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2.02.17 재롱잔치 유감 12
  2. 2010.08.11 모순인가 아닌가 3
  3. 2010.01.12 맥가이버 놀이 17
  4. 2008.03.23 내 자전거 18
  5. 2007.01.29 찜질방을 경험하다 8
  6. 2006.11.24 색에도 성별이 있나 3

올해도 어김없이 제일 어린 조카의 유치원 재롱잔치에 다녀왔다. 작년에 이미 녀석의 끼가 얼마나 출중한지 깜짝 놀라며 감탄했기에 올해도 기대가 컸는데, 역시나 녀석은 요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울 엄마의 촌평을 그대로 빌리자면, "비싼 돈 주고 가서 본 뮤지컬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신났다". 정말로 무대가 어찌나 화려하고 프로그램도 다양한지 주최측에서 심혈을 기울인 티가 팍팍 났다. 집중력이 5분, 10분도 안되는 꼬마애들을 데리고 얼마나 진을 빼며 연습을 시켰을지 선생님들의 노고도 노고려니와, 개인당 대여섯 개는 되는 출연분량에 따라 율동과 노래, 때로는 대사를 연습하고 무대를 오르내리며 매번 옷을 갈아입어야했을 아이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어휴... 감탄과 더불어 탄식도 절로 나왔다.

10여년 전, 첫조카가 유치원을 다닐 때만 해도 재롱잔치는 그야말로 유치원 강당에서 선보이는 원생들의 소규모 발표회였다. 의상이래봤자 흰티에 청바지, 한복 정도였고 동식물 역할 같은 특수의상도 유치원 선생님들이 약소하게 꾸며 만든 소품이었던 것 같다. 아, 그때도 운동복이나 태권도복을 입고 나와 시범을 보이는 순서는 있었다. 헌데 몇년 지나지 않아 둘째조카 때부터 재롱잔치가 점점 규모도 커지고 화려해지더니, 요샌 의상이며 조명이 가히 아이돌 그룹의 단체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욱 완성도(?) 높은 무대를 위해 전문 시스템을 동원하고 체육관 같은 공연장을 빌려 '빵빵하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 역시 관람을 매우 즐겼기 때문이다. 유치원 재롱잔치의 목적이 아이들의 성취감과 발표력, 혐동심을 높이는 데 있다고 하니, 이왕이면 번듯하게 포장하고 싶은 원장님들의 마음도 알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꼭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의구심이 떠나질 않았다. 어차피 의상비며 소요비용을 학부형들이 부담해야하는 형편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똑같이 무대의상비를 부담했는데, 자기 아이가 입고 나온 무대의상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공연장 대관 형편 때문에 평일 저녁 6시로 잡힌 재롱잔치를 나로선 기쁜 마음으로 보러갔지만, 직장 사정상 참석 못하는 부모는 없을까 괜한 걱정을 했던 게 사실이다. 정말로 콘서트장에 오듯 형광글씨 요란한 피켓까지 만들어들고 집안 식구들 대거 동원해 온 가족들도 있는 반면, 그럴 형편이 안되는 집안도 당연히 있지 않겠나. 작년엔 우리도 피켓이랍시고 스케치북에 색종이를 오려 급조한 응원판을 들었으나, 올해는 쿨하게 스마트폰 전광판을 이용하기로 했고 편한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조카의 순서가 아니더라도 앙증맞은 아이들의 몸놀림이 너무 귀엽고 깜찍해서 웃음과 박수가 절로 나왔다. 특히 올해는 완전히 모든 출연 프로그램의 '메인'을 꿰차고 무대 중앙에서 제일 열심히 신나게 정확한 동작으로 춤과 연주를 보여주는 조카 덕분에 어깨까지 으쓱했다.

그.러.나. 까칠한 인간의 취향은 어디 가도 드러나는 법. 대체로 훌륭했다고 평할 수 있는 공연이건만 중간중간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순간이 몇번 있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싶은 시대착오적인 면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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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언론인과 사진작가 부부가 있다. 언론인인 남자의 취재 도구는 볼펜과 작은 수첩, 소형 녹음기가 전부다. 남자는 가방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다 뭔가 기록할 일이 있으면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과 볼펜, 소형 녹음기를 꺼낸다. 가끔은 노트북 컴퓨터를 소지하고 다닐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땐 기사를 바로 송고하거나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 경우이고, 대부분은 양손을 자유롭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와 동반 기사를 취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어쨌든 언론인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촬영도구가 많은 여자는 작은 체구에 여러 종류의 카메라와 렌즈가 들어 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늘 어깨에 짊어지고 다닌다. 본격적인 촬영이 있는 날 쫓아다녀본 적이 있는데, 웬만한 택배상자보다도 큰 카메라 가방엔 각종 카메라와 렌즈, 빛의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찍어본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들어 있어 무게가 20킬로그램은 족히 될 듯 했다.

특별히 전문적인 취재나 촬영이 있는 날은 아니지만 둘이 같이 관련된 행사 때문에 두 부부가 같이 외출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남자는 맨몸에 빈손이고, 여자는 예의 그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들었다. 남편은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들어주어야 할까, 아닐까? 더욱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남자는 185센티미터의 장신에 100킬로그램은 나가는 거구인 반면,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아내는 150센티미터의 단신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둘과 동행하게 됐을 때 나는 빈말로라도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말 한 마디 안하는 남자의 태도에 분개했고, 복잡한 인사동을 함께 거닐며 나 역시 비슷한 단신임에도 사진작가 친구에게 가방을 같이 들자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헌데 친구는 괜찮다며 내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깨가 아파 가방 매는 쪽을 자주 바꾸면서도.  

가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나는 반나절을 지켜보다 참다못해 덩치 큰 남편에게 왜 부인 짐을 대신 들어주지 않느냐고 묻고 말았다. 넌 짐도 하나 없으면서, 가냘픈 아내가 끙끙거리며 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혼자 들고 다니는 게 가엾지도 않냐고. 남자는 오히려 내 질문을 의아하게 여겼다. 사진작가로서 무거운 촬영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당연한 일인데, 왜 자기가 간섭해야 하느냐고. 자기 아내가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땐 그에 수반되는 모든 수고로움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므로, 온전히 본인의 책임이라고. -_-; 논리적으로 너무도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쿨'한 사고방식과 행동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 부부였다면 둘 다 아무리 '프로'다운 직업인이라고 해도, 둘이 같이 움직일 땐 상대적으로 힘 센 남편이 아내의 짐을 잠시라도 들어주지 않았겠나 말이다.

이번엔 예순 살의 아버지와 열일곱 살의 늦둥이 딸이 있다. 역시나 이들도 미국인이다. 방학을 맞아 이혼한 아버지의 집에 다니러온 십대의 딸은 올 때보다 더 빵빵해진 큼지막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아버지의 배웅을 받는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 딸은 걸음걸이가 휘청거릴 정도다. 아버지는 시원섭섭함을 느끼며 딸을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의 배웅은 아파트 현관에서 끝이 난다. 주차장까지 함께 나가는 건 아버지 본인도, 딸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순 살이라고는 하지만 깡마른 십대 딸보다는 그래도 아버지가 주차장까지 짐을 옮겨다주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내 생각이지만. 

이 장면은 지금 작업중인 소설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몇년 전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가 떠올랐고 확실히 내가(심히 비약하자면 한국인이) 의존적이구나 하고 느꼈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무거운 딸의 짐을 스스로 옮기도록 내버려두는 장면은 그의 매몰찬 성격이나 무정함을 묘사하려는 뉘앙스가 전혀 없고, 그저 자연스러운 작별의 장면일 뿐이었다. 물론 유별난 딸의 독립심과 괴력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족 안에서도 개인주의가 통용되는 미국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났을 뿐이다. 부녀 사이에도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게 원칙상 옳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틈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같으면 당연히 나 대신 짐을 옮겨다 줬을 텐데, 라고. 위에 적은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에서 내 주변 남자들 같으면 당연히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고 다녔을 텐데, 라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무겁든 가볍든 남자들이 여자의 핸드백을 대신 들고 다니는 걸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며(다만 책가방은 인정 ^^;), 사사건건 "여자는 약하니까 이런 건 못해!"라고 핑계대는 여자들을 줄곧 혐오하며 집밖에선 늘 괴력을 발휘해온 이른바 돌쇠형 여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묵직한 아기 캐리어와 기저귀 가방, 시장바구니 따위는 남편이 매고 들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남편이 아내보다 더 힘이 세다는 전제 하에. 요즘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별로 그런 커플이 눈에 띄지 않지만 몇년 전까지도 흔하게 보았던, 아내에게 아기와 기저귀 가방을 모두 들게 하고 본인은 빈손으로 한가로이 걸어가는 뻔뻔한 남편들의 뒤통수를 내가 얼마나 째려보며 욕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양성평등과 성별역할 구분의 철폐를 집밖에서만 엄중이 부르짖었던 것 같다. 집안은 마치 그런 원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마음껏 응석을 부리거나 편협한 태도를 취해도 용서될 수 있다는 듯이. 물리적인 힘을 쓰는 부분에서도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건, 무조건 남녀 공히 군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어린이든 성인이든 하나의 인간 개체임은 마찬가지이므로 모든 사회적 의무를 똑같이 져야 한다고 우겨대는 억지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어쩐지 집 안과 밖에서 성별 문제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가 모순처럼 느껴지는 걸 피할 수가 없다. 험악하게 운전하는 것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 타파와 양성평등을 향한 내 나름의 노력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정작 집안의 영역에선 상당히 '연약한' 여자라 '특별히'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특권을 자임했다. 물론 나의 이런 태도는 맏딸이면서 고명딸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덕분이다. 상대적으로 두 남동생들은 나 때문에 역차별을 당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체중과 체구에 상관없이 어느덧 집안에서 '힘쓰는' 인물이 되면서, 그리고 '딸이고 첫째'이라서 더 예쁨을 받는 건 엄연한 '차별'임을 눈 동그랗게 뜨고 지적하는 똘똘한 조카들 덕분에 집안에서도 성 역할의 경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또 불쑥 걱정이 든다. 가족적 온정주의는 양성평등과 꼭 상충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제대로 공부는 안하고 몸으로 부딪치고 느끼는 현실로만 나름의 원칙과 이론을 정립하려니 생겨나는 부끄러운 헷갈림이다. 언제고 제대로 여성학 공부 좀 해봐야할 터인데, '과연' 언제나... 만날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고 한탄만 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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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 놀이

놀잇감 2010. 1. 12. 02:06

어렸을 땐 조립장난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간감각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 입체그림이든 평면그림이든 이리저리 작은 조각의 방향을 바꾸어 조립해 맞추는 과정이 내겐 상당히 골치아팠다. 그러고 보니 끈기도 부족했던가 보다.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내긴 했지만 들이는 수고에 비해 조악한 조립장난감의 완성품은 별로 성취감도 안겨주지 못했다. 같은 재능인지는 몰라도 루빅스 큐브는 한참 낑낑거려도 한 면 맞추는 게 고작이었다. 하도 짜증나서 완전 분해했다가 색깔 맞춰 다시 조립한 적은 있었어도...

헌데 언제부턴가 그리 복잡하지 않은 생필품의 조립은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다. 널빤지 조각에 간단히 나사 몇개를 조여야 만들어지는 수납함을 시작으로 탁자도 만들었고, 나중엔 책꽂이도 겁없이 사들일 수 있었다. 복잡한 컴퓨터 책상은 도면 놓고 오래 끙끙대는 내 꼬락서니를 안쓰러이 여긴 아버지가 나서주셨지만, 혼자 했어도 결국 제대로 완성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그 컴퓨터 책상을 멀쩡히 내다버려야했을 때 꽤나 고민을 했다. 다시 분해를 해서 중고로 팔순 없을까, 아니 팔지 않더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결국 귀찮아서 그냥 내다버리는 걸로 결론을 내리긴 했다. 지금 그 상황이 온대도 이런 게으름으론 또 그냥 버리는 쪽을 택하기 십상이지만, 대형폐기물 스티커를 붙이느라 거금까지 들이느니 누구든 쓸 사람에게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약간 후회스럽다. 

어쨌거나 진짜 맥가이버스러우셨던 아버지엔 못미치지만, 이제 집안 여기저기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내가 나서며 맥가이버 놀이를 하는 것 같아 슬며시 뿌듯하다. 그래봤자 형광등, 백열등 갈기, 헐렁해진 서랍장 손잡이 나사 조이기, 스테플러로 지저분한 전선 벽에 고정시키기, 옷걸이로 화분 지지대 만들기, 벽에 못박기 정도이고, 그보다 힘든 일은 당연히 막내동생이 다니러 올 때를 기다리는 편이다. 요번에 왕비마마의 실내 운동을 위한 헬스싸이클을 장만하면서도, 기사가 방문하여 조립 및 설치 해주기를 원하면 출장비 2만5천원이 추가된다는 말에 내가 시도해보고 못하겠으면 동생녀석을 부르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문제의 헬스싸이클이 그놈의 눈폭탄 때문에 꼬박 일주일만에 배달되어 왔다. 비전문가의 솜씨로도 30분에서 1시간이면 된다는 자전거조립은 얼핏 보기에 별로 어려워보이지 않았고, 나는 즉각 2만5천원 벌기에 돌입했다. 부품을 확인하고 일일이 비닐과 골판지를 벗겨, 작은 렌치 두 개로 설명서 순서대로 조립을 하고 있으려니, 정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난감 같은 렌치로 나사를 끝까지 조이는 게 만만치 않아 40여분만에 결국 조립을 끝내고 완성품에 앉아 시연까지 보이자, 내내 못미더워 잔소리를 해대던 왕비마마도 그제야 "우리 딸 맥가이버였네."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게다가 출장비는 흔쾌히 팁까지 3만원 주시겠단다. ㅋㅋ

왕비마마의 수시 운동 독려를 위해 자전거를 TV앞으로 놓느라 다시 소파를 베란다쪽으로 돌려놓고 화분을 죄다 옮기는 힘쓰기 작업까지 홀로 마친 뒤, 관짝만한 빈 자전거 포장박스를 한 구석에 치워놓고 뿌듯해 하려니 문득 며칠 전 차력을 시도하다 이가 빠진 지붕뚫고 하이킥의 오현경이 떠올랐다. 여자도 남자랑 <똑같이> 뭐든 잘할 수 있다는 걸 신애에게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습에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사무실 이사 때 여직원들은 <걸레질이나>하라는 잔소리에 걸레질 싫다면서 굳이 번쩍번쩍 책상을 옮기던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못하는 게 너무도 많은 인간이지만, 그걸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견엔 늘 동조할 수 없어 나름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젠 운전하다 타이어가 펑크 나면 나도 당연히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출장서비스를 부르겠지만, 그런 보험 서비스가 없던 10여년 전 나는 강북강변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혼자서 당당히 타이어를 바꿔 끼우고 가던 길을 간 사람이다! ^^v (물론 그 당시엔 몹시 슬펐었다. 그로부터 불과 2년전 올림픽대로에서 펑크가 났을 때는 여러 대의 차가 멈춰서서 도움의 손길을 자청했었는데, 2년만에 아무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가 아무래도 심히 쇠퇴한 나의 외모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1차 펑크 때는 원피스 차림의 꽃단장 모드였고, 2차 펑크 때는 청바지에 티셔츠, 야구모자 차림이긴 했다.) 

여전히 나는 운동신경이 둔하고 공간감각력과 셈 능력이 떨어지며 몸놀리는 게 귀찮고 무서운 건 죽어도 싫다. 하지만 길눈은 밝고 지도도 볼 줄 알며 완전 기계치는 아니고 못 정도는 거뜬히 박으며 가끔 드라이버와 망치, 렌치 따위를 들고 맥가이버 놀이를 즐긴다. 필요가 만들어낸 적응력일수도 있겠으나, 나도 놀랐던 숨어있는 관심과 재능을 발견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언젠가 조립주택 같은 것도 손수 만들어보고 싶다면 너무 원대한 꿈이려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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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전거

놀잇감 2008. 3. 23. 22:40
1년 넘게 별렀던 <내> 자전거가 드디어 생겼다. ^^
어제부터 만 하루 넘게 세워두고 구경만 하고 있는데(조립직후 차에 실어 오기 전에 약 15미터쯤 시승하긴 했다) 쳐다볼 때마다 정말로 얼굴에 미소가 벌벌 흐른다.

루이가노와 스트라이다, 다혼의 미니벨로들까지 모두 판매하는 멀지 않은 매장을 막내동생이 알려준지 몇달만에 벼르고 별러서 어제 전격 쇼핑에 나섰고, 매장에서도 1시간 가까이 고민하다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내가 선택한 건 하얀색 우베공.

벨로가 추천해준 미니벨로 가운데서 나름 마음속으로 점찍어둔 <루이가노, 우베공, 커브, 보드워크, 비테세> 가운데 매장에 가면 텔레파시가 통하듯 나의 단짝이 되어줄 자전거가 빛을 뿜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나의 우유부단함은 자전거를 살 때도 여지없이 걸림돌이 되었다.
하얀 우베공과 베이지색  보드워크 사이에서 좀처럼 선뜻 고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

일단 커브와 비테세는 몸판을 가로지르는 가로대가 옆에서 보면 넙적하여 내가 추구하는
가늘가늘하고 날렵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일찌감치 물망에서 제외되었고
루이가노 역시 매장엔 너무 비싼 모델만 있기도 했지만 핸들을 잡아보니 어쩐지 약간 무시무시한 느낌이랄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색깔도 진밤색과 검정색 뿐 -_-;;)

하늘색 우베공은 이미 벨로가 장만하였음을 알고 있기에 똑같은 걸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하늘색은 수입할 때 작은 사이즈가 아예 들어오질 않았대고, 작은 사이즈로 물건이 있는 건 흰색, 분홍, 빨강 뿐 베이지색과 검정 따위도 아예 작은 크기는 이번에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고 했다.
여기저기 팽배된 색깔의 성별화에 또 한번 분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보드워크는 크기가 하나이고 은은한 베이지색이 마음에 들었으나 핸들 세로축이 전체적으로 은색이라는 점과 프레임에 새겨진 로고가 우베공보다 예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
ㅎㅎ 나 같은 자전거인생 초보에게 성능 따위는 얼추 비슷하다 여겨졌으니 일단 사양 비교는 뒷전이고 예쁜 게 더 중요하기 마련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게 선택의 고민을 준 문제의 보드워크와 우베공)

조카들까지 거느리고 가서 매장 사장님과 사모님을 오랜 시간 고문하듯 창고와 매장을 오간 끝에
결국 베이지색 보드워크를 살 것 같다는 사장님의 추측과 달리 나는 구름빛깔의 우베공을 골랐고
(다혼에서 베이지색은 sand, 흰색은 cloud라고 표현하는데 구름빛깔이라니 흰색보다 얼마나 멋진가!)
후련한 마음으로 박스를 뜯어 조립을 기다렸다.

고르기만 하면 금세 끝날 줄 알았던 자전거 구입은 그 뒤로도 꽤나 시간이 걸려, 지켜보는 우리는 계속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조립을 마치고도 내 키와 뒷굽이 높은 운동화에 맞춰 -_-;; 안장 높이를 정하고, 팔자 걸음을 걷는 터라 페달도 똑바로 제대로 못 밟는 나의 자세를 교정하기 위한 잠깐의 교육을 받으며 나는 진땀을 약간 흘렸다. ㅋㅋ

매장을 나와 잠깐 골목길에서 새 자전거를 타보았는데, 워낙 오랜만이기도 하지만 어찌나 페달이 휙휙 잘 돌아가고 금세 속도가 나는지 약간 걱정스러울 정도였으나 일단은 차에 고이 모셔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선
바퀴에 묻은 흙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실에 세워둔채 계속 감상중이다.

오늘 하필 비가 오지 않았다면 당장 홍제천변으로 달려갔겠지만
며칠 또 이렇게 뜸들이며 감상만 하는 묘미도 괜찮을 것 같다. ㅎㅎㅎ

참... 이름도 정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자전거를 사면 꼭 한글 이름을 붙이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정해둔 이름은 없었는데
어제 오늘 이리저리 찾아보고 고심한 끝에 <느루>라고 부르기로 했다.
<느루>는 "한꺼번에 몰아치지 아니하고 오래도록"이라는 뜻을 지닌 부사로
"하루라도 느루 쓰는 것이 옳고..."와 같이 쓰인단다.
다들 빠르게 살지만 나 혼자 느릿느릿 살아도 좋겠다는 바람도 있고 워낙 게으른 내 성향과도 잘 맞는데다
늘 일을 몰아쳐서 해치우는 그릇된 작업 습관을 반성도 할 겸,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누룽지'랑도 어감이 비슷해 이래저래 마음에 든다.
우베공이 어떤 이들에겐 속도계가 필요할 만큼 제법 빠른 자전거라지만 매연 뿜는 자동차에 비길까.
지금 같아선 나는 그냥 휘휘 바람을 가르는 느낌을 만끽할 정도로만 달릴 생각에 그저 흐뭇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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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이 찜질방을 '복합가족놀이공간'이라고까지 극찬하는 말을 들었지만
난 워낙 뜨거운 곳을 잘 견디지 못할 뿐더러
남들이 입었던 옷을 빌려입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찝찝한 데다(언젠가는 세탁 부실한 찜질방 옷에서 '이'가 옮았다는 엄청난 소동도 들은 바 있었으니!)
찜질방이든 사우나든 일단 '대중목욕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단체 누드'의 민망한 순간을 언제든 겪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껏 단 한번도 찜질방엘 가본 적이 없었다.
사우나야 가끔씩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다지만 아무래도 찜질방은 떼로 몰려가 즐겨야 하는 곳일 터인데, 그간엔 고맙게도 찜질방행을 강요하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찜질방의 장점에 대해선 익히 듣고는 있었다.
온가족이 총출동해서 온종일 놀다가 그 안에서 한끼 정도 해결하고 올 수도 있으니
주부들이 특히 좋아하며
심지어는 엄마 따라 '맛을 들인' 5, 6학년 정도 여자애들이 시험 끝난 날 따위에
보드게임이나 퍼즐 같은 걸 싸들고 지들끼리도 찜질방엘 간다더군.
하지만 24시간 영업을 하는 탓에, 집 나온 청소년 또는 어른들의 값싼 쉼터 역할을 하기도 하고, 수많은 종류의 찜질방 가운데  이불이나 거적을 덮어야 하는 일부 서늘한 방이나 수면실에선 차마 눈 뜨고 못 볼 짓거리들을 해대는 젊은/혹은 늙은 연인들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공연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광경을 TV로 볼 때도 내게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것 같고, 뻔들뻔들 땀을 흘리면서 '건강 데이트'를 한다는 연인들의 이야기도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런 내가 전격적으로 찜질방엘 가보게 된 것은 순전히 조카들 덕분이었다.
토요일에 와서 하루 자고 가기로 한 조카들은, 아파트에서 침대 생활을 하는 자기네 집과 달리 주택이라 방바닥이 뜨끈뜨끈한 우리집 방에 이불을 깔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선
대뜸 '찜질방 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ㅡ.ㅡ;;

아이 따뜻해..라고 중얼거리며 요 밑으로 파고들어 나란히 누워있던 조카들은
나를 꼼짝도 못하게 눕혀놓고 각종 소꼽놀이 도구를 챙겨와선 '검은 계란'이라며
까먹으라고 했고, 연이어 식혜와 주스, 각종 과일도  날라다주었다(물론 다 장난감^^).
찜질방 경험이 전혀 없던 나와 달리, 조카들은 제 엄마아빠와, 이모들과 여러번 다녀본 품새였다. ㅋㅋㅋ

잠들기 전에도 '찜질방 놀이'를 더 해야한다고 난리를 치던 조카들에게
다음날 진짜로 찜질방엘 가자고 약속한 뒤 겨우 재운 터라, 걱정반 기대반으로 엄마 모시고
우리도 3대가 찜질방엘 진출했던 것인데...
일단 여자들은 무조건 분홍색 옷(그나마 울 엄마처럼 뚱뚱한 사람들은 흰색 티셔츠를 남자들과 공유하더군), 남자들은 무조건 청회색으로 구분시키는 성차별부터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나마 아이들은 모두 노랑색 옷을 나눠주기에 못마땅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

일요일이라 빈 사물함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찜질방은 완전 만원이었고
구운 달걀과 음료수 하나를 사먹으려 해도 매점에 줄을 서야 했지만
그래도 할머니, 고모와 둘러 앉아 식혜에 '검은 계란'을 까먹으며 행복해 하는 조카들을 보니 나도 그럭저럭 즐거워졌다.

둥글게 이글루스 모양으로 입구를 만들어 놓은 여러 찜질방 입구엔 황금참숯방, 천연보석불가마, 황토소금방, 알프스아이스방 따위의 재미난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온도가 심히 높고 거의 엉금엉금 기어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들어 놓은 불가마엔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60도를 전후로한 찜질방은 뜨거운 걸 못견뎌하는 나도 제법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뜨거운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을 자는 사람들!
그리고 드넓은 홀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딱딱한 목침을 베고 코까지 골며 자는 아저씨들.. 가끔은 어려 보이는 여자애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남들 발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셈인데 어떻게들 그렇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는지 원...
맨날 혼자 자다가 조카들과 올케와 동침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나와는 참 다른 세상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방마다 다정스럽게 누워있는 연인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래도 대낮부터 심각하게 눈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는 이들은 없어 다행이었다.

암튼 TV에서 본 것처럼 우리도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어 하나씩 쓰고 ^^;;
뜨거운 방에서 땀을 흘리고 나와선 아이스티와 녹차 따위를 마시며 탱자탱자 놀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후딱후딱 지나갔고, 사용료가 10분에 천원인 마사지 의자에 앉아 잠깐 마사지도 받고 나니 직업병인 어깨 결림이 조금 풀린 것도 같았다.

마지막 목욕탕에선 장난감까지 싸들고 가서 마냥 놀 작정을 한 조카들을 말리느라
전투적으로 샤워를 마치고 후다닥 나와야했지만 ^^;;
난생 처음 겪은 찜질방의 경험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물론 누구든 같이 가자고 청하면 얼씨구나 좋아라 따라갈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몸이 찌뿌드드할 때, 번잡한 시간을 피해 가족들과 나들이 삼아 가보는 건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ㅋㅋ 그럼 결국은 나도 찜질방이 '복합가족놀이공간'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건가?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찜질 가운이 촌스러운 분홍색이 아닌 곳이면 좋겠고 ㅡ.ㅡ;;
남녀차별없이 같은 색 옷을 대단히 깔끔하게 세탁해서 주는 곳이면 더욱 좋겠고
얼음 동동 띄운 수정과도 파는 곳이면 좋겠다! (어제 가본 그곳은 치사하게 식혜만 팔아서 맘상했다. 난 수정과가 더 좋은데;;)

아무려나 별것도 아닌 찜질방 탐방기 끝!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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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부쩍 아기옷을 사러 가는 일이 잦았다.
출산율 저조 시대라고 언론에서 떠들어대긴 하지만 내 주변엔 조카들도 집집마다 둘씩이고
결혼한 지인들은 어김없이 신기하게 예쁜 아기들을 세상에 내놓고 있기 때문.

아기 옷을 사러 가면 매장에서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정해져 있다.
몇 개월이나 됐느냐는 것, 아니면 여자 아기냐, 남자 아기냐.
그래서 성별을 밝히면 아주 당연하게 남녀 아기에 따라 구분된 색깔의 옷을 보여준다.
분홍색 아니면, 하늘색.
나처럼 색깔로도 성차별하는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을 위해
다행히 흰색과 연노랑색, 가끔 연두색도 눈에 띄지만 무늬마저도 확연한 성차별을
강요한다.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 열기구 따위는 남자 아기 옷인 푸른 계통에
꽃, 과일, 나비, 인형, 구두 따위 모양은 분홍 계통의 옷에 들어 있으며,
중성이라 할 수 있는 곰돌이나 토끼 따위의 무늬는 친절하게(!) 하늘색과 분홍색 두 가지가 모두 갖춰져 있기 일쑤다.

물론 나는 하얀색이나 노랑색 같은 성차별 없는(?) 색을 주로 선호하고
가끔은 일부러 여자 아기에게 자동차 그림이 들어간 하늘색 옷을 선물 하기도 하고
남자 아기에게 자주색 꽃무늬 반바지를 선물하는 등의 파격을 부린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옷을 입은 아기들의 성별을 주변에서 헷갈려하기 때문에 엄마들도 난감해 하고 혹시 모를 혼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자 아기의 민대머리 같은 이마에 레이스 머리띠로 표시를 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쩌다가 푸른 계통은 남자를, 붉은 계통은 여자를 무조건적으로 상징하게 된걸까?
지금은 초등학생이 된 큰 조카 정민이는 원래 분홍색을 좋아하는 핑크 공주이긴 했지만
사촌에게 물려받은 남자 아이 옷도 아무렇지 않게 입었던 터라 
다른 계통의 색에 특별한 반감은 없었는데,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초록색 옷을 입고 갔다가 같은 반 친구들이 남자 옷을 입었다고 놀렸다며 그 옷을 다시는 입지 않으려고 했었다. ㅡ.ㅡ;;
그때 나는 몹시 분개하면서
겨우 5, 6살밖에 안된 아이들이 색깔로도 성차별을 하게 만든 몰상식한 어른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 뒤로도 계속 온 사회가 강요하는 성별 색깔론을 우리 조카들에게만은 어떻게든 고착시키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악순환은 계속되는 법이라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린이날에 세발 자전거 하나를 사려고 해도,
짙은 파랑에 로보트 장식이나 자동차 장식이 거칠게 들어간 모양 아니면
공주나 바비인형 같은 그림이나 분홍토끼가 그려진 분홍색과 빨간색 자전거가 양자택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성별 다른 동생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이왕이면 중성적인 느낌의 자전거나 장난감을 사려고 하면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아진다.

이런 말도 안되는 성별 색깔론의 기저엔 하나라도 상품을 더 팔려는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성별 같은 형제자매를 키우는 집은 몰라도, 성별 다른 남매를 키우는 상황에선 색깔로라도 옷이며 장난감을 '차별화'해야 마지못해 부모가 소비활동을 더 하게 될 터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상업주의에서 비롯된 성차별 색깔론이 계속해서 그 아이의 사고방식을 좌우한다는 게 아닐까.
그림에 재능과 관심이 많은 9살된 우리 조카가 며칠 전에 그간 잘만 쓰던 그림물감과 파레트 겉포장이  '남자색'이라서 아이들이 놀리기 때문에 학교에 가져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다 제 부모한테 매를 맞았던 사건과 같은 일들이 앞으로 또 안 벌어질 리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서도 성별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한다.
'대개' 여자아이들이 인형놀이와 소꿉놀이 같은 역할 놀이를 좋아하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블록이나 공룡, 자동차, 로보트 같은 난감을 더 좋아한다는 식으로.
그 때문에 남자아이들의 공간감각능력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하는 반면
여자아이들은 감수성과 섬세한 언어 능력 따위가 더 발달한다지.
하지만 그건 '대략적인' 판단일 뿐, 그 안에도 분명 개인차는 존재할 것이고
오히려 그렇게 뭉뚱그린 일반화와 획일화의 틀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타고난 성품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자동차와 로봇을 갖고 놀기를 유독 좋아하는 여자아이나
인형놀이와 소꿉놀이를 몹시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단정적으로 동성애와 결부시키는 섣부른 오해도 종식되어야 할 것 같다.
나 혼자만의 경험을 확대해서 진리처럼 떠벌일 생각은 없지만,
어째뜬 난 어려서도 커서도, 눈껌벅이는 값비싼 인형들이 무섭고 먼지 풀풀 나는 곰돌이 인형 따위를 귀찮아 했었다. (그래서 내가 모든 애완동물을 싫어하게 됐다고 보는 지인들도 있긴 하다;;) 어려운 시절이라 동생들이 값비싼 장남감을 선물 받는 경우도 지극히 드물긴 했지만, 가끔 동생들 몫으로 자동차나 총 따위가 생겨나면 난 그 누구보다 신이 나서 '부릉 부릉' '빵야~ 빵야~'를 외치며 놀기도 했단 말이지.

저 유명한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의 아기가 태어나 처음 공개된 사진 때문에
세계 언론이 떠들썩할 때, 나는 그 아기가 입은 옷이 여자아기임을 상징하는 상투적인 분홍색도, 아기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색도 아닌 중성적인 '회색'임을 지적하며
역시 '안젤리나 졸리답다'고 했던 기사가 잊혀지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회색 신생아 옷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배냇저고리를 떠올려 보자. 모두 흰색 아니면(염료가 안 들어가 가장 아기 피부에 순하다던가) 연한 분홍, 하늘색, 연노랑이다.
그나마 조금 큰 아기들의 속옷이나 완연한 겉옷엔 회색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거다.

아무튼 이번에도 여자아기 옷을 사면서
나는 흰색 내복과 함께 결국 예쁜 디자인 때문에 ㅠ.ㅠ 끄트머리에 노랑 레이스가 달린 꽃분홍색 바지와 꽃무늬 프린트가 들어간 셔츠를 사고 말았다.

색에는 성별이 없노라고 목청 높여 부르짖으며, 편견에 물들지 않은 아기들에게만은
그런 어른들의 잣대를 강요하지 말자고 주장은 하지만
교묘한 상업주의가 파놓은 함정에 매번 이렇게 덜컥 자진해서 걸려든다.
몹시 씁쓸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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