서 밥 색깔이 조금 다른 것쯤 신경도 안 썼을 것 같은데, 그 옛날부터 울 엄만 참 별 걸 다 신경쓰는 아줌마였다는 얘기다.
아무려나 볶음밥으로 다시 김밥을 싼 것처럼, 약간 노르스름한 밥에 시금치와 소시지(옛날엔 햄 대신 당연히 소시지로 김밥을 쌌다!), 어묵, 단무지를 넣은 울 엄마표 김밥은 소풍 때마다 단연 인기였다. 소풍 가서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끼리 서로 엄마 음식솜씨를 품평하듯 김밥을 하나씩 서로 바꿔먹곤 했는데, 깔끔해 보이진 않지만 전체적인 간도 딱 맞고 전혀 뻑뻑하지 않은 울 엄마표 김밥만큼 맛있는 김밥은 없었다. 부잣집 친구가 싸온, 쇠고기를 볶아넣고 자른 김밥 하나하나마다 정갈하게 한 가운데 깨소금을 얹은 최고급 김밥보다도 나는 정말이지 울 엄마가 싸준 김밥이 더 맛있었다. 단순히 팔이 안으로 굽는 것만은 아니어서, 친구들도 너도나도 내 김밥을 하나 얻어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고, 소풍에 따라오신 친구 엄마들도 울 엄마한테 김밥 만드는 비법을 묻기도 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엔 우리도 일반미를 먹을 형편이 되었지만, 우리집 김밥 만드는 법은 바뀌지 않았다. 쌀이 아무리 좋은 거라도 맨밥에 참기름과 소금만 버무려서는 절대로 울엄마표 김밥 맛이 나지 않는 걸 어쩌랴.
우리들이 다 자라 학교에서 소풍가는 일이 더는 없게 된 뒤에는 정말로 연중행사처럼 드물게 엄마표 김밥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조르거나, 김밥을 특히 좋아하는 막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해주셨는데, 옆에서 내가 거드느라 엄마의 코치대로 김밥을 말아보면 영낙없이 옆구리가 터지거나 내용물이 한쪽으로 쏠렸다. 요리솜씨 뛰어난 엄마의 유전인자를 어느정도 물려받아 웬만한 음식은 흉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예쁘게 김밥 마는 비법은 도무지 터득할 수가 없었다. 김밥집에서 파는 것처럼 밥을 잔뜩 많이 넣으면야 나도 내용물을 한가운데로 몰리게 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한입크기로 적당히 얇으면서 내용물이 정 가운데 들어가도록 하는 것인데 난 왜 그게 안되는지! 그걸 터득하겠다고 허구한 날 김밥을 싸먹을 순 없는 일이어서, 얼마 전부터 나는 너무도 귀찮은 김밥싸먹기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울 왕비마마는 와병 후 살림에서 손을 뗀지 수년이고, 제대로 된 엄마표 김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건 아마도 1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가 아무리 솜씨를 부려도 김밥만은 추억의 그 맛과 모양을 살려낼 수가 없었다. 정 집에서 싼 김밥이 먹고 싶으면, 조카들의 잦은 소풍 뒷바라지에 이젠 김밥달인이 되었다는 올케들에게 살짝 몇 줄 더 싸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인 걸 뭐. ;-p (이러니깐 시누이 소리 듣는 거라고?? ㅋㅋ)

하지만 또 내가 누구인가. 식탐 앞에선 웬만한 결심도 손바닥 뒤집듯 하고 의지력을 바닥내는 단세포 동물.
얼마 전 집에서 싼 김밥이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다른 요리는 후다닥 뚝딱 잘도 하겠는데 김밥은 정말로 귀찮아서 다시는 만들어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걸 뒤집을 만큼 욕망이 컸다. 얼른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다가 준비하고 있으려니 아차 싶었다. 집에 흰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다. 엄마의 건강을 위해 매번 항아리에 백미, 현미, 흑미, 서리태, 보리, 율무, 기장쌀까지 모두 적당한 비율로 섞어 넣어놓고 밥을 해먹고 있으니, 흰쌀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영양가야 더 많겠지만 김밥을 시커먼 밥으로 싸야하다니... 속상한 일이었다. 밥도 어지러운데 다진 당근과 달걀을 섞어 넣는 건 곤란할 것 같아 당근은 아예 넣지 않기로 했다. 익힌 당근 싫어!

사진은 그렇게 해서, 아마도 수년만에 내가 싼 깁밥의 몰골이다. 심혈을 기울여 치즈까지 넣었지만 밥이 너무 뜨거워 금세 녹아 더욱 볼품없어졌고, 내용물은 역시나 한쪽으로 밀린데다 크기도 들쭉날쭉 가관이었다.
내용물에 다 따로따로 간을 했어도, 원래 방식대로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싱거워 30% 이상 부족한 깁밥을 꾸역꾸역 집어 먹으며 나는 또 중얼거렸다.
"내 다시는 집에서 김밥 싸먹나 봐라..."

엄마는 좀 싱겁긴 해도 먹을만하다고(맛있다고는 절대 하지 않으셨다!) 했지만, 들인 품과 기대에 비하면 결과물은 실망스럽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랏간 무수리의 삶을 이어오면서 느끼는 건, 아무렇게나 쉽게 대충 해서 먹을 때 결과물이 더 흡족하다는 사실이다. 괜히 공들여 절차가 복잡한 요리를 하면, 가사노동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그 과정에 이미 지치고 화가 나는데다 식탐과 식욕 기대치 또한 높아 웬만해선 만족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왜 또 그렇게 먹고 싶은 건 많은지 원...
벨로와 키드님이 통영 여행에서 먹은 충무김밥 자랑하는 거 보고 식탐이 동해 해먹은 짝퉁 충무김밥도 그랬었다. 역시나 잡곡밥으로 싼 김밥은 보기에도 먹음직하지 않았고, 모나브님의 요리법대로 애써본 오징어무침도 어딘가 심히 부족한 맛이었다.
ㅠ.ㅠ
채썬 무를 미리 절였다가 손아프게 짜서 무쳤는데도, 왕비마마의 촌철살인.
"무가 좀 더 아작아작했어야지."
당연히 나는 그때도 투덜거렸다.
"다시는 해먹나 봐라..."

오늘은 또 무얼 해먹나 오후 내내 무수리의 고민을 잇다보니 문득 엄마표 김밥 생각이 나서 3월과 5월에 찍어둔 사진을 찾아 주절거리기 시작했는데, 결론은 없다. 김밥 싸는 엄마 옆에 앉았다가 김밥 꽁지 낼름낼름 집어먹으며 행복하던 그 때가 그저 그리워질 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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